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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민족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자 입장

민족주의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자 입장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가 미-중 제국주의 패권 다툼과 직접 연결되었듯이한반도(동아시아혁명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성격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따라서 민족문제민족주의에 대한 코뮤니스트 입장은 무엇보다 명확하고 단호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국제적인 체제라서 자본주의 타도는 한 국가한 지역의 혁명으로는 불가능하며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싸우고 극복해야 한다국제적인 노동자계급 투쟁에서 민족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을 민족 또는 국가별로 분열시키고제국주의 전쟁에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공격하고 죽이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우 해롭다.

 

오늘날 모든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 성격을 갖고 있는데민족해방을 위한 투쟁 결과는 제국주의 약화가 아니라 다른 제국주의 세력의 대체로 나타난다이것은 이른바 '민족해방 투쟁'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을 지배계급 또는 부르주아지 일부와 동일시해야 하는 투쟁다시 말해 부르주아 중 한 편 또는 제국주의의 다른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투쟁'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증명한다.

 

심화하는 제국주의 대결 속에서아직도 민족독립(민족자주)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애국주의자들에 맞선 코뮤니스트 투쟁 구호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는데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혁명가들이 제기한 혁명적 패전주의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 이다.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격돌과 전쟁에 대한 노동자계급 태도도 마찬가지다모든 민족주의를 거부하고제국주의 전쟁과 평화주의 환상을 동시에 반대하며노동자계급끼리 서로 죽이는 지배계급 간의 전쟁을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으로 전환하여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다.

 

아래는 민족주의제국주의 문제에서 국제주의 원칙을 가진 국제조직(ICC, ICT)의 문서이며국제적 수준에서 우리와 원칙을 같이하기에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 공통의 입장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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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민족해방신화

 

전쟁 시기든 평화 시기든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를 그들의’ 조국과 동일시하도록 노력한다대대로 우리는 일자리” 위험에 처해 있고만약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 일자리를 잃는다는 말을 들어왔다정확히 똑같은 메시지가 전 세계 노동자에 강요된다.

 

전쟁 시기에 부르주아지는 노동자에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살육할 것과 우리 계급의 형제자매를 학살할 것을 강요한다민족이란 관념은 부르주아 지배를 위한 결정적인 버팀목이다민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특징을 위장하며 마치 기존의 질서가 사람들의 공동 이익 표현인 듯이 나타난다민족주의는 항상 자신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항복을 의미한다제국주의 시대에특정한 민족 발전 가능성’ 및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과업이라는 개념은 사실무근이며 모든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좌파는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을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좌파는 흔히 이러한 투쟁은 억압에 반대하기 때문에 반()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그것은 많은 국가에서 억압당하는 소수가 있기에 사실이다하지만 이 소수는 그 자신의 지배계급 또는 부르주아지 일부와 동일시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노동계급에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의 살육장으로 유인하는 것이다이러한 투쟁은 반제국주의 투쟁과 다르다민족주의 운동은 단지 군사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에서 후원자와 지지자를 찾는데 의존한다성공적인 독립투쟁’ 이후새롭게 해방된 국가’ 조차 세계 경제를 형성한 제국주의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철수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국가는 세계시장에서 자본주의 경쟁의 요구와 관계없이 그리고 그 요구의 외부에서 발전할 수 없다우리는 맑스가 어느 정도 독립투쟁을 지지했고또한 레닌은 민족자결권을 위해 싸웠다고 한없이 논쟁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계적인 맑스주의는 맑스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답하고자 한다맑스는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새로운 기술 및 기계를 만드는 자본주의 발전의 초창기에 글을 썼다이러한 배경에서맑스와 엥겔스는 봉건적이고 전()자본주의적 구조에 대한 승리의 속도를 높여줄 것이라 믿었던 민족운동을 지지했다자본주의의 상승 국면에서는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형성을 위한 여지가 여전히 있었고그와 더불어자본주의의 미래에 무덤을 파는 역할을 할 노동자계급의 발전을 위한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독립을 위한 여지는 제한된 경계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다그것은 레닌이 아니라이 사실(제국주의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분석에도 불구하고)을 더욱 잘 이해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0세기 초 이후 계속된 자본주의 발전은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 입장의 정확성이 더 분명해졌다레닌은 식민지 국가 정치투쟁이 제국주의 강대국의 토대를 동요시키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 결과로서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탈식민지화는 경제 강대국 구조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했다많은 경우에오래된 식민지 독립은 미국이 오래된 식민지 강대국을 이겼던 것처럼 제국주의 강대국 사이의 투쟁 결과였다.  (국제코뮤니스트 경향」 정치소개)

 

 

민족해방의 반혁명적 신화

 

민족해방과 새로운 민족국가 형성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특정 과제가 아니었다지난 세기 혁명가들이 특정한 민족 해방 운동을 지지했을 때그것은 단지 부르주아 운동에 관계된 것이라는 점이 자명했고그런 만큼 그들은 이러한 운동을 민족자결권의 이름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그들이 이러한 운동을 지지한 이유는민족국가가자본주의 상승기에는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가장 적합한 틀을 표현했기 때문이고()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제한적인 잔재 파괴를 통한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 세계수준의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 조건 성숙 과정에서 한 걸음 진보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쇠퇴기 진입과 더불어민족국가는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 전체와 더불어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제한되고 너무 협소한 틀이 되어버렸다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국가마저도 더는 발전할 수 없는 오늘 상황에서신생국가의 법률상 성립은 어떠한 진정한 진보도 가져다주지 않는다제국주의 블록으로 분할된 세계에서 각각의 민족해방투쟁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실상은경쟁하는 제국주의 블록 사이에서 지속적인 분쟁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다이때 노동자와 농민은 강제로 참여하든 자발적으로 참여하든 상관없이 단지 총알받이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한 투쟁은 어떤 경우에도 제국주의를 약화하지 않는데이는그것이 제국주의의 뿌리즉 자본주의 생산 관계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그것이 제국주의 블록 하나를 약화하면동시에 단지 다른 하나를 강화할 뿐이다그리고 이러한 분쟁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국가는 스스로 제국주의적으로 되어야만 하는데그 이유는 쇠퇴기에는 어떤 국가도그것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제국주의적 정치를 펼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족해방을 위한 성공적인’ 투쟁은 단지 하나의 제국주의 지배자를 다른 제국주의 지배자로 대치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특히 이른바 신생의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훨씬 더 국유화된 자본을 통한 착취의 강화체계화 및 군국주의화를 의미한다체제의 야만성 표현으로서국가자본은 해방된 민족국가를 일종의 거대한 강제수용소로 전환한다여러 단체의 주장과는 정반대로이른바 제삼 세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이러한 투쟁은 계급투쟁을 위한 어떤 발판도 제공하지 않는다이러한 투쟁은 항상 그 민족 자본을 위해 노동자를 애국적인’ 신비화 이름으로 동원함으로써이러한 국가에서 종종 매우 격렬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일종의 차단기로 작용한다지난 50년간의 역사는, ‘민족해방투쟁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주장과는 달리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에서 동인으로 작용하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전자도 후자도 그러한 투쟁을 통해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으며노동자들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어떤 한 진영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이러한 충돌 속에서이러한 투쟁을 무조건’ 또는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모든 입장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주의 국수주의자들의 행동만큼이나 범죄적이다그래서 그것은 코뮤니스트 활동과는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국제코뮤니스트 흐름」  강령)

 

 

제국주의

 

예전 소련과 그 동맹국은 하나의 제국주의 블록을 구성했다그 블록의 몰락은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 사이 경쟁 산물인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발전의 명백한 전환점을 기록했다. 1차 세계대전은 자본축적 과정에 내재한 순환적 위기가 세계전쟁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는 지구적 위기로 자본 집적과 집중에 도달했음을 보여주었다한마디로 자본주의가 새로운 역사적 시대말하자면 모든 국가가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의 부분이 되고 그 경제를 지배하는 법칙을 피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입증했다.

 

제국주의는 단순히 약한 자본주의 국가를 상대로 한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 정책이 아니다그것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중심의 금융과 산업의 촉수가 주변부 지역으로부터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불가피한 과정이다이 과정은 어떠한 국경도 인정하지 않으며주변부 지역의 토착 부르주아지에 어떠한 민족적 충성심도 명령하지 않는다토착 부르주아지는 국제 자본가계급의 부분이며 전통적 자본주의 중심부의 부르주아지인 국제 금융자본의 음모에 걸려든다.

 

지구적 전쟁재건위기라는 지긋지긋한 순환을 가진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자 더 높은 문명형식(코뮤니즘)의 가능성이 역사적 의제로 제기되었다이는 1차 세계대전의 유혈과 폐허에서 나온 유럽과 세계 혁명 물결의 첫 부분으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한 1917년 10월 혁명에서 극적으로 입증되었다그러나 이 시기 경험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들 자신의’ 국민국가를 지지해서 프롤레타리아 상호 살육을 묵과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후 봉기가 분출하는 동안 사회주의 이름으로 혁명을 철저히 억압한 제인터내셔널 대다수 당의 파산으로도 극적으로 입증했다오늘날 우리는 10월 혁명 이전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정치조직과 이후 정치조직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배적 생산양식으로 자본주의가 부상하고 강화되는 동안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또는 절대왕정에 저항하는 운동은 유럽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결집하는 틀을 제공했으며이는 나중에 거대한 노동조합과 당 조직의 형성을 촉진했다이러한 기관에서 노동계급은 현존하는 부르주아 사회정치 관계의 틀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면서 독자적인 계급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동시에 맑스와 엥겔스의 혁명이론이 인정을 받고 프롤레타리아 정치 생활의 확립된 부분이 되었다주류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결코 맑스주의 정치적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사회주의당은 맑스가 예측했던 혁명이 구체화하지 않은 채 미래 어느 날 성취될 먼 목표로 남았다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그들이 목표로 투쟁해야 할 빛나는 미래로 남았지만실천에서 그들의 전술을 규정한 전략 목표는 권력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점점 더 의회선거, 8시간 노동단결의 자유 등이 되었다.

 

1914년 사회민주주의가 제국주의와 하나 되면서 노동계급 운동은 결정적 전환점에 도달했다이는 코뮤니스트들을 제인터내셔널(1889-1914) 동안 대중운동을 지배했던 사이비 개량주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나뉘어 떨어져 나왔다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코민테른의 창설은 맑스주의 원리의 승리를 보여주었다이제 코뮤니스트 활동은 오로지 새로운 사회 건설의 조건을 창출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국제코뮤니스트 경향」  강령)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국가 간의 전쟁은 오로지 방어할 어떤 국가적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운동으로만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운동에 의해서만 막을 수 있다.

 

모든 전쟁에서직접 전선의 군인으로서 또는 민간인으로서또는 국가적인 이해를 위해 더 힘들게 일하고 덜 먹도록 요구되는 생산자와 소비자로서가장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은 착취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전쟁의 단순히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다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것은 1917~18년의 대대적 파업과 봉기였다오직 혁명 물결이 좌절되었을 때자본주의는 제2의 세계 학살을 감행할 수 있었다그리고 1960년대 말 노동자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했을 때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사실현재 충돌이 지금의 형식을 띠는 주요 이유는자본주의가 오늘날 거대 자본주의 권력 사이의 공개적인 충돌로 노동자계급을 용병으로 만들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우리를 착취하는 체제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자본주의가 전쟁 속으로 질주하는 바로 그 근원경제적 번영을 전개할 수 없는 무능력그것의 위기 은 증가한 착취실업 및 사회적 비용 삭감 등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생활 수준에 대한 끝없는 공격을 가한다전쟁을 향한 행진은 이러한 공격을 더욱 가속할 것이고피착취계급에 훨씬 더 큰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그래서 경제 위기에 대항한 불가피한 투쟁은 또한 전쟁에 대항한 투쟁이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단지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그것은 공격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전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한 계급전쟁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그 투쟁만이 자본주의 전쟁 기계를 파괴하고제국주의 전쟁과 국경을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하나의 세계 공동체로 인류를 이끌 수 있다.

 

착취자들과 어떠한 연대도 반대한다그들이 전쟁에 찬성하든 반대하든그들의 국적이 어디이거나 상관없이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를 위하여!  (국제코뮤니스트흐름」  :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평화주의 환상들에 대항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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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관점

 

자본주의의 전복은 하룻밤에 완료될 수 없다하지만 노동자계급이 한 국가 혹은 영토에서 지배계급을 전복하자마자코뮤니즘을 향한 이행기는 시작된다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극복하고 파괴하는데부르주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는데 그리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향한 첫발을 시작하는 데 정치권력을 사용해야 한다이것은 노동자평의회를 기반으로 한 혁명체제의 수립이 필요하다하지만 국제적인 체제로서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싸우고 극복될 수밖에 없다사회주의는 단 하나의 국가 혹은 영토에서 건설될 수 없다이른바 노동자국가’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우선 정치적 범주이다그런데도 노동자국가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노동일의 단축의료 및 교육제도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개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고 사회적 필요를 위한 직접생산을 시도할 것이다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대책은 사회주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자본가들이 위기를 어느 정도까지 다루고 노동자 투쟁을 부르주아 지형에 유지하고 고립시키는 한그들의 지배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전 세계 자본주의 상품생산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가치법칙의 강권은 유지된다고립된 파업 또는 공장점거가 한시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환경에 적대적인 노동자국가는 장기간 생존할 수 없다세계 자본주의가 군사적 수단으로 혁명적 실험을 파괴할 것인지세계 자본주의가 혁명적 실험을 엄청난 경제적 압력 아래에 둘 것인지아니면 두 가지 모두 인지이다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체제(볼셰비키 러시아에 관한 것으로서)는 자본주의의 환경 아래서 부르주아 국가와 경쟁하도록 강요당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인다이것은 머잖아 자본의 축적을 두고 경쟁적인 투쟁을 하고 어떠한 사회주의의 전망도 차단한다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체제 및 코뮤니스트 세계당 최고의 우선 과제는 국제적으로 혁명 확장과 강화이다오직 자본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타도할 때만이 사회주의를 향한 진정한 단계에 착수할 수 있다.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정치소개)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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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권력인 문재인 정부의 2년 반

  •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권력인 문재인 정부의 

    2년 반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상

    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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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이 글은 문재인 정부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글은 아니다. 더 본격적인 분석과 비판 그리고 우리 운동(코뮤니스트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둘, 이 글은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시청과 중앙청 등지에서 시위했던 고등학교 3학년 그 시절부터 2019년인 지금까지 59년 동안 군부독재이건 부르주아정권이건 역대정권의 퇴진이나 타도를 위한 투쟁을 회고하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셋, 이 글은 또한 이른바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와 함께한 운동세력(학생운동, 민중운동, 지식인운동, 문화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한 광범위한 관찰을 기반으로 정리한 몇 가지 단상임을 밝힌다.

