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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3호]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Ⅴ~Ⅶ)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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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중앙위원회가 권력 독점을 유지하고 강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던 좀 더 깊은 까닭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시기 동안 볼셰비키는 자신들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크론슈타트 사건에 의해 악화한 무거운 책임을 지닌 그들은 멘셰비키 사회민주주의자와 좌익 사회혁명적 ‘농민’당의 경쟁에 정치 무대를 열어놓길 두려워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볼셰비키는 세계혁명, 유럽에서 곧 닥쳐올 혁명, 특히 중유럽에서 혁명을 믿었다. 러시아에서 연립 정부는 다가올 혁명을 안내하고 지시할 운명을 지녔던 코민테른을 약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 당의 가장 크고 무거운 잘못을 건드릴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창조적 사고, 진실, 잘못, 바람직한 사고, 주체적 직관 등 모두가 뒤섞여 있었다. 그 어떤 것도 기업에 대한 믿음 없이, 실체적인 당연한 일을 평가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지 않고, 문제가 있고 불확실한 영역으로 들어서지 않고는 착수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은 알지 못하는 미래로 실질적이고/현재 순간에서부터 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태도에서, 정당한 행동은 맹목적으로 앞으로 내던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서 본다면, 유럽혁명의 교의는 정당한 것이었는가? 나는 우리가 그 문제에 만족스럽게 대응할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닌 하나의 의도는 그것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안정적이고 점증하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자본주의 시기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끝났다는 것은 틀림없다. 전지구적 혁명 시기의 개막을 알렸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 사회주의가 적어도 유럽 강대국에서 스스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야만의 시기와 “전쟁과 혁명의 순환”(엥겔스를 인용해서 레닌이 지적했던 것처럼)이 뒤따라올 수 있다고 하는 ─ 옳았다. 미래의 부르주아 유럽에 대해 믿는 쪽을 선택했던 보수주의자, 진화론자, 개량주의자들은 ─ 베르사유에서 조심스럽게 칼로 조각을 내었고, 로카르노에서 완패했으며, 국제연합에서 밝혀졌던 문구로 진저리를 나게 했던 ─ 오늘날 맹목적 정치의 정치인으로 기억되었다. 사회관계, 생산 관계의 지구적 전환이 아니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 관계, 권력 관계, 사상과 관습에 대해서. 줄이면 세계혁명이 유럽에서는 시기상조였고 불확실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 결정적이고 첨예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거대한 기술적 조류, 결정적인 국제적 책임, 모순적인 사회운동을 지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잘 조직된 공업국에 어울리게 특별한 지위를 지녔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이나 그리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절대 비밀로 소련의 시베리아 불모지에 세워지고 있는 것, 트리에스터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몰려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혁명의 겉모습이다. 볼셰비키 학파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노동대중의 자각과 새로운 사회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재조직화를 통한 유럽과 세계의 사회적 전환을 기다리면서 활동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 활동했다. 그때 그들은 잘못했고, 그들은 패배했다. 그 대신 세계의 전환은 제도, 운동, 믿음의 무서운 혼동한 가운데서 기다리던 비전의 명쾌함 없이, 회복된 인간주의에 대한 의식 없이, 그리고 사람의 가치와 희망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전반적 조류는 집단화와 경제의 계획화, 세계의 국제화, 억압당하고 식민화된 사람들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대중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형성을 향해 1917~20년의 사회주의자들이 규정했던 경향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대안을 내다보았다. 즉 야만주의와 전쟁, 전쟁과 야만주의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괴물이다.

 

볼셰비키는 예상한 독일혁명에서 러시아혁명의 구원을 보았다.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 농업 러시아와 공업 독일은 틀림없이 평화롭고 풍부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테제 하에서, 러시아는 발전하고 있는 내부 관료제에 의한 교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나치즘의 어두운 밤과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세계는 다른 투쟁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그러한 투쟁이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라는 소름 끼치는 기계를 생산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모든 지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때 승리한 독일혁명이 전체로서 인류의 사회적 진보를 풍부하게 해주었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역사의 가설에 대한 추론은 만일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고 지금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길 바란다면 적법하고 필요하다. 그런 추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가 시간의 흐름에서 인간의 삶의 전개가 아니라 일련의 숙명론적이고 기계적인 발생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싸우면서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러시아 볼셰비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전 세계 동지들은 지구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대변동을 막으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다가오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해방에 대한 커다란 의지를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가와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사람은 누구든지 그 점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그 어떤 사람도 전체로서 인간의 대의에 그처럼 헌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1917~27년의 혁명가들에게 헤게모니와 세계 정복 열망을 귀속시키려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지만, 어떠한 종류의 비참함과 이해관계가 역사적 진실이 지닌 특성을 빼앗으려는 그런 시도의 뿌리에 놓여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때 볼셰비즘이 잘못한 것도 틀림없다. 유럽은 불안정했고, 사회주의 혁명이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이성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에서 노동자계급의 압도적인 다수는 투쟁을 뒷받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그 대신에 전쟁 전 시기의 사회적 진보로 돌아가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위험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복지에 대한 감정을 간신히 생각해내었다. 온건하고 평범한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8년 11월에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혁명이 치를 희생을 두려워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적인 길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가 볼셰비즘을 폭력을 통한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불러왔다고 꾸짖었을 때, 역사적 대안, 즉 독일에서 개량주의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의 길을 고려하는 것은 오직 올바른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다 써버리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러한 대안은 히틀러주의의 승리로 직접 이끌었다.

 

볼셰비키는 서구, 주로 독일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해와 에너지를 잘못 보았다. 볼셰비키가 지닌 전투적 이상주의 때문에 생겨났던 이러한 실수는 가장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생기게 했다. 그들은 서구 노동계급과 접촉을 잃었다. 코민테른은 소비에트 당-국가의 창조물로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국 사회주의”라는 그릇된 교의는 속임수에서 생겨났다.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의 바보스럽기도 하고 형편없는 전술은 독일에서 나치즘의 승리를 촉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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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러시아혁명에 대한 첫 설명은 1927년쯤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흘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1920~21년 이래 코뮤니스트당의 독재, 즉 그 자체로 ‘볼셰비키 친위대’(Bolshevik old-guard)의 독재로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친위대’는 오히려 뛰어난, 즉 지적이고 이타적이며, 적극적이고 완고한 엘리트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취한 결과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해외에서 소련은 인정받았고 존경과 흔히 감탄의 대상이었다. 국내에서, 전쟁 시기에 파괴로 경제는 이용할 수 있는 재원이 거의 없었지만 대중의 에너지를 통해 되살아났다. 집단화한 생산의 새로운 체제는 낡은 자본주의 생산을 대체했고 꽤 잘 작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승리하고 조직하며, 생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믿음과 존엄감을 심어주었다. 부르주아 철학에서 인간에 내재 되었다고 생각한 사유재산에 대한 본능은 자연스럽게 멸종하는 길에 있었다. 농업은 평균 수준으로 재건되었고 1913년 수준을 뛰어넘기 시작하고 있다. 노동자의 봉급은 1913년보다 아주 높았다.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한 평가는 틀림없이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재건설’이 아니라 공업(자동차, 항공, 화학, 알루미늄···.)의 진전과 새로운 발전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제 활력을 되찾은 농업 부문과 상대적으로 약한 공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고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소련은 고립되었고 위협을 받고 있다. 소련의 방어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맑스주의자는 전쟁을 ‘금지한’ 브리앙-켈로그 조약에 환상을 갖지 않았다. 정권은 갈림길에 있다. 당은 권력 투쟁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예전 권력이 세워놓은 강령을 둘러싸고 ‘구(舊)볼셰비키’를 서로서로 경쟁시킨 투쟁으로 찢어졌다. ‘영웅적 시기’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명석한 사람들은 트로츠키 주위에 몰려 재그룹화되었다. 그들은 전술적 실수를 할 여지도 있고, 완전하지 못한 이론을 지닐 수도 있으며, 머뭇거릴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지닌 용기와 장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공업화와 계획화의 필요, 그뿐만 아니라 반동 세력, 무엇보다 관료제와 싸울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전투적 국제주의와 정권 민주화의 명백한 필요를 알고 있다. 그들은 서기들의 위계제에 패배했다.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헌신을 뚜렷이 보여준 소련의 몇천 명의 설립자는 권력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그들이 비난당했던 것은 모순적이고 아무런 뜻도 없었다. 중요하고 지배적인 사실은 1927~1928년에 당내에서 ‘쿠데타 세력’ 때문에 혁명적 당-국가가 관료주의적 경찰국가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국가는 혁명의 이상에 대해서는 모든 중요한 점에서 반동적이었다. 이데올로기 변화는 야만스럽게 빠르게 일어났다. 공직에서 태어난 죽은 슬로건인 맑스주의는 생각하는 사람의 비판적 맑스주의에 자리 빼앗으며, 지도자 숭배가 시작되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지도자 숭배를 통해 자신들이 지닌 새로운 특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신참자들의 표어가 되었다. 정권의 반대자들이 고뇌에 찬 짧은 생각에 동의했던 것은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국가, 전체주의 정권의 단면이다.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를 적대한 많은 구 볼셰비키, 즉 부하린, 릐코프, 톰스키, 류틴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소름 끼쳤고 저항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너무 늦었다.

