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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콜트콜텍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로 한건 나 스스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봐도, 그들과 같이 밥먹고 뭔가를 하더라도 그 때 뿐, 대부분 무심하고 무관심했다.
그런 내 모습이 좀 낯설었다.
2006년 나는 농민들을 만나고 그 마을에 살기로 결정했다.
2009년 피하고 피하다 결국 마주하게 되자 열일 제치고 용산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런 일들에서 대부분 크게 한 일은 없어도 스스로 마음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만나고 만나도 심드렁한 나 자신이 신기했다. 이런 정의, 이런 소용돌이에 끌리는 것 아니었나? 근데 왜 이러지?
처음에는 노동자들 때문인 줄 알았다. 먼저 살갑게 다가오기보다 약간 쭈뼛거리고, 뭔가 진리를 품고 있을 것 같다기 보다는 약간 한량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냥 그런것 때문인 줄 알았다. 아, 나는 노동자들한테 크게 관심이 없나보지? 라고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감정이 북받쳐 오르자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너무 답 없는 싸움이라고. 국내엔 더이상 돌아갈 공장도 없고, 동력도 약한 싸움이라 길게 간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고.
당시 나는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아 어렵구나. 그냥 그렇게 넘겼다. 그렇지만 뭔가 계속 연결되는 일이 생기고, 나는 왠지 기록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뭘 찍어야 할지, 왜 찍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켠으로는 '아~ 나 이거 왜 열심히 안하지??' 하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냥 내 게으름을 탓했다.
2006년에는 살던 곳에서 남은 땅이라도 일구며 살아가기를, '우리땅 지키기'를 하기를 바랐다.
2009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여섯분의 영정 앞에 무릎꿇고 사과하는 장면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소박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박한 것들은 하나도, 단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절망하기 싫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싸움의 끝을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절망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에 빠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 즈음부터 나는 항상 그랬다.
나는 항상 절망에 빠지기 두려워 무엇에도 다가기지 못했다.
#
"일상적연대"
"일상적 연대"라는 것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지금 일상적 연대를 하고 있다/지금 일상적 연대가 필요하다' 같은 것이 아니라 대추리를 경험했기 때문일테다.
'삶'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는 철거지역이자, (각자)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던 곳이기 때문.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대추리 "이후" 일 것이다. 삶과 투쟁이 분리되지 않던 생활과, 분리되던 그 '이후'를 감정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뭔가가 헷갈리고 불안했던 것.
'투쟁은 같이 했는데 삶은 같이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갈팡질팡했다.
그렇다고 투쟁과 삶이 묶여있던 대추리에서의 생활이 항상 행복하고 아름답운 것이었느냐? 결코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남고 싶은 일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이미 포기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래된 방식의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에 대한 피로도도 있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엄마가 사는 동네는 싫은데, 대추리라고 좋을건 뭐가 있겠나. 내 개인적인 생활이 엮이는 것과 투쟁에 연대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이기도 했다.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여전히. '투쟁 이후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남아있다. 개인적, 개별적 관계로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인지, 그런것이 혼란스러웠다. 용산의 철거민들은 적절한 보상만 받으면 그 지역을 떠날 예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아쉬움도 있고, 기억이나 추억도 존재하지만, 삶 자체가 땅에 묶여 있는 촌사람들과는 다른 위치였다. 오히려 옮겨다니는 것, 이동하는 삶에 익숙한 도시민들이었다. 그래서 협상 이후는 (생활보장만 가능하다면) 자기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대추리 주민들의 경우, 이후가 없을 것 같은 투쟁을 했다(고 느낀다). 가족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가 묻혀있는 곳이자, 땅에 얽힌 삶의 양태 때문이라도. 정박하는 삶이었다.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이 기억을 안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잘 살아보겠습니다. 정도로 마음을 갈무리했지만, 여전히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이런 형태('일상적 연대'에 주목하는)로 뭔가 잔여물처럼 남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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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일상'과 "연대"
-대추리의 경험으로, 나에게 있어 '투쟁'은, 혹은 다른 가치를 지향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다른 가치지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투쟁한다','연대한다'는 '다르게 살아간다'라는 의미로 자리잡았다. '연대한다'는 어떤 "가치투쟁, 의미투쟁에 가담한다"가 아니라 '다르게 살아간다'라는 의미로. 그래서 '연대한다'는 것이 굉장히 큰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지도 모른다. 작은 일,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위협받지 않고 마음을 약간만 떼어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작더라도 온 마음을 다 해야하는 것, 온전히 마음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라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는 못해'라고 생각하거나 금방 포기해버리거나. 그런걸지도 모른다.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가치투쟁, 어떤 의미투쟁에 동감하며, 적극적으로 그 싸움에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을, 어디까지 책임지는 일일까?.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투쟁의 시간이 지나간 후, 혹은 이겼다/졌다로 상징되는 어떤 결과가 나타난 이후는 어떻게 되는거지? 연대는 끝나는 것인가? 그 가치투쟁은 연대로 자기의 투쟁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 것인지?
