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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 토론을 위한 테제 -

     

     

    들어가며

     

    “딱히 심상정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정의당이요? 딱히 지지하지 않아요. 뭐랄까, 투표라는 행위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선택하는 거잖아요. 일상적인 지지와는 다르죠. 그럼에도 심상정을 찍은 이유는, 촛불 정국 이후 마치 문재인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 경계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번 대선은 대중적 성취를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달랐잖아요. 만약 문재인의 당선으로만 수렴이 되면 과거 대선과는 큰 차이가 없어지는 거죠. 누가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정치세력이 지지 받는지도 중요하다고 봤어요. 진보정당이자 소수정당인 정의당이 존재를 좀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30대. 남) [워커스 31호])

     

    그렇다. 부르주아 선거는 정당(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지지와 참여가 아니라 제한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와 지배체제를 유지해주는 근간이다. 선거 메커니즘은 부르주아 정치와 적대적이어야 할 노동자 투쟁마저 포섭한 지 오래다. 대대적인 노동자 투쟁이 부르주아 선거 지형을 바꾸어 독자적 노동자 정치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투쟁’은 선거 결과로 수렴되어야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투쟁을 교란하고 후퇴시키고 있다.

     

    위의 면담자(interviewee)는 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세력의 성격을 계급적으로 판단한다. 정의당을 계급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자본의 진영에 포함된 부르주아 정치 세력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가 혼합한 개량주의 세력으로 규정한다. 대선이 끝나고 선거 결과를 분석하고 노동자계급의 의식 흐름을 판단해야 하는 시점이다. 굳이 정의당을 먼저 언급한 것은 선거 거부-기권을 택한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의 의식적 노동자와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이번 대선에서 차악인 정의당 후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심상정이 얻은 200만 표 중에 민주노총 조합원의 표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도 10%대의 득표를 한 것은 정의당과 민주노총 모두 서로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정의당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선택과는 별개로 자신의 계급적 성격에 맞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촛불 투쟁에 임했다.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다른 부르주아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득표게임에 뛰어들었다. 정권교체와 권력분점 사이에서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한편의 부르주아 정치 쇼를 흥행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양적으로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급적인 행동과 자기 권력을 위한 투쟁이 없었기에 이른바 촛불 혁명과 정권교체의 들러리를 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촛불 투쟁에서‘시민’이 되어 계급을 잊었고, 대선에서는 부르주아 정치세력의‘국민’이 되어 계급을 상실했다. 민주노총은 우여곡절 끝에 대선 방침으로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조합원들의 진보정치? 에 대한 지지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를 실현하거나 대변할 노동자 정치가 부재하자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정권교체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과 그 성과물인 조기 대선에서 노동자들에게‘계급’과 ‘권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계급성을 드러내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들에게는 국회를 포함한 부르주아 정치 공간뿐 아니라 촛불 광장(태극기 광장), 언론(여론), SNS, 모든 사적-공적 조직들(풀뿌리 조직 포함) 모든 곳이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이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은커녕 계급마저 잊은 채 수동적으로 촛불 집회에 수차례 또는 수십 차례 나가는 동안,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손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계급적’으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촛불 투쟁과 대선의 결과인 정권교체로 나타난 것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선거와 권력투쟁에서 ‘계급적’이라는 것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것을 반영한 정치가 적대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그 반대이다. 계급 간의 이해관계 대립과 적대적인 정치를 감추고 정당(정치세력) 간의 경쟁으로 돌리는 것이 ‘계급적’정치인 것이다. 그들은 소수의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벌개혁이나 노동 기본권 보장 등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지만, 자본가 계급에도 적대적인 정책은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없었던 홍준표와 한국당 세력은 반노동조합, 반공, 친자본 이미지를 부각시켰지만, 그것은 내부 결속을 위한 목적이었다. 실제 노동자들의 ‘계급적’ 행동을 억제시킨 것은 정권교체 세력이었다. 결국,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계급적’이지 못했던 민주노총과 노동자 정치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주었다. 선거 이후에도 노동자 운동의 전망은 일부 낙관론자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매우 어둡다고 본다.

     

    이른바 자본주의 체제 정상화? 인 ‘적폐청산’을 내걸고 ‘노동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이전 정권과 같이 ‘노동(운동) 적대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 속에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적폐청산에는 재벌개혁이 중요시되고 있지만,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개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보진영이 금기처럼 여겨 온 노동시장의 문제, 임금개혁의 문제 해결에 나서야한다."