 

전체주의에 맞선 혁명 세대의 투쟁은 1927년에서 1937년까지 10년 동안 지속하였다. 이러한 투쟁이 취한 혼란스럽고 때때로 일치하지 않은 방법은 투쟁이 지닌 실질적인 중요성을 우리에게 비밀로 해서는 안 된다. 투쟁을 이끈 지도적인 인물은 서로서로 반목했고, 싸웠으며, 화해하기도 했고, 심지어 배반했다. 그들은 길을 잃었고, 독재 앞에서 굴욕감을 느꼈으며 폭력배의 허를 찌르려고 애썼고 자신을 지치게 했으며, 죽기 살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전체주의 정권은 그들을 서로 대항하는 데 이용했다. 이 모든 것은 그들 정신에 영향을 남겼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화석화된 당과 혁명에 대한 애국심, 헌신, 실질적 결과, 위대한 미래에 대한 커다란 비전, 공통의 위험 의식, 이 모든 것은 심지어 가장 명석한 정신 속에도 현실감각을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에도, 구사회주의 볼셰비키가 대표했던 혁명 세대의 저항은 참 완고했고, 그러한 저항은 1936~38년(모스크바 재판 시기)에 새로운 정권이 자신을 굳히려고 제거되어야 할 운명인 전체 세대에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가장 피로 더럽혀진 탈취였다. 볼셰비키는 첫 10년의 업적 때문에 망했다. 유기체와 사회의 순환적 발전을 연구한 두 명의 미국 사상가가 그러한 업적을 바라보면서 “1917~18년에, 러시아가 팽창과 성장의 시기에 들어섰고, 그 때문에 지금(1940년대) 러시아가 지구의 강력한 국가 가운데 가장 젊은 국가로 서게 했다”(Edward R. Dewey & Edwin F. Dakin, Cycles, New York, 1947)고 지적했을 만큼, 그러한 업적은 실질적이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러시아의 새로운 활기를 어떻게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해서, 달린(David J. Dallin)은 우리에게 하나의 지표를 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연합국의 30%에 맞먹는 주민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1,200~1,600명이나 연합국의 80%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장에서 붉은 군대는 침략국 병사들의 죽음보다 4배 많은 병사를 잃었다.

 

러시아혁명이 터졌을 때, 모든 혁명 정당이 이용할 수 있는 실질적으로 조직된 당원은 제국 주민의 1%도 못 되었다. 이러한 1% 가운데 볼셰비키는 오직 하나의 분파를 이루었다. 이러한 아주 적은 사람은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했고 탈진해버렸다. 1917년 10월~11월 혁명은 젊은 사람의 당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레닌은 47살이었다. 트로츠키는 38살, 부하린은 29살,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34살이었다. 10년에서 20년 뒤,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은 나이 든 세대가 했다. 그리고 이 세대는 권력의 특권에 매수된 젊은 경찰-관료제의 무게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대중의 수동성 때문에 무너지기 직전에 지쳐 떨어졌다. 대중은 테러주의 정권 때문에 영양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불구가 되었으며, 선전에 취해 있었다. 게다가 나이 든 세대는 외부세계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그들이 소련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동안 전 세계의 반동 세력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위대한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화해했거나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인민전선의 수명, 서구 노동계급의 후위 투쟁은 나치즘, 파시즘, 프랑코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에서 박살 났다. 바로 그 순간에 스탈린의 폭력배는 러시아에서 볼셰비즘을 청산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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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승리하여 의기양양한 첫 10년과 뒤이은 암흑의 10년 뒤에 우리가 러시아혁명에서 방어할 것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역사적 경험, 아주 당당한 회고록 ―이것들은 이미 행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즘의 교의와 전술은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나는 연구실이 현장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생산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가 저절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도덕적이고 정치적 방식으로 헤게모니의 포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다시 나타날 것이고 미래의 투쟁에서 확실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미래에는 이런저런 종류의 혁명적 독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경우에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이러한 정부의 민주적인 성격을 보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프롤레타리아트 단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와 심지어 민족들을 위해서. 이런 뜻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더는 우리의 목적일 수 없다. 우리가 이바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혁명은 오직 사회주의적― 그 말의 인간주의적 뜻에서―, 또는 좀 더 정확히 민주주의적이고 자유의지적인 수단을 통한 사회화한(socializing) 것일 수 있다.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당에 대한 볼셰비키 이념은 완전히 실패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심리적 배경은 불쌍한 부하린이 그렇게 당당하게 칭찬했던 이상에 헌신했던 동질적인 전투가 집단의 그룹화를 불가능하게 했다. 중앙집중주의, 규율, 그리고 지도된 이데올로기는 비록 우리가 조직적 틀이 필요로 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건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모든 이것에서 러시아인들이 지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역사의 저항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통해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사슬 말고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군가 달린과 보리스 니콜라예프스키(Boris I Nikolaevski)가 쓴 객관적이고 타협하지 않은 저작 『소련에서 강제노동』(Forced Labor in the Soviet Union)을 곧 프랑스어로 번역해주길 바란다. 그 책은 우리에게 1928년, 즉 소련의 테르미도르 동안 GPU 강제노동수용소에는 약 3,000이 못 되는 사람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몇백만의 노예가 갇혔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가장 적절한 평가는 1,000 또는 1,200만 명이다. 즉 이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성인 남성 인구의 16%(그리고 아주 낮은 비율의 여성)이다. 최근에 『대중』(Masses)에서 나는 이러한 수치가 지닌 결정적인 중요성을 낮게 보았다. 주민의 15%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럽인의 생활 수준과 같은 것을 누리는 특권을 지녔다고 보면서, 나는 ‘7% 특권 노동자, 15% 천민, 78%가 비참과 가난에 착취당한 사람들’이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체제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방어할 가치가 있는가?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이러한 ‘강제 노동수용소 소우주’의 영향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와 사회적 재조직화의 발전을 봉쇄하게 되었다. 따라서 비극은 러시아 하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이러한 과정의 논리적 결론은 제3차 세계대전일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가능성이 가까워 있는 한, 우리는 체념하고 재앙적 결과에 맡겨서는 안 된다. 국제 사건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의 공격성은 내부 상황의 중력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정권에 맞서 러시아와 비(非)러시아 대중이 반란을 일으킬 잠재적 경향은 공격(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소련 침공-옮긴이)이 시작될 때 그들의 패배주의와 그들이 침략자(독일군-옮긴이)를 해방자로 환영했던 방법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또한 승리에 뒤따랐던 ‘곤경’, 그리고 블라소프(Vlasov) 군대의 운동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2~3십만 명을 통해,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가 꽉 들어찬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나는 전체주의 정권이 반란의 훌륭한 공장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사람들이 지닌 혁명적 전통 때문에 훨씬 더 그럴 것이다.

 

러시아 대중의 사기에 대한 문서자료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정권의 철의 장악 속에서, 누군가 러시아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듯이, 여전히 중요한 생명력(활기)이 있다. 일하고 건설하고 발명하고 관리하는 사람의 9/10는 비록 그들의 사슬이 부서졌지만, 노동자 민주주의에서 적극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막으려고 사회주의 러시아를 위해 제때 그들의 사슬을 부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스탈린주의 정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지닌 억압받는 대중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반동의 강력한 세력은 러시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비(非)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훨씬 더 쉽게 반동 세력이 나타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범이슬람주의의 영향에 배여 있었던 중앙아시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그런데도 나는 억압이 가장 잔인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 동안 소련에서 실행한 나의 관찰을 바탕으로 삼아 커다란 다수가 틀림없이 공식 사회주의(official socialism)의 사기 행각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도 심지어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 일어난 국가가 통제한 생산으로 인한 발전이 아주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럽 전체에서 국유화와 계획화 바람이 일어났다) 진짜 러시아 민주주의는 생산자의 이익에서 사회화된 생산을 재조직하는 데서 건강과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의 기술적 명령은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과 공동체의 이익에 따라 경제를 또다시 세울 수 있는 새로 발견된 자유와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깊이 느낀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멕시코,

1947년 7~8월

빅토르 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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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Bolsey가 불어본을 영어로 옮기다.

 

<한국어 출처> 「실천」 2007년 10월호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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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3호]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Ⅰ~Ⅳ)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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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우리가 여행하려고 하는 지난 30년은 얼마나 끔찍한 길이 될까. 우리 시대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 가장 많은 희망을 안겨준 사건은 우리에게 달린 듯 보인다. 이제 1917년을 휩쓸었던 잊지 못할 열광주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활동가의 첫 성원이었던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비참함뿐이다.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과 목격자 가운데 그 누구도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문서는 모조리 파괴되었거나, 감춰졌거나 혹은 왜곡되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혁명에 늘 반대했던 망명자뿐이다. 그들은 책을 썼고, 가르쳤으며, 여전히 보수주의의 강력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구적 봉기 시기에 그 세력은 모든 진실한 객관성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 대한 어두운 광경에 비난의 칼날을 들이댄 이름뿐인 볼품없는 논리는 볼셰비즘 실패와 더 나아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실패를 입증하려고 시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얕은 술수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모든 문제에 부닥쳐서 쉽게 이어졌고 내다볼 수 있는 미래에 자신의 지배력을 느슨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른 실패를 잊고 있는가? 사회 재앙의 시기 동안 기독교는 어디에 있었는가? 자유주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계몽의 형태이거나 반동의 형식이거나 보수주의가 낳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솔리니, 히틀러, 살라자르, 그리고 프랑코를 주지 않았던가? 만일 그것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많은 실패를 솔직하게 생각하는 문제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막혀 있던 우리의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

 

모든 사건은 한정적이고 이행기적이다. 흔히 잊히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맥락에서 발전한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견해를 세우기 전에, 프랑스혁명에 대한 견해와 전망에서 생긴 많은 변화를 회상해보자. 칸트가 바스티유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열광했던 모습, 테러, 테르미도르, 집정부, 나폴레옹. 1789년과 1802년 사이에 자유와 우애, 평등의 공화국은 완전히 선회했고 그 자신의 기원을 부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인 나폴레옹의 정복은 히틀러가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두드러진 것이다. 황제는 괴물이 되었다. 문명화된 세계는 그에 맞서 힘을 합했다. 그리고 신성 동맹은 유럽 전체에서 낡은 정권을 다시 세우려고 싸웠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권력을 안겨 준 프랑스혁명, 공업의 정신, 과학적 문의는 19세기를 실제로 살찌우게 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지고 난 뒤 30년째, 즉 1819년, 루이 18세와 차르 알렉산드르가 지배하던 시기는 역사에서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실수로 생각되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로틴에서 죽었고, 수많은 전쟁과 투쟁이 어떻게 군주제를 가증스럽게 복구시켰는가.

