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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11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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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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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단편영화산책>

 정지원  강지혜

 

<빗방울전주곡> 발제문

 

1. 들어가기 전

 

1. 독립영화와 노동영화

한국 독립영화의 활동현황을 그룹별로 분류하면,

첫째,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서울영상집단] 등의 다큐멘터리 단체들이나 노동 단체의 영상패,

둘째, 독립영화의 대다수인 단편영화를 만드는 부류.

셋째, 극영화가 아닌 실험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그룹.

넷째, 독립애니메이션 그룹.

 

이들 독립영화는 1980년대 반민주 정권과의 대립과 절대적 생존권의 위협 속에서 충무로영화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항영화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 배경에는 서울영화집단의 서구와 남미영화를 모델로 한 민중영화, 현장에 뿌리박은 노동농민영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현장주의영화 등의 수용이 있었다.

 

빗방울 전주곡은 첫째, 둘째 모두에 해당되는 것 같다. 우선 첫째에 해당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강한 투쟁의식에 더불어 극영화의 픽션이 잘 어우러져 있다. 1980년 이후, 대체로 독립영화는 갈수록 경계가 모호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 운동은 가장 투쟁의 골이 가장 깊다고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다룬 영화야 말로 가장 독립영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역사

영국의 경우, 탄광노동자들이 19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파업기간동안 영상집단을 직접 꾸려서 많은 영화와 다큐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극영화의 형식을 가진 노동영상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파업전야”가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각종 미디어센터나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영상팀을 직접 만들어 촬영을 하거나, 노동자에게 직접 미디어 교육을 실시하여 좀 더 실제적인 노동영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미에서는 1999년 시에틀 WTO 시위 모습을 담은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 다큐는 100여명의 미디어 활동가들이 시위 기간 동안 시애틀 전역에서 시위모습을 담아온 것을 Independent Media Center에서 취합하여 한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많은 미디어센터들의 활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2001년 대우노조영상집단이라던가, 노동뉴스제작단, 그리고 미디액트 등 많은 노동자단체나 독립영상단체에서 장기간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활동의 결과물로는 지금도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이 직접 촬영한 <우리는 KTX 승무원입니다>과 2003년에 노뉴단에서 제작된 <이중의 적>등이 있다.

 

3. 특징

현재의 시스템이 얼마나 인간다운 삶과 충돌되는가, 그 시스템에 의해 노동자들이 어떻게 파괴당하고 있고, 이러한 파괴 과정을 어떻게 투쟁의 과정으로 전환시켜내는 가를 드러내는 노동 영화의 핵심 역할을 환기하고자” 이번 영화의 슬로건을 ‘노동영화, 자본에 경고하다’로 정했다고 전했다. 앞의 내용은 제9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주최 측의 인터뷰 내용이다. 노동영화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그 독립의 주체는 노동자라는 명제가 확실하다.

 

영화는 목적이 뚜렷하다. [중략] 그동안 파묻어놨던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듯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제 영화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드러난다. 감독 역시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짚는 작업은 힘겨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노동단체에서 만들어진 영화들(뉴스클립과 다큐멘터리 포함)은 주류언론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건을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관객들, 혹은 대중에게 사건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또 다른 대안들과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대우차노조파업의 경우도 그러하다. 주류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았던 과잉진압과 투쟁은 영상패가 노동자의 눈으로 담아낸 영상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폭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언론에서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KTX 여승무원 정리해고 사태 또한 여승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촬영을 하고 다큐로 제작하고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과 대중들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노동영화로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은 특수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영화 제작과정이 함축하는 현실과 작가와 관객의 긴장관계가 지닌 직관적 혹은 저널리스트적인 재현의 특수성이 지니는 위력이다.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나눌 때 특히 창작자의 의도도 다시금 경계의 단서를 준다. 특히 노동영화는 그 목적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괴롭다. 빗방울 전주곡은 노동영화의 강하고 거친 면을 잠시 거슬러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영화의 미래

최근 많은 노동자 인권단체나 미디어교육센터에서는 영상전문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노동자들에게 직접 영상교육을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직접 자신들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언론사의 왜곡된 편파적인 시선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노동자들의 눈으로,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대중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UCC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이러한 노동영화를 파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쉽게 많은 이들에게 노동의 현장을 전할 수 있는 만큼, 제작자들은 앞으로 좀 더 신중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빗방울전주곡’ 속으로

 

1. 극영화로써의 장점?

-극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해고 노동자의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정면에서 보여주는 작품

-한편 정리해고 노동자나 해직통고서를 받은 노동자를 다룬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빵과 우유>(원신연) 등 소외된 이들을 조용히 끌어안는 사회드라마들도 눈에 띈다.

