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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10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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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10/10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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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3/10/07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책 소개] 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국제공산주의흐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했기 때문에  「유니우스 팸플릿」이라고도 불리게 된 이 글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쓰인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세계대전이 일대 전환점을 나타내게 된, 자본주의의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세계대전의 시대 –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1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 같은 규모의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더불어 전대미문의 파괴기계가 작동되어 무수한 사람이 살육 당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차 대전 직후, 스페인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다시 2천만 명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사람들의 목숨을 더 앗아갔다.


1914년 8월 그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과 국제주의에 대한 완전한 배신에 직면하여, 여전히 국제주의자로 남은 혁명가들은 신속히 스위스의 찜머발트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원인과 귀결에 대한 규명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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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이글, “사회민주당의 위기(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그리고 그녀가 또한 작성한 “국제 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원칙들”은 인류에게 있어서 새로운 그 상황을 파악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제시하려는 혁명가들의 그러한 국제적인 노력의 일부분이었다.


그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 앞에서 그녀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오류로부터 배우는 것, 즉 철저한 자기비판이었다. 그리고 파악한다, 모든 것을 뿌리깊이 분석한다는 그 원칙을 통해서 그녀는 이 재앙의 엄청난 규모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대전- 이것은 야만으로의 퇴행이다. 제국주의의 승리는 문화의 절멸을 초래한다. 하나의 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은 간헐적으로, 하지만 이제 시작된 세계대전들의 시대가 계속된다면 결정적으로. 우리는 지금, 한 세대 이전, 즉 40년 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승리와 문화의 몰락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것의 수단인 전쟁에 대항한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행동의 승리냐는 선택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민족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그녀는 여러 장에 걸쳐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어떻게 자본주의가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늘 새로운 지대를 영입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서 “뒤늦게 도착한 자들”이 “먼저 도착한 자들”의 정복물들을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빼앗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는지를 묘사한다. 제국주의의 출현에 관한 이장들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전쟁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때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어느 한 나라 또는 몇몇 나라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국내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국제적인 현상으로서 오직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그 어떤 개별 국가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국가의 방어전쟁도 더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민족국가방어전쟁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지지도 일관되게 거부했던 혁명가들의 진영에 속한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때 민족자결이라는 민족의 이해와 국제연대라는 계급이해 사이의 충돌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룩셈부르크는 “국제사회주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오직 국제사회주의만이 그러한 민족국가를 창조할 수 있고 민족들의 그러한 자결권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전쟁이 채 몇 달도 진행되지 않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한목소리로 독일의 민족방어전쟁이라 주장한 그 전쟁의 새로운 성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전쟁은 “전체로 놓고 볼 때, 이미 완전히 꽃핀 자본주의가 세계지배를 놓고 벌이는,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세계지대의 마지막 나머지의 착취를 놓고 벌이는 경쟁투쟁”임을.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로 그 이전의 어떤 전쟁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현상, 즉 “전쟁의 지속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관련되고 점점 더 전쟁기간이 길어져서 군사적 승패 그 이전에 모든 관련국의 완전한 경제적 황폐화,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비 관련국들의 점점 더 심해지는 경제적 폐허, 그에 뒤이어 모든 나라에서 열띤 군비경쟁, 군사주의와 반동세력의 득세,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세계대전 발발이 초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끌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전국의 그 어느 하나의 승패를 무비판적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종결을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법칙성과 모순들로부터 생겨나는 객관적 역사적 조건들과 질적으로 새로운 발전단계를 다루는 동시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 발발과 관련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는 상황분석 끝에, 사회민주당의 배반이 없었다면, 노동조합들이 자본가들과 맺은 작업장에서의 당쟁중지(파업금지)가 없었다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쟁중지와 계엄 상태를 받아들이고 조국의 방어를 호소하고, 그렇게 해서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을 자행했던 사회민주당과는 그녀는 사회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세계대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 종결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전쟁을 없앨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제국주의는 인류에게 있어서 그 모든 재앙적인 모습에도 현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계급에는 역사적 필요성이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발전 가능성에 대한 조금의 환상과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하고 계속 학살을 자행할 수 있게 되면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의 생존 가능성도 의문시될 수 있는 위험성을 전쟁 발발 후 얼마지 않아 즉시 인식했다.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앞에 서 있다는 점을.

