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실천 복간호]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 김수행 선생과 “실천”으로 다시 만나기

     

     

     김수행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자이었던 그는 강단의 학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연구자와 활동가가 한데 어우러져 노동자 관점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취지와 만나 지금의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천』지는 “맑스주의 이론 진영의 동향을 점검하고 좌파 저널에 실린 해외논문과 세계사회주의 정치운동 진영의 주요 기관지 등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한국 맑스주의 이론진영에 튼튼한 밑바탕을 제공”하기 위해 발간했습니다.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실천』지를 복간하는 시점에서 김수행 선생의 ‘특별한 실천’이 새겨져 있는 사회실천연구소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왜 다시금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토론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이자 영원한 동지인 오세철 선생과 함께 그분을 다시 만나러 갑니다.

     

    다시 김수행 선생을 만나다

     

    Q : 올해가 68혁명(또는 68투쟁) 50주년입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오세철 선생에게 68년 반란의 물결은 실제 현실에서 존재했는지요? 존재했다면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A : 1968년은 미완의 4.19혁명, 5.16쿠테타 이후 유신으로 가는 길목이었어요. 당시 베트남 전쟁, 유럽의 68운동, 남미의 민족해방운동의 간접적인 영향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럽과 같은 반(反)관료주의 등의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1965년 한일회담 반대 같은 민족주의 경향,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투쟁, 월남(베트남)파병 반대 등에 간접적 영향이 있었죠.

     

    Q : 세계적으로는 68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군사정권까지 격동의 20~40대를 보내셨는데, 당시의 (급진적, 실천적)지식인과 지금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A : (1963~1983) 이 시기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기였어요. 그 중 1979년 말에서 1980년 봄까지 짧은 민주화 기간을 빼고, 이 시기의 지식인 운동은 군부독재 반대(타도) 투쟁에 집중하면서 민주투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지식인 운동이 부르주아 세력에 흡수되어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비판적지지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는 사회주의, 코뮤니스트 운동으로 분화되었습니다.

     ksh1.jpg

    <사진> 4. 19혁명 49주년 - 교수․연구인 시국선언 (2009년 4월)

     

    Q : 같은 시대를 보낸 김수행 선생과 오세철 선생 두 분은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처음 만나셨습니다. 코뮤니즘이라는 목표에서 같은 곳을 향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셨는데 어떤 계기로 사회실천연구소까지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까?

     

    A : 2004년 명예퇴직 후 실천 운동에 전념했어요. 맑스주의 연구자들과 『사회이론연구소 : 빛나는 전망』을 만들었고, 혁명적사회주의 운동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정치연합』을 만들었고, 『맑스주의 대학원』을 설립하여 젊은 맑스주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을 양성하자는 운동도 시작했죠. 그동안 한국에서 맑스주의는 분과학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에 갇혀있었고, 역사학을 포함한 보다 넓은 지평과 만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맑스주의 종합연구소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과학과 역사학(최규진), 그리고 인문학이 결합한 연구소, 연구자(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의 김수행)와 실천가(사회주의자로서의 오세철)가 결합한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오세철, 김수행, 최규진이 깊은 토론을 거쳐 『사회실천연구소』의 설립을 결정합니다. 김수행에게는 최규진과 내가 사회실천연구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했는데, 에피소드로 사당역에서의 대취사건이 있었고 김수행의 제자들은 반대했지만 함께 하게 되었죠.

     

    “ 더 중요한 것은 2006년 11월 사회실천연구소 설립제안이 있기 전, 종합 사회주의연구소를 향한 주제를 놓고 김수행과 나 그리고 최규진이 나눈 토론이었다. 나와 최규진은 연구소 설립문제를 여러 해 고민해 온 사이인데, 사회과학대학원 설립과 맞물려서 김수행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의 전제였다. 김수행은 흔쾌히 동의했고, 그 날 우리는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술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수행은 나처럼 자주 많은 양의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애주가이고 술맛나는 자리에서는 대주가가 된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jgfhfghgg.jpg 

    <사진> 2013년 여름 김수행 교수 자택에서의 사회실천연구소 수련회가 끝난 후

     

    Q : 사회실천연구소를 만들 때, 그리고 연구소 주요 성원들이 참여한 사회주의노동자연합과 국가보압법 탄압사건이 있었을 때, 김수행 선생의 도움(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A : 책에 쓴 내용대로입니다.

     

    “김수행은 경상도 사나이라 말수가 적지만 한마디 하면 그 뜻이 확실하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사무실을 얻어야하는데 목돈이 없었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사무실 보증금에 돈을 보탠 적이 있는데, 그 일부를 차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김수행을 만났다. 얼마를 빼 갈테니 그 부분을 메꿔달라고 했다. “그래 알았어”라고 한마디 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Q : 김수행 선생과 함께했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연구소 활동을 돌아보면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무엇이었고,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김수행 선생께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요?

     

    A : 긍정적인 것은 5~6년간의『실천』지 발간입니다. 맑스주의 관련 주요 글을 망라한 의미 있는 실험이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연구소 안에 활동가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실천」의 빈곤이었죠.

     

    김수행이 답했다면, 긍정적인 것은 연구자들의 단합과 헌신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사회과학대학원』의 실험에 역부족이었다는 것 아닐까요. 『자본론』수강생이 70%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었으니까...

     

    Q : 오세철 선생께서는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지인 김수행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수행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 일상에서 사람과 운동을 대하는 모습은 어떠셨습니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A : 하나는 사노련 재판 때의 모습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걸린 「사노련」재판 때에도 변호인 측 증인으로 참석해 판사와 검사에게 호통치며 일갈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법원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과 집회에 꼭 참석하여 힘차게 발언하는 김수행의 실천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 같은 사람도 잡아가야지” 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두 번째는 사회실천연구소에서의 모습입니다. 연구소의 『자본론』 강의 후 자주 가는 ‘을지로 골뱅이’에서 있었던 뒤풀이 에피소드인데요. 강의에 참석한 수강자들과 남궁원, 김수행, 나 이렇게 뒤풀이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김수행은 나에게 처음으로 “나 공산주의자야” 라고 고백했어요. 그러니까 2014년경, 당시 72세의 김수행이 맑스주의자, 공산주의자(코뮤니스트)로 커밍아웃 한 것이죠.

     

     

    다시 김수행 선생을 부르다

     

    Q : 올해는 맑스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코뮤니즘)을 지향하고 현실에서 투쟁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로서 평생의 과제이자 삶의 동인(動因)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추구하고 실천하던 맑스주의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느 점에서 다른가요?

     

    A : 맑스주의자로서의 사상이론(특히, 『자본』과 관련하여)의 기본은 둘이 같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맑스의 삶, 즉 그와 연관된 세계 코뮤니스트운동,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공언하기 전에 실천적으로는 사민주의좌파로서의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 상황에 방점을 둔 것은 사실입니다.

     

    Q : 김수행 선생의 친한 벗이자 동지였던 선생께서는 그분이 쓰신 책과 논문을 대부분 보셨을 텐데, 지금 우리가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십시오.

     

    A :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 신정완 편, 2007년, 서울대 출판부.입니다. 이 책은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으로 김수행과 제자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제1부 사회주의 이론」에서 제1장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김수행이 집필했고, 나머지 장과 2~4부는 제자들이 썼어요. 「제2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 「제3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 「제4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초석들」

    이 책을 보면 당시의 김수행과 그 제자들이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 상과 그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Q : 김수행 선생이 못다 이루고 간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과제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 김수행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와 나는 공동으로 새로운 사회의 강령을 포함한 구체적 방법론을 대담형식의 연재물로 『실천』지에 싣기로 했으나 미완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코뮤니스트의 공동의 과제로 남아있고 이를 위한 공동의 연구와 그 실현을 위한 혁명적 투쟁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진정한 코뮤니스트들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Q :  첨부한 글은 사회실천연구소의 성원이었던 남궁원 동지가 김수행 선생을 인터뷰한 글입니다. 인터뷰 내용 중 김수행 선생이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라는 책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다.

     

    “내가 (소련을)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리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김수행 선생의 답변에 동의하시는지요? 선생의 맑스주의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 주제가 발전적이고 심화된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지요?

     

    A :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1) 상품, 화폐, 임노동, (시장)의 소멸을 말한 것, 계획경제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 이라고 한 견해에 동의합니다. 2) 그러나 계급과 국가의 소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부분적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3) 새로운 생산자의 연합을 국가로 등치시킨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개념과 혼동한 것 같습니다.

     

    <보충>『한겨레신문』에 베네수엘라 차베스주의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나와 김수행의 차이 : 물론 이는 전태일연구소와 사이버노동대학과의 관계이기도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민주의에 대한 태도와 비슷하게)

     

    Q : 김수행 선생은 평소에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호소하셨습니다. 지금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작년의 촛불 투쟁과 지금의 미투 운동에도 함께 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두 분이 무엇을 함께 하셨을까요?

     

    A : 그가 살아있었다면, 촛불투쟁에 분명히 함께 하고 토론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이야기 했을 겁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세대를 넘어선 코뮤니스트운동으로서의 의미를 논의하고, 우리세대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적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진지하게 터놓고 토론했을 겁니다.

     

    2018년 5월

    오세철 사회실천연구소 회원 인터뷰

    이형로 작성

     c3b5802b1b133add20d6480015cc97a4.jpg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Q : 2008년 자본주의 공황 이후 유럽에서도 『코뮤니스트 선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맑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까?

     

    A : 내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간 게 1961년이야.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방법이 없느냐 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1학년 때, 책 읽기 위해서 일본 말을 서너 달 배웠어. 그때 상과대학에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책이 많이 남아있어서 일본 책으로 이론에서, 경제사에서, 경제사상사에서, 맑스와 맑스의 위치를 공부했지.

