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넷 첫화면으로 블로그홈 | 메일 | 공동체 로그인내정보
남십자성
http://blog.jinbo.net/redgadfly

양새슬
남십자성
[삶창65호] 백제인처럼 서울 살아내기, 석촌동 백제 고분군

백제인처럼 서울 살아내기, 석촌동 백제 고분군

 

서울 답사, 서울 발굴

 
쓰레기 고고학(garbageology)이라는 것이 있다. 쓰레기를 뜻하는 가비지(garbage)와 고고학을 뜻하는 아케올로지(archaeology)를 합성한 말로 쓰레기의 양과 종류를 조사해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조성된 난지도의 그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파들어가보면 다양한 문화층이 나올 것이다. 1977년부터 1993년 난지도가 폐쇄되기까지의 쓰레기는 전복이나 뒤바뀜 없이 아마도 문화층이 쌓였을 텐데, 7~90년대의 쓰레기가 어떻게 변모하는지, 이를테면 연탄 쓰레기가 언제부터 줄어들고 그래서 당시 에너지 소비 형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혹은 가장 많이 나오는 음식 포장지는 무엇인지를 통해 어떤 식품을 많이 소비했는지 등을 추정해볼 수 있다는 거다.
쓰레기고고학이 현대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양의 배설이 이루어지는 도시와 관련이 있다. 오래되고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일수록 그 지층에는 다양한 문화층이 쌓여 있다. 도시란 다양한 기능과 위계를 갖는 기관과 공간이 집적되어 있는 거대한 반도체 같기도 하지만, 시간이란 변수를 도입해보자면 매우 깊은 패총과 같아서 그 깊이에 따라 시간과 역사가 스며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몇천 년이 넘는 패총이 쌓여 있는 곳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서울엔 역사 유적이 즐비하다. 하지만 서울엔 새로운 문명이 들어섰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서울엔 수많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빌딩숲은 서울의 기억과 서울의 역사를 파묻어 버린다. 근대냐 탈근대냐가 회자되는 작금에 서울에서 답사하기란 일종의 발굴과도 같은 일, 빌딩숲 사이 잘 보이지도 않는 경희궁이나 덕수궁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 이전의 유적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잠실벌도 그중 하나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그 중심지는 바로 잠실 일대였다. 석촌동에는 백제의 종묘라 할 수 있는 무덤들이 즐비했으니 오늘날 그곳은 석촌동 백제고분군이라고 부른다. 서울을 파내려가다가 보면 제법 두터운 문화층을 발굴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백제다. 그리고 그 발굴이 끝나면 모든 발굴이 그렇듯이 다른 눈으로 서울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거대한 침묵, 백제식 피라미드

 
우리가 무덤 하면 떠올리는 건 흙으로 둥글게 봉분을 얹고 떼를 입힌 봉토분이다. 천년 고도 경주를 가면 시내 곳곳에 초록 잔디를 입힌 커다란 고분들이 마치 백악기의 브라키오사우루스처럼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 석촌동에는 돌로 쌓은 무덤, 적석총이 있다. 그 광경은 우리의 상식을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파격이지만, 무덤 양식은 건축과 달라서 매우 보수적인 속성을 가진지라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인들에게는 낯익은 오랜 풍습이었을 터다.

 

캡션 : 석촌동 내원외방형 적석총 모습. 안은 둥글고 밖은 네모난 모양으로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양의 우주관이 반영되어 있다.

 
석촌동 백제고분은 현재 8기가 남아 있지만 일제시대였던 1916년 조사에 따르면 89기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현재 제대로 복원된 건 2, 3, 4호분인 적석총과 흙으로 봉분을 입힌 5호분뿐이다. 나머지는 바닥에 돌만 쌓아놓은, 그야말로 흔적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석촌동 고분군에는 여러 가지 무덤 양식이 공존한다. 구덩이 무덤인 토광묘, 항아리 무덤인 옹관묘도 있다. 물론 적석총이 가장 특징적이나 평민과 일반 관리의 무덤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수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적석총은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돌을 모아 일종의 네모난 피라미드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석촌동에 있는 적석총은 그만큼 웅장하다. 봉토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과묵한 힘이 있다. 특히 석촌동 3호분은 그 규모와 크기가 놀랍다.

 

캡션 : 석촌동 3호분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웅장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3호분은 3단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전체 4.5m로 원래는 한두 단 정도 더 있어 그 높이가 더 높았을 거라고 추정된다. 가장 아랫단인 1단은 동서 50.8m, 남북 48.4m에 달한다. 이는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만주 퉁거우의 장군총이 하단 가로세로 30m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 무덤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석촌동 3호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학계에서는 백제 건국세력이 3세기까지는 임진강 일대를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3세기 중엽경에는 한강을 건너 이 지역에 몽촌토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의 선주민과 연합해 백제를 건설했다고 본다. 그들은 새로이 풍납토성을 건설하면서 하남위례성을 중심으로 예성강, 임진강, 남한강, 안성천을 연결하고 철광으로 유명한 청주 등 충청도 지역과 원주 등 한강 상류 지역을 편입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고고학 자료에 근거해서 보자면 한성 백제시대의 근거지는 바로 잠실벌이었던 셈이다. 그 중심에 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이 있는데 이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재위 346∼375)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가장 강력하다. 1986년 서울대학교 발굴 조사에 의하면 중국 동진시대의 사이호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보여주는 4세기 후반의 유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에서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옥연석(玉硏石)이 발굴되기도 했다. 옥연석은 곡옥(曲玉)을 만드는 원석을 깨뜨린 후 모서리를 죽이고 표면을 부드럽게 만드는 도구로서 고대 옥제품 수입설을 뒤엎는 귀중한 유물이다.

 
근초고왕은 백제에서 가장 영토 확장에 힘쓴 왕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초기 한성백제 시대의 백제 왕권을 확립한 왕이다.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은 마한을 정복해 영산강 유역까지 그 세력권을 넓히고 가야와 일본까지 세력을 미쳤다. 북으로 눈을 돌린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지금의 황해도 백천에서 격퇴하고 황해도 신계까지 영토를 넓히고 371년에는 평양성을 공격,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백제를 일약 동북아 최강국의 하나로 성장시킨다.

 
석촌동 백제고분군은 1970년대 초 서울시당국의 잠실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해 유적이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학계에서는 74년부터 긴급 구제발굴을 실시했고 백제시대의 초기 유적임이 확인되고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이 일대에 광범하게 산포되어 있는 백제시대 초기 유적을 종합적으로 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83년, 84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석촌동 백제고분군을 가로질러 나기로 되어 있던 도로는 다행히 고분군 아래 지하차도를 파서 통과했다. 지금도 고분군을 둘러싼 담장을 돌다 보면 그 지하차도를 만날 수 있어 만약 이러한 조사 없이 그대로 고분군을 관통했더라면 어땠을지 아찔하기만 하다.