 

혁명가들의 임무와 유니우스 팸플릿

 

1차 대전발발 당시 혁명가들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1914년 8월 그 전쟁을 지지했을 때, 그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이 사실상 붕괴하였을 때 처음으로 국제주의에 대한 그 정도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그네히트 등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결연한 국제주의자들은 당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았던 배신적인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그래서 당내에서 국제주의 역량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막 창립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 유니우스 팜플릿을 몇 가지 수정을 거쳐 그 지침으로서 받아들였다.


그 속에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우선순위들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10.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사회주의의 주요과제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살아있는 혁명 권력으로 모아내고, 이를 이해관계와 과제에서 통일된 견해를 가지며 평화 시에도 전쟁 시에도 통일된 전술 및 정치 행동능력을 갖는 하나의 강력한 국제조직을 통해서 정치생활의 결정적 요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로부터 소명 받은 역할이다.”    

   

“12. 선도적 국가들의 사회주의당들의 공식 대표들이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배반한 점을 놓고 볼 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로부터 부르주아-제국주의 정치로 전향한 것을 놓고 볼 때,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이끌고 한데 모아내는 일을 떠맡을 새로운 노동자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의 이해에 역사적 이론적 틀을 제공함과 동시에 혁명가들의 활동을 위한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이 저작의 주요 축들, 즉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몰락상황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양자택일, 노동자계급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 이 모두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참조점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초에서 그녀 자신이 전쟁발발 직전 썼던 다른 저작, 자본축적론을 그 토대로 삼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을 묘사하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발전지점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간은 전쟁 전 그녀의 책 “자본축적론”의 출간이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일련의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항의를 받게 된다. 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론, 즉,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모든 국가의 악성종양으로 되어버렸고 그렇게 해서 “민족자결주의”를 향한 요구의 기초가 사라져버렸다는 결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진행 중이던 때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이점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불붙었는데, 여기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때, 그 혁명가들은 공동의 국제주의적 입장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망을 공동으로 옹호하면서 조직적으로 그 당시 가능한 한 국제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었고, 다른 그룹들의 주저함에 대한 그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이라는 전망을 추구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류에 대한 이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한때 선도적 노동자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한 배신에 직면하여 상황을 그 뿌리까지 예리하게 분석하고 또 그러한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그녀의 능력을 통해서 혁명적 정신의 한 예를 제공했다. 이 정신은 불굴의 투쟁력, 결연함 그리고 광범위한 시각의 이론적-정치적 분석능력을 특징으로 했다.


세계대전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혁명가는 전대미문의 규모의 이러한 야만 그리고 선도적인 노동자당의 배신이 발생함으로 인해 처음에 진정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전쟁기간 동안 갇혀 있거나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동안 대부분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인류에게 있어서 그러한 재앙과 사회민주당의 배신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대응은 학살의 한복판에서 공포에 대항해 그리고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그녀의 국제주의적 활동을 막으려는 시도에 대항해 그 무엇보다도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문전기 저자 네틀이 쓴 내용에 따르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잠깐의 “자유” 이후 1916년 7월 다시 갇혀있을 때 전쟁기간 동안 그녀 자신의 문학적 계획을 다음과 같이 윤곽 지었다: “1. 자본축적론이라는 제목으로 경제학에 관한 완전한 글 – 원래의 저작과 부록,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반비판-으로 구성.” 그리고 2. “국민경제학 입문”(정치경제학에 대한 개요)이라는 집합적 제목으로 전적으로 대중적 일련의 에세이들. 그리고 3. “나는 코로렌코가 쓴 러시아 책,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다” (감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J. 디에츠에게 쓴 1916년 7월 28일자 편지에서).