     

    독학으로 맑스주의 입문

     

    Q : 선배들 권유가 아니라, 선생님은 독학하셨네요.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하고 남산에서 고초도 당하셨죠?

     

    A : 우리 때는 권유 그런 거 없었어. 독학을 했지.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으로 [금융자본에 관한 일 연구]를 썼는데, 힐퍼딩과 독점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은행자본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느냐 하는 공부를 했지. 주로 일본 책 읽으면서,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경제학과 조교가 됐어. 신영복 선생님과 만나는 것은, 상과대 경제학과에 동아리가 있었는데, 경우(經友)회가 있었지. 내가 들어갔는데, 6기더라고, 신 선생은 2년 선배니까 4기지. 1년에 선후배 관계로 한 두 번씩 보는데, 신 선생하고 통일혁명당 사건에 걸린 것은, 내가 종암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가까운데 신 선생이 살았어. 그때 신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고 있었어, 내가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하도 힘들어서, 재밌는 책이 없느냐고 했더니, 신 선생이 갖고 온 책이 레닌이 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꽃 파는 처녀』로 기억해, 근데 보니까 한글로 돼 있더라고.

     

    Q : 선생님 그러면, 북한판본이네요.

     

    A : 맞아, 북한에서 나온 책이야. 그때는 그런 책이 남한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그걸 보고서, 어, “이거 어디서 난 거에요” 물었지. 그랬더니 신 선생이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읽고 나서 돌려줬지. 근데 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는데, 신문에 신 선생이 잡혀가고 청맥회가 거론됐지. 나는 68년 한여름에 잡혀 들어갔지. 상과대 경우회 사람들이 잡혀가고, 나한테도 올 것 같더라고. 부산에 도망가 있었는데, 내가 조교라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보부 사람들이 교무실에 매일 와서 앉아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갔지, 바로 잡아가더라고. 근데 사건이 종결될 때가 된 거야. 나 같은 사람은 크게 가치가 없는 거야. 신 선생하고 걸린 게 별로 없어서,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조사받으면서, 신 선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많이 맞았어. 정보부에서 사건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신 선생이 진술한 내용을 내게 던져주더라고. 근데 보니까, 책 빌린 내용밖에 없잖아. 그 사람들이 “이걸 읽어보고 인정해” 그러잖아, 그래서 인정했지. 그 당시 내가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부 수사관들이 조교하고 조교수를 구분을 못 해서 신 선생이 나한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나갈 때쯤 되니까, 정보부 수사관이 “당신은 기소 유예될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기소유예 받은 거지. 그러고 나서 학교 조교 사표를 냈고, 은행에 들어가서 영국에 갔지. 런던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인데, 거기에 영국 좌파들이 다 와 있었다고. 내 지도교수는 로렌스 해리스(Laurence Harris)라는 사람이고, 심사위원은 벤 파인(Ben Fine)이었어.

     

    “구소련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Q : 자연스럽게 대안 사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말하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최근에 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6장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결국 소련 사회가 레닌의 정치혁명 시기나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에도 결국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시나요?

     

    Q : 그래요.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도 소련 경제를 어떻게 개발할 거냐 하는 문제에 집중된 것 같아. 혁명과정에서 적군이 백군을 진압한 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거나 ‘국가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농업 집단화나 중화학 공업화의 추진 등에서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노동자의 해방’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요. 내가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런데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문제라는 것이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무계획성이다, 계획적으로 운영하면, 자본주의적 공황도 없고 낭비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개념이 빠지는 거야. 국유화의 의미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소유를 이전하는 것이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표지인데, 소련에서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군수산업 등 각종 산업을 건설하는 이런 식으로 갔다고.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인간의 탈을 쓴 게 자본가라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국가, 당과 정부의 관료나 노멘클라투라가 자본가계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Q : 선생님, 소련의 국영기업과 달리 예를 들면 콜호스, 소프호스는 소련의 집단 농장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해서 농민이 집단 경영을 하고,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콜호스, 소프호스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볼 수 있나요?

     

    A : 집단농장도 모두 정부가 통제했어요, 자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지. 생산량 할당하고 임금도 위에서 다결정하고.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그런데 소련에서처럼 정부나 당의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 노동자들이 일할 맛이 나겠어.

    소련 사회가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넘어갈 때, 레닌이 그러잖아, 경제를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가 빨갛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잘 모르는 사람이 공장 운영을 어떻게 해? 네프 도입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야.

     

    Q :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난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스탈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봅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나,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 정치적으로는 진영테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 비판을 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과거 소련 사회 경험에서 본 것처럼, 국유화가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 일부 운동진영에서도 국유화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A :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다가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부르든, 공산주의 사회로 부르든)로 간다는 거야, 이거는 엥겔스 도식이야. 새로운 사회가 계획경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노동자가 어디에 있어? 없지. 엥겔스 도식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계획경제의 실현을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했어. 진영테제는 이론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나 강제수용소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얘기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야. 옛날 소련경제를 전형으로 하는 중앙지령형 통제경제에서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동원한 노동하는 개인들은, 사실상 국가에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 노예에 지나지 않아.

    맑스가 생각한 노동자 해방,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동하는 그런 개념이 없어진 거야. 평의회나 이런 게 없어진 거야. 이런 게 문제점이라고 생각해. 혁명적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이 공장을 접수하여 임금노동제도를 폐기하고 자본가계급을 ‘노동하는 개인들’로 전환시켜서 계급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결국, 해방된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하고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잔재를 부수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급인 당이나 정부의 관료가 하니까 안 돼. 정부 관료가 “금년 목표는 이거야” 노동자들한테 “따라와” 이렇게 하니까 말로만 계획경제야. 지금 새롭게 나오는 소련 문서를 보면, 국영기업들이 이윤율을 올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센티브(incentive),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전체적인 계획경제도 안되고, 거짓말 보고만 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와 무엇이 달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이런 특수한 소련 자본주의를 시장에 다 맡겨 경쟁적 자본주의로 전환시켜야 비리가 없는 능률적 사회가 된다는 거야. 지배계급인 당과 정부의 관료가 국유재산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여 경쟁적 자본주의의 자본가계급으로 둔갑했는데, 소련의 역사 80여 년이 이런 식으로 쭉 연결된 거야.

     

    Q :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북한도 자본주의로 볼 수 있겠네요.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계급에게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가 잘 안 돼. 박정희체제를 국가 주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벌한테 모든 걸 맡긴 거야. 새로 탄생한 국영기업이 별로 없잖아? 정부가 재벌한테 금융혜택, 세제혜택 줬지. 외국 차관의 도입에 정부가 지급 보증을 했지. 재벌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것을 박정희가 총칼로 보호한 거야.

    흔히들 박정희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을 제압했다고 보면서 ‘국가주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킬 뿐이야. 독재적 정치권력은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해서 증권파동을 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재벌에 크게 의존했고, 미국 정부가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지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 권력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 따라서 ‘국가 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낡은 사회를 타파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혁명적 전환기’일 뿐이야. 실제로 해방된 노동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하여 공장을 접수하면서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야 한다고.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상품 화폐 자본을 없애야 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Q :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이행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이행기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행기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행기 강령에 시장도 사라지고 화폐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일반 노동자들이 볼 때 쉽게 다가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좌파들, 트로츠키 이행기 강령보다도 더 센 이행기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A :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론』에서 상품부터 시작하잖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고, 상품교환에서 화폐가 생기며, 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잖아. 상품, 화폐, 자본은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돼 있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는 노동하는 개인들이 모든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동으로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기에 생산수단이든 소비수단이든 사회적 생산물을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처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야 해. 이래야만 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거나, 가치에 따라 교환되거나 하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와 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이행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모든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이행기의 초기에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니까 화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공장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전국평의회로 가면서) 노동자들의 연합이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여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생산한 것을 각 가정에 ‘택배’로 배달하면 될 것이므로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이 화폐를 갖고 물건을 살 필요도 없어. 화폐가 계속 사용된다면, 화폐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폭등시켜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쿠바혁명에서도 체 게바라가 몇 번에 걸쳐 화폐개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붉은글씨』 창간호 중에서

     

    2012년 11월

    김수행 교수 인터뷰

    남궁원 작성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8KJ top.jpg

     

    내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1970년 11월, 전태일)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1848년 2월 , 코뮤니스트 선언)

     

     지구상의 모든 인류 가운데 오직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지배를 전복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거대한 투쟁에서 성공했다. 영웅적 저항으로 그들은 국제자본이 조직한 용병군대의 집중공격을 물리쳤다. 그리고 지금 비길 데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주의 기반위에 재건하는데 경제는 세계전쟁과 2년 넘게 지속된 내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러시아 평의회 공화국의 운명은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에 달려있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우리는 오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깃발을 높이 들어 이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노동자가 이제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비인간적인 생활조건과 정치적 무권리 속에서 노예적인 삶을 강요당해 왔던가. 그러나 보라!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일어서서 힘차게 진군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전국적 대오를!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부르주아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 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영구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투쟁을 가로 막았던 자본가와 국가권력의 온갖 탄압과 회유를 분쇄하고, 우리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광산에서, 거리에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해 왔다. 단위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투쟁 속에서 지노협과 업종협을 결성하였으며 마침내 지역과 업종을 뛰어 넘어 전노협으로 결집한 것이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차치하고 노동조합은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장벽이다. 세계대전 동안 그들의 태도는 잘 알려져 있다. 옛 사민당의 주요원칙과 전술에 대한 그들의 결정적 영향은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전쟁선포에 해당하는 “신성한 노조”의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 사회반역자로서의 그들의 효능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의 발발시기에 논리적으로 지속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평화를 위한 “노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위기를 느낀 독일 산업가들과 협력함으로써 반혁명적 의도를 드러냈다. 그들은 독일 혁명의 전 과정동안, 오늘까지 반혁명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 노동계급속에 점점 깊이 뿌리 내리는 평의회 사상을 가장 폭력적으로 반대한 것은 노조의 관료주의이다. 경제영역에서의 대중행동으로부터 나오는 프롤레타리아 정치권력을 위한 모든 노력을 성공적으로 마비시키는 수단을 발견한 것은 노조이다. 노조조직의 반혁명적 성격은 악명이 드높아 독일의 수많은 지도자는 노조집단에 속한 노동자만 고용할 것이다. 이는 노조관료주의가 줄기로부터 갈라지는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에 적극적 부분이 된다는 것을 전 세계에 드러낸다. 이처럼 노조는 부르주아 하부구조와 함께 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축 중의 하나이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를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코뮤니스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코뮤니스트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코뮤니스트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코뮤니스트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코뮤니스트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코뮤니스트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코뮤니스트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코뮤니스트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1848년 2월, 코뮤니스트 선언)