 

서울에 백제는 없다

 
고대의 시간 속에서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한강 유역이 고구려, 신라, 백제의 격전지였고 이곳을 장악한 국가가 크게 흥했다는 역사 시간의 가르침은 뇌리에 박혔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서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조선’의 위로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조선의 문화층을 걷어내면 거기엔 백제의 문화층이나 강 건너편 아차산성의 고구려 문화층이 출토된다. 서울은 복수다. 조선왕조 수도 서울만이 아닌 ‘여러 서울’이 시간의 좌표 위에 존재했었다. 눈을 감고 백제인의 서울을 떠올려본다.

 
춥고 긴 겨울은 북방의 유이민에게 더욱 혹독했을 터다. 허나 제 땅 한 평 갖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 겨울보다 더 큰 시련은 발뒤꿈치를 따라오는 말발굽 소리, 목구멍이 찢어져라 먹을 것을 보채는 아이의 울음소리였을 게다. 해를 바라보고 걷는 남행, 그들이 도달한 드넓은 평지, 거기엔 바다 같이 넓은 강이 있어 농사짓기 좋았다. 북에서 내려올 적군을 생각하면 강을 성벽삼아 강 이남에 살아야 했다.

 
이 남쪽 나라엔 이미 살던 원주민이 있었다. 백제인은 이들을 완력과 힘으로 몰아내지 않았다. 대신 구슬리고 어르며 공존과 상생의 길을 택했다. 한 곳에 모여 있는 석촌동 백제고분군의 다양한 무덤 양식이 이를 보여준다. 백제식 적석총, 고구려식 적석총, 토광묘, 봉토분 등 여러 가지이고 인근 방이동의 고분군 역시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있다. 요컨대 백제인처럼 다양한 무덤에 묻혔던 이들도 없다. 백제 무덤 양식은 여느 나라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다양하다.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지닌 집단을 인정하고 섣불리 그 풍습을 통일시키기보다 용인하고 포용했던 백제다. 적석목곽분 일색인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 호우총 등과 비교해보면 백제의 힘이 바로 이 공존과 상생, 여유와 관용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이란 하늘로 돌아가는 일, 그 옵션이 다양했다는 것은 땅에서의 삶 역시 다양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재물이 풍요로웠던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풍요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건 한강의 넉넉한 수량, 넓은 들, 야트막한 언덕과 산, 기름진 땅을 닮아 있다.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백제는 서울에서 살았다. 살 수만 있다면 서울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었을 것이다. 백제사에서 한성시대가 차지하는 시간은 400여 년에 이를 정도로 길다. 백제 하면 전라도와 충청도를 떠올리는 우리의 편협함은 사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서울을 조선의 땅으로만 남겨둘 수 없다. 왕의 명령으로 흙을 덮고 땅을 파서 원주민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고 양반을 위한 새 도시 서울을 세웠던 조선 초기의 ‘수도 이전 정책’과 달리 백제인은 한강 유역에 있던 이들과 어울려 살았다. 잠실 인근에 즐비한 백제의 유적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뿌리의 깊이가 만만치 않음을 드러낸다.

 
서울에서 백제를 찾아 발품을 팔아 짚어 다니는 일은 고토(古土) 회복의 쇼비니즘적 꿈을 찾아주는 일도 아니고, 시원(始原)을 찾는 허망한 종주도 아니다. 그건 서울로 하여금 기억을 더듬어주는 일이다. 그 기억을 더듬어 서울에서 어떻게 백제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다. 서울에서 백제인처럼 사는 건 가능할까.

 

새마을과 신도시, 그리고 뉴타운

 


캡션 : 아현동의 아침. 아현동은 우리말로 애오개 또는 애우개라 한다. 고개의 생김이 엄마 등에 업힌 아이의 모습을 닮았다고 이렇게 불렀다 한다. 엄마들의 출근길이 분주하다.

 
잘 살아 보자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말에 갇히면 ‘원칙적 찬성’에서부터 게임은 시작된다. 새마을운동도 그랬을 거다. 조상님이 묻힌 선산을 가로질러 신작로를 내는 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못 본다며 펄펄 뛰신 마을의 어르신도 있었을 터이지만, 저항과 반발도 추상같은 나랏님의 결심 앞에 모기 소리만큼도 전달되지 않았을 게다. ‘원칙적 찬성’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정책 앞에서 뭐 뾰족한 수가 있었으랴. 농촌은 국가에 의해 새롭게 구획됐고 남아도는 유휴 노동력은 땅에서 뿌리 뽑혀 서울을 향했을 거다.

 
이촌향도라 이름붙인 이 현상은 중등교육 시절 근대화의 한 표징으로 맥락화됐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은 가난한 사람이 아는 법. 향도했던 가난한 이들은 이른바 ‘판잣집’이 위태롭게 선 ‘새마을’인 ‘달동네’에서 그 경사도만큼이나 위태로운 삶을 이어갔다. 허나 지구의 법도는 달처럼 둥글지가 않았고 ‘철거깡패’의 발길질은 무도하고 잔혹했다. 잘 살아 보자고 달을 향해 빌고 또 빌어도 나랏님의 이마가 달 보다 더 강한 빛을 내던 시절, 올림픽 팡파레와 함께 철거민은 쫓겨났다. 상계동, 도화동, 돈암동, 사당동, 금호동, 목동, 신림동, 동소문동, 행당동, 서초동, 행동… 서울은 전쟁터였다.

 
도심 내부에 더 이상 짓부술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신도시는 변두리에서부터 성벽처럼 축조됐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는 일산과 분당에 바다 모래 섞은 신도시를 짓는 것에서부터 열렸다. 더 이상 달동네를 세울 빈 땅은 서울에 없었고 변두리 도시는 마천루 같은 고층아파트로 채워졌다. 전략을 바꿔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새마을을 만들지 않았고 헌 마을에 스며들었다. 지하방은 그네들의 참호였고 옥탑방은 그네들의 망루였다. 헌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마을이 더 헌 것으로 되는 만큼 퇴락했다. 그래도 헌 마을은 그런대로 사람들을 감싸줬고 그렇게 세월의 고비를 넘어가는 듯했다.

 
다시, 잘 살아 보자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도시균형발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글로벌 시대의 ‘뉴타운’은 ‘원칙적 찬성’ 표를 기반으로 추진되었다. 허나 빛 좋은 개살구다. 가난한 이들도 모처럼 목돈을 만졌으나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다. 서울 전역 25개소에서 추진되는 뉴타운은 모두 헌 마을이고 그 헌 마을 말고 이들이 발붙일 곳은 없다. 수중에 들어온 목돈 보다 더 뛴 게 땅값이다. 큰 평수 아파트는 2억이 떨어졌네, 3억이 떨어졌네 하는 보도가 나와도 그건 애초부터 상관없던 일, 이들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곳은 없다.

 
30여 년 서울 빈민의 연대기가 대체로 이러하다. 그동안 서울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풍상을 겪었다. 그 결과 사람은 지치고 도시는 성장한다. 가장 살기 좋았던 땅, 북방의 이주민이 정착했던 따뜻한 남녘땅 서울은 이제 사람이 살기에 가장 혹독한 북방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서울은 가난한 이들에게 여름에도 겨울이다.

