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1일, 서울 프란치스꼬회관 2층에서 열린 91년 5월 대투쟁 심포지엄에 다녀 왔다.
나는 2부 발제자 중 한 명으로 갔다.
1991년 5월투쟁을 5월 대투쟁이라고 부르는 데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제목은 저랬다.
1부 시작할 때는 플로어에 56명, 발제,토론자 6명, 발표장 바깥 6명 정도 해서 총 68-70명 정도 있었던 것 같다.
플로어에는 유가족들이 상당수 참석해 계셨는데, 그분들 앞에서 하는 발제는 청중석에 앉아 있는 내가 보기에도 좀 민망하기도 했고, 이 토론회가 뭔가 싶기도 했고, 좀 감정이 복잡했다. 유가족들 말고도, 열사추모사업회 상근 일꾼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이어진 2부 때는 유가족들 상당수가 돌아가셨고, 그래서 플로어에 25명, 발제자 6명 정도 있었다. 총 31명?
토론회 끝나고서도 술자리가 이어졌지만, 난 가지 않았다.
대신, 91년 5월을 나와 마찬가지로 아주 괴롭게 기억하고 있는 후배와 새벽까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사실 이날 오전에는 집에서 정태춘 노래를 계속 들었는데,
그래서 아주 기분이 저조했다.
정태춘은 91년 5월 이후의 정서를 제일 잘 간직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 정서가 전이되어서였는지, 아휴... 정말, 술 생각 밖에 안 났다.
사진은 1부 밖에 찍지 못했고,
1-2부 모두 녹취를 해뒀다.
행사의 대략적인 순서는 이랬다.
■ 식전행사
-여는 말
-격려사
■ 제1부 : 91년 5월 대투쟁의 역사성과 현재성
- 사회 : 조현연(성공회대학교)
- 발제자 : 배성인(한신대학교)
윤상철(한신대학교)
이승원(성공회대학교)
- 토론자 : 권영숙(서울대학교)
한현우(광주전남추모연대)
■ 제2부 : 91년 5월이 2011년 5월에게 말한다
- 사회 : 문치웅(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 모두발제 : 장대현(한국진보연대)
양돌규(당시 고등학생운동)
원진욱(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박용진(진보신당 부대표)
김병철(금속노조 한진지회 열사정신계승사업회)
안진걸(참여연대)
박래군(‘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주최측이 자료집에 실을 글을 써달라고 해서 난 2개의 발제문을 제출했다.
한 개는 91년 5월 당시 고등학생들이 어떤 활동을 했나 하는 것을 팩트 중심으로 정리하면서, 그것이 세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개는 91년 5월에 대한 개인적 기억과 소회를 적어둔 것이었다.
똑같은 글은 아니지만, (각주도 빠졌고, 일부 내용도 빼뒀지만)
블로그에 각각의 글을 게시해뒀다.
하지만 발제는 발제문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했다.
발제 시간을 짧게 줬기 때문이기도 했고,
1부를 들으면서 지금 91년 5월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강조해둬야 할 것들이 좀 있을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래는, 내가 발제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더 살을 붙여서) 메모 형태로 정리를 한 것이다.
= 발제 모두 발언
다른 분들은 조직과 단체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나왔지만 나는 개인으로서 이 자리에 왔다.
자격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7-8년 전에 91년 5월 투쟁과 관련한 글을 썼던 게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면서
그걸 읽은 주최측에서 섭외가 들어와서 나오게 됐다.
개인 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정세분석, 그에 기초한 전망과 실천 과제를 얘기할 능력도 재주도 내겐 없다.
오히려 다른 분들과 다르게 난 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고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놓기보다는 다소 두서없는 발제가 될 듯하다.
양해를 바란다.
= 91년 5월세대와 참교육세대
1945년부터 1948년, 혹은 1950년까지를 해방 3년사, 해방 5년사라고 부른다.
그건 해방 이후 한반도의 상황이 매우 유동적이고 결정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
제 세력간의 힘관계와 시공간을 다루기 위해 설정하는 것 같다.
만약 가능하다면 나는 1987년부터 1991년 5월(또는 92년 12월)까지의 시공간을
'민주화 5년사' 같은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바로 그 시공간을 경유한 사람들은 그 이전,
즉 1980년 광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나,
1992년 이후의 소위 '신세대'로 불리던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경험과 다른 주체화 과정을 겪은 것 같다.
