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안과 밖, 운주사 천불천탑
우주로의 여행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이 탑승한 싸유즈호가 지구를 떠나던 시각, 난 서울의 터미널에서 다른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텔레비전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떠난다는 것, 그건 무엇보다도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것’ 혹은 ‘같은 세계를 다르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네는 ‘지구인’과 다른 체험을 했을 것이다. 아무런 힘도 자신을 당기지 않는 무중력 상태를 느꼈을 것이고 대륙과 대륙 사이에 대양과 대양이 푸른빛을 내는 지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네가 바라본 지구는 지평선, 사막, 초원, 파도와 해미, 서산에 지는 붉은 노을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과 거리가 아득해진 그곳에서 그네가 몸으로 겪었을 것들은 ‘지구인’으로의 귀환 이후에도 ‘우주의 지평’에서 ‘지구의 삶’을 살도록 할지 모른다.
그렇다. 여행의 길에 섰다가 다시 돌아온 일상은 그 이전의 일상과 같을 수는 결코 없다. 무릇 새로운 체험은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연결되곤 한다. 여행자들이 떠나기 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이 성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하물며 우주라니. 제 힘으로 날아오를 재주가 없는 대부분의 지구인은 지구 행성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의 빛을 본 적이 없다. 먼저 우주로 나갔던 이들이 찍은 사진으로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아, 지구는 파랗구나. 구름과 바다와 대륙이 저마다의 빛을 내고 그 빛이 모여 결국은 파랗게 빛나는구나. 또 그 우주의 빛은 어떤가? 검은 공간을 점점이 박혀 빛을 내는 행성들이 있고 그 행성이 모여 성운을 이루고 은하를 이루고 또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그러나 지구는 우주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우주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구인’이기 이전에 ‘우주인’이었다. 그러나 지구인이 우주를 여행한 방식은 현대의 그것처럼 로켓을 단 우주선을 타거나 우주정거장에서 생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공간적 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혹은 조형적 활동을 통해서, 붓과 목판 혹은 나침반과 제도기를 사용해 지구를 지도로 그려내듯이 별도 그려냈고 별자리도 그려냈다.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고 생시와 천체 운행을 따져 기운을 재고 운명을 점쳤다. 이것을 우주를 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를 품어냄으로써 우주와 지구의 경계를 지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이미 우주의 지평에서 빛을 내고 흐름을 만들고 삶을 새롭게 사유하고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 우주를 그려낸 절, 운주사가 있다. 남도 땅에 숨은 우주적인 미스테리를 간직한 골짜기에서 우리는 과거의 우주인들을 만날 수 있다. 우주선에 몸을 싣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우주의 빛, 거기엔 과거의 우주인이 품었던 간절한 소망, 희망 그리고 그 마음을 모아 세웠던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부처가 있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황석영은 <장길산>의 대미를 운주사 천불천탑 이야기로 장식했다.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은 노비들이 봉기하였으나 관군에 패했고 살아남은 이들이 숨어든 곳은 천불산이었다. 이곳에서 노비들은 미륵의 계시를 듣는다. 하룻밤 만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백성이 주인 되는 미륵의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겨우 하룻밤 사이에 천 개의 부처와 천 개의 탑을 세운단 말인가? 그러나 노비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밤을 새워 천불천탑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마지막 하나 남은 미륵을 세우기 직전, 노동에 지친 한 사람이 있어 소리 높여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닭이 울었다.” 미륵을 밀어 세우던 사람들, 부처가 되기 위해 달려오던 바위들, 모두가 실망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와불이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버린 이유다. 그러나 언젠가 미륵의 새 세계가 올 것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은 변함없어 그 소망이 천불산 골짜기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문화재청
물론 황석영의 ‘구라’는 지난 세기 으뜸인지라 이 이야기는 모두 그의 붓끝에서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운주사는 12세기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운주사가 먼저고 장길산은 나중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들 또 어떠하랴. 만인이 믿으면 ‘구라’는 더 이상 ‘구라’가 아니다. 그건 어떤 염원의 표징이 된다. 그래서인지 운주사 홈페이지 첫 화면엔 “와불이 일어서는 날, 이 땅은 민중의 염원인 불국정토가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별처럼 점점이 박힌다. 전설을 듣고 황석영이 재가공한 이 이야기는 군사독재의 시대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 1980년대의 염원이 와불을 일으켜세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운주사 만큼은 널리 알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운주사를 찾아 와불을 친견했고 여기에 스며 있는 갖가지 전설을 들었다.
운주사에 들어서면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의 탑들을 만나게 된다. 탑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양을 하고 있고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또 그 탑들은 양편 언덕 위, 산 중턱에도 세워져 있어 어떻게 그 험한 지형에 탑을 세웠을지 궁금해진다. 더 궁금한 건 탑을 조성했을 그니들의 마음이다. 탑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력을 쏟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로 스며들어 열과 성을 쏟아 그렇게 하나씩 탑을 세웠을 터이다. 현재 운주사에 석탑과 석불은 통틀어 100여 기에 불과하나 1940년대 조사 결과에는 몇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200여 기의 탑과 불상이 남아 있었다 한다.
