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1991년 5월 투쟁 과정에 고등학생운동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신문과 자료 등에 드러난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해보도록 한다. 이에 대한 자료가 많지는 않은 관계로 당시 고등학생운동의 활동상을 풍부히 드러내지는 못하겠지만 대강의 모습은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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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투쟁 당시 광주 지역에 고등학생운동 단체에서 배포했던 유인물>  

  

1) 1991년 5월, 고등학생들은 무엇을 했나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른바 1991년 5월 투쟁은 1987년 이후 성장하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결절점이었다. 노태우 정권 시기는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의 방향과 속도가 아직 가변적인 상황이었고 보수적․위로부터의 경로 혹은 진보적․아래로부터의 경로를 둘러싸고 힘겨루기가 진행중인 시기였다. 민선군부정권과 민주화운동 세력 중 그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이 1987~1991년까지의 역관계였다고 한다면 1991년 5월 투쟁의 패배 이후에는 보수적인 형태, 그리고 점진적인 속도의 이행이라는 윤곽이 비교적 뚜렷해지게 된다.


1991년 5월 투쟁은 4월 26일 ‘백골단’이라 불리던 경찰의 사복체포조에 의해 명지대 1학년 학생 강경대가 사망한 날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거리 정치’의 시간은 6월 20일경까지 대략 50여 일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고등학생들은 1991년 5월 투쟁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거리 시위를 조직했다. 1991년 4월 29일 연세대 국민대회부터 5월 1일 노동절 기념대회, 5월 4일 백골단 추방 국민대회, 5월 9일 민자당 해체 범국민대회, 5월 18일 노태우 정권 퇴진 범국민대회에 이르기까지 고등학생들은 매 시위마다 200~1000명에 이르는 대오를 꾸려 ‘타도 노태우’, ‘쟁취 참교육’을 외쳤다.
 

5월 4일 범국민대회에서는 용산고등학교 학생 10여 명이 ‘우리는 고등학생’이라고 적힌 흰색 깃발을 들고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쳐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을지로에서는 고등학생 200여 명이 ‘참세상 쟁취 고등학생’이라고 적힌 대형 깃발을 들고 참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한 5월 9일 성남지역 시민대회에서는 중고생 20여 명이 ‘성남을 사랑하는 중고등학생’이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참교육을 말살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에 합류했다. 부산에서도 남포동에서 서면 네거리까지의 행진에서 고등학생들이 합류하기도 했다. 5월 11일 안양병원 앞에서 있었던 노동자대회에서는 고등학생 20여 명이 참가했고 한 학생은 연설을 통해 “강경대 오빠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뒤 계속되는 분신으로 충격을 받았다”면서 “참교육을 말살하는 노태우 정권이 퇴진해 더 이상 죽음이 없기를 바란다”고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5월 15일 강경대 열사의 장례 때는 고등학생 2백여 명도 참가해 ‘노태우 퇴학’이란 깃발과 ‘경대형을 묻기 전에 노태우를 먼저 묻자’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
 

5월 18일 국민대회에서는 청계천 3가에서 을지로3가 도로를 따라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 서울연맹’ 깃발을 내건 고등학생들이 대열을 이뤄 행진하다가 시민․대학생 시위에 참여했다. 을지로에서 시민․학생 4천여 명과 함께 있던 이날 시위에서는 ‘새날을 여는 고등학생’, ‘민족의 양심 고등학생’ 등의 깃발도 보였고 “쟁취 참교육”, “타도 노태우”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이 날 고등학생들은 깃발을 보고 이 대열에 속속 합류했고 나중에는 1500여 명에 이르기까지 했다. 또 같은 날 ‘고등학생 정치활동 쟁취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는 ‘18세 선거권 쟁취’ 등의 주장을 호소하기도 했고 고가도로에서 세로로 된 플래카드를 내리기도 했다. 공실위는 이날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리집회의 고등학생 대오 앞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울지역의 고등학생들은 최대한 많은 학생들을 각 학교에서 동원하기 위해 애썼다. 당시 남부지역에서 핵심적인 학교이기도 했던 인헌고등학교에서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5월투쟁의 과정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우리 학교가 어쨌든 최대, 고2가 몇 명이었는지, 30명이 나갔어. 한 30명 수준이 저기 거기 그 어떤 집회에 나갔던 거 같애. (…중략…) 많이 있었잖아. 그 많은 것 중에 최대 집중날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 최대 집중 때가 한 30이 됐던 거 같고. (서연희 구술)

