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사당동에서

2009/10/07 16:44

1987년 사당동에서

 

엄마가 다쳤다

 

그때 난 중학교 2학년이었다. 1987년 10월 19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평소처럼 총신대학교 뒤편 산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씨는 쌀쌀했고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산길을 올라 고갯마루를 넘었을 때, 동네 놀이터 풍경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웬 아저씨들이 페인트 통에 나무들을 불쏘시개 삼아 불을 피웠다. 꽤 추운 날씨라 두세 명이 불 주위로 둘러서 쬐고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헬멧을 쓰고 손에는 목장갑을 낀 채 각자 각목을 들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있다 하더라도 하릴 없이 친구들끼리 노느라 바쁜 중학생들 정도였다. 심상하지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서였을까.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아파트 단지 안으로 접어들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일찍 기울었다. 집안은 조용했고 난 혼자 있었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깜빡 잠이 들었을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도 난 그 전화를 누가 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전화 내용은 간명했지만 무거웠다.

 

“엄마가 다쳤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은 30분 거리에 위치한 사당의원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늦은 오후 하교길에 마주쳤던 헬맷 쓴 사내들이 바로 그 ‘철거 깡패’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자들이 엄마를 때렸을 것이었다. 그 곁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 없었다.

 

6.29는 속이구

 

사당3동에 살인철거가 진행된 건 9월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0월 접어들어서였다. 6월항쟁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그때, 온통 세상은 대통령선거 얘기뿐이었다. 사당3동에도 추석 무렵 대통령 후보들이 번갈아 방문했다. 자신이 당선되면 달동네 사람들의 생존권도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다. 군부독재는 이미 끝장났고 대통령선거는 그걸 승인하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한 순간에 터뜨려 버린 것 중 하나가 사당3동 철거였다. ‘6.29는 속이구’라는 말이 회자됐다. 경찰은 철거깡패와 한통속이었고 그건 군부독재와 건설자본이 하나라는 의미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철거깡패를 잡아 경찰에 넘기면 경찰은 바로 풀어주곤 했다. 심지어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향해 최루탄까지 난사했다. 선대책 후철거, 강제철거 금지, 영구임대주택 건설 등의 구호가 제대로 외쳐질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10월 19일 강제철거가 진행되면서 20여 명의 중상자들을 낳기에 이른 것이었다. 누가 군부독재가 끝장났다 했는가.

 

침대 밑에서 바라본 세상

 

엄마는 대통령선거 즈음까지 사당의원에 입원해 있었다. 20여 명의 중상자 중 가장 많이 다쳤기 때문이었다. 기브스를 하고 누운 엄마 침대 밑이 나와 동생의 자리였다. 학교가 끝나면 침대 밑에 들어가 있었고 때론 거기서 잤다. 세입자대책위나 그곳을 드나들던 활동가 형, 누나들이나 방문하는 분들을 난 얼굴보다 발로 기억한다. 입원실은 회의실이었고 토론장이었다. 사람들은 정세를 논하거나 그날 그날 있었던 집회나 주요 단체들의 결정, 대통령선거 정국 등에 대해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웃으며, 때론 싸우며 이야기 나누곤 했다. 병상 밑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병상 밑에서 듣는 세상은 그 이전에 학교에서 가르치던 세상과는 아주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방학에 접어들자마자 형, 누나들이 얘기하는 집회장에 우리 형제는 힘 닿는껏 다녔다. 백기완 선생 유세도 다녔고 집회들도 다녔다. 사당동 투쟁이 일정하게 합의에 이르고 종결된 후, 사당3동 철거민들은 보라매공원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아저씨들은 북을 쳤고 아줌마들은 떡을 돌렸다. 모두 흥겨웠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부부들이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막걸리가 달았다.

 

로봇이 있다면

 

세입자대책위 한 아줌마의 아들이 있었다.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어디를 가셨는지 내게 맡기고 가셨는데 장난감 로봇을 가지고 잘 놀던 아이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나한테 진짜 로봇이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물었다.

 

“왜?”

 

“그러면 로봇 시켜서 철거깡패들 다 밟아서 벌레처럼 죽여버릴 거야”

 

아이의 말이 이렇게 잔인하고 독할 수가 있을까. 이후로도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 더 독하고 잔인한 아이의 언어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일곱 살의 말 속에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증오심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아이의 말이 자연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들이라고 왜 원한의 마음을 가지지 않겠는가. 오죽하면 당시 방영중이던 드라마 ‘인간시대’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을까. 그 아이의 말은 내 심정이기도 했다.

 

전환점

 

22년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987년 10월의 사당동과 2009년 1월 용산은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섯 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사실 뿐이다. 1월 20일 뉴스를 보면서 ‘나도 그때 고아가 될 뻔했구나’ 새삼 깨달았다. 거리나 명동성당 근처, 용산 참사 현장 멀찍이에서 유족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87년의 기억이 회상됐다.

 

용산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린 영원히 87년 사당동과 2009년 용산이 반복되는 걸 남은 생 동안 목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폭력과 수탈이 우리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22년이 지났어도 그와 같은 사건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인생을 바꾸어놓는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세상과 자신 사이를 단호하게 직접 연결시켜버리는 전환점이 있다. 내게 그것은 사당동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런 전환을 겪은 이들이 만나 엮어가는 것이 운동이라 나는 믿는다. 그렇게 운명을 엮어 살아가다보면 때로 용산과 사당동이 반복되더라도 좀 더 견뎌낼 힘이 샘솟지 않을까. 그 힘으로 아직 가지 않은 겨울을 한사코 밀어내야 하지 않을까.
 

1987년 10월 19일, 철거깡패와 대치중인 사당3동 시위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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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7 16:44 2009/10/07 16:44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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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보캅은 없었다

    from
    2009/10/09 17:04
    삭제
    판자촌 즐비했던 목동일대의 과거는 아마 그 뚝방의 물난리를 경험해본 몇 명의 기억에나 남아 있을 거다. 고층 아파트의 마천루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강제철거의 고통을 상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다른 목동의 재현이 있기 위해서 과거는 잊혀져야 한다. 어디 목동 뿐이랴. 난곡동도, 상계동도, 난지도도 죄다 망각되어야 한다. 그 후에야 뉴타운은 신성한 미래의 유토피아로 포장될 수 있다.  ...

댓글을 달아주세요

  1. 2009/10/08 23:1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앗.. 감동으로 눈물이..ㅜㅜ
  2. 2009/10/09 17:0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잘 보고 갑니다. 트랙백 하나 겁니다.
  3. 2009/10/12 23: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글 잘 봤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이 싸움을 이제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8일에 열리는 용산국민법정 준비를 같이 하고 있는데요, 이 글을 국민법정 소식 5호에 실고 싶어서 덧글 남깁니다. <두리번 두리번>이라는 꼭지가 있는데요, 다른 곳에 실렸던 글 중에 같이 나누고 싶은 글을 담는 꼭지입니다. 허락해주실 수 있는지... 국민법정 메일로 답변 부탁드립니다.(court@jinbo.net) 국민법정 소식 5호는 14일(수)에 나올 예정이에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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