 

그녀는 비록 감옥에 감금된 상태로 당연히 고통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수감기간 동안 쓴 글과 편지들은 매우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감옥 속에서 그녀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들의 다양함, 감옥 속에서 그녀가 작업했던 책 3권(저서 2권과 번역서 1권), 예술과 문학에 관한 수많은 편지는 불굴의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읽고 때로는 쓰기만 해요.”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제트킨에게 쓴 1916년 7월 1일자 편지)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을 앞에 놓고,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결연한 투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절친한 사람들을 잃은 후에도 스스로의 힘을 추스리고 기상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론적인 노력들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능력(그림을 그리고 식물학에 열광함)과 특히 외부로부터의 큰 지원망을 통해서 힘을 얻었다. 부분적으로 사식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았을 뿐만 아니라(위에 문제가 있어서 특별한 식이요법이 필요했음), 그녀의 글들은 항상 다시(교도관들의 묵인하에) 감옥으로부터 밖으로 유출될 수 있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녀는 밖의 많은 동지들 및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며 수감상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지원했다. 그 어떤 두꺼운 벽으로 둘러 쌓인 감방도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었고, 개별적으로는 자신의 동지들을 그리고 전체로서 계급을 그녀가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부를 향한 그녀의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출옥하던 날은 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감옥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를 집까지 동행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발전, 특히 아시아에서의 발전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행한 분석을 확인시켜 준다. 이 저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그녀의 경고, 즉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전쟁이 전개하는 파괴기계와 잔혹화, 그리고 이는 다시 노동자계급을 물리적으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의 정치적 기상적인 약화를 야기하게 된다는 점까지.


그녀는 시계의 째깍거림을 느꼈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될 것임을, 자본주의체계가 길게 생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인류에게, 지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에게 그만큼 더 커다란 위험임을 느꼈다.          
 
제국주의 역사속의 한국

 

1차 세계대전동안 아시아대륙은 전반적으로 전투행위의 영향권에 있지 않았던 반면, 그 직후에는 군사주의 암종양이 아시아에서도 자라났다.


이 현상은 먼저 중국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충분한 통일을 이뤄낼 수 없었고 무수한 군웅의 충돌로 그 나라는 항상 다시 황폐해졌다. 1930년대에 이미 일본과 중국 사이의 전쟁으로, 그런 다음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극동은 유럽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전쟁무대가 되었다. 전쟁결과 중공과 타이완으로 나뉘게 된 중국의 분할과 더불어 새롭고 지속적인 충돌 중심지가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전쟁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일련의 군사적 정복을 통해 충족시키려 시도했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무수한 화염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은 야만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의 원자탄투하가 새로이 출현한 경쟁자 러시아가 일본에 관여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양대 세계대전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의 무대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주로 원자재와 폭탄 받이로서 인력자원을 주로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면, 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새로이 출현한,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중국 및 러시아 사이에 최초의 거대한 힘의“과시”에서 그 중심에 서있게 된다. 그 전쟁의 강도와 규모 및 지속기간, 서울과 평양이 거의 초토화되어버릴 만큼 엄청나게 심한 파괴 이 모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를 잘 보여주었다. 한 동안 미국은 한국이 러시아(소련)-중국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정리된 지 반백 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북한 사이의 충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군무장된 지역들에 속한다.


이제 동서블록들의 붕괴 이래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졌다. 새로이 부상하려는 중국, 그 숙적인 일본과 약화되어가는 미국 모두는 이 지역에서 특히 남북한에 대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망들을 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긴장의 첨예화가 여기서도 놓여있다.