 

이러한 가운데 광주시 교육청은 1991년 5월 16일 중고등학생들에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행사개최나 묘역참배 등을 요청할 경우, 18일 학교별로 학교장 재량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기념행사를 갖도록 각 고등학교에 시달했다. 교육청이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의 5․18기념행사를 공식 허용한 것은 80년 이후 처음이다.


이에 따라 광주 전남 지역 각 학교에서는 5․18 추모 행사가 열릴 수 있었다. 그 시각 강경대의 장례 행렬은 망월동으로 향하고 있었고 같은 날 노태우 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20분께 전남 보성군 보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생 7백여 명이 학생회 주최로 ‘5․18 추모행사’를 갖던 중에 3학년 김철수(18)가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김철수는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행사장으로 달려나가며 “이런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쳤다. 곧이어 김철수는 전남대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6월 2일 운명하였다.
 

김철수는 죽기 전 분신 현장에서 타다 남은 종이를 남겼다. “XXXXXXX 왜 죽은지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친구들아 12년이란 긴 세월 XXXXXXX 목이 메어 우리 XXXXX 쇠사슬에 쥐꼬리만한 명예와 권력을 위해 공부벌레가 되어 주길 바라는 기성세대 및 벌건 대낮에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심장이 터질듯한 분노의 가슴을 잃어버린 우리 배움에 학도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또 그는 ‘참교육 쟁취’, ‘노태우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내용의 녹음 테잎을 남겼고, 그 테잎의 복사본 일부는 전교조를 통해 전국의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에게 전달되기도 하였다.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 서울연맹에서 나온 <마당>에는 그 일부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김철수 학생은 “박승희 분신 이후 죽음을 각오했다. 우리나라 전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어나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은 김철수의 분신 이후 더욱 조직적으로 거리시위에 나섰다. 5월 19일 전남대병원 응급실 앞에 모인 고등학생 6백여 명은 4차선 도로를 점거한 뒤 광주지방노동청 앞까지 거리시위를 벌이고 다시 금남로 3가 광주은행 네거리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 노제에 20여 개의 깃발을 들고 참석하기도 했다. 또 5월 21일에도 고등학생 3백여 명은 조선대 민주로에 모여 ‘보성고 김철수군 분신에 따른 광주 고교생 결의대회’를 갖고 입시위주 교육 개선과 참교육 실현 등을 촉구했다. 6월 8일에는 서울지역 고교생 2백여 명과 전교조 교사 등 8백여 명도 동국대 만해광장에서 김철수 추모제를 가진 뒤 ‘6월 항쟁 계승 및 노태우 정권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제5차 국민대회’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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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9일, 광주 도청앞 노제를 위해 행진 중인 김철수 열사 장례행렬과 도청 앞 노제 장면>

 

2) 1991년 5월 투쟁 이후의 탄압 국면과 저항
 

5월 투쟁이 고 김기설 열사 유서대필 사건 논란이 지속되고, 6월 3일 외국어대 정원식 총리 서리 계란 세례 사건 등 이후 사실상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자 5월 투쟁에 참여했던 고등학생들에 대한 탄압도 잇따랐다.
 