이들을 '세대'로 부르는 용어는 대략 2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91년 5월세대 : 87년 6월을 겪지 못하고 91년 5월을 겪은 (대학으로 치면) 88, 89, 90, 91학번
두번째는 참교육세대 : 87년 6월 이후 전교협과 이후 전교조 출범 시기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연령집단
이 둘 다 저널리즘에서 붙인 용어이고 따라서 사회과학적으로 적실성이 있는 개념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분석을 위해 쓸 수 있다고 본다.
이 세대에 대한 관심이 91년 5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개인적인 동기 중 하나였다.
(이 심포지엄 발제,토론자 15명 중에도 '참교육세대'라 불리는, 고등학생운동 출신이 4명이다.
이들이 지금 운동사회의 진보정당, 민주노총 쪽에 광범하게 포진되어 있고 주요 비정규직투쟁의
맨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교육세대는 91년 5월세대의 일부였고 둘은 중첩되어 있지만 그 문화가 확연히 다르다.
91년 5월세대는 오히려 92년 이후 신세대와 그 성장과정 속 경험이 유사하고 신세대'스럽다'.
그렇지만 91년 5월의 경험을 겪으면서 자신들을 신세대의 일부로 포함시키기가 어려워졌다.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91년 5월의 학생 열사들의 존재이다.
이 학생 열사들 중에 스스로 분신을 했던, 그리고 분신 정국의 서막을 열었던 이들은 모두 '참교육세대'였다.
박승희 열사는 광주에서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고,
김영균 열사는 서울 대원고,
천세용 열사는 서울 동북고,
김철수 열사는 전남 보성고에서 고등학생운동을 했다.
그렇다면 91년 5월 세대와 (분신을 감행했던) 참교육 세대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참교육 세대는 중고등학생 시절, 앞서 말한 한국의 '민주화 5년사'의 기간 속에서 자랐고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참여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었다.
그 시간동안 목격했던 88년 박래전, 조성만 열사, 89년 이철규, 이내창 열사 등 수많은 열사들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이 운동의 활성화와 결집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고 자랐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91년 5월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경험이었다.
어쨌든 열사들은 91년 5월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고, 또 91년 5월 세대를 괴롭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21일, 부기 : 이 말을 좀 더 밀어붙여 보자면... 가설적으로 얘기해보자면...
참교육세대는 91년 5월 세대의 핵심 선진층이기도 하고, 또 91년 5월 세대를 괴롭히는 내부의 이질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참교육세대는 91년 5월에서 '운동권의 질서'를 따르는 한, 87년 이후의 운동을 먹고 자란 '운동권의 아이들'이었고, 이들을 키운 건 8할이 운동권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운동권의 공리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들은 '밥풀데기'와도 같았다.
운동과 91년 5월 세대를 내파시키는 이질적인 존재들, 이들을 당시 유행했던 용어 '밥풀데기' 취급 받았다고 하면 과언일까.
이건 단지 비유가 아니다. 외대 정원식 총리 밀가루-계란 투척을 한 이들은 정권과 언론으로부터도 매도 당했지만, 한편 운동권에서도 무슨 '적군파' 취급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열사들은 '운동권의 아이들'로도 '밥풀데기'로도 취급될 수 없었다. 이들을 '운동권의 아이들'로 여긴다면 자기 세대와 부딪히며 빚어지는 이질성을 자기 논리 내에서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을 '밥풀데기'로 취급한다면 '열사'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열사를 부관참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사들의 존재는 91년 5월 세대를 '세대'로 구성하지 못하도록, 내파시켰다.
다른 한편, 이들 열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열사들, 즉 분신자살을 한 윤용하, 이정순, 정상순 열사들 같은 경우, 91년 5월의 회로 안에서 이해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어 난감했다. 이들은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서 '열사'인가 아닌가라는 논란이 삼삼오오 술자리에서 이야기되곤 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운동은 여전히 자기 질서, 자기 조직 내부가 아닌 자들을 이질적인 흐름으로, 밥풀데기로 여긴다.)
