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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짧은 생각이지만 아직 머리 속은 복잡하다.

결혼도 연애도 매매(와 거래)로 이뤄지고 있거늘,

성까지 상품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고결한 윤리 따위 고수할 생각은 없으나,

비성년들이 직접 겪고 있는 변질된 혹은 더 가혹해진 성매매 현장은,

차별과 폭력에 대한 감성이 어느 정도 훈련되어 있는 나로서 여전히 마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1%를 제외한 나머지 99%가 그저그렇게 산다면, 그 99% 안에는 얼마나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는가.

누군가에게 기대어 빼앗거나 또는 빼앗기며 사는 일상, 그 버라이어티함을 형성하는 다양한 축들이 있다면, '성'을 축으로 두고 나뉘는 사회적 계급화에 맞선 운동들은 나름의 역사와 한계와 또 과제들을 남겨 왔을 것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반성매매운동은 가족주의와 결합하여, 성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피해자화하고 주체의 목소리들을 가두는 방식이었다고 보는 평가가 있다. 그렇지만 성매매 '피해'를 호소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쉼을 제공하고 지지자가 되어주며, 긴급한 심리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운동들을 해 온 것은 '피해자화'를 주장했던 이들 여성단체들이기도 했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활용해 적극적 행위자로서 성을 파는 주체로 볼 수는 없는 것인지, 낙인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자 담론과 이에 따른 조직화가 왜 그 여성들에게 힘을 줄 수 없는 것인지, 결국 이래도 저래도 전체 '여성'들을, 남성들의 성적 대상화로 전락하게 한다는 논리는 변화하지 않는 것인지.....

피해와 고통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 그렇지만 여전히 숨죽이며 그러한 고통들을 말하지 못하는, 특히 10대 여성들이 많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에서 시작되는 성노동자 운동은 왜 조직되지 않는 것인지, 바꿔 말하면 일각에서 조직되는 성노동자 운동은 왜 이들을 '포괄'하고 있지 않은 것인지....

 

이러한 물음들을 갖게 되고, 또 던지는 것은 여전히 이 사회는 남성 중심의 성담론이 지배하는 사회임에도, 그 속에서 '성매매'가 단선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하나의 시각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한 끝 차이라 생각하지만,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이의 긴장이 제일 팽팽한 지점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가출한 10대들이 2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임노동현장에서 노동하기 어려운, 노동 자체가 매우 열악한 10대들의 상황, 그 속에서 청소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은 매우 제한적이다. 10대 청소녀들의 성매매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저자는 10년 전에는 인신 구속이 없었고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개인형 성매매였다면, 현재는 포주가 개입된 산업형 성매매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손쉽게 채팅으로 만나 성매매가 이뤄지고, 친구나 동료들이 포주가 되어 결국 그 사회 안에서 위계화되는 것은 젠더나 연령면에서 '약자'인 10대 청소녀들에게 매우 가혹한 굴레였다 . 

 

 

 

얼핏 보면 '주체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듯한 단어인 '조건' 은 하기 싫은 성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막 역할을 해주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소위 '조건'을 내세운다 하여도, 청소녀들은 쉽게 임신이 되고 폭력에 노출된다. 경제력이 있는 남성들이 여성을 구매하는 관계, 철저히 이 관계로 들어갔을 때에 대부분 청소녀들은 남성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건은 걸어도, 콘돔섹스를 의무화하고 있지는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실제 책 속에서는 조건을 통해 임신한 친구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며 그들 중 대부분은 피임의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협상이 통하지 않는 조건은, 결국 성구매자들에게 어떠한 제약도 주지 않게 되는 것이고, 10대 청소녀들이 폭력과 임신의 공포에서 한 치도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성구매자들에게 저항했을 때 10대 여성들에게 날아오는 폭력은 직접적으로 몸에 위해를 가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쉽게 '강간'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사가 달려 있는 중대한 일들을,  '보호'라 말하는 포주의 착취 속에서 매일매일 행하고 있는 10대여성들....성매매 특별법에 따르면 이들은 피해자여야 한다. 하지만 법이 시행되는 현장 곳곳에서, 이들은 또 다시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성매매 특별법이 정기적으로 성매매 집결지를 쳐내는 방식이었으나, 실제 현장에서 성을 구매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과 단속이 강화되고 있지는 않았다. 보호관찰 한답시고 성희롱을 해가며 수치심을 주는 경찰들의 모습은 뭐, 안 봐도 훤하다. 결국 성매매 특별법 속에 담긴 '피해자'는 없다고 봐야 한다. 성구매 횟수가 훨씬 더 잦을 경찰이나 관료들이 '가부장적 사회의 피해자'로서 10대 여성들을 보호하고 존중할 리 없었다. 쉽게 자기 성을 파는 헤픈 년이라는 낙인과 범죄자, 여전히 달아야 하는 그 꼬리표를 지울 수 있는 힘은 경찰 따위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경찰들이 성구매 남성노릇을 하며 10대 여성들을 적발하는 행태, 별다른 가치판단 없이 이러한 과정으로 보호관찰되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역할로써 국한되는 저자의 활동들은 솔직히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화도 났다. 하지만 이런 통로가 아니었으면 만나기 어려웠으리라....상처받은 아이들의 치유를 위해 누구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견디며, 아이들을 임파워링했을 저자의 활동들은 내가 평가하기 어려운 대단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졌던 강박은 '타자화'였다.