1991년 6월, 각 시도 교육청은 학생들의 소지품 검사와 동향파악을 강화하라는 내용의 ‘고교생 정신교육 강화 계획’이란 제목의 공문을 일선 고교에 보냈다. 공문의 내용 중에는 문제 예상학생 관리 및 예방지도 철저라는 항목에서 주기적인 소지품 검사, 불온 게시물과 유인물 점검, 교우 관계, 불량 단체 가입․접촉 여부 관찰 등을 통해 학생들의 의식화를 막을 것을 지시하고 있다. 또한 집단소요 예방 항목에서는 학생의 불순집회 불참을 지도하기 위해 참가 가능학생을 파악하고 집회장 현장지도를 철저히 할 것을 지시하고 있고 또한 교사들로 순회조를 편성, 직원회의․점심시간․휴식시간 때 순시지도를 강화하고 전교직원의 비상연락체계와 비상시 역할분담계획을 세우기로 한다는 등의 내용까지 있었다.
 

이러한 학교규율체제에 의한 학생 통제의 강화 방침에 따라 서울의 한 고교에서는 교사들에게 학생시위 대비훈련을 시켜 물의를 빚는가 하면, 부산 해운대고와 충렬고에서는 잡부금 징수 등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렸다는 이유로 1명을 퇴학시키고 9명을 무기정학 시키는 등 22명을 무더기로 징계하기도 했다. 또, 5월 25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3차 국민대회에 참가했던 청주상고 3년생 박 아무개(18)군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박군이 가입한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KSCM) 회원 고교생들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또한 경남 마산공고는 경남대에서 해직교사들을 초대해 스승의 날 행사를 가지려던 학생 3명을 무기정학에 처한 데 이어 이들에 대한 징계철회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린 2명의 학생을 퇴학처분하고 7명을 무기정학시켰다.


또 고척고등학교에서는 6월 24일, 일간지 만평과 시국문제를 실은 학급신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재복(3학년)을 퇴학 조치해 남녀학생 4백여 명이 교문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서울시교육청의 공문이 내려간 직후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6월 13일 체육시간에 2명의 교련 교사들이 소지품 검사를 했고 3학년 9반에서 학급신문이 발견되자 강현주(90년 학생회 부회장) 외 4명을 추궁하고 이재복을 퇴학 협박했다. 이재복은 6월 14일 학교 측이 강요하는 진술서 작성을 거부했고 이에 학교 측은 17일 등교 정지를 조치했다. 이에 불응하고 이재복은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등교 투쟁을 벌였고 21일에는 고척고는 직원회의를 통해 불법유인물 제작과 지도 불응, 90년의 각서 위반을 이유로 퇴학 조치했다. 이에 6월 21일 같은 반 학생들 20여 명이 라카로 낙서를 했고 6월 27일에는 등교해 교실에 앉아 있던 이재복을 112 순찰차가 출동해 연행, 고척2동 파출소에 5시간 구금 후 훈방 조치했다.


서울 대원고등학교에서는 5월 학생들이 학교 담에 ‘선배 뜻을 이어받자’는 내용의 구호를 써넣다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5월투쟁 과정에서 5월 1일 분신한 안동대 김영균은 대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고등학생운동 활동가였다. 대원고등학교 활동의 중심에는 6명의 학생이 구성한 ‘교육민주를 염원하는 학생 소모임 목마름’(이하 목마름)이 있었다. 목마름은 88년 직선제 학생회 쟁취부터 시작해서 89년 전교조로 인해 해직된 나승인 선생의 복직과 전교조 사수를 주장하는 유인물 배포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학내에서 전개했다. 이 같은 활동에 김영균은 중심에 있었고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목마름 회원은 13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 선배가 안동대학교에서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내 동아리연합회 등에서 활동하던 후배들은 유인물을 배포하고 벽낙서를 썼다. 박윤상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던 박윤상은 당시 텔레비전에서 김영균의 분신 소식을 보고 그 즉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대구 경북대병원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학교에 유인물을 배포한다.