     

    넷,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분석틀을 진보-보수 또는 좌-우로 구분하는 방법은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틀 자체가 부르주아 분석 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맑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진보-보수나 좌-우는 자본주의 체제 동전의 양면이며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정권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권력이지 진보 또는 좌에 위치한 권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단상의 범주를 이데올로기(코뮤니즘), 경제(자본주의) 그리고 정치(자유주의, 민족주의)로 나누고 문재인 정부의 2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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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촛불이 매개 되어 10년의 이른바 ‘적폐’가 정권교체의 문을 열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국가와 민족도 자유로울 수가 없고 남과 북도 예외일 수 없다. 남, 북, 미 그리고 세계의 공통화두는 평화와 번영이다. 문재인과 김정은의 글과 말을 보면 이 두 마디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평화는 계급전쟁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며 번영은 이윤과 계급불평등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일 뿐이다. 갈라진 남, 북이 표면적이고 가시적 적대를 넘어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부분 집합으로 나아가는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를 상상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리고 우여곡절의 과정을 겪어도 이 과정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통합과정일 수밖에 없다.

     

    여섯, 이렇게 볼 때 북한은 개혁, 개방을 통해 점진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로 공고해지고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연합, 연대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주의 건설을 말하는 형용모순이 존재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삼척동자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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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이 효과는 남쪽의 우리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아직도 보수주의 부르주아들이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특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세력을 ‘좌파’, ‘빨갱이’, ‘친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러한 대립이 허위이며 지금이 그런 대립을 주장할 마지막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다. 두 가지 형태의 부르주아 세력은 자본주의의 양면이며 보완적 관계임을 깨닫게 될 날이 멀지 않았고 이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과 혁명적 실천이 보여줄 것이다. 물론 이념적 재편 과정에서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존재했던 ‘진보’,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등의 개념이 정리되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이념과 실천이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덟, ‘경제’가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재인 정부의 노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비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반노동’에 가깝다. 노동, 자본, 국가의 통합구조를 안착시키려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미완성이기는 하나 장기적으로는 형성될 전망이다.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와 대립을 조정하거나 중재하는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가 국가이고 부르주아지와 동맹하는 계급이다. 여기에 노동계급마저 부르주아지 편에 선다면 그 기구는 부르주아지의 단일기구이다. 계급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반민주주의 국가임을 문 정부 스스로 천명하고 있다.

     

    아홉, 경제정책의 구체적 모습은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한 법제화에서 드러난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이 착취체제와 이를 규정하는 법을 반대하고 없애려는 투쟁을 몇 백 년 해오고 있다. 메이데이가 노동시간의 단축 투쟁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원칙을 계층사이의 이해로 조정하고 노동시간을 변형근로제로 후퇴시키는 문정부의 모습을 보며 노동계급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했는가? 반노동으로 나아가는 정부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집권한 지 1년이 되자 그 실체가 드러났고 노동계급은 정권퇴진운동을 벌였다. 어느 정권도 예외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노동자는 어디 있는가? 노동운동은 여전히 운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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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마지막으로 정치권력의 행태를 짚어보자. 부르주아 정치권력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삼권 분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영역의 분리, 기능의 독립성으로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골격이다. 코뮤니스트는 이러한 분리를 반대하고 평의회에 기반을 둔 대중(노동자, 병사 등)과 지역의 선출된 권력을 프롤레타리아 민주권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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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는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를 둘러싼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다루지 않는다. 여야를 불문하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그 권력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386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민주화운동세력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사독재와 싸운세력으로 우리사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착에 공헌한 세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 결합한 세력은 앞으로 부르주아 의회에 진출할 예비세력으로 그들의 전임자들과 유사하다.

     

    이들의 부류는 대학, 언론, 사법부, 노동 등에 몸담았다가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부르주아지의 사적, 개인적 인간관계로 문재인 정부에 가담했다고 본다. 이들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 같지만 사회주의나 코뮤니즘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편입되기를 갈망하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기회주의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2년 동안 청와대, 정부, 의회, 법원, 언론기관 등에서 보이는 이른바 엘리트(교수, 판사, 정부관료, 청와대, 언론가, 시민운동 활동가, 노동조합 관료)들이 문재인 정부를 떠받드는 소부르주아 세력의 실체이다.

     

    앞으로 2년 반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세력이 보수주의 부르주아 세력과 언제, 어디서나 연대하고 연합할 수 있는 세력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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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

  •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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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코뮤니스트당(세계혁명당) 건설과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수립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는 출범 6년을 맞이하여, 그동안의 혁명조직 운동을 평가하고 현실에서의 코뮤니스트당 건설 전망을 밝히기 위해 “혁명조직” 관련 글을 연재합니다.

    코뮤니스트 7호의 「혁명당과 노동계급」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를 소개합니다.

     

     

    혁명조직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보고서는 1982년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국제총회에서 채택되었다. 「국제평론(IR)」 다음 호에서 두 번째 보고서, ‘혁명조직의 구조와 작동 양식에 관하여’를 실을 것이다.

     

    1. ICC는 창립 이래, 전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새로운 도약에 국제 혁명조직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 왔다. 그 투쟁에 비록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일지라도 개입하여 혁명가 그룹 사이에서 토론의 구심점을 형성하려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ICC의 존재가 필요하고 공상적이지도 않음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ICC는 자체 기능이 계급 내부의 심오한 요구에 부응한다는 신념으로, 여전히 무책임성과 미성숙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혁명 환경의 딜레탕티즘(제대로 모르고 좋아하는 어설픈 전문가주의)과 과대망상증에 대항해 싸워오고 있다. 이 신념은 어떤 종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맑스 이론의 분석법에 기반을 둔다. 혁명조직의 출현, 혁명조직의 역할, 형태, 목적과 원칙의 근거는 맑스 이론의 틀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론 없이는 진정한 혁명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

     

    2. ICC가 최근에 겪은 분열은 조직의 치명적인 위기로 여겨질 수 없다. 본질에서 그것은 혁명조직이 나타나는 계급 운동의 조건과 발전노선, 이해할 수 없었던 무능력의 표현이었다:

     

    - 혁명을 향한 경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 지역적인 것이 아니다.

    - 위기와 투쟁의 폭이 필연적으로 혁명적 시기를 즉시 펼쳐내지는 않는다.

    - 조직화의 필요성은 우발적이거나 지역적인 요구가 아니라, 코뮤니즘이 전 세계적으로 승리할 때까지의 역사적 시기 전체를 총괄한다.

    - 결과적으로, 혁명조직의 과업은 장기적인 토대에서 이해해야 하고, 조직의 진정한 위험인 당면주의(맞닥뜨린 국면에 조급/당면하게 대응)적 조급함에 따른 모든 인위적인 지름길로부터 조직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3. 혁명조직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항상 귀결되었다:

     

    - 아나키스트와 평의회주의 시각에서 조직은 노동자 각각의 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지고, 개인의 순전히 우연적인 집합체로 환원된다.

    - 전통적인 보르디가주의는 계급을 당과 동일시하면서, 계급의 총괄 조직의 기능과 더불어 혁명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4. 혁명조직의 필요성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여전히 크다. 반혁명으로(1980년대 당시 폴란드에서처럼) 어떤 조직화한 혁명분파도 부재했던 곳에서 거대한 투쟁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이 필요성은 없어지지는 않는다.

     

    - 19세기에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이 된 뒤, 혁명가들을 조직하는 것은 결정적인 요구였고 지금도 그렇다. 역사상 사회 변혁의 잠재력을 자체에 품은 모든 계급은 그 역사적 목표의 승리로 이끌 투쟁의 목표와 방법에 관한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목표는 이론적으로 (강령) 그리고, 실천적으로 (활동)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전반적인 목적을 옹호하는 정치조직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 계급의 내부에서 출현하고 계급의 영구적이고 일부인 혁명조직은 모든 자연적인 분할(지리적이고 역사적인)과 인위적인 구분(직업 분야, 생산현장)을 초월하며 부정한다. 그것은 계급 내부에서 통일된 의식 발전을 향한 영구적 경향을 표현한다. 모든 즉각적인 구분을 반대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한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탈선시키고 파괴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체계적인 시도에 직면해서 혁명조직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해로운 효과에 대항한 투쟁에서 결정적인 무기이다. 그 이론(코뮤니스트 강령)과 계급 내부에서의 투쟁 활동은 자본주의의 선전이라는 독(毒)에 대항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5. 코뮤니스트 강령과 투쟁 활동 원칙은 혁명조직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조직의 초석이다. 혁명이론 없이, 어떤 혁명적 기능, 즉 이 강령의 실현을 위한 어떤 조직화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맑스주의는 항상 모든 당면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편향을 거부해 왔다. 이러한 편향은 코뮤니스트 조직의 역사적 역할을 왜곡하고 부정하는데 봉사한다.

     

    6. 혁명조직은 계급의 한 기관이다. 기관은 생명체의 살아있는 구성요소를 의미한다. 그 기관이 없다면 계급의 삶에서 치명적인 기능의 하나가 없는 것이라서 언제라도 위축되거나 마비될지 모른다. 그래서 계급이 필요로 하는 기관을 불가피하게 창조해냄으로써 재탄생하고, 성장하고, 확장된다.

     

    7. 이 기관은 계급의 즉각적 충동에 복종하는 것에 국한된 단순한 생리학적 부속물이 아니다. 혁명조직은 계급 일부이다. 이것은 계급에서 분리되지도 않고, 계급과 같지도 않다. 그것은 계급 존재와 의식 사이의 매개체도 아니고, 계급의식의 총체도 아니다. 그것은 계급의식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계급의 총체가 아니라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활동적인 부분을 포괄한다. 계급이 곧 당이 아니듯이 당도 곧 계급이 아니다.

     

    8. 계급 일부로서 혁명가의 조직은 그 부분(투쟁가)의 합도 아니고 사회학적 계층(노동자, 피고용자, 지식인)의 연합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생명체의 최적화된 작동을 보장함으로써 그 구성 세포들의 유일한 기능인 하나의 생명체로서 발전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특정 범주에 그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는다. 계급과 마찬가지로 혁명조직은 하나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9. 혁명조직이 완전하게 꽃필 수 있는 조건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혁명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같다.

     

    - 국제적인 차원 :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로 혁명조직은 부르주아지가 부과한 민족국가 틀을 돌파함으로써 태어나고 살아간다. 자본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모든 나라에서 계급투쟁의 국제주의를 옹호한다.

    - 사적 차원 : 혁명조직은 계급의 가장 진보된 분파로서 계급에 대해 역사적인 책임을 갖는다. 과거 노동자 운동의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의 기억을 사수하기에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 역사적 목표의 가장 의식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요인이 바로 계급과 그 정치조직에 그들의 단일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10. 혁명조직의 활동은 오직 통일된 단일체로서 이해해야 하며, 그 구성요소는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 이론적 활동, 이 활동의 수행은 항시적인 노력이어야만 하고, 그것은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되거나 완결되지 않는다. 이것은 필수적이며 대체할 수 없다.

    -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에의 개입 활동. 이것은 조직 최상의 실천이며, 이때 이론은 선전과 선동을 통해 투쟁 무기로 변환된다.

    - 기관의 발전과 강화, 그리고 조직의 성과를 가져오는 조직 활동 없이는 양적 발전(새로운 구성원)은 질적 발전으로 바뀌지 않는다.

     

    11. ICC 안에서 표현된 많은 정치·조직적 몰이해의 보기는 ICC가 처음에 채택한 이론적 틀을 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몰이해는 자본주의 쇠퇴이론과 이 이론의 실천적인 함의를 우리의 개입 활동에 동화시키는 것이 빈약했던 점에 기초한다.

     

    12. 혁명조직이 근본 본성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기능의 속성은 자본주의의 상승기와 쇠퇴기 사이에 질적으로 변경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혁명의 격동기에는 혁명조직의 특정 존재 형태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한편, 19세기에는 오직 맹아적으로 출현했던 다른 형식을 발전시켰다.

     

    13. 자본주의 상승 주기는 혁명적 정치조직에 하나의 특정한 과도적인 형태를 부여했다.

     

    - 혼합형태. 협동조합, 노동조합 그리고 당이 같은 조직 안에 존재할 수 있었다. 맑스의 노력에도 그 조직의 정치적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노동조합 투쟁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 대중조직의 형성. 이것은 특정한 사회적 범주(청년, 여성, 협동조합주의자)의 중요한 분파를 포괄하거나 심지어는 특정 나라에서 노동자계급 대다수를 포괄함으로써 혁명조직의 원래 기능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 느슨한 형태를 사회주의 조직에 부여했다.

    -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즉각적인 개량의 가능성은 사회주의 조직 활동의 장을 이동시켰다.

    「코뮤니스트 선언」에 확인된 코뮤니즘이라는 더 광범위한 전망을 넘어, 즉각적이고 점진적인 투쟁이 우선권을 차지했다.

     

    14. 혁명의 객관적 조건 미숙은 조직적으로 결합하여야 할 임무의 전문화, 즉 조직 기능의 원자화를 가져왔다.

     

    - 이론적인 임무는 전문가(맑스주의 학파, 직업적인 이론가)에게 맡겨졌다.

    - 선전과 선동 임무는 항구적인 노동조합과 의회 대표자(’직업 혁명가’)가 맡게 되었다.

    - 조직 임무는 당의 임금을 받는 직원이 책임졌다.

     

    15. 그 대다수가 이제 막 시골 지역이나 수공업장에 도착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과 그때 겨우 형성된 민족국가 틀 내부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혁명조직의 진정한 기능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 정치적, 조직적 전통 없이 여전히 종교적인 신비화 영향 아래, 독립적 생산자로서 그들의 예전 조건에 대한 향수에 갇힌 채 프롤레타리아화한 대중의 거대한 성장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교육하는 작업에 지나친 역할을 부여했다. 조직 기능은 여전히 문화가 부족하고, 이전의 유아기 환상으로 고통받는 한 계급에 의식을 주입하고 ‘과학’을 주입하는 것으로 여겼다.

    - 산업화한 나라의 틀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은 사회주의의 국제적 성격을 가려버렸다(국제사회주의보다는 ‘독일사회주의’나 ‘영국사회주의가’ 더 많이 거론되었다). 제1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은 단일하고 집중화된 세계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 분파들의 하나의 연방체로 작동했다.

