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5월 25일)가 김귀정 열사 20주기 기일이었다.
한학자셨던 청명 임창순 선생께서는 평생 공자, 맹자 등 유교를 연구하셨지만,
"기제사는 지내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유족도 아닌 내가 열사의 기일을 챙길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런 건, 자연스럽게 되는 거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죽음들이 있다.
지난 5월 13일, 성균관대를 찾았다.
성균관대 사학과 출신인 조동원 전 교수가 평생에 걸쳐 해온 탁본 400여 점 중
한국 미술과 관련한 것들만 추려서 전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 김에, 김귀정 열사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다.
날씨가 무척 좋은 날이었다.
그때도 5월엔 날씨가 좋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늘 높이에 떠 있던 까만 똥 같은 것들이 비처럼 쏟아지면서
하얀 최루 연기를 포물선처럼 그려대던 것은 기억난다.
학교 앞 서점들은 다 사라졌다.
91년 5월투쟁 때도 우린 서점들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시내로 나갔었다.
김귀정 열사가 들렸을 논장서점도 이제 없다.
나중에 이재필 선배가 다시 열었던 논장도 다시 사라졌지.
서점 풀무질은 건너편 지하로 옮겼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김귀정 열사가 즐겨 찾았다는 지하 카페 '메카'가 있던 자리에는
'성대앞골목'이라는 종목을 알 수 없는 가게가 간판을 달았다.
카페 '메카'를 갈 때마다, 열사를 생각하면서 그곳이, 그리고 그곳에서 나누던 우리의 대화가, 그 만남들이,
진정 운동의 '메카'를 이루는 일부이기를 소망했었다.
캄캄한 카페 안에는 테이블마다 백열등 조명이 있었고, 빛이 비치면 뽀얀 담배 연기들이 가득했었던 그곳.
그 옆, 옛날 성대 운동권 학생들이 맛없는 안주에 막걸리, 소주를 마시면서 투쟁가를 부르던,
다락방이 곳곳에 숨어 있던 '라면일번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SBS에도 소개가 됐다는 '김종선 칼국수' 집으로 바뀌었다.
다락방은 다 없어졌을까.
그때 드르드득 하던 나무문은 강화유리 문으로 바뀌었으니, 아마도 다락방도 다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겠다.
어느날인가, 우리 패거리도 '라면일번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성균관대 학생들도 그 옆에서 술을 마셨다.
한 여대생의 생일인 듯, 생일 축하를 하면서 막걸리를 돌아가며 그녀 머리 위에 쏟았다.
왁자한 분위기에서 생일인 그녀는 '그만해!' 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곧, '생일빵'이 끝나고, 씻으러 가는 그녀에게 그 패거리의 선물이 전해졌다.
그 선물은 티셔츠, 바지, 속옷, 양말 등속이었다.
'생일빵'은 과격했지만, 다정했던 그날의 생일을, 그 '라면일번지'를 그녀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종로분식, 부부식당도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몇년 전, 부부식당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이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을 그곳에서 참 많이도 취했었다.
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왼편에 보이는 작은 숲인지 공터인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하마비 안쪽의 그 공간은 옛날보다 깨끗하다.
저녁 어스름만 내리면 수백 명이 막걸리 판을 만들고, 팔을 뻗쳐들고 무언가를 타도하겠다고 외쳐대던 곳이었다.
성균관대는 축제 기간이었다.
91년에도 5월 투쟁이 없었다면 축제로 채워졌을 지도 모르겠다.
5월투쟁으로 인해 축제는 늦춰졌고 연기됐었다.
웃고 떠드는 청춘들을 보면 기분이 좋기도 하고 에너지를 받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뭔가 좀 복잡하다.
김귀정 열사 추모 기간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보니 더 복잡해졌다.
학생회관 위로는 에드벌룬이 두둥실 떠 있다.
추모제를 주관하는 김귀정생활도서관을 찾아간다.
학생회관 4층, 405호에 있다.
입구에 열사의 얼굴이 꽉 차 있다.
그녀를 아는 이들은 그녀를 가난했지만 맑고 선했다고 증언한다.
어머니께서는 노점을 하셨다.
그녀가 가고 난 후에도 노점을 하신다 한다.
그녀가 죽었던 그날, 난 그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나가지 않았다.
충무로 현장에 있던 친구들의 증언은 끔찍했다.
누구라도 죽었을 수 있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압사라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아무리 토끼몰이식 진압 때문이라고는 해도,
살기 위해 다른 동지를 밟고 도망가려 하는 그 상황 자체가 끔찍했다.
그것이 그녀를 죽인 것은 우리일 지도 모른다는 부채감을 가지게 만든다.
그해 6월 12일에 그녀를 보낼 때는, 사람들이 5월을 잊은 듯했다.
불과 보름 전, 한 달 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그녀를 보낼 때는 사라졌다.
전대협조차 출범식을 부산대로 잡았고,
다른 학교들은 5월 투쟁으로 인해 연기됐던 축제를 하느라고 바빴다.
그녀의 장례식은 투쟁의 장이 아니라 평화시위의 장이었다.
신문들은 그녀의 장례식을 칭송했다.
불법시위와 과격시위가 사라졌고, 평화시위가 정착된 계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노제를 지내기 위해 성균관대 안으로 장례행렬이 들어가려 할 때
유림들이 가로막았다.