-'연대책임'은 무엇을 책임지는건지. 그건 사람에 따라 책임이 달라지는건지. 연대의 정도에 따라서 책임이 달라지는건지. 투쟁의 기여분에 따라 달라지는건지.
모르겠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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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오랜만에 불질. 또 정줄 놓고 논거 티 팍팍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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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된건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작업실 컴 앞에 앉아서 뭘 해야할지 떠올려봤을 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러면 괜히 작업실에서 히히덕 거리며 웹툰이나 보거나 쓸데없는 웹서핑 같은거나 하고 시간이나 떼우고 올게 분명하지. 그러니 그냥 집에서 놀자 ㅇ-<-< 라는 식이 되어버려 또 그냥 공치는 나날들이다. 근데 정말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어쩌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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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아. 떼창연습 때문에 오랜만에 옛날 화면들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현장과 분리되는 것에 대한 불안은, 아마도 대추리에서의 삶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떤 대의나 명분에 가담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활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던 것이, 어떤 '활동'을 한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운동을 한다'거나 '활동을 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운동에 대한 자각도 별로 없었거니와). 마을을 나온 후에, 그리고 여태까지도 드문드문, '나는 왜 주민들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지 못하나'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추리의 대의명분인 '미군기지 확장반대'는 평화운동, 인권운동의 범주(및 반미운동환경운동 등등이 함께 있었지만 어쨌뜬) 안에 있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어떤 면에서 내가 겪은 삶은 공동체운동이랄까 지역주민운동이랄까, 그런 측면도 동시적으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그런 개념이 별로 없었을 뿐.. 이런저런 이유를 달지만 어쨌든 나를 추동하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관계'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일것이다.
관계를 쌓고 만들어나가고 하는 것은 왜 중요해졌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주민들'하고 뭉뚱그리면 막 낭만화되고 아련아련한 이미지에 막 그러니까 마치 개개인들이 엄청나게 친하고 살갑고 서로 두텁고 행복한 그런 시간을 보냈을 것만 같지만 사실 곰곰히 짚어보면 한명 한명의 모든 주민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거나 엄청나게 두터운 관계를 쌓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 중에 어떤 분들과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을 많이 주고 받은 경우도 있고, 이러저러한 때도 있었으나, '우리'를 묶어주던 '투쟁 중'이라는 얼개가 풀렸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관계, 혹은 다른 측면의 접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참 오랫동안 죄스러웠다.(물론 내가 참 연락을 안하고 못하고 막 그렇긴 했다 흑흑) 투쟁 '끝' 이라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 이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투쟁 끝' 뒤에 무엇이 자리해야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런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데 묶어서 작업하자고 생각했던 것에는.
그냥.. 그렇다고;;;;; 하도 오랫동안 작업에 대해 생각조차 안하고 있어서 잊어먹게 되는 거 같아서;;;;
1. 이럭저럭하게 예전에 인터뷰 했던 영상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참 아예 내용을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었구나 싶다.
마음먹고 '인터뷰 해야지!'하고 갔을 때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들이댔구나 싶다.
그 와중에 가장 큰 잘못은 어설피 대충 내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넘겨짚어 넘어갔던 대목이다.
