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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03
    변방에서 중심으로-독립영화에 대한 단상들
    독립영화비평
  2. 2007/04/03
    매혹의 기억-단편영화에 대한 단상들
    독립영화비평
  3. 2007/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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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4/03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_
    독립영화비평
  5. 2007/04/03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6. 2007/04/03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변방에서 중심으로-독립영화에 대한 단상들

<단편영화산책> 협동과정 서사창작과 강 지 혜

 

 변방에서 중심으로-독립영화에 대한 단상들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며 독립영화는 투쟁 의지가 서린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투쟁이라는 단어로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나눠도 좋을까? 이를테면 대부분의 예술이 어떤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투쟁을 근거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단순 미학적인 관점에서 유희로 시작되는 것도 있겠지?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좀 더 투쟁의 강도가 강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썼다.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도 관건이겠다. 영화 중간 중간 독립영화계의 한 획들을 긋는 작품들을 보면 그 역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철거민들을 위한 혹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나뿐이 아닌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회의 현상에 대해 망설임 없이 바로 의지를 표명하는 것, 그런 것을 바로 독립영화의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을까? 왠지 이번 과제를 하면서 하염없이 물음표만 붙는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재미있으면 좋겠다. 혹은 따뜻하면 좋겠다. 라는 인터뷰 내용이 생각난다. 그리고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는 영화를 하고 있지 않았나 라고 말하는 감독도 기억난다. 이러한 고민과 욕망은 비단 독립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충돌은 희망이다.’ 라는 문장을 보고 뭔가 느낌이 왔다. 영화가 착상되게 된 사회적 사건부터, 사사건건 만들어지는 과정 내내 간섭하는 관료적 잣대, 이후 상영되는 과정에서 빗어지는 해프닝들까지 모두가 충돌의 충돌을 거듭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투쟁과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될 것이다.

 

왠지 앞으로 수업시간에 단편영화와 독립영화 둘 중 어느 것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논제에 대해, 독립영화에 더 비중을 싣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뭔가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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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기억-단편영화에 대한 단상들

<단편영화산책>협동과정 서사창작과 강 지 혜

 

매혹의 기억-단편영화에 대한 단상들

 

  문득 쏟아지는 수많은 영상물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컴퓨터 그래픽 등 영상 기술의 발전으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을 바로 마주보게 된다. 아마도 세월이 갈수록 영화는 무섭게 발전해 갈 것이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홀리 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70년대 만들어졌으나 현재의 내로라하는 여느 컬트영화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미지의 힘은 그걸 가능케 하는 기술에도 있지만 이미지를 존재케 하는 정신과 그 플롯에 더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지난 시간, 한국의 70, 80년대 영화를 보았다. 첫 영화 <아침과 저녁사이>의 실험적인 이미지들이나, <백일몽> 같은 재미있는 플롯부터 <칸트 씨의 발표회>처럼 강한 메시지까지, 사실 조금 놀랐다. 한국영화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변방에서 아무도 잘 보아주지 않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사회에서 시를 쓰는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격렬하고 실험적인 70, 80년대와 달리 90년대 영화들은 잔잔하고 문학적이었다. <우중산책>에서 읽히는 여인의 비에 젖은 마냥 질척대고 비참한 안생이나 <가변차선>의 마치 황석영 소설을 읽는 듯한 문학적인 느낌, <지하생활자>처럼 불 꺼진 지하까지 관객을 끌고 내려갔다가 한바탕 불을 질러버리는 광기의 모습까지. 러닝타임 내내 강렬한 몸짓은 없지만 어떤 순간 감정이 폭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미군이 이라크 여자아이를 강간한 사건에 대한 글을 써간 적이 있다. 써간 나를 비롯 또래들은 강한 목소리를 띤 글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교수님은 요즘 나이든 노인네들이 읽기엔 이 글의 목소리는 너무 약하다고 느꼈을 거라 하셨다. 그들의 시대엔 더 치열하고 처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요즘시대는 어떤 투쟁들이 지하세계로 내려가 버리고 그 위에선 반쯤 벗은 연예인과 빠르게 바뀌는 가전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 같다.

문득 70년대에서 90년대로 내려오며 영화 내의 거친 면들은 사라지고 내성적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기저에 깔린 지뢰를 감지하며 영화를 보았던 시간이었다. 억압은 어느 시대든 존재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더 영악하고 조용하게 이 사회를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시 영화도 진화한다. 진화일까? 수업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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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단편영화산책

