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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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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대대적 파업, 노동조합 그리고 분업

    (Massenstreik, Gewerkschaften und Arbeitsteilung heute)

     

    • 1905년, 사회적 지진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 그녀의 팸를릿을 쓸 당시, 그녀에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막 일어났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 그 규모에 있어서 엄청난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를 이룬 대대적 파업의 물결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물결은 계급투쟁 전대미문의 폭발이었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대해 그때까지 상상할 수 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와 혁명투쟁 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갑자기, 전자본주의적 약탈을 제거하는 것은 더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 나란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자체의 과제로 보였다. 결국 1905년의 투쟁은 완전히 새로운 조직원칙을 낳았다. 투쟁을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더는 노동조합의 임무도 그리고 노동자정당의 임무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 대중이 이 임무를 스스로 넘겨받았다. 소비에트가, 독일어로는 노동자평의회가 탄생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자계급 자신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맑스의 표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차르제국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뒤흔든 역사적인 지진이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을 현재의 사안으로 세움으로써 그리고 수십 년간 통용되던 전제들의 기반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맑스주의 노동자운동을 뒤흔들었다.

       

       

      대대적 파업 - 지금 더이상 논할 필요도 없는가?

       

      우리가 현재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을 토론할 때, 당연히 우리에게는 역사에 대해 그리고 역사로부터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백 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트로츠키에게 또는 레닌에게 있어서 만큼 우리에게도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대적 파업의 문제가 우리의 현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언뜻 보기엔 참으로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1905년의 그것과 같은 지진은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임금노동자들은 전체 전선에서 지독한 방어전에 내몰려져 있다. 인원 감축, 대량해고, 폐업 그리고 생산의 이전 등이 피해자(해고자)들이 그에 대항해 많이 손써 볼 수도 없이 결정되고 시행된다. 실업자들은 체계적으로 압박당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빈곤뿐만 아니라 개별화에 내몰려서, 자신이 국가의 공격에 대해 의지할 데 없이 내던져진 것처럼 대부분 느낀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변질된, 한때의 노동자조직이었던 노동조합은 1905년에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에 의한 자체조직화에 의해 범람 되었다. 그들은 도처에서 상황의 주인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어떻게 DGB와 같은 거대한 노동조합중앙협회(총연합회)를 조합원들이 무더기로 떠나버리는지를 경험하고 있긴 하다. 그들이 실업자가 되어서 결국 노동조합귀속성의 의미를 더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든 또는 그들이 이러한 노동조합에 대해 실제로 어떤 신뢰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든.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에 의사, 항공기조종사 또는 기차기관사의 경우와 같이 공공연한 탈연대와 제각각의 투쟁을 선동하는 작은 부문노동조합들이 어떻게 세를 확대해 가는지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철도노동자의 파업과 같이) 사실상 국민경제에 해를 끼칠 수 있을 파업을 국가는 당장에 그냥 법원의 판결로 금지할 수 있지 않은가?

       

       

      미래의 대대적 파업이 현재에 준비되는가?

       