동시에, 신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연결점과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려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광적 노력들은 전대미문의 환경파괴를 초래했고 장기적으로는 이일대의 삶의 토대들을 위협하고 있다. 생산력의 향상, 백 년 전만 해도 경제적으로 난쟁이에 불과했던 새로운 경제적 경쟁자들의 출현이 평화로운 발전으로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 그리고 결국 제국주의적 긴장을 더 불붙이게 됨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묘사했던 이론적-정치적 틀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이 책이 독일어로 처음 출판된 지 거의 100년이 흘렀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과 더불어, 한국의 독자들이 노동자운동의 세기적 저작들인 「자본축적론」과 「유니우스 팸플릿」 책을 곧 접하게 된다. 이 저작들은 또한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 2 및 제 3인터내셔널 내 좌파적 흐름의 전통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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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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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코르쉬는 그람시, 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 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 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공산당 안에서 「공산당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 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공산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자리에서 코르쉬를 울트라 좌파 (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 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 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공산주의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공산주의자, 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 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 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 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즉 실제 혁명운동에서주어 진다. 예를 들어, 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 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 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적으로 정립되며, 부르주아 사회 제도, 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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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뮌과 러시아 소비에트, 독일 노동자 평의회에서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코르쉬는 파리코뮌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한다. 파리코뮌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인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행동(Die Aktion」에 실렸다.

 

 *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옮긴이|남궁 원

 

 

 
자본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 의제를 제기하는 역사적인 현 시기에, 계급의식적인 모든 노동자는 혁명적 코뮌에 관하여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더구나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따라서 자기 의식적인(self-conscious) 프롤레타리아트 부분은 혁명적 코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propaganda)이 이루어진지 반세기만에, 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 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schools)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안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 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뮌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 때, 다시 한 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깜짝 놀란 속물들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20년도 더 지난 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 주요부에서 파리코뮌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월, 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 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 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뮌”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혁명적인 모든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 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 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와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이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 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 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 또는 1920년 카프(Kapp)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 또는 1923년 루르(Ruhr)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Cunow) 파업 과정에서, 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의 패배의 결과로 현재, 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낡은 신념, 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샤이데만과 뮐러, 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기구의 최고 정점에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 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 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 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 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 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의 발전형식에서, 발전하는 의식이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 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뮌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뮌의 가담자들(communards)이다. 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 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 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뮌을 달성해냈으며, 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러나 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뮌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코뮌”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 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 동시에 그는 “코뮌”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뮌”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뮌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코뮌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 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뮌”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 코뮌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즉,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이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서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뮌”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 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발전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 바, ―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뮌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 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 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시스트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뮌을 비교함으로써, 부르주아 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봉건제와 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 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 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 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 단계 역시 봉건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 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 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로 막 전환했던 1840년대 초기 맑스의 이 이론적 설명은, 몇 년 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 및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되었고, 또 20년 후에는 저 유명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대회 제네바 회의의 결의에서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주장되었다. 즉 노동조합은 지금까지의 지배적 발전 과정에서 이미 “마치 중세의 자치체나 마을이 부르주아지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고 논증한 것이다. 이는 비록 노동조합 스스로는 자본의 과도한 요구에 맞서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방어하는 하루하루의 당면과제에 파묻힌 나머지 이를 넘어서는 자신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앞으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전체를 조직하는 그러한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 코뮌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 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했다. 맑스가 이 새로운 코뮌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은, ―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뮌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 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뮌 및 코뮌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뮌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 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코뮌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 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뮌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 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 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 적어도 파리코뮌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년~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도, 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 이제 파리코뮌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 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 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왜 하필 특히 “코뮌”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 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 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 번 매우 상세하게 코뮌의 특징을 서술했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화된 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 정확히 “코뮌”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 사실상 파리코뮌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 있어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뮌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 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Michael Bakunin)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 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뮌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뮌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 즉, 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뮌 및 코뮌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Cf. Brupbacher: Marx and Bakunin, pp.114-115.)