 

Ⅱ.

 

역사 왜곡은 으레 그때의 질서로 될 수밖에 없었다. 부정확한 과학 사이에서, 역사는 물질적이고 심리적으로 대부분의 관심을 위협한 오직 하나의 것이다. 비록 사실이 쉽게 이용될 수 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신화, 실수, 목적이 있는 해석은 난무했다. 틀림없이 먼저 자신을 알리지 않고 말하고 쓰는 것은 훨씬 더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1917년 10월과 11월에 볼셰비키가 일으켰던 폭력적인 쿠데타가 민주주의의 싹을 뽑아버렸다”라는 주장이 있다. 그 어떤 것도 사실과 아주 다르다. 그 어떤 공화국도 러시아에서 선언되지 않았고 소비에트와 노동자ㆍ농민ㆍ병사 위원회 말고 그 어떤 단일한 민주주의 제도도 없었다.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농업 개혁을 거부했고, 대중이 요구했던 평화 협상을 여는 것을 거부했으며, 반동 세력에 맞서 효율적 조치를 거부했다. 이행기적이고 단명한 국가는 두 개의 커다랗고 앞서 나아가고 있는 집단, 즉 장군들의 집단과 혁명적 대중 집단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 어떤 것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민주주의 발전을 지시하지 않았다. 1917년 9월쯤에 오직 하나의 대안은 반동적 장군들의 독재냐 또는 소비에트 독재냐였다. 그러한 쟁점에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는 두 역사가, 트로츠키와 우익-자유주의적 정치가인 밀류코프는 이 문제에 똑똑히 동의했다. 소비에트 또는 볼셰비키 혁명은 전제정이 무너지고 난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이끌었던 불안전하고 비효율적인 온건 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한 결과였다.

 

또한, 11월 7일(옛 달력에 따르면 10월 25일)의 봉기가 한 줌 밖에 안되는 음모가, 즉 볼셰비키당 작품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보다 실제 사실에 훨씬 더 모순되는 것은 없다. 1917년은 대중 행동의 시기였다. 그러한 행동은 변화, 다양성, 힘에서, 그리고 갈증을 느낀 대중의 주도가 뚜렷이 볼셰비즘 쪽으로 나아갔던 끈기에서 놀라웠다. 농민 소요는 러시아 전체로 퍼졌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낡은 규율은 폭넓은 반항으로 무너져 버렸다. 크론슈타트와 발트 함대는 임시정부에 대한 복종을 딱 잘라 거부했다. 트로츠키만이 해군 기지에서 일어난 무장 갈등을 소비에트와 만나 막을 수 있었다. 투르게스탄에서 타쉬겐트 소비에트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케렌스키는 칼루가 소비에트를 그의 포병으로 위협하고 있었고 볼가에서 50만 병사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거부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주변 지역에서, 노동자 적위대가 세워졌다. 페트로그라드 요새는 소비에트의 권위로 자신을 위치 지었다. 소비에트 사이에서, 다수파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온건한 사회주의자와 볼셰비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는 케렌스키에게 등을 돌렸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열광주의의 커다란 물결 속에서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존 리드와 자크 사둘이 쓴 책을 다시 읽어보자. 그 사람 모두 그 열광주의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 아닌가! 그렇다, 볼셰비키 ‘음모’라고 하는 것은 대중적 정서의 커다랗게 떠오르는 물결에 의해 권력을 실행했다.

 

제국이 페트로그라드 교외 무장되지 않은 주민의 압력 아래 1917년 2~3월에 무너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가치 있다. 요새의 군대와 시위하고 있는 노동자 사이에 자발적인 친교는 전제정의 운명을 정해버렸다. 나중에 이러한 친교를 부추겼던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들을 동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몇몇은 이름이 있었지만, 다수는 이름 없는 상태로 남았다. 모든 혁명정당의 지도자와 가장 능력 있는 전투가는 그 순간에 감옥에 있거나, 또는 외국에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활동한 소규모 집단은 볼셰비키가 노동자를 공장으로 복귀하라는 호소를 내걸려 계획했던 사건 전환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가! 4개월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잡고 있는 연립 정부의 경험은 7월 초에 요새와 교외 주민이 소비에트로 권력 이전을 요구하는 슬로건을 들고 일어난 커다란 시위를 조직했던 깊은 분노를 낳았다. 볼셰비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자가 이끌었던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였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결론으로 끝난 시위에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라의 나머지가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을 느꼈다. 으레 그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들은 중상(“독일 간첩”)과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압박당했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는 만일 그들이 이러한 대중 운동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장군들은 힘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7년 9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은 케렌스키 정부에 있는 공개적인 공범과 함께 전투에 들어섰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잠적했고,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혔고, 볼셰비키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군대는 철도 노동자와 다른 전투적 노동자와 접촉 결과로 저절로 흩어졌다.

 

전제정의 문관은 또렷이 다가올 혁명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막을 수단을 지니지 않았다. 혁명정당은 혁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할 수도 없었고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다. 사건이 그러한 과정을 밟았고 봉기가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누구에게든 남겨진 것은 의지와 비전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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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다. 혁명정당 사이에서 일어났던 자연도태의 과정에서 볼셰비키가 힘을 모은 대중의 열망을 일관되고 현명하게, 그리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가장 정통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했고 내전에서 이겼다. 왜냐하면, 많은 주저와 갈등이 있었지만, 대중은 발트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볼셰비키를 편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다란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에 있는 많은 볼셰비즘의 적이 받아들였다. 망명한 자유주의 출판업자인 헬레나 쿠스코바(Helena Kuskova)는 얼마 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백군도 ……제헌의회를 위한 투쟁도 밀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백군은 군주제적 반혁명, 입헌주의, 민주적인 반-볼셰비즘을 대변했다. 그러므로 1920~1921년에 내전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혁명은 볼셰비키가 지도자와 중견 요원의 형식으로 두뇌와 신경 조직을 제공했던 커다란 대중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직접적인 목표가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또 다른 신화이다! 사실 그들은 권력이 고립될 수 있다는 위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일찍이 연립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원칙적으로는 온건 사회주의정당과 연립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온건 사회주의정당은 3월 혁명(옮긴이: 2월 혁명)을 실패로 이끌었고 소비에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이상주의자이자 지식인이 이끈 농촌을 바탕으로 삼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협력을 구했고 얻었다. 1917년 11월에서 1918년 7월 6일까지, 사회혁명당 좌파는 정부에 참여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가운데 잘 알려진 몇몇 사람들(1/3)처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8년 7월 6일에 그들은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녔고 ‘독일 제국주의에 맞서 전쟁을 다시 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모스크바에서 폭동에 가까운 반란을 시작했다. 그때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그들의 성명서는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닌 어떤 당이 한 첫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했고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도록 남겨 놓았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의 책임은 늘어났고 그들의 정서는 바뀌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다수파(볼셰비키)와 소수파(멘셰비키)로 분열되기 전에 그들은 다른 러시아 혁명정당과 바탕부터 달랐는가?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특성, 수단의 선택에서 편협성과 비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관료주의적 국가주의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중앙집중화되고 아주 규율적인 조직, 독재적이고 비인간적인 특성. 잘난 체하는 작가와 뭘 모르고 떠드는 작가는 이와 관련해서 레닌의 ‘비도덕주의’, 즉 그의 ‘프롤레타리아적 자코뱅주의’와 ‘직업적 혁명주의’를 인용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1870~80년부터 모든 러시아 혁명정당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실제로 권위주의적이고 아주 중앙집중화되었고 규율에 의존했다. 모든 사람은 ‘직업적 혁명가’로 훈련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삶을 투쟁에 모두 바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은 그때 감히 ‘실천적’ 비도덕성을 지닌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열렬하고 이타적인 이상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공평하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이든 아니든 간에 거의 모든 사람은 자코뱅적 정서가 있었다. 모든 것은 영웅과 광신자를 낳았다. 멘셰비키를 빼고 모든 사람은 독재를 열망했고 그루지야 멘셰비키도 빈번히 독재의 방법을 이용했다. 모든 커다란 정당은 그들의 구조상 그들 자신에게 할당한 목표 때문에 ‘국가주의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지닌 교의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혁명적 정서가 있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지닌 권위주의 정서와 그가 제1 인터내셔널에 쓴 비밀 조직 방법을 잊었는가? 그가 쓴 『고백』에서 바쿠닌은 계몽된 독재를 두둔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썼다는 점은 매정한 것이다. 공화주의 이상을 지니고 있고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사회혁명당은 아주 중앙 집중적이고 규율 잡혔고 권위주의적 ‘기구’를 발전시켰다. 그 기구는 테러주의적으로 독재와 싸울 것을 목표로 했다. 바로 그것은 경찰이 도발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했다. 전체로서 러시아 사회-민주 세력은 국가권력에 대한 정복을 목표로 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보다 훨씬 더 ‘자코뱅’적 말로 다가올 혁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배 세력이었던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독재적 색채를 띠었다. 네스토르 마흐노의 검은 군대가 점령했던 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조차도 몰수, 징발, 체포, 처형을 갖춘 진짜 독재를 실행했다. 그리고 마흐노는 그 독재의 ‘두목’이자 ‘대부’ 또는 ‘주인’이었다.