사실은 하나도 알지 못하고,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 사람이 내뱉은 단어와, 이 때 멈추었던 숨이 무슨 의미였는지 하나도 몰랐는데.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래서 제대로된 인터뷰는 없구나.
그래. C는 이렇게 시간차가 필요한 촬영이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렇게 오랜 시간의 투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
'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너무나 이상했던 것이 정황상 이들의 과정이나 감정이나 기복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현재 상황의 파편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었고, 아는 척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기투쟁은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되었고, 그렇게 생활이 바뀌고 일상이 변화되어 다른 것들이 아예 변화한다는 것을. 그저 어떤 이벤트를 안다는 것이 그것을 안다는 말로 바뀐 것 같다.
그리고 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만연하는 폭력이 일상화 되었을 때 생기는 나쁜 내성 같은 것.
아.. 겉멋만 들어가지고 나는 으아....
1. 9월 이전은 잘 생각이 안남-_-;;;;
다시 봐야하는것인가...!!!!
2. 10-11월 초 는 보면서 매우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상황이 우울하기도 했지만, 보면서 특히나 우울했던 듯.
11월 8일 2차 철조망이 우울의 최고조였던 듯.
3. 11월 중순-말
특히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들소리와 관련된 것도 많고.
운동회, 김장 담그기 등이 재미있었던 방송인듯.
* '주민앵커'가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 부분을 활용할 수 있을지?
*'김양분 할머니' 에게 특히 애정을 가졌었던 것이 기억남. '사소한 이야기' 할 때 주인공으로 세웠던 할마시..
근데 김양분 할머니 말고도 애정을 가졌던 할마시들이 많아서 이걸로 괜찮은걸까 생각했었던 것이 기억남.
*편집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 판단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매우 촬영본이 거시기.. 이걸 얼마나 쓸 수 있을지가 고민됨..
방송분을 받는 것이 맞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일단 방송분은 받아두고...
*후반으로 가면, 방송분에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주민들이 회의하는 장면을 니나가 촬영했던 것으로 기억.
이 소스를 활용할 수 있을듯.
당사자-연대자의 관계와 책임 부분에 대해. 다만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 어떤 위치가 적절할지는 다른 소스들과 배치해봐야할 듯.
*소스를 다 보기 전에 구성안을 써야할 것 같은데..... 어쩌지...-_-;;;;;
1.
어제는 주저리주저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는데 오늘 막상 쓸려고 하니 딱 생각이 안난다.
이거슨 그날 뭘 보았느냐 때문인듯.
2.
어제 C 촬영본을 봤을 때는.
나으 무능함, 오글거림, 회피하고 싶은맘으로 가득가득.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엮을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 대신에, 소스 자체는 잘 안보게 됐었다. 발촬영에, 나의 이상한 리액션, 그리고 아무 앞뒤 맥락없는... 그리고 많은.
역시나 C는, 보면 볼 수록. 내 깜냥이 안되는 곳이었구나 싶다. 일도, 관계도, 움직임 자체도. '내 할 수 있는 만큼' 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커야할 것 같은 압박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것 같고. '뭐 어때? 난 나야! 난 원래 이만큼인걸!'이라고 당당하기에는 자아가 약하다. 흐으. 아무튼 여러모로, 감당하기 어려운 곳. 이라는 생각. 그래서 핸들링이 가능한 선이 어디까지일지 잘 생각해보고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어렵지만.
어쨌든 C의 소스는 너무너무너무너무 보기 싫지만, 대신에 영화를 어떻게 엮을 것인지 구성, 혹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해 쪼끔이나마 생각했던 것 같다. 안적어놔서 뭘 생각했는지가 기억 안나는 것이 함정...
근데 오늘 본 A소스는 그냥 상념에 빠져, 과거에 잠겨, '아, 저때 저랬지. 아, 저때 저것도 했지. 아, 저때 재밌었지' 따위의 생각으로 구성은 커녕 내가 작업할려고 보고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_-;;;
A도, C도 문제인데 B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그것도 문제다.
하아, 하는 것 없이 나이 먹었다는 사실이 싫어서 어떻게든 정리해서 엮어볼려고 했드니만 그건 참 쉬운일은 아닌 것 같다. 없는걸 꾸며내려니 힘든 것인가. 사실 별로 한일 없이 나이만 먹은것도 맞는 말이라고..