      지난 몇 년간의 작은 충돌 - 독일에서의 메르세데스, 오펠, AEG, 텔레콤의 경우 또는 뉴욕과 런던 지하철의 경우-을 1905년 러시아에서의 거대하고 영웅적인 파업과 비교한다면, 현재는 사실 참 암담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여기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방법일 것이다. 오늘의 세계를 1905년의 대대적 파업의 절정점과 비교한다면, 대대적 파업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수년에 걸쳐 준비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소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그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체의 역사와 그 이전의 역사를 갖는 여러 해에 걸친 성장을 거친다. 대대적 파업의 시작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것들은 종종 나중에 가서야 그런 것으로 인식된다. 러시아에서 그것은 1896에서 1906까지 10년에 걸친 한 시기였다. 그것은 성페터스부르크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부분적 임금투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이 되었다. "지금은 이 사건이, 혁명의 엄청난 대대적 파업들에 비해서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그 당시 러시아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에서 총파업이란 전례 없는 어떤 것이었고, 그것 자체가 일종의 축소판의 온전한 혁명이었다"  (룩셈부르크 저작집(독어판), 제2권, 104쪽, 풀무질 162, 163쪽 참조 : 이것과 이후 모든 인용문은 역자가 직접 번역했고, 쪽수는 독어판,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Rosa Luxemberg Gesammelte Werke)의 쪽수임, 참조할 풀무질 번역판의 쪽수는 풀무질 표시가 첨가됨-역주 )  아마 우리는 언젠가는, 회고하면서 2004년 보쿰의 오펠에서의 6일 동안 지속된 자생적 공장점거 파업의 예가 일종의 '축소판의 혁명'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코뮤니즘의 종말을 공개적으로 승인하는 겉모습이 그리고 계급투쟁이 추월당한 것 같던 겉모습이 삐걱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 파업이 1989년이래 시기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 의 종결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류의 작은 충돌들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것의 발단은 사소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발생은 초보적이다.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 순전히 경제적이다. 그것이 대부분 겪게 되는 패배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 이러한 작은 전투로부터 막강하고 전반적인 운동이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전체에 쌓이는 어떤 것의 표면을 때리는 가시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계급이 자본을 축적하는 동안, 노동자계급은 궁핍과 비참을, 피폐와 수모를, 소외와 비인간화를, 증오와 분노를 축적한다. 노동자들은 대대적 파업에 돌입하면 그제야, 로자 룩셈부르크가 썼듯이,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어졌는가를 포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인한 고통이자 임금노동체제로 인한 고통이다.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인식이, 그 원인의 인식이 노동자투쟁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끄는 것이다. 대대적 투쟁의 세기에는, 임금노예제를 본래 특징짓는 모든 것이 피부로 느껴지게 될 것이고 쟁점화될 것이다. 정체되거나 삭감되는 임금, 노동시간의 연장이나 강화 또는 두 가지 모두, 직장지도부의 교만한 태도와 상사의 잔인성, 문화 결핍 또는 그러한 문화에의 노동자 접근차단, 직장 밖의 주거 - 및 생활 조건, 국가의 억압과 사법체계의 소란스러운 불공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패와 와해, 특히 임노동의 전반적이고 증대되는 불안정성 -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이 쌓여간다. 이 모든 것이 점점 더 피부에 와닿게 되고 의식된다. 불만이 분노로 바뀌는 시점까지, 어떤 것을 일으키기에 한점 불꽃이면 충분할 시점까지, 계급 일부분에 대한 - 개별적인 노동자 한 명에 대한 - 어떤 공격이라도 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그 시점까지. 이렇게 집단적으로 저장된 경험은 노동자 대중이 때때로 몽유병자 같은 확신으로 - 행동하게 만든다 - 이것이 의식의 일부인 직관이다. 결국, 그러한 운동은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내부의 경향 안에 강하게 뿌리박음으로써 그 자체의 힘을 얻는다. 1905년의 사건은 준비된 것이었고, 그것을 위한 준비 투쟁은 무역 및 산업위기에 의해, 실업에 의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초래되었다.

       

       

      현재의 잠재력 인식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이 대대적 파업의 문제를 100여 년 전에 고찰했듯이, 그렇게 우리가 현재 그것을 고찰하자면,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와 현재가 얼마나 유사한지를 확인하게 될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오늘 쌓이고 있는 사회적인 시한폭탄은 1905년에 축적되었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위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실업의 위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확산되어 있다. '사회적 국가'가 허물어지는 시기인 지금, 실업은 점점 더 그것 본래의 공포를 되찾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 전쟁 - 당시는 극동에서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충돌, 지금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충돌 -은 체제의 본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게다가 오늘의 전쟁은 현존하는 무기체계와 테러리즘으로 볼 때 점점 더 직접 민간인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 또한 오늘은 자본주의에 의해 유발된 재앙과 같은 환경문제로 인한 멸망위협 등과 같은 새로운 위협이 의식된다. 이미 그 당시에도 특수하게 러시아적이 아니라 국제적이었던 이러한 과정이 오늘은 훨씬 더 분명하게 하나의 전세계적인 전개라는 점이 또한 부가된다.

