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문경 폐채석장 십자가 시신 발견 사건

 

올해 5월 3일, 경북 문경 한 폐채석장에서 발견된 십자가 시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죽음의 방법과 관련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자살이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자살이냐, 종교적 형식을 띤 타살이냐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다. 수사 결과 그는 시신이 발견되기 하루나 이틀 전에 죽은 것으로 밝혀졌고 국과수에 사건 조사가 의뢰되었다. 국과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경찰은 시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등 정황 조사와 주변 탐문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청주에서 혼자 살아오던 택시 기사 김씨는 몇 년 전부터 교회를 다녔고 2년 전에는 주 아무개 전직 목사를 만났다고 한다. 김씨는 주 목사에게 성경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주 목사가 김 씨의 시신을 찾아냈다.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자살’에 무게를 둘 만한 여러 가지 정황이 속속 나타났다. 그는 실행계획서를 직접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만들기 위해 직접 나무를 김해의 한 목재소에서 구입했다. 그러자 세간의 관심은 ‘혼자 했느냐’, ‘방조자(조력자)가 있느냐’ 하는 지점으로 전환됐다.

 

그러던 중 국과수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과수는 5월 17일, ‘(단독) 자살로 판단’한다는 부검 및 감정 결과를 경찰에 통보했다. 국과수는 “김씨의 유전자(DNA)만 검출됐으며 타살이나 다른 사람이 개입한 것으로 의심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국과수는 두 차례의 재현 실험을 한 결과 '혼자서 충분히 (십자가 자살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과수의 이러한 판단의 전제는 “조력자 또는 방조자의 개입을 완전하게 배제하기는 어려우나 그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부분은 수사를 통해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하지만 경찰은 국과수 감정 결과가 통보된 이후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했다. 그간의 행적 수사 결과를 토대로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이 사건이 어떤 설명이 가능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사건과 관련해 궁금함만 있었는데, 신호수 열사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됐다. '어떤 분'께서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신호수를 떠올렸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적, '신호수 열사'의 성함만 들었는데, 사실 어떤 사건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관련한 자료를 찾아 읽어 보았다.

 

1986년 여수시 돌산읍 야산 굴 속 변사체로 발견된 신호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신호수는 1963년생으로 전남 여수 돌산읍에서 태어났다. 1967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고 1980년 경기상고 1학년 재학 중 자퇴했다. 그 뒤 공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해 1983년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1984년 4월 방위병에 입대했고 1985년 6월 제대했다. 제대 후 1985년 11월, 인천시 중구 항동에 있는 LPG 가스 배달 업체에 입사해 일했다.


1986년 6월 11일, 그는 서울 서부경찰서에 영장 없이 연행된다. 당시 북한의 불온유인물을 자취방에 보관한 것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들은 그가 ‘방위병 근무 당시 포상 휴가를 받기 위해 습득한 것을 보관했을 뿐’이라 하여 조사 3시간만에 풀어줬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 그의 행적은 없다.

 

1986년 6월 19일, 방위병 유 아무개 등은 여수 돌산읍 대미산 자락에서 갑자기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게 여겨 다가갔고 거기에 수직동굴이 있었다. 그곳에서 신호수가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여수경찰서는 그가 동굴에서 소지품을 태우고, 입고 있는 옷을 묶어 굴 천정 부근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한 후, 허리띠로 자신의 양팔 상박부를 묶은 뒤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수사 종결했다.

 

자신의 몸을 묶은 상태에서 동굴에서 목을 맬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실제 당시 사건 현장 검증 때도 여수경찰서 경찰들이 재현을 시도했으나 잘 안 되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또 소지품을 태운 성냥갑이나 라이터가 발견되지 않았던 점도 수상하다. 자살하려던 사람이 끈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 등도 의문시되었다.

 

경찰 수사도 엉망이었는데, 시체 검안 및 부검도 엉망진창이었고, 동굴 속 사진도 제대로 찍지 않았다. 현장 감식도 탐문 수사도 하지 않았고, 신호수 씨를 연행했던 서울 서부경찰서 경찰들에 대한 조사도 없었다.