아 지겹다 나의 무능함!!!! 그리고 이 자학은 아마 pms가 몰고 온 우울증상이겠지!! 나는 안다!! 지지 않겠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미 좀 짐.. 내 마음은 이미 나를 공격하고 있다.
3.
어떤 일을 하기로 했는데 자꾸 하기 싫어서 징징거리게 된다. 아. 안할거면 안한다고 할 것이지. 이런걸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할듯.
아무튼 정신차리고 살아야겠다.
1. 일상 단상
따뜻하게 입고 나간다고 갔는데도, 해가 질 무렵부터 바람이 불더니 쌀쌀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평택은 항상 추운 느낌이다. 여러 의미로 바람 많은 도시. 하...
덕분에 몸에는 한기가 들었고, 집으로 오는 길에 왠지 헛헛해서 먹은 핫바는 얹혔고,
체기가 가라앉자 갑자기 미친듯이 배가 고팠다.
나는 알아, 이건 정신적 배고픔이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먹어야겠다 싶어서 냉장고를 뒤적이다
언니네 텃밭에서 온 콜라비를 보고, 샐러드를 해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러쿵저러쿵 하다보니 정작 콜라비는 뜯어보지도 않고 상추 샐러드가 되었다.
게다가 참깨 드레싱을 뿌린다는 것이 머스타드를 뿌려버림. 아놔...
근데 콜라비는 대체 어떻게 먹어야 하는걸까-_-;; 까는 것 부터 어떻게 해야하는지 좀 막막하다.
2. 작업단상
집에오는 버스에서 경험이 쌓이는 것은 무서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렛 박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아무튼 그런식으로 박스에서 기억을 하나씩 꺼내는 것 같은 느낌으로 구성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사실 이 경험들을 섞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건데 그렇게 따로 두면 안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그렇지만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있었던 일이므로 각자의 특성과 의미는 살리되 하나의 박스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좀 더 강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혹은 그런 장치를 깔아서? 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근데 포레스트 검프가 내가 떠올리고 있는 그 얘기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다시 포레스트검프를 보기로 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는 길에 결국 편의점에서 맥주를 삼. ㅎㅎ)
3. 이어지지만 분리되는 단상.
스스로는 A와 연대가 원활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죄책감도 생기고 아예 반대로 끊고 싶은 생각도 들고, 아무튼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생각하려고 했던 적은 종종 있었지만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고, 항상 어영부영 생각을 꿀떡 넘겨버렸던 것 같다. A와 관계에 무슨 이상한 피해의식도 있는 것 같고...-_-;;
ㅁ이나 ㅈ은, A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열린 공간이었고, 실험의 공간이었다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공간이었던 것 같다. 잘하지만 뽐내지 않는 사람들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잘하는게 없는 내가,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하지 않은 내가 참 초라해보였기 때문이다. 다들 훌륭한 일을 알아서 척척 해냈기 때문에 '고양이 손이지만 나라도...','별로 할 줄 아는건 없지만 이렇게라도...' 라는 생각이 안들었기 때문에 적극성을 잃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가 초라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자존감이 너무 떨어졌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넘어야 할 산이었음에도 멍청하게 뒷걸음질 친 것이기도 했는데,
소위 주로 '큰 판' 이라는데서 내 나름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왔던 나는, 언제나 세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개인이었기 때문에 '대책위' 라던가 '운영위' 같은 운영회의에 들어간 적이 없었고, 대부분 '~캤더라' 정도로 정보를 알고 있었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판이 워낙 크기도 했고, 아무 세력이 없기도 했고, 어려서 그러기도 했고.
근데 A는 막 무슨 단체들이 줄줄이 들어와 있는 범대위 같은 큰 판도 아니고, 아무 세력이 없는 개인들도 많고(혹은 아무 세력이 없는 개인들의 참여를 장려하고), 나도 이제 더이상 그렇게 어리지는 않다. 그러니 사실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더라도 '회의에 오라'고 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고, 만일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면 꾸준히 이 투쟁으로 무엇을 기획하고,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게 하려는지, 그리고 수행자들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켜보는 것 뿐 아니라 의견을 내며 관여하는 것 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걸 꼭 해야하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참 여전히 아리송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꾸준히 진행과정을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회의라는 것이 전부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진짜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지만. 어쨋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꾸준히'라는 수사이다.