       

      독일의 예는 이러한 전개를 잘 보여준다. 한 때 전후 독일은 자본주의 복지 수준의 그리고 사회적 평화의 성채었다. 이제 한때의 모범국가였던 이 나라를 노동자투쟁이 엄습하고 있다. 이 투쟁은 아직은 점점이 고립되고 또 노동조합에 의해 통제당한 채 머물러 있긴 하지만 계급의 더욱더 많은 부분을 포괄하면서 자본주의 비참함의 점점 더 많은 측면을 쟁점화하고 있다. 역시 여기에서도 우리는 100년 전의 러시아와 유사점들을 보게 된다. 그 당시 상업종업원들이, 은행의, 사무실의 그리고 관청의 직원들이, 음식점 종사자들이 그리고 부유층의 집안 고용인들이 심지어는 경찰의 최하층이 투쟁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행했는지를 보는 것은 놀랍다. 현재는 병원 근무 의사들이나 기관사들의 파업을 통해서야, 지금까지 특권을 가진 것으로 통해왔던 이런 직업이 얼마나 한심한 급료를 받고 있는지가 일반인에게 알려진다. 이 직업군에 속하는 이들도 자신들이 '노동하는 빈곤층(working poor)'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도 놀란다.

       

      2007년 여름 독일에서는, 실업자와 연금생활자들이 증가된 세금부담과 식료품 물가상승 그리고 생활비삭감으로 인해 일 년 전에 비해 15% 적게 받은 점이 심지어는 공식적인 통계 속에서도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작센주의 주립은행은 즉각 170억 유로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그 은행이 미국의 부동산시장에 잘못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파업이 즉각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판결근거에 따르면) 국민경제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법원판결을 통해 금지되었다. 실업률감소와 경제호황에 대한 모든 승리의 함성에도 불구하고 해고의 물결은 계속되고 있고,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경영 합의라 불리는)은 증가한다. 또한 경제전문가들은 피닉스-TV의 심야 토론프로그램에서, 앞으로 몇 년간 실질임금이 부가적으로 30% 더 떨어지게 될 것이란 점을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에게 무리 없이 전달할지를 놓고 씨름한다.

       

      게다가 68년 세대인 부모보다는 패배를 덜 당한 새로운 세대가 사회적 투쟁의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 대세는 1년 전 프랑스에서 정부의 고용불안정화법에 대항한 학교와 대학교에서의 대대적 투쟁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로스톡과 하일리겐담에서도 이 체제를 더는 신뢰하지 않고 대안을 찾는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젊은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눈으로 주시하자면, 우리가 다시 대대적 파업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가정을 세울 수밖에 없다. 대대적 파업으로의 성숙 시기는 아마도 부르주아계급의 노련함과,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이라는 국가의 통제 기계의 효과성 그리고 대대적인 실업의 섬뜩한 영향 때문에 훨씬 더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전개의 방향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역할

       

      참으로 노동조합은 오늘날 계급투쟁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제어요소이다. 1905년 러시아에서 그것은 달랐다. 그 당시는 대대적 파업이 노동조합의 전반적인 창립을 위한 최초의 동력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이 노동조합은 처음부터, 본래 투쟁의 조직자, 즉 노동자평의회의 그늘 안에 있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1905년은, 계급이 단지 공동으로, 투쟁의 확대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시기에로의 진입을 알렸다. 노동조합적인 투쟁방법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 되었다. "혁명적 시기의 뇌우의 기운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소위 어떤 부분적이고 작은 충돌도 하나의 전면적인 폭발로 자라날 수 있다. 독일에는 매년 그리고 매일 노동자와 기업가 사이에 치열하고 잔인한 충돌이 발생하지만, 그 투쟁은 관련된 개별 분야나 개별 도시, 공장의 장벽을 뛰어넘어 솟아오르지 않는다" (129쪽, 풀무질 195쪽)

       

