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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08
    [코뮤니스트 5호]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자유로운 영혼
  2. 2017/11/08
    [코뮤니스트 5호] 나 다니엘 블레이크
    자유로운 영혼

[코뮤니스트 5호]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제1부 기본원칙

     

    오늘날 우리는 코뮤니즘의 위기를 단순히 재구성해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이 목표가 더는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상 최초로 코뮤니즘은 역사적 가능성과 필요성이 됐다. 그것은 오직 혁명계급의 의식적 개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 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소멸.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소책자, 1982, 서문에서)

     

    1) 맑스주의자에게 노동계급은 국제코뮤니스트 혁명의 담지자이다. 그러나 코뮤니즘은 혁명 후 단순히 선언될 수 없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가 있고, 자본주의 생산단계의 규칙으로부터 통합된 계급 없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순간까지의 이행기가 있다. 이러한 이행기는 불안정한 사회이고 경제적 강제의 모순 흔적이 제거되는 끊임없는 변화의 시기이다. 이행기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떠한 “경제”도 없이 수행하기 때문에 안정된 생산양식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경제” 즉 희소성의 관계를 소멸시키는 시기이다. 본질적으로 운동의 역동적 시기일 것이고 만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퇴행할 것이다.

     

    정치혁명의 승리 직후의 사회는 어떨 것인가? 하나의 큰 걸림돌인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착취자들의 정치 권력을 패퇴시키고, 자본가계급의 어떠한 정치적 표현도 억압하며 그들의 주요 경제 집합체를 몰수하면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노동계급은 새로운 사회의 유일한 구성인자가 아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비 착취계급과 계층인 농민, 장인, 소부르주아, 도시의 “중간계급”, 그리고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무산계급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저개발 사회의 빈민 대중이 있다.

     

    생산력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개별적이고 연합되지 않는 노동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길만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본가계급의 반혁명을 막는 투쟁, 가치법칙의 흔적을 절멸시키고, 농업을 사회화하며, 생산자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투쟁, 그리고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할 수 있는 연대와 집합적 작업의 관계로 사회를 결합하는 것도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이다.

     

    2)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의 가장 앞선 중심쟁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수많은 맑스주의 용어처럼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좌파의 풍자가 그 의미를 왜곡시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억압자와 착취자의 특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할 때에만 그 폭력의 정당성을 담보한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폭력은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 부르주아지의 계급폭력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테러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폭력은 방어적이고 부르주아 혁명이 만든 테러의 모델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 부르주아 세력의 재구축에 대항할,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회화의 조직들에 대한 무장 항거를 진압하는 정도로 폭력을 엄격하게 최소화하는 문제가 있다.

     

    비착취계층은 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독재”는 다른 계층이 무장 항거를 하는 경우에만, 사회혁명 내의 총체로서 폭력을 사용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을 의미한다.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로 조직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 권력을 갖는다.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어떤 부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폭력이 아니다. 노동자평의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꽃피어 언론, 회합, 집단의사결정의 자유가 최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통찰력과 힘을 줄 수 있다.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분명히 정치적 권리와 표현에서 제외되는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비착취계층에게는 어떠한가? 그들을 이행기 동안 구석으로 몰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탈린주의적, 파시스트적, 위선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논리를 가진 자본주의적 논리를 거부한다. 이행기에 비착취계층은 계급의 존재를 위한 기반은 제거되지만, 사회혁명과정에 연합되어야 한다.

     

    3) 이행기에 왜 국가가 있고 어떤 국가가 존재하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지만, 즉각 국가를 사라지게 할 수 없고 형식과 내용에서 수정된 새로운 국가를 막을 수 없다. 분화되고 갈등하는 사회적 실재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상부구조로 표현된다.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적으로부터 혁명을 보호하고 이행기 사회의 결속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행기의 국가는 “잘라야 할 최악의 측면을 지닌 국가” “반(半)국가”다. 맑스주의가 “국가의 폐절”이라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행기의 국가를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국가의 소멸(시들어가기) 생각, 이러한 역동성을 표현한 “반-국가”의 생각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행기의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어서 “반-국가”의 실재적 가능성은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이론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위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이 문제와 씨름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완전하게 밝히지 못한 중심쟁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4) 위에서 언급한 소책자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 맑스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소멸’ 은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통해 어떻게 표현되는가? 국가가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와 반혁명의 실체가 된 것처럼 우리는 국가가 어떻게 노동자평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국가에 부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국가의 독재에 맞설 수 있는가? 국가 형식에 대해서 그리고 그 국가 안에서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반-국가’는 ‘노동자국가’인가? 노동자평의회는 이러한 ‘필요악’의 부정적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가?”

