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진보의 시원(始原), 감은사지 삼층석탑

 

꿈이 시대를 만드는가? 그렇다. 두 가지 꿈이 있었다. 하나는 1980년 5월의 꿈. 광주에서 시작된 항쟁은 계엄군의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했다. 항쟁이 무참하게 진압된 다음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항쟁이 남긴 꿈을 가슴 속에 품은 채 고통을 감내하며 각고의 노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몇 안 되는 그 사람들조차도 꿈의 크기, 열망의 정도, 사심 없는 진심의 정도는 다 달랐다. 불과 7년 후, 뜨겁던 1987년 6월의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에 의해 학살의 당사자는 권좌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이제 그 꿈을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하지만 군정은 연장됐고 5.5공화국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6월로 이어진 5월의 꿈을 간직한 걸로 믿어졌던 한 야당 지도자는 학살의 주범들과 손을 잡는 구국의 결단을 내렸고 다음 권좌를 차지했다. 또 5월의 적자였던 다른 야당 지도자 역시 학살을 낳게 만든 옛 군부와 손을 잡고서야 오랜 대통령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6월의 거리를 주도했던 한 인사도 그 이후 대통령이 되었지만 ‘좌측 깜박이 넣고 우회전’ 하는 현기증 나는 그의 질주는 그가 지녔던 꿈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여기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6월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간 후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대규모 정치적 이벤트 와중에 터져 나온 7, 8월 노동자들의 투쟁은 ‘공평한 기회’를 갖기 위한 꿈이 아니라 ‘공평한 삶’을 누리고자 했던 꿈, ‘인간이 되고자 했던 꿈’이었다. 그 꿈은 전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되는 이들에게는 무시무시하고 위험천만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탄압’이라는, 이제는 상투어가 되어 버린 이 단어의 실제가 얼마나 잔인했는지는 그동안 제 몸에 불을 붙인 이들의 숫자만으로도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역사를 밀고 나아갔던 이들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 꿈을 꿨던 사람들의 꿈의 크기, 열망의 정도, 사심 없는 진심의 정도는 다 달랐다.

 

이 두 가지 꿈들의 시원이 되는 장소가 있다면 그건 단연컨대 무덤들이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망월동을 향했고 또 마석 모란공원과 솥발산 열사묘역을 찾았다. 새로운 꿈을 꾸는 이들에게 이 묘역들은 그 꿈의 시원이었다. 정확히 역사는 이 묘역을 찾는 이들이 꾸는 꿈의 열망도 만큼 전진했다. 길이 막히고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어찌 해야겠느냐고 묻고 답을 구하는 오체투지의 여정은 망월동과 마석 모란공원, 솥발산 열사묘역을 향했다. 5월, 그리고 7, 8월의 꿈은 그렇게 끝없이 첫 마음을 되새겨가며 30년 역사를 전진시킬 수 있었다.

 

동해구(東海口), 새로운 시대의 첫 출발

 

여기 아주 오래된 꿈의 시원이 묘비처럼 서 있는 곳이 있다. 동해로 나아가는 길목, 이른바 동해구(東海口)라 불리우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이 그곳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문무왕과 그 아들 신문왕의 꿈과 그 꿈이 얽힌 무덤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문무왕릉과 두 개의 우람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로서 왕자 시절, 무열왕이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660년)시키는 데에 공을 보탰고 자신이 왕이 된 후 고구려를 멸망(668년)시켰다. 그러나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자 이에 맞서 싸워 결국 당나라를 물리치고(676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감은사는 원래 문무왕이 세우고자 했던 절이었다. 그는 서라벌에서 동해로 통하는 이곳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붙이고자 했는데 그것은 욕진왜병(欲鎭倭兵), 즉 왜구를 진압하고자 했던 그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681년 7월 1일에 승하하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자신이 죽거든 동해에 장사를 지내주면 죽은 후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말을 했다.