     

     코민테른의 정신에 충실하게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정복이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파괴한다는 의미에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 창설자의 사상에 따를 것이다. 부르주아 관료의 지도 아래 있는 자본주의 군대, 그 경찰, 간수와 판사, 그 성직자와 관료와 함께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총체를 파괴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번째 임무이다. 승리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타격에 대항하여 단련되어야 한다. 이것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과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착취자의 내전을 분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마지막 투쟁이 국경 내에서 해결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국경 앞에서 멈추고 세계를 통한 습격에서 민족적 양심이나 그 어떤 것 때문에 물러서는 것이 적을수록,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최면당하거나 국제적 계급연대의 기본사상을 상실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국제적 계급투쟁의 사상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명확하게 이해할수록,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원동력이 되고 해체되는 자본주의를 조각낼 세계혁명의 타격은 더욱 충동적이고 대규모적일 것이다. 모든 민족적 특수성을 넘어서서, (1920년 5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 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1970년 11월, 전태일)

     

     

     우리는 이제 이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통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전노협의 건설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밝힌다. 우리는 또한 정권과 소수 재별의 억압과 수탁을 제거하여 4천만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제 민주세력과 힘차게 연대해 나갈 수 있는 전국노동자의 조직적 대오가 출범하였음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선언문)

     

    1848년, 모든 지배계급을 코뮤니스트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코뮤니스트 선언)

     

    1920년, 모든 국경과 조국을 넘어서서, 영원한 봉화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비칠 것이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1990년, 억압과 굴종의 세월, 어용과 비민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전노협이 깃발 아래 강철 같이 단결하여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향해 힘차게 진군하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만세! 노동운동 만세! (전노협 창립선언문)

     

    1970년,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전태일)

     

     

    그리고 2018년? 2019년?

     

    전태일 열사 정신이란 무엇인가?

    전노협(민주노조) 정신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정신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당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는 왜 대답하지 못하는가?

     

    코뮤니스트 8호를 이렇게 엄중한 물음으로 발행합니다.

     

    2018년 11월 10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가 나왔습니다.

  • 8KJ.jpg

     

     

     

    COM8HO MOK.jpg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가 나왔습니다.

     

    □ 가격 : 1만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내일(토)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코뮤니스트>를 판매합니다.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지도 함께 판매합니다.

     

    코뮤니스트   2018년 _ 8호

     

     

    □ 코뮤니스트 8호를 내면서 

     

    □ 특집. 맑스 탄생 200주년  

    ‣ 혁명 투사 칼 맑스  ㅣ ICC / 한동이 

    ‣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ㅣ ICT / 편집부

     

    □ 정세 / 쟁점

    ‣ 플랜트노조 충남지부 해산 사태와 민주노조 원칙  ㅣ 구재보 

    ‣ 민주노총 「평화‧번영‧통일시대의 등장과 노동자 자주통일운동의 과제」에 대한 비판  ㅣ 조덕연 

    ‣ 인종주의와 노동자계급  ㅣ 이혜원 

    ‣ 성차별, 페미니즘 그리고 성해방  ㅣ 조덕연

     

    □ 코뮤니스트 정치

    ‣ 코뮤니스트 사회의 차별철폐와 평등에 대하여  ㅣ 이형로

    ‣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ㅣ 이혜원

     

    □ 문화

    ‣ 너희가 말한 모든 것은 불법이 되었다  ㅣ 임성용

    ‣ 장애인문화공간  ㅣ 라나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 민족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자 입장  ㅣ 이형로

    ‣ 민족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  ㅣ ICP

     

    □ 국제정세

    ‣ 세계의 계급투쟁 : 국제주의 노동자들의 목소리  ㅣ 신디

    - 러시아의 연금 '개악'에 맞선 투쟁  

    - 그라나다 지하철 노동자 투쟁  

    -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노동자계급  

     

    □ 기획번역

    ‣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  ㅣ ICC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회의를 제안하며  ㅣ 계승회의

    ‣ 코뮤니스트 혁명가 : 붉은 로빈 후드 막스 횔츠  ㅣ 이형로

     

     

    □ 코뮤니스트 조직 소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7호] 사랑의 급진성...

  • 「사랑의 급진성」을 읽고서...

     

     

     성? 사랑의 무엇이 어떻게 급진적이란 말인가? 얼핏 자유주의적 연애관이 떠오르기도 한다. 차가운 친밀성 시대에 만남은 종종 미리 설정된 프로그램(단순한 섹스 파트너 찾는 만남)에 따라 이뤄진다. 이렇듯 섹스 파트너 시대에 사람들은 단지 섹스하는 육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서 사랑이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의 급진성이 아닌, 사랑 없는 섹스이며 결코 급진적이지 않은 사랑의 비급진성이다.

    sdfhg.jpg

     스레츠코 호로바트(저자)는 몇 가지 전제를 제시하며 사랑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랑이냐 혁명이냐가 아니라 사랑과 혁명의 관계에서만 사랑의 급진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넘어서 사회, 정치혁명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과연 사랑은 급진적일 수 있을까? 사랑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등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성생활 및 관련 제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유재산제도와 계급이 발생하기 전에는 무리 단위로 생활을 하며 군혼을 하였다. 이 사회에서는 성 억압과 성 불평등이 없는 모계혈통 중심이었다. 지금처럼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이 없는 사회였다. 그 결과는 반사회적 성폭력, 성행동이 아니라 무리의 유대 강화와 생존으로 이어졌다.

     

    - 사랑과 섹스

     

     계급의 발생과 사유재산제도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형식적이고 강제적인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적 가족 탄생을 낳았다. 형식적 일부일처제는 혼전 순결 등의 성도덕과 성 억압, 성차별을 권위와 가부장적 권력을 통해 강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었다. 특히, 빌헬름 라이히는 이러한 성 억압을 통해 복종적이고 순종적인 인간이 재생산된다고 주장한다.

     

     라이히1)는 (남성의 경우) 발기/사정 능력은 단지 오르가즘 능력의 전제조건일 뿐이며 성기 장애가 신경증의 가장 중요한 증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보완하였다. 사랑 없는 섹스는 오르가즘 능력이 없으며 당연히 신경증을 해소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혁명과 사랑의 이분법뿐만 아니라 사랑과 섹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부정한다.

     

     그래서 충동의 만족을 통한 오르가즘에 이르는 길이 라이히가 생각하는 성해방의 방식이다. 하지만 성해방으로 나아가는 데는 개인 내적인 장애물과 사회적인 장애물이 있다. 라이히는 사회적 장애와 관련하여 성정치, 성혁명을 통한 성해방을 강조했다. 라이히에게서 성혁명은 정치혁명과 함께이며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성혁명과 정치혁명이 다른 개념이 아닌 근거는 신경증을 극복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과 충동의 삼중 구조이다. 신경증 증상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모습은 성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의 성격 구조가 아닌 단순하고 자명하고 온당한 성격을 보인다. 이에 따라 충동의 삼중 구조를 제시하였다. 자연스러운 일차적 충동(생물학적 충동), 반사회적 이차적 충동(생물학적 충동이 억압되어서 왜곡되어 나타난 반사회적 충동), 표면적 충동이다. 이를 통해 더는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왜곡을 풀어주어 자연스러운 충동이 펼쳐져 나가게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A6394.JPG

     <성정치, 파시즘의 대중심리 : 빌헬름 라이히>

     

    - 욕망, 다시 사랑의 급진성

     

     라이히의 작업은 사랑의 쟁취는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욕망은 비사회적이고 금기시되어야만 하는 무엇이 아니다. 사랑의 급진성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욕망은 전체주의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유방임주의부터 이슬람근본주의까지 적대시하고 있다. 왜? 욕망은 본질에서 혁명적이고 기존 사회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은 현 사회체제에 위협적이고 전복적이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욕망 역시 철저하게 계급화되어있다. (서구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이슬람근본주의 사회의 사례를 통해 피지배계급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당하지만, 지배계급에는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흥 부유층의 경우에는 상품 물신숭배와 욕망의 상품화에 따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제한에 반대하기보다는 소비의 자유를 통해 체제 위선적인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

     

     1917년 10월 혁명은 욕망의 폭발이고 초반부에는 성혁명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 법적으로 열등한 여성의 지위 폐지, 이혼/ 낙태 허가, 여성들이 결혼한 후에도 재산과 수입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했다. 그런데 1934년에는 동성애 반대법 통과, 낙태 금지 등등으로 후퇴하였다.

