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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집' 발표을 위한 유인물

 

<192-339: 더불어 사는 집이야기>

‘집이 없다’는 것과 ‘갈 곳이 없다’는 것의 차이                        

 

                                                                               김봉재



1. 집이 없다는 것의 의미


 홈리스(homeless)란 일정한 주거가 없는 모든 사람으로, 거리 노숙자부터 주거불안 계층까지를 포함한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다음의 네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1)아직 주거를 상실하지 않았지만, 주거 불안상태에 놓인 계층(퇴거의 위험에 몰린 계층 등)

2)이미 주거를 상실했으나, 가족적 지지망이 해체되지 않아 형제나 친척집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

3)이미 주거를 상실하였고, 가족적 지지망 마저 해체되어 비닐하우스나 쪽방과 같은 불안정한 임시주거 시설에서 생활하는 계층

4)끝으로 비닐하우스나 쪽방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거리로 나와 숙식을 해결하려는 계층을 포괄하고 있다.                <이태진, 한국 홈리스의 주거지원 실태와 정책방안 (2004)>


 위의 정리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노숙자’ 혹은 ‘노숙인’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의는 3번과 4번에 가깝다. 한국사회에서 그들의 이미지는 고약한 냄새와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낙인으로 얼룩진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를 보았던 5월 3일 각 포털사이트의 인터넷 기사에는, 또 한명의 노숙자가 ‘무고한 시민’을 지하철 선로로 밀쳤고 ‘용감한 시민’들이 그녀를 구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것은 ‘노숙인’이라는 의미가, 인간이 살아가는데 기본이 되는 의식주(衣食住) 중 ‘주(住)’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homeless'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숙을 하는 한 인간 자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 지하철 역사에는 ‘노숙인’을 만났을 때 ‘일반인’의 대처 방안이 나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2.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의미


 우리나라의 경우 노숙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IMF구제금융 시기에 실직노숙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부터이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노숙자 문제는 사회구조의 결함으로 부터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결과적으로 노숙자 문제가 발생하자, 노숙자 운동이 정착되기 이전에 초기부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 쉼터가 만들어 졌고, 공공부조나 의료지원체계와의 연계망이 일찍이 형성될 수 있었다. <중략> 반면 일본의 경우 노숙자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이해되기 보다는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력으로부터 인식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노숙자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입장역시 정책적으로 관여하기 보다는 개개인의 자조를 강조하며 체계적인 접근방법을 취하지 못했다. <중략> 일본에서는 쉼터가 거의 없다. 쉼터가 등장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노숙자들은 공원이나 강변에 텐트를 치고 집단 거주하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 노숙자들이 젊은이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본에서 발생하는 것도, 이처럼 노숙의 문제를 정부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무능력으로 환원해 버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도시 연구소, 일본 노숙자 운동의 시사점 (2003)>

 2003년에 발간된 참고자료에서처럼, 우리는 IMF체제 하에서 수많은 실직자와 그에 따른 노숙자들을 양산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소한의 생존권을 박탈당한 희생자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그들은 블루컬러부터 화이트 컬러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일순간에 노숙자로 전락해버린 각 개인의 기구한 사연과 더불어, 그렇게 전락해 버린 개인들의 재기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이것은 그들을 ‘주(住)’를 해결하지 못한 ‘homeless’로써 정의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어쩌면 차가운 IMF체제 종료 후엔, 머지않아 따뜻한 봄이 오리라는 당시의 희망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노숙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故손창호 퉁퉁한 얼굴에 특이한 목소리. 전영록과 함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을 풍미한 청춘 배우. '동경 아리랑'이라는 영화로 감독으로 데뷰. 한동안 사라졌다 병원 24시라는 TV프로를 통해 행려병자로 발견. 마흔 일곱의 나이에 온통 망가진 몸과 정신마저 흐릿해져 도무지 손창호라 믿을 수 없는 상태로 그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의 존재가 알려지자 그를 잊었던, 그를 버렸던, 그를 멀리했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마감했다.           <네이버 개인 블로그에서 무단 발췌(2004.1)>


 건교부는 행정사범의 경우 최근 주요 역의 노숙인이 늘어나면서 철도 시설 및 열차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등 기초질서를 저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열차 내 고성방가 늘었다. 연합뉴스 2007-05-02>