1871년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 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에서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 파리코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 즉 파리코뮌과 프랑스 모든 코뮌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 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 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 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 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모두, 바로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 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 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제1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 그는 혁명적 파리코뮌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적인 한 순간 ― 승리한 반동세력에 맞선 코뮌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내려 간, <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파리코뮌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 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뮌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 그 이유는 더 이상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뮌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뮌을 추가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와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 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1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뮌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뮌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 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 파리코뮌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 만일 맑스가 파리코뮌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뮌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뮌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코뮌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코뮌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 코뮌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뮌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며,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 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 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뮌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뮌의 연방적이고 반(反)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 파리코뮌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코뮌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뮌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 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 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뮌”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뮌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들이 만약 어떤 “코뮌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완전히 틀렸다. 최종적으로 “코뮌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 시킨다”는 이론, 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 이상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 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을,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 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뮌” 국가도,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 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이며, 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공산당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장치를 “장악”해내든, 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 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 혁명적 코뮌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 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 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옮긴이|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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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  정현철

 

 


1. 노동조합의 한계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을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한편으론 계급의 조직으로 발전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론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조건에 대한 협상자이자, 노동과 자본의 중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계급의 연대와 결합의 중심이 되었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며,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민주의 정당들과 함께 제국주의적 학살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노동조합이 협력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반(反)계급적 역할이 처음 드러났다.1)

 

또한, 전쟁 이후의 혁명 물결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들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전쟁을 지지했다. 그 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서도 생존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을 위해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의 학교’ ‘사회주의 훈련소’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극소수의 정파활동가나 초보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공급받을 수는 있겠으나,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과 대중이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조직과 노조운동의 잘못된 결합, 즉 정치조직의 노조운동 지도-피지도 관계에서 나타난 대리주의 경향은 계급행동의 수동성과 상층부의 관료주의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조직 전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축소시켜왔다.2)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상대로 공동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의미가 있다. 헌법의 노동 3권과 관련한 하위법들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이 체제 내화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간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 지역일반 노동조합운동, 산업별 노동조합건설 등-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 날개 전략 속에서 진보정당의 몰락과 함께 내셔널센터(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로서의 위상마저 무너져 버렸다. 최근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둘러싼 희대의 촌극은 민주노총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 해고자들이 이끌고 있다. 재능교육,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등 이른바 장기투쟁사업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역할과 권위의 상실은 내부 자정능력도 상실시켰다. 최근 10여 년간 민주노총 내부의 무수한 조직 갈등에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한계는 말하지 않고 ‘개량주의’나 ‘관료주의’의 문제로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것은 대개 노동조합의 ‘급진화’-좌익리더십 선출, 급진적인 요구안, 많은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촉구-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핵심은 기본적인 노동조합의 형태를 방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재편, 강화, 혁신’ 등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전체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의 밖에 존재한다. 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며 계급성을 고양시키는 기구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2.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조합운동의 개조나 발전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으며, 좌익적(전투적) 노동조합이나 평조합원 운동이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투쟁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적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평의회, 즉 노동자 총회에 의해서 통제당하는 대표들의 회의가 그것이었다.

 

소비에트나 평의회는 준 상설적인 총회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일반화된 계급투쟁에 의존한다. 계급이 모든 공장에서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장소에 노동자들의 총회가 없다면, 노동자평의회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이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을 이어나갈 때에만 상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 자체로 혁명적 시기를 뜻한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특유의 기구이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일상시기이거나 계급의식의 고양기가 아닐 때 어떻게 그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난 50여 년 동안 진행된 수천 번의 비공인(와일드캣) 파업3) 의 경험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노동조합을 넘어선 파업은 특히 매우 단순한 조직 형태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총회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조직적 기초가 평의회의 형태로 이러한 파업 속에서 발견된다. 형식과 내용은 결합되어 있다. 그들의 형식이나 조직은 어떤 태동기에 그 형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혁명 기관의 조직 형태인 노동자평의회이다.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 의해 선임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된 각종 평의회에 의해 협력하고 확장되면서, 이러한 투쟁들은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부르주아 국가와의 정면대치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의 확대와 급진화를 통해서만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국가에 대항한 방어적 투쟁에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공세적 투쟁으로 이행할 수 있다. 대중 파업, 급진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자기 조직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자신을 노동조합의 한계와 영역에서 넘어설 때 노동자 투쟁은 확장되고 막혀있는 모든 곳을 열어놓을 것이다.