한편으로는 핵심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시도이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혹은 '주체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스스로 수동적인 인간이라고 늘 생각하는데, 결정적 순간의 결정은 내가 할 수 밖에 없지만, 항상 누군가 제안하고, 끌어주는 곳에 발붙였던 것 같고, 그런 일들을 해왔던 것 같다. 스스로 기획해서 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을 때 없다고 생각이 들면서 난 참 비주체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좀 자신감이 떨어져서 그런거기도 하지만) 어쨌든 주체적으로 살아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왜 이런것마저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_-;; 회의에 가서 지켜본다고 해서 꼭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_-;; 아무튼 이 산을 넘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되는? 뭐든 하여간 조금이라도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삼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음.. 이렇게 쓰니 뭔가 또 더 많은 설명과 다른 첨부들이 필요한데, 꼭 운영회의에 들어가야먄 주체적으로 사는거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정확한 표현이 안나와서 참 거시기 한데...
아무튼 투쟁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 정도가 되겠다. 그동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곳들도 있었는데, 다만 쩌리였기 때문에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못했었다. 대세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기획을 함께 해보자, 이런 식이려나. 근데 마음가짐은 몸에 좋은 쓴 약을 먹는 듯한 것이라, 눈을 질끈 감고, '으으, 이걸 버텨야해!!' 라는 식이라 막 확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의 준비는 잘 안돼있는 상태다. 고민됨. 그리고 사실, 이게 정말 몸에 좋은 약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쓴걸 참고 먹었는데 너덜너덜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
그렇지만........... 항상 생각하는거지만, 핵심으로 지나갈 때, 태풍의 눈 속에 있을 때는 오히려 고요하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은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 휩쓸렸을 때다. 혹은,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다하더라도 지나고 나면 배우는 것, 남는 것이 있을 거라는 것.
나는 '후회' 같은건 잘 안하는 사람이고, 보통 과거의 경험을 미화하거나 그래도 이건 좋았어 정도로 대충 좋게좋게 정리하는 편인데, 한가지 크게 후회하는 것이 생기고 그런 경험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생기니, 여러가지로 두려움이 생긴다. 그 전에는 저런 마음(지나고 나면 괜찮아져, 다 배울 점이 있는거지)가짐 쯤으로 대강 뛰어들었던 것도 좀 있었던 것 같은데, 후회라는 것을 하고나니 몸을 사리게 되는 것 같다.
경험하지 않아도 좋았을 경험이라고 새겨지는 것은 참. 참 끈질기구나.
후아.
어쨌든.
잡설이 길어졌다.
포레스트검프 봐야되는데-_-;;;
132,133번 테잎을 보니 매우 느낌이 좋다.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학생이라는 건조한 관계 이외의 어떤 모습들이,
실제로 가르치고 배우는 틈 사이로 조금씩 비죽이 나오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윤쌤에게 제주도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의 모습에서는
윤쌤의 서투름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윤쌤도 툴툴대고, ☆☆도 툴툴대는 성격이지만,
이런저런 일상을 겪으면서 그 안에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한글을 좀 늦게 깨우친 편인 △△이가 국어 문제를 한개밖에 안 틀린건 어찌나 기특하던지.
자기 자신도 뿌듯해 하는 얼굴이 참 귀엽다.
126번 테잎에서도 느꼈지만.
나는 이 즈음부터 아이들에게 현장 인터뷰 같은 것을 시도했었다.
음. 정말 제대로 된 인터뷰가 거의 없다.
132,133번 테잎에도 아이들 인터뷰가 잠깐 있다.
나는 ■■에게 끈질기게 물어보는데, 계속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들에 다가가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질문하고 싶었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저 조금 더 그 질문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실패했던 것이었다.
촬영할 때는 못 알아들었던 중요한 단서들이 들린다.
♤♤가 ■■형네 집앞에 지나갔더니 방에는 불이 꺼져있고 거실에만 불이 켜져있었다.