= 91년 5월세대와 관련한 저널리즘의 접근 비판
이번 91년 5월투쟁 20주년을 맞이하여 한겨레, 경향에서 특집 기사들을 쏟아냈는데,
91년 5월 세대를 분석하는 게 특징적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들의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즉, 91년 5월을 계기로
새로운 운동으로의 전환, 즉 시민사회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이 태동되었다는 분석은 사실과 다르다.
아시다시피 91년 당시 시민단체는 경실련 정도를 들 수 있는데, 경실련에 대한 운동 사회의 시각은 싸늘한 것이었다.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친 민중운동적 시민운동'인 참여연대 출범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참여연대 출범도 91년 5월과는 무관하다.
진보정당운동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시간적인 공백도 컸지만, 91년 당시 '진보정당운동'을 하던 상당수가 소멸, 배신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91년 당시의 진보정당운동과 96-97총파업 이후의 진보정당운동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난 이런 왜곡이
언론, 학계, 운동집단이
2011년 현재의 자기 논리와 정치적 전망에 과거를 꿰어맞췄기 때문이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91년 5월투쟁, 패배의 발명
1부에서도 승리냐 패배냐를 넘어서야 한다고 발제자들이 말씀하셨는데,
1부는 오히려 승리냐 패배냐의 틀에 갇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승패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민주화 5년사'에 대한 복기가 필요하고
또 그 민주화의 과정이 일정한 패턴으로 고착된 이후에 대한 복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 없이 91년 5월에 일어났던 이들에만 관심을 가지면, 승패주의 이상을 얘기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승리냐 패배냐보다 더 중요한 건,
91년 5월이 '패배'로 기억되고 고착되어 간 과정이며,
거기에는 '패배'로 각인하기 위한 거대한 기획과 플랜이 관철되어 간 과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야말로 패배를 발명하고, 패배주의를 사후적으로 관철시켜 변혁적 민주주의, 전투적 민주주의의 관점을 버리도록 만든 것이었다.
알다시피 '민주화 5년사'를 특징짓는 것은 부문, 부분운동을 통틀어서, 정파를 불문하고 '변혁적 민주주의투쟁'이었다.
이 변혁적 민주주의투쟁을 해체시켜 간 과정은
91년 5월을 패배로 기억해가는(기억이 전변되는) 과정이었다.
그 거대한 기획과 플랜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됐는데 그걸 나는 개량화와 합법주의화, 제도화의 과정이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변혁적 민주주의의 자세를 유지했던 세력은 힘겹게 명맥을 유지해 오기는 했지만, 혁신이나 적응보다는 기존 노선을 사수하는 데 그쳤다. 이조차도 힘든 과정이기는 했다.)
개량화 1 : 세대론이 학생운동을 겨누다
- 92년부터 촉발된 세대론은 전투적 학생운동과는 친화적이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학생사회에 등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같은 세대론에 학생운동은 무관심하거나 애써 눈을 감았다. 학계와 이론 진영은 '세대론' 자체가 해악적이라거나 그것은 단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면서 묵살했다.
난 (정권과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였던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세대론 자체가 문제였다기 보다는 주체 생산의 관점에서 세대론을 생산하고 논의를 역전시키면서 주도해가지 못한 운동 진영이 문제였다고 본다.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 같은 책을 낸 미메시스 그룹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그같은 시도는 소수에 그쳤을 뿐이고 제대로 대응해내지 못했다.
그 결과 92년부터 세대론을 들먹이면서 비운동권 학생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실련 학생회 같은 비운동권부터, 무조건적인 '반운동권'까지 마구잡이로 등장해 갔고, 얘네들 뒤에는 기독교, 신한국당 등이 뻗쳐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때는 이들이 다수는 아니었지만 해가 갈수록 전투적 민주주의운동의 주요한 세력인 학생운동은 점차 해체되어 갔다. 96년 범민족대회와 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는, 전투적 민주주의의 입장을 고수하던 세력이 학생사회를 재구성해내지 못한 채 기존의 관성으로 일관하다가 마침내 뒤늦은 파산 선고를 받은 사건이었다.