 
새 정부와 새 시 당국의 도시정책은 조선 초기 정도전의 그것과 닮아 있다. 도성 밖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고 구획 정리해 양반들을 배치한 삼봉 정도전. 그래도 동대문 밖 창신동과 서대문 밖 애오개에는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토굴에 거적으로 바람을 막고 살지언정 내쫓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가난한 이들 모두를 몰아내고 있다.

 
주택보급률 108%인 나라에서 몸 누일 공간이 없어 유랑걸식 하듯 남쪽을 바라보고 걸어야 할 사람들. 유이민이 따로 없다. 백제인처럼 발견할 수 있는 땅은 어디에 있을까. 무덤이 달라도 황천길은 하나이듯 사는 집이 달라도 종국에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게 삶일진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서로 담벽을 마주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백제인처럼 서울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오늘도 뉴타운 예정지 집집마다 빨간 페인트로 ‘나가라’, ‘공가’, ‘부수자!’가 써갈겨지고 모두가 집자리로 혈안이 되어 있는데, 서울살이의 고단함은 언덕을 타는 마을버스 바퀴처럼 힘겹다. 허나 삶이 무덤보다 어두울지라도 그 삶의 힘은 역사만큼 깊고 난지도 쓰레기 산의 높이만큼 높다. 궁극적으로 철거될 삶은 존재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의 삶은 철거될 수 없다. 철거되는 것은 흔적일 뿐, 그 흔적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서울 빈민사가 그렇듯이 우린 다시 새 삶을 이어갈 것이고 그것이 도시를 다시금 백제인의 그것처럼 다양하게 꽃피울 것이다. 도시란 세련된 곳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헌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백제인처럼 살아내기, 그게 우리가 만드는 새마을, 우리가 건설하는 신도시의 방식이다. 새 삶은 헌 마을에서! 이것이 이 시대 우리의 슬로건이다.

트랙백(0)   덧글(0)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redgadfly/?pid=40

새마을과 뉴타운

 

골목 멀리 사다리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지난 가을 이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현동도 이른바 '뉴타운'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단다.

 

 

마을이 뉴타운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비워야 한다.' 집집마다 하나씩 시뻘건 페인트로 '공가'라고 써갈겨진다. 처음엔 한 집, 두 집 그러다가 이제 길 하나를 면하고 있는 모든 집들에 피칠을 했다. 무슨 무속신앙 비슷하다.

 

 

가을 내내 아현3구역은 집이 비어졌다. 2구역에 사는 나로서는 점점 '뉴타운'이 내 문제로 다가오고 걱정이 산더미다. 지난 봄, 주인집은 2000만 원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난 길길이 날뛰며 '임대차보호법'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집 할머니를 을러댔다. 난 내가 약자인 줄은 정말 몰랐다. 철 없는 것. 부동산을 들러 사장에게 귀동냥을 한 결과, 내가 목소리를 높일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부동산 사장 왈, "어쩔 수 없어요. 법이 뭐 우리랑 상관 있나요. 그냥 1천만 원 올려준다는 선에서 쇼부 보세요."

 

아현3구역에서 이사 나온 사람들은 이주비를 손에 쥐었다. 몇백만 원씩 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으로 갈 곳은 없다. 그래서 옆동네인 우리 동네 2구역으로 이사를 온다. 그래서 주인집들마다 '기회다!' 하며 2000만 원씩 올릴 것을 요구했다. 몇백 쥐어봐야 소용 없는 게 이런 거다. 근데 또 난 그 몇백이라도 받고 나가려고 기어코 아현동을 고수한다. 몇백 있어봤자 갈 곳이 없는데 없으면 더더욱 갈 곳이 없을 거 아닌가.

 

노회찬이 선거에서 떨어진 노원구의 심리 메커니즘도 그러할 것이다. 그게 어리석은 줄 누가 모르겠는가. 어리석어도 그 몇백, 몇십이라도 손에 쥐어야 내돈이 되고 그 돈이라도 있어야 조금이라도 덜 밀려날 수 있다. 우린 그런 식으로 뉴타운의 노예, 새마을의 노예가 된다.

 

 

골목을 가로막고 선 이 차는 도대체 이사를 가자는 것인가, 말자는 것인가. 출근길과 이삿길은 겹친다. 하루 종일 동네에는 사다리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그 떠들썩하던 아현시장도 요즘은 눈에 띄게 퇴락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 아현동, 그 아현동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갈까.

 

 

전봇대, 담벼락 할 것 없이 여백이 있기만 하면 '이삿짐 센터' 전화번호 광고들이 뒤덮는다. 저 골목길은 내가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지만 늘 저 길을 지나치며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2-30년대 지어진 걸로 보이는 한옥과 골목이 그려내는 곡선이 예뻤으나 뉴타운의 직선에 그 자리를 내줄 것이다. 신작로를 내주고 사라진 새마을 시대의 구불구불한 논두렁 밭두렁처럼.

 

 

버려진 집들이 늘어감에 따라 길에 내앉은 가구들도 늘어만 간다. 한때 아이의 배냇저고리와 언니의 수줍은 속옷과 아버지의 구멍난 '난닝구', 어머니의 옆을 튼 티가 함께 담겼을 옷장도 거리에 내앉아 떠나는 주인들을 구경한다. 용도폐기된 것이 가구만일까.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어디 버려진 가구 뿐이겠는가. 가구가 버려지고 건물이 주저앉으면 거기에 얽혀 있던 한 식구가 질박하게 이어갔던 그 시절의 기억도 다 사라지고 만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세입자 주거이전비 및 영업손실보상금을 접수받는다는 플래카드. 빨리 먹고 떨어지라는 말을 서비스 정신으로 포장하면 저렇게 된다. 급한 게 우리랴. 재개발 업자들이지. 그래도 그거라도 빨리 받아 쥐고 가뜩이나 뛴 강북 전월세 집을 알아봐야만 한다. 내가 먼저 차지하지 않으면 내 이웃이 차지할 것이니, 이웃 보다 먼저 남은 매물을 차지해야겠다. 춥고 긴 겨울이 앞에 있다. 정녕 거리에 내앉고 싶지 않는다면 어서 서둘러라. 뭐 그런저런 말들을 플래카드는 살랑거리며 포효한다.

 

 

가게를 비워줘야 하는 문방구 주인네는 다급하다. '뉴타운 세일'이라 써붙였지만 좀체 물건이 나가지 않는다. 동네 서점도 '뉴타운 세일', 동네 화장품 가게도 '뉴타운 세일'이다. 정말 싸게 팔려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박정희가 죽었을 때 난 일곱 살이었다. 난 더 이상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라는 노래를 듣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박정희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뉴스를 듣지 않아도 됐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곧 전두환이 등장하고 '땡전뉴스'는 계속되었고 새마을중앙회장은 대통령의 동생이 맡았다. 새벽 골목을 부수듯이 울려퍼지던 청소차의 노랫소리도 계속됐다.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바톤을 이어주던 92년 울산 염포동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청소차가 오면 그 노랫소리가 탱크 소리처럼 울려퍼졌고 허겁지겁 일어나 쓰레기를 싣고 맨발로 튀어나가야 했다. 신자유주의 탓인지 뭔지 그 '새마을'은 '뉴타운'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골 영감들이 박정희를 그리워하며 새마을운동을 들먹일 때, 그 새마을운동은 모두가 잘 사는 마을, 배고픔을 면한 마을, 옛 것을 부수고 새것을 세우는 건설적인 마을을 만들자는 것으로 얘기되어진다. 뉴타운도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 같은 논리에 별 저항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공모'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에는 사람들도 절박한 것이다. 다 뛰는데 그럼 어쩌란 것이냐. 80년대 철거민처럼 싸우란 것인가. 이제 그렇게 싸울 수도 없다.