      독일에서 대대적 파업의 전개는 그 당시에도 이미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어려웠는데, 그곳에는 막강하고 종종 사회민주주의적이기도 한 노동조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상황은 그래서 모든 오래된 산업국가에서의 현재 상황과 더 유사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에 관한 팸플릿을 쓰면서 독일의 상황을 러시아의 상황만큼이나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대대적 파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말에 있었던 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의회공산주의라는 정치적 경향이 출현했다. 그것의 특징은 노동자평의회를 선전하는데(이런 선동은 다른 경향도 했다)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당의 기구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거부하는 데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심지어 당의 의회분파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쪽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두뇌의 살해에서도 그러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본래 사회민주당의 창조물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의 정치적인 지도 아래 놓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호황기에 - 베른슈타인이 당의 맑스주의적 기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 - 그 당시 노동자운동에서 기회주의의 발전은 특히 노동조합이 '후견인'으로서의 당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성'의 태도를 가지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건에 의해 새로운 양분을 공급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글에서 당이 이제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적인 위치를 되찾을 것을 요구했다. 1906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만하임 전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32명의 동지들은 - 룩셈부르크의 혁명적인 채찍질에 의해 또 러시아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에 고무되어 - 당수뇌의 결정에 대한 한 보충안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는 전당대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최고이자 가장 포괄적인 형식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제안에서 결정적인 이 문구를 카우츠키는 노동조합 측의 대표자들이 이빨을 드러내자 철회해버렸다. 카우츠키의 중심주의 본질은, 당내의 통일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통일을 위해서 기회주의에 굴복하고 이러면서 당의 맑스주의적 이론적 기초를 내부로부터 스스로 파괴한 것에 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통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좌파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러시아에서의 투쟁 결과를 그 근거로 들었다. 이 투쟁은, 그녀의 논거에 따르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오랜 구분이 낡은 것이 되어버렸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사회민주주의적 대중정당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있어서도 단호한 귀결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인용하자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분은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독립은 의회주의 시대에 역사적으로 생겨난 산물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여기서, 부르주아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에 경제투쟁은 분산되고 각 기업, 각 산업 분야에서의 여러 개별적인 투쟁으로 해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투쟁은 대중 자신에 의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고 대신에 부르주아 국가의 형식에 알맞게 입법적인 대리자에 대한 압력을 통해서 이뤄진다. 혁명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자마자 즉, 대중이 투쟁의 장에 출현하자마자, 경제투쟁의 분산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주의적인 형식도 사라지게 된다. 혁명의 대대적 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이며, 분리되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두 개의 형태로서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도 사라질 것이다. (...) 하나는 경제투쟁 또 하나는 정치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의 두 가지 상이한 계급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의 투쟁만이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착취를 제한하는 것을 그리고 부르주아사회와 착취의 폐지를 동시에 겨냥한 투쟁이다. (...)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재의 이해를, 사회민주당의 투쟁은 노동자운동의 미래의 이해를 포괄한다. (...) 노동조합은 그룹의 이해를 그리고 노동자운동 발전의 한 단계를 대표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을 그리고 그들의 해방이라는 이해 전체를 대표한다." (155, 156쪽, 풀무질 228, 229쪽)

       

      대대적 파업은, 계급정당이나 노동조합 중 어떤 것도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투쟁 중에 조직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당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과제에, 즉 '정치적인' 지도에, 계급의식의 옹호와 확산과 한층 더한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이와는 반대로 점점 더 축소되는데, 이는 파업기금을 통한 파업 준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노동조합의 대대적 파업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는 그 당시에도 있었다. 그것이 노동자투쟁에 쓸모없어질 수록 그 만큼 더 계급의 적의 진영에서 그들의 안전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계급투쟁에 대항한 걸림돌로 잘 활용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6년에 소비에트의 완전한 의의를 파악하지 못했듯이 노동조합의 이러한 발전의 종결점을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참 대단하게도 그녀는 이미 매우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노동조합투쟁의 한계를 파악해냈다. 그녀는, 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소위 평화적으로 팽창하는 시기에마저도 (노동조합운동의 고향인 영국에서마저도) 노동자계급의 총체는 결코 노동조합적으로 포착되지 않았음을 제시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많은 주요부문 자체를 포함하는, 계급의 특히 억눌린 부분, 즉 '서로 뒤엉켜진 노예 무리(die zusammengeknaeulte Masse der Heloten)', 이들에서는 노동조합적인 조직화가 전혀 접근 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그 당시 독일제국에서는 광부, 직조공, 철도노동자와 우편노동자 그리고 농촌노동자가 포함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과 그들의 정치적인 성숙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에 대해 호통을 쳤다. 심지어 그녀는 다가올 혁명투쟁에서 이러한 부문이 선두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예언했다 - 이 예언은 독일혁명에서 정확히 적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계급 전체가 포함되지 않는 한 좌절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이러한 포괄은, 투쟁 속에서의 그들의 결집은 결코 노동조합적인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바로 이점에 소비에트의 비밀이 놓여있다, 즉 소비에트는 다른 노동조합의 구성원을, '조직된 자들'과 '조직되진 않은 자들'을, 직장인과 실업자를 결합시킨 것이다.

