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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4/11
    첫번째 <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2. 2007/04/10
    20011327 조형예술과 김현지
    독립영화비평
  3. 2007/04/10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질문
    독립영화비평
  4. 2007/04/10
    <빗방울 전주곡> 질문 - 박선영(1)
    독립영화비평
  5. 2007/04/10
    <빗방울 전주곡>,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독립영화비평
  6. 2007/04/09
    프린트 드렸는데 방명록에 있던 거 어쨌던 원위치로^^;
    독립영화비평
  7. 2007/04/08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예술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독립영화비평
  8. 2007/04/05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9. 2007/04/05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비평
  10. 2007/04/05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2)
    독립영화비평

첫번째 <영화>에 대한 단상

영상이론과 김현선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한 고백


언젠가부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질문을 던져 놓고 고민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다. 물론 세상에는 이미 그럴듯한 답들이 나와 있고, 내가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른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현재 보고 있는 영화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영화의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영화는 보는 행위로부터 의미를 생성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의미는 보는 행위의 주체로 인해 다양하게 분화되므로 영화는 항상 그것을 보는 시점과 그 때의 주체 사이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고민이라 해도 언제나 그것이 현재적 시간 안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습관화된 질문과 고민은 그 상태로 박제되기 일쑤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홀로 유유히 존재할 것만 같은 영화의 지위를 인정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내가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이다. 더 정확하게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의 창작물이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사실이 오히려 쉽게 간과되곤 한다. 마치 영화의 모든 창조적 권리는 감독이 거머쥐고 있으며, 이러한 창조자의 세계는 외부적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감독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 이러한 특수성이 지니는 상대적인 의미, 이러한 요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환경까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동시대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역사 또한 인간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다시 영화를 만들고 만들어진 영화에 다시 영향을 받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특징을 언제나 포함하고 있는 인간과 그들의 역사 그리고 영화는 그들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차원에서 영화는 그것의 기반이 되는 물질적 토대와 사회․문화적 맥락, 영화 제작 전반에 걸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과 이해관계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과거의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방식  모두를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금 앞서 언급했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점을 잊지 않으면서 영화 자체와 다소 거리를 두거나 완전하게 거리를 소거해 나가기도 하면서 다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다가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영화를 보면서 흔히 놓치게 되는 것들의 자리를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살아있는 영화의 의미들을 ‘나는’발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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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327 조형예술과 김현지

<빗방울 전주곡>

 

질문 1. 빗방울 전주곡에 앞서 대우 구조조정에 관련된 영상을 봤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더욱더 무력하게 만드는 구타 장면을 보며 저 곳이 제가 서있는 땅, 한국이 맞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상을 찍는 것을 제재하지 않은 것이 좀 신기했습니다. 어설프게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건가요? 아님 신경쓰지 못한 카메라였던 건가요? 몰래 찍은 것 같지는 않던데. 인터넷에 그게 돌고 나서 찍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질문 2. 그렇게 실업하고 나서 노동자들에겐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까? 그리고 이렇게 보도 형식으로(빗방울 전주곡 전에 있던 영상 자료) 많은 사람들이 그 자료를 봤을텐데, 그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것으로 그쳤는지. 아니면 정말 강한 대책 마련이 있었는지. 그렇게 찍은 영상과 <빗방울 전주곡>이 방영 되고 나서 그 시대에 어떠한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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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질문

영상이론과  박소영

 

이 영화 뿐만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를 볼때 마다

들었던 생각입니다...

먼저 <빗방울 전주곡>에서 다루고 있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요?

한국의 경제이데올로기에서 투쟁에 뛰어든 노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하지만 분명 그들의 영웅적 행동 뒤편에는

또 다른 상처를 안고 힘들어하는 그들의 가족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빗방울 전주곡>에서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주변을 되돌아 보게끔 하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렇다면  진정 한국의 어긋난 경제이데올로기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는

누구일까요?  누구를 위해서 투쟁이 이루어져야 하는 걸까요?

