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쇼킹 패밀리>에 대한 리뷰 - 김현선

'패밀리쇼킹함’, 그래서 ?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2006), 경순-


ㅜㄷ


<쇼킹 패밀리>는 수다스럽다. 수다(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고 가볍다. 또한 수다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만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쇼킹 패밀리>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쓸 데 있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쓸데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첨언하자면 <쇼킹 패밀리>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문제를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게’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가벼움은 ‘무거운 주제는 무겁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에 무게(‘가족’의 문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쇼킹 패밀리>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건드리기는 하였으나 고민하지 않으며 ‘그래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소리는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즉,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는 ‘입’들은 너무 많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쇼킹 패밀리>를 보는 일은 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수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외부와 내부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사운드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수다스러움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아줌마들의 노래방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혹은 감독 경순)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며, 이렇게 시작된 감독의 말소리는 영화의 내부에서 외부(내레이션)로 이어진다. 처음 장면에 등장하는 아줌마들은 가족 안에서 ‘패밀리’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금의 사회 현실을 보여주며, 이를 시작으로 영화는 다양한 방식(문자와 소리의 몽타주, 가훈의 의의, ‘패밀리’의 ‘쇼킹’함을 더하는 경순의 친구-엄마 때문에 버린 인간이며, 자기가 잘못하고도 여자가 모든 것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동시에 싫은 소리하는 것은 싫어하는, 공공캠페인 패러디)으로 사회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이 그녀는 이러한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에 있어도 여전히 혹은 여지없이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즉, 친구처럼 길러온 그녀의 딸 수림이 가족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려 하고 그녀 자신이 ‘쇼킹 패밀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음에도 그녀의 前史에 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2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이혼하여 싱글맘이 된 그녀는 영화 안에서 솔직한 그녀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그녀가 만들어내고 그 속에 들어갔던 ‘패밀리’의 ‘쇼킹함’에 대해서만은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은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만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쇼킹 패밀리>는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현재에 다시금 출몰하며 놀라운 자생력을 보이는 ‘가족’과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는 현재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녀의 과거들을 불러낸다. 즉 싱글맘이 되기 전에 바로 거쳤을 30대의 경은과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인 20대의 세영을 불러낸다. 물론 그녀들(경은과 세영)의 이야기는 그녀들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즉 경순의 과거라고도 볼 수 있는 경은과 세영의 삶은 각자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세영의 이야기를 통해 <쇼킹 패밀리>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시작한다.


<쇼킹 패밀리>는 이미지 또한 수다스럽다. 영화는 그 자신의 안과 밖(밖: 영화에 참여하는 스텝들의 회의, 안: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스텝들의 대화 혹은 인터뷰)을 오가며 ‘패밀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이와 동시에 그래픽 몽타주, 외부(그녀들이 아닌-가훈, 입양, 대학입시, 호주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에서의 장면들, 그녀가 찍은 사진 혹은 그녀들을 찍은 사진, 그녀와 그녀들의 춤, 세영의 집을 담는 왜곡된 화면 등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의 편집과 조합 또한 가벼움이라는 무게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쇼킹 패밀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하고, 이로 인해 영화는 경제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도 쉽게 만들어지고 한편에서는 고민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과잉을 만들어냈다. 즉, 디지털 영화들은 보다 더 일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상의 인상(印象) 혹은 단편적인 시간의 조각들을 펼쳐놓거나 모아놓는 데 그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쇼킹 패밀리>는 디지털 영화가 지니고 있는 한계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쇼킹 패밀리>를 통해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는 수다에 참여했던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웃는 사이 ‘패밀리’의 심각함과 시사성을 망각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것은 ‘패밀리’의 ‘쇼킹함’, 그래서?라는 질문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