 

요컨대 새마을운동과 뉴타운은 엔클로저가 아니었던가. 엔클로저가 15세기 혹은 18세기에만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구획 새로 하기, 그건 항구적으로 반복적이다. 변두리 인생들에겐 쟤네들이 새로 구획하는 게토를 향해 늘 짐을 싸야만 하고 거기엔 비슷비슷한 빈민들이 또 질기고도 질긴 삶을 엮어가고 있을 거다. 근데 참으로 이제 숨어들 게토조차 보이지 않는 서울이다.

트랙백(0)   덧글(1)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redgadfly/?pid=39

노동자도시 울산에서 커피를 찾아서

노동자도시 울산에서 커피를 찾아서
 


다방커피의 비밀

‘다방커피’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커피 음용 방식을 언어적 경제성에 따라 한마디로 축약한 말이다. 만약 이 단어가 없었다면 “커피 어떻게 타줘?”라고 물었을 때 “난 말이야…”로 시작해 한참을 설명해야 한다. 복잡하고 피곤하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아마 그 긴 설명에 뒤이은 대답은 “니가 타먹어!”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관철된 언어적 경제성 원리. 한마디면 된다. “난, 다방커피”.

‘다방커피’를 ‘자판기 버전’으로 하자면 “설탕프림커피”다. 다방커피를 구성하는 3요소를 나열한 게 커피의 이름인 셈이다. 기묘한 작명법이다. 물론 그 구성요소가 단 3개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런 작명법이 가능한 거다. 예컨대 “작약 숙지황 황기 당귀 천궁 계피 감초 생강 대추”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간단히 줄여서 “쌍화탕”이라고 부르지만, “설탕프림커피”라 하는 고작 여섯 글자 정도의 이름은 우리 인내심의 한계 혹은 기억력의 용량의 한도치 내에 들기에 이같은 작명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방커피’ 혹은 ‘설탕프림커피’에는 한국인의 커피 음용문화의 비밀이 숨어 있다. 우선 그 구성요소가 세 개다. 커피, 설탕, 프림. 그리고 여기에는 맥스웰, 맥심, 테이스터스 초이스냐의 구분을 불문한다면 ‘인스턴트 커피’라는 대전제가 있다. 또 커피, 설탕, 프림의 비율이 대개 2:2:2이고 그걸 베이스로 하여 기호에 따라 가감하고 취향과 시대에 따라 계란을 넣기도 하였다.

이 한국인의 커피 음용 비밀은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우선 남한에 사는 전 한국인의 거의 90% 이상이 인스턴트 커피를 마신다는 것, 그것도 거의 비슷한 비율로 커피를 마신다는 것, 우유도 아닌 프리마라는 정체불명의 화학첨가물을 넣어 마신다는 것, 설탕을 넣어 달착지근하게 마신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 비밀에서 가장 핵심은 3가지 요소의 비율, ‘설탕’이다. ‘설탕’이 ‘커피맛’을 죽였고 못 느끼게 만들었다. 아무튼 ‘기호’란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해야 ‘기호’지, 90% 넘는 사람들이 한결 같다면 그건 이미 ‘몰기호’다. 한국인의 커피문화는 한마디로 몰기호적 기호, 일치단결한 기호를 가졌다, 되겠다.

많은 얘기, 즉 왜 이렇게 대동단결의 혀감각을 가지게 되었나 하는 역사적 연원이나,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인스턴트 커피 소비국 뭐 이런 얘기들을 접어두고 얘기를 빠르게 전개시켜가자면, “어쨌든 우리 입맛은 그러했다”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서 ‘스타벅스’나 ‘커피 빈 & 티 리프’와 같은 세계적인 커피 프랜차이즈 업체가 한국에 상륙해 명동 한복판 최고 땅값을 갱신해갈 때조차 한국인은 ‘다방커피’인 인스턴트 커피를 제일 많이 소비했다. 또 ‘스타벅스’와 ‘커피 빈 & 티 리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도 ‘카페 라떼’, ‘카라멜 마끼아또’였다.(얼마 전 1위 메뉴로 ‘카페 아메리카노’가 등극했다고 하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달달한 설탕물인 시럽을 듬뿍 넣어 마셨다.) 이 메뉴가 어떤 맛이냐고? 한마디로 다방커피와 별 차이 없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 커피색 설탕물이라고나 할까. 요컨대 그런 비싼 커피숍에서 명품 브랜드 커피를 마시는 듯 폼 잡고 앉았어도 혀끝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셈이다.



노동자 도시 울산에서 커피집을 찾아서

내가 커피를 마시는 방법은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다방커피’의 그것인데 내 경우 몸에 열이 많아서인지 얼음 듬뿍 넣고 끓였다기보다는 뜨거운 물에 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정도로 걸죽한 커피를 넣어 마시는 ‘아이스 커피’였다. 그것도 하루에 5~6잔을 마셨는데 문제는 한 잔의 크기가 ‘1000cc’ 생맥주 잔이었다는 것이다.

3
~4년 전, 성균관대 앞에서 ‘동우네 커피집’이라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아니다. 더워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에어컨이 없으면 여름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종종 혼자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데, 그때도 그랬다.

우연히 찾은 그 커피집은 커피 ‘제대로’ 하는 사람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그곳 사장님으로부터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자리에서 커피를 뽑는 기구(드립퍼라고 한다)를 사서 집에서 직접 커피를 뽑아 마시는 드립퍼로 변했다. 그리고 조금씩 기구를 늘여가고 주위에 커피 좋아하는 이들과도 친해져 정보도 얻고 같이 커피도 마시러 다녔다. 그리고 커피도 제대로 맛을 만들기 위해서는 녹차처럼 무척 어렵고 수고로운 공정과 정성이 쏟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2006년 4월, 1987년 노동자대투쟁 20주년 기념사업을 함께하기 위해 울산으로 내려왔을 때 무척 당황했던 것은 커피 마시러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이 내려다보이는 동구 전하동에서 지냈는데 동구 커피숍에서 나오는 커피는 그냥 ‘커피색 나는 설탕물’에 가까웠고 그럴 바에는 굳이 커피집을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남구 삼산동이나 중구 성남동에 가면 ‘스타벅스’가 있기는 했다. 급한대로 커피가 갈급하면 그곳을 찾기는 했지만 결코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이윤의 1%가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군자금으로 들어간다”는 찜찜한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선도가 생명인 커피에 있어 미국에서 다 볶은 뒤 한국으로 배송하는 그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이 있었다. 그런데 제일 큰 것은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짐 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에 나오는 것처럼, 커피는 담배와 궁합도 잘 맞고 무엇보다 둘 다 ‘대화’의 촉매제이자 완충제 역할을 한다. 대화가 끊겨 어색한 순간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커피, 혹은 논쟁이 격렬해져 잠시 숨을 고르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뽑아든 담배 한 모금, 난 이런 게 가능한 그런 곳을 찾았다. 금연 커피숍, 아무리 그곳에 맛있는 커피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곳 문을 두드릴 수 없는 내 선택법의 제일 기준은 흡연 여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그런 곳이 삼산동 현대백화점 근방의 ‘보라빛향기’였다.