    - 조직 기능은 국가적인 것으로 보였다. 각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사회주의’ 국가의 연합된 연방체로 장식되었다.(카우츠키)

    - 조직은 ‘민주적인’ 사람들의 조직으로 보였고, 그 임무는 선거에서 사회주의 강령을 위해 민중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16. 이 역사적 시기의 과도기 성격은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를 왜곡했다. 혁명가의 역할은 참모부를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지휘인 것 같았다. 계급의 주요한 미덕은 규율, 지도자에 대한 복종으로 여겨졌다.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로 그것은 목적(대리주의)의 완수를 위해 심지어는 투쟁방법(노동조합주의)의 완수를 위해 위임된 ‘우두머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당은 ‘전체 민중’의 당이었고,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승리였다. 당의 계급 기능은 민주주의 이념의 늪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당 기능의 이러한 퇴행에 대항해서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초기 제3 인터내셔널이 싸웠다. 코민테른이 인터내셔널의 몇몇 낡은 개념(대중당, 전선주의, 대리주의)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을 오늘날 혁명가들은 결코 모범의 미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조직 기능에 대한 이러한 왜곡과 단절이 바로 역사적인 쇠퇴 시기 부과한 매우 중대한 요구이다.

     

    17. 전쟁에 뒤이은 혁명 시기는 혁명가의 기능에 심오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의미했다.

     

    - 조직은, 규모가 축소되었거나 발전된 당이거나 상관없이, 혁명을 준비하거나 조직할 임무를 더는 갖지 않았다. 혁명은 계급 전체의 행위였다.

    - 계급의 투쟁가를 준비하고 지도하는 것은 교육가도 참모부도 아니다. 계급은 혁명 투쟁 속에서 자신을 교육하고 ‘교육가’ 자체도 계급에 의해 “교육되어야” 한다.

    - 그것은 더는 특정 그룹(청년, 여성, 협동조합주의자 등)의 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18. 혁명조직은 그래서, 비록 계급 단일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는 아닐지라도, 즉각 단일한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더 넓은 단일성 즉, 그것을 탄생시킨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단일성이다.

    그것은 더는 국가 규모가 아니라 세계 규모로, 다른 ‘국가’ 분야를 배출하는 하나의 총체로서 부상한다.

    그 강령은 동방이나 서방이나,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모든 나라에서 같다.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과 전(前)자본주의 아나키즘의 산물로서 국가적인 ‘특이성’이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때문에 강령의 단일성이 부인될 수는 없다. 강령은 전 세계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19. 혁명의 객관적 조건 성숙(프롤레타리아트의 결집, 더 단일화되고, 더 좋은 질, 지적 수준이나 성숙도에서 이전 세기 그것보다 우월한 계급의식의 더 커다란 균일성)은 혁명가들의 조직 형태와 목표 모두를 심오하게 변화시켰다.

     

    (가) 그 형태에 있어서

    - 혁명조직은 과거보다 훨씬 더 제한된 소수지만 더 의식적이며, 그 강령과 정치적 활동으로 선택된다.

    - 혁명조직은 19세기에 비해 훨씬 더 개인적이지 않으며, 투쟁가 대중을 지휘하는 지도자 조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유명한 지도자와 위대한 이론가의 시기는 지났다. 이론 작업은 진정 집합적인 임무이다. 수백만 ‘무명의’ 프롤레타리아 투사들과 마찬가지로 조직 의식은 개개인의 의식이 통합되고 초월함으로써 하나의 단일한 집합 의식으로 발전한다.

    - 그 기능 양식에 있어서 그것은 국가 지부의 병립에 불과했던 제1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과는 반대로 더 집중화된다. 혁명이 오직 전 세계적 규모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시기에 혁명조직은 혁명가들의 재조직화를 지향하는 전 세계적인 경향의 표현이다. 이러한 집중화는, 1921년 이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혁명가들의 전 세계적인 활동을 특정한 한 나라의 당이 흡수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가들의 전 세계적인 활동이 많은 나라에서 존재하며 그 중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관해 지배적이지 않은 그러한 단일체가 스스로 활동을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분에 대한 단일체의 우선성이 부분의 삶을 조건 짓는다.

     

    (나) 그 방법에 있어서,

    - 전쟁과 혁명의 역사적 시기 혁명조직에 그 진정한 최종목적, 즉 코뮤니즘을 더는 장기적 목표로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세계혁명을 위한 대투쟁 안에 직접 뛰어들어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전면에 떠오른다.

    - 러시아 혁명이 보여주듯이, 혁명가는 그들이 요구할 어떤 권리도 특권도 갖지 않고 계급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단지 출현하고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계급을 대체하지도 않고 계급을 대신해 권력을 획득하지도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도 않는다.

    - 혁명가의 근본 역할은 혁명 이후까지 계급의 모든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성숙을 촉진하는 그들의 대체 불가능한 기능을 완수하는 것이다.

     

    20. 반혁명의 승리, 국가의 전체주의적 지배는 혁명조직의 존재 자체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고 그들의 개입 범위를 축소했다. 이렇게 심오한 후퇴 시기에 이론 기능은 개입 기능을 초월했고, 혁명원칙 보존에 결정적임을 증명했다. 반혁명 시기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 작은 써클, 핵 또는 극소수로, 계급으로부터 고립된 채 혁명조직은 혁명을 향한 새로운 역사적 시기가 열린 후에만 발전할 수 있었다.

    -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새로운 조직원을 영입’하는 것은 숫자라는 신기루에 원칙을 깨뜨리고 조직 기능 손실을 준다. 그래서 가입하는 이들은 강령에 의식적으로 동의하면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 조직 존재는 맑스주의 이론의 틀에 따라 굳건히 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철저하고 이론적이며 정치적이고 투쟁적인 선택에 따른 양적인 손실은 질적인 이득을 낳는다.

    - 과거보다 더욱더, 혁명조직은 50년간의 반혁명의 지배로 강화된 자본주의의 엄청난 압력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의 미약한 역량이 저항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이다.

    이 때문에, 비록 홀로 존재하지는 않을지라도 계급에 의해 생겨난 혁명조직을 결연히 보존하고 강화하며 세계 규모로 혁명가들을 재조직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21. 반혁명 시기 종결은 혁명조직의 존재 조건을 변화시켰다. 혁명가들의 재조직화 발전에 유리한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기는 여전히, 당의 출현에 필수 조건이 진정한 질적 도약을 통해 충분한 조건으로 아직 전환되지 않은 중간시기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사상 투쟁과 공동 행동을 통해 결국에는 서로 융합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당 건설을 향한 경향을 나타낼 혁명가 그룹의 발전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경향의 실현은 혁명을 향한 노정이 열리는 것과 혁명가들의 의식에 달려 있다.

    비록 1968년 이래 특정 단계가 도달되었을지라도, 비록 혁명 환경 내부에 선택이 이뤄졌을지라도, 당의 출현은 계급투쟁의 발전이 느리고 혁명 진영이 아직 미성숙한 상황에서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발주의의 결과물도 아니다.

     

    22. 사실, 1968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재기 이후 혁명 환경은 새로운 시기를 감당하기에 매우 미약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혁명 시기 동안 그 흐름에 대항에 투쟁했던 예전의 코뮤니스트 좌파의 약화 또는 소멸은 혁명조직의 성숙에 부정적인 요소였다. 천천히 재발견되고 재동화된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론적인 성과보다도 훨씬 더 조직적 성과(유기적 연속성)가 부재했는데, 이러한 성과물 없이는 이론은 죽은 글귀로 남는다. 혁명조직의 기능, 심지어 필요성조차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종종 오해되었다.

     

    23. 이러한 유기적 연속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68시기 이후 출현한 인자들은 학생운동과 그것에 의해 대변된(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모든 것을 폐기하는) 논쟁주의의 압도적인 압력에 취약했다.

     

    - 이것은 일상생활과 자아실현에 관한 개인주의 이론을 대변했다.

    - 맑스주의를 하나의 ‘학문’으로 또는 사적인 기풍으로 바라보는 학습 써클의 아카데미즘.

    - 노동자주의가 좌익주의의 압력에 굴복했음을 은폐하는 행동주의/당면주의.

     

    계급투쟁의 느리고 불균등한 걸음걸이에 직면한 학생운동의 환멸과 해체는 모더니즘이라는 형태로 이론화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 운동은 가장 덜 확고하고 덜 진지한 인자들을 걸러내고 자신을 정화했다. 그런 인자들에게 투쟁주의는 휴일의 소일거리이거나 소외의 극치였다.

     

    24. 특히 폴란드 이후, 위기가 더 넓고 넓은 계급 분출로 향한 길을 열어낼 것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음에도, ICC를 포함해서 혁명조직들은 모더니즘과 아카데미즘만큼이나 위험한 또 다른 위험이자 개인주의와 딜레탕티즘(제대로 모르고 좋아하는 어설픈 전문가주의)과 쌍을 이루는 당면주의(맞닥뜨린 국면에 조급/당면하게 대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날 혁명조직은 이것을 결정적으로 일소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러한 재앙들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5. 최근에 ICC는, 쁘띠 부르주아적 조급함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고 1968년 5월의 혼란스러운 정신의 최종 전형인 당면주의의 재앙적인 결과로 고통받았다. 이러한 당면주의의 가장 충격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다.

     

    (가) 행동주의, 이것은 개입에 나타났고 자발주의 개념인 ‘신규모집’ 안에 이론화되었다. 조직은 인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강령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선택을 통해 조직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잊히었다. ‘수적인’ 발전은 단순한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계급과 그것이 배출해 내는 인자의 성숙 결과이다.

    (나) 지역주의, 이것은 특정한 개입에서 표면화되었다. 우리는 ICC 내의 특정 인자가 그들의 지역적인 지부가 마치 개인의 소유물이자 자동적인 실체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부는 전체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국제조직의 필요성조차도 부정되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국제조직은 일종의 ‘허세’로, 기껏해야 지부 간의 느슨한 ‘연결고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다) 경제주의, 오래전에 레닌이 대항해 싸웠던 그 경제주의는 계급투쟁의 전 세계적 틀 속에 각각의 파업을 통합해 내기보다는 그것 자체로만 바라보는 경향 속에 나타났다. 종종 우리 조직의 정치적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혁명가들을 노동자를 위해 봉사하는 투쟁의 ‘심부름꾼’이나 ‘기술자’로 여기어 결국에는 장래 투쟁의 물질적 준비만을 옹호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라) 추종주의는 혁명조직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이러한 몰이해의 마지막 구체화로서, 우리 자신의 깃발을 숨긴 채 파업을 단순히 따라가려는 경향의 형태를 띠었다. 노동조합주의의 모든 숨겨진 형태를 분명하고 비타협적으로 고발하는데 주저함이 있었다. 운동과 함께 머물며 더 많은 즉각적인 반향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든지 계급에 의해 인정받기 위해서 원칙을 외면하였다.

    (마) 노동자주의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의 최종적인 종합이었다. 좌익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특정 인자들은 조직 내부에 ‘노동자’와 ‘지식인’, ‘지도부’와 ‘풀뿌리 단위’가 존재한다고 선동적으로 주장했다.

    몇몇 동지들이 조직을 떠난 것은 당면주의가 매우 심각한 병임을 보여주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조직의 정치적 기능과 그 이론적 강령적 기초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26. 이 모든 전형적인 좌파적 편향은 조직 강령 안 이론적인 불충분성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이론적 틀의 빈약한 적용을, 특히 자본주의 쇠퇴론의 빈곤한 적용을 반영하는데, 자본주의의 쇠퇴는 혁명조직에 열린 활동과 개입의 형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27. 이 때문에 ICC는 정치분석에서 당면주의로밖에 귀결될 수 없는, 그 어떤 강령적 틀의 포기에 완강하게 반대해야 한다. ICC는 다음과 같은 위험들에 대항해 결연히 싸워야 한다.

     

    - 경험주의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경험주의의 경우, 당면한 사건과 현상에 집착함으로써 기회주의의 영원한 원천인 ‘특정한’ 경우라는 낡은 개념이 초래된다.

    - 피상성의 모든 경향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이 경향은 관행성이나 정신적인 게으름의 형태를 취한다.

    - 이론 작업에 대한 특정한 불신이나 주저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이론의 ‘회색’은 개입이라는 ‘장밋빛’에 반대 항에 놓여서는 안 된다. 이론은 맑스주의 전문가에게 맡겨진 어떤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집합적인 심사숙고의 산물이자 이러한 사색 과정에 모든 이의 참여 산물이다.

     

    28. 우리의 이론적 조직적 성취를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주의의 유아기 형태인 딜레탕티즘의 다음과 같은 흔적들을 없애야 한다.

     

    - 방법이 없이 단기적으로 조금씩 일하는 것.

    - 수공업자의 딜레탕티즘의 표현으로, 개별적으로 일하는 것.

    - 미숙하거나 인위적인 경향을 구축하는 정치적인 무책임성.

    - 책임을 다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것

    조직이 투쟁가의 일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투쟁가는 일상 투쟁을 유지해서 조직의 폭넓은 작업에 스스로 발 딛는다.

     

    29. 자본주의 쇠퇴기에 혁명조직의 기능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1980년대라는 결정적 시기에 우리 자체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혁명이 조직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혁명적 소수들이 하나의 계급 기관으로 존재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조직문제와 극복되어야 할 몰이해가 존재한다.

     

    30. ICC 존재는 오직 맑스주의 방법의 재습득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데, 이 방법이 사건을 이해하고 개입하는데 가장 확실한 나침반이다. 조직의 모든 작업은 오직 장기적인 기반 위에서만 이해되고 발전할 수 있다. 방법 없이, 집합적인 정신 없이, 모든 투쟁가의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당면주의 조급함을 배제할 수 있는 불굴의 자세 없이는 그 어떤 진정한 혁명조직도 존재할 수 없다. ICC는 그 존재가 장래의 투쟁에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인,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창조한 그러한 기관의 하나이다.

     

    31. 지난 19세기와는 달리, 혁명조직의 임무는 더 난해하다. 구성원 모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조직은 여전히 반혁명의 마지막 영향으로부터 고통받고, 그 시기 동안 전진과 후퇴로 표시되는 계급투쟁의 결과로 고통받는다.

    반혁명의 기나긴 밤 질식할 것 같고 파괴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 필요는 더 없을지라도, 현재의 활동이 계급투쟁에 그리고 세계적 규모의 대중 운동 발생에 유리한 시기에 활동하고 있을지라도, 조직은 계급 운동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시기에 올바르게 퇴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혁명조직은 혁명의 순간이 올 때까지, 계급을 엄습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사기 저하의 물결에 대항해 결연하게 투쟁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 가장 결정적인 임무는 조직의 통일성, 그 원칙과 기능을 방어하는 것이다. 스스로 위축되어버리는 약점 없이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바로 미래의 승리를 위한 조건을 준비하는 길이다. 혁명이론을 대중이 파악할 수 있으려면 당면주의 편향에 대항한 처절한 투쟁이 필요하다.