 

여수경찰서는 그를 가매장했다. 그리고 6월 27일이 되어서야 가족들에게 신호수의 죽음을 알렸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내내 신호수의 아버지 신정학 씨는 거리에서 헤매고 온갖 시위에 함께했다. 올해 그는 73세이다. 22살의 아들을 가슴에 묻고 24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가 죽은지 18년이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는 당시 경찰이 '장흥공작'이라는 공작을 진행하면서 신호수를 간첩 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해 고문을 가하는 등으로 신호수가 사망에 이르렀고 이를 자살로 위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11월, 그것을 사실로 판단하고 진실 규명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신호수 사건 과거사위원회 조사보고서 가기

 

그러나, 그가 죽은 지 24년이 지난 2010년 10월 6일, 서울중앙지법은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위자료 청구를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총 8900만 원의 위자료와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땅의 노동자 신호수의 죽음, 그 죽음의 진실 밝혀져야
 

시인 고은은 나중에 {만인보}로 묶이게 되는 연작시를 1988년 {창비} 가을호에 발표하면서 전태일 등 열사들을 먼저 노래했다. 그중 신호수에 관한 시는 이렇다.


신호수


아직도 가매장한 채
봉분을 미루고 있다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노동자 신호수의 무덤


불온전단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가
그 길이 저승길 되고 말았다
1986년 6월 11일
인천에서 일하다가
형사대에 붙잡혀가
8일 만인
6월 19일
그의 고향 언저리
여수 돌산 평사리 대미산 중턱 암굴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한 방위병이 해안경비 야간근무 마치고 돌아가다가
인적 없는 산에서
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 비둘기 때문에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자살이라니!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분단팟쇼는
사람 하나둘 아니 몇천 명쯤
몇만 명쯤
쏘아죽이고 때려죽이고
밤에는 축배를 들며 춤추는 놈들이야
학살 또는 타살을
자살이라고 발표하고


이 땅의 노동자 신호수의 죽음
그 죽음의 진실 밝혀져야
거기 민주도 민족도 있다
거기 조국도 있다

 

그의 죽음 배경에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나 1986년 5.3 인천 사태가 있다. 그를 연행하고 '사건'을 만들기 위한 '기획'이었던 '장흥공작'은 "노동자들의 소요 배경에는 북한이 있다"는 식의 시나리오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런 '큰 그림'에 짜맞춰졌던 노동자 신호수, 그것도 대공장노조도 내셔널센터도 없던 시절의 도시 하층 노동자 신호수는 '말썽 없을 인물'로 간택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열사에도 서열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비판'의 맥락에서, 다른 의미에서는 '긍정'의 의미에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아직 그 죽음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일 거다. 분명한 건, 이런 진술 자체가 씁쓸하다는 거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여도를 점수로 매기거나 퍼센트로 매기던 민주화운동보상 방식이 떠오른다. 점수 매기기는 지난 10년간의 소위 '민주 정부'에서 '과거 청산'을 하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특히 '보상액'을 산정하기 위한 기능을 했던 것 같다. '돈으로 터는 것'도 과거 청산이라면 청산일 거라고 어떤 이들은 믿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에게 '네 목숨값은 얼마냐?'고 되물었을 때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사, 사회적 정의는 구성적 힘에 의해 결정된다

 

신호수 사건은 의문사다.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에서 어떤 판정을 내렸건, 아직도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이 그의 죽음에 경찰의 가혹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의 죽음이 여전히 의문사라고 할 때,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것이 하나 있다. 한국에서의 의문사의 정의와 관련된 것이다. '의문사'라고 하는 말의 정의가 한국에서는 법 규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로 2000년 1월 15일 제정된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규정이다. 거기서는 의문사를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의문의 죽음으로서, 사인이 밝혀지지 않고, 위법한 공권력의 직접·간접적인 행사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죽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죽음이 의문사인가 아닌가, 해결됐는가 불충분한가에 대한 판단은, 사법 기관과 국과수, 경찰과 같은 기관의 판단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판단과 상관 없이, 심지어 이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도 의문사는 있어 왔고, 국가가 의문사에 대해 전면적으로 조사하라고 싸워 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개구리 소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같은 미제 사건 중 실종, 살인 사건은 모두 '의문사'이고, 또 삼성반도체와 노동자 백혈병, 수많은 작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돌연사,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 사건 등 역시 '의문사'가 아닐 수 없다.

 

신호수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의문사 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수많은 의문사 때문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은 82건으로서, 그중 의문사로 인정된 것은 단 19건뿐이다. 나머지 33건은 기각되었고, 30건은 조사 불능으로 결정됐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 이제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 받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런 사건에 대해서도 사실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은, 이 법률 바깥에 있는 수많은 의문의 죽음들, 아직 발생되지 않은 죽음들에 대해서 우리가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이러한 의문의 죽음에 관한 사회적 정의를 확장해 갈 과제가 주어져 있고, 그 과제를 해결할 구성적인 힘의 문제가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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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07:08 2011/05/30 07:08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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