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처럼 서울 살아내기, 석촌동 백제 고분군

 

서울 답사, 서울 발굴

 
쓰레기 고고학(garbageology)이라는 것이 있다. 쓰레기를 뜻하는 가비지(garbage)와 고고학을 뜻하는 아케올로지(archaeology)를 합성한 말로 쓰레기의 양과 종류를 조사해 당대인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조성된 난지도의 그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파들어가보면 다양한 문화층이 나올 것이다. 1977년부터 1993년 난지도가 폐쇄되기까지의 쓰레기는 전복이나 뒤바뀜 없이 아마도 문화층이 쌓였을 텐데, 7~90년대의 쓰레기가 어떻게 변모하는지, 이를테면 연탄 쓰레기가 언제부터 줄어들고 그래서 당시 에너지 소비 형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혹은 가장 많이 나오는 음식 포장지는 무엇인지를 통해 어떤 식품을 많이 소비했는지 등을 추정해볼 수 있다는 거다.
쓰레기고고학이 현대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양의 배설이 이루어지는 도시와 관련이 있다. 오래되고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일수록 그 지층에는 다양한 문화층이 쌓여 있다. 도시란 다양한 기능과 위계를 갖는 기관과 공간이 집적되어 있는 거대한 반도체 같기도 하지만, 시간이란 변수를 도입해보자면 매우 깊은 패총과 같아서 그 깊이에 따라 시간과 역사가 스며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몇천 년이 넘는 패총이 쌓여 있는 곳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서울엔 역사 유적이 즐비하다. 하지만 서울엔 새로운 문명이 들어섰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서울엔 수많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빌딩숲은 서울의 기억과 서울의 역사를 파묻어 버린다. 근대냐 탈근대냐가 회자되는 작금에 서울에서 답사하기란 일종의 발굴과도 같은 일, 빌딩숲 사이 잘 보이지도 않는 경희궁이나 덕수궁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 이전의 유적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잠실벌도 그중 하나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그 중심지는 바로 잠실 일대였다. 석촌동에는 백제의 종묘라 할 수 있는 무덤들이 즐비했으니 오늘날 그곳은 석촌동 백제고분군이라고 부른다. 서울을 파내려가다가 보면 제법 두터운 문화층을 발굴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백제다. 그리고 그 발굴이 끝나면 모든 발굴이 그렇듯이 다른 눈으로 서울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거대한 침묵, 백제식 피라미드

 
우리가 무덤 하면 떠올리는 건 흙으로 둥글게 봉분을 얹고 떼를 입힌 봉토분이다. 천년 고도 경주를 가면 시내 곳곳에 초록 잔디를 입힌 커다란 고분들이 마치 백악기의 브라키오사우루스처럼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 석촌동에는 돌로 쌓은 무덤, 적석총이 있다. 그 광경은 우리의 상식을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파격이지만, 무덤 양식은 건축과 달라서 매우 보수적인 속성을 가진지라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인들에게는 낯익은 오랜 풍습이었을 터다.

 

캡션 : 석촌동 내원외방형 적석총 모습. 안은 둥글고 밖은 네모난 모양으로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양의 우주관이 반영되어 있다.

 
석촌동 백제고분은 현재 8기가 남아 있지만 일제시대였던 1916년 조사에 따르면 89기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현재 제대로 복원된 건 2, 3, 4호분인 적석총과 흙으로 봉분을 입힌 5호분뿐이다. 나머지는 바닥에 돌만 쌓아놓은, 그야말로 흔적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석촌동 고분군에는 여러 가지 무덤 양식이 공존한다. 구덩이 무덤인 토광묘, 항아리 무덤인 옹관묘도 있다. 물론 적석총이 가장 특징적이나 평민과 일반 관리의 무덤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수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적석총은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돌을 모아 일종의 네모난 피라미드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석촌동에 있는 적석총은 그만큼 웅장하다. 봉토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과묵한 힘이 있다. 특히 석촌동 3호분은 그 규모와 크기가 놀랍다.