     

    당면주의 잔재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코뮤니스트 좌파에 의해 보존되고 풍부해진 맑스주의의 생생한 전통을 다시 품어 조직이 역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배출된 대체 불가능한 도구임을 실천 속에서 보여줄 것이다.

     

     

    보론

     

    전면화된 투쟁과 혁명운동의 시기에 혁명가의 활동은 직접적이고 심지어 결정적인 영향을 갖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노동자계급은 이때 숙적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계급이 자체의 전망을 강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비화와 자극에 항복하여 부르주아지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 계급은 회합이나 총회에서 투쟁 속도를 늦추고 그것을 이탈시키려 모든 가능한 수단을 사용하는 부르주아지 대리인들이 자행하는 사보타지와 훼손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운동에 분명한 정치적 방향성을 유지하고 계급의식 균질화 과정을 가속하는 임무를 가진 혁명가들이 있다는 것은 독일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보였듯이 힘의 균형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특히, 우리는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듯이 이 영역에서 볼셰비키가 행한 근본적인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당이 노동자 대리인 소비에트에서 소수이고, 부르주아의 영향 아래에 놓인 채 이 영향을 프롤레타리아트에 확산시키는 모든 기회주의적 쁘띠부르주아적 인자들의 블록에 비해서 잠정적으로 미약한 소수임을 인정하라… 노동자 대리인 소비에트가 혁명정부의 유일한 형태이고 그래서 이 정부가 부르주아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한 노동자 대중들의 요구들에 근거해서 그들의 전술 오류를 인내심 있고 체계적으로 노동자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그들에게 설명하라." (테제4)

     

    지금부터 ICC 존재와 현 임무 실현은 미래 임무에 부응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를 표현한다. 전면화된 활동의 시기에 혁명가들이 그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은 현재 활동이 조건 짓는다.

     

    1) 이러한 역량은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적 숙련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일관적이고 분명히 규정된 입장은, 그것을 옹호하고 유포하며 심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역사는 보기를 들어 독일의 혁명가들과는 달리 어떻게 볼셰비키가 (1905년부터 1차대전까지) 계급의 경험을 고려해서 그들의 입장을 발전시키고 조직을 강화하는 역량으로 인해 계급의 혁명 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틀 안에서, 코뮤니스트 그룹의 근본적인 목적 중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정치투쟁 초기의 특징인 활동과 조직의 수공업적인 수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 임무, 즉 개입, 출판, 유포, 토론 및 근접한 인자들과의 교류를 발전시키고 체계화하며 정규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중점적인 급선무이어야 한다. 이것은 특수한 기관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세포들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균형 잡힌 신진대사를 갖는 단일체로써 활동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기능규칙을 요구한다.

     

    2) 지금부터, 혁명조직은 전 세계적으로 투쟁의 발전과 더불어 출현하는 정치 그룹, 토론 써클, 그리고 노동자그룹에 있어서 국제적인 정치적 재조직화의 일관된 축을 표현한다. 간행물을 가지고 있고 개입하는 국제 코뮤니스트 조직이 존재함으로써 이 그룹은 입장과 경험의 대결을 통해서 자신을 정립하고 그들 입장의 혁명적 일관성을 발전시키며 어떤 경우에는 국제 코뮤니스트 조직에 가담할 수도 있게 된다. 만약 그러한 축이 없다면, 그러한 그룹은 (예를 들어 행동주의, 지역주의 및 협동조합주의 등을 통해) 분산되고 낙담하고 퇴행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투쟁이 발전하고 혁명적 대결의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이 역할은 계급투쟁에 따라 생겨나는 인자들과 관련해서는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점점 더 노동자계급은 숙적과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부르주아 권력을 즉각 전복할 수 없는 시기에조차도 충격은 격렬하며 계급투쟁의 결과에 결정적일 것이다. 이 때문에 혁명가들은 그들이 가진 어떤 수단을 활용해서라도 계급투쟁 안에 개입해야 한다.

     

    -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진 모든 잠재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러한 투쟁을 가능한 한 멀리 추진하기 위해서.

    - 모든 문제가 분명하게 제기되고, 일반적인 정치적 전망의 틀 안에서 최대한 많은 교훈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1982년 1월.

     

    2005년 1월 17일, 인터내셔널 리뷰 (IR)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specialtexts/IR029_functi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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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건설/혁명조직 관련 글>

     

    혁명당과 노동계급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6925

     

     

    혁명조직의 역할과 구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6931

     

     

    다시 혁명조직의 기본을 말하다.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5845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3 : 노동계급과 혁명조직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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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를 즉시 중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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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는 정당한 방어권이 아니라 성폭력의 연장이거나 또 다른 성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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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이유로도 2차 가해는 용인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즉시 2차 가해를 중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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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가해에 대한 제 단체의 규정>

 

‘2차 가해'라 함은 사건 이후 가해자나 그 주변인3자가 피해자가 원치 않는 접촉이나 합의 시도 및 사건접수자 또는 제3자가 피해자를 부당하게 추궁하고 특정 행동을 강요하는 행위고의적으로 사건 해결을 지연시키거나 은폐축소하는 행동 등으로 피해자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민주노총 성폭력폭언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

 

 

2차 가해란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와 고통을 주는 일체의 언행(언어적인 폭력정신적인 협박이나 물리적 강압집단적인 따돌림괴롭힘피해자 신변 공개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과거 경력이나 행동성격 등을 문제 삼는 행위 등)을 하거나 피해자와 조직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포함하며본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코뮤니스트 반()성폭력 규정

 

 

2차 가해라 함은 성폭력 사건 이후 가해자 또는 가해자 이외의 자가 언어적인 폭력정신적인 협박이나 물리적 강압집단적인 따돌림괴롭힘피해자 신변 공개사건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과거 경력이나 행동성격 등을 문제 삼는 행위 등으로 피해자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말하며 본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노동당 당규 제5호 성차별·성폭력·가정폭력 사건 처리에 관한 규정

 

2차가해라 함은 사건을 묵인방조하거나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사건과 관련하여 직간접적인 또 다른 가해를 하거나권리를 침해하는 일체의 언행을 하거나피해자와 당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사회변혁노동자당 제3호 당규 성차별성폭력 근절 및 예방에 관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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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혁명조직의 역할과 구조

  • 혁명조직의 역할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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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의식

     

    우리는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교화하고 레닌의 실천과 이론 작업으로 확인되었으며, 제3 인터내셔널의 처음과 두 번째 회의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의 형성에서 다시 확인되었던 혁명 이론의 습득물을 견지한다. 협상위원회(Committee of Entente) 내부의 이탈리아 좌파는 이러한 입장을 방어했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랐다.

     

    1.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므로, 필요의 세계에서 자유의 세계로 인류를 인도하는 결정적인 단계를 완수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2.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점진적으로 강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 과거 지배 계급에 맞선 새로운 계급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존재는 부르주아지 권력을 점진적으로 사라지도록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의 권력은 점차 절대적인 것이 되고, 시민 사회의 가장 깊은 층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다.

     

    3. 여타 계급에 맞서는 결정적인 적대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계급의 존재 그 자체에서부터 구체적으로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의식, 코뮤니스트 의식이 나타난다.”

     

    4. 부르주아 권력을 혁명적으로 전복할 가능성이 역사적 과제로 제시되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생산 양식과 사회적 관계의 내적 모순의 폭발을 더는 통제할 수 없는 위기의 시기 동안이다.

     

    5. 이 혁명은 “필연적이다. 지배 계급이 다른 방식으로는 전복될 수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계급 전복이 수년간 쌓인 모든 거름 위에 올라타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하는 데 적합하게 되는 것은 혁명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맑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의식의 대규모 생산과 대의명분 그 자체의 성공을 위해서는, 인간이 거대한 규모로 변화해야만 하며, 그 변화는 실천적인 움직임, 혁명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맑스)

     

    6. 앞선 시기 동안, 그리고 혁명적 과정이 일어나는 그 시기 동안, 코뮤니스트 의식은 노동계급과 다른 계급 내부의 소수 개인 사이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코뮤니스트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 그리고 계급 적대의 객관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되고, 지속해서 다시 언급된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이러한 객관적 상황으로부터 그 힘과 유물론적 본질을 끌어내며, 따라서 이는 전체 계급의 유산이다.

     

    7.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운동과 강령의 표현으로써, 코뮤니스트 의식은 맑스주의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로 정의될 수 없다. 반대로, 코뮤니스트 의식은 사회적, 경제적 실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바로 그 실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혁명 의식은 귀족계급 지배의 외형에 반대하면서 하나의 착취하는 계급(부르주아지)을 다른 착취 계급으로 대체할 필요에 기초하는 반면, 코뮤니스트 의식은 오늘날 사회와 모든 그 이전 사회의 계급적 성격 그 자체에 반대한다. 그 목적은 계급 구분 그 자체이다. 그것은 적절한 단어의 의미에서 마지막 이론이 아니라, 명백히 마지막 혁명 이론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코뮤니스트에게 이 국가들은 계급 적국의 국제적 노선에 완전히 편입된 국가 자본주의의 한 형태이다.)에서 나타난, 혁명적 맑스주의와 완전히 갈라선 이데올로기들이 고전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조차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8. 계급과 코뮤니스트 의식의 관계는 계급과 미래의 계급 독재의 실천과의 관계와 같다. 그것은 매우 역동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객관적인 사회적, 경제적 모순에 기반을 둔다. 계급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 준비가 될 때까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마음과 심리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9. 맑스주의에 맞지 않는, 전형적인 소부르주아 관념론 이론에 단호하게 거부하고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이 이론은 혁명 과정 바깥에서 코뮤니스트 의식이 성장할 수 있고 일반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관념의 우월성이라는 관념론적 원칙에 기초하며, 현실에 대한 불가능한 비전을 내세우며, 코뮤니스트의 피할 수 없는 의무로부터 떼어놓고 그들의 일을 방해하면서 잠재적 혁명가들을 속일 수 있을 뿐이다.

     

    10. 러시아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과정에 대한 잘못된 평가로부터 시작된 평의회코뮤니스트 운동은 근본적으로 반(反)맑스주의적인 테제를 채택했고, 코뮤니스트 운동에 적합하지 않고 그에 반대하는 관점에 도달했다.

     

    11. 평의회코뮤니스트 운동에 가까운 또 다른 입장 또한 거부해야 하는데, 오직 혁명 과정만이 코뮤니스트 의식을 일반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를 ‘혁명의 필요에 대한 의식’으로 환원하여 고도로 조직된 부르주아지 세력에 반대하는 조직된 투쟁을 포기했다. 이 입장의 옹호자들은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보존과 두 제국주의 블록 중 하나의 헤게모니에 봉사하는 것일 뿐이다.

     

    12.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코뮤니스트 의식, 전체 원칙, 테제의 계승, 그리고 코뮤니스트 혁명 이론과 견해가 한 번에 주어지는 어떤 것, 운동의 어느 역사적 단계에서 그다음 단계로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하는 관점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 주변에 있는 이들은 코뮤니스트 의식이 계급과 자본에 종속된 상태에서 계급이 객관적으로 겪어야 하는 경험에 코뮤니스트 의식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테제와 입장이 계급이 사는 실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이 모든 변화 속에서 계급투쟁 성격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필수적인 교훈을 끌어내는 것이다. 당연히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모든 변종은 부르주아의 민족적 코뮤니스트 정당 이론에도 계급 사회의 기본적인 본질을, 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계급이고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받는 계급이며 여전히 그렇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혁명가의 조직: 당

     

    1. 혁명으로 향하는 기간 동안, 그리고 심지어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코뮤니스트 의식은 소수가 갖고 있는데, 그러니까 오직 소수만이 갖고 있고 이러한 의식에 기반을 두고 행동한다. 이것은 논쟁할 필요가 없는 진실, 구체적인 사실이다. 이 소수는 계급이 자본주의 생산 양식 위기에 빠져있는 기간 동안 실천적인 운동, 혁명 – 계급 내에서 대중의 코뮤니스트 의식이 성숙하는 유일한 방법 - 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도구를 갈고 닦을 의무가 있다. 모든 의미에서 혁명적 소수의 조직은 당이다.

     

    2. 당은 테제, 원칙, 그리고 코뮤니즘을 위한 모든 투쟁 표현의 유산을 계급에 돌려줘야 하는 영속적 책무가 있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노동계급이 자신이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당은 계급과 그 의식의 관계가 자본주의 존재의 전 역사를 통해 표현되는 매개체이며,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가는 이행의 시기에서도 바로 그러할 것이다.

     

    4. 노동계급의 권력 획득, 그러므로 전 사회 혁명의 시작은 오직 자본주의의 위기 동안, 그리고 계급이 혁명가들의 원칙과 강령 속에서 그 자신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인지할 때, 즉 부르주아지 국가에 대한 공격 동안 당과 그 강령을 중심으로 결집할 때에만 가능하다.