     

     구소련에서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경직된 속류 맑스주의자들의) 주된 불만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회 기여를 막는다는 것이다. 레닌에게서도 성적인 문제가 지나치게 널리 퍼지면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애쓰는 대신 기분 좋은 것들을 말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이네사 아르망은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은 성/사랑 혁명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혁명가는 혁명을 먼저 이루어야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월 혁명 직후 진보적 성해방 조치가 1930년대 접어들면서 퇴보한 상황 및 1960 -70년대 독일 등지에서의 코뮌에서 성해방 실험의 실패로 저자는 사랑과 성의 이분법적 사고를 원인으로 주목했다. 하지만 사랑의 급진성의 주제인 ‘사랑과 혁명’ 모두에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지 등의 구체적 분석과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한계도 있다. 그런데도 사랑의 급진성은 혁명의 급진성에서 발견되고 혁명의 급진성은 진정한 사랑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저자는 사랑에 빠져 사회와 혁명에 무관심한 경우와 정치혁명이 우선이며 그 이후에 성혁명을 하자라는 주장에 모두 반대한다.

     121800-wilhelm-reich-quotes-2047-4.png

    우리 인생의 원천은 사랑과 노동과 지식이다.

    인생은 그 세 가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 빌헬름 라이히

     

    - 사랑의 급진성, 오늘날의 의미

     

     노동해방 없이 성해방, 여성해방은 요원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적 불평등과 성 억압은 어느 날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계급 발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평등, 성해방을 포함하는 성혁명은 계급타파로 가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따로 일수가 없다. 이에 성적 자유와 성평등은 남녀 사이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계급 타파와 인간해방의 주제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이슈인 미투는 남녀 사이 문제에서 더 나아가 권력 문제로까지 제기되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을 보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반적 성억압(혼전 순결, 낙태 금지, 부르주아 도덕 교육, 종교 교리 등등)과 그 파생적 결과로 성적으로 파편화된 지배계급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도덕과 혼전 순결, 낙태 금지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폭로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적 자유가 무엇인지, 실질적 일부일처제 실현을 위한 사회적 전제조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불거진 특정 조직의 내부 민주주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혼전 순결과 낙태 반대를 내부 규정으로 삼아왔던 것이 폭로되었다. 충격을 넘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부르주아도 내팽개친 부르주아 도덕을 내부 규정으로 무장한 그들은 노동계급의 적일 뿐이다. 

     

     욕망과 도덕은 그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욕망과 도덕은 사회적이며 시대와 계급에 따라 다르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연계되었다. 대중의 다양한 구체적 관심들을 끌어내고 해결해 가면서 어떻게 커다란 문제와 연결해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대중에게 향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의 욕망에 귀 기울여 갈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과도 담을 쌓고 대중과도 담을 쌓고 깃발만 꽂으면 대중이 따라나선다는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는 허위와 기만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주>

     

    1)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87-1957) :

     1897년 갈리시아(폴란드 남부 지방)의 도브르치니카에서 태어났다. 1918년 비엔나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1920년에 비엔나 정신 분석학 협회에 들어갔다.

     이후 1930년 베를린으로 가서 정신분석상담소와 맑스주의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했다. 라이히는 한편으로 코민테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독일 공산당과,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트 학파와 대결한 뒤에 1934년 공산당에서, 그리고 국제 정신 분석 협회에서 추방당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3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오르곤 에너지'를 발견하였고, 1957년에 죽을 때까지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였다. 라이히는 뉴욕주와 메인주에 연구소를 설립했고, 1947년 식품의약 관리부의 조사대상이 되었고, 1954년 법정의 금지명령을 요청하는 고소장이 발부되었다. 라이히는 기초자연 연구에 관해 '피고'로 재판받는 것을 거부했는데, 법정모욕죄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57년 11월 3일 한 연방교도소 안에서 사망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강제적 성 도덕의 출현』(1932), 『문화적 투쟁에서의 성』(1936), 『성 혁명』(1966), 『파시즘의 대중 심리』(1933), 『성격 분석』(1933) 등 다수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사회(이행기)의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 코뮤니스트 사회(이행기)의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이번 주말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평등행진'이 있다. 그동안 이 사회는 인권과 기본권에서 형식적으로도 평등은커녕 철저하게 소수자를 배제하고 혐오세력을 양성해왔기에,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위해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행진을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실질적 평등과 차별철폐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글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본전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새로운 노동자권력의 계급적인 목적을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체제이며, 경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착취계급의 소유권을 몰수하고 사회화를 점진적으로 전체 생산으로 넓혀 나가는 사회이다. 노동자권력의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될 것이고, 계급 속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 가능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평의회 체제로 중앙화(집중)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 과정에서 혁명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노동자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혁명당은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하며, 평의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혁명당의 명령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 프롤레타리아 총회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만이 정치권력을 가진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 낡은 전통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계급과 계급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필요 없게 된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국가는 소멸한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다. 사회의 행정적 업무는 모든 구성원의 협력, 합의, 집단적 의사 결정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이상이 처음으로 실현된다.

     

    코뮤니스트 사회와 기본권(평등, 차별철폐)

     

    그렇다면 코뮤니스트 혁명과 함께 시작될 사회에서는 평등과 차별철폐가 어느 정도 이루어질 것인가? 현재 시점에서 즉각적인 목표로 삼은 코뮤니스트 강령 일부를 소개한다.

    이 강령은 이른바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구소련,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의 지배계급과 그들을 '노동자국가'라면서 방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가장 넓고 평등한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는다.

     

    모든 사람은 신체와 정신에 있어 어떠한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 사회에서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얻고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갖는다.

    모든 사람은 노동할 권리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사회는 모든 노동자에게 차별 없는 일자리를 보장하고, 노동에 필요한 교육과 평등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교육 자원을 누릴 권리를 갖는다. 모든 교육기관은 무상교육을 하고, 모든 사람은 평생교육의 권리를 갖는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와 건강권은 무상으로 제공하며, 거주 장소를 선택할 권리와 주택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 사상, 신념, 표현, 결사, 집회, 파업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반혁명적 정치 활동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과 노동자 조직, 비정부 조직에서의 정치 활동을 완전히 보장하며,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언론, 집회, 결사, 파업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갖는다.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모든 영역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고 알 권리를 가지며, 사회의 모든 정치·문화·윤리·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해 제한 없이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의 기본원리인 ‘인간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성, 직업, 국적, 종교, 인종, 신념, 지위, 신체조건, 학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차별도 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권리와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코뮤니스트 혁명과 함께 완전하고 조건 없는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영역, 모든 노동에서의 성평등을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한다. 결혼과 가족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며, 법적인 통제 없이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요구만으로도 이혼을 보장한다.

     

    하나,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누릴 권리와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막을 의무를 동시에 갖는다.

     

    모든 인류가 누릴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위해 평의회와 기업과 사회구성원들의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감시하고 통제할 권리를 모두가 갖고 실천한다. 자연을 보전하고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사회는 자원 수탈과 대량소비에 의존한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진한다.

     

    공약과 강령(형식과 실현)의 차이

     

    부르주아 정치와 선거에서의 공약은 소수 지배계급(정치세력)의 다수 대중에 대한 지키지 못할 약속이거나 명령이지만, 코뮤니스트 강령-프롤레타리아 혁명 강령은 다수 계급이 혁명과 자기 권력을 통해 직접 실현할 목표이자 실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철폐를 위한 법 제정 투쟁은 한계가 있지만, 모든 차별과 혐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조건이기에 더욱 확산되어야 하고 근본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 ‘국가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게 만드는 투쟁’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가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면, 형식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평등을 위한 투쟁과 스스로 결정한 직접행동이 ‘공약’이나 ‘국가 의탁’을 넘어 소수자를 포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기 권력으로 사회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진정한 평등과 차별철폐를 실현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고 행동해야 그곳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다.

     

    44151973_1360882320715055_3993533649214504960_n.jpg

    <원문>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1&document_srl=33623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장투쟁] 자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8/10/07 20:47
  • 수정일
    2018/10/07 20:4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 자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

    SKB비정규직지부 농성 현장을 찾아서

    - 임성용

     

     

    1. SK그룹 본사 농성 77일째

     

    지난 9월 14일 저녁, 종각역 6번 출구에 있는 SK그룹 본사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산하 ‘SKB비정규직지부 투쟁 승리를 위한 금요연대문화제’가 열렸다. 77일째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문화일꾼들이 참여해 진행해온 연대문화제다.

    SK브로드밴드(SKB)는 거대 통신사인 SK텔레콤의 자회사로, 인터넷, IPTV, 전화를 설치하고 유지 관리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다. 전국에 103개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각 지역센터는 SK텔레콤과 위, 수탁 계약을 맺은 별도 법인 형태이며 노동자들은 전원 간접고용형태다.

    문화제는 노동조합 정책실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전남동부센터에서 상경한 조합원의 투쟁발언, 섹소폰 연주, 비보이 춤꾼의 신나는 춤, 시낭송, 노동가수 김성만 씨의 노래가 곁들여졌다. 참석자는 50여명,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요즘 분위기로는 적은 숫자도 아니다.

    부분파업 중인 조합원들이 문화제 때마다 각 지역에서 교대로 단체 상경하고 있었다. 이날 순천에서 버스를 대절해 올라온 조합원은 활달하고 의지가 넘쳤다. 순천센터에는 30명 정도의 조합원이 있고, 순천과 여수 등 도시지역뿐 아니라 인근의 군ㆍ 읍면까지 전남 동부일대의 서비스를 담당한단다.

     

    “노동시간 단축, 안정된 임금 보장도 중요하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회사 전환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하면서 애초부터 ‘진짜 사장이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143297_215338_3103.jpg

     

    상경 조합원의 말에는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다. 여기서 SKB비정규직지부의 역사를 살펴보자.

     

    2. 자회사 만들기 꼼수

     

    SKB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은 4년 전인 2014년 3월 30일이었다. 상부노조로는 ‘희망연대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희망연대노동조합’은 통신노동자, 콜센터, 물류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한 노조 가입이 힘든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서비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권리보장 사업을 하고 있으며, 지역이나 기업과 관계없이 개인도 가입할 수 있는 초기업노조이다. 노동조합이 지향하는 활동이나 신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목표로 한다. 2009년 12월에 창립되었다.