 

캡션 : 석촌동 3호분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웅장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3호분은 3단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전체 4.5m로 원래는 한두 단 정도 더 있어 그 높이가 더 높았을 거라고 추정된다. 가장 아랫단인 1단은 동서 50.8m, 남북 48.4m에 달한다. 이는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만주 퉁거우의 장군총이 하단 가로세로 30m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 무덤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석촌동 3호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학계에서는 백제 건국세력이 3세기까지는 임진강 일대를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3세기 중엽경에는 한강을 건너 이 지역에 몽촌토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의 선주민과 연합해 백제를 건설했다고 본다. 그들은 새로이 풍납토성을 건설하면서 하남위례성을 중심으로 예성강, 임진강, 남한강, 안성천을 연결하고 철광으로 유명한 청주 등 충청도 지역과 원주 등 한강 상류 지역을 편입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고고학 자료에 근거해서 보자면 한성 백제시대의 근거지는 바로 잠실벌이었던 셈이다. 그 중심에 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이 있는데 이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 ?∼375, 재위 346∼375)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가장 강력하다. 1986년 서울대학교 발굴 조사에 의하면 중국 동진시대의 사이호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보여주는 4세기 후반의 유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에서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옥연석(玉硏石)이 발굴되기도 했다. 옥연석은 곡옥(曲玉)을 만드는 원석을 깨뜨린 후 모서리를 죽이고 표면을 부드럽게 만드는 도구로서 고대 옥제품 수입설을 뒤엎는 귀중한 유물이다.

 
근초고왕은 백제에서 가장 영토 확장에 힘쓴 왕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초기 한성백제 시대의 백제 왕권을 확립한 왕이다.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은 마한을 정복해 영산강 유역까지 그 세력권을 넓히고 가야와 일본까지 세력을 미쳤다. 북으로 눈을 돌린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지금의 황해도 백천에서 격퇴하고 황해도 신계까지 영토를 넓히고 371년에는 평양성을 공격,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백제를 일약 동북아 최강국의 하나로 성장시킨다.

 
석촌동 백제고분군은 1970년대 초 서울시당국의 잠실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해 유적이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학계에서는 74년부터 긴급 구제발굴을 실시했고 백제시대의 초기 유적임이 확인되고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이 일대에 광범하게 산포되어 있는 백제시대 초기 유적을 종합적으로 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83년, 84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석촌동 백제고분군을 가로질러 나기로 되어 있던 도로는 다행히 고분군 아래 지하차도를 파서 통과했다. 지금도 고분군을 둘러싼 담장을 돌다 보면 그 지하차도를 만날 수 있어 만약 이러한 조사 없이 그대로 고분군을 관통했더라면 어땠을지 아찔하기만 하다.

 

서울에 백제는 없다

 
고대의 시간 속에서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한강 유역이 고구려, 신라, 백제의 격전지였고 이곳을 장악한 국가가 크게 흥했다는 역사 시간의 가르침은 뇌리에 박혔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서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조선’의 위로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조선의 문화층을 걷어내면 거기엔 백제의 문화층이나 강 건너편 아차산성의 고구려 문화층이 출토된다. 서울은 복수다. 조선왕조 수도 서울만이 아닌 ‘여러 서울’이 시간의 좌표 위에 존재했었다. 눈을 감고 백제인의 서울을 떠올려본다.

 
춥고 긴 겨울은 북방의 유이민에게 더욱 혹독했을 터다. 허나 제 땅 한 평 갖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 겨울보다 더 큰 시련은 발뒤꿈치를 따라오는 말발굽 소리, 목구멍이 찢어져라 먹을 것을 보채는 아이의 울음소리였을 게다. 해를 바라보고 걷는 남행, 그들이 도달한 드넓은 평지, 거기엔 바다 같이 넓은 강이 있어 농사짓기 좋았다. 북에서 내려올 적군을 생각하면 강을 성벽삼아 강 이남에 살아야 했다.