 

3. 평의회의 특징과 직접민주주의

 

평의회는 아래와 같이 공통의 특성이 있다.
           
첫째, 평범한 노동자, 농민과 소시민, 군인, 저임금 노동자 포괄적으로 보면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비중을 가지고 평의회의 주체로 활동했다. 이러한 계급 또는 계층은 사회적, 경제적(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오는 임금노동자), 정치적(법에 따른 선거권 제한)으로 권리를 억압받았었고, 박탈당하였으며, 최소한 어떤 특정한 계급에 종속되어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위치에 있었다.

 

둘째, 평의회운동의 정치적 조직형태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영역이거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법률적 조직과 제도들에 대항하면서,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 조직형태를 지향했다. 이러한 정치적 조직을 통하여 평의회는 지금까지 박해받던 계급이 직접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이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평의회의 첫 번째 조직원칙은 평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자들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항시적으로 고용하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거나 생산수단을 임대한 모든 사람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셋째, 평의회 직접민주주의는 다음의 실천과 제도들이 특징이다.

1) 모든 지도적 위치는 선거를 통하여 결정된다.
2) 선거권자는 통일된 선거단위에서 행동하며, 자신들이 속한 기본단위(작업장, 분과, 위원회, 부대)와 대중집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형성한다. 
3) 선거권자는 필요한 결정을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논의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들이 뽑은 선출자에게 되도록 적은 사안에 대한 결정권한을 위임한다.
4) 당선된 선출자는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선거권자의 위임에 통제 받는다.
5) 당선된 선출자들은 선거권자의 지속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해명해야 하며, 과오가 있을 때 언제든지 소환되거나 대표성이 상실된다.
6)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한 같아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원리가 확산되어 일반화되면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가’ 동일화되는, 즉 ‘대중의 직접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평의회가 지향한 직접 민주주의의 골격을 이룬다.

 

평의회의 특징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가져야 할 무기는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직접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모임 참가자들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행동에 참가하는 그룹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된 평의회 형태를 보일 때에만 가능하며, 평의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고유의 단결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4)
     

 

4. 새로운 노동자운동에 대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계급의 기본생활을 방어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적 분리(분업)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5) 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제도권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가의 수단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들은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6)

 

그것은 비공인파업, 점거운동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직접행동네트워크 등이 투쟁의 내용과 일치되는 조직형식이다. 하지만 최근의 점거운동은 국제적으로 활성화되었지만, 대중총회 형식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내용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 자본주의 개조 주장에 머물렀다. 지나친 정치조직의 지도의지, 느슨한 시민운동과의 결합이 운동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프롤레타리아(프레카리아트) 자발적 행동과 의식적 투쟁이 지역평의회에서 만나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평의회운동은 현실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노동자 대중의 직접행동과 비공인파업 투쟁 형태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투쟁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평의회적 조직인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통해 계급 안으로 확산해나갈 수 있다. 또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생존권 방어에 내몰린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빈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소수자들이 거리투쟁, 광장점거를 통해 투쟁의 주체가 되는 대중총회를 개최하고, 지역에서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지역(투쟁)평의회 건설을 통해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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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평의회운동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 새로운 계급주체들이 작업장, 업종, 고용 여부, 성별, 조합원, 비조합원 장벽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광장점거와 파업투쟁을 하나로 묶어낼 것7)이며,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선 전 계급적 투쟁전선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조직은 노동조합 역할에 개입하거나 경제투쟁을 배후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에 나서는 것을 조력, 촉진하고, 대중총회, 파업위원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계급의식을 혁명의식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토론문화, 토론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상시기부터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평의회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본에 의하여 분열 통치되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주체적 자각’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을 열망하는 ‘계급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직형태가 ‘평의회’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주체들8)이 평의회운동, 코뮤니스트 정치와 만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중투쟁의 분출과 함께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주체,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모든 조직 형식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5. 평의회 운동의 지평 확대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

 

앞으로의 평의회운동은 이제 노동자권력을 지향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 계급의식의 발전 기관으로 지평을 확대하여야 한다.

