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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1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2017년 가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은 우리는 ‘10월 혁명’이 준 자유와 평등의 실패한 '약속'을 달성시키기 위해 다시 혁명을 꿈꾸는 노동계급과 붉은 계절을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소수가 모였다. 지난겨울 촛불은 거대하게 타올랐지만, 어디에도 혁명의 불씨는 보이지 않았다.

1919년 3월 2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1차 회의 개회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체제는 많은 나라에서 일상어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노동자 투쟁에서 아주 흔한 형태”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노동자들에게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는 낯선 용어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접한 세대에게는 전체주의(스탈린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용어로 잘못 각인되어 있다. 1917년~23년까지의 세대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소비에트가 지금 세대에게는 아주 낯설거나 본래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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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지워진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은 노동계급에 세계혁명의 길고 험난한 과정을 깨우치게 했다. 반면에 지배계급에는 혁명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했고, 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했다. 1917~1921년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패배한 이후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학살하며 직접 공격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파시즘과 반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계급투쟁의 암흑기1)이다.

이후 1945~1989년 미-소 제국주의 블록의 냉전 시대에는 서로 간의 대립과 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왜곡하고 음해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주의 국가를 10월 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왜곡’했고, 서구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면서 제국주의 간 대립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소련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심지어는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로 혁명운동은 강력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지배계급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 노동계급 내부의 억제력으로 혁명의 불씨는 물론 일상적인 계급투쟁까지 잠재우고 있다.

 

‘공산주의(코뮤니즘)의 붕괴’에서 포퓰리즘의 등장까지 지난 수십 년간,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좋게 봐도 세상과 관계없는 괴짜, 멸종 위기에 처한 희소 동물로 비치고 있다. 현재 노동계급의 다수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대해 대부분 잊었고, 혁명 전통의 일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망각 과정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 이전보다 생산 수단에서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더욱 ‘새로운 것’에 의존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무엇이 진정한 역사적 경험인가에 대한 왜곡은 노동계급에 기억상실을 유발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의존은 소비뿐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의 기억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교훈까지 잊게 하는 데 유용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은 미래의 투쟁에 적용할 진정한 교훈까지 버리면서 자신의 혁명적 전통을 망각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전히 인류의 미래와 함께하는 계급이며, 과거 투쟁에서 교훈을 끌어내 공산주의(코뮤니즘)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가진 유일한 계급이다. 따라서 역사적 과거에 대한 교훈을 찾고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지워진 혁명의 기억을 되살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현재 위기를 돌파해 낼 첫걸음이다.

 

 

문재인 정부와 정권교체 환상의 대가

 

지배계급은 자신에 불리한 혁명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거짓 환상을 퍼트린다. 특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에는 ‘(시민)혁명’이라는 단어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독재)에 대한 승리, 계급 간 분열을 넘어선 부르주아 국가-시민사회의 승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연인원 1,70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혁명과는 거리가 먼 촛불투쟁을 현 정부에서 먼저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상과 일터 어디에서도 혁명을 하지 않았는데, 촛불혁명의 수혜자들은 가만히 새 정부의 적폐청산 쇼를 지켜보며 기다리라고 강요한다.

한편 촛불투쟁 내내 노동자의 요구는 ‘정권교체’ 환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촛불투쟁의 근본 원인인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분출하지 못했다. 촛불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저항의 수준은 낮아지고 분출의 힘은 통제당했다. 촛불투쟁 이후에도 주류 노동자 운동은 근본적인 반성과 쇄신보다는 ‘정권교체-적폐청산’ 환상에 기대어 ‘노조하기 좋은 나라’라는 ‘국가적’ 캠페인에 나선다. 촛불투쟁 기간 작지만 정권교체 환상을 지속해서 비판한 세력이 있었고, 촛불투쟁과는 다르게 소수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계급의 현안으로 공동투쟁을 벌여나갔지만, 노동자운동 내부의 거대한 대중추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래와 같은 현실은 거짓 환상을 막지 못한 대가를 치르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 정권이 바뀌었어도 노동자 현실은 그대로이고, '노동존중'을 내건 문재인 정부에서도 농성장 폭력 철거, 폭력 진압, 불법연행 등 노동자 민중 탄압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18일 청와대 100m 앞에서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이 속한 투쟁사업장공동투쟁위원회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여전히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국 곳곳 노동자들은 다시 고공농성에 오르고 있다’며 ‘정치 권력이 바뀌었어도 노동자 현실은 그대로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검찰,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를 규탄하기 위해 결의대회를 열었다’는 취지를 밝혔다.