    SKB에 노조가 생기고 각 현장에 지회가 결성되자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센터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야간근무, 휴일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노조의 교섭 공문을 부착하지 않은 센터들은 조합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2014년 11월, SKB지부는 다단계 하도급 근절, 고용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첫 전면파업에 나섰다. 이 시기에 현장지회장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결성하여 즉각적인 파업에 나설 것을 노동조합에 촉구하기도 했다. 현장지회장들의 행동은 조합원들의 압력을 반영한 것이었기에 매우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SK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파업 50일 만인 2015년 1월 6일 SK그룹 본사 건물에 대한 점거투쟁에 돌입했다. 이날, 200여 조합원이 종로구 SK그룹 본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다 전원 경찰에 연행되어 크게 보도가 되었다.

    한 달 후인 2월 6일에는 SKB와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 두 명이 장기파업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중앙우체국 앞 15미터 높이의 전광판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장연의, 강세웅 두 노동자는 고공농성에 돌입하면서 “원청인 통신대기업들이 사용자로서 책임을 갖고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설 때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통신노동자들의 광고탑 농성은 8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런 투쟁에 힘입은 희망연대노조는 이듬해 3월 초, 중재인이 참여한 가운데 회사 측과 교섭을 벌인 끝에 그 결과를 전체 조합원 찬반투표에 붙여 통과 시키고, 4월17일 조인식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이었다. 임단협이 체결되었으나 각 현장은 이를 적용하는 문제로 센터 측과 승강이를 벌여야 했고, 센터의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요구가 계속되자 SK는 교묘한 수법을 택한다. ‘홈엔서비스’라는 자회사를 만들어서 기존의 비정규직들을 이 회사에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SKB에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하라는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접고용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무늬만 정규직인 전형적인 꼼수를 부린 것이다. 현재 투쟁 중인 노동조합의 이름은 ‘SKB 비정규직 지부’인데, 그 사용자 주체가 ‘홈앤서비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회사 측이 노동자의 여망을 자회사를 통한 하청화로 교묘히 왜곡시킴으로서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복수노조가 만들어져 노동조합이 분리되고, 노동자들은 전환과 미전환으로 이간질되었다. 홈엔서비스가 만들어지면서 일부 노동자가 홈엔서비스 쪽 노조에 가입, 사측 입장에 동조해 투쟁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다행히 그 숫자는 훨씬 적어서 SKB비정규직지부는 2017년 8월, 창구단일화 절차를 통해서 교섭대표노조의 지위를 획득한다. 2018년 현재 홈엔서비스 조합원은 760명으로, SKB비정규직지부의 1,600명보다 훨씬 적다. 또한 홈엔서비스 조합원 중에도 200명은 이번 파업에 찬성했고 극히 일부지만 파업에 동참하기도 한다.

    회사가 자회사를 택한 이유는 당연히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노동조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임금도 변한 게 없고, 오히려 근로환경은 더 악화된다. 자회사는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쉽게 하는 수단임이 입증되었을 뿐이다.

    결국 올해 2018년 6월 29일, SKB비정규직지부는 다시 파업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3. 파업의 의미와 문재인 정부

     

    SKB비정규직지부 파업의 의의는 정치적으로도 크다.

    공공부분을 비롯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러나 일부 공공부문에서 무기계약직 전환을 했을뿐,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었다. 오히려 여러 공기업들의 정규직을 가장한 기만적인 자회사 꼼수는 더 심했다.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문제도 다를 바 없는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 중에서 특히 현대, SK와 손발을 맞춰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발표하자 민간 기업에서는 최초로 SK가 비정규직 직고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그 직고용이라는 것이 한낱 자회사 설립이었다. SK 투쟁에서 보듯이,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상 ‘정규직화 제로’이다. 따라서 SKB비정규직지부의 파업은 문재인 정부를 정조준하는 셈이다.

    이번에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쌍용차 해고자 119명 전원복직 합의에 매우 기쁘고 감회가 깊다”고 했다. “걱정이 많으셨을 국민께 희망의 소식이 되었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으로 “긴 고통의 시간이 통증으로 남는다.”고도 했다.

    대통령이 진심으로 고통을 느꼈다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음속으로만 희망이니 기쁨을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로 희망을 주는 정책을 실행하고, 비정규직에게 기쁨을 주고, 노동자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노동, 사회에서 만연한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젠 몇몇 개인이나 특정 노조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전 노동자적인 단결과 계급투쟁의 전망이 실종되면서 사업장도 변하고, 현장도 변하고, 노동자도 변하고, 노조도 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다.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SKB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이 아직은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싸우고 있지만, 상급노조와 노동자조직에서는 이 중대한 투쟁의 불씨를 전국적으로 상승시켜야 한다.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싸우고 있는 SKB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모든 노동자들이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할 것이다.

     

    4. 승리를 위하여 연대를!

     

    이번 파업을 이끌고 있는 정범채 지부장은 이날 문화제 마지막 발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화수목, 교섭을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측에서 우리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소고발하고,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어떻게 교섭이란 걸 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도 사람이라면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도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탄압일변도로 나올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섭장에 나간 겁니다. 저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교섭 이틀 전에 대표에게도 얘기했습니다. 진짜 추석이라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대체인력부터 빼고, 징계와 고소고발도 무효로 해라! 저들은 이야기합니다. 대체인력은 고객서비스 때문에 뺄 수 없고 징계라든가 고소고발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 하겠다고 합니다. 교섭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일 쟁대위를 통해서 앞으로 투쟁방향을 동지들과 함께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저는 투쟁에 있어서 동지들이 정말 가열차게 잘 싸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측은 이렇게 잘 싸우는, 특히나 가열차게 선봉에선 부대들을, 대표적인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소고발하고, 그것으로 우리 노동조합의 예봉을 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일 쟁대위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 투쟁기조가 진짜 생활임금이고 뭐고 다 좋은데, 그런 생활에 필요한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소중한 동지들에 대한 징계와 고소고발을 기필코 막아낼 수 있는, 그러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저들이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의 작태들, 저런 기세를 우리가 꺾지 못한다면, 교섭도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교섭위원들에게 많은 좋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근데, 교섭자리에선 그런 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하게 저들을 압박할 때, 저들은 꼬리를 내리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섭에서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말 우리 노동자들의 이 절박한 마음 하나하나가 묶여서 투쟁심으로 똘똘 뭉치지 않는 이상 교섭은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소중한 동지들, 정말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섭이고 투쟁이고 정말 나를 지키고 내 앞에 동지를 지킨다는, 내 가족을 지킨다는 그러한 각오와 투지로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photo_2018-09-15_09-08-07.jpg

     

    지난 여름, 그 무더운 폭염을 이겨내고 농성장을 지켜온 정범채 지부장은 6월 말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지친만큼이나 목소리도 차분했다. 그러나 그가 외치는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하자!”는 구호 한마디에는 절박함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SK그룹 본사가 있는 서린빌딩 기둥을 등지고 세워진 농성천막, 빌딩 앞 도로변에 묶인 많은 현수막들, 가로수를 이은 줄에 매달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가 적힌 빨간 리본들 너머로 수많은 행인들이 무심하게 또는 궁금한 듯 바라보며 지나간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부끼는 것들을 깨끗이 걷어내고 SKB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이 투쟁의 승리를 만끽하며 활짝 웃는 날은 언제일까?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기업에게만 맡겨둔 채 방관하고 있는 한, 그런 날은 요원해 보인다. 우리가 비정규직 투쟁을 개별사업장 문제로 보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면 역시 좌절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압박이 필요하다. 자회사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필자 : 임성용. 운수노동자, 시인. 시집으로 <하늘공장> <풀타임> 산문집 <뜨거운 휴식>이 있다.

    *월간 '시대' / 2018년 10월호.

     

    photo_2018-09-15_09-07-34.jp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7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  

    • KakaoTalk_20161108_182831034.jpg

     

     노동계급이 자신을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 즉 ‘계급으로서의 자기 조직화’와 ‘혁명적 계급의식’은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노동계급은 사회 전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이전 계급들과는 달리, 현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미래 사회를 지배할 권력의 어떠한 경제적 토대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계급이 가진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 조직화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조직화는 다른 계급보다 훨씬 더 그들 투쟁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이룬다.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힘은 조직상의 절대 우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단결하지 않으면 분쇄 당한다. 노동자들의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공통된 이해를 위해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 노동계급은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단결과 연대에 기반을 두어 계급으로 조직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기 조직화는 가공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조직화와 연대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붕괴시킬 수 없다.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는 반드시 전투적 의지와 집단적인 의식으로서의 ‘혁명적 계급의식’과 결합해야만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발전시킬 수 있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투쟁을 벌일 수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이다. 노동계급의 한 부분인 혁명조직(당)은 전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혁명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장악하고 행사한다. 

    혁명조직은 계급의식의 발전과 조직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혁명조직은 대중들이 혁명 강령으로 향할 수 있도록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철폐하는 길에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자본주의 아래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노동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혁명 강령 없는 혁명조직은 존재할 수 없으며, 혁명조직은 투쟁하는 노동계급과 조직적으로 함께해야만 혁명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들과 혁명조직은 항상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속에서 노동계급의 요구와 자기 조직화를 방어하고, 계급의 민주주의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항상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본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신을 조직하려는 모든 경향들(비공인 파업 투쟁, 직접행동,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노동자평의회 등)의 출현과 확산을 촉진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 점거 투쟁에서의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론의 장, 프롤레타리아 정치 광장을 통해 계급의 민주주의와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이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가 될 것이다.