       

      왜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계급투쟁의 이해를 위해 활용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새로운 노동조합투쟁의 표현이라 환영되는, 독일에서의 부문노동조합의 재탄생은 실은 오래동안 존재해온 그리고 반동이 되어버린 노동조합적인 편협성이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로자 룩셈부르크는 백년 전에 이미 비난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의 업무의 전문화 그리고 평화로운 시기에 분산된 경제투쟁과 관련하여 당연히 좁을 수밖에 없는 시야는 노동조합 관료들을 생각의 편협성과 관료주의로 이끈다." (163쪽, 풀무질 237쪽)

       

      "다수의 동지들은 주로 '규율'의 미덕, 즉 수동적인 복종의 미덕을 의무로 가지는 판단력이 없는 대중으로 폄하된다. 사회민주당과는 반대로 (...) 노동조합에서는 종속된 대중에 대한 상관이라는 관계가 그 정도에 있어서 휠씬 더 심각하다" (165쪽, 독일어판 초안에만 있는 부분임-역주)

       

      이러한 편협성이 혁명가들을 향한 순전한 살인욕으로 바뀔 것임을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로서는 그 당시 알 수 없었음에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옳은지!

       

       

      대대적 파업과 분업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운동의 발전에서 일시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전복이, 계급사회의 극복이 역사의 현안이 된 시기에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족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자계급 자체 내부 분업의 특정 단계를 체화하고 영구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 자체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그것을 초래한 계급사회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은 물질적 비참함에 대항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는 분업 자체를 그 주요한 희생자인 임금노예의 주도로 폐지하는 것이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인 것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부분, 국가 등의 구분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 또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의 - 이러한 분리가 의문시 될 것이다. 그렇게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그녀의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 시기의 폭풍 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의 낭만주의자'로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 (133쪽, 풀무질 199쪽)

       

      대대적 파업의 결과는 특히 "노동자계급의, 생활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 즉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지적인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이다. (114쪽, 풀무175쪽) 이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찬가지로 분명히 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지속적인 단계로서의 물질적인 생활 수준은 혁명 속에서 설자리가 없다. (...) 혁명의 상승하고 하강하는 이러한 날카로운 물결 속에서도 존속하기에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정신적인 결정체(강조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함-역주)이다, 노동자계급의 도약적인 지적 문화적 성장이다. 이것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서의 계속적 전진을 확고하게 담보한다." (117쪽, 풀무질 179쪽)

       

      2007년 10월. 토론모임 라인란트( de.geocities.com/zirkelrunde )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작성
    • 사회주의노동자신문 번역
     
    <주>
     
    *토론모임 라인란트(de.geocities.com/zirkelrunde)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구성원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개입하지만 그것과는 독립적임을 밝힌다. 
     
    *2007년 여름 라인란트 토론모임에서 대대적 파업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 토론의 기본자료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에 쓴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이었다. 그 후 토론잡지「아우프헤벤(Aufheben)」의 편집진으로부터 대대적 파업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기뻤다. 먼저, 우리는 이 잡지가 독일어권에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표현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개방적이고 풍부한 의견교환의 장이라는 것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대대적 파업의 문제가 대단히 현재성을 띤다고 여기며 이에 대해 가능한 한 폭넓고 열린 논쟁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모임에서 이루어진 토론에 대한 요약문을 작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임의 한 구성원에게 우리의 토론을 기초로 아우프헤벤을 위한 글을 작성하도록 위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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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

  •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100년 전, 1919년 1월 15일 -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그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부인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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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비극의 종말>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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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로자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인용한 문헌>