타자화, 섹슈얼리티에 대한 거래와 매매가 여성의 일상에서 나의 연애와 결혼은, 직업은, 이 아이들과 다른가? 그렇지 않다, 라고 수없이 되뇌였다. 아이들이 겪고 있는 그 일상의 참혹함에 대해 애써 침착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지독한 성병 때문에 물을 틀어놓고 소변을 봐야 하는 어떤 아이의 이야기 속에서,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드는 건 나는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을 매개로 원치 않는 섹스를 하며 내 몸에 많은 위협을 '스스로' 가해야 하는 직업, 아마도 이것이 성을 파는 청소녀들에게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상이라 한다면, 당장 '성매매' 일반에 대해 강하게 거부하거나 반대해야 맞지 않겠는가. 아무리 삶의 높낮이가 없다고 해도, 

내면에는 뿌리 깊은 구별짓기를 나도 하고 있다는 것, 인정해야 했다. '못해도 그 아이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다르다. 그런 참혹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고, 그렇게 살 생각도 없다. 나와 다른, 아주 어렵고 딱한 아이의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빈곤하다면, 내가 사는 게 힘들어 가출을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먹고 살아야 한다면, 성매매가 아닌 다른 통로가 있었을까. 일찍 성매매로 유입되는 아이들은 소비 체계도 다르게 갖고 있다. 없는 자원에 빈곤한 관계들, 이를 '돈'으로 매우려는 10대들의 심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큰 돈을 벌어도, 금세 쓰고, 또 이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시 성매매로 유입된다. 몸을 대주는 일, 맞는 일, 돈 떼이는 일이 생활이 되다보면 자기 존중감도 없어진다. 

 

이들을 보면서 요즘 한창 활보중인, 10대 활동가들이 생각났다. 내가 만난 10대 활동가들은 참 자존감이 높았다. 

 

왜 10대인가, 왜 10대들의 운동이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져본 것도 최근의 일인 듯 한데 다층적인 억압에 저항하는 10대들과, 그 구조에 순응하며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찾는 10대들....10대들이 누려야 할 성적 권리를 말하지 않는 사회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들로 이에 정면도전하는 활동가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문제로 교육청 점거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충격은 청소년들을 임신시키려고 작정했네, 항문성교를 가르치려 하네 등등의 선동으로 똘끼 가득한 인간들이 도배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던 것이, 바로 10대 당사자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책을 보면서 이 활동가들이 성을 파는 십대 여성들을 만날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이 자원으로 형성되는 방식과 소비되는 방식에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그렇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활용되는 방식은 자발적 선택 vs 피해자의 구도로 압축되거나, 목적과 의도 이것이 발현된 관계, 여러 사회적 맥락들을 포괄하지 않은 채 표현의 자유나 성에 대한 엄숙주의, 과도한 억압 정도로 무시되기 일쑤였다. 나아간 얘기지만, 요즘 여러 노출논란과 나꼼수 비키니 시위에서부터(왜 정봉주의 성욕을 채워주기 위해 하는 것과 모피반대를 위해 하는 게 동급으로 취급되는 건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음-:)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나꼼수 동조자들과 언론들이 부러 섞고 있다. 이 진흙탕 속에서 다른 맥락들을 짚는 것, 논란의 미세한 결들을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솔직히 입 열기 싫기도 하다. (어떠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나꼼수 띄워주기에 동조하는 것 같고, 뭐 진보 마초, 남성 운동가들의 가부장성...진짜 이딴 이야기하는 거 이제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남은 건 다만 조롱과 냉소일 뿐!) 

 

 

섹슈얼리티에 대한 권리를 다른 곳에서, 다른 목소리로 '함께'주장할 수는 없는 걸까. 

 '조금 다른 아이들'끼리의 만남을 상상해보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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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01:55 2012/02/05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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