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경복궁 굴뚝

 

유라시아 대륙 끄트머리에 붙은 반도는 땅이 비옥하고 맑은 물이 풍부했지만 겨울은 춥고 길었다. 엄동이 닥치기 전, 사람들은 땔감을 산처럼 마련했다. 설한이 닥치면 불아궁에 장작을 넣고 구들에 몸을 뉘었다. 폭설에 길이 끊기고 마을에 인적이 사라진 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긴긴 겨울밤 새끼를 꼬며 지냈다. 상처하고 홀로 지내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걱정되면 슬며시 문을 열고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지를 살피면 그만이었다. 조난 당한 사람뿐 아니라 일상의 인간에게도 연기는 생존에의 욕망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상징이다. 연기도 말을 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래서 굴뚝은 한 인간의 호흡 여부를 알 수 있는 생존 지표다. 바이탈 사인이다.


굴뚝새에게 굴뚝은 북풍과 한설로부터 온기를 지켜주는 든든한 기둥이다. 그래서 굴뚝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여름에는 산에서 살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평지의 마을로 내려와 울타리나 굴뚝 주변, 처마 아래에 살았다. 생명이란 본디 우는 것이다. 지붕이나 땅 위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굴뚝새는 “초르 초르” 운다고도 하고 “찢찢” 또는 “찌찌, 찌찌쪼로, 쪼로로로로로” 소리를 내며 운다고도 한다. 수컷은 번식기 때 길게는 10분이 넘도록 온갖 소리로 울고 암컷은 짝을 받아들일 때 울음소리를 낸다. 울어야 생명이 이어진다.

 

굴뚝새는 또한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운다. 영역이란 삶의 터, 그걸 지키고자 하는 텃세를 탓할 수 있을까. 생명이란 본디 터를 지키는 것이다. 굴뚝 주변 굴뚝새의 울음은 생명의 소리이자 엄혹한 계절에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소리이다. 한 종의 생존 지표다. 바이탈 사인이다.


바이탈 사인은 체온, 호흡, 맥박 등 생존 여부를 알려주는 활력징후다. 굴뚝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굴뚝새는 연기와 울음으로 생명 신호를 발신해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굴뚝은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거대한 경계를 세워 안과 밖을 나눴던 도시 안에는 높다란 담장으로 울타리 친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공장마다엔 담장보다 더 높은 굴뚝이 무슨 탑처럼 들어섰다. 굴뚝은 매일같이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 연기는 활력징후, 생명 신호, 생체 징후가 아니었다. 연기가 뿜어져 나올수록 도시는 병들었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몸은 야위었다. 온갖 물품이 공장에서 출고됐고 산재 사망 사고를 당한 시신도 그곳에서 출고됐다.


굴뚝은 이제 사람의 것도, 굴뚝새의 것도 아니었다. 굴뚝은 이제 자본의 것이었다. 자본의 힘을 표현했다. 자본의 바이탈 사인이었다. 또는 자연과 노동의 힘을 환수하는 동력 장치의 배설기관이었다. 생명의 힘을 빨아먹고 남은 찌꺼기를 뱉어내는 기관이었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


굴뚝이 본디 생명의 상징이라 하더라도 집 짓는 이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구조물은 아니다. 아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건 오히려 기능적 관점에서이다. 또 불아궁, 연도, 개자리 등 온돌 구조 전체 맥락에서 굴뚝을 고려한다.


굴뚝은 적당한 속도로 연기를 잘 배출해내야 한다. 공기가 너무 빨리 배출되면 땔감이 많이 들고 방구들이 빨리 식는다. 반면 공기가 잘 배출되지 않으면 장작이 잘 타지 않는다. 그래서 굴뚝은 적당한 높이로 세워야 했다. 남쪽에서는 낮게 세웠고 북쪽에서는 높게 세웠다.


여염집에서는 이러한 기능적 측면이 생김보다 우선했다. 아무리 치장한들 굴뚝은 굴뚝이다. 굴뚝다워야 굴뚝이다. 굴뚝답다는 건 과한 치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가의 굴뚝은 소박했다. 깨진 항아리나 와편을 짚, 황토와 섞어 굴뚝을 쌓았다.


하지만 궁궐은 달랐다. 궁의 굴뚝은 왕이 사는 궁궐다워야 했다. 지금도 경복궁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또 그 굴뚝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 뒤뜰 십장생 굴뚝(보물 810호)과 교태전 뒤뜰 아미산 굴뚝(보물 811호)이 그것이다.

 

자경전에는 누가 사는가? 자경전은 대왕대비의 처소다. 지금 볼 수 있는 자경전은 고종 2년(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조대비, 즉 신정왕후를 위해 지었다.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가능케 해준 인물이다. 그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해 오늘날에 이른다. 대왕대비가 만수무강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자경전 곳곳에 조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벽돌로 모양을 낸 담장에는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가 새겨졌다. 또한 거북, 소나무, 대나무 등의 문양이 새겨졌다. 이 역시 오래도록 장수하시라는 의미였다.


