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녘 달의 미학,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 바다를 가르고 떠오르는 태양이 그 모든 힘을 전유하던 시절도 있었다. 왕의 시대였다. 왕이란 권력을 지닌 자다. 왕의 권력이란 태양처럼 전능한 것이었다.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 태양의 힘이라면, 그것을 박탈하는 힘, 생사여탈권 역시 태양으로 상징될 만하다. 그래서일까. 이집트 파라오에서부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까지, 러시아 전제군주 차르부터 일본의 천황까지, 태양은 이들의 상징이었고 백성은 납작 엎드려 긍휼히 여기길 원했다. 고대 그리스 12신 중 태양의 신은 아폴로였음도 기억해야 한다. 고대 중국과 고구려에서 태양은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로 상징되었다. 또 동시에 제국의 상징도 태양이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는 제국의 힘이 미치는 영역을 표현하는 말이다. 요컨대 태양이란 권력, 폭력, 통일성, 남성, 온전한 것, 위대함 등과 교배되는 말이며 그 방위 표지는 동쪽이다.
서쪽, 그건 달의 자리다. 달은 왕과 권력의 힘이 유효하지 않은 시간, 온갖 힘이 공존하는 시간, 신비롭고 매력적이면서도 음험한 마력(魔力)의 시간, 그 상징이다. 달은 해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다. 바다를 움직여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고 또 그 신비로운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태양의 신 아폴로의 쌍둥이인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으로 처녀신이며 따라서 잉태의 능력을 지닌다. 다시 말해 생명을 잉태시키는 힘은 달에게 있다. 이 기운에 따라 여성의 월경이 리듬을 가지며 남성들에게 이 기운은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운 것이었다. 또한 달이 뜨면 늑대가 울고, 늑대가 울면 사람들은 두려웠다. 어떤 힘이 자신들을 덮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통일성을 근간으로 한 왕의 권력과 배치되는 반역적 기운이었고 제압할 수 없는 야성의 힘이었다. 고대 중국과 고구려에서 달은 두꺼비였고 신선이었다. 달은 태양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달의 방위 표지는 서쪽으로 태양이 자리한 동쪽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부석사는 무엇보다 서쪽의 기운, 달의 기운이 강한 절집이다. 사과나무에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겨울, 과수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불국토 부석사를 오르면 등 뒤로 해 떨어지고 그 장엄한 광경 너머 달의 시간이 성큼 다가온다.
산맥에 안긴 부석사 가람배치
의상대사가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는 중국의 한 집에 머물렀다. 그 집에는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으니 잘 생긴 신라 승려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어느덧 공부를 마치고 신라 귀국길에 오른 의상대사를 실은 배는 서해 한가운데로 나아갔으나 뒤늦게 달려온 선묘는 대사에게 전하려던 옷가지를 바다로 던지고 그녀 또한 몸을 던져 스스로 용이 돼 배를 호위해 신라까지 이르렀다.
“부석사의 포개져 있는 두 개의 돌은 닿지 않고 떠 있는 것일까.” (신경숙, 『부석사』)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고구려, 백제가 닿지 않는 영주 땅에 절집을 세우려 했으나 사교 집단 500여 명이 이 땅에 먼저 자리 잡고 있어 그 뜻을 이루기 쉽지 않았다. 이에 용이 된 선묘는 큰 바위가 되어 허공에 떠올랐으니 이들 무리는 혼비백산, 천지사방으로 도망치고 의상대사는 수월하게 부석사를 세웠다. 그리고 그 부석(浮石), 즉 떠 있는 바위는 아직 무량수전 한 편 뒤쪽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그가 쓴 『택리지』에서 바위 위에 얹어진 이 큰 바위가 서로 이어 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틈이 있다 했다. 만약 노끈을 넣어 빼보면 아직 돌이 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돌 위에 돌을 얹은, 아니 돌 위에 돌이 포개어 떠 있는 이 부석은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설화다.
안양루 너머 무량수전의 처마가 의젓하다.
부석사는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신 절집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인 무량수전이 중심 전각이 된다.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줄곧 가파른 산기슭과 경사진 계단을 오르는 과정이다. 범종루를 지나 마지막 고비인 안양루 누하계단(樓下階段)을 오르면 배흘림기둥이 아름답다는 무량수전과 마주하게 된다. 그 길은 험하고 고되지만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부처님을 알현할 수 있는 기쁨은 그 무엇보다 크다. 아미타불의 불국토인 서방 극락정토는 사바세계에 계신 석가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석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면 한 세계가 있으니 극락이라 하고 거기에 부처가 있어 아미타불이라 하며 현재에도 법을 설하고 있느니라.”