 

단과 체레텔리 같은 멘셰비키 우파도 권위주의의 통치를 바랐다. 체레텔리는 더 늦기 전에 볼셰비즘을 탄압할 것을 편들었다. 마르토프 같은 멘셰비키 좌파는 아마 민주주의 혁명 이상을 진지하게 붙잡았던 하나의 그룹이었을 것이다.

 

볼셰비즘이 갖는 뚜렷한 특성은 공동의 견해를 함께 지닌 그들의 경쟁 정당에 대한 타고난 우위였다. 그 특성은 맑스주의 신념,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교의, 고집스러운 국제주의, 사상과 행동의 통일이었다. 많은 개인 속에 이러한 사상과 행동의 통일은 그들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함께 있었다.

 

1917년 맑스주의의 이상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달라졌고 사회 투쟁은 그들이 그때로 돌아와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동안 역사적ㆍ경제적 현실에 대한 강한 인식에 중점을 두었던 이러한 이상주의는 그때와 환경에 적합했다. 그것은 그때의 자유주의적 표현, 이중거래, 자기 강화하는 미루는 짓, 책임성의 포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포함한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나라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게 한 “부르주아혁명”을 진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구조의 발전으로 반드시 이끌게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러한 ‘부르주아’혁명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그런 뒤떨어진 무대에서 일어날 수 없지만, 사회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유럽 노동계급을 위한 본보기가 될 것이라 믿었다. 1917년에 레닌은 모든 생산 수단에 대한 국유화를 계획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나중에 레닌은 자본주의와 국가 통제로 이루어진 혼합 체제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섰다. 1918년 7월에 비로소 내전의 발발은 수세적 필요로서 완전한 국유화를 강제하게 되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타협하지 않은 국제주의는 러시아에서 혁명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 훨씬 더 기름진 것으로 될 다가올 유럽 혁명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 앞날에 대한 이런 비전은 그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 사회주의가 함께 지닌 토대의 일부였다. 비록 실제로 거대 정당이 전체 혁명이라고 하는 이러한 구상을 이미 포기해버렸지만. 맑스의 독일 후계자인 칼 카우츠키는 1908년까지 이러한 혁명의 주요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칼 리프크네히트 모두는 같은 믿음을 지녔다. 볼셰비키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했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생긴 심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차르 제국에는 의회주의적 기회주의와 일상적 타협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잔인하고 단순한 사회적 현실은 적극적이기도 하고 아울러 전체적이기도 한 신념을 생기게 했다. 이 점에서 볼셰비키는 좀 더 러시아적이었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보다 러시아 대중의 기질에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의 뜻에서 서구적이고, 진화론적 정서, 민주주의적인 특성을 몸에 익힌 당원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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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이제 잘못과 실수라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 보자. 이런 짧은 연구에서 볼셰비키-사회주의 혁명에 대항해 싸웠던 권력과 정당이 저지른 결점, 잘못, 범죄를 똑같이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와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맥락이 빠진 가운데, 우리는 일방적인 견해와 똑똑히 싸워야 할 것이다.

 

1939년에 나는 파리에서 펴낸 『스탈린 초상』(Portrait de Staline)에서 이렇게 썼다. “……정확히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 때문에 사회주의자(볼셰비키)가 저질렀다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잘못은 반혁명, 투기, 간첩 활동, 의무 불이행에 대한 탄압을 위한 비상 위원회의 창설이었다. 나중에 그 위원회는 ‘체카’로 짧게 줄여 불렸다. 그 위원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즉 적어도 방어할 여지도 없는 피의자, 단순한 수상쩍은 사람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비밀리에 선고를 받았고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심문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이었는가? 틀림없이 포위 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처참한 내전은 예외적인 조치를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는 공개 재판이 독단적이고 부패한 행동에 맞선 하나의 보증임을 잊었다. 어떻게 푸키에탕빌(Fouquier-Tinville)이 쓴 임시변통 수단보다 훨씬 더 처진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실수이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 탓에 소름 끼치는 결과가 나왔다. 체카의 훨씬 더 힘 있는 계승자인 GPU도 볼셰비키에서 모든 혁명 세대를 뿌리 뽑았다. 어쨌든 사회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환경은 실질적인 중요성을 띠었다. 젊은 공화국은 치명적인 곤경에서 살았다. 크라스노프와 코르닐로프와 같은 장군에 대한 공화국의 관대함은 피의 강으로 물들이게 하는 희생을 치렀다. 옛 정권은 또다시 테러의 이용에 호소했다. 1917년 11월에 백군은 크렘린 병기고 노동자를 대량 학살함으로써 내전에서 테러를 이용하는 주도권을 잡았다. 1918년 첫 몇 개월 동안 핀란드 반혁명세력은 러시아에서 ‘적색 테러’가 선언되기 전에 테러를 이용했다. 1848년 6월의 날들에서 시작한 19세기 사회 전쟁과 1871년 파리코뮨은 정복당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을 대규모로 없애버렸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졌을 때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런데도 체카는 처음부터 1918년 여름까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반혁명 봉기가 터진 뒤, 볼셰비키 볼로다르스키와 우리츠키가 암살당하고 난 뒤, 그리고 레닌을 암살하려는 두 번의 시도가 있고 나서, 체카가 ‘적색 테러’를 시작하고 인질과 수상쩍은 사람들, 적들을 총살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대중의 분노를 통제하고 다른 데로 돌리는 수단이 되었다. 제르진스키는 지역 체카의 지나침에 대해 걱정했다. 체키스트 자체의 통계는 이러한 공세가 매우 교훈적일 것으로 어림짐작한 것이다. 최근에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작은 책, 사회혁명당 좌파인 스타인베르그가 쓴 『어느 인민위원의 회고』를 다시 펴 보았다. 그 책에서 나는 두 개의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았다. 1917년 말에, 총알 두 발이 레닌에게 발사되었다. 레닌을 암살하려 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 노동자 대표가 레닌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반혁명가들이 당신의 피 한 방울을 흘리게 한다면,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백배로 보복할 것이다. 스타인베르그는 이 구상(암살)에 따라 레닌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를 꼼꼼히 적었다. 비극적 결과를 막으려고 사건은 특별히 비밀에 부쳤다. 나는 다른 자료를 통해 총을 쏘았던 두 명의 사회혁명당원이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그들은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다. 두 명의 자유주의자인 전직 장관, 쉰가레프와 코코쉬킨은 감옥에 있는 동안 병을 앓았다. 그들을 병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병원에서 그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암살당했다. 레닌이 그 범죄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아주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조사를 지시했고, 범인은 많은 동지의 지지를 받고 보호를 받았던 혁명적 수병이었음이 발견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병들은 테러리즘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행동을 취했다. 사실 함대의 병사들은 암살자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인민위원은 사건 전체를 ‘잊어버리’라는 강요를 받았다. 수병의 지지가 혁명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을 때에, 그들은 자발적인 테러리즘 행동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1920년에 중요한 처벌은 러시아에서 폐지되었다. 그것은 내전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나는 당내 모든 사람이 정권의 정상화, 포위 상태 종식,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선회, 폐지가 아니지만 체카 권력에 대한 제한을 바랐다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피폐화된 나라는 재건을 시작하기만을 바랐다. 그 나라는 여전히 신념과 열광의 커다란 저수지였다. 1920년 여름은 혁명의 역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모든 러시아 사람이 상황이 평화스러워지길 바랐던 때에, 필수드스키는 폴란드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맞선 전장으로 몰아넣었다. 틀림없이 정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빚어진 이러한 공격은 영국과 프랑스가 크림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브랑겔 장군을 승인했던 것과 일치했다. 그것이 혁명에 끼친 나쁜 영향은 즉시 나타났다. 폴란드를 패배시킨 중앙위원회는 폴란드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레닌의 이러한 계획은 바르샤바 문 앞에서 붉은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실패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고통스럽고 피로 더럽혀진 전쟁이 끝났음에도 나라가 황폐해졌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는 더는 주요 처벌을 폐지하거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밑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참과 위험은 주민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경제체제에서 당-국가를 불구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전시 코뮤니즘’(War Communism)라고 하는 체제 운명이 정해졌다.