 
이 남쪽 나라엔 이미 살던 원주민이 있었다. 백제인은 이들을 완력과 힘으로 몰아내지 않았다. 대신 구슬리고 어르며 공존과 상생의 길을 택했다. 한 곳에 모여 있는 석촌동 백제고분군의 다양한 무덤 양식이 이를 보여준다. 백제식 적석총, 고구려식 적석총, 토광묘, 봉토분 등 여러 가지이고 인근 방이동의 고분군 역시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있다. 요컨대 백제인처럼 다양한 무덤에 묻혔던 이들도 없다. 백제 무덤 양식은 여느 나라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다양하다.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지닌 집단을 인정하고 섣불리 그 풍습을 통일시키기보다 용인하고 포용했던 백제다. 적석목곽분 일색인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 호우총 등과 비교해보면 백제의 힘이 바로 이 공존과 상생, 여유와 관용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이란 하늘로 돌아가는 일, 그 옵션이 다양했다는 것은 땅에서의 삶 역시 다양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재물이 풍요로웠던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풍요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건 한강의 넉넉한 수량, 넓은 들, 야트막한 언덕과 산, 기름진 땅을 닮아 있다.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백제는 서울에서 살았다. 살 수만 있다면 서울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었을 것이다. 백제사에서 한성시대가 차지하는 시간은 400여 년에 이를 정도로 길다. 백제 하면 전라도와 충청도를 떠올리는 우리의 편협함은 사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서울을 조선의 땅으로만 남겨둘 수 없다. 왕의 명령으로 흙을 덮고 땅을 파서 원주민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고 양반을 위한 새 도시 서울을 세웠던 조선 초기의 ‘수도 이전 정책’과 달리 백제인은 한강 유역에 있던 이들과 어울려 살았다. 잠실 인근에 즐비한 백제의 유적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뿌리의 깊이가 만만치 않음을 드러낸다.

 
서울에서 백제를 찾아 발품을 팔아 짚어 다니는 일은 고토(古土) 회복의 쇼비니즘적 꿈을 찾아주는 일도 아니고, 시원(始原)을 찾는 허망한 종주도 아니다. 그건 서울로 하여금 기억을 더듬어주는 일이다. 그 기억을 더듬어 서울에서 어떻게 백제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다. 서울에서 백제인처럼 사는 건 가능할까.

 

새마을과 신도시, 그리고 뉴타운

 


캡션 : 아현동의 아침. 아현동은 우리말로 애오개 또는 애우개라 한다. 고개의 생김이 엄마 등에 업힌 아이의 모습을 닮았다고 이렇게 불렀다 한다. 엄마들의 출근길이 분주하다.

 
잘 살아 보자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말에 갇히면 ‘원칙적 찬성’에서부터 게임은 시작된다. 새마을운동도 그랬을 거다. 조상님이 묻힌 선산을 가로질러 신작로를 내는 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못 본다며 펄펄 뛰신 마을의 어르신도 있었을 터이지만, 저항과 반발도 추상같은 나랏님의 결심 앞에 모기 소리만큼도 전달되지 않았을 게다. ‘원칙적 찬성’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정책 앞에서 뭐 뾰족한 수가 있었으랴. 농촌은 국가에 의해 새롭게 구획됐고 남아도는 유휴 노동력은 땅에서 뿌리 뽑혀 서울을 향했을 거다.

 
이촌향도라 이름붙인 이 현상은 중등교육 시절 근대화의 한 표징으로 맥락화됐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은 가난한 사람이 아는 법. 향도했던 가난한 이들은 이른바 ‘판잣집’이 위태롭게 선 ‘새마을’인 ‘달동네’에서 그 경사도만큼이나 위태로운 삶을 이어갔다. 허나 지구의 법도는 달처럼 둥글지가 않았고 ‘철거깡패’의 발길질은 무도하고 잔혹했다. 잘 살아 보자고 달을 향해 빌고 또 빌어도 나랏님의 이마가 달 보다 더 강한 빛을 내던 시절, 올림픽 팡파레와 함께 철거민은 쫓겨났다. 상계동, 도화동, 돈암동, 사당동, 금호동, 목동, 신림동, 동소문동, 행당동, 서초동, 행동… 서울은 전쟁터였다.