    1. Takahashi, Shoichi <로자 룩셈부르크>

    2. ICC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팸플릿]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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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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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이슈페이퍼인 「과제」는 평화‧번영‧통일 시대에 민주노총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평화와 통일은 국가와 민족으로 등치되고 공공연히 자본과의 협력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민족 모순만 극복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도, 노동자의 권리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포장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마저도 희석시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 입장에 불과하다. 이 글은 「과제」에 대한 간략한 비판이다.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 요약

     

    「과제」는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평화‧번영‧통일의 한반도 시대’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이라고 평가한다. 선언의 조건으로 북의 핵 무력 완성과 전략의 전환, 미국의 쇠퇴와 미국 우선주의의 등장, 남쪽 민중의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의 등장을 꼽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 노동운동만이 대중적 민간교류를 돌파할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고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는 4.27 판문점선언 발표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간교류 사업을 성사시키면서, 각계 전반에 평화통일 여론을 크게 조성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이 평화‧번영‧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주도하려면, 노동자 자주통일 역량 강화에 최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이 땅 노동계급의 가장 주되는 착취자가 미 제국에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내부적으로 인식 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과제」에 대한 비판

     

    1. 「과제」는 그 어떤 명확한 근거도 없이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만으로 현시기를 평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사는 내적 모순에 의한 공황의 역사이고 전쟁은 이런 모순의 또 다른 현상이었다. 즉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우연이 아닌 자본주의 모순에서 발생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은 항구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평화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노동자 투쟁의 동력을 빼앗고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평화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원칙에 따라 부르주아지를 타파하고 노동자 권력을 확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노동자계급에게 제1차 제국주의 전쟁과 제2 인터내셔널의 사례는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과제」는 평화 시대의 등장 조건으로 일관되게 북한의 핵무장을 꼽고 있다. 하지만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이다.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들과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그렇다 진정한 평화와 제국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에 의한 핵무장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및 세계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뿐이다.

    또한 「과제」는 평화‧번영‧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주도하려면, 노동자 자주통일 역량 강화에 최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적폐 청산과 사회 대개혁의 대상으로서 자본가계급과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은 평화번영, 통일의 길에서 손을 잡아야 하는 복잡한 형국이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과 손을 잡는다면 진정한 평화의 시대는 결코 오지 않고 참혹한 실패밖에 없음을 역사는 보여 주고 있다. 평화의 시대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열 수 있고 노동자 권력만이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시대 등장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은 단지 특정 시대에서 특정 역할을 하도록 강조되고 있다. 즉, 노동자의 혁명적 열기, 동력보다는 수동적이고 피동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북한 정권이 만든 국면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의 부르주아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3. 「과제」는 민주노총이 이 땅 노동자계급의 가장 주된 착취자가 미 제국에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내부적으로 인식 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노동기본권도, 경제 주권과 경제민주화도, 항구적 평화체제와 자주통일도 결국 이 땅에서는 미 제국의 문제에 달려있다는 점만 분명하게 하면 나머지 문제에서의 차이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말 민족 간의 모순 이외에는 크게 중요한 차이가 없단 말인가? 생계형 자살을 비롯한 자살률 1위 국가, 산업재해 1위 국가, 노동시간 1위, 초중고 수업 최장 국가… 그야말로 노동자계급은 벼랑 끝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중요한 차이가 없단 말인가? 이러한 주장은 결국 노동자계급의 생존을 건 일상과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석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문재인 정권의 지지율이 떨어지다가도 남북회담 등으로 다시 상승하는 현상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남북경협의 열매를 이야기하지만, 그 열매는 자본에게 돌아가지 노동자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다. 결국 국가와 민족이라는 깃발 아래 단결하자는 말은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할 뿐이다. 지난 3차 남북정상회담 때 삼성 자본에 대한 북한 측의 부통령급 대우를 보더라도 명백하다.

     

    이러한 「과제」의 기회주의적 주장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참혹한 재앙이자 교훈이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총구를 같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자국의 부르주아에게 향하자는 ‘전쟁을 혁명으로’라는 레닌의 외침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 세력에 의해 짓밟히며 혁명은 실패했고 노동자계급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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