     

    5. 당-조직의 기복은 계급의 삶의 기복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당-조직은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정치적 수준에서 최고의 지배력을 발휘할 때 그 심각한 퇴조의 시기에는 거의 사라진다. 그러나 계급 사이 객관적인 적대가 사라질 리 없는 것처럼, 이 적대를 먹고 자라는 코뮤니스트 의식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가들의 조직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지점까지 축소될 수는 있다. 계급의 패배가 일반 혁명가들에게 공포와 환멸로, 따라서 코뮤니스트 의식 수준에 대해 혼동과 착란으로 이어졌을 때 특히 그러하다. 이는 1948년 전후 이탈리아에서 확인되었다. 이 시기 스탈린주의의 결정적인 승리3) – 이는 계급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 자신을 얽매는 사슬을 벼리게 했다. – 는 통일된 조직,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당 구성원의 분리를 일으켰는데, 이 조직은 1943년 스탈린주의의 깊은 침체로부터 계급의 잠재적인 각성에 대한 반응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6. 당을 자처하는 여러 조직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의 연속성과 그 당을 보호할 투사의 필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제3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권력이 그들이 판단하기에 타락의 순환을 완료하기 전인 1921년 레그혼(Livorno)에서 설립된 당에 대해 프랑스와 벨기에의 좌익 분파의 동지들의 책무였다. 이것은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소련이 반혁명의 대리인으로서, 세계 제국주의 전쟁에 한 세력으로서 참전했을 때 완성되었다. 그러자 혁명의 연속성 방어는 새로운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당에서 구체화 되었는데, 이 조직은 이전 시기의 경험과 노력을 모두 집대성한 테제와 강령을 중심으로 재결합되었다. 이 당이 이후 2개의 경향으로 나눠진다는 사실4)과 그들 중 하나가 종종 공개적으로 반혁명적(우리는 Invariance를 생각하고 있다)5)인 그룹과 조류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1943년 강령의 기반에 대한 완전한 소멸이나 배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7. 프롤레타리아트 세계당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 ‘민족적’ 당의 지도로 어떤 국가에서 혁명적 격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과거 역사적 경험과 제국주의 초국가적 집중의 성장은 혁명가들이 반세기 동안 혁명가의 코뮤니스트 의식으로 표현되는 이론적 체계적 강령의 기반 위에 국제 정당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자본의 초국가적 성격, 다시 말해 모든 국가에서 부르주아지가 가지는 똑같은 계급적 이해는 역시 초국가적 성격의 프롤레타리아 이해에 대응한다. 한 나라에서 승리한 혁명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적극적인 연대 없이는 오래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은 방어 수준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혁명적 공격에서도 그러하다. 세계혁명당은 중요한 전략적 계획 실행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세계당은 자본에 대한 총체적 공격에 집중하고 있어, 혁명이 처음 터져 나온 나라에서의 전술은 이 계획에 부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8. 이것은 국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당이 가질 관점이다. 프롤레타리아 이해와 당 전략의 초국가적 성격은 당의 집중화된 조직에 반영될 것이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별개일 수 없는 도구인데, 왜냐하면 객관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계급의 계속 진행되는 발전을 오직 당만이 체계적, 정치적 강령으로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급은 극단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거나, 심지어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 없이도 쉽게 파벌주의 및 코포라티즘 - 둘 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 의 먹이가 될 것이다. 당이 그 중심 입장, 연방제의 원칙이 아니라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에 따라 단단하게 재결합하고 조직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계급이 다양한, 종종 모순적인 경험을 당에 보내더라도 당이 그것을 통일된 강령으로 정교화시켜 다시 계급에 돌려줘야 하는 것처럼, 당 자신도 그 안에서 전투적 활동 경험과 전략적, 전술적 입장이 주변적인 것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다시 중심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옮겨갈 수 있다.

     

    계급과 당

     

    당이 오직 혁명 직전에만, 심지어 혁명 동안에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당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왜곡시킨다. 만약 계급이 혁명적 공격을 수행할 역량이 있다면 - 당으로 대변되는 정치적으로 통일된 요소의 개입 없이 특정 수준의 정치적 동질성을 계급 내에서 이룰 수 있다면, 당은 그 자체로 잉여인 것이다. 만약 계급이 그 투쟁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특정 순간 당으로 ‘스스로 무장’한다면, 당은 의식의 문제와는 관계없는 작전상의 도구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 유명한 평의회주의자들의 이론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왜 좌익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혁명의 수행에 당이 필연적임을 인정하면서도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당 구성을 연기하는 그런 개념과 싸워야만 하는지 그 이유이다. 그것은 당(어떤 동지들은 당보다는 혁명가 조직이라 표현하길 좋아한다)의 실천적인 책무를 과소평가한 데 기반을 둔다. 우리는 당의 필수적인 책무 중 하나가 가능한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경험과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정교화한 노동계급 해방의 강령을 계급에 되돌려 줄 수 있는 도구로 당이 스스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당은 계급 내에서 계급 일부로 행동한다.”라는 공식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디에 있든 전투적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일부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결정적인 입장과 당의 총체적인 방향을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당이 그 안내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고 전제할 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당이 계급의 소수라는 일반적 상식과 배치되는 대중적 존재감을 어디서나 가질 만큼 수적 성장을 겪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한 이것은 충분조건이 아니다.

     

    당과 계급 사이를 이어주는 기관이 혁명적 공격의 시기 전후 모든 기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혁명적 원칙은 분명히 후천적으로 획득한 혁명적 원칙이다. 이 기관은 당이 강령과 방향성에 대한 영향력을 가능한 확대하기 위해 사용한다. 계급은 경제적 수준에서, 또는 누군가는 계약적 수요라고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움직이고 투쟁한다. 오직 혁명가만이 이러한 투쟁의 한계로 계급을 해방할 수 없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코뮤니스트들은 자신을 노동자 대중과 구분하는데, 이는 방어적 투쟁에서 전체 계급과 함께 싸울 때조차 혁명가들이 이러한 투쟁의 한계를 비판하고 혁명의 필요성을 선전하는데 이용한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코뮤니스트들은 계급의 투쟁을 부르주아 국가를 공격하는 정치적 전략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들은 전체 체제가 위기일 때, 그리고 투쟁이 전면화되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 공격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지향하기 위해 사용할 도구를 준비해야만 한다.

     

    만약 혁명으로 나아가는 시기에 당이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갖추지 못한 채 계급 내에서 활동하는데 소홀히 한다면, 당은 그 근본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당은 혁명가의 조직으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상황이 객관적으로 좋을 때, 당은 준비되지도 않고 계급으로부터 고립될 것이라는 의미이고, 이는 계급이 무장해제된 채로 방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당이 무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능성은 계급투쟁의 성숙도, 그리고 계급 내의 혁명가들과 부르주아 좌익의 실제 관계와 물론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것은 사용할 도구의 종류가 당의 강령에 정확하게 예상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증거는 우리 강령이 예견했던 ‘국제주의자 공장 그룹’인데, 이것은 오늘날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한때(예를 들어 1945년에서 1948년까지)는 매우 중요했던 우리가 그 형성에 공헌하고자 하는 국제당 강령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들의 책무는 특정 동지들이 믿는 것처럼 단순히 ‘경제적 수준에서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당의 총체적인 정치적 원칙을 당에 전파하고, 계급에 동조하는 계층을 단단하게 하며, 미래 혁명 투쟁의 참고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상황에서의 어려움, 낮은 수준의 계급의식은 이런 노동자들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지점을 강령에서 놓치고 좀 더 나은 시기로 미룬다면, 우리는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우리의 의무를 수행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이 오랜 시간 동안 전투적으로 존재해 옴으로써만 개발할 수 있는 핵심 그룹과 경험이 부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이 계급과 혁명을 위한 작업과 동시에 스스로 갖춰야 하는 도구 가운데, 공장 그룹의 네트워크는 제일 급하고 중요하지만, 비록 혁명가의 수가 부족하다는 점과 좋지 않은 정치적 상황 탓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외 다른 것도 반드시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6) 다른 한 편, ‘청년 코뮤니스트’ 같은 다른 조직은 부르주아 사회와 혁명적 운동 내에서 이전 단계의 산물로 간주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제는 불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다시 당의 중앙 조직과 계급을 진정으로 연결하는 도구 없는 계급 정당은 없다는 원칙을 확인한다. 이 주장을 과소평가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은 당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1. 계급과 그 당의 변증법적 관계는 권력 쟁취 기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적 ‘반(半)-국가’의 건설 시기 동안 사라지거나 질적 변화를 겪지 않는다. 둘 다 계급이 그 목적에 집중되고 통일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2. 프롤레타리아 ‘반(半)-국가’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 동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발견한 평의회 형태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실천적 혁명적 운동으로 수행되는 점진적 계급의 소멸은 코뮤니스트 의식의 대량 생산, 그리고 결과적으로, 당의 점진적 소멸을 동반할 것이다.

     

    3. 당은 “노동자 국가”라는 구조와 그 자신의 구조를 동일시하지 않고, 정치적 안내라는 자신의 역할을 계급이 자신의 이해를 깨달을 때까지 수행할 것이다.

     

    4. 코뮤니스트좌파 그룹이 이행기의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필요는, 노동자평의회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노동자 국가도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당 없이는 혁명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없다는 명백하고 근본적인 주장의 긍정에서 시작한다.

     

     

    <주>

     

    3) 1928년 소련에서 스탈린주의는 명백하게 승리했었지만, 이것은 스탈린의 충복, 톨리아티(Togliatti) 아래 재결성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이 전후 시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평화를 건설하는데 돕는 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4) 이것은 1951-2년,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당(코뮤니스트 투사)에서 분리된 보르디가와 보르디가주의자들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분리된 두 경향의 조직적 차이를 개괄할 것이지만, 그 분리에 대한 자세한 것은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의 보르디가: 신화를 넘어서 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Invariance”는 보르디가주의자 진영에서의 첫 번째 분리(1966년 일어났지만, 그 후로 더 많이 발생했다)였고, 보르디가가 실제로 살아있을 때 발생한 유일한 분리였다. 자크 카마트(Jacques Cammatte)가 지도했으며, 보르디가주의자들을 ‘활동가주의’라며 비판했다. 결국, 카마트는 혁명을 이룰 희망 없이, 모든 정치적 조직은 ‘소음’이고 노동계급은 ‘자본을 위한 계급’이라고 결론 내렸다.

     

    6) 이것은 38년 전에 작성된 글이며 그 이후 지난 30년 동안 노동계급의 재건 또한 우리 이탈리아 동지들이 ‘지역’ 그룹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조직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CWO는 이라크 전쟁 시기 “전쟁이 아니라 계급 전쟁”과 같은 주제에 대해 싸웠던 그룹과 함께 자체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우리는 이것을 ‘계급을 조직하는’(ICC가 1978년 이야기한 것처럼) 시도가 아니라 혁명가들을 조직하고 계급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혁명적 정치 조직 또는 당은 이 문서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단순히 선전하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일 수 없다.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 당(코뮤니스트 투사)

    197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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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 28일

    CWO 재발행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6-08-28/the-revolutionary-party-and-the-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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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혁명당과 노동계급

혁명당과 노동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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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가 요청한 제2회 국제회의의 문서, 코뮤니스트 투사의 국제주의자들이 “혁명 조직의 역할과 구조”에 관해 쓴 글을 출간한다. 우리는 이 문서를 영어로 출간한 적이 없었다.1) 그러나 우리는 올해 후반에 있을 회의에서 정점에 달할 국제코뮤니스트경향(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내부의 혁명당 역할과 구조에 관한 토론 일부로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 문서는 당의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는 일련의 문서 중 첫 번째이며, 그 배경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기 위해 서문을 작성한다.

 

(적어도 러시아 혁명의 실패 이후) 중요하고 가장 난처한 문제 중 하나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소수의 역할과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각 세대는 이러한 문제에 매번 새롭게 직면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문제에 적절히 맞서기 위해서는 과거 투쟁과 과거 프롤레타리아 세대의 진정한 성취를 고려해야만 한다. 1970년대 초반 자본주의 전후 호황의 마지막에 뒤따라 만들어진 다른 좌익공산주의 조직처럼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의 선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는 스탈린주의 소련이 보여준 바와 같은 러시아 혁명 실패의 유산에 대한 거대한 의심의 시기였으며, ‘모든 정당은 부르주아적’이라는 오토 륄레(Otto Rűhle)의 관점이 많은 공감을 얻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하여 사회민주당은 몰락했고, 제3 인터내셔널에 의한 세계 혁명의 포기와 함께 소련에서 정당주의가 출현했다. 이러한 사건은 대중 정당이든 ‘전위’ 정당이든 노동계급에 뭔가 줄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싹 쓸어 없애버린 것처럼 보였다. 소련이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사실 국가자본주의의 독특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한 이들에게는 당의 문제 전체가 문제였다. 그랬던 만큼, 그 시기는 평의회주의와 ‘자발성’ 숭배가 막대한 영향력을 발취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의 진정한 성격은 끈질기게 돌아와 혁명가들의 앞을 막아선다. 역사상 다른 적대 계급이나 피지배계급과는 달리 노동계급은 지킬 어떤 형태의 재산도 없다. 그야말로 재산이 없는 계급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와는 달리, 과거 체제 아래에서 이런 법을 없애거나 저런 특권을 제거한다고 해서 점증하는 이득을 얻을 수가 없다. 노동계급의 유일한 ‘재산’은 노동하는 능력(그리고 착취 계급을 위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능력)뿐이며, 유일한 무기는, 안톤 판네쿡이 언급하듯이, ‘의식과 노동계급 조직’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직면한 문제가 있다. 만약 아래와 같은 것이 사실이라면 :

 

“지배계급의 이념은 모든 지배적 이념의 시대에 존재한다. 사회를 지배하는 실질적 세력으로서의 계급은 동시에 지배적인 지적 세력이다. 물질적 생산 수단을 소유한 계급은 동시에 지적 생산 수단도 통제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지적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한 생각의 이념은 (지적 생산 수단을 가진 이들의 그것에) 종속된다.”

 

어떻게 노동계급은 그러한 지배로 벗어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우선 해결할 수 없는 체제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은 규칙적이고 주기적인 경제 위기와 체제의 존속이 ‘시민 사회 안에 있지만 시민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증가하는 착취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이 계급은 때때로 광범위한 봉기의 형태를 띠는 집단행동으로 착취에 함께 뭉쳐 저항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 대처한다.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착취의 대안을 위한 학교이다. 그러나 투쟁의 과정에서 일부의 노동자들(일부 노동자는 아니지만, 체제를 간파할 수 있고 노동계급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데 일상적인 게릴라전을 넘어선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깨달음, 의식에 도달한다. 그들은 체제, 그 자체를 넘어서는 정치적 강령의 필요를 인식한다. 그러나 계급 내에서 소수인 탓에, 그들은 자신의 목표를 진전시키기 위해 자신을 조직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계급투쟁이 생산한 의식에서 획득한 모든 것과 자신을 통합할 수 있는 조직, 당을 만드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당의 성격, 역할, 그리고 구조의 문제가 이제 제기된다. 그리고 그것은 짧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맑스는 처음에 국제노동자연합 또는 제1 인터내셔널 안에서 그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 규칙에서 그는 핵심 요소를 제기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책무이다.” 이를 통해 맑스가 의도했던 바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이것을 잘못 해석하듯이) 노동자들은 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노동계급은 모든 부르주아 조직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신의 정치적 조직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1 인터내셔널은 바쿠닌(Bakunin)과 프루동(Proudhon)의 추종자들과의 논쟁으로 찢어졌고 진정한 세력으로서 10여 년 만에 사망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민족(국가) 정당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한 걸음 후퇴한 사회민주당이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지가 미디어를 통제하고, 대중에게 접근할 방법이 대부분 효과적이지 못할 때의 노동계급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수백만의 운동으로 성장하였고, 자본주의가 선거 때문에, 또는 적어도 평화적인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과거 지배의 잔존물을 깨끗하게 쓸어버리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던(5 테제를 보라) 혁명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그리고 특정할 수 없는 미래로 연기되었다(이른바 최대 강령이 되었다).