 


멀리 동해바다 문무왕릉이 보이는 곳에 감은사지가 있다. Ⓒ경주시

 

문무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신문왕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장을 하고 동해구의 바위섬에 화장한 유골을 뿌렸다. 대왕암이 그곳이다. 또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감은사의 완공을 서둘렀다. 신문왕이 이듬해인 682년 5월 7일에 감은사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는 길어야 9개월 남짓 만에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추어볼 때 문무왕대에 이미 절의 공사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탑을 먼저 세웠는지, 금당을 먼저 세웠는지는 학자들에 따라 입장이 다르고 또 문무왕 생전에 어디까지 공사가 진척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어쨌든 절의 완성 후 신문왕은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 붙였는데 이는 ‘아버지의 은덕에 감사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견대. 지금 세워져 있는 이견대는 1979년 복원된 것이다.

 

동해구에는 또 하나의 유적이 있는데 이견대(利見臺)가 그것이다. 이견대에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가 얽혀 전해져 온다. 신문왕이 왕에 오른 뒤 682년 5월 1일, ‘동해에서 작은 산이 떠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신문왕은 일관(日官)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했다. 일관이 보고하기를 문무왕과 김유신이 성을 지키는 보물(守城之寶)을 내주려 하는 것이라 했다. 신문왕은 크게 기뻐하고 5월 7일 지금 이견대가 있는 자리에 가서 그 산을 살폈다. 산세는 거북머리 모양인데 대나무가 그 안에 있었고 그 대나무는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이튿날부터 7일 동안 비바람이 불더니 5월 16일이 되자 날씨가 좋아졌다.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홀연히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바쳤다. 용은 이르기를 섬에 있는 “대나무를 베어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 했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만파식적이라 이름 붙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게 하고 비가 올 때는 개이게 하며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결을 평온하게 했다. 이 피리는 신라의 국보가 되었다.

 


감은사지는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전형인 쌍탑일금당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감은사지는 두 가지 의미에서 통일신라 미술의 시원이다. 첫번째는 절의 배치, 즉 가람배치 양식이라는 측면에서이다. 감은사는 통일신라가 막 시작되던 당대의 가람배치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 이전 신라의 절은 예컨대 분황사나 황룡사지처럼 탑 하나만 세웠는데 감은사터는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양식, 즉 탑을 두 개를 세우고 건물을 배치했다. 두 탑 가운데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금당, 강당을 세우고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것이다. 통일신라 때 세운 불국사 역시 쌍탑일금당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올라가는 시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두 번째는 감은사지의 삼층석탑이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시원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돌로 탑을 처음 세운 것은 백제인들이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그것들이다. 이를 받아들인 신라는 돌로 탑을 쌓으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해 다섯 층으로 탑을 쌓았다. 의성 탑리 오층석탑, 나원리 오층석탑, 장항사지 오층석탑처럼 말이다. 하지만 통일신라에 이르러 신라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최초로 삼층으로 탑을 쌓고 또 그 이전과 다르게 이중기단을 창조해내게 된다.

 

호국용의 직무유기?

 

감은사지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감은사지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었지만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은 추령을 넘어 동해구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영향이 컸다. 유홍준은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원고 전체를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로 채우고 싶다고 썼다.

 