투쟁만이 해결책을 안겨 줄 수 있을까요?..........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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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 질문 - 박선영

<빗방울 전주곡>에 대한 질문

 

20041181 연극학과 박선영

 

 

1. 왜 최헌규 감독은 영화제목을 <빗방울 전주곡>로 지었을까요? 최헌규 감독은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에서 영감을 얻었을까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과 최헌규 감독의 단편영화 <빗방울 전주곡>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2. 왜 정배(주인공)의 딸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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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감독/ 2003/ 29분

 

20041181 연극원 연극학과 박선영

 

 이 영화를 보기 전, 2001년 4월 10일에 있었던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먼저 보았다. 실상은 참으로 끔찍하고 참혹했다. 2001년 당시 나는 대우사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고3이었고 대학에 가는 일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너무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며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도 모른채 나는 따뜻한 방안에서 배불리 먹으며 느긋하게 공부를 하 고 있었다니. 그때는 몰라서 느끼지 못한 죄책감이 지금에서야 몰려온다. 역시나 사람은 아는 것이 병이다. 하지만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서 이리도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리도 모를 수 있었을까. 세상은 경주마처럼 혼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곳이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것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고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아무리 애써봐도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고 마는 것이 사회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노동자들은 대기업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아무 죄 없이 이유 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죄값을 치러야 할 사람과 죄값을 치르는 사람은 따로 존재하는 듯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꿈을 잃었으며 미래를 잃었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목숨을 끊었다.
 살고자, 살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마지막 외침은 무참히 휘둘러진 방망이 속에서 산산히 부tu졌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흘린 붉은 피가 그토록 붉어보일 수 없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대변하는 그들의 피는 싸늘하게 흘러 식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나 자신 또한 무기력해지는 느낌이었다.
 무기력해질대로 무기력해진 나는 <빗방울 전주곡>을 보면서 더 우울해졌다. 그들이 아파트에서 반지하 방으로 이사를 간 것처럼 나 역시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반지하 세계로 한순간에 추락한 느낌이었다. 저절로 우울해지는 곰팡내 나는 반지하의 세계.
 만약 영화를 보기 전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와 대우사태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고로 정리해고를 당한 한 가장이 그 후 택시기사를 하며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울한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다. 연관을 짓기에는 대우사태에 대한 언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영화를 봤기 때문에 쉽게 영화의 전사를 알 수 있었고,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감정몰입이 더욱 잘 되었다. 내 자신이 분노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몰입하고 느낀 감정은, 나의 분노에 답답함이 더해진 극도의 답답함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왜 그들은 더 나아질 수 없고 더 나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애쓰는 자와 애쓰지 않는 자, 삶을 관조하는 자와 살아가는 자, 과거를 바라보는 자와 미래를 바라보는 자. 그들이 합하여 만들어지는 결과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 세계에서도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길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 였다. 이 세계에서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끌어 내려 함께 나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낡은 포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포대가 새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가 낡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나약함, 희망 없음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딸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등록시켜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은 곧 죽어도 미래가 없어도 앞으로 나아가야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보다 딸 아이의 굶주려질 뻔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드는 쪽을 택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사라질뻔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딸을 보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내 자녀라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우리들의 자기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말이다.
 문뜩 며칠 전 보았던 <훌라걸스>가 생각이 났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어머니들이 하던 일을 물려받지 않고 새로이 건설될 하와이안 센터의 훌라댄서가 되겠다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그들의 어머니들과 어른들은 댄서가 되겠다는 자신들의 딸들을 비난하고 반대한다. 하지만 춤을 추며 행복해하는 딸들을 보면서 자신들은 힘들게 일하며 살아왔지만 그들은 이제 웃으면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자고 말한다. 고통스럽게 일하는 시대는 자신들로써 끝내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가려질뻔한 소녀들의 미래는 날개를 펴게 되고 그들은 희망을 현실로 이루게 된다.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서 역시 자신은 힘들게 일하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의 딸에게는 그 고통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딸만큼은 즐거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은, 끊임없이 내리는 어둠의 빗줄기 속에서 희망은 그 비를 멈출 수는 없지만 막아줄 우산이 되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느즈막한 저녁,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반지하 방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웃음 짓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빈약하지 않았을까. 그 어느 누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제목이 ‘빗방울 전주곡’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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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산책 <변방에서 중심으로> - 독립 영화
한국예술종합학교 20011327 조형예술과 김현지