 

사실은 계급 내에서 코뮤니스트 의식의 저장소로서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사회민주당 내의 진정한 혁명가들의 존재는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적 개념들로 뒤섞여 버려 실제로는 노동계급을 자본주의로 통합시키고 있는 ‘운동’을 위장하는데 이바지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른바 제2 인터내셔널의 광범위한 다수 사회민주당이 그들 ‘자신의’ 정부의 음모를 지지하고 노동계급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내모는데 찬성 투표를 던진 1914년에 이르러서야 명백하게 밝혀졌다. 전쟁 이후 혁명적 물결이 있었던 시기에는 노동계급 혁명을 위한 진정으로 국제적인 첫 번째 시도를 억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를 계속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에 두 번째 봉사했다. (특히)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대중을 새로 만들어진 코뮤니스트당을 따르는 대중에게 반대하기 위해 동원했고, 러시아 밖에서의 혁명의 패배를 확정 지었다. 이것은 다시 고립된 러시아에서 반혁명의 최종 승리로 이어졌다. 이 반혁명은 최초에 혁명을 이끌었던 바로 그 당에 의해서였다.

 

볼셰비키는 사회민주당 가운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한 몇 되지 않는 당 중 하나이며, 결과적으로 러시아 혁명적 계급 운동 내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전쟁은 죽음, 빈곤, 그리고 기아에 가까운 상황을 가져왔고,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에서 혁명이 의제로 떠올랐다. 볼셰비키당은 이후 스탈린주의자들(그리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신화가 묘사하듯이 규율이 잘 세워진 집단이 아니었다. 볼셰비키당은 혁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와 관련하여 중요한 지점은, 1914년 당시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더욱 광범위한 노동계급 안에 있었으며, 차리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명확한 입장을 대표한다고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볼셰비키당이 자본주의 규칙을 대체할 역량이 있는 진정한 노동계급의 실체로서 소비에트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보냄으로써 표현되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볼셰비키당은 결합점이 되었다.

 

그리 논쟁이 많이 되지 않았던 점은 다가올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입장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주요한 목표는 당이 성장하여 권력을 잡도록 충분한 지지를 받는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간략히 하자면, 당이 계급을 대표하고, 따라서 혁명을 당의 이름으로 수행한다는 사회민주당의 입장을 대체로 수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양한 색조의 사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전-러시아 최고위원회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겨주는 대신 전복되었을 때, 새로운 정부, 인민 위원 평의회가 그 위에 서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혁명가 좌익이 여기서 손을 뗀 다음에는 그것이 유일한 당 정부가 되었다. 따라서 당은 국가가 되었고, 당과 국가 사이의 분리가 사라졌다. 그 시기 이것이 혁명뿐만 아니라 혁명당에 대한 개념에 대해 위험할 것이라고 인식한 이는 거의 없었으며, 특히 혁명이 고립되자 명백해졌다.

 

러시아 혁명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루었고 계속 다루겠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 조직에 대해 짧은 언급을 간단하게 하고자 한다. 러시아 혁명은 당, 혁명적 소수 또는 그 외 당신이 그것을 지칭하든 어떤 이름이든 그것은 혁명을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은 혁명 전부터 계급 안에 존재했고, 혁명의 처음부터 참여했다. 그 영향력은 구성원에 그치지 않고 발휘되었다. 당은 전진할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했고, 혁명 과정을 중단시키려 하는 모든 이들을 비판했다. 심지어 봉기를 지도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는 봉기를 지도했을 수도 있지만, 봉기는 혁명이 아니며, 일단 계급 대중이 혁명적 경험을 스스로 쌓게 되면 봉기는 궁극적으로 그들만이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이들은 계급 수준의 기관들(평의회, 또는 소비에트, 지역 위원회 등)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주의가 법령의 공포로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자신들의 혁명적 소수, 당이 제안한 강령을 받아들인 계급 대중의 의식적인 자기활동에 의해서만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잡한 문제이며 우리가 앞으로 몇 달간 다룰 많은 문제를 제기하는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혁명 이전의 대중 정당은 과거에 속한다는 것이다. 1914년 사회민주당의 붕괴는 이를 보여주었고, 1921~2년 혁명적 파도가 사그라지자 코민테른이 사회민주당과 통일 전선을 형성하려는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를 했을 때도 그러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30년대부터 계속 사회민주당에 ‘위장가입’을 하고 그들을 혁명적 경향으로부터 제거하는 오류를 반복했다. 인테사(Intesa)위원회의 강령은 통일전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모든 상황에서 임기응변과 전술적 조작이 당의 기반을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 당과 대중의 관계는 대부분 객관적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2)

 

혁명가들의 첫 번째 책무는 상황이 어떻든 혁명적 관점을 방어하는 것이고, 거짓된 (그리고 기만적인) 바탕 위에 조직을 건설하려는 이런저런 기회주의적, 단기적 방침을 쫓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짧은 글이 진정으로 국제적인 국제주의자 계급당의 설립에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위한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CWO(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주>

 

1) 원 번역은 국제코뮤니스트경향(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이 1978년 11월, 코뮤니스트좌파 그룹(Groups of the Communist Left)의 제2회 국제회의 팸플릿 1권: 준비 문서로 출간했다. 이 번역은 레프트콤 웹사이트(leftcom.org)의 이탈리아어 부분의 글을 번역한 판이다.

 

2) 우리의 팸플릿 “Platform of the Committee of Intesa 1925 – 파시즘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좌파 싸움의 시작.”을 보라. 자세한 것은 뒤표지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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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6-08-28/the-revolutionary-party-and-the-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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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19년 _ 9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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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2019년 _ 9호가 나왔습니다.

     

                   □ 가격 :  12,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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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메이데이, 코뮤니스트 노동자 선언

촛불정부가 아니라 자본가 정부!

 

자본에 맞서거짓 평화에 맞서 계급전쟁을

 

 

     촛불 정부를 자임하며 노동존중을 내걸었던 자본가 정부가 가면을 벗어던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 공약(公約)은 지키지 못할 공약(空約)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거짓임이 드러났다.

 

같은 자본가 정권으로 적폐청산의 대상이자 노동탄압의 상징이었던 이전 정권과 경쟁하듯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다박근혜와 함께 처벌받고 청산되어야 마땅한 재벌과 자본가 단체들은 언제 우리가 자본가 세상에서 고개 숙이고 숨죽이며 살았냐면서 반격에 나서고 있다그들은 어느새 한 몸이 되어 더는 물러설 곳도 추락할 곳도 없는 노동자들을 향해 비열한 공세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의 친자본 정책 전환은 본질적으로 보수 세력과 자본가계급의 압력이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 정부의 본색을 드러낸 것 뿐이다노동존중은 애초 관심조차 없었기에 정책을 전환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러한 거짓선전을 할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문재인과 민주당 정권의 기반은 처음부터 자유주의 민족주의 부르주아 세력이었고여기에는 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포섭된 다수의 노동자가 존재한다이러한 세력은 자본주의 쇠퇴기 장기적인 위기 상황에서 개량의 물적 토대가 제한적이고첨예한 계급대립 상황에서는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에 지배계급 편에서 노동자계급을 포섭하는 데 주력한다.

 

지금은 조직노동자들의 계급적 힘이 약해져 있고계급 내부 분열이 공고화되었기 때문에노동자들을 최대한 밀어붙여 양보를 얻어낼 것이다이것은 희생과 양보의 크기를 두고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면서 포섭해나가는 자본의 전형적인 위기 전가 방법이다여기서 위기 유포(희생 강요)와 사회적 타협(경사노위)은 상호보완성을 가진 자본가계급의 유용한 무기다이에 맞선 노동자의 무기는 투쟁을 강화하는 것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사회적 타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노동자에게 절대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투쟁 회피의 다른 말인‘ 교섭과 투쟁 병행’ 노선은 단결과 투쟁의 힘을 무너뜨려 결국 타협에 매달리게 할 뿐이다.

 

문재인 정권은 탄생에서부터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심화시킨 치명적인 위기를 떠안고 출발했다하지만현 정부가 어떠한 특별한 정책을 펼치더라도 (그것이 노동존중의 가면을 쓰던적폐청산의 가면을 쓰던한반도 평화의 가면을 쓰던그 해결책을 기존 정권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찾아야 하므로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미가 추진하는 북한 비핵화를 통한 체제 보장/한반도 평화/제국주의 세력 개편은 평화의 문제, ‘민족의 문제, ‘체제의 문제로 포장되어 있지만실제로는 경쟁하고 대립하는 지배계급 내부의 사활을 건 싸움이다따라서 시간도내용도절차도 모두 그들의 방식대로 진행되며오직 노동자계급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에서만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여기서 노동자계급이 국제적이고 독자적인 관점을 갖지 않는다면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수많은 지배계급 간의 전쟁에 이용당하고 희생당했던 과거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지배계급이 주도하는 평화는 계급전쟁을 종식하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며번영은 이윤 획득과 계급 불평등을 심화하는 자본주의의 지속적 성장일 뿐이다.

 

지금 노동자들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갈수록 깊어지는 위기를 다음 세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오늘 투쟁하지 않으면 내일은 구걸하게 될 것이다문재인 정부는 촛불 정부가 아니라 자본가 정부다위기를 극복하는 것도노동자계급의 힘을 되찾는 것도자본가 정부와 촛불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촛불 이전에 더 잘 싸웠다독재정권에서도노동자 투쟁이 불법일 때도 훨씬 잘 싸웠다노동자의 방식으로노동자의 자리에서노동자계급으로 단결해서 투쟁했기 때문이다조합주의와 관료주의를 넘어 아래로부터 계급투쟁을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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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오랜 기간 깊은 위기에 빠져 있다우리는 갈수록 더 위험한 세계에 살고 있다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노동자계급의 생활 수준을 지속해서 공격할 뿐 아니라 생태파괴를 통해 지구 생명체의 미래까지 점점 더 위협해가고 있다또한그것은 우리를 전쟁과 야만으로 이끌고 있다오늘날 60여 개가 넘는 지역에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다전쟁은 노동자계급과 가족의 삶을 파괴하지만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이러한 자본주의 위기를 막을 수 없는 가짜 사회주의·사민주의 진보좌파의 무능은 포퓰리즘과 파시즘의 부상을 촉진하면서 노동자들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자본주의는 이제 인류에게 평화롭고 조화로운 발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오히려 부르주아지는 수천만의 프롤레타리아가 서로 학살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인류의 생존 고통이 커지는 동안 그들은 치명적인 무기 생산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부었다자본주의 존재는 노동자계급과 인류의 생존그리고 이 지구 자체의 존립과도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전쟁으로의 질주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작동 결과이다그것은 몇몇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이 아니며지도자의 선택 문제를 넘어선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이다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 전복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대안은 전쟁이냐 혁명이냐’ 이다.

 

노동자의 주적은 부르주아 국가에 있다그 적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이다하지만자본주의-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하고 미래의 전쟁을 준비하는 모든 국가민족정치 세력 또한 우리의 적이다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위기와 고통전쟁의 치명적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모든 민족주의애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국제적으로 연대하여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이다노동자들이 싸워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착취자들에 대한 전쟁계급전쟁뿐이다.

 

모든 착취와 억압차별이 없는 사회를 위해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를 위해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계급전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계급전쟁을 조직할 때이다.

이제는 계급전쟁을 강화하고 전면화할 코뮤니스트당으로 집결해야 한다.

 

자본에 맞서

자본가 정권에 맞서

제국주의 전쟁과 거짓 평화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전쟁계급전쟁을!

코뮤니스트당 건설을!

 

 

2019년 메이데이

투쟁하는 코뮤니스트 노동자


 

#선언에 동의하는 동지들의 많은 공유와 배포 부탁드립니다.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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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3

7. 세계의 코뮤니스트 동지들에게!

- 러시아코뮤니스트당 노동자그룹 선언(강령) -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에 대한 의견 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자계급은 그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파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의 끊임없는 발생은 멈췄다. 러시아의 코뮤니스트좌파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부수는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칭송하며, 좌익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몰살시키려 할 때도, 코뮤니스트좌파는 혁명의 영웅적 시기의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성을 방어했다.

 

레닌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난 것은 볼셰비키의 공개적 위기를 촉진한 한 요소였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에 의한 “3두 정치”의 형성 과정에서 관료적 분파가 당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 연합의 주요 유대는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트로츠키는 그동안 상당한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공공연히 반대파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정권은 경제와 사회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23년 여름, 신경제정책(NEP)의 도입에 의한 “시장 경제”의 명백한 첫 번째 위기가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위협했다. NEP가 1921년의 위기로 귀결된 전시 코뮤니즘의 과도한 국가 집중을 되돌리기 위해 소개된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는 경제의 자유화가 러시아를 자본주의 생산의 좀 더 고전적인 위기에 노출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임금 삭감, 해고 정책과 같은 정부의 대응은 이미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져 있던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3년 8~9월, 동시적인 파업의 발발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3두 체제는 NEP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왕도로 보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특히 부하린이 이론화시켰는데, 부하린은 당의 극좌에서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스탈린 이전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의한 “달팽이 걸음”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다른 한 편, 트로츠키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더 강화된 국가 집중과 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의 지도적인 그룹 안에서부터 나온 첫 번째 명확한 발언은 「46인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Poliburo(정치국)에 1923년 10월 제출된 것이다. 「46인의 강령」은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피아타코브(Piatakov),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insky)와 같은 인물과 샤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V Smirnov), 그리고 오신스키(Ossinski)와 같은 민주집중그룹의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트로츠키의 서명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파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분파는 1921년 이후 금지되었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앙 위원회에 보낸 공개적인 편지는 1923년 11월 프라우다에, 그리고 그의 팸플릿 「새길」(New Course)에도 실렸고, 이것은 「46인의 강령」과 비슷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그를 반대파의 중요 인물로 명백히 위치 짓게 해 주었다.

 

「46인의 강령」은 최초에는 정권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강령은 지배적인 계층의 실용주의적 경향과 NEP를 불변의 원칙으로 끌어 올리려는 경향에 대한 반대로서 더욱 강력한 국가 계획을 위한 몽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트로츠키를 둘러싼 좌익 반대파가 견지한 주제였지, 그 힘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의 내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에 대해 제기한 긴급한 경고였다.

 

동시에, 강령은 “병적인” 반대파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물론 강령은 그 단어를 당내 위기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미아스니코프와 보그다노프의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 주위의 노동자 그룹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곧 트로츠키도 비슷한 관점을 취했다. 그들의 분석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동시에 당의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으로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키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그룹들이 “병적인” 현상들로 해체될 리는 없다. 「노동자의 진실」 그룹이 패배주의, 심지어 멘셰비즘으로 나아가는 특정 경향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 좌파와 네덜란드 좌파 내에서의 대부분의 경향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러시아에서 국가 자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통찰은 10월 혁명을 다소 진보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에 의해 약화되었다.