개량화 2 : 퇴조기론과 노동운동 위기론이 노동운동을 겨누다
- 90년 1월에 출범한 전노협을 두고, 91년 하반기부터 노동운동 세력재편론이 등장한 건 아이러니하다. 조직 만들자마자 깨자는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한 자들은 뭔가 음험했는데, 그들을 주축으로 퇴조기론, 노동운동 위기론이 회자됐다.(물론 그 전에 91년 5월 박창수 열사 투쟁에 대한 격렬한 내부 평가 과정이 있었고 소위 5적 척결을 주장한 인민노련 쪽 행패 같은 게 있었다.)
처음 노동운동 내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인 자들은 전투적 노동운동을 '소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주로 인민노련의 노회찬이 그러고 다녔다.) 지금은 퇴조기이고 따라서 공세기 때와는 다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떠들었다. (92년의 정치세력화 관련 토론회에서 노회찬이 '여름에 반바지 입고 뛰어다닐 수는 있는데, 지금 겨울이 왔는데도 반바지 입고 다니면 곤란하다, 외투 입고 버티다가 여름 되면 다시 벗고 뛰자'는 얘기를 했다. 순환론적 인식도 저열했지만, 표현도 저열하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91년 임단투가 착실하게 준비됐고(대우조선을 중심으로 총노동전선이 구축중이었는데, 이걸 깨기 위해 김문수가 거제로 내려가 백순환 위원장을 만나서 졸랐고, 한편에서 김우중이 대폭 양보하면서 타협되어 버려 안타깝기는 했으나.), 91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 그해 11월 노동자대회 모두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퇴조기라는 진단은 현장 단위에서는 사실과 달랐고 현장 단위에서는 '뭔, 개소리냐'는 식으로 반응했었다.
그런데 이 퇴조기론을 받아 안으면서 학계, 교수 집단이 노동운동 위기론을 유포했고 박승옥이 창작과비평(1992)에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을 제출하면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중간 간부 이상들에게 광범하게 확산됐다. 노동운동의 전투성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는다는 논리였다. 김동춘, 김형기 같은 이들도 이런 주장에 함께했다.
노동조합 간부, 활동가, 전노협 간부 등 노동운동가가 1,700여 명 구속,수배,고소,고발 당해 있는 상태에서 국민과 함께 하기 위해 전투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논리는 투항하자는 것이었다. 이건 87년 이래로, 전노협으로 응집된, 전투적 노동운동을 깨자는 거였다.
이후 ILO공대위가 전노대로 바뀌고 민주노총 출범을 공식적 목표로 하면서 더욱 심해졌고 전노협의 주축 활동가들마저도 이에 동조하면서 민주노총이라는 우경화된 개혁 노조주의가 부상하게 된다.
개량화 3 : 정치적 지도부의 배신과 헌납
91년 5월투쟁 이후 6개월동안 지리하게 전선 구축 논쟁이 진행됐고
이 배경에는 92년 대선을 어찌할 거냐라는 게 깔려 있었다.
91년 5월, 지도부가 여전히 명동성당에 갇혀 있고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고 있고
박창수 열사 의문사의 진상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지도부는 서둘러 대통령선거를 바라보면서 전선 논쟁에만 몰두했던 거였다.
그 결과 12월 전국연합이 만들어졌다.
이듬해 초,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가 떴는데, 한 달 만에 민중당과 통합했다.(통합할 걸 왜 뜨나?)
민중당이든 한국노동당이든 졸속적 통합도 문제지만,
합법주의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스스로의 개량적 성격을 명확히 하고,
그걸 또 안기부에 승인까지 받으면서 ({우리사상} 3호 참조)
변혁적 성격을 버렸다.
암튼...
정치적 지도부가 모두 배신, 정치적 헌납, 투항, 소멸 등을 겪은 게 이 시기이고,
크게는 98년까지 운동권의 정치적 지도부는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소정파의 우두머리들은 있었지만 말이다.)
이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정파별로 보면 더 간단하게 설명된다.
구 전민련 명망가 : 이부영 류가 떠돌다가 나중에 민자당에 둥지. 김근태 류가 김대중 당에 무장해제 당한 채 개별입당.
구 전민련 간부 : 전국연합 결성 후, 점차 개인적으로 김대중 정당에 흡수 당함.
NL : 전국연합 결성해서 김대중 지지로 정치적 독자성 헌납(뉴DJ플랜을 추진하던 김대중으로부터 개무시)
ND : 인민노련과 합치려고 했지만 나중에 따 당하고 백기완 독자후보를 냈지만 1.2%로 완전 패배. 그후 거의 실체 사라져감.