 

1921년 초에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는 정확히 이러한 경제체제와 당 독재에 대항한 저항이었다. 봉기가 지닌 실질적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당은 굶주린 국가를 통치할 수 없었고 그것의 인기를 지탱할 수 없었다. 대중의 자발적인 열광은 사라져 버렸다. 희생과 결핍은 혁명 안에서 여전히 적극적인 소수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독히 추운 겨울, 불충분한 배급, 전염병, 농촌에 대한 끊임없는 징발 등 이 모든 것은 곳곳에 비참함, 일종의 절망, 빵과 반(反)혁명 사이 이데올로기의 혼동을 퍼트렸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고삐를 놓아버린다면, 그들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볼셰비키가 자신의 의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들이 계속하는 것이 옳았다. 그들의 잘못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부딪혀 제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던 우리가 잘 알았듯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갖가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다.

 

권력의 잘못과 실수는 1921년 크론슈타트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칼리닌이 냉정하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설득과 이해가 필요했던 곳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은 위협과 모욕을 썼을 뿐이었다. 형제로 받아들이는 대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간 크론슈타트 대표들은 체카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갈등에 대한 진실은 당과 나라 전체에서 언론을 통해 숨겨졌다. 크론슈타트를 책임지고 있던 백군 장군 코즐로프스키가 말했듯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미국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선의에서 한 중재 시도는 거절당했다. 그 대신 대포가 동포들끼리 전투에 쓰였다. 체카는 나중에 죄수를 쏘았다. 만일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수병이 1918년 이래 바뀌었고 이제 후진적인 농민층의 열망 말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다면, 지배집단도 바뀌었다고 말해야 한다.

 

‘전시 코뮤니즘’의 폐지와 ‘신경제정책(NEP)’의 시작을 알리면서, 레닌은 전투와 대량학살이 끝난 뒤 크론슈타트 반란자가 내건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권, 그리고 그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되자 농촌에서 징발이 폐지되었다. 그 대신 일종의 현물세가 들어섰다. 그것은 상업과 소규모 기업의 자유를 다시 세웠다. 다른 말로 하면, 신경제정책은 생산과 교환에 대한 완전한 국가 통제를 통해 나라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누그러뜨렸다. 그와 함께, 인내와 화해를 통해 소비에트 헌법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다른 사회주의자와 자유의지적 요소에 대한 정부 정책을 자유화하는 것도 정상으로 되었다. 라파엘 아브라모비치는 올바르게 1921년에 이러한 노선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볼셰비키를 꾸짖었다. 그 대신 중앙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아나키스트를 불법화했다. 연립 정부가 이때 세워졌다면, 그것은 확실한 위험을 국제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 입증되었다. 그들은 결코 이러한 권력 독점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당과 노동계급 안에서 불만이 퍼지자, 중앙위원회는 그 순간부터 포위 상태임을 어쩔 수 없이 선언했다. 이러한 포위 상태가 당 그 자체에 미친 영향은 너그러웠던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반대파는 비난당했고 숙청당했으며 추방당했다.   <계속>

 

 

멕시코,

1947년 7~8월

빅토르 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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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Bolsey가 불어본을 영어로 옮기다.

 

<한국어 출처> 「실천」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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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1940년, 레온 트로츠키 암살 - 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

1940년: 레온 트로츠키 암살 - 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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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추모글과 연대기는 트로츠키 암살 80주년인 작년(2020년)에 작성되었으며,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글로  "트로츠키를 인간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와 노동자 운동 모두를 둘러싼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할 필요를 인식하기 위해" 쓴 글임을 밝혀둔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0년 8월 21일 저녁 7시 25분, 붉은 군대의 영웅적 조직자이자 코뮤니스트 혁명의 열렬한 설교자였던 레온 트로츠키가 멕시코시티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기 26시간 전, 스탈린주의자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 요원 암살자가 레닌의 오랜 동지를 도끼로 내리쳐서 두개골을 박살 냈다.

 

그의 부인이자 신실한 동지였던 나탈리아 세도바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서 밤을 새웠다. 그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렸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고 때로는 호흡이 곤란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부드러웠다. 그날 밤과 그다음 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저녁 무렵, 두개골 절개수술이 끝난 후 의사들은 호전되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다가 그의 호흡이 짧아지고 거칠어졌다 … 나는 모든 희망을 걸고 기원했다 … 나는 지쳐서 의자에 쓰러졌다. 나의 예감이, 어쩌면 움직임이 나를 깨웠다. 나는 내 앞에서 흰 코트를 입은 두 명의 의사를 보았다. 나는 이해했다. 레온 다비도비치는 조금 전에 평화롭게 잠들었다. 그는 60세였다.”

 

그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트로츠키가 1920년대 이후 러시아 안팎에서 혁명의 패배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이론적-정치적 접근 방식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우리는 트로츠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분석을 위해 조만간 팸플릿(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을 증보판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저지른 심각하고 때로는 매우 심각한 오류에도(그의 추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그가 암살당하기 6개월 전인 1940년 2월 27일에 썼던 짧은 쪽지 글로 그를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과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끊임없는 투쟁을 그와 함께 공유한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 동안은 맑스주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를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맑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코뮤니스트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에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2020년 8월 21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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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 연대기 (1879-1943)

 

우리의 팸플릿(『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방식은 트로츠키를 인간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인 논증(對人 論證)이 혁명적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소용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역사는 영웅의 역사라는 부르주아 역사관을 절대 거부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삶(그리고 사실 레닌의 삶)은 개인이 물질적 환경을 넘어설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적절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밝힌 경우는 트로츠키와 노동자 운동 모두를 둘러싼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연대기 개요는 우리 논의의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1879년 10월 26일. 레브 다비노비치 브론슈타인(Lev Davidovich Bronstein), 안나와 다비드 레온테비치 브론슈타인의 다섯째 아들로 남우크라이나 Yanovka에서 태어났다.

 

 1881년. 러시아 농민 미르를 사회적 단위로 선택한다면 서구 노선을 따르는 산업혁명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인민주의자에 의해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살해됨. 인민주의는 이 시기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적 운동이 된다.

 

 1883년. 플레하노프(George Plekhanov)와 자술리치(Vera Zazulich)와 악셀로드(Pavel Axelrod)는 노동해방(Emancipation of Labour) 그룹인 첫 번째 러시아 맑스주의 조직을 설립한다.

 

 1895년. 레닌과 마르토프(Martov)는 노동계급 해방 투쟁연맹(the League of Struggle for the Emancipation of the Working Class)을 설립했다. 그 지도자들은 즉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진다.

 

 1897년. 남러시아 노동조합이 L.D. 브론슈타인(Bronstein)과 맑스주의를 끌어안고 공장에 리플릿을 뿌리기 시작한 전 나로드니키(Narodniks, 인민주의자)에 의해 설립된다.

 

 1898년. 브론슈타인, 체포되어 여러 감옥을 전전하다. 오데사에서 간수 트로츠키는 그가 후에 알려질 필명에 대한 영감을 준다.

 

 1902년.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다. 이스크라 출간, 트로츠키는 Piero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다. 트로츠키, 시베리아에서 최초로 탈출한다.

 

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뉜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 편에 선다.

 

 1904년. 트로츠키, 멘셰비키 분파에서 사임한다.

 

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노동자들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대량 학살로 혁명의 첫해가 시작된다. 트로츠키는(나탈리아 세도바와 함께) 러시아로 돌아온다. 11월, 트로츠키는 상페테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두 번째 의장(Khrustalev-Nosar의 체포 후)이 된다. 레닌은 중단 없는 혁명을 주장한 「민주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을 쓴다. 트로츠키는 11월, 혁명이 무너지자 체포된다.

 

 1906년. 감옥에서 영구혁명 이론을 처음으로 진전시킨 「결과와 전망」을 쓴다.

 

 1907년. 시베리아에서의 두 번째 탈출, 빈에 정착, 그곳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재결합을 설파하는 인쇄물인 프라우다(Pravda)를 편집한다. 레닌은 이 시기에 그를 ‘수다쟁이 트로츠키’ 정도로 묘사한다.

 

 1908년. 제2 인터내셔널의 슈트가르트 대회에서 룩셈부르크, 레닌 등이 제안하여 유럽 전쟁이 일어날 경우 총파업을 요구하는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보스니아의 위기는 곧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이 되었다. 독일은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도록 오스트리아를 지원한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해결방안을 무시했고, 그들 각각의 정부를 지원했다. 오직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의 정당들만이 전쟁에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프랑스로 가서 마르토프의 반전 신문인 Golos(The Voice)와 Kievan Thought와 함께 일하기 전에, 스위스로 가서 「전쟁과 인터내셔널」이라는 전쟁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 1915년 2월. 트로츠키는 Nashe Slovo에서 멘셰비즘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9월, 11개 국가를 대표하여 온 38명의 사회주의자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찜머발트에서 만난다. 트로츠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찜머발트 선언을 썼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를 요구하는 레닌의 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지하는 좌파에 함께하지 않았다.

 

 1916년. 키엔탈 대회는 ‘좌파’와 ‘평화주의자’의 분열을 확인한다. 프랑스 정부는 트로츠키의 출석을 막는다.

 9월. 트로츠키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페인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다.

 

 1917년 3월. 2월 혁명의 발발에 대한 소식을 듣고,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향했으나, 증기선이 Halifax, Nova Scotia에 정박했고, 그래서 영국은 그를 800 독일인과 함께 전쟁 포로로 억류했다. 찜머발트 대회에 대한 그들을 향한 트로츠키의 연설은 감옥 당국에 의해 중지되었다.