비가 오는 가운데, 학생들은 검은 상복을 입고 정문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지만 유림들은 비켜 서지 않았다.
그해 6월의 가장 슬픈 장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몸이 열 개라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학생활과 아르바이트 생활의 연속,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 나는 공부를 제쳐두고 돈을 벌러 다닌다.”
"운동은 논리가 아니다.……운동은 변하지 않는 신념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무엇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운동적 삶을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날마다 반성하고 날마다 진보하여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바꾸어가며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고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 없이 역사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자
그래 한 순간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난 무엇이 될까?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난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김귀정 열사가 남긴 일기 ‘10년 후에 나는’ 전문
"어제 저녁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의 쪼그만 친구 수배중인 친구를 생각했다.
주근깨투성인 얼굴, 야위고 초췌해진 모습으로 슬리퍼를 끌고 내 앞에 나타났다.
벌써 두 달째 접어든 그 아이의 방황, 친구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못 해보고
어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만 글썽거렸다.
주머니사정 때문에 음료수 한 잔 사주고, 굳세게 살아라 말한마디 던져주고 등을 돌렸다.
목이 콱콱 메어옴을 느끼며 나는 아르바이트하러 발길을 돌렸고
난 남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가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성대생이 된 지 벌써 2달이 넘어 석달째다.
그나마 그래도 말하고 싶은건 아니 말할 수 있는 건 내 주위의 사람들
불의에 항거하며 자신들의 모든 것까지 버려가며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 곁에서 작은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내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1988년 5월 2일)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슬픈 것은 나는 아니,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화내고 분노하는 만큼
노태우와 미제에 대한 적개심이나 분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일에 흥분을 잘한다.
그렇지만 6공 최대의 비리가 폭로되고
그것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기만적인 지자제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눈한번 크게 뜨고는 그만이었다.
산동네 오두막에 방한칸 빌려 살던 우리의 민중들이 강제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을 때
우리는 불쌍하다 동정의 눈길 한번 주고는 그만이었다.
우리의 주먹과 힘들을 너무 헤프게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좀더 중요하고 의로운 일에 우리의 정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다."
- 심산 동우회가 있을 날 저녁에.
"나는 혁명성이나 투철한 사고방식, 해박한 지식도 없었고,
그냥 심산이 좋아서, 선배가 좋아서 올라오기 시작했고, 마칠 때까지 그래왔다.
그렇게 생활하다보니까 나의 동아리 생활은 시한부를 내 머리속에 그어놓고,
그 선을 넘을까봐 가슴 졸여 하며, 불안해 하며 보냈다.
그렇게 생활해서인지 지금까지 있을 때만이라도 열심히 할 것,
만약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의 난…, 하고 스스로 자문해 본다.
후배, 동료, 선배 모두에게 이야기하고 싶다.(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살아라.
나도 지금의 내 생활영역속에는 지난 날의 과오를 다시 한번 저지르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함을, 계속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1991년 4월 2일 )
나는, 오늘을 무어라 적을 수 있을까.
생활도서관은 어수선했다.
추모제를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학생들에게 추모비 위치를 물어봤다.
그런데 잘 몰라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해 알아봐 주었다.
성균관대에는 세 개의 추모비가 있다.
하나는 이윤성 열사 추모비,
또 다른 하나는 김귀정 열사 추모비,
마지막으로는 성균관대 출신 열사들에 대한 추모비
그런데, 이윤성 열사 추모비는 찾지 못했다.
그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강제징집됐고 1983년 5월, 의문사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했고 북한강에 뿌려졌다.
구글에서 찾은 그의 열사비는 이렇게 생겼다.
성균관대학교 민주열사상과 김귀정 열사 추모비는 모두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과연 학생들이 알고나 있을까 의문이었다.
민주열사상은
성균관대학교 민주열사상 건립위원회가
단기 4323년(1990년) 여름에 세웠다고 열사상 받침돌에 새겨 있다.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형상이다.
김귀정 열사 추모비는 다섯 개의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기둥에는 한복을 입고 깃발을 든 여성을 동으로 주조해 붙인 것으로 보인다.
추모비 앞에는 "귀정아 네가 꿈꾸던 해방산천에 너 다시 부활케 하리라 - 민족 성균관"이라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여성 부조상 위에는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는데,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의 조각은 이봉민, 글씨는 앎함 정지완이 했고 비석 옆에는 세운 날짜인 1991.11.1이라 음각돼 있다.
원래, 이 비석과 함께 세웠다고 기록돼 있는 두 개의 장승은 비석 뒤에 뽑혀진 채 방치되어 있다.
어찌된 일일까.
1991년, 제2회 민족민주열사 추모제가 열렸던 성균관대 금잔디 광장은 많이 변했다.
길게 뻗어 있던 스탠드가 반토막 났고,
금잔디 광장에 있던 소라고동 무대도 사라졌다.
옛 학생회관도 사라졌고,
지금 학생회관은 예전엔 대학 당국이 사용하던 건물로 기억한다.
소라고동 뒷편이었던 곳에는 새 건물이 들어섰다.
2000년대 초반, 금잔디 광장이 파헤쳐지고 공사중일 때 와본 적이 있었다.
그때처럼 황폐하지는 않지만
사라진 것, 그리고 새로 생긴 것들을 생각하면 서늘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금잔디 광장을 향하고 있는 CCTV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