 

이것은 미아스니코프(Miasnikov), 쿠즈네쵸프(Kuznetsov), 그리고 모이셰프(Moiseev)와 같은 오랜 볼셰비키들이 지도하는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이 그룹은 13차 볼셰비키 총회 직후 1923년 4~5월에 그 선언(강령)을 배포함으로써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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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스니코프(사진 중앙), 「노동자그룹」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 그룹”으로 불린다.>

 

세계의 코뮤니스트 동지들에게!

 

현재 선진국과 특히 그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생산력은 이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굳은살 가득한 손에 권력을 쥐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코뮤니스트 혁명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는 부르주아 민족 전쟁에 관계되어 야만에 삼켜지고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 사이,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어, 노동과 번영의, 평화의 깃발을 심는, 둘 중 하나의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군비 경쟁,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항공 함대의 신속한 강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혹독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전쟁으로 죽을 것이다. 마을, 공장, 기업, 그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창조한 모든 부가 파괴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다. 각 나라에서 더 빨리 부르주아지를 물리칠수록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빨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할 것이다.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은 과거에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투쟁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가지각색의 모든 유형의 억압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극히 만족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본질적인 임무인 부르주아지와 그 착취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복종과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사소한 요구만을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특정 순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직면했을 때 부르주아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노동자 대중은 그 억압자들이 직접 이야기하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그들의 이해에 맞는 것처럼, 사회주의 용어로 치장되어 제시된다면, 노동자계급은 그 언어에 현혹되어, 배신자들을 신뢰하고 그 힘을 쓸데없는 싸움에 낭비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나 「사회주의자들」이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별로 다른 놈들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전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급 동지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지독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주아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문제와 노동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와 한 패거리인 이들을 따라왔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고, 파업하기 시작할 때, 외부에 서서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투쟁 속에 있으면서, 이 투쟁이 오직 부르주아지만을 살찌울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직한 혁명의 신발을 더럽히는 의미가 될지라도 때로는 똥 무더기 위에 서야만 할 때(선거에 입후보한다든가)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모든 것은 각 나라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선거에 나가거나 파업에 참여할 것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감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원칙을 양보하고 망각하거나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진짜 해법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대중을 지도할 수 없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 하면서 끝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끌려다니게 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남들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발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미성숙함 탓으로 돌리거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혁명을 시작할 준비되어 있으며 게다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킨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그에 봉사하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배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로부터 멀리 도망쳐 프랑스나 벨기에로 도망칠 것이고,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에 「베르사유」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라인 지방과 루르 지방을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러시아 부르주아지나 그 사회민주주의 동맹들이 했었고, 또 미래에 반복할 행동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푸앵카레는 독일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구원하고,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 세계의 도둑들로부터 구원하는 그런 사업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는 불행히도 군대를 구성한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 사업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해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동맹자를 돕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총구를 주인들, 다시 말해 푸앵카레를 향해 돌릴 것이다. 푸앵카레는 자기 자신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대를 부를 것이고, 불쌍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 동맹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둘 것이다. 이것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베르사유 조약을 깬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푸앵카레는 「라인」과 「루르」로부터 추격을 받아, 인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에 따라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를 공포할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쿠노」와 파시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독일은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지 말고 그것을 써야 한다.

 

독일 혁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분산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혁명의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노동자계급의 적에 대한 결정적인 단절과 무자비한 전투 없이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군사적으로 억압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승리는 코뮤니스트 혁명의 목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진 모든 세력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왜 우리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 사이에서 진실한 혁명적 코뮤니스트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호소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정당 모두에게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특정 정당에도 전투와 승리를 위해 통일 전선을 구성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제4 코뮤니스트 노동자 인터내셔널(제3 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의 정당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밝혔다.

 

첫 번째 단계가 가까워졌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직에 기반을 두고 부르주아지와 열심히 그들을 비호해 온 모든 종류의 추종자들과 그 아류들(사회주의혁명가당, 멘셰비키 등)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이 이끌어온 모든 공격, 부르주아지와 지주,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에 의해 고무된 모든 공격을 물리쳤다.

 

이제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모아 권력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엄청난 결핍과 그 무게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결핍은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한쪽에서는 NEP의 관료주의적 퇴보 경향, 다른 한쪽에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내외부에서 위협하는 경향에 대해 아직 맞서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 그리고 즉각적으로 10월 혁명의 승리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세계 코뮤니스트 혁명의 기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미 승리를 보증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 - 모든 국가의 코뮤니스트들 - 의 전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코뮤니스트 프롤레타리아의 군대(볼셰비키)가 겪은 결핍과 고통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대다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의견을 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코뮤니스트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코뮤니스트에 반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악용할 사회적 배신자와 악당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적이 공개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 하는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와 코뮤니스트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 언제나 그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논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뿌리 뽑을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배신자들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버려둔다면,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10월 혁명이 더 이상 승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 배신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코뮤니스트 운동에는 죽음의 일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따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배신자들의 의견에 직면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이,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총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 운동과 러시아 운동의 약점으로 그 실패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그들 나라에서의 혁명이나 적어도 하나둘의 선진국에서의 혁명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10월 혁명의 승리로부터 차지한 위치를,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기하여 그들의 적을 패배시키는 시점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내전과 기근으로 약해져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위협이 되는 위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적확하게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으로 그것을 계승할 것이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은 러시아 전역에서 경고하고 호소해 왔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함께 모여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분명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앞서 깨달을 것이다. 투쟁은 어렵다. 우리의 활동은 지하활동에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선언」은 러시아에서 출간될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선언을 복사하고 유포한다. 우리 그룹에 속한다고 의심이 되는 동지들은 당과 조합에서 제명되며, 체포되고 추방되며 해체된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 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당과 소비에트 관료의 승인 아래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비판을 질식시키는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멘셰비키주의다.”(12차 대회에서의 그의 연설을 참고하라) 그것은 만약 지도력이 코뮤니스트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누군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는 당과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GPU(체카)에 넘겨질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중앙위원회는 그 자신을 로마의 교황처럼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 러시아 노동자들이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것은 반혁명으로 선언된다. 우리,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노동자그룹」은 모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10월 승리가 자본주의 과두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소비에트의 권력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을 막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지도 그룹이 우리의 10월 혁명에 대한 고려가 불법이고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국가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과 제3 인터내셔널에 충실한 동지들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선언」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동지들, 10월 혁명을 위협하는 이 모든 위험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동지를 보고 있다. 동지가 회의에서 우리의 강령에 대해 논쟁하길 바라고 동지의 대표가 제3 인터내셔널의 5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에 대해,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지들, 우리의 선언을 토론하고 혁명을 만들어라. 이해하라 동지들, 이것은 당신이 완전하고 늘 고통받는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것을 돕는 것임을. 우리의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다.

 

노동자 동지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10월 혁명 승리 만세!

세계 혁명 만세!

 

 

 

8.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맑스주의 혁명가들이 이름값대로 가장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쓰라린 종말까지 싸울 투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당이든 인터내셔널이든 기회주의의 장악으로부터 조직을 구하고 퇴행으로 빠지는 것과 더 나쁘게 배반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는 제1 인터내셔널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방도였다. 그것은 또한 제2 인터내셔널에서 “좌파”의 방도였다.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단원이 독일 사민주의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단절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당의 다수를 얻음으로써 기회주의 지도부를 전복하기를 원했다. 최악의 경우 당을 재탈환할 희망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 당 분리 때 그들과 함께 더 많은 혁명가가 함께할 것을 원했다. 그들은 당 안에 조그만 삶의 불꽃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싸웠고 가장 훌륭한 인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맑스주의 혁명가의 유일한 방도였다. 더구나 역사적 경험은 “좌파”가 분리보다는 당이 배제할 때까지 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기를 들어 트로츠키는 축출당하기 전까지 볼셰비키당에서 6년 넘는 투쟁의 세월을 보냈다.

 

코민테른 안에서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운동의 가장 암흑의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 속에서 가장 길고 가장 끔찍했던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당과 코민테른을 바로 세우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스탈린주의의 철권으로부터 그를 구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 투쟁은 기껏해야 최소화되고, 처음의 의견 불일치로 조직을 떠나거나 “상처뿐인 영광” 때문에 떠난 인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이며, 때로는 생명을 희생한 노동자와 혁명가 세대의 어려운 투쟁에 대한 소부르주아의 경멸을 나타내고 있다.

 

이탈리아 좌파는 이 방법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론적으로 풍부하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조직의 입장은 그것이 계급을 되돌릴 수 없게 배반했는가를 알게 한다. 조직의 반역이 분명하지 않고, 당이 적 진영에 무기와 짐을 건네주지 않는 한 진정한 혁명가의 역할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싸우고, 필사적으로 당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가 의기양양한 반혁명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코민테른에서 했던 것이다.

 

코뮤니스트 운동의 위기는 1923년 동안 밝은 대낮에 나타났다. 몇 가지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기회주의 비중이 커지는 코민테른의 3차 대회 이후, 그리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파업이 확대되었지만, 크론슈타트에 대한 억압 이후이다. 동시에 「노동자 반대파」는 소련코뮤니스트당 안에 만들어졌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위기의 근본 이유는 세계혁명의 지연에 있다”(트로츠키 「레닌 이후 코민테른」)고 선언하면서 보편적 감정을 요약했다. 세계혁명의 지연은 전체 노동자운동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0월 혁명의 위기는 NEP(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취한 국가자본주의의 조치에 의해서도 방향을 굴절시켰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유럽 혁명의 확장에 대한 희망을 지연시켰다. 혁명가 중에 레닌은 그 결과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923년 러시아 혁명은 지구를 지배한 자본주의에 의해 경제적으로 목 졸리게 되었다. 이 수준에서 소련의 상황은 파국적이었고 지도부에 제기된 문제는 NEP가 산업에 대한 도움을 통해 전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가, 수정되어야 하는가였다.

 

트로츠키는 다수가 현상 유지를 원했던 소련코뮤니스트당 정치국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의 경제 상황의 문제와 소련코뮤니스트당의 내부조직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당 통일을 깨뜨리는 것을 피하고자 의견 차이는 정치국 내에 한정되었다. 이는 1923년 가을 그의 책 「새로운 경로」에서만 공개되었다. (1923년 12월에 출간됨)

 

다른 반대도 나타났다. 코뮤니스트좌파와 반대파 코뮤니스트를 포함한 46명의 인사들이 서명하고 정치국에 제출한 강령 (1923년 10월 15일), 사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Smirnov) 등이 만든 「민주집중주의」 그룹의 창설, 쉴라프니코프(Shliapnikov)와 함께하는 「노동자 반대파」의 재활성화, 미아스니코프(Miasnikov), 쿠즈네초프(Kuznezov) 등의 「노동자그룹」의 창설 등이다.

 

동시에 감옥에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I)의 모든 동지에게 보내는 선언」에서 특히 “통일전선” 문제에 대해 코민테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심각한 비판을 썼다. 그는 의견 불일치에 기반을 두어, 그의 입장을 방어하지 않고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면할 것을 요청했다.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좌파는 다수파였다.)

 

트로츠키와 같이 보르디가의 태도는 더욱 효과적인 정치투쟁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심스러웠다. 2년 후 그는 코르쉬에게 보낸 편지(1926년 10월 26일)에서 그의 방도의 핵심을 설명했다.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는 실재주의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직 공세적으로 가지 않고 타격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혁명가가 참을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나긴 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미래 투쟁에 대한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견디고, 조심스럽게 전진하면서 일하는지를 알고 있다.

 

코민테른 5차 대회 이후 시기는 다음으로 특징 지워졌다. 코뮤니스트당의 지속적 “볼셰비키화”와 코민테른 “우선회”, 스탈린과 그 심복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특히 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의 전위대였고 우선회로의 준비가 안 된 트리엥(Trient)과 루스 피셔(Ruth Fisher)였다. 코민테른 지도부에게는 “적응”이 필요했던 자본주의의 “안정화”, 소련코뮤니스트당 14차 당 대회(1925년 12월) 중앙위의 정치 활동 보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짧은 쉼 동안 우리가 한 번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기로 전환되었다.”

 

당 대회에서의 논쟁 밖에서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레닌이 정치 활동을 포기하게 만든 이래 코민테른과 소련코뮤니스트당을 이끈 3두 체제(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1925년 말 와해된 것이었다.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 3두 체제의 존재는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 투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후 최초의 반대 운동이 침묵으로 줄어들자 스탈린은 더는 러시아 국가와 당 그리고 코민테른을 통제하는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주위의 “옛 볼셰비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안정화”의 상황은 스탈린이 침로를 바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소련 내부 정책에 대해 스탈린에 반대하면서 지노비예프는 세계 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취했다.

 

“최초의 어려움은 세계혁명의 지연에 있다. 10월 혁명 초기에 우리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가 몇 달, 아니면 몇 년 안에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슬프게도 세계혁명의 지연은 확실한 사실이며 자본주의의 부분적인 안정화가 전시대에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새롭고, 더욱 크고 복잡한 곤란을 제기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의 지도부가 이러한 “안정화”를 인식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5차 대회의 전망과 정책이 올바르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고 정치적 선회를 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침묵했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공개적으로 투쟁을 지속함으로써 더욱 정치적 태도를 채택했다. 보르디가는 “우니타(L'Unita)”에 쓴 글에서 러시아 문제와 “트로츠키 문제”를 제기했다.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좌파는 당의 “볼셰비키화”에 반대하기 위해 “협상위원회”를 만들었다. (1925년 3-4월) 보르디가는 그람시 지도부의 당으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즉각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6월에야 데이먼(Damen), 레포시(Repossi)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진정한 분파가 아니라 조직의 수단에 불과했다. 결국 “좌파”는 당내 다수파를 점하면서도 당으로부터 축출되지 않기 위해 위원회를 해소했다.

 

러시아에서는 1929년 봄 소련코뮤니스트당 15차 당 대회 준비를 위해, 트로츠키의 최초의 반대파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크룹스카야가 합세한 「통일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새로운 반대파 결성에 스탈린의 억압이 강화되었다. 세레브랴코프(Serebriakov)와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가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노동자그룹」의 미아스니코프(Miasnikov) 같은 사람은 투옥되었고 국가인쇄소 소장은 투옥될 예정이었다. 내전에서의 몇몇 투사는 군대에서 추방되었다. 항공학교장인 그룬스타인(Grunstein)과 우크라이나의 오크토니코프(Okhotnikov) 등 우랄 지역,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포함한 전국에 걸쳐 GPU(국가정치총국, 게페우)는 지도자를 당에서 축출함으로써 「반대파」의 지역조직을 폐쇄했다. 1927년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소련코뮤니스트당 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지노비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항복은 러시아 좌파가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모욕, 위협, 당으로부터의 추방은 노동계급의 진정한 투사를 막을 수 없었다.