 

 4월. 레닌,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다. 그의 4월 테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줄 것과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볼셰비키에 의한 코뮤니스트 이름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볼셰비키 지도자들(트로츠키의 매형 카메네프를 포함하여)은 그것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 5월. 트로츠키는 4월 29일 영국에서 석방되어 러시아에 도착한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5월 7일 만났고, 국제혁명의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러시아의 의제라는 데에 동의한다. 트로츠키는 더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다시 합쳐져야 한다고 믿지 않게 된다.

 

 7월. 볼셰비키 슬로건 영향 아래의 크론슈타트 수병, 성급하게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도록 힘쓴다. 트로츠키는 사회혁명당(SRs)의 지도자 빅터 체르노프(Victor Chernov)를 분노한 수병들로부터 구해낸다. 임시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할 충분한 군인을 소집할 수 있었고, 볼셰비키는 배척되었다. 트로츠키는 그가 레닌을 지지함을 발표했고, 투옥되었다.

 

 8월, 코르닐로프 장군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는 케렌스키가 그 육군참모총장에 대항한 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재합법화했다.

 

 9월.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된다. 9월 23일,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 10월. 트로츠키는 레닌의 케렌스키 정부 전복 요구를 지원한다.

 

 10월 24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원래 코르닐로프와 싸우기 위해 세워진)의 의장으로서 트로츠키는 케렌스키가 노동자 계급에 적대하여 선제 파업을 시도했을 때, 권력의 전복을 조직했다. 트로츠키는 케렌스키의 전복을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25일 그 유명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당의 마지막 비문 - 그들이 이제는 그들이 속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는 -을 선언했다.

 

 11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새로운 권력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의 의장으로서, 새로운 정부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제안을 거절하도록 만든다. 새로운 정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적 냄새가 나는 장관(Ministers)이라는 이름 대신 인민위원(People Commissars)이란 이름을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외무인민위원으로서, 트로츠키는 그가 단순히 제국주의자 연합국(러시아, 프랑스, 영국) 사이의 비밀스러운 협정을 맺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이 연합국 측에 대한 정복의 전쟁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표하는 협정문을 출간한다. 그러나 그는 독일 제국 최고 사령관과 평화의 본질을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

 

 12월. 트로츠키는(카메네프와 요페(Joffe)와 함께) 독일 참모 그룹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 도착한다. 그 위원단은 독일 군인들에게 혁명을 촉구하도록 하는 리플릿을 돌렸다. 그는 레닌이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노선을 지지한다면,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를 승인할 수밖에 없다는 레닌의 인식을 지원할 것이라는 레닌의 제안을 수용한다.

 

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 조약, 핀란드 소비에트 공화국과 우크라이나의 그 가장 비옥한 토지를 대가로 맺어진다. 이 시기 트로츠키는 사임한다. 그는 이제 전쟁 인민위원이 된다. 그다음 2년 반 동안 그는 적군을 조직한다.

 

 8월 27일. 트로츠키는 백군과의 내전에서 적군을 규합하기 위해 전선과 전선을 오가는 기차에서 묵는 그 유명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실제로 2년 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적색테러(Red Terror)에 대한 멘셰비키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을 쓴다.

 

 1920년 12월. 이제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협하는 300만의 프롤레타리아의 죽음, 배고픔, 무관심으로 인해, ‘전시코뮤니즘’은 대체되어야만 했다. 무엇으로 대체할 것이냐는 논쟁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를 제안한다.

 

 1921년 1월. 이탈리아 사회주의당은 세라티(Serrati)가 개량주의자들을 추방하지 않자 분열된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를 지도자로 추대한다.

 

 3월. 10차 당 대회에서, 신경제정책(NEP)이 전시코뮤니즘 대신 채택된다. 노동자 반대파(Workers Opposition)와 같은 분파들은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그것이 끝나기 전에, 크론슈타트 반란은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y)에 의한 진압의 비극적 필요성[트로츠키]을 가져왔다.

독일에서 3월 행동의 실패로 포위된 소비에트 공화국의 즉각적인 구원에 대한 희망은 그 끝에 달한다.

 

 1922년 3월. 지노비예프는 코뮤니스트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추천한다.

 

 1923년 2월. 이탈리아에서 보르디가가 체포된다.

 

 5월. 레닌 첫 뇌졸중. 레닌,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비판하지만, 스탈린의 제거를 촉구하는 유언을 쓴다.

 

 6월. 코민테른의 세 번째 확대 상임 위원회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l)에 새로운, 그러나 혼성 지도력을 구축한다.

 

 

 1924년 1월. 레닌의 죽음.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그에게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한 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 5월. 그람시,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2년간의 지도를 받은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코민테른 지부(PCd's)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한다.

 

 

 6월. 코민테른 5차 대회는 코뮤니스트당들의 볼셰비키화를 요구한다.

 

 11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은 독일 노동계급을 그 마지막 시기에 패배로 이끌었다. 트로츠키, 「10월의 교훈」 출간한다.

 

 1925년. 트로츠키, 전쟁 인민위원 자리에서 물러난다.

 

 1926년. 영국에서 총파업의 실패. 보르디가, 소련의 방향과 스탈린에게 도전하기 위해 코민테른 모임에 최후로 참석한다.

 

 1927년. 중국 노동계급이 패배한다. 트로츠키는 이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 반대파에 함께한다. 세 명 모두 당에서 축출된다.

 

 1928년. 트로츠키 알마아타(Alma Ata)로 보내진다. 스탈린, 소련에서 당과 국가의 총체적 통제권을 장악한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의 좌익 분파는 파리, 팡탱(Pantin)에서 공식적으로 재조직된다. 「프로메테오」(Prometeo)가 브뤼셀에서 출간된다.

 

 1929년. 트로츠키, 터키 Prinkipo Island로 망명. 반대파의 기관지인 「Bulletin of the Opposition」의 첫 호가 파리에서 발간된다. 월스트리트에서 공황이 시작된다.

 

 1930년. 보르디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공식적으로 축출된다.

 

 1933년. 트로츠키 「영구혁명」을 완성한다. 나치즘, 독일에서 권력 장악한다. 트로츠키, 국제 좌익 반대파가 기반을 두고 있는 프랑스로 가는 비자 획득. 이것은, <국제 코뮤니스트 연맹>(볼셰비키-레닌주의)이라는 이름이었다. 트로츠키와의 논쟁 후, 이탈리아 분파는 「빌랑」(Bilan) 출간을 시작한다.

 

 1934년. 레닌그라드에서 Kirov 암살로 소련에서 숙청이 시작된다. ‘프랑스 전환’으로 불리는, 트로츠키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프랑스 사회민주주의당에 가입하라고 요구한 사건이 일어난다. 입당주의(Entryism)는 트로츠키주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 1935년. 트로츠키, 노르웨이로 간다. 「배반당한 혁명」을 출간한다.

 

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트로츠키, 멕시코에 도착한다.

 

 1937년. 일본, 중국을 침략한다.

 

 1938년. 트로츠키의 아들 레온 세도브, 스탈린의 요원에 의해 파리에서 암살된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죽음의 고뇌와 제4 인터내셔널의 책무」(「이행기 강령」으로 알려진) 를 쓴다.

제임스 버냄(James Burnham)과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샤흐트만(Max Schachtman)은 트로츠키에게 변질된 노동자 국가 공식을 포기하라고 한다.

 

 1939년. 2차 제국주의 전쟁을 발발시킨 히틀러-스탈린 조약과 폴란드 침공 발발한다.

 

 1940년. 스탈린 요원에 의해 트로츠키가 암살당한다. 제4 인터내셔널은 소련을 심지어 핀란드 침공 이후에도, 변질된 노동자 국가로서 방어하기를 계속한다.

 

 1943년 5월.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과의 제국주의 전시 협정의 일환으로 코민테른을 해산시켰다.

 

 7월.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한다. 이탈리아에서 파업의 물결. 이탈리아 좌파,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을 지도자로 하는 그들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비밀스럽게 <국제코뮤니스트당>[Battaglia Comunista] 을 결성한다.

 

 11월. 「프로메테오(Prometeo)」 본간 제1호 발간한다.

 

 

<원문 출처>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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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계급전쟁을 조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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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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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2021년 9월 ~ 2022년 2월

 

 

▶ 토론 주제

 

1. 코뮤니스트 좌파와 세계혁명   <발제 ㅣ 오세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논쟁, 자본주의 쇠퇴-해체 문제 등)

 

2. 코뮤니스트 강령과 당 건설    <발제 ㅣ 이형로>
   (코뮤니스트 정치원칙/강령, 선거 강령과 계급의식, 혁명당 건설)

 

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국제주의 
   (쿠바, 미얀마 투쟁 등 최근 쟁점, 민족문제와 국제주의 원칙)

 

4. 혁명과 반혁명,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역사적 교훈
   (파리코뮨 150주년, 크론슈타트 봉기 100주년 교훈 등)

 

5. 코로나19와 자본주의,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 전망  <종합토론>  
  (코로나 19-자본주의 위기와 노동자계급, 계급투쟁 전망)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투쟁!

코로나19 이전의 자본주의가 아닌 야만의 체제 전복!

