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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석 할아버지

 

#목요일

 

목요일에는 집에 내려갔다.

아직 정신을 온전히 찾은 건 아니지만,

일반실로 올라간 삼촌을 보러 엄마가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서울에 다녀가는 동안, 가게를 보러 내려갔다.

 

동네는 조용했고,

가끔 술 취해 비틀거리는 손님들이 소주를 사갔고,

약간 어려보이는 남자가 담배를 사갔고,

어린 아이들이 와서 새콤달콤이나 뿌셔뿌셔를 사갔다.

 

아빠는 막일을 나갔다고 했다.

 

저녁에 가게로 돌아온 아빠에게서 흙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본 아빠는 더 늙어있었다.

그래도 나는 콧속으로 들어오는 아빠의 흙냄새가 좋았다.

당뇨라 몸도 안좋으면서 막일은 왜 다니는지.

철딱서니 없이 그저 그런 생각만 들었다.

두 달 전에 난 상처가 낫질 않는다며

걱정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곤 곧 동네 아저씨들과 놀러 나가버렸지만.

 

#금요일

 

전날 언니랑 엄마랑 술을 또 진탕 마셨다.

아빠가 한잔 먹고 남긴 고량주를 전부 마셔버렸더니 속이 쓰리고 토할 것 같았다.

가게로 해장국을 시켰는데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애꿎은 엄마한테 막 짜증을 냈다.

엄마에게 나를 확인 받는 방식은 늘 그런것이었다.

속 쓰린데 밥도 못 먹고 가겠네.

이렇게 스스로를 자학하는 걸 보여주면 엄마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빨리 가야 되? 밥은 먹고 가야지.

라고 말한다.

언제나 엄마가 오바하지 않으면서 나를 걱정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왜 좀더 격정적으로 나를 걱정해주지 않는거야? 하며.

 

해장국을 기다렸다.

밥은 먹고 가고 싶었으니.

 

니*에게 카메라를 주러 새 대추리로 갔다.

팬션촌처럼 예쁘게 지어놓은 집들 사이로 콩쥐놀이를 하는 니*와 마리*가 보였다.

길에서 마주친 노영희 할머니댁에 놀러갔다.

"마리* 화장실 가고 싶대요!"

라는 말을 하고.

 

할머니네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뭐, 작은 집들이 꽤 많긴 했지만.

 

아직도 대추리를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다고 하셨다.

대출받아서 지은 집이라 마음이 편치 않다고,

돈 많은 사람들이야 모르지만 내년에 공공근로도 끝난다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먹고살지 막막하다고.

데모라도 해야겠다고 하셨다.

그 때 너희들도 다 와~, 다 와서 도와줘야해?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니*는 애인이 있다고 뻥쳤고, 할머니는 얼렁 시집가라고 성화셨다.

아직도 이런데 다니냐? 직장다니면서 돈벌어야지!

 

쇼파에 앉아서 주름진 얼굴로 보*의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그이는 잊지도 않아. 꼭 이렇게 기억나.

 

보*은 대추리에 있을 때, 들소리에서 미디어교육을 했는데,

노영희 할머니와 함께 영상을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의 기억이 각인되었나보다. 각인될만한 기억이었을거라 짐작한다.

 

어디를 돌아다녀볼까 하고 헤메다가 김영녀 할머니댁에 놀러갔다.

들소리 애들이 왔다고 하니 엄청 기뻐하며 반겨주셨다.

할머니 얼굴에는 주름이 는 것 같았고,

다리가 불편하신데, 이제는 운동도 잘 안나가신다고 하셨다.

이리로 이사하고 나서는 한번도 밖에 안나갔어.

 

이제는 왠지,

 

 

김영녀 할머니 댁에 나와서 나는 인천으로 가야했다.

머무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강권석 할아버지와 한대수 할머니를 만났다.

한대수 할머니는 마당을 쓸고 계셨고, 강권석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다녀오시는 길이셨다.

지금 왔어요?

아뇨, 좀 전에 왔는데 지금 가요;;;

가만있어봐, 버스 시간이..

지금 바쁘게 가면 저기 삼거리 있는데서 버스 탈 수 있겠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내일 올거죠?

네? 네.. 내일올게요

뻥쳤다. 내일은 못온다.

 

길을 나서려 하자 강권석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태워주신다고 했다.

버스타는데까지 가려면 바쁘게 가야한다며.

나도 급하기도 해서 좀 민망하지만 할아버지 오토바이 뒷자석에 앉았다.

 

삼거리에서 10분쯤 기다렸는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이번 버스는 놓쳤겠거니, 20분 후에 있다는 버스를 타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권석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내달려 오셨다.

아무래도 버스가 간거 같애, 객사리까지 데려다줄게요.

 

다시 할아버지 오토바이 뒷자석에 앉았다.

내일 오지요?

네, 내일 올게요.

 

삼거리로 나올 때였나, 객사리로 나올 때였나.

할아버지가 한번 더 확인을 하셨다.

나는 아마 지킴이 명단에서 제명당하고도 더 큰벌을 받을 거다.

 

추운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려니 달달 떨렸다.

할아버지도 '빔' 이라고 써진 캡모자를 다시 눌러써야 했다.

근데 참,

우리가 무엇이라고, 내가 뭐라고.

찬바람을 맞으며 이 사람의 등짝을 보고있노라니,

오토바이라 춥지만, 밭일하고 온 터라 운동화는 꺽어 신었지만,

바래다 주시겠다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

그게 너무 좋아서 왠지 미안해졌다.

 

할아버지에게서도 흙냄새가 났다.

내 몸에서도 흙냄새가 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객사리까지는 가지도 않았는데 추팔공단을 지나자 3번 버스가 옆에 섰다.

대로에서 갑자기 버스 문을 두들겨 버스에 올랐다.

급하게 버스에 타느라고 할아버지께는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다.

못난년.

 

 

 

#일요일

 

토요일에 있었던 마을잔치에 다녀온 니*가 집에 왔다.

마을잔치가 어땠는지, 백서가 어떻게 나왔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물론 좋은 얘기는 별로 없었다.

분위기는 싸-했다고 한다.

좋을턱이 있나.

쫓겨나서 빛져서 새 집 지으면, 집이 깨끗하다고 좋은가? 뭐.

노영희 할머니 댁 화장실에서 봤던,

쌔삥에 삐까리한 집과 어울리지 않게 있었던 놋대야가 생각났다.

 

지금와서 대추리를 기억하는 것은,

쫓겨나와야 했던 당시에는 너무나 슬펐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나는,

어떤 순간이고, 어떤 투쟁이고, 어떤 공간이고.

꼭 함께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지.

물론 그 와중에 당연히 상처받는 사람은 생기겠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처럼,

애도하는 것, 생채기 난 이후 그 상처를 보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걸,

잊지 말아야지.

 

 

아, 근데 지킴이 명단에서 제명당하면 안되는데.. 어쩌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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