그 마음은 자경전 뒤뜰 십장생(十長生) 굴뚝에도 담겨 있다. 이 굴뚝은 꽃담보다 한 단 앞으로 나와 있는데 장대석 기단 위에 전돌로 굴뚝을 쌓았다. 이 굴뚝은 그 크기가 너비 381센티미터, 높이 236센티미터, 두께 65센티미터이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굴뚝의 가운데에는 십장생 무늬와 사군자가 새겨져 있다. 십장생은 천계에 속하는 해, 구름과 지계에 속하는 산, 물, 돌 그리고 천계와 지계 사이에 존재하는 거북, 학, 사슴,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와 같은 장생의 상징물이다. 이 십장생이 사군자, 즉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와 어우러져 하나하나 공들여 만든 전돌로 새겨져 있고 바탕은 삼화토를 발라 하얗게 처리되었다.


이외에도 해태, 용, 불가사리 등 많은 문양이 굴뚝 여러 부위에 새겨져 있고 그 아름다움을 더하지만 이 굴뚝의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나란히 배열된 10개의 연가(煙家)이다. 굴뚝 맨 윗부분에 집 모양으로 만들어진 전돌을 연가라 하는데, 연기를 배출하면서 공기가 역류하거나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했다.

십장생 굴뚝만큼 아름다운 굴뚝이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뒤뜰에 있다. 교태전은 왕비의 처소로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더불어 내전에 속하는데 강녕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내전이란 임금과 왕실의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근정전, 사정전 등 정치의 영역인 외전과 구별된다.


교태전은 원래 경북궁이 세워질 때는 없었지만 조선 세종 때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태조와 세종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일제는 1920년 창덕궁 대조전에 들어갈 건축 자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교태전을 허물었고 그것을 대조전 부재로 썼다. 지금의 교태전은 1996년에 강녕전과 함께 복원되었다. 강녕전의 북쪽에 위치하며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다.


교태전 뒤뜰엔 동산처럼 솟은 층계가 있는데 거기에 갖가지 꽃을 심었다. 그래서 그것을 화계(花階)라 부른다. 이 화계는 조선 태종 때 만들어졌다. 경회루 연못에서 퍼낸 흙으로 만들고 그 주위를 장대석으로 정리해 층층이 단을 쌓고 거기에 나무를 심고 괴석도 배치했다. 그리고 아미산이라 이름 붙였다. 바로 이 아미산 세 번째 계단에 주황색 전돌로 쌓은 굴뚝 4기가 있다.

 

교태전 뒤뜰 아미산 굴뚝


굴뚝은 6각 기둥 모양으로 생겼는데 지붕 아래까지의 높이는 약 260센티미터가량 되고 한 벽면의 폭은 88센티미터가량 된다. 각 굴뚝의 벽에는 자경전 십장생 굴뚝과 마찬가지로 십장생과 사군자 등 여러 가지 무늬를 벽돌로 구워 삽입했고 그 사이는 역시 삼화토를 발라 하얗게 바탕을 채웠다.


교태전의 온돌방을 데운 뜨거운 공기는 이 굴뚝을 통해서 밖으로 배출되었다. 궁궐에서는 참숯 백탄(白炭)을 썼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집에서처럼 매캐한 회색빛 연기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구중궁궐에 갇힌 궁중 여인네들에게 이 굴뚝도 생명의 봉화 같은 것이었을 게다. 눈 쌓인 하얀 화계 사이 세워진 주황빛 굴뚝 기둥. 비(妃)는 가끔 물끄러미 아미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또 봄꽃이 현란하게 화계를 수놓으면 그녀의 마음 또한 울긋불긋 설레었을 것이다. 이 화계는 마당에서 올려볼 때보다 교태전 난간에서 내려다볼 때 그 모습이 더 한눈에 담긴다. 오롯이 왕비를 위한 화계였던 것이다.


한국의 궁궐에는 굴뚝이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것들이다. 자금성에서 굴뚝을 찾아볼 수는 없다. 온돌로 난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화덕을 썼다. 따라서 굴뚝이 없다. 굴뚝은 한국적인 것이다. 온돌이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궁궐에는 굴뚝새가 있다. 굴뚝이 있기 때문에 굴뚝새도 있는 것이다. 왕과 왕비의 굴뚝에도 어김없이 굴뚝새는 날아왔다. 새는 신분을 알지 못한다. 왕의 굴뚝과 빈민의 굴뚝이 다르지 않았다. 굴뚝새가 있는 이상, 궁궐도 인간적일 수 있었다.