 


□  9월 말부터 시작합니다.
자세한 일정과 내용은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여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 참가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주최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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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3호]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환상 : 영원한 반(反)노동계급 무기인 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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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각각의 새로운 충격으로 그 위기는 더욱더 심화한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생산과 유통의 혼란은 기존 시스템의 어려움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계급은 국가 개입이 계급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조건과 "공동체"에 가져올 이로운 효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자본의 좌파에 속하는 여러 정치 집단에 따르면,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유럽연합(EU)과 세계 각국이 대규모로 유동성을 공급한 것은, 국제 코뮤니스트들이 수십 년 동안 주장해 온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 내에 여전히 노동계급이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여지가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위기 원인을 분석한다는 측면에서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더 나아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EU와 유로존의 상황을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식의 오래된 국가 자본주의와 다름없는 경제 요리법을 생각해낸다. 지난 4월 코비드-19 비상사태가 한창일 때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유로의 코로나 위기 : thenextrecession.wordpress.com)은 로버츠의 비전을 특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 로버츠는 이탈리아와 같은 EU 회원국들의 심각한 어려움을 언급했다. 그는 결국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경우 유로존 재무장관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경제 지원책이 비참한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되살리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중앙은행(ECB)의 공적 채무 매입을 통해 이탈리아 국가가 실업자를 위한 일시적 노동 계획을 지원하고 채권시장에서 저비용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위해서 마지막 결전을 미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전에 국가 개입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폐기했던 로버츠가 같은 글에서 투자 계획을 위한 EU 예산 증액과 대기업 과세의 조화를 완성하는 마셜 플랜의 실행을 제안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난국에 대한 로버츠의 대응은 모순적이다. 로버츠를 비유하자면, 자본 흐름에 아주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유로존 국가들에만 이익이 되는 최저의 공통분모를 위한 경쟁이다. 요컨대, 그와 같은 로버츠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공유하지 않지만, EU 경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나아가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유로존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분명히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로버츠가 주창하는 이러한 국가 개입주의는 마치 EU와 유로존 개별국가의 더 많은 자본 투자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본질을 바꾸거나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처럼,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계급 없는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교활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선전하고 있다. 이 법칙은 맑스에 의해 확인되었고, 2007~2008년에 발생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로버츠 자신에 의해 종종 신중하게 분석된다. 그러나 사실 맑스는 코뮤니스트 혁명가이면서 정치경제 평론가였고, 단순히 사회주의를 "국민"의 각성과 자본주의의 부흥으로 보는 마이클 로버츠 같은 학구적 맑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정치경제가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나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하는 규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로버츠와 그의 친구들이 자본주의, 상품, 국가, 그리고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기구와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코뮤니즘은 경제에서 국가 개입의 강력한 신봉자와 함께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구제를 열심히 하는 여러 개혁론자에게서, 경제 또는 자본주의 계급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가가 아닌, 현재 상황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정한 운동(1)이라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맑스 「자본」 제1권의 한 구절에서 단일 자본가 또는 자본가 연합의 독점 형성이 사회 자본의 집중과 중앙집중화 과정의 극단적인 결과로 제안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이것은 자본가 연합이 사회적 자본을 독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본가 국가일 수 있고, 집단적 자본가나 기업가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엥겔스는 「반 뒤링」에서 집단 자본가로서의 국가의 역할에 관해 썼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 수준 자체가 자본가 착취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을 해야 하여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결국 직접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반 뒤링」에서 엥겔스의 주장을 모든 자본주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제국주의 시대에 이것은 모든 곳에서 국유화 또는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증가가 특징지어져 왔다.

 

실제로 지난 50년 동안 이윤율 하락으로 매우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국가도 신자유주의 단계로 간주하는 경제 지원 대책에 의존해 왔으며, 또한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통제되는 특정 기업이나 기업집단의 민영화와 분배를 진행해 왔다. 비록 이러한 국가 개입의 형태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30년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중요한 개입을 보았다. 특히, 국가 개입은 공공 부채를 늘려서 수익성이 없는 기업과 은행의 "구제"로부터 노동 시장의 구조 개혁이라 불리는, 연구와 개발로 만들어진 투자뿐만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더욱 더 호응하는 노동계급의 착취 방법, 그리고 그 가치보다 낮은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는 방법까지 다양했다. 소부르주아 선거 고객의 충성심을 보장하고 "사회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에 대한 "수요"를 지원하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돈의 홍수도 잊지 말아야 한다.(3)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이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이익을 해친다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의 조건을 결코 "개선"한 적이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는 이른바 말하는 노동 시장의 "개혁"을 통해 노동력 가치 이하의 임금 감소를 촉진하는 것 외에도 사회 서비스, 보건 및 연금(즉, 간접 임금과 지연 임금)을 대폭 삭감하여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연계된 전염병의 확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윤율 하락에 따른 구조적 위기 등으로 복지제도를 무참히 축소해 온 자본주의 국가 스스로 공동체 전체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임금노동자들의 상태는 대유행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강요해 온 생산 중단과 한계로 인해 악화하였다.

 

게다가, 이윤 때문에 헐떡이는 경제에 대해 자본주의 국가가 지원하는 부문에 대해 대가를 지불한 것은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였다.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먹여 살리는 잉여 가치의 원천인 노동계급은 이번에도 생활과 노동조건이 악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국가 “자선”에 대한 법안이 해결되는 방식이 이러하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자선은 "사회주의"나 일반적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사실, 공채와 사채는 자본주의 운영 메커니즘이 실패할 때 단지 잃어버리게 될 미래의 재화 생산에 대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마이클 로버츠도 지난 6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채택된 조치가 위기를 종식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부채가 늘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인정했다.(4)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관점에서 볼 때, 한편으로, 개혁주의가 조장하는 환상에 의해 나타나는 피해는 단지 일상 투쟁에서 계급 투쟁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그러한 신뢰는 노동계급의 자주적인 정치 조직을 약화시키고, 그로 인해 세계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전망을 약화시킨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평의회 건설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의 추정되는 복지를 가장한 국가의 개입은 심각한 체제 위기나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경제 부흥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를 안정시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것은 사회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주의 간 충돌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자본주의 국가 언론과 선전 공세가 제대로 봉사하였으며, 이것은 반드시 "후방"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만약 맑스와 엥겔스(5) 시대에 어떠한 환상이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들은 이제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이다. 1세기 이상 우리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의 개입주의가 어떻게 해서 강력한 반혁명 무기로 제공되어 왔는지를 보아왔다. 게다가, 그들의 시대에도, 맑스와 엥겔스는 페르디난드 라살레와 그의 초기 독일 사회민주주의 추종자들처럼 사회주의가 갑자기 그리고 설명할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통제 속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을 거칠게 비난했다.(6) 맑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썼듯이, 민주주의 국가 초당파(7)를 믿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혁명적 과업과 노동계급 내에서 이러한 신념의 확산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8)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경험하고 있는 반혁명 단계의 깊이와 계급에 뿌리를 내리는 혁명 정당을 건설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2020년 11월 21일

Gracchi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주>

 

(1) 「독일 이데올로기」를 보시오.

 

(2) 분명히, 그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와 함께 두말할 것도 없는 순전히 교훈적인 가설이었다.

 

(3) 게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수동성.

 

(4) 그는 그가 바라던 새로운 마샬 플랜이 이윤율 하락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로버츠의 “해결책”이 국가 자본주의(즉, “공공 소유”가 가치법칙 자체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Weekly Worker의 Modern Monetary Theory (MMT)에 대한 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MMT 지지자들이 맑스주의적인 정책 결론, 즉 공공 소유와 생산 계획을 통한 생산적 부문의 전용과 경제 가치의 법칙을 억제하거나 종료하는 '지배적인 수위'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제한 자금 창출을 통한 정부 지출 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weeklyworker.co.uk)

 

MMT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leftcom.org를 참조하시오.

 

(5) 무엇보다도 맑스와 엥겔스는 항상 자본가들이 단지 전형적인 "더블 브레스트 재킷을 입은 제철소 사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본의 좌파는 생산 수단의 소유권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착취 시스템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항상 무시해 왔다.

 

(6) 그들은 「반 뒤링」에 의해서 입증된 바와 같이 노동운동 내의 이러한 종류의 논쟁에 익숙했다.

 

(7) 번역자 주 – 공정한, 초당파

 

(8) 역자 주 – 두 가지 이상의 내용을 비교할 때 서로 다른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 변경이 필요하지만, 기본 사항은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말할 때 사용된다.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12-07/the-illusion-of-state-intervention-in-the-economy-the-eternal-anti-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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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교훈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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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선거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사멸해가는 자본주의 문명에 속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회와 내각은 그 자본주의 문명과 함께 사라질 겁니다.

 

우리는 노동자평의회 건설과 코뮤니즘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 「노동자 전함」, 1922년

 

 

나는 현 사회 체제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전복과 사회주의 연방의 즉각적인 수립을 지지합니다.

 

나는 모든 부르주아 선거 운동과 개혁 공약을 거부합니다.

 

노동자들은 선거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와 의회 제도를 파괴하기 위해 현장과 거리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 체제인 코뮤니즘으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가이 알드레드, 「노동자계급 유권자들에게」,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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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교훈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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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원칙으로부터 우리는 민주주의적 질서가 오랫동안 발전해 온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선동은 선거와 부르주아 기관에서 보이콧을 확대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선거 활동에 막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실천은 이중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활동이라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모든 힘을 빨아들여 당의 다른 모든 부분을 마비시킵니다. 

