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의 참뜻, 보신각과 보신각종
그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해를 1961년 혹은 1980년에 ‘비유’했다. 4월 혹은 5월을 군홧발로 빨갛게 짓밟았던 별들의 독재. 그러나 그해는 총과 탱크를 앞세웠던 그 시절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잃어버렸다던 10년’을 되찾았다. 통령 또한 그네들 행위의 결과였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다시금 그를 끌어내리겠다고도 했다. 청소녀들이 앞장서 천변에 촛불을 밝혔다. 어른들은 부끄러움에 머리를 주억거리며 수줍게 합류했다. 그러자 독재에의 비유가 ‘조금’ 그럴싸해졌다. 독재자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경찰력이었고 공권력이었다. 청장께서 앞장서 충성했고 통령께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골단이 부활했고 진압방패가 날아다녔다. 그러자 정말 독재에의 비유가 ‘더 한층’ 그럴싸해졌다. 사람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87년의 여름처럼 시청 앞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6월의 인파가 촛불로 켜졌다. 그러자 정말 독재에의 비유가 ‘왕창’ 그럴싸해졌다.
그래서였을까? 거리에 섰던 사람들은 아마도 6월 29일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기대가 스스로를 배반할 거라며 우려하던 이들도 있었으나 어쨌든 거리에서의 열정이란 달뜨게 기다리는 그 무엇을 상정하지 않으면 분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밀물 같던 촛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통령께서는 경제를 염려하며 촛불을 끄자 하셨다. 위기를 논하시며 경제를 살리겠다 약조하셨다. 그런데 촛불이 꺼지자 금세 위기는 없다, 단호하게 밝히셨다. 밀물 같던 위기는 통령의 말씀으로 썰물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무더위가 채 물러나기 전, 그해는 이번엔 1997년스러워졌다. 세계 곳곳에서 경제가 풍비박산 하더니 없다던 위기가 들이닥쳤다. 경방고수들은 너나없이 ‘공황’을 논하고 통령의 정책 실패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무능한 대통령, 언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이닥칠 때 이미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공황은 리얼리티를 획득했고 막연한 공포와 불안은 또한 그럴싸해졌다. 영등포 뒷골목과 탑골공원 노인들의 입에서도 ‘아이엠에푸’, ‘외환보유고’, ‘부실은행’이라는 단어가 맴돈다. 사실 새 통령께서 전직 통령이신 이 아무개, 박 아무개, 노 아무개, 김 아무개의 풍모를 골고루 갖고 계시다는 비밀을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세밑이다. 추운 겨울이다. 그리고 누구나 직감하다시피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 것이다.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아랫목에서 귤이나 군밤을 까먹으면 좋을 계절이다. 텔레비전에선 ‘10대 가수 가요제’가 나왔으면 좋겠다. 만날 조 아무개만 가수왕을 해먹던 시절, 그때도 여느 해처럼 ‘중계차 나와 주세요’ 하면 인산인해를 이룬 보신각 풍경이 보였다. 사람들은 카운트다운을 했고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스튜디오 가수들도 보신각 앞 군중도 송구영신의 박수를 보냈고 환호성을 질렀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올해는 지난해보다 부디 행복하기를 기원하곤 했다. 사람들의 기원과는 반대로 해마다 보신각 종소리가 울려도 세상살이는 기구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기원하는 그 보신각도, 보신각종도 기구하기는 우리 못지않았다. 그래서였나. 염원이 늘 배신으로 돌아왔던 것은.
