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답답하다.

 

되는 일이 없다.

 

아직 난 울산에 있다. 9월 20일 상경 예정이었지만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 몇 달간 녹취한 것을 검독중이다. 검독을 하면서 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른다. 어렵사리 예산을 마련해서 푼 녹취의 퀄리티가 형편없다. 지금 세 번째 것을 검독중인데, 이건 아예 다시 내가 직접 푸는 게 나은 정도다. 검독이 아니라 완전 새로 푸는 수준이다.

 

물론, 구술자의 얘기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 안 들리는 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 내가 검독한 부분과 녹취록 알바 친구들이 푼 게 이렇게 다르다.

 

이제 이렇게 눈빛만 봐도 알 만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게 기계공장에 동력회, 조립공장에는 걸립패, 권용목 씨나 사영운 씨 그런 사람들 주축으로 한 그런 모임이 있고.

 

녹취록 알바 친구들이 푼 초벌 녹취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눈빛만 봐도 알만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게 '비온 뒤에 악어들' '들불' '그릇 공장에 건립' 권용묵씨, 사영립씨 그런 사람들이 주축으로한 그런 모임이 있고

 

권용목을 권용묵으로, 사영운을 사영립이라 풀어놓은 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사람 이름, 지명 등은 배경지식 없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인터뷰 자리에 함께했던 나 역시 잘 안 들리기도 하니까. 그런데 서두의 '이제 이렇게' 같은 말을 빼먹는다든가 띄어쓰기, 맞춤법이 틀리면 화가 난다. 더구나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아무렇게나 머릿속에서 생각난대로 옮긴 저 '비온 뒤에 악어들'을 보고서는 이어폰을 내던지고 정말 어이 없어 한참을 웃었다.

 

2. 보통 1시간짜리 녹취를 풀면 나 같은 경우에는 8시간이 걸린다. 물론 다시 들으면 또 새로운 게 들리고 틀린 게 발견된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퀄리티가 어느 정도는 담보되는 시간은 곱하기 8이다.

 

퀄리티만 괜찮다면 검독 시간은 1시간, 혹은 2시간이면 된다. 멈춰가면서 들을 필요도 없고 쭈욱 들으면서 조금씩만 만져주면 된다.

 

근데, 지금 녹취록들 수준은 검독 시간이 10시간 이상씩 걸린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내가 모든 녹취록을 혼자 검독해야 하니 그 시간이 한정 없이 길어진다. 게다가 몸도, 마음도 지치고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녹취비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예산은 이미 다 집행이 되었다. 수고는 했으니 녹취비야 당연히 집행이 됐어야 한다. 오히려 적게 책정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검독 때문에 다른 할 일을 못하고 있는 건 참 답답하다. 녹취록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들, 아까 위의 녹취록을 예로 든다면 1987년 당시 울산 현대엔진에 기계공장, 조립공장 외에 어떤 부서들과 체계로 회사조직이 편성되어 있었는지 등등을 조사해 각주로 달아넣어 준다든가 하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녹취록이 그야말로 녹취록으로만 머무르게 된다. 역사 자료, 사료가 연구자로 하여금 더 풍부하게 해석될 수 있을 여지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녹취록은 10여 개. 한숨만 나온다.

 

게다가 마지막 구술인터뷰의 경우에는 하도 이런 녹취록 퀄리티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초벌녹취를 아예 내가 했다. 그리고 녹취 알바 친구에게 보내주려고 했는데 케이블도 잃어버리고, 다시 주문했더니 엉뚱한 게 오고, 반품하고, 다시 주문하고... 이런 과정이 일주일, 이주일 걸리니. 또 이러저러한 다른 잡무와 부탁들, 요청들에 휘둘리다 보면 정작 녹취록 검독에 실제 투여되는 시간은 형편없이 적다.

 

답답할 뿐이다. 처음 사람들이 생각했던 시한보다 한 없이 길어지는 게. 성과물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게.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 두어야겠다.

 

1. 절대 대학생들에게 녹취 아르바이트를 시키지 않겠다. 그건 대학원생도 경우에 따라서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물론 잘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학생'이라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요즘의 대학생들은 과거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게 없다. 전무하다. 배경지식, 그런 건 요원한 얘기다. 이게 노동에 대해서만 그럴까. 다른 모든 종류의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

 

2.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검독'에 대한 예산도 반드시 배정되어야 한다.

 

3. 함께 인터뷰어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초벌녹취록 작성을 '함께' 하도록 하는 걸 원칙으로 세워야겠다.

 

4. 녹취 아르바이트 친구들을 반드시 사전에 교육시켜야겠다.

 

5. 맞춤법, 띄어쓰기 못하는 친구들은 미리 시험이라도 쳐보고 싶다. (이건 교훈이라기보다는 바람이다. 어휴.)

 

 

6. 친한 사람, 계속 친하고 싶은 사람 하고는 녹취 일 같이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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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13:22 2007/11/21 13:22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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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2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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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2. 2007/11/22 20:0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안녕^^ 나 윤샘. 우짜다 들와왔네. 힘내시고, 짜증나 한 100번 외치면 쫌 낫지않을까? 제대로 된 책 하나 나오려면, 산고의 고통을 격어야한다던데....덧들달기 심히 걱정되네(맞춤법, 띄어쓰기 ㅋㅋ)
  3. 2009/03/18 10:0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속기사한테 의뢰하시는 게 시간절감, 예산절감, 객관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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