 

노동자의 굴뚝


굴뚝이 죽음의 상징이 된 근대 이후 그 굴뚝으로 인해 가장 많이 죽어간 사람들은 흔히 ‘톰’이라 불리던 굴뚝 청소부였다. 보통 굴뚝 청소부는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었다. 일을 부리는 자들은 복잡하고 좁은 굴뚝으로 아이들을 내몰았다. 검댕이 온몸에 묻고 숨은 턱턱 막혔다. 옷가지조차 입을 수 없었다. 불규칙한 굴뚝 구조 때문에 옷이 찢기거나 걸렸기 때문이다. 맨몸으로 온종일 굴뚝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새카맣게 검댕이 묻었다. 검댕이란 무엇일까? 연기나 그을음이 엉겨 붙은 검댕은 검정색을 띤 탄소미립자이다. 영국의 의사 퍼시발 포트는 이 나이 어린 굴뚝 청소부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음낭암에 3배 이상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음낭암은 역사상 최초로 발견된 직업성 암이었다. 퍼시발 포트는 노동 후에 몸을 깨끗이 씻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충고였을까? 차라리 굴뚝 청소를 그만두고 인신 구속으로부터 탈주해 소매치기가 되라고 권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산업혁명 이후 굴뚝은 도시를 온통 잿빛으로 만든 주범이었다. 도시는 굴뚝과 결부되었다. 한국도 그랬다. 죽음의 공장, 죽음의 굴뚝. 나치가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와 한국의 공통점은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호와 높다란 굴뚝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이 사람의 생명을 태우고 나오는 연기를 내뿜었다면 한국의 굴뚝은 자연과 노동의 힘을 환수하는 동력 장치의 항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동이 가난으로부터 자유케 해줄 것을 열망하면서 도시로 향했다. 그러나 도시는 낯설었고 무엇보다 몸과 맞지 않았다. 젊은 노동자들은 직업병과 산재로 죽어가면서도 ‘산업 전사’로서 전쟁 같은 노동에 내몰렸다.


굴뚝새도 찾지 않는 공장의 굴뚝.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바로 그 인간만이 살았다, 굴뚝과 함께.


몇백 년이 지나고 노동자들은 굴뚝을 올랐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올랐다. 마치 굴뚝 청소를 하기 위해 몸뚱어리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올랐던 나이 어린 굴뚝 청소부처럼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아버지처럼 올랐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결코 강제적인 청소 노동을 위해서도, 혹은 난장이 아버지처럼 몸을 던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농성을 하기 위해서, 아니 울기 위해서였다. 울어야 생명이 이어진다. 생명이란 본디 터를 지키는 것이다. 굴뚝새는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운다. 노동자는 삶을 지키기 위해서 운다. 노동자의 굴뚝 농성은 생명의 소리이자 엄혹한 계절에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소리이다. 한 종의 생존 지표다. 바이탈 사인이다.

 

   


2010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평택공장 70미터 굴뚝에 올랐다. 2009년 울산 현대미포조선 용인기업 복직 문제를 두고 노동자들이 100미터 예전만 굴뚝에 올랐다. 2006년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랐다. 2004년 삼양화성 전주공장의 사내 하청 노동자 6명이 원청회사의 탄압에 맞서 40미터 굴뚝에 올라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2003년 전북 군산 기아특수강 해고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50미터 굴뚝에 올라 132일간 농성을 했다. 1998년 울산 현대자동차노조 전직 위원장 셋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6일간 45미터 굴뚝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1992년 창원 세일중공업에서 5명이 32미터 높이의 굴뚝에 올라가 ‘총액임금제 철폐’, ‘경찰 병력 철수’를 요구하며 농성을 전개했다.


노동자의 굴뚝은 아름다웠다. 굴뚝 주변으로 사람들은 굴뚝새처럼 모여들어 함께 소리를 높였다. 굴뚝 아래 연대 대오가 서로에게 십장생이었다. 투쟁은 십장생처럼 오래 지속될 것이었고 오래도록 조화로울 것이었다. 경찰과 사측의 용역깡패가 쏘는 물대포에 맞서며 체온을 나눴고 소화기의 독한 분말을 뒤집어써도 호흡을 함께했으며 고동치는 맥박의 리듬을 조화시켰다.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랐을 때 자본의 굴뚝은 이미 죽음의 굴뚝이 아니었다. 노동자가 살아 있다는,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죽음의 공장을 인간이 살고 굴뚝새가 사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가장 강력한 활력징후였다.


경복궁에 가거든, 교태전 뒤뜰 아미산 굴뚝을 보거든, 굴뚝 주변을 배회하며 울고 있는 굴뚝새들을 생각하자. 굴뚝새가 살지 않는 굴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우슈비츠라는 징후다. 이 시대 경복궁에는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온기가 없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 끄트머리에 붙은 반도에는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굴뚝새 같은 노동자들만이 “찌찌, 찌찌쪼로, 쪼로로로로로” 울며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들을 깨운다. 우리 모두가 화답할 차례다. “찢찢”, “초르초르”

 

* 류시화,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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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5 02:59 2010/07/05 02:59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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