각과 종의 수난기
종이 걸려 있는 건물을 ‘종각’이라 하는데 처음 세웠던 조선 태조 5년(1396)에 그것은 단층 건물인 ‘각’이 아니라 2층 건물인 ‘루’였다. 인사동 근방에 있던 그 ‘루’는 태종 13년(1413) 현재의 종로 네거리로 이사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는 바람에 광해군 11년(1619) 단층 건물인 ‘각’으로 다시 지었으나 이게 웬걸, 숙종 12년(1686)에 또 불타 버려 다시 세워야 했다. 불운은 계속되고 불난 집은 또 나는 법이다. 고종 6년(1869)에는 종각 일대 화재로 인해 홀라당 타 버렸고 같은 해 이번에도 역시 단층 건물로 세워졌다. 1915년엔 길을 넓히면서 뒤로 이동했는데 이 역시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고 1953년 또다시 더 뒤쪽으로 자리를 물려 다시 세웠다. 1978~1979년에는 공사를 하면서 이번엔 아예 불나도 끄떡없게끔 튼튼한 철근 콘크리트로 2층 누각으로 짓게 된다. 여전히 그 편액에는 ‘각’ 자를 단 채.
고 임인식(1920-1998) 사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보신각에 덩그러이 놓여 있는 보신각종.
조선은 새 수도 서울을 건설하면서 유교의 이념에 따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인의예지를 한 글자씩 따 문에 이름을 달았다.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소지문이 그것이다. 이중 남는 글자인 ‘신’을 따서 고종은 1895년 3월 15일 도성 사대문 가운데쯤에 위치한 이 건물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강조하건대 조선의 중심은 서울이었고 서울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종각이었다. 왕이 있던 궁궐이야 권력의 중심이겠지만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종각은 예나 지금이나 중심 중의 중심이다. 종을 쳐야 시간을 알리고 시간을 알리려면 가운데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보신각종은 조선시대의 시계였고 사이렌이었으며 알람이었다. 인경(밤 10시)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그때부터 통행금지였고 만일 이때 잡히면 통금 위반에 걸려 곤장을 맞아야 했다. 파루(새벽 4시)를 치면 비로소 사람들은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보신각에 걸린 종은 어떤 종이었을까?
조선시대에는 다섯 개의 큰 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보신각종이다. 보물 2호인 보신각종은 높이 3.18m, 입지름 2.28m, 무게 19.66톤에 달하는 큰 종으로 처음 주조되던 세조 14년(1468) 당시만 해도 신라 성덕대왕신종 이후 가장 큰 종이었다. 이 종에는 음통이 없고 용 두 마리가 고리 역할을 하는데 이는 일찍이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분류하신 것처럼 조선 종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중국 종의 면모에 가깝다. 보신각종은 원래 신덕왕후의 능사인 정릉사의 범종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정릉사가 폐사된 후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로 옮겨졌다. 다시 원각사가 문을 닫고 나서도 그냥 종루에 매달려 있다가 한때 숭례문으로 옮겨질 뻔도 했었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 제독에 의해 현 명동성당 부근 고개에 위치한 명례동현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종각을 복구하면서 종로의 종각으로 옮겨진다. 그 뒤 보신각이 고초를 겪을 때마다 화마를 함께 입었다. ‘종’ 신세도 ‘각’ 신세 못지않게 사납다. 사나운 신세의 끝은 이러하다.
보신각종은 파루에 33회, 인경에 28회 타종했다. 그러면 하루에 61번 친 셈이고 1년이면 22,265회, 440년 동안 9,796,600회를 타종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보신각종이 종각으로 옮겨진 후 여러 차례 화재를 겪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 보신각종이 일평생 겪었을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보신각 공사가 한창이던 1979년 3월, 보신각종의 균열이 발견되었다. 서양 종의 경우 수명은 약 400년이라 하는데 이 종은 균열이 발생되던 당시 나이가 500년이 넘던 때였다. 균열의 크기 또한 커 가로 3m 93cm, 깊이 70mm에 달했다 한다.
