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용기와 지혜와 연대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길”. 용산참사 200일을 맞아 진행된 추모미사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다. 지금 용산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잊혀지는 것’이다. 그들이 왜 죽었는지 사람들이 잊는 것이다. 그들을 누가 죽였는지를 사람들이 잊는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이 잊는 것이다.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고심한다. 그래서 100일을 세고, 6개월을 세고, 200일을 센다. 이런 계기를 통해 사람들이 기억을 환기시키고, 발걸음을 놀려 현장을 찾아보기를 기대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전하기 위해 블로깅을 하고 인터넷 방송을 한다. 그러나 사건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주류 신문방송의 역할이라는 점은, 인터넷 시대에도 부인할 수 없다.
현장에서는 보도자료를 내고, 또 낸다. 언론이 관심을 기울여 한번이라도 더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실 상대하는 것은 언론이 아니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정부 엘리트 관료, 혹은 거대 기업이다. 이들은 인적, 물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고, 이들 역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도자료를 낸다. 그렇게 그들의 보도자료와 이들의 보도자료가 함께 세상에 쏟아지고,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보도자료들은 경쟁한다.
현상만으로 보면 경쟁우위는 ‘객관성’에 있다. 어떤 주장이 더 논리적이고 권위 있는 근거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보도자료가 우위를 점할 지는 뻔한 일이다. 정부와 기업의 보도자료는 국내외를 아우르는 통계 등 ‘객관적인’ 자료를 훨씬 많이 포함하고 있다. 반면 싸우는 자들의 보도자료에는 투박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예의 ‘성명서체’의 메마른 목소리들로만 가득하다.
사실의 외피를 잘 두른다면 보도자료들의 진짜 경쟁우위는 ‘볼 거리’로 요약된다. 한번 다룬 용산 철거 문제는, 한번 다룬 쌍용차 문제는 또다른 ‘볼 거리’ 없이는 언론 지상에 오르내리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의 보도자료는 컬러풀한 이미지와 볼 거리, 이야깃거리들로 가득하다. 낡고 진부한 이야깃거리 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망루에 오르고 어떤 사람들은 죽어야만 언론 귀퉁이에 한줄 날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정반대일수 밖에 없는 계급 간에 벌어지는 담론 전쟁이다. 양 세력은 보유 자원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보도자료 경쟁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달리기일 수 없다. 권력 관계는 객관적인 수치 그 이상이다. 우리는 보도자료에서 객관의 외피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
언제나 ‘왜곡’을 주의해야 한다. 현란한 보도자료에서도 사실에 대한 왜곡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언론의 중요한 책무이다.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심각한 왜곡은 권력관계에 대한 왜곡이다. 억울한 소비자와 기업의 이해를 같은 선상에 두고 평가한다. 폭력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와 시민의 폭력을 대등하게 비교한다. 노동력을 사용하는 경영진과, 노동력 이외에 아무런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니 때로는 노동자가 더 큰 권력으로 나라를 말아먹는 것으로 왜곡한다.
77일간 외로운 섬이었던 쌍용자동차 도장공장에서 점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던 기자 5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이들 언론인들을 근 48시간을 채우고서야 풀어줬고, 형사입건하였다. 의로운 목소리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는 현장에서 취재 부담은 과거보다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객관 보도’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용기와 지혜와 연대의 정신이 이 시기 이 땅 모든 언론인에게 함께 하기를.
* 이 글은 미디어오늘 2008.8.11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