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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로 한건 나 스스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봐도, 그들과 같이 밥먹고 뭔가를 하더라도 그 때 뿐, 대부분 무심하고 무관심했다.
그런 내 모습이 좀 낯설었다.
2006년 나는 농민들을 만나고 그 마을에 살기로 결정했다.
2009년 피하고 피하다 결국 마주하게 되자 열일 제치고 용산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런 일들에서 대부분 크게 한 일은 없어도 스스로 마음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만나고 만나도 심드렁한 나 자신이 신기했다. 이런 정의, 이런 소용돌이에 끌리는 것 아니었나? 근데 왜 이러지?
처음에는 노동자들 때문인 줄 알았다. 먼저 살갑게 다가오기보다 약간 쭈뼛거리고, 뭔가 진리를 품고 있을 것 같다기 보다는 약간 한량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냥 그런것 때문인 줄 알았다. 아, 나는 노동자들한테 크게 관심이 없나보지? 라고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감정이 북받쳐 오르자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너무 답 없는 싸움이라고. 국내엔 더이상 돌아갈 공장도 없고, 동력도 약한 싸움이라 길게 간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고.
당시 나는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아 어렵구나. 그냥 그렇게 넘겼다. 그렇지만 뭔가 계속 연결되는 일이 생기고, 나는 왠지 기록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뭘 찍어야 할지, 왜 찍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켠으로는 '아~ 나 이거 왜 열심히 안하지??' 하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냥 내 게으름을 탓했다.
2006년에는 살던 곳에서 남은 땅이라도 일구며 살아가기를, '우리땅 지키기'를 하기를 바랐다.
2009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여섯분의 영정 앞에 무릎꿇고 사과하는 장면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소박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박한 것들은 하나도, 단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절망하기 싫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싸움의 끝을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절망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에 빠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 즈음부터 나는 항상 그랬다.
나는 항상 절망에 빠지기 두려워 무엇에도 다가기지 못했다.
#
"일상적연대"
"일상적 연대"라는 것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지금 일상적 연대를 하고 있다/지금 일상적 연대가 필요하다' 같은 것이 아니라 대추리를 경험했기 때문일테다.
'삶'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는 철거지역이자, (각자)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던 곳이기 때문.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대추리 "이후" 일 것이다. 삶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던 생활과, 분리되던 그 '이후'를 감정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뭔가가 헷갈리고 불안했던 것.
'투쟁은 같이 했는데 삶은 같이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갈팡질팡했다.
그렇다고 투쟁과 삶이 묶여있던 대추리에서의 생활이 항상 행복하고 아름답운 것이었느냐? 결코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남고 싶은 일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이미 포기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래된 방식의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에 대한 피로도도 있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엄마가 사는 동네는 싫은데, 대추리라고 좋을건 뭐가 있겠나. 내 개인적인 생활이 엮이는 것과 투쟁에 연대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이기도 했다.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여전히. '투쟁 이후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남아있다. 개인적, 개별적 관계로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인지, 그런것이 혼란스러웠다. 용산의 철거민들은 적절한 보상만 받으면 그 지역을 떠날 예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아쉬움도 있고, 기억이나 추억도 존재하지만, 삶 자체가 땅에 묶여 있는 촌사람들과는 다른 위치였다. 오히려 옮겨다니는 것, 이동하는 삶에 익숙한 도시민들이었다. 그래서 협상 이후는 (생활보장만 가능하다면) 자기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대추리 주민들의 경우, 이후가 없을 것 같은 투쟁을 했다(고 느낀다). 가족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가 묻혀있는 곳이자, 땅에 얽힌 삶의 양태 때문이라도. 정박하는 삶이었다.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이 기억을 안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잘 살아보겠습니다. 정도로 마음을 갈무리했지만, 여전히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이런 형태('일상적 연대'에 주목하는)로 뭔가 잔여물처럼 남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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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일상'과 "연대"
-대추리의 경험으로, 나에게 있어 '투쟁'은, 혹은 다른 가치를 지향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다른 가치지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투쟁한다','연대한다'는 '다르게 살아간다'라는 의미로 자리잡았다. '연대한다'는 어떤 "가치투쟁, 의미투쟁에 가담한다"가 아니라 '다르게 살아간다'라는 의미로. 그래서 '연대한다'는 것이 굉장히 큰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지도 모른다. 작은 일,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위협받지 않고 마음을 약간만 떼어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작더라도 온 마음을 다 해야하는 것, 온전히 마음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라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는 못해'라고 생각하거나 금방 포기해버리거나. 그런걸지도 모른다.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가치투쟁, 어떤 의미투쟁에 동감하며, 적극적으로 그 싸움에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을, 어디까지 책임지는 일일까?.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투쟁의 시간이 지나간 후, 혹은 이겼다/졌다로 상징되는 어떤 결과가 나타난 이후는 어떻게 되는거지? 연대는 끝나는 것인가? 그 가치투쟁은 연대로 자기의 투쟁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 것인지?
-'연대책임'은 무엇을 책임지는건지. 그건 사람에 따라 책임이 달라지는건지. 연대의 정도에 따라서 책임이 달라지는건지. 투쟁의 기여분에 따라 달라지는건지.
모르겠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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