결국 이 종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1983년 12월 12일, 보신각종을 새로 만들기 위한 ‘보신각종 중주위원회’가 꾸려지고 대대적인 성금 모금을 하는 한편 서울대 공대 생산기술연구소에 새 종의 주조를 위임하고 설계는 서울대 공대 염영하 교수에게, 디자인과 조각은 서울대 미대 강찬균 교수에게 의뢰했으며 주물제작은 성종사에 맡겼다. 기본설계는 종의 높이 3.8m, 입지름 2.30m, 중량 20톤으로 했으며 네 개의 시안을 만들어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성덕대왕신종보다 큰 크기다. 가장 큰 종이 되기를 열망한 당시 정권의 바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1984년 2월 19일 최종적인 디자인을 확정했고 그렇게 제작된 종이 바로 지금 보신각에 걸려 있는 종이다.
우리가 울림을 전달해야
보신각 공사가 시작된 1978년을 맞이하던 어떤 이의 일기는 이러하다.
달력에는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1977년 정사년은 영원한 역사 속에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또 이 밤이 지나면 1978년 무오년이 밝아올 것이다. …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금명 묵은해는 떠나간다. 그리고 새해가 밝아 온다. 종소리를 들으며 천지신명에게 두 손을 합장하고 경건히 기구하였다.(1977년 12월 31일)
청와대까지 퍼져나간 종소리는 이미 제 수명을 넘긴 터였다. 경건하게 기구하던 이 또한 몰랐겠으나 그 역시 수명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터였다. 보신각종이 종루에서 내려오기 훨씬 전에 그는 부하가 쏜 총탄에 맞아 청와대에서 내려와 땅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가 만약 지금 보신각 종소리를 다시 듣는다면 불길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보신각이 불에 타거나 균열이 발견되거나 할 때는 대개 전쟁, 정변, 혼란기 때였다. 서울 도성 한복판, 나라의 시계가 불에 탄 것이다. 사이렌 같은 규율과 통금 같은 명령이 불에 탔을 땐 낡은 모든 것이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낡은 모든 것에게 보신각종은 조종(弔鐘)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을 선고하고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 이야말로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아들인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세상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종소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종이 맞아들인 새로움은 오래 가는 게 아니다. 수명을 다한 새로움의 자리는 낡은 것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였나. 염원이 늘 배신으로 돌아왔던 것은.
그래, 그래서였다. 노 아무개가 싫어 이 아무개를 통령으로 맞아들였지만 그건 새로움이 아니었다. 구관이 싫어 신관을 뽑았으나 그 신관이 명관이기는커녕 구관을 빼어 닮은 셈이다. 새 통령은 전직 통령이신 이 아무개, 박 아무개, 노 아무개, 김 아무개의 풍모를 골고루 갖고 계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아서는 송구영신할 준비가 안 된 거다. 정말이지 가락시장을 찾은 통령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 된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고 되려 그를 보고 눈물로 위로해서는 아니 된다. 그 눈물이 늘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에게, 구관에게, 낡고 하찮은 것들에게 우리 운명을 위탁하게 만든다.
세상일을 종소리가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운명은 누구에게 위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운명은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TV 보듯 낭창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던 10년에 1년을 더해 11년 동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곰곰이 곱씹어야 한다. 4년 뒤, 우리가 15년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자들은 또 ‘잃어버린 5년’을 들고 나올 텐데, 갑과 을 중 골라봐야 둘 다 구관일 게 뻔하지 않겠나. 그 결과 20년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스스로 조종이 되어 파루에 33회, 인경에 28회 타종하면서 죽음을 선고하고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내야 한다. 죽음이란 생성의 끝이 아니라 다른 생성의 시작이다. 낡은 것을 죽이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 파괴와 건설, 송구와 영신, 그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종이 되어야 가능하다. 스스로 종이 되어 자기 울림을 세상에 전달해야 한다. 내 울림이 다른 이에게 울림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다른 이의 울림이 내 심장에 전해져 더 큰 울림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울림과 울림이 만나 함께 울려야 한다. 이퀄라이저로 조정되지 않은, 갖가지 울림이 고루 섞여 살아 있되 크면서도 이윽한 소리로 만물을 번뇌로부터 해방시키는 종소리. 그런 소리를 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종이 되어 종로 네거리에 걸려야 한다. 우리가 보신각종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