그래서 이제 감은사지 아래에는 넓은 주차장도 생기고 경주 답사의 필수코스가 되어 수학여행철이나 봄, 가을 나들이 온 사람들로 북적댄다. 사람들은 이 절에 문무왕, 신문왕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호국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터의 돌 구조물 아래 공간이 비어 있다는 것도 안다. 감은사지 아래의 용담이 있고 또 지금은 건천이 되어버린 절 앞 대종천변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무수한 책들에서는 던져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좀 짓궂지만 이 질문은 감은사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질문이다. 나라를 지키겠다던 그 용은 어디로 갔나? 호국(護國)의 임무가 막중할진대, 24시간 365일 불철주야로 조국강토의 바다를 지켜야 할 용이 감은사 금당 아래 아늑한 공간에서 쉬고 있으면 될 일인가? 문무왕은 어쩌자고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만파식적에 용의 권능을 실어 아들에게 건네주고 사라졌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은 문무왕이 아니라 그 아들 신문왕에게 돌려야 한다. 동해구 유적들의 주인공은 문무왕이지만 배후에서 그 유적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그걸 사람들 속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담론화시킨 것은 신문왕이다. 문무왕 주연, 신문왕 연출인 셈이다. 따라서 신문왕의 숨은 뜻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동해구 답사는 껍데기만 보고 온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문무왕이 어떤 왕인가? 삼한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왕이다. 끝없이 이어지던 ‘전쟁의 세기’를 종식시킨 문무왕은 당대의 신라인들에게 위대한 영웅이었을 것이다. 문무왕 역시 이제 대를 이어 지속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문무왕의 집권 후반기는 ‘평화의 세기’가 시작되는 시대적 전환기였고 그는 이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해 스스로 용이 되고자 했고 하나 남은 골칫덩이인 왜구를 방어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버지 문무왕이 죽고 나자 신문왕은 오래된 신라의 문제, 즉 통치체제의 불안정성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무열왕계(武烈王系)라 불리는 진골 출신 전제왕권 체제가 가진 불안정성이 그것이었다. 함께 꿈을 추구해온 이들 안에 도려내야 할 살이 있음을, 이들을 도려내지 않으면 그 꿈을 끝까지 이어갈 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나마 ‘전쟁의 세기’에는 경쟁하는 다른 진골 귀족들의 도전을 외부의 적을 향해 돌릴 수 있었지만 전쟁은 끝났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문무왕도 죽었다. 신문왕은 진골 귀족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문무왕의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평화의 세기’를, 그 꿈을 더 밀어붙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 김흠돌(金欽突)의 난이었다.

 

문무왕은 즉위 초기 진골귀족의 힘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태자비로 김흠돌의 딸을 맞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 ‘평화의 세기’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힘을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골귀족의 군사적 기반을 박탈하기 위해 전쟁 기간 동안 진골귀족을 제거해 나갔고 귀족연합적 군사제도였던 6정(停) 대신 국왕에 직속된 부대인 9서당(誓幢)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6두품 출신의 행정 관료세력을 성장시켜 골품제적 질서에 입각한 진골귀족과 대립시켜냈다. 이러한 문무왕의 태도에 진골귀족은 상당한 위협감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구심으로 진골귀족 출신으로 6정의 장군이기도 했던 김흠돌이 떠올랐다. 김흠돌은 태자비의 아버지, 즉 신문왕의 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문왕이 태자 시절이었던 문무왕 5년(665년) 그의 딸을 태자비로 바쳤다. 그의 주위에는 점점 진골귀족 세력이 모여 들었다.

 

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한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려던 것이 발각되었다. 신문왕은 즉위를 전후로 한 어떤 시점에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김흠돌의 딸을 내쫓았고 이것이 김흠돌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지만 그 배후에 진골귀족의 불만이 있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김흠돌의 주위에는 흥원(興元), 진공(眞功), 김군관(金軍官) 등 진골귀족 세력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 중 특히 김군관은 병부령을 역임하고 상대등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결국 김흠돌과 그 주위의 진골귀족들은 신문왕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해질 무렵, 감은사터 전경. “깊은 그리움이 만든 탑이구나”(신현림, <감은사는 행복하다>) Ⓒ경주시

 

감은사가 완공되고 감은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바로 이런 일련의 사태가 일어난 직후였다. 감은사라는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 문무왕이 이제 죽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불멸하는 존재,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 문무왕이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신라의 왕권은 이제 자신에게 있다는 선언을 서라벌로 통하는 동해의 입구에 거대한 탑으로 조영한 셈이다. ‘아버지 문무왕은 죽었다’의 완곡어법이랄까. 신문왕은 전제왕권을 강화시키는 데에 아버지 문무왕의 정치적 권능을 필요로 했고 그러한 의도를 감은사지 금당터에 얽힌 ‘용의 쉼터’ 이야기에, 절의 이름 ‘감은사’에 새겨 넣은 것이 아닐까? 또 감은사지 완공 이후에는 만파식적 설화를 널리 퍼뜨려 문무왕과 김유신의 권능이 영험한 피리의 형태로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설파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동해구의 유적이란 신문왕의 음험한 정치적 의도가 서려 있는 곳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해석은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진보의 시원