     

     

    [참고문헌]

     

    1.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본질에 관한 테제. m.c. 1946

    2. 이행기의 문제들. Italy, 1974

    3. 이행기의 문제들. m.c. 국제평론 1호, 1975

    4. 이행기의 문제들. Italy 국제평론 1호, 1975

    5.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국제평론 8호, 1976

     

     

    제2부 최근 코뮤니스트 진영의 논쟁

     

    1) 1970년대 좌익코뮤니스트 진영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토론과 논쟁은 이행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가 그리고 코뮤니즘의 구체적 모습에 관련되어 이루어졌다. 모든 논의의 출발은 1875년 코뮤니스트 선언이라고 부르는 ‘고타강령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른바 ‘낮은 단계의 코뮤니즘(공산주의)’으로 부르는 이행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시기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실제로 존재했는가가 가장 핵심적인 쟁점일 수밖에 없다.

     

    2) 2010년 이후 이행기를 둘러싼 논쟁이 주로 좌익코뮤니스트 진영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하나는 이행기의 존재에 동의하면서도 평의회 체계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행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이다.

     

    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평의회 체계를 분리하고 코뮨 국가와 평의회 국가를 분리하는 맑스•엥겔스 그리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견해를 비판하는 ICC 내의 이견 그룹인 브라질의 opop(workers' opposition) 그룹의 주장이 있다.

     

    (이 그룹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 글을 참조할 것.

    ①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 국가(ⅰ)” 국제평론 2012 1st Quarter, 148호, 5-11쪽

    ② “자본주의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이행기 국가(ⅱ)” 국제평론 2012, 150호, 9-14쪽)

     

    4) 좌익코뮤니스트 그룹 내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은 이행기의 존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국제주의자전망(IP)은 이행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화 이론(Communication Theory)을 주장하고 있다. IP 이외에 이행기를 부정하는 그룹은 영국사회당(SPGB)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대안”(A Buick과 J. Crump)에서 코뮤니스트 사회가 이행기 없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한 그룹은 Marxist Humanist Initiative로 Andrew Killman의 “맑스주의 개념으로서 ‘이행사회’의 불일치”라는 강연에 기초하고 있다. 킬맨은 하부구조로부터 직접 결정되지 않은 의식은 인민의 의지를 통해 새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의 제3 테제에서의 혁명적 실천을 인용한다.

     

    5) IP의 공산화 이론은 1968년에서 1975년에 발전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Invariance의 J. Camatte의 이론에 근거하여 이행기는 러시아 경험의 국가자본주의 반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의심했으며 Dauve와 Nesic (Tropikin그룹)은 레닌주의자들이 맑스의 임노동 폐절이라는 목적을 잊고 오직 계획경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불평한다. 이들은 이행기는 반(反)혁명의 방안이므로 혁명을 통한 즉각적 코뮤니즘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마트는 1914-45년 사이를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경과였고 그것이 반혁명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6) Theorie Communiste는 실질적 포섭을 두 단계로 구분하고 1단계를 1970년까지, 2단계는 그 이후 현재까지로 보며 1974-95를 반혁명으로 규정하면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일국 노동시장의 붕괴, 복지의 사유화, 신자유주의 등으로 자본은 계급 관계의 본질을 변혁시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에 내부화되었고 노동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쓸모없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자본 / 노동의 축이 존재하지만, 자본주의는 폐절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조건의 일반화는 자본주의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행기라는 전통적 맑스주의적 견해가 정치혁명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코뮤니스트적 조치가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고 혁명과 함께 그리고 혁명 전에 즉각적 코뮤니스트적 조치를 요구한다. 가치법칙은 점진적으로 파괴될 수 없고 노동계급의 투쟁은 자본과 노동에 맞서 동시에 벌여야 하고 이것만이 계급의 폐지와 보편계급의 출현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7) 이행기를 거부하는 IP의 공산화 이론은 맑스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을 노동과정에서의 잉여가치 추출과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 문제가 있다. 맑스는 형식적 포섭을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 실질적 포섭을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 연관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실질적 포섭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에 전적으로 통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통합이 지적이고 문화적인 종속을 말하고 있고 핵심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에게만 적용하고 주변부 국가 노동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질적 포섭에 종속된 노동계급이 계급을 폐절시키는 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고 혁명의 주체가 되어 즉각적 공산화를 이룰 수 있는가가 근본적 문제로 남는다. 즉각적 사회화의 요구는 새로운 사회가 자본주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고, 마치 공산화가 혁명 없이 가능하다는 인상을 준다.