1. 한국영화는 이제 진실한 민족민중적인 영화가 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 독립 영화인들은 민중들의 계급적 정서와 과학적 세계관을 풍부한 영화예술로 구현 하고자 한다.
2. 한국 영화 운동은 영화가 민중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직접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 대중적 보급의 길을 개척하는 임무도 부여받고 있다. 이에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상업적 배급망 외의 새로운 대중적 보급망을 꾸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3. 한국 영화운동의 주역은 제도권 내의 양심적, 진보적 영화인들과 비제도권 독립영화인들이다. 이에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제도권 내의 영화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악수를 청하고 같이 손잡고 싸워 가는데 앞장서고자 한다.
4. 한국영화는 민족적인 영화예술이 되어야한다. 이에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조직적인 창작과 보급 그리고 연구를 병행하여 참으로 우리 것인 영화미학과 창작 방법론을 세워나가고자한다.

1990년 1월 31일 ‘한국독립영화협의회’ 결성선언문의 요지이다. 이는 대중들의 영화 예술에 대한 요구와 역사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움직임, 그리고 그 당시 열악한 영화현실을 개척하기 위한 조직적인 실천이었다. 서울영상집단이 엮은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책에는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1996 독립영화의 혼용된 개념사용을 정리한 갈래는 첫째, 사회비판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진보적 영화운동’두 번째, 기존의 영화미학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소형, 단편영화’와 ‘실험영화’마지막 세 번째 계열은 충무로 내의 젊은 감독들의‘독립 프로덕션’작업을 이르는 것이다. 이 외에 내가 <변방에서 중심으로>영상을 보고 생각난 단어들은 자유, 투쟁, 쟁취, 독자적, 민중미술 등등이다. 자본으로부터, 제도권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영화 신념을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을 보며 그 시대에 독립 영화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푸른 영상의 김동원 감독은 “이젠 더 이상 과거의 언어로 얘기할 수 없다. 정치적인 탄압이 혹독했던 시기엔 어려운 제작여건 때문에 어설프게 만들어졌어도 관객들은 진지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새로움이 필요한때”라고 독립영화 작품의 새로운 도전을 강조했다. 근본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자본사회와 영상 환경의 변화로 제도권 영화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독립영화에게 오히려 호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탄압이 없어지는 지금 앞으로의 독립영화가 어떻게 정의가 되고 발전할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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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예술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20041181 연극학과 박선영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말.