     

     혁명조직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조합(주의)의 한계에 막혔을 때 과감히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직접행동, 노동자 공동행동, 비공인 파업, 대중(대대적)파업을 촉진해야 한다. 비공인 파업 투쟁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했다. 혁명 시기가 오기 전까지 혁명조직은 모든 계급투쟁 속에서, 자본에 맞선 경제적 요구들과 정부에 대항한 낮은 차원의 정치적 요구들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타도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이 상시화, 전면화되고 정치적으로 상승할 때 혁명조직은 구체적으로 파업위원회들과 노동자총회, 대중총회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집중시키고, 노동자평의회 건설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이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혁명 강령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서로 조직한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정치표현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너무 늦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혁명 강령의 명확한 세부 내용이 잠재적인 구성 부분 사이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관련된 모든 면에서 명료화해야 한다.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7호]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하다.

  •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하다.

     

     최근의 이른바 (노동당) 비선/언더 조직 사건은 그 조직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슨 활동을 하는 가와 상관없이 가부장적, 위계적, 반여성주의적, 반인권적 조직 행태가 드러나면서 모두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20년 전 기준으로도 지금 폭로된 폐해들은 정상적인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권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 혁명 운동 조직은 필연적으로 비공개, 비합법, 수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모든 비공개 조직이 이토록 폐쇄적이거나 억압적이지는 않았다.

     

    현재에도 코뮤니스트 조직과 같은 혁명조직은 활동을 공개적으로 해나가면서도 적들의 공격과 탄압에 대비한 조직구조로 되어있다. 하지만, 혁명적인 조직일수록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져야만 혁명적 실천과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조직 내부에 분파활동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지만, 사적인 비선이나 언더는 존재할 수 없다. 이번 ‘언더’ 조직 사건과 같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규율은 조직과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킨다. 혁명조직의 규율은 강요가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와 민주적 토론능력을 통해 강화되기 때문에 토론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운동을 갉아먹는 반운동적 해악으로 간주하고 그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그렇다면 혁명조직은 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00px-Presidium_of_the_9th_Congress_of_the_Russian_Communist_Party_(Bolsheviks).jpg

     

    - 혁명조직(당)의 본질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은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바로 그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하다. 혁명당(또는 그에 선행하는 혁명조직)은 전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강령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의식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혁명당은 늘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수일 것이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코뮤니스트 강령은 전체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이행될 수 있다. 코뮤니즘을 확립하는 임무는 전체 노동계급에 달려 있다. 그것은 의식적인 계급의 전위일지라도 위임될 수 없는 임무이다.

    따라서 혁명당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장악하고 행사한다. 당은 계급의식의 발전과 조직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혁명 강령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서로 조직한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정치표현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너무 가련하고 너무 늦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혁명 강령의 명확한 세부 내용이 잠재적인 구성 부분 사이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관련된 모든 면에서 명료화되어야 한다.

    이처럼 혁명당은 국제적인 전망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수행해야 할 어떠한 ‘민족적 책무’ 갖지 않으며, 세계적 기반 위에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혁명당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건설되어야 한다.

     

    - 혁명조직의 구조에 대하여

     

     오늘날 혁명조직은 일상적 정치토론과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평의회 구조와 높은 정치의식 통일(균질화)과 행동 일치를 끌어내는 ‘민주적 중앙화’를 조직 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에서 혁명당의 조직은, 상상처럼 존재할 수 없으며,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구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비록 혁명당의 평당원 동지와 그 안에서 선출된 지도부 사이의 관계에서, 즉 ‘자유와 권위’ 사이의 관계에서 ‘민주적 중앙화’는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유일하게 건강한 방식이며, 더욱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유지될 수 있다.” (유기적 중심주의냐 민주적 중앙화냐), 1951, 오노라토 데이먼

     

    이러한 구조는 한국과 같이 대중조직, 정치조직을 막론하고 박제된 구조(총회-대의원/전국위-중앙위-중집/운영위/대표)를 갖는 곳에서는 생소할 것이다. 특히 조직 내 다수파 차지와 핵심 기구의 장악이 전체 조직의 장악으로 연결되는 형식적 민주주의(낡은 민주집중제)에 갇혀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낡은 구조가 아래로부터의 권력, 의식과 투쟁의 발전을 막아온 주요 원인 중 하나이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현재의 이른바 ‘민주집중제’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형식적인 ‘다수결 원칙’, ‘대의제’와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식으로 변질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상설로 위임된 ‘중앙기구’에 의해 관료화되어 버렸다. 더욱이 최근까지도 일부 정파는 ‘민주집중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 ‘분파금지’ 제도마저 유지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사회의 다양한 기능에 더 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세계적으로 소통하고, 세계적인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의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그들이 추구하는 민주집중제는 너무 낡았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 가장 소통이 잘되는 구조이며 가장 집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적들의 탄압이 정교해진 만큼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정교하고 창조적인 소통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 조직 내부의 차이와 통일에 대하여

     

     혁명조직은 내부의 의견 차이와 행동의 통일을 위해 두 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하나, 조직 내부의 정치의식 발전이 제한 없이 완전히 가능해야 하고, 획일화되지 않은 조직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수많은 의문과 의견 차이를 억압하지 않고 가장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할 수 있게 보장한다.

    둘, 토론의 자유와 함께 조직의 단결과 행동 일치를 보장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조직의 모든 단위가 토론과 아래로부터의 결정으로 채택한 사안을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혁명조직에서는 만장 일치주의를 경계해야 하며, 토론의 중요성, 논쟁과 이견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 내부의 분열적 요소와 존재는 조직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토론문화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절대 배제하지 않는다.

     

    “혁명조직이 자신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인 계급의식의 발전과 확장을 완수하려면, 집단적이며 국제적이고 동지애가 담긴 공개토론 문화의 발전이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성숙(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적 성숙)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 국제코뮤니스트 흐름, 『International Review)』131호, [토론문화 : 계급투쟁의 무기]

     SDASFDFSXDXV.JPG

     우리는 현재의 수준에서 혁명조직에 대한 이해 부족과 왜곡, 그리고 악의에 찬 거짓선전과 힘든 싸움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부에 건강한 토론을 끌어내고 활성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위기가 심화 될수록, 부르주아지의 무기는 날카로워지고 있다. 더욱이 계급 운동 내부에 조합주의, 의회주의, 민족주의(스탈린주의), 반여성주의, 인종주의 등 대중들이 피해야 할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본을 말하고 기초를 튼튼히 하고자 한다. 많은 시간과 조직적 개인적 성숙이 필요한 만큼 더 열어놓고 토론하고 경험하고, 투쟁 속에서 원칙을 세워나가고자 한다. 우리가 제안한 정치원칙이 이러한 토론의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7호]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임성용

 

 

 지난 4월 17일, 낮 열두 시 무렵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뒤편에 있는 추모비 앞에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봄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 붉은 담벼락이 높다랗게 둘러싼 언덕 아래에는 ‘조선의 혼그릇’이라고 이름 붙인 주발 형태의 철재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혼그릇을 이룬 쇳조각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은 항일독립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6·10만세 항쟁의 주역 권오설의 이름도 있었다. 그 추모비를 정면에 두고 한 장의 현수막이 걸렸다.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라고 적힌 것이었다. 현수막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에 담긴 얼굴 하나가 점차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수인복과 수형번호, 그리고 權五卨이라는 흰색 성명을 앞가슴에 달고 있는 강고한 인상의 사내였다. 수형자의 모습으로 찍은 당시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는 다름 아닌 조선의 젊은 볼셰비키였다.

 44201.jpg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볼셰비키 혁명가, 권오설

 

  6·10투쟁 지도특별위원장 권오설은 1928년 2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기 전까지 일경은 예심 기간이라는 것을 두어 2년 동안이나 그를 심문했다. 결국, 혹독한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 병감에서 숨졌다. 1930년 4월 17일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보통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린다. 아니면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권오설 역시도 독립운동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권오설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뛰어넘는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책임지고 투쟁을 주도한 6·10만세 항쟁의 혁명적 성격을 살펴보면 그것은 확연해진다. 

IE000803551_STD.jpg

 ‘모든 인민이여 귀를 기울여라- 들려오지 않은가 노동자 농민을 전위로 한 인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우렁찬 발소리- 이 강산을 진동시킨 「조선 독립 만세」의 고함- 이날이 바로 지난 21년 전 일제와 가장 용감히 싸운 조선공산당의 영도 아래 노동자 농민을 전위대로 한 학생 소시민 지식층 등 모든 조선 인민이 독사 같은 일제의 눈초리와 총칼 밑에서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 독립 만세」 「토지를 농민에게」 「애국자 혁명가를 석방하라」하고 과감히 궐기한 조선해방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제21주년 6·10만세 운동 기념일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노동자가 일어섰다. 농민도 궐기하고 학생도 소시민도 지식층도 일본의 주구 이외의 조선 인민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이 날. 전 인민의 무자비한 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만세 소리의 폭풍은 전선 방방곡곡을 휩쓸었다.’    - 《독립신보》 「민족의 자랑 6·10만세 기념일-조선공산당 영도 아래- 이조 최후 왕·국장일에 반제항쟁」이라는 제목의 기사

 

 위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오설이 특별위원장을 맡았던 6·10만세 항쟁은 1919년에 전개되었던 3·1만세 운동과는 다르다. 6·10운동은 그 규모가 3·1운동보다는 작았지만, 조선공산당 중앙기구 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비서인 박민영, 조선공산당 조직원이며 공청 선전부원인 이지탁,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권오설 등이 주도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나서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6·10만세 항쟁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특히 권오설이 핵심을 맡은 사업이었다. 1926년 5월 3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 회의에서 6·10투쟁 총책임자로 권오설을 선임했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고려공산청년회, 조선노동총동맹을 주축으로 해서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권오설은 6월 7일, 사전에 투쟁계획이 발각되어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고보 학생이었던 이현상(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권오상, 이선호가 다시 선전문을 만들어 예정대로 6·10투쟁을 진행했다.