 

“당으로부터의 추방은 당원으로서의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지만, 우리가 코뮤니스트당에 들어올 때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 할 의무로부터 우리를 면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당으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우리는 그 강령과 전통, 그리고 그 기치에 충실할 것이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당과 노동자계급에서의 그 영향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Rokovsky의 이 말은 혁명 정치에서 훌륭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도이고 우리의 방도다. 혁명가는 그들이 배제되지 않는 한 절대로 조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직을 올바르게 바로 잡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 이후 시기 동안 반대파의 성원은 그들이 당에 복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의 배제가 잠정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28년 1월 국외추방이 시작되었다. 추방된 사람들은 지정된 주거지에서 생활할 수단이 보장되지 않아 매우 참혹했다. 모스크바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모욕은 물론 아파트에 살 권리를 잃어버렸다.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로 떠났고 48시간 후 라코프스키는 아스트라한(Astrakhan)으로 떠났다. 반대파 조직이 망명 중에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연속되는 새로운 타격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성원과 그 대표인 라코프스키는 계속되는 투항과 소련에서의 트로츠키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투쟁을 계속했다.

 

이 시기 동안 GPU(국가정치총국, 게페우)는 스탈린이 마침내 「반대파」의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교활하게 퍼트렸다. 이는 즉각 반대파를 균열시키기 시작했고 라덱은 자극제의 일부의 역할을 했다. 가장 약한 부분이 항복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주의자들은 망설이는 자들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들을 쓰러뜨리거나 포섭할 최선의 순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혀, 1929년 8월 라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당 중앙위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을 석방하고 유배 중인 트로츠키를 불러 당에 복귀하도록 우리는 도울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분파적 투쟁방법을 포기하고 코뮤니스트적 견해를 방어할 모든 권리를 모든 성원에게 보장하는 당 규약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선언은 수용될 수 없었는데 첫째, 망명으로부터 트로츠키의 복귀를 요청했기 때문이었을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스탈린의 표리부동한 책임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목적을 달성했고 공황의 파장을 잠재웠다. 투항은 멈추었다.

 

함정, 협박, 암살에도 불구하고 라코프스키와 반대파 중핵은 1934년까지 조직화된 투쟁을 지속했다. 그들 대부분은 진영 내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라코프스키가 투쟁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지노비예프와 그 추종자들이 했던 부끄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빌랑(Bilan)」은 명확히 선언했다.

 

“트로츠키 동지는 그것이 이념적이고 정치적 투항이 아님을 선언한 후 논평을 발표했다. ‘소련에서 코뮤니스트당이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국제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여러 번 되풀이했다. 라코프스키의 경우는 이를 부정적이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우리는 라코프스키의 경우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연대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행동이 라덱,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의 부끄러운 투항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1929년 소련에서 추방된 이후 투쟁은 국제 좌익반대파 결성과 함께 국제적 수준에서 전개되었다. 코민테른 6차 대회(1929년 2~3월)에서 보르디가는 마지막으로 참석하여 선언한다.

 

“좌익의 저항은 우익으로부터의 위험에 대항하여 국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하고 유용하며 필요한 반응은 책략, 음모와 복도에서의 소문 같은 형식으로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나서도 안 된다.”

 

1927년부터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망명지에서 계속되었다.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활동가는 감옥에 있거나 보르디가처럼 섬에 갇혀 있었다. 좌파는 활동가 다수가 축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당과 코민테른 내에서 싸웠다. 그들의 기본목적은 퇴행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경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 조직 내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코뮤니스트당은 우리가 기회주의와 투쟁해야 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당이 완전히 빛을 잃지 않는 한 조직화된 분파로서 재통합할 수 있도록 상황이 지도부를 강제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코뮤니스트로서 우리의 의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1929년 7~8월, 이탈리아 좌파)

 

이러한 전망은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파 사이에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1928년 4월 이탈리아 좌파는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코민테른에 남을 수 없다고 결정한 코민테른 9차 확대총회(1928년 2월 9-25일)에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 순간부터 이탈리아 좌파는 더 는 코민테른 성원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고 분파를 형성할 의무가 있었다.

 

분파 형성 결의문에서 「분파」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설정했다. ① 「코뮤니스트 선언」을 지지하고 「제2차 세계대회의 테제」를 받아드리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모든 인자의 결합. ② 레온 트로츠키 의장 아래 6차 세계대회의 재소집. ③ 6차 세계대회 의제로 소련코뮤니스트당의 15차 대회 결의에 연대를 선언한 인자들의 축출을 다룬다.

 

이처럼 「러시아 반대파」는 당으로의 재통합을 희망했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당과 코민테른 내에서의 분파로 생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쇄신이 분파로서의 활동에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투쟁의 지속성을 보증하고 미래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주역이 되는 간부를 발전시키는 조직으로 <분파>를 이해했다. 우리와 반대로 「반대파」는 사건의 열쇠가 분파의 수준에 있지 않고 중앙파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간부의 형성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코민테른을 재통합하는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정책(이탈리아 좌파는 1928년 이후 포기한)은 올바른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코뮤니스트당과 코민테른의 퇴행을 막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파 없이 반대파는 밖에서 있었고 그 고립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반대파 성원은 코뮤니스트 활동가 다수로부터 단절되었고 더는 그들의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노동자운동과 연결을 맺는 것이 가능한 「분파」의 방도는 그 후 이탈리아 좌파가 이론화한 방도였다.

 

반대로 코뮤니스트 각성(Réveil Communiste) 같은 그룹의 고립정책은 파국적이었고 생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노동자운동의 고전적 방법과 원칙을 입증했다. 즉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가볍게 분리하지 않는다. 정치적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건강한 요소들을 최대한 입증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성과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노동자운동과 계급을 위한 교훈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조직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원칙 없이 조직으로부터 분리하고 같은 강령적 기준 위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다. 조직의 강령과 실천을 비판에 종속시키지 않는 것은 퇴행을 선언하는 것이다. 코민테른 역사를 보면 혁명가의 진정한 태도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좌파의 이론적이고 정치적 작업이 없었다면 「코뮤니스트좌파」에 속하는 현재의 조직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1930년대 초 「빌랑(Bilan)」이 내세운 생각에 동의한다.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작업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8년부터 오늘날까지 트로츠키 동지는 이러한 분파 건설의 작업을 완전히 소홀히 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의 진정한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Bilan」1933년 11월 “2 4/3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2019년 3월

 

 

정리 l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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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2

  • 4. 코민테른과 코뮤니스트좌파의 대립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스트에 대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코뮤니스트좌파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코뮤니스트좌파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反)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코뮤니스트좌파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저널) “코뮤니즘(Kommunismus)”으로 이동했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코뮤니즘”은 코뮤니스트좌파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했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코뮤니스트좌파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反)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보르디가의 반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코뮤니스트좌파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했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하였고, 노동자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했다. 코뮤니스트좌파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대두했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사회주의노동자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코뮤니스트좌파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결연히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도 나타났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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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참가한 영국 대표단 (실비아 팽크허스트). 1920년 7월>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얀 아펠(Jan 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넸다. (울프하임, 라우펜버그, 륄레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KAPD와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아펠(Appel)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륄레(Otto Rühle)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륄레(Rühle)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륄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륄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더욱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를 KPD(독일코뮤니스트당)와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 정당"으로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아펠(Appel), 슈왑(Schwab), 메이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판네쿡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기저적인 쟁점들에 관심을 두게 된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즘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다. KAPD내에서 룰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했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소련과 서유럽 상황은 급변했다. 1920년 소련은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유럽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다수 국가와의 무역과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하였고, 유럽에서 혁명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되었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 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 버려 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5. 보르디가의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권주의파를 대표하여 보르디가 동지가 작성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 의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정치적 대의제도의 형태이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에 따라 비판한 결과는, 국가 대의기구 선거에서 모든 사회계급의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부 기관이 지배적인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위원회가 되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투쟁 기관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조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코뮤니스트는 노동자계급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무장투쟁만이 노동자계급을 그 목표에 데려다줄 것이다. 코뮤니즘 경제 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민주주의 기구들을 폭력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 즉 노동자평의회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착취 계급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대의기구를 가진 정부 체제를 세운다. 의회제도의 폐지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과제가 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 사회 형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소유보다도, 관료적 국가기구보다도 앞서 타도되어야 한다.

     

    3. 지방정부 기관 역시 똑같이 타도해야 한다. 지방정부 기관을 이론적으로 국가 기관에 대립되는 것처럼 제기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지방정부 기관은 부르주아 국가의 메커니즘과 같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 역시 파괴하고 지방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로 대체해야 한다.

     

    4. 지금, 이 순간 정신적·물질적으로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코뮤니스트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낡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이 달콤하게 유포시킨 환상과 편견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질서가 더 오랫동안 지배했고 대중의 관습과 사고에 뿌리내린 나라들에서 이 과제는 특별히 중요하며, 당연히 혁명을 준비하는 문제 중에서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5.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이 아직 까마득히 멀어서, 혁명을 직접 준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아직 계급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시기에, 선거와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전과 선동, 비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혁명이 이제 막 시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들이 아직 형성 단계에 있는 대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에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사태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6. 세계혁명의 종결과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조직에 끼친 결과,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실현한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 배신자들에 반대하여 건설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시작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코뮤니스트의 혁명적 대의를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의 선명성을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최종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선거를 거부하도록 선전할 필요성이 있다.

     

    7.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이라는 혁명적 개념이 운동의 중심 목적으로 등장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는 당의 모든 정치적 활동은 바로 그 목적에 바쳐져야 한다. 적대적인 정당 사이의 모든 충돌, 권력 장악을 위한 모든 투쟁이 선거 캠페인과 의회 토론,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메커니즘의 틀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거짓, 그 부르주아적 거짓과 단호히 절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에게 선거에 참여하라고 호소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과 나란히 활동하는 전통적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서는, 착취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들이 의회라는 같은 지반 위에 등장하는 광경을 끝장내지 않고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 낡은 사회주의당의 극단화된 의회주의 실천은 선거 캠페인과 의회 활동이 정치 행동의 모든 것이라는 위험한 개념을 유포시켰다. 다른 한편 그런 배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혐오감은 정치 행동과 당 활동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생디칼리즘적이고 아나키스트적 경향에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다. 따라서 코뮤니스트당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노동자평의회에 직접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다면,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을 선전하는 데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9. 선거 캠페인 및 그 결과에 부여하는 지나치게 큰 중요성, 당이 자신의 모든 능력, 인력, 언론, 재정을 상당 기간 거기에 쏟아붓는다는 사실은, 우선 집회에서 모든 연설과 이론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선거야말로 코뮤니스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심 활동이라는 확신을 강화한다. 또한 그로 인해 혁명적 활동의 합법·비합법적 요구와 완전히 모순되는 전문성을 당 조직에 부여함으로써 혁명을 조직하고 준비하는 모든 과제를 거의 완전히 포기하게 만든다.

     

    10. 다수결에 의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정한 당에 선거 캠페인에 계속 참여하게 하는 것은 사민주의적 인자들을 걸러내는데 필요한 과정을 가로막는다. 그들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의회와 기타 민주주의 기관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실제 성격은 반대당들이 비판으로부터 의회주의 원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의회주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선거 과정의 공식 절차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 발언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제도의 기본 원리라는 공통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 그 규칙의 미묘함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의회제도 내부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과 똑같이 점점 더 투표수와 의석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당이 의회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주> 코뮤니스트의 의회 전술에 대해 논의한 8차 전체회의에서는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기초한 위원단의 테제에 대해 부하린과 볼프슈타인이 설명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의 보르디가가 자신이 제출한 이견 테제를 설명한다. 위원단의 테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 이후에 혁명적 의회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으며, 따라서 의회를 활용하는 전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르디가는 프롤레타리아트 대중투쟁의 시기에 코뮤니스트가 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해악적인 결과만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6.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

     

    1918년부터 계속,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력은, 그 정상에 볼셰비키당이 앉아있는 국가기구에 의해 제한되고 억압되어 왔다. 권력 장악 후,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기관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 자신을 통치 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평의회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20년대 초의 트로츠키의 저작 『테러리즘과 코뮤니즘(the Terrorism and Communism)』 - 크론슈타트 학살과 같은 행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이미 포함하고 있던 비극적 저작 – 에서 (노동의 군사화와 함께)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전망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바로 그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들의 의회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역사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전적으로 당대의 질서가 되도록 만든 시기에, 코뮤니스트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표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트로츠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언된 ‘대표자’가 되고 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비록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게 될지라도,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 자체는 당과 국가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러시아 국가는 평의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혁명의 힘을 파괴하고 반혁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과 나란히,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공동전선의 개념, 대중 정당을 통해 최소 강령을 보호한다는 생각, 노동조합 과업의 필요성, 혁명적 의회주의 입장 등을 발전시켜갔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저항하며 코뮤니스트 원칙을 그대로 지키려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고 이러한 실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전술’과 원칙 사이의 차이는 제2 인터내셔널의 안에서 그랬던 만큼이나 발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이해를 항상 염두에 두기보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더더욱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었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선택했을 때, 그 조종을 울렸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옹호한 이러한 테제들은 단지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볼셰비키당은 반혁명의 가장 유순한 도구가 되었다.

     

    그들의 계급은 1927년 이후 국제적인 수준에서 파괴되었고, 세계 혁명의 요새는 점차 더욱더 고립되어 반혁명의 요새로 변형되어갔다. 그들의 국제 조직은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도입한 순간에 결정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점점 더 고립되어가던, 영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동지들은 추방의 고통 아래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의해 가장 비열한 종류인 중도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과 합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파괴적인 타격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굴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투쟁을 계속할 충분한 전투적 용기와 혁명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점진적인 퇴행은 가장 건강한 혁명적 인자들 사이에 분출을 촉진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해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은 조직적이고 일관적인 국제적 반대파를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다. 세계의 일부(멕시코에서 아시아까지, 물론 러시아를 포함하여)에서 그들의 출현은, 정치적이거나 조직적인 수준에서 진정으로 조정되지는 않았다. 비록, 특히 KAPD, 보르디가 분파, 팽크허스트 주위의 영국 동지들과 벨기에 좌파 등등 사이에서 눈에 띄게 많은 접촉과 교류가 있었지만, 『일 소비에트』(Il Soviet, 이탈리아 좌파의 기관지)가 좌파 흐름의 많은 문서를 출간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국제적인 접촉이 존재했었지만, 반혁명 충격의 무게와 힘은 좌익 분파를 심각한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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