선거 활동을 수행하는 당 조직은 혁명에 필요한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활동에 맞는 조직의 성격과 뚜렷이 다른 매우 특수한 기술적 성격을 발전시킵니다. 당은 유권자들을 준비하고 동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여러 선거위원회로 쪼개집니다.

언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방식으로 선거를 활용할 수는 없습니다.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을 활용하는 것은 행동 방식 문제입니다. 선거 캠페인과 의회 연단을 활용하는 것은 부르주아 기관 문제입니다. 부르주아 기관은 노동자 소비에트 같은 프롤레타리아 기관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혁명 이후에 언론, 선전 등의 활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선거와 의회 연단에서도 선전을 수행할 수 있다.”라고들 합니다. 저는 거기에 약간의 유치한 주장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선거와 의회 연단에서 발언은 언론에 실리게 됩니다. 그 언론이 부르주아 신문이라면 모든 것이 왜곡될 것입니다. 그 언론이 우리 편 신문이라면 나중에 어차피 인쇄되어 나올 내용을 연단에서 발언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착취자에서 피착취자로 권력 이전은 그 뒤로 대의제 기구 변화를 가져옵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는 소비에트 체제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혁명적인 직접 행동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은폐하는 민주주의라는 낡은 가면을 찢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의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며, 이 관점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코뮤니스트당이 의회주의(선거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코뮤니스트 혁명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 행동을 요구합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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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교훈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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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코뮤니스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의회로 들어갈 겁니다.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내몰았던)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다시 지지받게 될 겁니다. 

코뮤니즘을 위해 건설하는 당 대신, 관성적으로 정당들을 조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애국주의자들 및 부르주아 분자들과의 의회주의적 타협이 다시금 등장할 것이며, 그로 인해 결국 서유럽에서 모든 혁명은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연설의 자유는 억압당할 것이고, 훌륭한 코뮤니스트들은 모두 추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발생했던 모든 관행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기회주의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입니다. 동지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 대열 외부에서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과 힘을 황폐화하는 기회주의가 다시 섞여 들어오는 것은 좌익이 너무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천 배 더 나쁠 것입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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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 다시 꺼내든 낡은 당 건설 노선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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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거나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수이지만,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를 실천한다는 세력도 일부 포함된다. 그들은 항상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 장악 이후까지 일관되게 노동자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지, 아니면 반대로 노동자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한국에는 사회주의/혁명 세력을 자임하면서 반(反)자본주의, 사회변혁, 노동해방, 사회주의자 등을 내걸고 노동자 운동에서 이른바 좌파 블록을 형성한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이 좌파 블록으로 모인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에서 온갖 폐해를 끼치며 기득권을 누려온 다수파 운동(이른바 자민통으로 지칭되는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반사작용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면 여전히 자기 운동의 최종목표와 노선을 명확히 하지 못한 운동의 퇴보에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쇠퇴기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개혁을 넘어선 혁명적 이행전략을 가진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투쟁에서는 사회주의와 무관한 실천만을 하면서도 급진적 구호나 그럴듯한 전술로 조합주의/노동자주의/선거주의 실천을 가리고 있다. 이른바 ‘좌파’의 정체성은 단지 다수파 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혁명적 기질과 줄서기로 드러낼 뿐이다.

 

이들 좌파 중 다수는 혁명적 이행전략인 노동자(평의회) 권력 창출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현실에서 혁명적 조직과 실천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시시때때로 전술을 바꾸면서 전략적 과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즉, 계급이 처해있는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장기적 전망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주체들의 혁명적 계급의식 획득과 자기 조직화라는 전략적 목표로 꾸준히 나아가지 않고, 단기적이고 정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전술을 바꾸는 것이다. 공동전선의 일종인 좌파 블록이 정치노선과 전략적 목표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파에 대한 상대적 반(反)정립으로 형성되는 경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더욱이 이들이 개량주의 세력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입당 전술, 노동자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고 혁명 세력과 함께한다는 환상을 유포 시켜, 오히려 개량주의자들의 본질을 가려주고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동맹은 자신들이 다수파를 장악하지 않는 한 이들과 함께하는 내내 개량주의 노선을 묵인하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깨고 나와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개량주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옹호하는 전술의 결말은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의 단절하는 시간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의 남발로 인한 이합집산과 분열의 반복은 노동자 대중에게 정치 운동의 신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 단결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급의 전위역할을 해야 한다는 착각과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자만에 빠져, 온갖 현장 투쟁에 개입하면서 투쟁의 목표와 원칙을 훼손하거나 계급의식과 자기조직화를 자신들에게 맞춰 인위적으로 재단해 왔다. 계급의식과 계급투쟁 발전에 목표를 두지 않고, 자기 정파(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면 정세에 조급하게 개입하는 운동이, 장기적 전망이나 운동의 본질에 접근하는 투쟁을 계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급의 전위란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위는 계급투쟁 과정에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을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우 길고 힘든 계급의식 발전 과정에서 (계급투쟁의 퇴조-상승의 모든 기간에)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고 (코뮤니스트) 혁명 강령을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방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신뢰와 영향력이 노동자계급 안에 깊이 뿌리 내려 주요한 투쟁의 중심에 설 때 비로소 계급의 전위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위(혁명조직)가 노동자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당(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혁명강령을 방어하는 집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자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 노동자 후보/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당 건설 경로에서도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적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해 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코뮤니스트 노동자가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이들은 강령적 실천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 조직화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조급한 정세 대응에만 매달리거나, 자기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면서 당 건설 운동을 지속해서 후퇴시켜왔다.

 

이제는 그것의 만회를 위해, ‘(사회주의/좌파 대선후보를 통한 당 건설’이라는 낡고 악취 나는 전술을 슬그머니 들고나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정치 노선이 불분명한 (오랜 전통의?) 의회주의 제도권 소수 정당과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포기한) 비제도권 소수 정당이 추진 중인 사회주의 대중정당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한 축은 9년 전에 선거주의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대선 투쟁(후보전술)을 통해 그리고 실패한 진보정당 운동과 야권연대에 대한 반(反)정립 운동을 통해 투쟁 동력과 당 건설 주체를 확보하여 당 건설을 할 수 있다는 거짓을 유포했다. 결국, 공동전선을 통한 단계론적 계급정당 건설 노선이 선거 전술과 혼합되어 타락하는 운동 세력의 유력한 생존전략이 되었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제대로 된 반성과 성찰도 없이 이들은 더욱 우경화하여 ‘사회주의 좌파 후보’ 간판을 내걸고 부르주아 제도권 정당으로 향하는 최악의 생존 전략을 채택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이제라도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으로 전향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신의며, 운동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이들이 향하고 있는 제도권 정당에 대한 비판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가능한 최고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 자본은 ... 그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확립하는데,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 또는 어떤 정당의 변화도 이를 흔들 수 없다."(레닌, 「국가와 혁명」)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정치 무대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매스미디어부터 시작하여 학교, 종교 제도로 모양 짓는 도구들을 통제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제도적 결정은 자본가들의 경제적 필요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의 관리자들은 지배계급의 대표들이다.

 

이러한 제도들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환상이며, 이 제도들이 진실로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보유한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수단인 한 그러하다.

 

다양한 제도권 정당들은 지배하는 자와 그 반대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기만적인 게임을 수행한다. ‘당’끼리 대립 뒤에는 종종 부르주아지의 서로 다른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을 뿐이거나, 더 단순하게는 더 안락한 제도권 의석에 앉으려는 서로 다른 정치인들 간의 무의미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에도 정당은 관리에 있어서 환상에 불과한 차이를 제안할 뿐이다: 보다 인간적인, 공정한, 더욱 ‘민주적인’ 얼굴의 자본주의 등.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자칭 코뮤니스트 정당들 또한 진정한 혁명적 강령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은 노동자 투쟁을 위한 제도적인 경로라는 환상만을 확산시킬 뿐이며, 대부분 언제나 (이른바 ‘급진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라도) 지역 기관들에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선거에서 대중 투표를 목표로,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이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급투쟁에 진공상태는 없으며, 오히려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계급투쟁의 깊이는 당 건설의 주체를 담보해주고, 계급의식의 발전은 강령으로 표현된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진공상태에서의 당 건설과 같다. 더욱이 진공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진흙탕(부르주아 선거판)에 빠져버리는 것은, 그동안 진공상태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혁명의 승리는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근접했을 때 현실화한다. 이때 당과 계급은 차이는 가장 가까워지며,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 프롤레타리아 대중정당으로 현실화한다. 따라서 계급의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혼란스러운 일상시기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주의 당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강령에 입각하지 않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가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계급의 일을 대신하거나 관료적으로 관리하는 대리주의 당으로 향하게 된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적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후퇴할 수도 있기에, 노동자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와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혁명당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하고, 미래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혁명당의 과업이다. 혁명가/코뮤니스트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일반화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혁명가들의 개입은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설정하고 혁명적 무장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이 모든 투쟁의 순간에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저항과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혁명가들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반드시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세계혁명을 위해 세계적 수준에서 개입하여 전 세계의 혁명진영을 재규합하는 혁명적 인터내셔널 건설의 과정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선거가 아닌 계급전쟁을 실천하는 정당, 부르주아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한 계급 정당이다. 자본주의 쇠퇴기, 끝 모를 위기의 시기, 노동자계급에 필요한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혁명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임을 명심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편집자 주>

이 글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실렸던 글이다. ‘공동전선’, ‘당 건설’에 대한 문제의식은 현재의 정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보완하여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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