세월이 흐를수록 시대는 변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카세트가 사라지고, 초소형 MP3가 등장했다. 롤러 스케이트는 인라인 스케이트가 되고, BOOK이 E-BOOK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게 예술도 당연히 진보하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예술은 진보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기술적인 측면은 발전했을지 모르나,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사상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 옛 것이니까 촌스러울 거라는, 후질 거라는, 유치할 거라는 식상한 편견을 가지고 우리나라 70-80년대, 90년대 단편 영화들을 감상했다. 하지만 영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아니 저 시절에도 저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저러한 실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저러한 은 말 그대로 저러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고, 그들의 친구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틀에 박히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일거라 생각되는 내 주변의 어른들이라는 말인데, 그들에게도 자유로운 영혼이 존재한, 자유롭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오늘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실험적이면서 자유롭고 독특한 표현과 이야기에 감탄의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영화들이 재밌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옛 영화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나에게 영화들은 신선함과 기발함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색동>(이 영화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의 스토리 구성이 매우 흥미로웠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진행되는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컷들의 빠른 변화와 오버랩되어 진행되는 장면들이 사이드 조명처럼 흥미롭고 재밌어 눈을 떼지 못했다. 또한 어색하지만 과감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시절을 방문하고 싶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개인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측면이 많았다는 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고발하고 있었다는 점이 나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들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리고 내가 감상하게 된 90년대 영화들이 특히나 그 시대의 암울하고 우울한 측면을 부각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내 마음 또한 우울해졌다. 그 시절은 꼭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 같았고, 모두가 힘들고 우울했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일말의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힘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무거운 돌들을 집어 든 느낌이다. 너무 가벼워서도 안 되겠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돌들을 드는 것은 힘에 벅찬 법이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해 무겁고 튼튼한 벽돌이 필요하지만 그들 사이에 가벼운 벽돌들도 가끔씩은 들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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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우선 이번 영화의 리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던 것인지 말씀드립니다. 독립영화의 정체성, 그들이 그토록 토론하고 쌍욕을 해가며 쟁취하고자하는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단순하게 영상의 동기부여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자기검열에 입각한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상원의 중견 교수님들과 유명 감독, 평론가들의 출연으로 독립영화에 대한 그들의 언급과 정의에 동조하면서도, 정작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저는, 앞선 세대의 진보적 행동에 대한 억압과 구속을 일종의 '문화적 저항'의 원천으로 규정하며, 그것이 문화적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의 정의 앞에 ‘반드시 현실과 투쟁할 것’이라는 전제를 달아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독립(단편)영화는 분명, 현실과의 투쟁에서 오는 정신-물리적 고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고, 그러한 영화의 제작과 상영과정을 지켜보며,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파고들어 그 평범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변모시키고, 그것을 영상으로 옮겨 담는 사람조차 영웅화가 된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영웅이 될 거라는 착각은,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를 ‘참여’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중심이 된다면 저는 그들의 투쟁을 축하하며 샴페인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기대를 해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차가운 사무실바닥에서 새우잠을 잘 때, 주점에서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며 ‘저항이나 자유’따위를 외칠 뿐이며, 같이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꾸미지도, 어디엔가 제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들이 현실과 계속해서 투쟁해주기를 바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영화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변방으로 내모는 행위는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어제의 저는 지친 그들에게 ‘변절’이나 ‘배신’ 혹은 ‘타락’등의 단어를 너무나 쉽게 붙였던 것 같습니다.