     

    8) 위와 같은 논쟁을 검토해보면 ‘고타강령비판’ 이래 140년의 자본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행기의 필요성에 관한 맑스·엥겔스의 이론적 결론은 여전히 옳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여전히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세상을 건설할 유일한 계급으로 남아있고 그들의 자본과의 적대적 관계 때문에 자본주의에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9) 최근 논의의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① “공산화 이론과 가치 형식의 폐기”, 국제주의자전망, 2012, 가을/겨울, 57호, 11~16쪽

     

    ② “IP와 좌익코뮤니스트의 전통 (3부) - 혁명에 대한 이해”, 국제주의자전망, 2013/14, 겨울, 58/59호, 46~53쪽

     

    ③ “Bilan,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 (제 2부)”, 국제평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4, 1st Quarter, 152호, 25~30쪽

     

    ④ “이행기와 그 반대 관점들”, 혁명적 전망,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2014, 여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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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나 다니엘 블레이크

  •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의 처음. 어두운 화면, 심장병 환자 다니엘(데이브 존스)이 질병 수당을 심사받는 화면으로 시작한다. 영국 복지 행정 담당자의 기계적이고 권위적인 질문 속 다니엘은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 1995년 작)으로 잘 알려진 80세의 켄 로치 감독은 자본주의 영국 사회의 답답함에 놓았던 카메라를 다시 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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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  영화는 목수로 일하던 다니엘이 심장병을 얻어 질병 수당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대신 구직 수당을 신청하게 되지만 이마저 쉽지 않은 상황을 복지의 주체 처지에서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수당을 신청하러 간 복지 상담 센터에서 런던에서 일자리를 잃어 두 자녀를 데리고 뉴캐슬로 온 케이티를 보게 된다. 업무를 담당하는 미국의 외주업체는 시간과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소란(?)을 피우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로 부당한 업무처리에 항의하는 케이티를 밖으로 쫓아낸다. 센터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켜보기만 한다. 기다리던 다니엘은 다음 차례의 사람에게 양보를 얻어내지만, 어느 곳에서도 분노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고요하다. 그나마 어려운 경제에도 안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이러한 통제방식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경찰의 통제선을 넘지 못하는 시위대, 어떠한 폭력도 안 된다며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 과연 우리는 케이티를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난과 자존심.  다니엘의 도움에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을 함께 나누던 케이티가 식료품 보급소에 가서 보인 행동은 우리의 가슴을 울컥하게 하였다. “너무 배가 고파 그랬어요.” “죄송해요” 그리고는 가게에서 생리대를 훔치다 경비원에게 적발되어 홀에서 보이는 눈물. 딸에게 낡은 신발과 식표품 보급소에서의 엄마 행동을 두고 학교 친구들이 놀린다는 소리를 듣고 경비원의 소개로 만난 성매매 업자. 결국 케이티는 그곳에서 일하게 되고 다니엘은 케이티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케이티를 찾은 다니엘은 안타까워하고, 케이티는 수치심을 느끼며 서로의 관계에도 금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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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3주년이 된 송파 세 모녀 사건에서 집주인에게 남긴 “죄송합니다.” 또 얼마 전 공사장에서 얻은 부상으로 집세를 내지 못하다 자살한 분이 남긴 유서 “죄송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가난과 빈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영국과 한국 사회 모두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떠넘기고 있다.