 
도심 내부에 더 이상 짓부술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신도시는 변두리에서부터 성벽처럼 축조됐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는 일산과 분당에 바다 모래 섞은 신도시를 짓는 것에서부터 열렸다. 더 이상 달동네를 세울 빈 땅은 서울에 없었고 변두리 도시는 마천루 같은 고층아파트로 채워졌다. 전략을 바꿔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새마을을 만들지 않았고 헌 마을에 스며들었다. 지하방은 그네들의 참호였고 옥탑방은 그네들의 망루였다. 헌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마을이 더 헌 것으로 되는 만큼 퇴락했다. 그래도 헌 마을은 그런대로 사람들을 감싸줬고 그렇게 세월의 고비를 넘어가는 듯했다.

 
다시, 잘 살아 보자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도시균형발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글로벌 시대의 ‘뉴타운’은 ‘원칙적 찬성’ 표를 기반으로 추진되었다. 허나 빛 좋은 개살구다. 가난한 이들도 모처럼 목돈을 만졌으나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다. 서울 전역 25개소에서 추진되는 뉴타운은 모두 헌 마을이고 그 헌 마을 말고 이들이 발붙일 곳은 없다. 수중에 들어온 목돈 보다 더 뛴 게 땅값이다. 큰 평수 아파트는 2억이 떨어졌네, 3억이 떨어졌네 하는 보도가 나와도 그건 애초부터 상관없던 일, 이들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곳은 없다.

 
30여 년 서울 빈민의 연대기가 대체로 이러하다. 그동안 서울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풍상을 겪었다. 그 결과 사람은 지치고 도시는 성장한다. 가장 살기 좋았던 땅, 북방의 이주민이 정착했던 따뜻한 남녘땅 서울은 이제 사람이 살기에 가장 혹독한 북방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서울은 가난한 이들에게 여름에도 겨울이다.

 
새 정부와 새 시 당국의 도시정책은 조선 초기 정도전의 그것과 닮아 있다. 도성 밖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고 구획 정리해 양반들을 배치한 삼봉 정도전. 그래도 동대문 밖 창신동과 서대문 밖 애오개에는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토굴에 거적으로 바람을 막고 살지언정 내쫓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가난한 이들 모두를 몰아내고 있다.

 
주택보급률 108%인 나라에서 몸 누일 공간이 없어 유랑걸식 하듯 남쪽을 바라보고 걸어야 할 사람들. 유이민이 따로 없다. 백제인처럼 발견할 수 있는 땅은 어디에 있을까. 무덤이 달라도 황천길은 하나이듯 사는 집이 달라도 종국에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게 삶일진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서로 담벽을 마주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백제인처럼 서울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오늘도 뉴타운 예정지 집집마다 빨간 페인트로 ‘나가라’, ‘공가’, ‘부수자!’가 써갈겨지고 모두가 집자리로 혈안이 되어 있는데, 서울살이의 고단함은 언덕을 타는 마을버스 바퀴처럼 힘겹다. 허나 삶이 무덤보다 어두울지라도 그 삶의 힘은 역사만큼 깊고 난지도 쓰레기 산의 높이만큼 높다. 궁극적으로 철거될 삶은 존재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의 삶은 철거될 수 없다. 철거되는 것은 흔적일 뿐, 그 흔적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서울 빈민사가 그렇듯이 우린 다시 새 삶을 이어갈 것이고 그것이 도시를 다시금 백제인의 그것처럼 다양하게 꽃피울 것이다. 도시란 세련된 곳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헌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백제인처럼 살아내기, 그게 우리가 만드는 새마을, 우리가 건설하는 신도시의 방식이다. 새 삶은 헌 마을에서! 이것이 이 시대 우리의 슬로건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10/27 13:15 2008/10/27 13:15
글쓴이 남십자성
태그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blog.jinbo.net/redgadfly/trackback/40

댓글을 달아주세요


BLOG main image
남십자성입니다. 트위터 : @redgadfly 페이스북 : redgadfly by 남십자성

카테고리

전체 (142)
잡기장 (36)
삶창연재글 (15)
무비無悲 (15)
我뜰리에 (3)
울산 Diary (7)
캡쳐 (4)
베트남 (33)
발밤발밤 (18)
TVist (10)
탈핵 에너지 독서기 (1)

글 보관함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전체 방문자 : 468752
오늘 방문자 : 74
어제 방문자 :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