철도공사 부산지사는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부산역 1층 출입구를 폐쇄하는 노숙인 야간 출입제한 2단계 조치에 들어갔다고 2일 밝혔다. 부산역 1·3층 맞이방(대합실)일부를 폐쇄하는 1단계 조치에 이어 시행되는 이번 조치를 통해 부산역은 3층 출입구와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야간에 모두 폐쇄된다.
철도공사는 부산진역에 노숙인 무료급식을 위한 간이천막을 설치해 부산역에 남아 있는 노숙인들을 유도할 예정이다. 박태우기자
 

               <“노숙인 야간출입 통제" 부산역 2단계 조치 시행 부산일보 2007-05-02>


지금의 관점에서 한국의 노숙인 들은 더 이상 'homeless'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기거할 집 없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합법적인 승인아래 이동의 제한까지 받게 되었다. 이들은 잠재적 범법자로 규정되어 어디에도 발붙일 수가 없으며, 우리는 그들에게서 실직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경제 회생’이라는 엄청난 불을 끄기 위해 희생된 그들은 결국 그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마는 것이다. 참고자료에서 보듯 초기단계부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은, 노숙인 운동을 정착 시키고 자립심을 길러, 노숙인의 권익을 보호해 주기 위한 장기적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장의 여론을 무마시키려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정부의 부실한 정책은 노숙인들의 자활을 효과적으로 지원하지 못했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쉼터와 명목뿐인 사회사업을 양산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숙인들을 위한 공공정책의 실패로만 끝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쉼터와 수많은 사회단체가 난립할수록 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 졌는데, 쉼터에서의 부적응을 개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위에 예로든 ‘故 손창호’ 역시 노숙인을 위한 무료병원에서의 통제된 생활을 참지 못해 뛰쳐나와 곧 사망했다. 얼핏 이것은 충분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데도, 개인의 어떤 이유 때문에 죽음을 맞은 듯 보이는 사건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쉼터를 뛰쳐나오고, 무료병원을 퇴원해 다시금 노숙 하거나, 죽음 맞으려 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는 뒤로 물러나 있다. 오히려 충분한 공적지원이 되는 상황에서, 그러한 ‘도움의 손길’로 부터의 이탈은 앞서 언급한 일본의 사례처럼 ‘노숙인’의 삶을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킬 좋은 구실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정부당국과 일반이 가지는 차별의식이 단단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 노숙인 들을 우리와 같은 ‘동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되어져야 할 인간’으로 보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엄밀하게 돈이 없는) 그들에게 갱생을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 자활 의지 vs 불신


 주정수는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원생들은 물론 만족할 수 없었다. (...) 섬 안의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날 때마다 그 만큼 섬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에는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갔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전국노점상연합회’ 전 회장이자 ‘더불어 사는 집 고문’인 양연수씨는, ‘최초’로 노숙인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자활단체를 조직했다며,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노숙인들을 선동한다. 각을 세우고 ‘역사를 세로쓴다는 사명감’을 가진 그는 스스로를 ‘빈민 운동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혁명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영화 속 양연수는 악역이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여러 사회적 문제에 관여해 그것을 쟁점화하고 여론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자 직업인 셈이다. 개량 한복을 입거나 무스탕을 걸치고, 단 3일 밤을 ‘더불어 사는 집’에서 보냈던 그가 부르짖는 노숙인의 유토피아는 마치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소록도 병원장들의 행위처럼 스스로의 ‘동상’을 세우기 위한 과정일지 모른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양연수씨가 내세운 ‘노숙인 스스로의 자활’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성공여부가 불투명하다. 우선 빈집을 점거한다는 행위자체가 불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공적지원을 받을 가능성마저 스스로 줄여버린 꼴이 되었다. 거기다 양현수씨가 개인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사업장이나 소득원도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더 많은 노숙인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무료급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더불어 사는 집’의 목적이 노숙인 자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선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더불어 사는 집’ 사람들이 점점 지배자가 되어가는 그의 독선 앞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나거나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현실에서 주거를 박탈당하고 ‘노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적-사회적 관계들과 단절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재진입 기회마저 박탈당했다는 것과 동일하다. 흔히 노숙 생활을 ‘한계상황’ 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럼에도 노숙인들의 거리 생활이 길어지고 만성화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제약들 때문이다. 첫째, 노숙인들의 건강상태나 근로능력에 대한 문제를 차치해두더라도, ‘주민등록 문제’는 노숙인들이 노동을 통해 사회진입을 하는데 가장 큰 장벽이 되고 있다. <중략> 둘째, 노숙인들은 각종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다. 범죄조직은 노숙인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주 노숙지인 공공역사를 중심으로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거나 신분도용을 통한 경제사기에 노숙인을 이용한다. <중략> 셋째 노숙인들이 지불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의, 노숙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주거자원이 우리사회에 없다. 우리나라의 공공임대주택 재고율은 2.3%(그 중 최저주거기준 미달가구가 23%)에 불과하며, 그나마 있는 공공임대주택에서조차 노숙인은 입주자 선정대상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동현, 주거정책 빠진 노숙자 대책은 ‘포장지’일 뿐, (2005.1)>