2007/03/27

방송영상과 정지원

2005138016


70, 80년대의 한국 단편영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나의 무지함이 지나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시대에는 한국에서 단편영화가 제작 되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처음으로 본 그 흑백의 단편영화는 상당히 특이했는데, 상당히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접적인 장면은 묘사되지 않았지만, 처음만난 여자와 섹스를 하고, 그 여자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집에 있던 애인에게 다시 선물하는, 70년대의 청년들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그러한 영화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볼 수 없는 예전의 서울 풍경들이 생경했다. 그 시대의 풍경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단편들이 기록적인 역할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단편들은 픽션이지만 이 영화들은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대를 주름잡고 있던 사상과 소수자들의 인권이 잘 녹아난 작품들이었다. 더 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 시대를 대변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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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_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_ 방송영상과 2005138016 정지원


“기존 상업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제작한 영화”

백과사전에서 정의하는 독립영화의 의미이다. 백과사전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독립영화를 하는 이들을 “배고픈 직업”을 가진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 역시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이러한 정의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간단하게는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최근 들어서 조금은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뚜렷한 자신의 신념과 열정을 담아낸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창작자의 의도’가 신념과 열정이란 단어를 대신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깊게 좁게 생각해 본다면 신념이라는 단어가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면서, 그리고 다른 독립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만드는 이에겐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무엇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독립영화를 하는 이들은 자본을 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믿고 있는 그 무언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물론 상업영화를 제작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확고한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신념에 동의를, 또 어떤 관객은 그것에 반기를 들것이다. 하지만  돈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앞세운 그들이 상당히 부러울 뿐이다. 아직 나에겐 그러한 확고한 신념이나, 세상을 좀 더 깊이 보는 눈이 없다. 세상을 좀 더 깊고 다르게, 그리고 세심하게 보는 법, 그리고 내가 믿고 따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이들이 만들어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독립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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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산책>                                             방송영상 20041235 도유리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란 무엇일까, 에 대한 대답은 비록 그것이 내 개인적인 정의라 할지라도, 정말이지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번 기회에 또렷이 깨달았다. 독립영화에 대한 정리를 하자면 먼저 ‘독립’ 이라는 말부터 정의 내려야 할진대, 우리가 흔히 쓰는 독립이라는 단어는 독립영화의 그것과는 꽤나 먼 거리에 있다는 확신을 지울 수 없는 탓이다. 이 지경쯤 되고 보니, 도대체 누가 독립영화에 최초로 독립영화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그 사람은 어쩌다가 그 말을 떠올렸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피어난다.


  아주 진부한 추측을 해보자면, 최초의 그 작명가는 독립영화가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있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아 그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독립영화가 가진 특징들은 많지만, 그 모든 특징들을 한 번에 표현해낼 수 있는 단어를 찾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이름이 태어나던 시기에는 아마 그것이 명확하고도 현실적인 근거를 가진 이름이었을 테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고 멀고 까마득하긴 하지만, 독립영화라는 이름이 탄생하던 그 때보다는 그래도 독립영화에 대한 위상이 많이 높아진 지금, 독립영화에 상업성 짙은 자본이 전혀 침투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작가의 태도 문제일까.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독립영화란, (상업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상대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대신,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삶과 그 배경이 되는 이 사회에 천착해있는 영화라고. (이쯤에서 ‘천착(穿鑿)’의 사전적 정의를 알아보니,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 이라고 한다. 정확히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것이 다큐멘터리이건 극영화건 간에 상업영화보다는 좀 더 진지한 태도를 품고 있으며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니까. 상업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진지하거나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이고 또 심각한 왜곡이지만,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을 표현해보라는 과제를 받고서 이상하게도 독립영화의 ‘정의’를 강박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나로서는 이 단순하고도 진부한 답이 새삼 신선하게 느껴진다. 막연하던 그 무엇을, 이렇게 글로 풀어내본 것은 아주 오랜만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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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산책>                                                       방송영상 20041235 도유리



내가 바라보는 단편



  지난 학기, 나는 25분여 길이의 ‘Short'를 만들었다. 내가 속한 과의 특성상 포맷은 드라마였지만 어쨌거나 단편영화와 별다를 바 없는 작품이었고, 그 지난한 산고를 겪으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흔히들 단편의 매력이란, 짧은 길이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영상의 길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을 토해내고 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물론 나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 라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애송이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노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단편이라는 작은 그릇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던 것이 애초에 무모한 짓이었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누군가가 이런 나에게, 포기하는 게 아니냐고 혹은 지레 겁을 먹은 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외국과 한국의 단편들을 보면서도 역시나, 그런 나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더 많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가 그것이 버거워 휘청대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적잖이 있었고, 그들 역시 짧은 길이 안에 그들이 원했던 모든 것들을 녹여내는 데 실패했으리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 역시 그들처럼 관객들과의 소통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의 실패가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단편에 도전하려 한다. 단편에 어울릴만한 이야기를 찾아내어, 지난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단편만의 매력을 맛보기 위해. 더 나아가, 많은 이야기들을 능숙히 녹여내어 단편이라는 그릇 안에 알맞게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을 쌓기 위해. 앞으로의 수업시간에도, 그런 농익은 솜씨를 느낄 수 있는 단편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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