공동투쟁위원회 김혜진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노동존중이 실현되려면 박근혜 정부 때 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이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며 “그런데 문재인 정부 경찰은 지난 8월 농성장을 폭력 철거하고, 2명을 불법 연행했다. 기자회견도 집회라며 출석요구서를 남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참세상, 11.18>

“국방부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기지에 공사 장비를 반입했다. 경찰은 공사 장비 반입을 반대하던 주민과 연대단체 회원을 강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주민 20여 명이 다치고, 1명이 연행됐다.” <뉴스민, 11.21>

 

- 촛불투쟁의 성과물을 전취한 문재인 정부에 입성한 노동운동 출신 명망가의 '사회적 대화' 참여 주장 : '노조'를 국가기구로 통합시키겠다는 의도와 이를 벗어난 ‘계급적’ 투쟁은 고립될 것이라는 협박

 

“지난 10일 정부서울청사 노사정위원장실에서 만난 문성현은 ‘산적한 노동현안을 풀기 위해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생각이 달라도 함께 논의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노동에서도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최저임금 문제는 사용자나 정부만 바라볼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연대정신을 발휘해 풀어야 한다.’며 SK이노베이션 노조가 기본급 일부를 갹출해 협력업체 지원 등 상생기금에 출연하기로 한 사례에 주목했다.

노동을 존중하는 대통령이 나왔으니 내 모든 걸 던져 풀어보고 싶다. 노조가 광장으로 나와 합리적 토론을 거쳐 국민들이 바라는 것을 하나라도 풀어나가 봤으면 한다.” <경향신문, 11.17>

 

민주노총 선거에서 ‘사회적 대화’가 쟁점이 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선거 공약과는 별개로 사회적 합의주의로 이어지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거부 흐름’이 ‘정권교체-적폐청산-노동존중/노조하기 좋은 나라’ 환상에 가려 사라지고 있는 현실.

 

“민주노총 2기 임원직선제가 한창이다.

선거 쟁점과 관련해 ‘사회적 대화’가 부상했다. 지난 1기 직선제에서 한상균 후보는 ‘민주노총을 투쟁사령부 체계로 재정비하고 즉각적인 총파업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1기 직선제 쟁점은 박근혜 정부에 맞선 ‘총파업’으로 모아졌다. 반면 2기 직선제에 나선 4개 후보조는 출마의 변으로 ‘사회적 대화’를 강조해 1기 직선제의 쟁점과 차별화했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를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노총 선거 쟁점도 이를 반영한 셈이다.“ <매일노동뉴스, 11.17>

 

이러한 현실은 100년도 아닌 불과 10~20년 전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교훈을 잊은 노동자 운동이 같은 성격의 자본가 정부에 전면적으로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며, 앞으로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당시보다 훨씬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혁명적 소수의 문제

 

올해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자 세계혁명의 미래’를 꿈꾸게 했던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의 계급투쟁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혁명적 상황과 무관한 지금의 노동자투쟁은 러시아혁명의 엄청난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욱이 지금은 러시아혁명과 같이 혁명적 투쟁이 분출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그런 대중행동을 예측할 수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정세에서 일관된 목표를 갖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혁명적 소수’의 문제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1905년 자발적으로 출현한 소비에트를 촉진시켰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었고, 1917년 소비에트를 다시 등장하게 만든 것도,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혁명적이고 계급적인 소수였기 때문이다.

 

혁명적 소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최종목표와 혁명의 전망을 갖게 된 인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나오고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때문에 ‘계급의 일부’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투쟁에서 계급적 소수파도 운동의 최종목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계급투쟁에 원칙적이며 가장 활성화된 부분을 차지한다. 계급투쟁의 확산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바로 이들이 얼마나 계급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승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이들이 대중행동을 대신할 수 없고, 정세와 무관하게 대중의식을 고양할 수는 없다. 따라서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소수가 계급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투쟁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투쟁을 자극하고 전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오랜만에 분출된 투쟁은 우리 희망과는 다르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좌절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수파 운동의 존재이유며, 단순히 소수라서 항상 다수를 추종하고 계급투쟁의 최종 승리보다 다수파가 되기 위한 운동은 혁명적 소수의 운동이 아니다.2)

지금의 암울한 현실에서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끌어내면서 혁명적 소수의 복원에 중점을 두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주>

 

1)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1930년대는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이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는 혁명운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2) "계급에 대한 당의 궁극적 목표는 계급을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이 다수가 되어, 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시기(계급의식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하고 균질화되어 있지 못했을 때) 당의 역할은, 이러한 상태의 계급안에서 다수를 획득하거나 국면적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가 되더라도 혁명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계급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당장의 인기와 계급 대중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판단하여 “미래에 계급이 얼마나 혁명적으로 변화되었나”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것도 혁명적 정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일상시기 또는 침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다수의 계급의식과 타협하는 영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수에 대한 영향력을 잃더라도, 혼란에 대해 단호하게 단절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노동계급에 진정으로 공헌하는 길이다. 혁명조직이 노동계급에 근거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끈기 있는 인내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모든 활동의 방향이 진정으로 노동계급을 변화시키고,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고, 코뮤니스트 혁명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는 것에 있다." <<사노위 실패의 교훈과 혁명당 건설 투쟁의 연속성>>, 이형로, (마르크스21 제11호, 2011.9)

 

 

2017.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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