사진 : 보라빛향기 실내전경

보라빛향기

보랏빛향기는 울산뿐만 아니라 전국을 통틀어도 ‘커피 제대로 볶는 집’에서 갓 볶은 커피를 가져다가 커피를 만든다. 한국에서 커피 생두를 직접 볶아 커피를 뽑는 ‘자가 로스팅’ 문화를 퍼뜨린 것은 ‘3박(朴) 1서(徐)’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말해 일본에서 커피를 배우신 분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선구자들의 이름은 박이추, 박원준, 박상홍, 서정달 씨고 이제 예순줄에 접어든 원로들이다. 이분들 중 강릉 보헤미안의 박이추 씨만 여전히 그의 가게에서 커피를 볶는다. 그 뒤를 잇는 사람들 중 한 분으로 거명되는 분이 울산 빈스톡의 박윤혁이라는 분이다. 보랏빛향기는 그 빈스톡의 커피를 가져다가 커피를 만든다. 빈스톡의 커피는 무척 진하다. 커피를 오래 볶았기 때문에 커피콩 색깔도 짙은 밤색과 검정색 사이일 정도이다. 그래서 처음엔 너무 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내 그 맛에 적응하고는 다른 데 커피는 맛 없다고들 한다.

랏빛향기는 2007년 문을 열었지만 점차 울산 사람들에게 커피맛을 알려가고 있다. 처음 넓은 가게에 걸맞지 않게 텅텅 빈 쇼파들은 이제 제법 찾는 발길이 많아져 사람들을 채운다. 사이폰이라 불리우는 커피 추출기구로 커피를 뽑아마시면서 사람들은 무척 신기해한다.

보랏빛향기가 위치한 곳은 울산 삼산동 현대백화점 코앞이다. 그것도 스타벅스를 마주하고 있다. 울산에서 삼산 하면 신시가지라 할 수 있다. 삼산동에 시가지가 조성되기 이전에 ‘시내’ 하면 성남동이나 공업탑로터리였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허허벌판이던 삼산동에 버스터미널과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그 주변으로 유흥가와 쇼핑시설이 들어섰다. 그래서 몇 년 만에 울산을 찾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삼산동은 밤이면 취객들과 젊은 직장인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지만 낮 풍경은 사뭇 다르다. 쇼핑을 위해 차를 몰고 백화점을 찾은 아줌마들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디에도 ‘노동자’는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커피

한국 자본주의는 건강에도 좋지 않은 가장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로 노동자의 입맛을 길들여 놨다. 커피는 노동자에게 여유와 담소의 상징이 아니라 졸린 잠을 깨우는 각성제일 뿐이다. 자본에게 노동자는 철야를 알리는 벨소리를 들으며 공장 자판기 앞 훌쩍 마시고 버려지는 종이컵 같이 하찮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자판기 커피를 홀짝홀짝 하루에 대여섯 잔씩 마셔가며 일하고 또 일했다.

87년 대투쟁 이후 20년, 울산 노동자는 적어도 ‘못사는’ 노동자는 아니다. 1인당 GDP가 한국이 2만 달러를 갓 넘은 데 반해 울산의 1인당 GDP는 2006년 4만 달러를 넘어섰다. 물론 이는 통계일 뿐이다. 그래도 제법 살기 좋아진 것만큼은 분명한 듯하다. 하지만 울산 노동자의 생활과 문화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노동자에게 고작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하물며 다른 문화적 향유 역시 어렵고도 먼 얘기다.

교대제 근무를 하는 노동자들은 집과 회사만을 왔다갔다 한다. 울산 와서 깜짝 놀란 것 중 하나는 노동자들이 울산 지리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2~30년 울산에 살았음에도 그렇다. 여유 시간이 생겨도 잠자기에 바쁘다. 그래도 소득은 늘어 집집마다 자동차가 생겼지만 집은 공장 멀리 아파트단지로 이사 갔고 그래서 더 집과 회사만을 왔다갔다 한다. 차가 또 문제인 거다. 그렇게 집만 찾아들어가도 집집마다 가정이 평탄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교대제로 인해 자녀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부인과의 관계도 서먹하다고들 한다. 노동자 가정의 주부들은 그나마 끼리끼리 모여 삼산동에 나들이라도 나가지만 노동자들은 없다.

제대로 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엄청난 소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부동반으로 커피집에 나들이해 얻는 것은 커피 한 잔 만도 아니다. 시내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그윽한 커피 향이 부부 사이에 녹아들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는 예로부터 사랑의 묘약 중 하나라고 하지 않았다던가.

트랙백(0)   덧글(1)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redgadfly/?pid=37

지구의 안과 밖, 운주사 천불천탑

지구의 안과 밖, 운주사 천불천탑

 

 

우주로의 여행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이 탑승한 싸유즈호가 지구를 떠나던 시각, 난 서울의 터미널에서 다른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텔레비전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떠난다는 것, 그건 무엇보다도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것’ 혹은 ‘같은 세계를 다르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네는 ‘지구인’과 다른 체험을 했을 것이다. 아무런 힘도 자신을 당기지 않는 무중력 상태를 느꼈을 것이고 대륙과 대륙 사이에 대양과 대양이 푸른빛을 내는 지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네가 바라본 지구는 지평선, 사막, 초원, 파도와 해미, 서산에 지는 붉은 노을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과 거리가 아득해진 그곳에서 그네가 몸으로 겪었을 것들은 ‘지구인’으로의 귀환 이후에도 ‘우주의 지평’에서 ‘지구의 삶’을 살도록 할지 모른다.