 

‘보기 드물다’, ‘사회’라는 수식어로 미뤄보아 빗방울전주곡을 단순 극영화라고 국한하기엔 무리가 있다.

 

영화는 사건으로부터 일 년 후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의 충격적인 사건현장을 넘어 그 여파가 얼마나 계속 한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보여준다. 여기에는 몇 가지 픽션이 첨가되어 있다. 부부의 첫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와 또한 물놀이를 가리라는 결말로 막연히 풍겨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그렇다.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며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다니! 깜짝 놀라며 분노하게 한다. 더 나아가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 혹은 가족들, 내 자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2. 빗방울전주곡이란? (상드의 일기를 통해)

조르쥬 상드는 저서 ‘나의 생애’에 이렇게 적고 있다.

‘비가 쏟아져 마차 지붕에 넘쳤다. 너무나도 무서운 어두운 밤길을 무릅쓰고 달렸다. 우리들은 환자(쇼팽)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도착 하였을 땐 그는 정말로 생생하게 앉아 조용한 절망 속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기막힌 자작의 전주곡을 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호수 속에 빠지는 것으로 착각했다. 무겁고 얼음장 같은 물방울이 일정한 속도로 자신의 가슴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중략] 그의 작곡은 그의 환상 속의 음악 속에서 그의 가슴위로 떨어지는 눈물로 바뀌어진 빗방울이었던 것이다.

다시 곡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곡은 그저 무심하게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문득 ‘아… 비가 오네’ 하는 느낌. 왼손은 빗방울을 묘사한다지만, 오른손의 멜로디는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특별히 무겁지 않은 상념들. 가끔 가다 그 상념은 왼손의 빗방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오른손의 (13초, 혹은 1분 25초 부분) 음들의 덩어리로 마무리 되고 다시 시작한다.

 

편안했던 상념이 변하기 시작한다. 1분 40초부터 3분 19초까지 똑똑거리며 계속되는 리듬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이미지를 주었다면, 3분 19초부터는 환상 속의 공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울먹거리는 연약한 심장이 느껴진다. 감정적 에너지가 고음에서 더 밀도 있게 호소한다. 연약한 감성이 폭발할 것 같다. 작곡가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불현듯 4분 17, 18초 부분에선 순간적으로 평온한 현실로 돌아온다. (이 모든 묘사는 필자가 연주할 때 느끼는 상태이므로, 개인적 느낌의 묘사로만 받아주시길…).’

 

배경에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른다. 이사의 풍경이 무심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쁜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쇼윈도의 옷을 보고도 발걸음을 돌리는 모녀. 학원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보는 딸. 택시 노조 시위에 참여하자고 권유 받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은 여자. 하지만 봇물처럼 막상 비가 쏟아지면서 과거와 조우하는 감성적인 추억들(부부의 첫 만남)이 되새겨진다. 제대 후 막연했던 남자와 일당 3만원에 엑스트라로 전전하던 여자에게 쏟아지는 비처럼 막막하고 구질구질한 게 없겠지만, 복권을 사려다 만난 헤드라이트 불빛이나 흐트러진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머리끈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일 년 후, 삶 속에서는 여전히 궂은비가 오지만 그들에겐 추억이 힘이 되고, 딸 혜안이의 우산이 되고자 묵묵히 비를 견뎌내는 것이다.

 

3. 영화 속 살펴보기 (세부 줄거리에 대한 단상들)

너를 보면 즐거웠고

그랬다가

너를 보면

내가 보여 갑갑했다가

이제는 너를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우리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혹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우리 지지치 말고 계속 이 작업을 하자! 라고 다짐 하는 듯한 여운이 든다.

플롯은 꽤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우자동차가정아파트에서 이사 나오는 장면이 시작이다. 담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 지하 월세 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

 

대우자동차 시위의 후유증으로 등에 파스를 도배하고 사는 남자는 택시 운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택시연맹소속의 집회로 일 년 만에 또다시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제 그는 섣불리 예전처럼 덤비질 못한다.

 

남자는 시위가 나가지 않고 혼자 골목에서 우유팩을 찬다. 잠시 대우자동차 노조 동료들과 여럿이서 족구를 하던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넘어져 버리는 현실. 그를 바라보는 딸이 있다. 그는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앞 뒤 젤 것도 없이 등록시켜준다.

 

‘너네아빠는 돈도 없고 힘도 없다’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남자, ‘엑스트라 배우였으니까 너의 아빠와 결혼했지’ 라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여자. 그리고 이층 집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설거지를 하며 눈치를 보았던 혜안이. 이쯤 되면 이들은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눈 돌리면 바로 옆에 있는 이웃들이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리는 바로 우리들을 보고 부디 분노를 서슴지 않길.