 변영주 감독의 말처럼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변방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아무도 그들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당하게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독립영화가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질러 고행의 길로 인도하더라도 그는 또 다른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영웅화되었던 출연자와 제작자와 감독과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관객들입니다. 세상이 독립영화를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변방으로 돌진합니다. 그들이 중심이 되는 순간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독립영화의 혁명이 성공한 날이며, 모든 나르시즘이 허물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한발 앞서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방을 만들어 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이유는 그곳에 결승선이 있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뒤쫓아 오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달리는 도중 결승선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을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들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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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단편영화’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어렵다’ 일수도 있고 ‘지루하다’일수도 있고, ‘강렬하다’ 일수도 있지만 단편영화는 분명 지루할 때가 많습니다. 단편영화가 만들어지는 환경(거의 대부분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만들지만)상 많은 돈을 들여 훌륭한 비쥬얼을 만들기 힘듭니다. 그리고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지는 강박관념들, 무엇인가를 성찰해야 하고 관조해야 하며 새로운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인해 영화는 매우 관념적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들이 조합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다’ 나 ‘어렵다’라는 반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단편영화에서 만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그 어떤 것이든 영화화 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꼭 일반적인 드라마형식의 내러티브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창조된 인물이 겪는 그 순간의 심리상태나 그 밖의 것들을 형상하는데 단편이 가지는 장점이 장편보다는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편으로 끌고 가기 부담스러운 것들, 혹은 그 상황을 다룰 때 단편은 ‘완결성’이라는 무기를 지닙니다. ‘영화화 하고자 하는 것’을 ‘열고’, ‘닫으면’서 그 순간 가장 잘 짜여진 ‘영화’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단편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단편은 장편의 반대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편과 장편은 반대가 아닌 별개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단편이 할 수 있는 것을 장편은 할 수 없고 장편이 할 수 있는 것을 단편은 하지 못합니다. 즉 ‘형태’의 차이이지 ‘영화’라는 점에선 동일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편영화는 ‘마이너’하고 장편영화는 ‘메이저’하다는 인식은 그동안 우리의 영화산업이 기형적인 방법으로 감독을 생산해 내었기 때문 일수도 있습니다. 즉 단편작품을 포트폴리오로 입봉한 감독들은 장편에 뛰어든 후, 단편에 손을 대는 경우도 드물고, 손을 대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서 마치 과거의 순수성을 추억하기 위한 소품정도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창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위해 선택하는 ‘선택지’가 되어야 하지 ‘영화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나 ‘메이저에 올라가기 전 마이너리그’라고 인식되어선 안 됩니다. 짧은 시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우리의 영화산업은 이것을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산업을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단편을 찍는다는 것은 ‘고급예술’을 하는 것도, ‘저항운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순수하게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낼 그릇으로 ‘단편영화’를 골랐을 뿐입니다. 따라서 단편영화가 ‘영화의 정수’이고 영화의 순수성을 지향한다는 주장에 쉽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단편영화를 하는 그 자체가 인디정신을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장편영화를 하는 감독들이 무조건적으로 상업성에 기댄 상품만 찍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장편과 단편은 그저 ‘영화’라는 자장 안에서 논의 되어야 합니다.

 단편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가질 기회가 우리에겐 너무나도 적습니다. 영화가 상영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단편영화들은 (우리의 현실에서)그 영화가 만들어진 학교 안에서, 혹은 단편영화를 (어떠한 이유에서건) 향유하고 공유하는 일부 그룹 안에서만 선을 보이고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수한 영화들이 소비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단편영화는 영화가 아닌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영화는 보아줄 사람들 앞에서 손을 들고 서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것들을 꺼내어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단편영화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적 방법의 접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알아주길 바라는 그 수많은 단편영화들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단편영화에 대하여 취해야할 첫 번째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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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20041181 연극원 연극학과 박선영

 

 독립영화란, 미국 영화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단편영화, 대기업의 자본과 유명 영화사에서 만들지 않은 영화 정도를 일컫는다고 네이버 지식인은 말하고 있다. 즉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같은 부류로 묶어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가끔씩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혼돈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독립영화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모든 것에서 독립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독립하여 자유롭게 만든 영화,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관객, 대중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을 너무 의식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떳떳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본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은 만든 이의 뚜렷한 생각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때론 과격하게, 그리고 분명한 색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의 잘못된 점, 어두운 이면들, 약한 자들의 이야기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사회의 감언이설과 타협하지 않고 제대로 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본 많은 독립영화들은 고뇌하고 있었고 고뇌하게 만들었다. 보고 나면 무거운 마음이 드는 그런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때론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고 공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나는 나를 자극시키고 사회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세상을 마냥 밝게만 바라보려 하는 나의 시선을 넓게 만들어주는 독립영화의 이러한 시선들을 훌륭하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만이 독립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아니라도 독립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독립적이고 무엇이 독립적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서 독립영화가 생겨나게 된 동기의 의미로서 독립영화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영화와 단편영화에서 오는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듯 하다.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번 <단편영화산책> 수업을 통해서 그것의 경계는 어디이며, 무엇일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혼자서 막연히 고민하던 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독립영화에 대한 원래 의미는 이미 변색되어 버렸기 때문에, 독립영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욱 맛있게 ‘독립영화’를 맛보고자 하는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함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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