  

그렇다. 여행의 길에 섰다가 다시 돌아온 일상은 그 이전의 일상과 같을 수는 결코 없다. 무릇 새로운 체험은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연결되곤 한다. 여행자들이 떠나기 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이 성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물며 우주라니. 제 힘으로 날아오를 재주가 없는 대부분의 지구인은 지구 행성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의 빛을 본 적이 없다. 먼저 우주로 나갔던 이들이 찍은 사진으로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아, 지구는 파랗구나. 구름과 바다와 대륙이 저마다의 빛을 내고 그 빛이 모여 결국은 파랗게 빛나는구나. 또 그 우주의 빛은 어떤가? 검은 공간을 점점이 박혀 빛을 내는 행성들이 있고 그 행성이 모여 성운을 이루고 은하를 이루고 또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그러나 지구는 우주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주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구인’이기 이전에 ‘우주인’이었다. 그러나 지구인이 우주를 여행한 방식은 현대의 그것처럼 로켓을 단 우주선을 타거나 우주정거장에서 생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공간적 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혹은 조형적 활동을 통해서, 붓과 목판 혹은 나침반과 제도기를 사용해 지구를 지도로 그려내듯이 별도 그려냈고 별자리도 그려냈다.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고 생시와 천체 운행을 따져 기운을 재고 운명을 점쳤다. 이것을 우주를 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를 품어냄으로써 우주와 지구의 경계를 지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이미 우주의 지평에서 빛을 내고 흐름을 만들고 삶을 새롭게 사유하고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 우주를 그려낸 절, 운주사가 있다. 남도 땅에 숨은 우주적인 미스테리를 간직한 골짜기에서 우리는 과거의 우주인들을 만날 수 있다. 우주선에 몸을 싣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우주의 빛, 거기엔 과거의 우주인이 품었던 간절한 소망, 희망 그리고 그 마음을 모아 세웠던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부처가 있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황석영은 <장길산>의 대미를 운주사 천불천탑 이야기로 장식했다.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은 노비들이 봉기하였으나 관군에 패했고 살아남은 이들이 숨어든 곳은 천불산이었다. 이곳에서 노비들은 미륵의 계시를 듣는다. 하룻밤 만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백성이 주인 되는 미륵의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겨우 하룻밤 사이에 천 개의 부처와 천 개의 탑을 세운단 말인가? 그러나 노비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밤을 새워 천불천탑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마지막 하나 남은 미륵을 세우기 직전, 노동에 지친 한 사람이 있어 소리 높여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닭이 울었다.” 미륵을 밀어 세우던 사람들, 부처가 되기 위해 달려오던 바위들, 모두가 실망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와불이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버린 이유다. 그러나 언젠가 미륵의 새 세계가 올 것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은 변함없어 그 소망이 천불산 골짜기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문화재청

   

물론 황석영의 ‘구라’는 지난 세기 으뜸인지라 이 이야기는 모두 그의 붓끝에서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운주사는 12세기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운주사가 먼저고 장길산은 나중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들 또 어떠하랴. 만인이 믿으면 ‘구라’는 더 이상 ‘구라’가 아니다. 그건 어떤 염원의 표징이 된다. 그래서인지 운주사 홈페이지 첫 화면엔 “와불이 일어서는 날, 이 땅은 민중의 염원인 불국정토가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별처럼 점점이 박힌다. 전설을 듣고 황석영이 재가공한 이 이야기는 군사독재의 시대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 1980년대의 염원이 와불을 일으켜세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운주사 만큼은 널리 알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운주사를 찾아 와불을 친견했고 여기에 스며 있는 갖가지 전설을 들었다.

  

운주사에 들어서면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의 탑들을 만나게 된다. 탑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양을 하고 있고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또 그 탑들은 양편 언덕 위, 산 중턱에도 세워져 있어 어떻게 그 험한 지형에 탑을 세웠을지 궁금해진다. 더 궁금한 건 탑을 조성했을 그니들의 마음이다. 탑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력을 쏟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로 스며들어 열과 성을 쏟아 그렇게 하나씩 탑을 세웠을 터이다. 현재 운주사에 석탑과 석불은 통틀어 100여 기에 불과하나 1940년대 조사 결과에는 몇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200여 기의 탑과 불상이 남아 있었다 한다.

 

 

ⓒ 운주사

  

사실 한국미술사에서 운주사는 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불상이나 탑 모두 그 형태가 특이하여 주목할 듯도 하지만 조형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거친 조각 수법이나 정형성 없는 형태로 인해 평가절하되어 왔다. 함께 답사를 다니던 이들이 “운주사가 미술사적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지”라는 촌평을 거리낌없이 붙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사학자가 아닌 다중에게 경주의 옛 사찰들이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조형미를 지진 석탑과 석불이 즐비하더라도, 제 아무리 원형의 가람배치를 지녔을지라도 결코 운주사만큼의 영감을 주지는 못한다. 갑녀을남이 운주사를 찾았을 때, 그들이 아무리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네들이 직관적으로 받는 강렬한 느낌만큼은 전국 여느 유적지에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느낌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칠성바위의 비밀

  

운주사의 가람배치는 여느 사찰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보통 절집의 배치가 일주문을 들어서면 법당이 나오고 그 앞에 탑이 한 기 혹은 두 기 서 있기 마련인데 운주사는 탑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서 있다. 천탑이 있었다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또 왼편 산 중턱에는 특이하게도 칠성바위가 있다.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둥그런 바위 일곱 개는 칠성신앙을 상징한다. 그 크기는 두께가 45센티미터, 무게는 작은 것이 12톤, 큰 것은 20톤에 이른다. 사위를 둘러보면 이 바위는 어디선가 옮겨온 것이 분명하며 정을 쪼아 동그랗게 다듬은 것이다. 칠성바위는 거의 북두칠성의 배치 그대로이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북극성을 찾는 방법은 북두칠성에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대로 칠성바위로부터 북극성 위치를 찾아보면 거기엔 놀랍게도 운주사를 상징하는 와불이 있다.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이라면 와불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운주사의 가람배치는 도교의 칠성신앙이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칠성바위는 칠성여래(七星如來)를 상징하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석가여래(釋迦如來)을 형상화한 와불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은 운주사의 가람배치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운주사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의 배치와 거리를 따서 바로 그 위치에 칠성바위와 와불을 조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저기 우뚝 솟은 탑들은 무엇일까? 한 천문학자의 연구는 놀랍다. 운주사의 탑들은 일등성에 해당하는 밝기의 별을 나타내며 현대 천문학에서 그리는 일등성들의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운주사 골짜기에는 천불천탑이 있다”고 한 기록은 무엇일까? 다기한 형태를 했을 탑들은 다 무엇일까? 우주는 밝은 별들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수많은 이등성, 삼등성, 사등성, 아니 이름도 없는 수많은 밤하늘의 뭇별이 바로 천불과 천탑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운주사는 일종의 지도다. 우주 지도. 우주를 지구 안에 들여온 것이고 골짜기에 우주를 새긴 것이다. 천불산 골짜기에서 고려인들은 우주인이 되었다. 별과 별 사이를 누비고 탑을 세움으로써 저마다 별이 된 셈이다. 그 많은 별이 모이고 모여 우주를 이루었다. 천 개의 탑을 세우고 천 개의 부처를 세웠다. 그 많은 소망과 소망이 모여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이 성큼 눈 앞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우주여행은 이렇게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을 모아 배를 띄워놓고 흘러가는 방식(運舟)으로 이루어졌다. 별이 모여 배를 건조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은하수처럼 흘러 조금씩 그 꿈을 이뤄갔다.

  

와불이 일어설 것인지 아닌지는 사람들 마음의 간절함에 비례해서이다. 와불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들이 미륵을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안아오는 것이다. 와불은 최종심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일종의 마침표에 불과하지 않을는지.