 

이 사건은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왜 그 이 형이 죽었는지 아느냐, 후배로서 이것이 사건이 안 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뭐 교실 같은 데 뒤에다가 신문 스크랩해서 분신한 기사 같은 걸 교실 벽에 붙여놓고 이런 수준이었다가, 이거는 이대로 가면 안 될 거 같다 그래서 인제 유인물 뿌리고. (…중략…) 새벽에 돌렸는데. 밤, 전날 밤에 미술부실 이런 데에 가서 전날 저녁부터 숨어 있었고, 새벽에 2신가 1신가부터 작업을 시작하자. 그래서 애들이 한 10명 정도 모여서 (…중략…) 그래가지고 유인물, 그 유인물도 완전히 무식하게 전 반을 다 돌면서 책상 하나 하나마다 다, 층 나눠서 교실, 층 나눠가지고 그러다가 성공하고 다 돌리고 나서 인제 의기양양해서 학교 걸어오다가 막 애들이 스프레이로 교장 욕도 해놓고 이런 짓하고 놀다가, 경찰차가 (웃음) 앞에 가는데 아래 위로 까만 애들이 옷 입은 애들이 가니까 경찰이 당연히 이상하게 봤겠지. 경찰차가 딱 앞에 가는 거예요. (…중략…) 경찰이 딱 보니까 이거 진짜 이상한 놈들이다. 잡아가지고 보니까 이제 뭐 이렇게 저렇게 웃기는 놈들이구나. 그러면서 이제 한 새벽 6신가 5신가 이렇게 앉아가지고 교장이랑 막 학생주임 파출소에 와서 인제 인수인계하고 부모님 오시고 이러면서 새벽에 긴급하게 교사들이랑 소집해가지고 유인물 수거를 했어요. 몇몇 몇 장 정도는 일찍 온 애들은 아마 봤을 텐데,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 말하자면 알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때 움직였던 애들은 그 중심적인 애들이 다 있었고, 학생회장 빼고 다 있었고, 학생회 간부도 있었고. 그때 그러면서 잡히면서 현장에서 다 잡히면서 그야말로 학교 측으로선 대어를 낚은 거죠. 이렇게 움직이는 놈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런 게 있었구나. 이러면서 그때 다 걸려서 저는 (…중략…) 무기정학 당하고 그담에 줄줄이 최소 근신부터 해서 줄줄이 엮였고. (박윤상 구술, 가명)

 

이런 탄압 국면에서도 교육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고등학생들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10월 12일 진광고․대선고․상지여종고 재학생 1천 5백여 명이 시내 명륜동 남부시장 앞 도로를 막고 농성을 벌였으며, 10월 30일과 31일 연 이틀 동안 2천여 명이 중앙동 지하상가 로터리와 군인극장 앞 로터리를 점거한 채 “고교경쟁 입시 부활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원주의 시위는 춘천으로도 번져 나갔다. 춘천지역 3개 사립고교생 1천 8백여 명도 11월 4일 춘천시 춘천종합운동장 앞 빈터에 집결, 고교 경쟁입시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춘천시내 성수고․유봉여고 1․2학년생 1천4백여 명은 오전 9시 30분께 춘천시 중앙로 춘성군 농협 앞 도로를 점거하고 평준화 해제조처 철회를 주장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1991년 11월 3일에는 한국고등학교기독교운동총연맹, 흥사단고등학생아카데미, 한물결청년회, 푸른소나무, 청소년언론운동체 우리소리 등 6개 학생단체는 오후 3시경 연세대학교 노천강당에서 학생의 날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투경찰 4개 중대 500여 명이 배치되어 행사를 원천봉쇄 했고 이에 주최 측은 장소를 옮겨 연세대 학생회관 4층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학생 1백여 명은 쇠파이프와 화염병 등으로 무장한 채 학생회관 주변에서 경찰의 교내진입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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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3 09:34 2011/05/03 09:34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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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5월이 가기전에...

    2011/05/27 17:17
    삭제
    남십자성님의 [1991년 5월 투쟁, 그리고 고등학생운동] 에 관련된 글. 가끔 남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 그때 나도...."하고 떠올리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그럴때마다 나도 비슷한 걸 한번 써보면 어떨가 하는데, 아직도 주위에서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 혹시라도 한다리 건너 관련된 사람 있으면 민망하지 않을까, 혹 누군가에게 누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쉽게 포기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지나온 시간들, 즐거운 일, 슬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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