 거리 노숙인들의 50%이상이 쉼터를 경험하였지만 거리노숙인의 증가는 점차 두드러지고 있으며, 그곳은 통한 사회복귀는 역시 16% 정도로 낮다. 쉼터 입소를 중심으로 한 지원정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숙인들이 양현수씨에게 끌러다는 요인 중 하나는 될 수 있어도 근본적인 문제는 아닌듯하다. 영화 말미에, ‘노숙인 스스로’의 자활을 외쳤던 양현수씨는 공적 지원을 받고자 관계기관을 찾아 서류를 꾸민다. ‘더불어 사는 집’의 정체성이 처음의 취지와 다르게 그가 대표가 되는 일종의 ‘쉼터’로 바뀐 셈이다. 결국,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했던 많은 이들은 ‘더불어 사는 집’을 떠나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거리급식을 통해 모집한 더 많은 노숙인들이 그곳을 거처 갈 것이다. 노숙인들이 양현수씨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쉼터로의 입소를 꺼리기 때문이라면, 점점 쉼터로 변해가는 ‘더불어 사는 집’을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시말해, ‘더불어 사는 집’의 정체성이 쉼터와 유사하게 변해가고, 그것이 결국 양현수씨 개인의 입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와중에도 떠나지 못하는 노숙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이 쉼터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쉼터는 개인의 사생활을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할뿐더러, 물리적 공간 역시 협소하다. 쉼터별 입소정원은 쉼터 개소당시 시설의 규모에 따라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작위적인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실제 이 인원에 맞춰 입소를 받게 되면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다. <중략> 그럼에도 정부는 정원기분에 따른 공실률을 운운하며, 상담활동을 강화하여 쉼터에 입소시키겠다고 한다. 그것을 ‘동절기 대책’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자활의 집’이라는 일부 주거지원제도가 존재하나 프로그램식 임시사업으로 물량이 적고, 조건이 까다로워 극소수의 노숙인만이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현재 상태로는 기본 입소기간 6개월이 지나면 자력으로 주거지를 확보해야한다. <중략> 노숙인들이 거리를 선택하는 것은 거리생활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서도, 집을 마다하는 별종이기 때문도 아니다. 거리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동현, 주거정책 빠진 노숙자 대책은 ‘포장지’일 뿐, (2005.1)>


 노숙인들은 ‘더불어 사는 집’을 쉼터나 ‘자활의 집’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식사장면과, 술자리가 말해주듯 ‘더불어 사는 집’은 불법 점유된 빈집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의 소유인 것처럼 느껴진다. 노숙인들은 잔치를 하듯 모여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술잔을 부딪치며 ‘더불어 사는 집’이 정말 그들의 유토피아가 되길 바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양현수씨의 선동에 이끌린 이유가, 그곳이 다른 곳보다 더 나은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 스스로가 실천토록 돕겠다는, ‘더불어 사는 집’의 취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회복지관련 연구자들이 외국의 사례를 분석해하며 나름의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반영된 정부의 대책이나, 개인 활동가들의 노력이 무의미 하다고만 불수도 없다. 그러나 노숙인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존중을 무시한 채, 그들을 배제시키고 정부당국이나 사회활동가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노숙인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노숙인 운동과 노숙인 사이에 불신과 배반이라는 넘기 힘든 골을 파게 된다. 그것은 곧 노숙인들의 자활의지를 상실 시킬 뿐 아니라, 그들을 ‘천성’부터 게으른 ‘잠재적 법죄자’로 낙인찍게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4. 나오며 하는 말


그것은 한마디로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장님이 아무리 섬사람들을 생각하고 섬을 위해 노고를 바치고 계셨다 해도 원장님은 결국 섬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사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원장님께서 꾸미고자 하신 섬사람들의 낙토가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공동의 천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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