ⓒ 운주사
사실 한국미술사에서 운주사는 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불상이나 탑 모두 그 형태가 특이하여 주목할 듯도 하지만 조형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거친 조각 수법이나 정형성 없는 형태로 인해 평가절하되어 왔다. 함께 답사를 다니던 이들이 “운주사가 미술사적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지”라는 촌평을 거리낌없이 붙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사학자가 아닌 다중에게 경주의 옛 사찰들이 아무리 완벽에 가까운 조형미를 지진 석탑과 석불이 즐비하더라도, 제 아무리 원형의 가람배치를 지녔을지라도 결코 운주사만큼의 영감을 주지는 못한다. 갑녀을남이 운주사를 찾았을 때, 그들이 아무리 미술사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네들이 직관적으로 받는 강렬한 느낌만큼은 전국 여느 유적지에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느낌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칠성바위의 비밀
운주사의 가람배치는 여느 사찰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보통 절집의 배치가 일주문을 들어서면 법당이 나오고 그 앞에 탑이 한 기 혹은 두 기 서 있기 마련인데 운주사는 탑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서 있다. 천탑이 있었다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또 왼편 산 중턱에는 특이하게도 칠성바위가 있다.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둥그런 바위 일곱 개는 칠성신앙을 상징한다. 그 크기는 두께가 45센티미터, 무게는 작은 것이 12톤, 큰 것은 20톤에 이른다. 사위를 둘러보면 이 바위는 어디선가 옮겨온 것이 분명하며 정을 쪼아 동그랗게 다듬은 것이다. 칠성바위는 거의 북두칠성의 배치 그대로이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북극성을 찾는 방법은 북두칠성에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대로 칠성바위로부터 북극성 위치를 찾아보면 거기엔 놀랍게도 운주사를 상징하는 와불이 있다. 칠성바위가 북두칠성이라면 와불은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운주사의 가람배치는 도교의 칠성신앙이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칠성바위는 칠성여래(七星如來)를 상징하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석가여래(釋迦如來)를 형상화한 와불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은 운주사의 가람배치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운주사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의 배치와 거리를 따서 바로 그 위치에 칠성바위와 와불을 조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저기 우뚝 솟은 탑들은 무엇일까? 한 천문학자의 연구는 놀랍다. 운주사의 탑들은 일등성에 해당하는 밝기의 별을 나타내며 현대 천문학에서 그리는 일등성들의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운주사 골짜기에는 천불천탑이 있다”고 한 기록은 무엇일까? 다기한 형태를 했을 탑들은 다 무엇일까? 우주는 밝은 별들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수많은 이등성, 삼등성, 사등성, 아니 이름도 없는 수많은 밤하늘의 뭇별이 바로 천불과 천탑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운주사는 일종의 지도다. 우주 지도. 우주를 지구 안에 들여온 것이고 골짜기에 우주를 새긴 것이다. 천불산 골짜기에서 고려인들은 우주인이 되었다. 별과 별 사이를 누비고 탑을 세움으로써 저마다 별이 된 셈이다. 그 많은 별이 모이고 모여 우주를 이루었다. 천 개의 탑을 세우고 천 개의 부처를 세웠다. 그 많은 소망과 소망이 모여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이 성큼 눈 앞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우주여행은 이렇게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을 모아 배를 띄워놓고 흘러가는 방식(運舟)으로 이루어졌다. 별이 모여 배를 건조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은하수처럼 흘러 조금씩 그 꿈을 이뤄갔다.
와불이 일어설 것인지 아닌지는 사람들 마음의 간절함에 비례해서이다. 와불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들이 미륵을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안아오는 것이다. 와불은 최종심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일종의 마침표에 불과하지 않을는지.
촛불, 별이 되다
서울 복판에 촛불 하나가 별처럼 켜졌다. 그 촛불이 흘러가면서 다른 촛불을 밝혀 저마다의 소망과 염원을 모아나갔다. 촛불은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었다. 그 촛불의 물결은 저마다의 소망과 소망이 모여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이 성큼 눈앞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처음 촛불은 청계천과 같았다. 높다랗게 쌓은 석축을 넘지 못했고 그 안에서만 빛났다. 촛불이 늘어나자 그 물결은 마치 운하처럼 전국으로 넘쳐흘렀다. 마침내 촛불은 바다가 되었다. 청계천을 복원한 대통령은 대운하를 포기했고 바다 건너로 정부 대표를 보내야 했다. 촛불이 만들어낸 지도는 마치 은하수처럼 흘러나갔다. 그리하여 촛불은 별이 되었다. 그건 우주를 품은 것처럼 경이로운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광장에 나설 때 마치 우주여행이라도 하듯 즐겁게 길을 나섰고 두 달이 넘도록 거리에서 밤을 지새웠다. 국가라는 중력을 느끼지 못하는 무중력 상태에서 그네들은 오직 서로의 인력(引力)으로 화해롭게 지탱했다.
여행의 길에 섰다가 다시 돌아온 일상은 그 이전의 일상과 같을 수는 결코 없다. 무릇 새로운 체험은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연결되곤 한다. 우주를 여행한 이들이, 아니 우주를 땅에 새겨 넣은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안아올 것인지는 그 마음의 간절함에 비례할 것이다. 아직 촛불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내려와야 촛불의 시간이 끝날 것인가? 미륵이 청와대에 들어가야 촛불의 시간은 끝나는가? 아니다. 누워 있던 미륵이 서는 건 촛불을 든 이들이 별이 되고 탑이 되고 부처가 될 때 가능할 것이다. 성불, 부처가 되는 일,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면 우리가 곧 미륵이다. 촛불의 시간은 수행의 시간, 그건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여기가 戰線이다!/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전선을 뜨는 건 비겁한 짓이다.”*
* 장석주, 「화순 운주사에서」, <절벽>, 세계사, 2007, 9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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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2008/07/03 15:47양새슬님의 [지구의 안과 밖, 운주사 천불천탑] 에 관련된 글. 언제나, 제 자리에서, 세상의 모든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운주사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가보자고 재촉하는 나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듯. 아무래도 혼자 여행을 다녀와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