 

 

<각주 부분은 붙여넣기 하기가 까다로운 관계로^^;생략하겠습니다. 목요일 날 발제문에서 모두 확인하실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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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의 리뷰를 보고 떠오르는 ?

영상이론과 김현선

 

하나의 전제

나는 전 시간에 <빗방울 전주곡>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본 내용에 대한 곡해의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의 전제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그러므로 리뷰에 쓰여진 내용에 관한 질문은 가능하다.

 

본론.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있는 부모가 꾸는 꿈은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자신의 딸만은 그들의 삶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꿈은 자신들에게 처해진 현실은 고스란히 남긴 채

이미 누군가가 여유롭게 누리고 있을 또 다른 현실로 자신의 딸을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꿈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한들 문제적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현재 부모의 현실을 이어받는 것이 그들의 피를 가진 딸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딸은 여전히 그 현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대안은 근본을 찾아나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지니는 허망함과 그 이후의 난감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곳'은 저 멀리에 있는 피안(彼岸)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차안(此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질문.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혹은 그들의 미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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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영상이론과 김현선

 

뜨거운 게 좋아.

-복잡한 심경을 뚫고 지나가는 단순한 정신의 행로-


일단 ‘독립영화에 대한 독립영화’를 보고 난 나의 소감은 역시 ‘뜨거운 게 좋다’이다. 과거 어느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던 생각은 인간은 뜨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 다른 것을 보면서 그 뜨거움을 간절하게 바랐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영화를 보면서, 그러는 내내 울컥하고 목까지 차오르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그렇게 나를 간절하게 했던 ‘뜨거움’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다시 한번, ‘인간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일정 정도의 따뜻함을 유지하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고, 또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해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안에서 ‘독립영화’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독립영화가 태생부터 정의되어진 것들에 포섭되지 않는 정의되지 않은 것들의 이름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독립영화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독립영화는 ‘(     )에 반하는 영화’라는 정의되지 않는 정의 혹은 부정형의 정의밖에 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비어있는 그 무엇은 무한하게 새로 생겨나고 빠르게 크기을 갖춰 나가며 그와 동시에 그에 걸맞는 힘을 행사하는 모든 유형의 권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몇 번이고 자신의 존재를 부르짖지만 그 메아리는 다시 변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영화가 (     )에 반하면서 찾아나가는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잠정적인 결론을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내가 다다르게 한 독립영화의 목적지는 결국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제껏 이 시대의 공간을 겸손하게 점유해 온 하나의 사람이며, 외진 구석이 본래 자신의 자리였으리라 묵묵히 받아들이고 순간을 견뎌온 우직한 사람이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살아있는 사람이며, 이렇게 저렇게 부딪치게 되는 차가운 발길질에 투쟁해 온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 그 사람들은 그 자체가 ‘뜨거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저런 수식이 필요없는 그냥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과 영화와 이들을 바라보는 나는 무엇으로 만날 수 있는가?

그래, 그건 또 ‘뜨거움’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차가운 걸 차갑다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여 드디어 다다르게 된 나의 목적지.

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잠정적인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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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영화>에 대한 단상

영상이론과 김현선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한 고백


언젠가부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질문을 던져 놓고 고민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다. 물론 세상에는 이미 그럴듯한 답들이 나와 있고, 내가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른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현재 보고 있는 영화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영화의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영화는 보는 행위로부터 의미를 생성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의미는 보는 행위의 주체로 인해 다양하게 분화되므로 영화는 항상 그것을 보는 시점과 그 때의 주체 사이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고민이라 해도 언제나 그것이 현재적 시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습관화된 질문과 고민은 그 상태로 박제되기 일쑤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홀로 유유히 존재할 것만 같은 영화의 지위를 인정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내가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이다. 더 정확하게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의 창작물이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사실이 오히려 쉽게 간과되곤 한다. 마치 영화의 모든 창조적 권리는 감독이 거머쥐고 있으며, 이러한 창조자의 세계는 외부적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감독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 이러한 특수성이 지니는 상대적인 의미, 이러한 요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환경까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동시대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역사 또한 인간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다시 영화를 만들고 만들어진 영화에 다시 영향을 받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특징을 언제나 포함하고 있는 인간과 그들의 역사 그리고 영화는 그들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차원에서 영화는 그것의 기반이 되는 물질적 토대와 사회․문화적 맥락, 영화 제작 전반에 걸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과 이해관계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과거의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  모두를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금 앞서 언급했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점을 잊지 않으면서 영화 자체와 다소 거리를 두거나 완전하게 거리를 소거해 나가기도 하면서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다가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들의 자리를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살아있는 영화의 의미들을 ‘나는’발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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