  
촛불, 별이 되다

  

서울 복판에 촛불 하나가 별처럼 켜졌다. 그 촛불이 흘러가면서 다른 촛불을 밝혀 저마다의 소망과 염원을 모아나갔다. 촛불은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었다. 그 촛불의 물결은 저마다의 소망과 소망이 모여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이 성큼 눈앞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처음 촛불은 청계천과 같았다. 높다랗게 쌓은 석축을 넘지 못했고 그 안에서만 빛났다. 촛불이 늘어나자 그 물결은 마치 운하처럼 전국으로 넘쳐흘렀다. 마침내 촛불은 바다가 되었다. 청계천을 복원한 대통령은 대운하를 포기했고 바다 건너로 정부 대표를 보내야 했다. 촛불이 만들어낸 지도는 마치 은하수처럼 흘러나갔다. 그리하여 촛불은 별이 되었다. 그건 우주를 품은 것처럼 경이로운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광장에 나설 때 마치 우주여행이라도 하듯 즐겁게 길을 나섰고 두 달이 넘도록 거리에서 밤을 지새웠다. 국가라는 중력을 느끼지 못하는 무중력 상태에서 그네들은 오직 서로의 인력(引力)으로 화해롭게 지탱했다.

  

여행의 길에 섰다가 다시 돌아온 일상은 그 이전의 일상과 같을 수는 결코 없다. 무릇 새로운 체험은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연결되곤 한다. 우주를 여행한 이들이, 아니 우주를 땅에 새겨 넣은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안아올 것인지는 그 마음의 간절함에 비례할 것이다. 아직 촛불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내려와야 촛불의 시간이 끝날 것인가? 미륵이 청와대에 들어가야 촛불의 시간은 끝나는가? 아니다. 누워 있던 미륵이 서는 건 촛불을 든 이들이 별이 되고 탑이 되고 부처가 될 때 가능할 것이다. 성불, 부처가 되는 일,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면 우리가 곧 미륵이다. 촛불의 시간은 수행의 시간, 그건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여기가 戰線이다!/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전선을 뜨는 건 비겁한 짓이다.”*

 

 

 

* 장석주, 「화순 운주사에서」, <절벽>, 세계사, 2007, 94~96쪽
 

 

트랙백(1)   덧글(2)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redgadfly/?pid=36

깃돌이에 대한 추념, 굴산사지 당간지주

<삶이 보이는 창> 2008년 5-6월호 (통권 62호, 발간 예정)


 
깃돌이에 대한 추념, 굴산사지 당간지주
 

깃돌이에 대하여

 
독재의 시대, 최루탄 난무하는 포도(鋪道) 위, 페퍼포그 매캐한 연무(煙霧) 속, 질주하는 백골단, 흩어지는 본대오, 그러나 다시금 모여드는 시위대, 그 중심엔 깃돌이가 있었다. 1987년 6월항쟁과 1991년 5월투쟁 영상을 나란히 비교해 본 이는 안다. 그 4년 사이, 얼마나 많은 깃발이 등장했는지를. 6월에 깃발은 없었다. 6월, ‘빵’ 소리만 나도 흩어지던 군중은 5월, 안개 자욱한 종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자기 깃발을 찾아 다시금 전열을 정비했다. 깃발이란 그런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랄탄 연기 속에서 갸름하게 눈을 떴을 때, 저 멀리서 펄럭이는 깃발. 우리 위에 솟아 우리를 모이게 하는 힘을 지닌 것. 그것은 ‘전투 상황’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깃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사진연구소, ‘내릴 수 없는 깃발이여!’,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72쪽

당신은 깃돌이를 아는가? 날아드는 전투경찰 날 세운 방패를 코앞에 마주하고도 한 걸음조차 뒤로 물러서지 않는 이, 시위대가 몸을 돌려세워 한 정거장쯤 걸음아 나 살려라 달릴 때조차 몸 돌리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는 이, 사복체포조의 일차적 타격 대상이 되는 책임막중한 자리, 그것이 깃돌이다. 깃돌이는 왜 달아나지 않는 것일까? 깃발이 조직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전투의 성패를 가름하기 때문이다. 깃발이 서지 않으면 우리는 미아가 되고 엉엉 울며 엄마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깃발이 서지 않으면 동지는 군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

 

당신은 깃돌이의 고독을 아는가? 혼자 그 바람과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하는 자의 고독을. 한바탕 데몬스트레이션이 파하고 더 이상 사람들은 깃발을 보고도 모여들지 않아 소용을 다한 깃돌이의 비애를. 내려진 깃발을 고이 접어 가슴에 품어야만 했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도시, 방금 전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던 함성 소리 대신 러시아워의 클락션 소리와 빨간 후미등만 깜박거리는 거리에서 목도하는 먹먹함을.

 

그 고독과 비애와 슬픔은, 마침내 그를 돌로 굳게 만들었다. 돌이 되어 버린 깃돌이. 강릉시 구정면 학산 기슭에 가면 한국에서 가장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 돌이 되어버린 깃돌이를 만날 수 있다. 깃돌이는 그렇게 말없이 서서 한때 펄럭이던 깃발을 보고 구름떼처럼 모여들던 사람들을 천 년을 하루처럼 아직 기다리고 있다. 보물 86호, 높이 5.4m, 깃돌이에게는 이런 말들은 한갓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깃돌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당, 간, 그리고 지주  

 

당간지주(幢竿支柱)란 무엇인가? 한자어란 늘 풀이가 필요한데 당간지주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 간, 지주를 쪼개어 곱씹어보는 것이 현명하다. 당간지주란 깃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고 버티는 기둥이다, 지주다, 깃돌이다. 깃대를 양 옆에서 튼튼하게 버티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짝을 맞춰 서 있다.

 

그렇다면 당간이란 무엇인가? 당간(幢竿)은 ‘당(幢)을 거는 장대(竿)’를 말한다. 깃대라는 얘기다. 당간은 보통 철이나 동으로 만든 관을 이어 붙여 당간지주 사이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은 몇 개 되지 않는데 충남 공주 갑사나 충북 청주 용두사지에 가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기둥 머리에 용이나 사람 모양을 한 장식을 붙이는데 그에 따라 용두당(龍頭幢), 인두당(人頭幢)으로 구별해 부른다.

당(幢)은 또 무엇인가? 당(幢)은 깃발이다.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내건다. 사람들은 절 입구의 당을 보고 절로 몰려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매달아야 하는데 그래서 당간, 즉 깃대는 길고도 높아 바람에 흔들리기 십상이고 그 자체만으로 지지하기가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양 옆에 지주를 세워 깃대를 튼튼하게 붙잡는 것이다.

 

절집은 다른 만물이 그러하듯 흥과 망이, 성과 쇠가 교차하는 법이라 흥성했을 때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또 그 사람들이 각지에 그 절집의 법력과 신통을 설파하지만 쇠락할 때는 썰물처럼 빠져나가 적요함이 가득하다 마침내 와편이 나뒹구는 폐사지로 전변하는 법이다. 그 주기는 대개 짧아 천 년 넘는 절집은 흔치 않다. 이름난 절집도 쇠락하면 여느 여염집과 다를 바 없고 쓰러져 땅 속에 묻히면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도 잊혀져 어디인지조차 찾기 어렵게 된다.