민중당 당권파 : 이재오, 김문수 등 신한국당에 투항
PD : 민중당 당권파가 신한국당 투항 후 보수야당인 꼬마민주당(이기택, 노무현 등)에 투항
= 91년 5월과 2011년 5월은 닮았다? 정치의 과잉
저널리즘에서는 등록금투쟁 당시 죽음을 당한 강경대 학생이나,
살인적 등록금으로 시달리는 지금 대학생들을 거론하고
또 MB 등장 후 민주주의의 후퇴 운운하면서
91년 5월과 2011년이 닮았다는 둥 떠들어대지만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잠깐 곁가지로 새자면,
지금 대학생들의 투쟁을 살펴보면 기본기가 너무 없다.
동원력도 형편없다.
이걸 학생운동의 부활 운운하는 건, 운동권의 바람일 뿐이다.
외양이 비슷하다고 시대가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건,
저널리즘에서나 할 소리다.
그리고 운동권이 지금 새로운 세대를 '지도'(이런 말이 가능하다면)할 능력과 내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소망과 사실은 구분되어야 한다.
오히려 다른 점들이 닮아 있기는 하다.
정치의 과잉이 그것이다.
91년 5월 직후의 구호들을 떠올려보자.
"92-93 대격돌에 꽃피우자 민주정부!"를 외치던 NL이나,
"92년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외치던 PD일부+ND나,
"당선 가능한 야당 후보 지지!"를 외치던 석탑계 같은 구호들 말이다.
92년 대선만 바라보고 몰빵한 게 91년 5월 이후의 운동권이었고
현장에 있던 활동가들이 속속 이탈한 게 그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2년 총선,대선만 바라보고 판짜기 열라 몰빵하면서
대중운동을 방기하고 있다.
이 판짜기는 진보대통합이든 민주대통합이든,
도대체가 정책도, 노선도, 쟁점도, 감동도 없고
오로지 2012년 대선 승리만 주장하는 정치공학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쌍용, 한진 등 노동쪽이든, 빈민, 학생 등의 운동이든
고립, 분산되어 있다.
총연맹이 있고, 산별노조가 있어도 이렇다.
정치의 과잉, 그 배면에는 정치성 탈각이 있다.
정치는 상층에서의 정권 창출, 의석 확보 차원으로 국한된 채 과잉담론화되고,
기층 사회운동 단위에서는 급속하게 정치성 탈각이 일어난다.
지금이 그렇다.
= 91년 5월 세대는 가능한가?
세대는 '공통 경험'이 있고, 거기에 호명 기제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처럼들 생각하는데,
그리고 그래서 '91년 5월 세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1부에서 잠깐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이브한 인식으로 세대를 구성할 수 있다면 벌써 됐을 거다.
91년 5월세대는 일단, 분석을 위한 용어로는 사용 가능하겠지만
정치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고 본다.
첫째로, 그야말로 낀세대로서 앞세대, 뒷세대와 너무 많이 중첩되어 있고,
둘째로, 91년 5월투쟁이 (전투라는 관점에서) 졌다는 것이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어 있고,
셋째로, 세대로 구성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다.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져본다.
91년 5월 세대가 구성되어야 하는가?
보통 한국에서 '세대'가 정치적 세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기존 정치체제가 새로운 엘리트집단을 흡수하기 위해 발명되기 때문이다.
91년 5월 세대는 기존 정치체제가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명되지 않은 측면이 크고,
그 결과 이들은 기존 정치체제로 흡수되기보다는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 광범하게 산포되어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세대로 구성되기 보다는
그냥 하던대로 하는 게 그나마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본다.
* 시간이 없어서 이 정도 하고서 발제를 마쳤음.
어떤 사람들은 내 발제를 들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 오래된 언어들로 하는 정견 발표를 듣기가 참 괴로웠다.
이젠 대학1학년들도 믿지 않을 낙관적 전망과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기초한 허풍을
어떻게 그렇게 거리낌없이들 얘기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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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 선생의 게시글이 있어 트랙백을 걸어두었다.
http://blog.naver.com/heutekom?Redirect=Log&logNo=150108677801
권영숙 선생의 메모글이 있어 링크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