따라서 일부의 관점에서는 3·1운동보다 6·10투쟁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종교, 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좌우는 물론 조선의 모든 혁명 대중을 하나로 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3·1운동 때, 조선 민족 대표라는 33인들의 얼빠진 행적과는 달리 6·10투쟁은 조선공산당이라고 하는 ‘전위당’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대중들의 민족해방 의지를 끌어모으는 데 집중했다. 즉 6·10투쟁에는 ‘당’이 있고, 강철 같은 당에 목숨을 맡긴 ‘당원 동지들’이 있었다. 3·1운동 앞에 이름을 내세운 종교 지도자들,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인텔리들, 민족주의자들은 6·10투쟁이 일어나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천도교 신파에서 함께 참여한 것뿐이었다.

3·1운동 때의 ‘독립선언문’과 6·10투쟁 때의 ‘격고문’은 뚜렷이 다르다. 6·10투쟁의 격고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싸움에서 처음으로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혁명적 방법론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같은 투쟁 슬로건은 조선 혁명의 전환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혁명 정신은 조선공산당이 와해한 1928년 이후에도 경성 트로이카, 경성 콤그룹으로 끊임없는 재건작업을 시도했다. 격고문을 보자.

 

 ‘......현재 세계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계급에 대한 무산자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 1926년 6월 10일, 격고문 중에서

 

 그럼 이와 같은 민족해방-계급해방 정신을 바탕으로 6·10투쟁을 계획하고 준비한 권오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권오설은 경북 안동의 잔반가에서 태어났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형편에도 가숙인 남명학교에 들어가 동화학교에 편입, 졸업한다. 대구고등보통에 입학했으나 민족사상을 부추기다 퇴학당한다. 2년 뒤,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그만둔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고용원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광주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체포된다. 그는 배후조종혐의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0년부터 고향에서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학습강습회’ ‘풍산소작인조합’ 등의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설립하고 농민,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는 불과 일이 년 만에 사회주의단체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한다.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에 가입했다. 화요회는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4년 4월, 260여 개의 가입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 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된 그는 대동인쇄 동맹파업, 양말직공파업, 고무직공파업, 양화직공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 조직 준비위원을 한 그는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아울러 그는 조공의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에 조선노동총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1차 검거(신의주 사건)로 책임 비서 박헌영이 붙잡히자 김찬, 조봉암 등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게 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가 되었다. 즉 2차 조선공산당의 강력한 실력자가 권오설이었다. 그가 벌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6·10투쟁 이었다. 그는 만세시위에 나설 학생들을 규합하고 상해에 있던 김단야, 조봉암 등과 연락해서 격문전단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는 한편 국내에서 투쟁 슬로건이 담긴 격문을 십만 장이 넘게 인쇄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 날인 국장일에 맞춰 전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실행하려던 그는, 거사 사흘 전에 인쇄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도중, 그는 일경을 고소하면서까지 고문에 맞서 대항하였으나 끝내 옥사하였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건 이후, 그해 11월 ‘신의주사건’ 1926년 6·10투쟁, 그리고 1928년 당 책임비서 차금봉이 피검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만에 열린 추도의 기념식

 

 

 권오설을 비롯한 조공 핵심 인물들의 망명과 검거, 구속, 옥사로 조공은 치명적인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재건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그대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31년 2월, ‘ML파’ 사회주의자그룹은 상해에서 기관지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발행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화요파’ 출신인 김단야, 권오직 등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단야 등은 1931년 3월, 박헌영과 『콤뮤니스트』 창간호를 발간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1933년 8월, 서울에서는 이재유를 중심으로 경성 트로이카그룹이 결성되었다. 1934년 11월 경성재건그룹, 193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경성준비그룹 등을 거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1939년 4월, 이관술과 김삼룡이 경성 콤그룹 지도부를 다시 구성했다. 특히 1930년대 들어와서는 혁명적 노동조합,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검거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당 재건 방침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전국적 조직건설을 통해 당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의 결렬과 조선정판사사건,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의 테러, 미소 간의 정세 변화에 따라 통합적 지도력 강화를 위해 남조선로동당으로 해소되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삼두마차를 필두로 하는 경성 트로이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소에서 병사했고,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죽었고, 남로당 책임자였던 김삼룡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주하와 함께 총살당했다.

2018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을 진행한 주최자가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로 되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는 단체가 아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가열 차게 했던 경성 트로이카 혁명가들의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몇몇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침 조선공산당 창립일과 권오설 사망일이 4월 17일로 같은 날짜였다. 그리하여 권오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었던,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들이 옥살이했던, 바로 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추도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권오설 동무가 옥사한 지 88년 만에야 역사와 죽음의 현장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었다. 그 이면에는 사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기도 했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는 시민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가의 시설물이므로 조선공산당 기념식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라는 현수막을 만들어갔지만, 그것을 공공연하게 내걸지도 못했다. 권오설의 삶과 죽음이 조선공산당 투사들의 삶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정신이었기에 그 모든 동무를 위해서 한 송이 하얀 국화꽃을 바치고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하는 것으로 위로 삼았다. 차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여 조선공산당 창립 100주년 기념을 앞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성원 넘치는 행사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 만세!’ 추도식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의 가슴 속엔 이 한 마디의 외침을 품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의 동지들이 분명한 결의와 각오로, 공부와 실천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선배 동지들의 뜻을 이어가자고 한 사회실천연구소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를 옮겨 적는다.

214241.jpg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오세철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굉장히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권오설 선생 시대에, 1910년 20년대 초기부터 조선 공산주의운동 역사를 제대로 실천하신 동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경성 콤그룹 구성원들이 있지만, 우리가 공부하고 이해하기로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 특별히 맑스주의 원칙과 사상을 끝까지 올바르게 붙들고 실천한 사람들이 경성 콤그룹 포함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 그룹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공부했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를 포함한, 또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젊은 동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무얼 붙들어야 하는가? 세계사적으로 붙들기도 하지만 조선의 공산주의 역사에서 누굴 붙들어야 하느냐? 어떻게 운동을 붙들어야 하느냐? 이런 고민을 하거든요. 공부하면서 그래도 그 시대에, 그 운동을 앞장서서 하셨고 또 실천하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던 동지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 여기에 처음 나온 이유입니다. 역사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추도사가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어떤 생각으로 나왔냐 하면, 앞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이, 또는 앞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겠다는 젊은 동지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결의와 각오를 우리 권 선배님에게 전달하는 의미로 나왔어요. 추도사 아닙니다.

 

그래서 짧게 이야기할게요. 최근에, 작년이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고, 올해가 맑스 탄생 200주년입니다. 내년이 코민테른 100주년이에요. 3년이 연속으로 이어져서, 이것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서, 제가 3년 동안 행사를 하는 게 아니고 공부를 좀 합시다! 그랬어요. 동지들한테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그래서 작년엔 러시아혁명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하고, 러시아혁명이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건 혁명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지만 왜 변질되고 퇴화했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한마디로 하면 그거는 그 원칙과 사상을 져버린, 우리가 보니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특별히 총칭으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서 역사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하기로는...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로 안 봅니다. 우리는 백 개의 공산주의가 있고 백 개의 맑스주의가 있는데, 그러면 진짜가 뭐냐? 그것을 찾는 운동! 저는 그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특별히 권오설 선배 동지가 했던 그런 운동과 세력은 거기에(공산주의) 가장 가까웠다고 저는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뭘 해야 하는가? 그것을 세계운동 속에서 찾아야 하고, 우리 운동도 있었지만 이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계속 토론을 하면서 그것을 찾자, 제발 스탈린주의 좀 버리자, 운동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게 우리가 작년에 공부했던 것이거든요. 올해 이제 맑스에요. 올해가 맑스 2백 주년인데, 맑스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다시 찾는 게 아니고 먼저 돌아가서 찾자. 다 떠났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시 제대로 된 사상으로 돌아가서, 그럼 지금 맑스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느냐, 아 그걸 계속 공부하자. 금년은 그 공부를 합시다. 맑스 2백 주년 맞아서 그 공부하고, 2년 공부한 다음에 내년 아니에요? 그럼 코민테른 백 주년이에요. 그런(공부) 다음 당이고 뭐고 전략은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내가 그랬어요. 아까 무슨 당 이야기도 하셨지만, 우리가 그런 당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부 좀 하시고 그 토대 위에서 전략도 이야기합시다. 그때 뭐 세계 혁명당을 이야기하든지 그렇게 합시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부하고 있어요.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고딩이 됐거든요. 고등학생... 무슨 말씀인지 모르죠? 제가 열여섯 살이 됐다는 겁니다. 60을 버리고 한 바퀴 돌았으니까, 이제 열여섯 살이 됐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래서 공부 좀 합시다, 제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이제 공부하는 것을 보여드릴게요. 공부만 하지 않고 한 다음 실천을 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면서...