 

첫째, 새로운 주체형성과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은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지역적 연대투쟁과 이른바 프레카리아트 계급의 직접행동 분출로 현실화될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이 수평적으로 만나 지역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평의회로 발전할 때 계급의식 또한 급속도로 회복,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의 평의회운동은 대공장 사업장의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지역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과 만나 기성 노동조합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적 조직형태를 결합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9)가 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총회와 정치광장이 확장되어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실업자, 학생,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할 때 대리주의 노동자(진보)정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직접정치가 실현될 것이다.

 

셋째, 광장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직접행동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경험과 확장만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계급의식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대중총회, 지역평의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연대는 대중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여기 흔들리는 민주노조라는 노쇠한 나무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그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는 풍성한 가지들을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악한 세력들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들을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들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 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더 폭넓은 단결 투쟁의 근거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자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평의회)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여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주>

1)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고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혁명가들의 살해에서도 그랬다. [필자]

 

2) 이른바 ‘민주집중제’로 표현되는 중앙 집중적 의사결정구조는 대의제 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총회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는 사라졌고, 집행부와 대의원 장악이 모든 것에 우선시 되었다. 노동조합 상층기구와 형식적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과 노동자투쟁의 확산을 가로막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몰락과 회복불능을 가속화 시켰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민주노조재건’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이미 평조합원들이 절감하고 있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3)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파업은 규칙들과 규제들에 따라 노동조합에 의해 선언되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와일드캣 파업(비합법적이거나 비공식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자생적인 파업들은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다른 개별 노동조합들로 분할되는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통들은 노동자들을 종종 경쟁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회사들로 분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작업장에서 다른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서로 간에 반목했다. 파업을 할 때도 그들은 종종 분리된 상태로 참여했다. 때문에 통일이라는 관념들에 접하기 어려웠고 행동의 조화와 타협은 유일하게 위원회와 관료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직접행동에서 이러한 노동조합의 회원 차이는 어느 조합에도 속하지 않는 표시로써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즉 통일이 없이는 어떠한 투쟁도 불가능했다. 와일드 캣 파업들이 거대한 대중들을 결집하고, 전 산업 분야, 도시와 구역에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 한다. 파업위원회들은 관료들의 노동조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노동자 평의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

 

4) 프롤레타리아계급에 1910~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은 계급의식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보여주었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가 나타났고, 그곳 모두에서 회합과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교류가 발생했다. 이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가 부과한 심각한 무지와 의식의 왜곡 속에서 침체되어 있었지만, 평의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명료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소통하면서 그들은 정치적 토론에 임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을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환경은 열정적인 토론을 창출하고, 다른 프롤레타리아들과의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때 계급의식은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역할에 대하여],이형로, 2012, 붉은글씨 창간호,

 

5) 비정규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파업의 대부분을 불법으로 몰아가거나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대공장(대기업) 노조들의 생산(자본)에 타격을 가하지 않는 공식적 파업에 대해 묵인하는 현상들은 이러한 자본의 지배방식(분업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

 

6) 이 글에서 노동자운동 새로운 대안의 핵심 중 하나인 정치운동(혁명조직) 관련된 내용은 담아내지 못했다. 혁명조직의 역할, 혁명조직과 계급과의 관계, 혁명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호로 넘긴다. [필자]

 

7)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8)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9)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이다. 다수가 이러한 정치의식에 익숙해졌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노동자계급 의식이 된다.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만이 어제든 나타날 수 있는 계급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한 계급의식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이러한 토대에서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창조성과 자발성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 더욱 높고 깊은 계급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고, 토론의 결과가 행동으로 즉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혁명의 승리는 고사하고 내부 분열이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부르주아 대의제도의 허위의식을 타파하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만들어 간다면 무너진 폐허에 새로운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실제로 보일 것이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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