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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05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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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3. 2007/04/05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2)
    독립영화비평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우선 이번 영화의 리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던 것인지 말씀드립니다. 독립영화의 정체성, 그들이 그토록 토론하고 쌍욕을 해가며 쟁취하고자하는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단순하게 영상의 동기부여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자기검열에 입각한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상원의 중견 교수님들과 유명 감독, 평론가들의 출연으로 독립영화에 대한 그들의 언급과 정의에 동조하면서도, 정작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저는, 앞선 세대의 진보적 행동에 대한 억압과 구속을 일종의 '문화적 저항'의 원천으로 규정하며, 그것이 문화적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의 정의 앞에 ‘반드시 현실과 투쟁할 것’이라는 전제를 달아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독립(단편)영화는 분명, 현실과의 투쟁에서 오는 정신-물리적 고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고, 그러한 영화의 제작과 상영과정을 지켜보며,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파고들어 그 평범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변모시키고, 그것을 영상으로 옮겨 담는 사람조차 영웅화가 된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영웅이 될 거라는 착각은,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를 ‘참여’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중심이 된다면 저는 그들의 투쟁을 축하하며 샴페인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기대를 해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차가운 사무실바닥에서 새우잠을 잘 때, 주점에서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며 ‘저항이나 자유’따위를 외칠 뿐이며, 같이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꾸미지도, 어디엔가 제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들이 현실과 계속해서 투쟁해주기를 바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영화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변방으로 내모는 행위는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어제의 저는 지친 그들에게 ‘변절’이나 ‘배신’ 혹은 ‘타락’등의 단어를 너무나 쉽게 붙였던 것 같습니다.

 변영주 감독의 말처럼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변방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아무도 그들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당하게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독립영화가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질러 고행의 길로 인도하더라도 그는 또 다른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영웅화되었던 출연자와 제작자와 감독과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관객들입니다. 세상이 독립영화를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변방으로 돌진합니다. 그들이 중심이 되는 순간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독립영화의 혁명이 성공한 날이며, 모든 나르시즘이 허물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한발 앞서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방을 만들어 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이유는 그곳에 결승선이 있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뒤쫓아 오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달리는 도중 결승선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을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들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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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단편영화’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어렵다’ 일수도 있고 ‘지루하다’일수도 있고, ‘강렬하다’ 일수도 있지만 단편영화는 분명 지루할 때가 많습니다. 단편영화가 만들어지는 환경(거의 대부분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만들지만)상 많은 돈을 들여 훌륭한 비쥬얼을 만들기 힘듭니다. 그리고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지는 강박관념들, 무엇인가를 성찰해야 하고 관조해야 하며 새로운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인해 영화는 매우 관념적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들이 조합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다’ 나 ‘어렵다’라는 반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단편영화에서 만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그 어떤 것이든 영화화 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꼭 일반적인 드라마형식의 내러티브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창조된 인물이 겪는 그 순간의 심리상태나 그 밖의 것들을 형상하는데 단편이 가지는 장점이 장편보다는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편으로 끌고 가기 부담스러운 것들, 혹은 그 상황을 다룰 때 단편은 ‘완결성’이라는 무기를 지닙니다. ‘영화화 하고자 하는 것’을 ‘열고’, ‘닫으면’서 그 순간 가장 잘 짜여진 ‘영화’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단편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단편은 장편의 반대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편과 장편은 반대가 아닌 별개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단편이 할 수 있는 것을 장편은 할 수 없고 장편이 할 수 있는 것을 단편은 하지 못합니다. 즉 ‘형태’의 차이이지 ‘영화’라는 점에선 동일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편영화는 ‘마이너’하고 장편영화는 ‘메이저’하다는 인식은 그동안 우리의 영화산업이 기형적인 방법으로 감독을 생산해 내었기 때문 일수도 있습니다. 즉 단편작품을 포트폴리오로 입봉한 감독들은 장편에 뛰어든 후, 단편에 손을 대는 경우도 드물고, 손을 대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서 마치 과거의 순수성을 추억하기 위한 소품정도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창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위해 선택하는 ‘선택지’가 되어야 하지 ‘영화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나 ‘메이저에 올라가기 전 마이너리그’라고 인식되어선 안 됩니다. 짧은 시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우리의 영화산업은 이것을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산업을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단편을 찍는다는 것은 ‘고급예술’을 하는 것도, ‘저항운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순수하게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낼 그릇으로 ‘단편영화’를 골랐을 뿐입니다. 따라서 단편영화가 ‘영화의 정수’이고 영화의 순수성을 지향한다는 주장에 쉽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단편영화를 하는 그 자체가 인디정신을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장편영화를 하는 감독들이 무조건적으로 상업성에 기댄 상품만 찍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장편과 단편은 그저 ‘영화’라는 자장 안에서 논의 되어야 합니다.

 단편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가질 기회가 우리에겐 너무나도 적습니다. 영화가 상영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단편영화들은 (우리의 현실에서)그 영화가 만들어진 학교 안에서, 혹은 단편영화를 (어떠한 이유에서건) 향유하고 공유하는 일부 그룹 안에서만 선을 보이고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수한 영화들이 소비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단편영화는 영화가 아닌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영화는 보아줄 사람들 앞에서 손을 들고 서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것들을 꺼내어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단편영화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적 방법의 접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알아주길 바라는 그 수많은 단편영화들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단편영화에 대하여 취해야할 첫 번째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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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20041181 연극원 연극학과 박선영

 

 독립영화란, 미국 영화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단편영화, 대기업의 자본과 유명 영화사에서 만들지 않은 영화 정도를 일컫는다고 네이버 지식인은 말하고 있다. 즉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같은 부류로 묶어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가끔씩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혼돈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독립영화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모든 것에서 독립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독립하여 자유롭게 만든 영화,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관객, 대중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을 너무 의식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떳떳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본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은 만든 이의 뚜렷한 생각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때론 과격하게, 그리고 분명한 색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의 잘못된 점, 어두운 이면들, 약한 자들의 이야기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사회의 감언이설과 타협하지 않고 제대로 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본 많은 독립영화들은 고뇌하고 있었고 고뇌하게 만들었다. 보고 나면 무거운 마음이 드는 그런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때론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고 공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나는 나를 자극시키고 사회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세상을 마냥 밝게만 바라보려 하는 나의 시선을 넓게 만들어주는 독립영화의 이러한 시선들을 훌륭하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만이 독립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아니라도 독립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독립적이고 무엇이 독립적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서 독립영화가 생겨나게 된 동기의 의미로서 독립영화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영화와 단편영화에서 오는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듯 하다.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번 <단편영화산책> 수업을 통해서 그것의 경계는 어디이며, 무엇일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혼자서 막연히 고민하던 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독립영화에 대한 원래 의미는 이미 변색되어 버렸기 때문에, 독립영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욱 맛있게 ‘독립영화’를 맛보고자 하는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함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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