오늘 추모제를 보면서, 각 공산주의자의 추모사업회가 따로 있어요. 제가 알기로 이일재 선생도 계시고 이수갑 선생도 있고 남궁원 동지도 있고, 아! 개인으로 제발 그러지 맙시다. 이제 개인추모사업회는 자기들끼리 하더라도 좀 다르게 합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코뮤니스트정신계승회의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실천하는 모임을 하자고, 모시는 것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전 여기 오면서 나중에 점심 드시면서도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운동을 그렇게 하자는 거죠. 추모하실 분들은 또 이렇게 하시고 실천으로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을 제대로 하는 그런 모범을 좀 보입시다. 또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이 결의로, 헌사로 권선생님에게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

 

 

 

*웬 뜬금없는 조선공산당 추모식이고 기념식인가 하고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시 한편으로 답을 대신한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옆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사형장 밖에서 목 놓아 울며 그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전에 사형장을 지키고 섰던 미루나무는 언젠가 비바람에 쓰러져 없어졌고, 지금은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서 있다고 한다.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푸르게 자라듯, 코뮤니즘 혁명을 향한 진군의 역사는 또다시 되살아올 것이리라 믿는다. 모든 사라진 것들은 돌아온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pdf

 

 

미루나무

 

임성용

 

미루나무는

비바람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무친 것이 있다

 

어떤 통곡이 있다

어떤 기억이 있다

달그림자 드리워진 올가미가 있다

 

울며 울며 땅을 치더라는

울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더라는

목 놓아 부여잡던 손톱자국이 있다

 

검은 구멍 속으로

깊숙이 햇볕이 든다

시구통으로 질질 끌려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루나무 혼자서 붉은 담벼락 언덕을 본다

 

피맺힌 것이 있다

잊혀진 것이 있다

무덤의 유골로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라진 뼈에 사무친 것이 있다

 

외로운 목숨이 질 때

미루나무가 쓰러질 때

인간의 땅에 태어나 푸르른 미루나무가 있다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숨결이 있다

 

1927년_9월_13일자_동아일보.jpg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기사 (1927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icc.JPG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23.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요 공격 중 하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2월 봉기의 민주주의적 희망과 볼셰비키에 의한 10월 “쿠데타”를 억지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10월 쿠데타가 러시아를 재앙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선을 무너뜨릴 필요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며, 이 제국주의 전선은 “민주주의” 편을 포함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분파 때문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응답이었으며, 이런 수준에서 1917년 10월은 잃어버린 시대의 폐허와는 거리가 먼, 인류의 미래의 이정표였다.

     

    오늘날, 세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은 모든 반격 이후, 노동계급은 그 혁명적 프로젝트의 회복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코뮤니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곤경의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코뮤니즘이 부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허함의 형태로 그것은 세계의 상황은 곧 지배한다.”(세계의 상황에 대한 보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대회). 20세기와 21세기의 수많은 야만,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에서 후쿠시마와 알레포까지, 그것은 수십 년 전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패로 인류가 치러야 했던 매우 값비싼 대가였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 문명 쇠퇴기의 이 늦은 시간에, 혁명적 변환의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진다면, 인간 사회의 생존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진정한 가능성을 띠고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한 편에서 그들은 객관적인 가능성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첨예해지는 충돌에 내포되어 있다. 쇠퇴기 해체의 자본주의는 모든 불황의 시대를 견뎌왔던 이전의 계급 사회들과는 달리 지구적 확장을 멈추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에까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져 왔다. 몇몇 수준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 현대 기술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실제 사용에 잠재적으로 내포된 모순. 정보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고된 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편에서 그것은 일자리를 줄이고 다른 한 편에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적이고 연합된 성격의 자본주의 생산과 그 사적 소유권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한 편에서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 손톱만 한 소수의 오만과 낭비 때문에 그 사회적 부가 전용된다는 모순은 삶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노골적인 빈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 노동의 연결 수준의 객관적인 세계적 성격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종종 스스로 극단적으로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잠재적으로 국제 계급투쟁의 힘에 새로운 원천을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혁명적 대결을 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열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과잉생산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특히 대규모 부채에 의존하는 등을 의미한다.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합리함으로, 풍요의 가능성과 자본주의 아래 그러한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을 동시에 가리킨다. 다시, 기술적 발전의 예시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부각시킨다. 인터넷은 모든 종류의 무료 재화(음악, 책, 영화 등)를 분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이윤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무료 배포도 축소하거나 상품을 광고하는 광장으로만 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대한 관료체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과잉생산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인류 대중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 1980년대 시작된 지구화의 특정 단계는 맑스가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예언한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수 없는 지향으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한 장벽에 직면한다. 이 본질은 발전의 특성 단계에서 스스로 보편성 경향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극복으로 나아갈 것이다.”1) 1차 세계대전 시절의 혁명가들은 물론 이 모순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가 민족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여 자본이 실제로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의 첫 번째 명백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의 이러한 극복이 – 사실 몰락이 – 순수하게 경제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막다른 길에 가까워질수록, 군사적 수단들을 통해 타자를 희생하면서 “생존”을 향한 추동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 푸틴 등등의 노골적인 민족 전쟁은 인류의 통합과는 먼 자본주의 지구화가 우리를 자기-파괴에 더욱 더 가깝게 몰고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연으로의 몰락이 반드시 세계 전쟁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그러하다.

     

    -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시작에서부터 “공짜 선물”로 여겨지는(애덤 스미스) 본질 사이의 모순과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체의 단계에 도달한 것. 이는 기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같은 노골적인 공공 파괴, 그들의 주적인 중국의 성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희생을 감수한 성장을 향한 열띤 사냥으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대기의 도시들을 탄생시켰고, 이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리고 고대의 미신과 현대의 깡패 자본주의의 기묘한 결합은 아프리카의 모든 종의 파괴를 가속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뿔과 가죽의 마법적인 힐링 효과를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열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의 건강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의 영속화가 군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교환 수준에서도 인간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위에 언급한 더는 견딜 수 없이 첨예화된 모순은 어쨌든 하나의 해결방법을 가리킨다.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세계 생산의 연합, 인간 존재 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과의 연합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주로 드러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부분,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비록 역사적 상황의 심각성을 점점 더 깨닫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이전 수십 년간 공유해 왔던 “미래가 없다는” 절망을 더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연합된 생산력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둔다. 이 앎이란 과학적, 기술적 진보로 표현되는 잠재성, 지식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의 “축적”, 그리고 인류와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하고 결정적인 이해의 성장이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부분 – 2011년, “세계 혁명”의 깃발을 한껏 높였던 서유럽 운동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 은 오늘날 노동의 연합이 띠는 국제적 성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투쟁의 국제적 통합의 가능성을 더 잘 움켜쥘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구적 통합은 자본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회피해야 할 해결책이며, 그것이 교환을 위한 생산에 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일지라도 그러하다. 쇠퇴의 시기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주의적 방식으로 사회 통합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다급한 탐색의 일종이며, 자신의 붕괴를 부추기는 체제의 “자연법칙”이 전개되는 시기에 지배계급이 경제적 삶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시도이다.

     

    24. 자본주의가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마법으로 없앨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동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혁명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려움 - 코뮤니즘의 “소유권”을 부활시킬 수 없는 명백한 무능력 -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뮤니즘을 향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 재구성이 여전히 오늘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의 객관적인 필요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주관적인 바람을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고, 연합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낼지 이해하기 위한 탐색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10월의 기억, 실제로는 독일혁명과 세계규모의 혁명적 물결이 10월에 의해 활성화된 것을 포함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억압되었으나, 모든 억압된 기억은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안에는 진짜 이야기와 그로부터의 교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하고 정교화하며, 그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를 회복할 때 계급의 사고를 살찌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가 항상 있다.

     

    계급은 실천적인 투쟁이라는 엄격한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규모로 이러한 수준의 의문에 도달할 수 없다. 자본의 공격이 심화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투쟁은 연합된 노동이라는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확신과 구속되지 않는 연대의 발전을 위한 강고한 기반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하게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한 편에서 이론적인 투쟁, “깊은” 과거와 그 가능성 있는 미래를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 수준에서 보편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계급의 당면한 투쟁은 다소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이러한 다음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한계가 있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세대들의 투쟁, 무엇보다 전체 체제 – 시위자들이 그들의 깃발에 공공연히 써 놓았듯이, “구시대적” 체제 - 에 대한 진정한 분노의 표현이었던 스페인의 분노 운동(Indignados)과 같은 투쟁은 어떻게 이 체제가 작동하고 무엇이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 동시에 현존하는 질서라는 제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조직적 수단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리고 보라, 그러한 수단은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 집회의 일반화, 위임된 대표의 선출은 1917년 소비에트 시절로부터의 명확한 메아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의 깊은 지하에서 활동한 “노련한 두더지(Old Mole: 1968년 9월부터 1970년 9월까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 지하신문 중심의 급진적 신좌파 그룹)”의 작업의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치-도덕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급의 더욱 넓은 부문의 일부로서 현존하는 삶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의 등장이다. 이러한 순간의 진화는 계급 영역에서의 대중 투쟁과 혁명적 관점의 준비와 성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분노 운동이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초기 정치화와 경제적 투쟁, 노동 계급이 여전히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노동 현장에서의 운동이 연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룩셈부르크의 「대대적 파업」에서 볼 수 있고, 주창되듯이, 혁명적 미래는 경제적 투쟁을 현대주의자의 선언인 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진정한 통합에 있다.

     

    25. 운동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연결을 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은 수행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1917년 볼셰비키 당의 역할을 전력으로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광신도와 지식인들의 음모론이라고 내세우며 의심하는지 그 이유이다. 코뮤니스트 소수의 책무는 투쟁을 유발하거나 앞서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 10월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가 붉은 10월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반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무는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경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코뮤니스트좌파와 자본의 좌익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탐색하는 소수들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심각하다. 1989년 이전에는 반대로 혼란스럽지만, 식별가능했던 반자본주의 생각들은, 보기를 들어 평의회주의자 또는 자율주의자(autonomist)와 같은 종류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그룹들 내에서 영향력 있었는데, 그 이후 실물 경제 또는 현존하는 “상품”의 영역의 보존과 확장에 대한, 지역 수준에서 상호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반을 둔 개념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의 진전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더욱 정치화된 계층들조차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미래의 혁명가 세대의 출현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오늘날 현존하는 혁명적 소수들이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왜 오늘날 코뮤니즘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능성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혁명가들과 정치화된 소수들은 이런 상황의 순수하게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혼란은 자신의 분열과 방향 상실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소수의 약점은 계급 전체 약점의 표현이며, 이를 극복할 어떤 조직적 비법이나 활동가주의 슬로건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017년 4월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Notebook IV, the Chapter on Capital.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이전 글> 

    1부. 계급투쟁 100년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17

    2부. 해체의 충격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5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