    문재인 정부 대통령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2년 전 한 좌담회에서 강조했던 말이다. 옆에 있던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문제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셔야 한다."고 거들었다.1) (2017. 5. 26일자 기사, [내일신문]

     

    촛불 투쟁과 대선 기간 나타난 정권교체 환상은 단순히 반박근혜 정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적폐청산이라는 촛불 광장의 요구가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는 재벌개혁, 노동존중 등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비정규직 문제, 일자리 문제까지 파고들어 정권교체 열망으로 수렴된 것이다. 이렇듯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권교체 환상이 걷히지 않는 한 당분간 노동자 운동은 선거기간에 포섭된 것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정부의 품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것을 제어할 ‘계급’과 ‘권력투쟁’이 없었기에 전면적인 내부 투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혁명의 기억마저 거의 잊혀 진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선언적인 정권과의 대립각 주장이나 이미 정권에 포섭된 노동자 운동 배신세력에게 남 탓하듯 비난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낡은 운동은 이미 민낯을 드러내다 못해 태생적 본질마저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소수의 발본적, 혁명 운동 세력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계급 운동의 위기에 직면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혹독하고 길었던 반혁명의 암흑기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파시즘 아래에서도 소규모의 혁명가들은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으로 후퇴하지 않고 “미래는 코뮤니스트의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한 실천을 벌여나갔다. 그들에게는 혁명(전통)에 대한 ‘기억’과 투쟁과 실천에서의 ‘인내’와 자기조직화에 대한 ‘전망’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오늘날 ‘혁명의 가능성’과 무너진 ‘계급성의 복원’과 그것을 위해 우리가 ‘꾸준히 해나가야 할 실천’에 대한 토론을 위한 제안이다.

     

     

    1. 촛불 투쟁에서 대선까지의 노동자계급

     

    촛불 투쟁은 수많은 기록과 역사를 남기며 문재인 정권의 탄생과 함께 막을 내렸다. 촛불 투쟁이 이렇게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지면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위기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었다.

     

    연인원 1,700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가 다수는 조직적 참가자가 아닌 개별 단위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다. 촛불 집회는 ‘퇴진행동’이 주최하고 조직노동자(민주노총)가 일부 역할을 했지만, 수십만 명을 넘는 인원이 지속해서 참가한 것은 단체의 조직력보다 자발적인 참가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촛불 투쟁의 확산은 자본주의 위기 아래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사회와 일상에서의 기득권세력, 지배계급에 분노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표출할 ‘광장’이 필요했고, ‘촛불 집회’가 일부 실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직노동자들은 예상치 않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에 자극받고 고무되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투쟁에서 그래왔듯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 물결에 자신들이 가진 노동자 고유의 무기로 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형식적으로 대응했다.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계급적 투쟁’보다는 편하고 이익이 되는 ‘조직적 집회 참가자’의 길을 택했다. 조직노동자들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을 만나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재벌(대자본)에 맞선 직접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들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은 박근혜 정권의 반대편에서 정치 권력을 나누며 정파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던 국회를 압박해 탄핵소추를 이끌어냈다. 선출되지 않은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촛불 투쟁이 만든 박근혜 파면 정세는 선거법에 따라 대선으로 이어졌다. 촛불 투쟁의 성과도 정권교체 민심(?)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민심은 촛불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과 열망의 온전한 표현이 아니라 촛불 투쟁의 한계가 만들어 낸 불가피한 결과였다.

     

    박근혜 파면 이후 “탄핵은 끝이 아니라 촛불 혁명의 시작이어야 하고, 대통령 교체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촛불로 타올라야 한다.”며 투쟁을 지속하자고 했던 민주노총은 대선 시기 “세상을 바꾸는 대선, 노동존중 평등사회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민주노총과 산하 조직들은 대선 시기 대통령 후보와 그들의 정당에 ‘정책 협약’이라는 부탁 또는 압력을 통해 약속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들은 사회연대노동포럼과 같이 문재인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을 강하게 비난하면서도 부르주아 대선의 본질과 정권교체의 환상에 대해 정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선거로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어려워도 ‘선거가 아닌 투쟁으로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내자’고 호소하지 않았다.

    선거를 넘어 투쟁으로 정세를 돌파하자고 고공농성에 돌입한 것은 가장 어렵고 끈질기게 싸워 온 소수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계속>

     

    <주>

     

    1) 기사원문 : 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238653

     

    *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을 위한 1차 토론회>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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