 

굴산사 역시 그러했다. 범일(梵日)은 어릴 적 절에 들어와 22세가 되자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그 후 귀국, 서기 851년 명주 땅 학산 아래 절 하나를 창건하고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일으킨다. 그것이 굴산사고 그래서 굴산사는 사굴산파의 종가다.

신라말, 당대를 지배하던 교종의 틈바구니에서 선종은 힘차게 교세를 확장해 간다. 사굴산파는 그 선종의 물줄기 중 한 갈래로 굴산사 폐사지에 들어서면 그 당시 이 절의 사세가 얼마나 막강했을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허나 이 절집 역시 내리막길을 걷다가 사라졌는데 1936년이 홍수가 휩쓴 후 ‘문굴산사’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서야 비로소 그 위치를 알게 되었다.

시련과 발견은 또 한번 짝을 이루어 찾아왔다. 2002년에는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덮쳤다. 124명이 죽고 60명이 실종된 엄청난 피해를 남긴 태풍 루사. 루사는 굴산사 터를 비껴가지 않았다. 굴산사 터 앞을 지나는 학산천이 넘치고 수해가 나자 긴급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굴산사 터의 전체 크기가 드러나게 된다. 굴산사는 동서로 140m, 남북으로 250m 크기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절터로 알려져 있는 경주 구황동 황룡사지의 크기가 동서로 169m, 남북으로 149m라고 하니 이 절은 실로 엄청난 크기였던 것이다.

 

굴산사가 번창했을 무렵, 그 절집엔 수많은 사람들이 불심을 구하고 원력을 얻고자 드나들었을 것이다. 밥 시간이 되면 굴산사 앞 학천의 개울물이 쌀뜨물로 허옇게 흘렀다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인가. 허나 언덕 위 드넓은 농지로 변한 지금, 겨울 한설 내려 대관령이 막히고 영동지방이 고립되기라도 하면 그곳은 하얗게 내린 눈밭으로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국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만이 홀로 숙설(宿雪)을 뚫고 우뚝 서 이곳이 과거 영화로웠던 절집이 있었던 자리였음을 굳세게 증언한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문화재청.
 
굴산사지 당간지주 앞에 서면 무엇보다도 그 큰 규모에 압도당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라니 그럴 법도 하다. 마치 거대한 탑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높이는 사실 큰 탑, 이를테면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중량감은 못지않다. 그 이유는 굴산사지 당간지주의 독특한 질감 때문이다. 자연석 그대로인 것처럼 거칠게 다듬어놓은 그 질감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매끄러움은 찾아볼 수 없고 깎다가 만 화강암처럼 강인하다. 그 거친 질감은 마치 후기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들처럼 힘차고 육중하다.

 

당간지주는 폐사지에서 몇 안 되는 볼거리 중에 하나다. 뒤집어 말하면 신도가 북적거리는 이름난 절집에서 당간지주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다른 볼거리가 많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번창한 절집도 결국 쇠퇴의 내리막길에 서면 가장 오래도록 남는 것은 돌로 만든 것들이다. 석불, 탑, 부도, 기둥을 세웠던 심초석, 그리고 당간지주가 그것이다. 당도, 당간도 사라지고 몰아치는 태풍에 맞서 깃대를 부여잡고 있었던 깃돌이만 남는다.

 

다시 변주하여, 반복해 묻는다. 당신은 깃돌이의 고독을 아는가? 혼자 그 바람과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하는 자의 고독을. 한바탕 법회가 파하고 더 이상 깃발을 보고도 모여들지 않는 산사의 비애를. 내려진 깃발을 고이 접어 가슴에 품어야만 했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법당 처마, 방금 전까지 산사를 가득 메웠던 불경 소리 대신 적요함을 깨는 산새 소리, 새파랗게 내리는 달빛과 북두칠성 쨍그랑 비치는 고요함 속에서 발견하는 먹먹함을.
 
침묵으로 말하다, 깃발은 바람의 것이다

 

폐사지에서 시대의 무상을 읽는 건 자연스럽다. 허나 그것에만 그친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우뚝 서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당간지주에 대한 모독이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던 절, 이제 그 깃발마저 사라지고 깃대조차 부러져 간데온데없으나 홀로 그 자리 지키고 선 이가 있다. 흥망성쇠에 주기가 있다는 것은 흥한 것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역도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순환의 법도다. 깃대는 다시 세우면 될 일이고 깃발은 다시 묶어달면 될 일이다. 하지만 깃대는 홀로 설 수 없고 깃발은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펄럭이기에 단단히 잡아줄 그 누군가가 필요하니 깃돌이는 역사의 쓰임을 위해 아직도 대지에 발을 깊게 담그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금양년을 거치며 한 시대의 순환이 다하고 이제 다른 순환이 갈피를 잡았다. 갑이 논하고 을이 박하며 여기저기 깃발이 새로 솟고, 한 깃발이 두 깃발로 쪼개지는 혼돈과 여러 깃발이 하나로 합일하는 재편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 어제의 것이 시효를 다해 역사적으로 소멸하였으니 새로운 깃발이 필요하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이 이어지고 있으니 아직 새 깃발이 마련될 필요가 없다는 이들도 있다. 깃발을 선택하는 건 그 무리와의 친소 정도, 취향, 정치적 지향, 정서적 코드 등에 따라 다기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다 좋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본디 깃발은 바람의 것이다. 바람은 흐르되 물처럼 목적지를 갖지는 않는다. 바람이 목적지를 갖지 않는 것만큼, 깃발 또한 목적처럼 보일 때조차 궁극적으로는 한갓 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깃발을 부여잡고서 깃대가 부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이들만이 돌처럼 굳셀 수 있다. 깃발을 갈아 올려도 깃돌이들이 굳세다면 천 년 넘도록 절은 폐사하지 않고 불력이 온누리를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온몸에 새겨진 상처에도 불구하고 깃돌이는 천 년 비바람과 눈과 별밤과 열기를 굳세게 기억한다. 그래서 깃돌이의 고독, 비애, 쓸쓸함, 먹먹함은 우리가 이입한 투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상하게 여기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역사가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겐 아직 더 나아가야 할 역사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허나 그 역사가 목적지를 갖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아니 우리가 생각했던 목적지란 한갓 그 계절에 불던 바람의 방향에 불과하다고, 그래도 좋다면 깃발을 잡으라고, 허나 아니라고 생각될 때 깃발을 새처럼 날려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을 패배로 기억하지 말자고, 다만 굳세자고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에게 깃발의 의미를, 우리가 그것을 부여잡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줄 것이 아니었다면 저 당간지주가 천 년을 하루처럼 서 있을 이유가 없었을 터이니 사람들아, 깃돌이와 이야기를 나누자. 곧 살이 데일 정도로 뜨거울 여름이 올 터이니 그 전이라도 바람의 지평에서 천 년을 침묵으로 말해온 돌기둥을 만나러 가보는 것이 어떠할 것인지.

트랙백(0)   덧글(0)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redgadfly/?pid=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