 

동해구의 유적들은 문무왕의 꿈 또한 담긴 유적이다. 그의 꿈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 번째는 삼한통일과 당나라 축출, 왜구로부터 신라 보호 등 ‘전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포스트 통일’ 이후 신라인들의 번영과 행복을 이루고자 했던 꿈이라 할 수 있다. 이 꿈은 장대한 정치적 기획과 야망이었는데 문무왕 당대에 첫 번째 꿈은 완수되었고 따라서 ‘포스트 통일’의 꿈이 리얼리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재위 기간 중 어떻게 칼과 투구를 녹여 낫과 쟁기를 만들 것인지 구체적인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알고 있었다. 오랜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함께 그 꿈을 꿨던 이들 가운데서는 첫 마음을 잃고 사심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그들은 낡은 관념을 갖고 낡은 질서와 타협했고 낡은 질서를 온존시키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모든 낡은 것들이 힘을 합하고 연합했다. 언제나 반동이란 기존 권력을 지닌 이들이 아직 강대한 그들의 힘을 모두 다 잃지 않았을 때 나오며 그 반동의 힘은 일시적일지언정 새로운 힘보다 강해 보일 수 있다. 이 반동은 어쩌면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보다, 또는 동해안에 나타나는 왜구보다 더 통일신라를 내파시킬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였다. 이들을 제어하지 않으면 이 장대한 정치적 기획인 두 번째 꿈으로까지 밀어붙일 수 없었다.

 

신문왕은 그 반동적 힘을 분쇄하고자 했다. 낡은 살을 도려내야 했다. 김흠돌의 난은 어쩌면 신문왕의 공작일 수도 있다. 혹은 김흠돌의 딸을 내쫓음으로써 부러 촉발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문왕은 그렇게 해서라도 낡은 힘을 철저하게 분쇄하고자 했다. 철저함, 충실함, 진실함, 굳건하고 비타협적으로 뚜벅뚜벅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꿈을 꾸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져야 할 마음일 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 신문왕은 아버지의 힘조차도 환수해야 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참다웁게 계승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적당히 이용하면서 편안하게 생을 누리고자 하지 않았다. 낡은 세력과 연합함으로써 꿈의 전진을 중단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감은사탑은 신문왕이 ‘새로운 진보’를 굳세게 추구해나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러한 굳센 마음이 있었기에 감은사탑은 찰주조차 벼락에 맞지 않고 아직까지 굳건하게 시원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 있는 것인지도, 처음 꿈을 품은 자들의 모양을 닮은 당당한 결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진보는 그렇게 가야 한다. 이 길 자체가 오랜 세월을 요구하기에 첫 출발은 화강암 만큼의 단단함을 가져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상황에 이끌리고 주변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지금 이 탑이 거센 바람과 파도 앞에 아무리 작아 보이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더 굳건하게 세워내지 않는다면 그 탑은 천 년을 가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감은사 삼층석탑이 일러주는 건 바로 그 강직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꿈, 새로운 진보의 의지를 돌로 세운 것이 감은사 탑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꿈의 시원을 떠올릴 때 품게 되는 그리움, 예컨대 5월 광주와 7, 8월 노동자대투쟁을 떠올리는 감정을 이 감은사탑을 바라보며 느낀다. 우리도 5월의 꿈을 넘어 7, 8월로 나아가기 위해, 아니 7, 8월 속에서만 참다웁게 계승되는 5월을 위해 우리 안의 낡음을 도려내고 그 낡음과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쳐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진보의 표상이 동해에 있다. 그 시원을 찾아 우린 좀 더 굳세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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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5 03:22 2010/07/05 03:22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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