부석사는 온통 아미타여래에 대한 의상대사의 뜻이 곳곳에 스며 있다.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極樂)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곳을 지난다는 건 곧 극락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을 지난다는 뜻이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는 소조상인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따로 양옆에 협시보살을 두지 않았고 무량수전 앞에도 탑이 따로 없다.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에 따르면 “아미타부처는 열반에 들지 않아 탑과 협시보살을 세우지 않는 것이 나의 깊은 뜻이다”라며 의상대사가 말씀을 남겼고 이는 그의 스승 지엄(智儼)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한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는 안동 봉정사 역시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 앞에도 옛적 미타불석탑이 없었을 거라 추정되고 있다. 불국사 또한 그러하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할 당시 함께 가람의 형태를 갖추었던 스님은 의상계 화엄의 고승인 신림과 표훈이었다. 불국사의 극락전 마당에도 탑이 없고 극락전 안에 모셔진 아미타부처 곁에도 협시보살이 없다. 또 석가부처가 계신 불국사 대웅전의 서편에 극락전이 위치하고 있음도 부록처럼 기억해야 한다.
부석사의 절집 배치가 놀라운 것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의 상징을 건축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부석사를 보며 감탄하는 것은 여러 부처님의 세계를 절집 안에 구축한 불국사의 불전 배치를 넘어서는 장대한 스케일에 있다. 부석사는 안양루 아래의 가람배치 축을 기준으로 안양루 상단의 축이 왼쪽으로 틀어져 있다. 안양루 하단의 축을 연결하면 도솔봉으로 연결되고 안양루 상단의 축은 비로봉, 연화봉과 연결되어 있는 봉황산의 내맥인 안산을 바라본다. 도솔봉은 미륵이 주처하는 도솔천의 세계를 상징하고, 연화봉과 비로봉은 비로자나불이 계신 연화장세계를 상징한다. 즉 부석사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불국토 전체를 조영한 대가람인 것이다.
합장하는 손끝은 서방 극락정토를 향하고
부석사를 찾는 이들은 무량수전을 찾고 배흘림기둥을 가리키고 내려가곤 한다. 그보다 조금 더 답사를 즐겨하는 이들은 무량수전에서 안양루를 돌아보고 그 아래 흐르는 산맥과 일몰을 감상한다. 또 이 절집의 아름다움을 더 깊게 느끼고 싶어 하는 이들은 범종각 아래에서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또는 범종각 아래 계단에서 안양루를 사진에 담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무량수전이 안양루를 품은 것처럼 보이는 위치인 나한전 앞을 배경으로 렌즈 앞에 서기도 한다. 이 모두 부석사의 아름다움임에는 분명하다. 건축가들이 한국에서 가장 건축적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부석사를 꼽지 않았던가. 각각의 위치는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위치이다.
그러나 정작 극락정토 부석사에 와서 아미타불을 알현하지 않고 사과나무 밭 사이로 난 길로 하산하는 이들을 보노라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경주 석굴암에 가서 본존불을 보지 않고 토함산을 내려가는 격이니 말이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아미타여래좌상은 소조상, 즉 흙으로 만든 부처로 겉에는 개금하여 우리에게 광휘를 비춘다. 그 크기는 2.78미터로 매우 크고 당당하며 그 수인은 석굴암 본존불처럼 항마촉지인, 즉 마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 모양을 하고 계신다. 좌우에 손 모양을 하는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중요한 것은 아미타 부처님만이 아니다. 그 앉아 계신 위치와 방향을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부석사의 아미타불은 다른 절집처럼 들어가는 우리를 바라보는 건물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수전의 왼편에서 오른편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
무량수전의 오른편, 즉 부처님께서 바라보고 있는 쪽은 정동쪽이다. 그러니 부처님을 마주하고 예불 드리는 이들은 정확히 서쪽을 향하게 된다. 부석사 아미타불은 동쪽을 향해 앉았다기보다는 정확히 서편에 앉았다 말해야 한다. 서방 극락정토에서 우리로 하여금 극락을 바라보라 하고 계신 것이다. 안양루 위 상단 전각들의 축이 굴절된 것은 무량수전에 드는 불자들이 정확히 정서향(正西向) 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부석사 가람배치의 의미는 하늘에서 볼 때가 아니라 무량수전 안에 들어와 아미타여래를 향해 합장할 때 비로소 완전하게 깨닫게 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해를 먹고