    한국의 복지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복지 주체들에게 소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이 사회의 복지 관료들은 복지비용을 줄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서 모든 방법을 이용해 당연히 복지를 누려야 할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쳐 포기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 세계이며, 자본주의는 경제 공황은 계속되고 있고, 위기 속에서 노동력은 남아돌고 생산물은 팔 곳을 잃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체제의 한계 상황이라서 복지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다.

     

    # 가족.  딜런이 물고기를 사포로 열심히 문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먼저 간 몰리의 이야기를 한다. 좁은 곳에서의 생활로 산만해진 딜런이 다니엘을 만나며 다시 좋아지는 모습을 보며 한국 사회의 양육 문제가 양육자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느끼게 해준다. 먼저 간 몰리는 자본주의의 대량생산과 이윤추구를 위한 축산 때문인데, 그것은 몰리 뿐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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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  이 영화에서는 많은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다만 다니엘과 케이티 사이의 관계는 삭막한 영국 사회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따뜻한 사이다. 그러다 케이티의 직업 선택으로 관계가 멀어지지만, 케이티의 딸 데이지가 다니엘을 찾아가 마음의 문을 닫은 그를 바꿔 놓는다. 데이지는 다니엘에게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다시 그는 케이티의 팔짱을 끼고 질병 수당의 항고 결정을 보러 간다. 이 장면을 통해 다니엘도 케이티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하게 된다. 그러나 결정을 보지 못하고 만다. 켄 로치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를 이야기한다. 다니엘 전기가 끊긴 집에 사는 케이티에게 전기요금을 주고, 케이티는 저녁에 자기 몫을 다니엘에게 주고, 옆집 청년은 다니엘의 수당 신청을 돕는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케이티가 읽는 다니엘의 유언장은 사회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나’의 존엄성을 지키라는 감독의 메시지로 보인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것이 노장 감독이 답답한 현실에서 하고자 했던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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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다니엘이 공을 튀기고 있는 딜런에게 낸 “코코넛과 상어 중에 무엇이 사람을 더 많이 죽이지?” 나중에 딜런이 답을 한다. “코코넛이요.” 이유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상품이 된 코코넛은 더 많은 노동자를 죽게 하기에, 상어보다 무서운 존재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케이티의 자존심을 무참히 밟아 버린 가난, 굶주림, 마트에 넘쳐나는 진열된 상품이 아닌 생활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는 사회... 유리창 앞의 물고기들이 작고 닫힌 창을 넘어 넓고 푸른 혁명의 바다로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날은 어제쯤일까?

     

     영화의 배경인 영국과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함께 하는 국제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이글을 마친다.

     

    “다니엘은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존엄을 보여준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의 존엄은 그의 장례식장에서 낭독되어 그에게 돌아온 말과 모순된다. :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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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은 자신을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시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민이 된다는 것은 사회계급이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에 있어 시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차이는 근본적이다. 지배이데올로기가 착취자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동원하는 일은 시민권 또는 민주주의의 방어라는 이름으로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논리일 뿐이다. 시민권 방어는 프롤레타리아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경쟁과 분열과 자본주의 세계의 영속화로 이어진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표현한 것처럼, 그의 상황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배제된, 위험에 빠진, 착취당하는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가 공유하고 있다. 그곳이 영국, 프랑스, ​​중국 또는 그 밖의 어디든, 임금 노동의 동일한 자본주의적 법(률)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더라도 자본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우리를 분쇄하여 무너뜨리고, 우리를 죽이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수적인 진정한 계급 연대는 무엇보다 투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 국가를 넘어선 의식적, 집단적 투쟁.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라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구절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꿀 열쇠다. “1)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길수

     

    <주>

    1) Review: "I, Daniel Blake", a film by Ken Loach, 국제코뮤니스트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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