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소통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09/07/07 16:12
  • 수정일
    2009/07/07 16:12
  • 글쓴이
    진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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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지인들과 할 때가 있다. 정치속이 너무 빤히 내보이는 언론인과 누리꾼 수사, 게다가 수사 중인 사적인 이메일 내용을 공개하는 몰염치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검찰은 그럴 법한 치들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녹색성장이라는 말로 멀쩡한 땅과 강을 파헤치고, 거액의 장학 재산을 설립하는 뒤로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청와대와 정부의 이중성에 기가 막히지만, 그들이 형용모순을 정말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도 지난달 말 국가인권위원장의 조기 사퇴는, 정말로 큰 충격이었다.
 
위원장 임기가 아직 넉 달이나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언론지상에 꼴사나운 인사들이 벌써 차기 위원장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 문제는 '위원장'이라는 고위직 인사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인권단체들은 인권위 설립 이후 가깝고도 먼 관계를 유지해 왔다. 지난해 청와대가 장애인 시설 비리 전력이 있는 김양원씨를 인권위원으로 임명할 당시에는, 항의 행동에 나선 인권단체들에 대하여 인권위가 시설보호 요청으로 응수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인권위와 인권단체들의 긴장 관계는 인권위가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실질적인 인권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가인권기구는 파리협약이라는 국제기준을 들이대지 않아도 독립성이 생명이다. 본래 자유권은 태생적으로 국가와 시민의 갈등적 관계를 전제해 왔고 사회권은 국가의 대시민적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인권기구는 국가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현재의 권력 관계로부터 필연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인권위 설립 때 인권단체들이 한겨울 눈밭에서 노숙 농성하며 법무부 산하 기구화를 막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화하겠다고 했을 때도 또다시 인권단체들이 맨몸으로 노숙 농성하며 독립기구를 지켜냈다.
 
이런 마당에 위원장의 조기 사퇴는 인권위의 독립성이 처한 위기를 정점으로 몰아붙였다. 촛불 시위에 대한 인권위 결정을 둘러싸고 비판을 몰아칠 때, 인권위의 조직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언하였을 때, 이 정권이 인권위와 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미 드러났다. 이제 그들은 노골적인 우세로 인권위를 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써 길들이거나 식물화하려 할 것이다. 
 
정보인권 차원에서는 큰 일이다. 경찰과 검찰의 디엔에이 데이터베이스, 형사사법정보통합체계 … 정부 부처들이 앞다투어 거대한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국민을 감시하려 할 때 그것을 견제해야 할 인권위는 앞날이 깜깜하다. 
 
답답한 현실에 대통령의 '불통'을 탓하는 언론의 보도에 눈길이 간다. 대통령과 시민사회가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소통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국회가 북새통인 이유는 소통을 매개하는 미디어법 때문이며, 청와대는 갈수록 자기 식의 '소통'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대한늬우스'가 다시 극장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소통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뜻이다. 차기 인권위원장 임명을 앞두고 대통령이 인권단체들과 소통하려면 비참한 인권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 위축과 용산 참사 등 바닥을 치는 최근의 인권 상황을 자신이 초래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그런데 생존권이 벼랑 끝에 몰린 철거민들의 농성을 도심 테러로 규정하고, 갈곳없는 노동자들의 옥쇄 파업을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하고, 전투경찰과 시민의 부상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이들과 소통이 가능할 것인가. 그런데도 어떤 언론은 매 사안마다 대화를 하라며 등을 떠민다. 불통하는 대통령보다 더 깝깝하다. 

 

* 이 글은 미디어오늘 2008.7.7자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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