서방 극락정토란 어떤 세계일까? 괴로움과 슬픔이 없고 오로지 평안함과 즐거움만이 있는 세계. 안락(安樂)은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해방이란 바로 모두가 안락해지는 것이고 불교적 견지에서 보자면 서방 극락정토를 지금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을 향한 미학적 상징은 동서고금을 떠나 서쪽을 향하기보다는 동쪽, 더 정확히는 태양을 향해 왔었다. 식민지 치하는 태양이 빛을 잃은 겨울, 혹은 캄캄한 밤이었고 다시금 빛을 기다리는 광복(光復)의 이미지는 새벽이었으며, 조국 광복의 그날엔 빼앗긴 들에도 따스한 볕이 쬐는 봄이 올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의 시대에도 그 비유법은 적실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오는 건 우주의 법칙인지라, 학살을 넘어 군사독재의 집권이 영구해 보여도 승리의 태양은 종국엔 깨어 있는 자들의 것이어야 했다. ‘박’해 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갈구하던 시인 역시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벽을 깨뜨려 솟구칠 숨 쉬며 자라는 우리의 사랑, 분노, 희망, 단결을 위해 ‘노동자의 햇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1987년이 지나자, ‘한밤의 꿈’일지도 모른다던 ‘그날’은 일출처럼 문득 와버렸고 ‘노동자의 햇새벽’도 지나 이미 동해바다를 뚫고 붉은 태양 솟구치고 있었다. 1987년부터 1990년대 중반, 혹은 말에 이르기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성장은 눈부시게 놀라운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노동해방’이라는 벅찬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그건 이념에 앞서 현실이 웅변해주는 ‘힘’이었다. 그 힘에 기초해 노동해방의 은유에는 태양과 동쪽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한국 사회 초기 노동가요에서 그 상징의 사례를 살펴보자면 이러하다.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단결투쟁가>
“동트는 새벽엔 가열찬 투쟁 정신!”-<진짜노동자>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전노협 진군가>
그러나 노동해방의 태양은 힘차게 타오르지 못하고 그 빛을 잃어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정말 금세라도 노동해방의 태양을 안아올 것 같던 동해바다를 닮은 푸른빛의 노동자들은 백발의 늙은 노동자가 되어 집으로, 공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노동해방의 세상이란 우리가 저들의 것을 빼앗아 갖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의 것도 사라지는 세상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저들의 태양을 단지 빼앗는다고 우리의 무기로 전화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우린 태양을 빼앗는 운동의 과정에서 태양을 소유한 자들과 닮아 갔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태양을 빼앗아 가질 게 아니라 생사여탈권의 원천으로서의 태양을 꺼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반대의 힘으로서 달을 긍정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달이 태양을 먹어버리는, 그래서 어둠이 오히려 다양한 힘들을 되살아나게 만드는 개기일식의 반역적 은유, 그 미학적 힘이 긍정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달에 의해 꺼진 다음, 다시금 빛을 내는 해는 그 이전의 해와는 다른 것일 테니 말이다. 우린 다른 미학적 상징을 지녔음을 상기해야 한다. 예컨대 <동학농민가>처럼. “저 흰 산 위에 대나무 숲을 이루고 봉황대엔 달이 비춘다. 검은 해가 비로소 빛을 내던 날 황토현의 횃불이 탄다”
알다시피 저 노랫말의 “흰 산”이란 농민군이 집결했던 부안의 백산(白山)이다.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란 말에 담겨 있는 것처럼 흰 옷의 농민군이 죽창을 들고 집결했던 곳이다. 농민군의 봉기는 태양을 가려버리는 달처럼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농민군은 패했다. 그 후 긴 시간이 지났다. 잠시 잠깐 태양을 품어볼 꿈이라도 꿨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도 지났다. 패배자들의 역사는 패배를 갱신했다. 루저들. 이제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것 같은 이들. 저들이 보기에 태워 죽여도 무방한 사회의 부스러기들. 77일을 싸워도, 아니 몇천 일을 싸워도, 전국의 굴뚝에 깃발처럼 매달려 아무리 펄럭여도, 수갑을 채워 감옥에 보내버리면 되는 난장이들. 대를 물려 난장이가 되는 족속들. 그랬다. 저들의 태양은 무량수의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태양은 오히려 달이다. 굴뚝에 올라 우리가 쏘아 올려야 할 작은 공은 태양이 아니라 달인 거다.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달은 태양의 배면, 반란의 힘이 되어 새로운 세상, 서방 극락정토, 해방된 세계를 잉태할 것이었다.
가치와 상징의 세계를 전복하지 않고 베끼는 것으로 해방의 미학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이었다. 루저들의 해방을 향한 미학은 돌을 띄워 올려 적의 무리를 쫓듯 새로운 달을 매번 쏘아 올려야 한다. 그 달을 쏘아 올려 산맥 기슭에 거대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해방의 불국토를 구성해가야 한다.
해가 진다. 한 해가 간다. 지난해처럼 이 지긋지긋한 까마귀의 시간도 가버렸으면 좋겠다. 지배로 점철된 그 모든 시대와 세월도 다 가버렸으면 좋겠다. 새해, 동쪽으로 달려 일곱 시쯤 불끈 떠오르는 태양에 소원을 빌지는 않을 테다. 해에 대고 해방을 빌지 않을 거다. 그건 생사여탈권을 왕에게 맡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 차라리 새벽 네 시 반쯤 일어나 불끈 뜬 서녘 달을 향해 소원을 빌자. 부석사 조사당 오르는 길에서 무량수전 아미타 부처님 머리 위로 뜬 서편 달을 향해 빌자. 이 땅 모든 루저들의 안락한 삶을. 매번 달이 차오를 때마다 포기했던 그 다짐을.*
*장기하와 얼굴들, <달이 차오른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