방에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가 그건 "엄마 혼자 밥 먹을 때"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맥락상 ■■가 엄마랑만 산다는 건 전혀 알 수 없다.
엄마랑만 산다거나, 아빠랑만 산다거나,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하고만 산다는 것.
아이들에게 그것을 스스로의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의 가정환경에 대해 대충 들었지만,
그런 삶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몰랐다.
그리고 심지어, 부끄럽게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조차, 몰랐다.
사실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노력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추석즈음의 촬영분에는 아이들에게 친척집에 가는지, 용돈을 받는지,
내 딴에는 그런 '소소한 질문들'을 했다.
⊙⊙이와 ♧♧이는 친척네 가고, 용돈을 받는다고 했고,
■■는 안간다고 했고, 이번에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엄마가 화가나서 용돈을 안 주실 거라고 했다.
곧 해맑게 웃긴 했지만 장난치는 분위기였는데도 ■■는 잠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런 '소소한 질문들'을 던질 때 묘하게 불편했던 선생님들의 표정과 분위기들.
나는 촬영을 하면서 한번도 아이들 스스로에게 자기들의 가정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아, 딱 한번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놓쳤다. 물론,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의 범주에 들어있지 않은 아이들.
가난한 아이들, 가난한 동네의 아이들.
아이 키우는 것의 대부분을 가족단위가 책임을 지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돌봄을 받는 아이들.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복지'라는 행위가 갖는 시혜적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들' 이라는 점을,
나쁜 한국사회를 유지하는 나쁜 말들 중에 핵심인 가족주의의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라는 점을,
이 아이들이 바로 한부모 가정의, 조손 가정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이 아이들이 바로 (비꼬며 말하자면)'복지혜택' 속에 있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이 선생들이 바로 그것을 연결하고, 감싸고, 행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렇게 중요한 현실이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크게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촬영본은 헐겁고 가볍다.
어떤식으로든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현재 촬영본만으로는 그 이야기를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편집도 다시 도피의 연속이다.
핵심을 찌르지 않고 간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부딪치면서 일상을 지내고 있는
공부방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 사회에 이 사람들이 놓여져 있는 위치와 그것이 가져오는 차별과 상처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에 대해,
그리고 더 잘하고 싶어하는 이유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아아.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너무나 협소하고 짧았고 너무 적었다.
그렇다. 이것을 말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말하기 방식에 대한 고민이....
아마도 그냥 열심히 했다면,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도피했던 것이다. 핵심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 적어서, 그리고 너무 위험한 방식으로 전개될지도 몰라서,
이 상태에서 어떻게 진전시켜야 할지 모르겠어서,
안절부절하거나, 맥 없이 다른 이야기들을 만지작대고 있다.
내가 이 아이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충격.
타인에 대해 '말하는 사람'으로서 말하기 방식에 대한 어떤 지식도, 지혜도 없다는 것에 대한 충격.
아. 충격의 연속이다,
녹취를 할 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작업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조금 버거운 일이다.
근데 왜 그렇게 괴로운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난리를 쳤지.
누군가는 다큐멘터리가
인간을 이해해야하는 일이라고 했던 것 같다. 맞다.
그런데 주인공들을 이해하기에 나는 폭이 너무 좁았다.
근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들이댈만큼 용기는 없고.
어쩌면 철딱서니 없는 컨셉으로 무턱대고 들이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괜히 그럭저럭 세상이치 아는 척을 하다가 이제서야 혼이 나고 있다.
물론. 더 혼이 날테고, 잘못한 것이 이것만은 아니겠지만ㅠ_ㅠ
김pd는 나한테 테잎을 보며 스스로의 부족함에 머리를 찧을때가 종종 있을거라고 했는데,
아마 그동안 내가 지랄발광을 했던건,
스스로 좁다는걸 인정 못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 동물적으로는 뭔가 크게 비어있고, 부족한 것이 느껴지는데
그걸 남탓을 해가며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거 같다.
촬영기간에 언뜻 스치며
뭔가 이런걸 더 생각해봐야하나? 라고 생각했던 것,
이건 모르겠는데, 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멍청하게 그냥 흘리고 말았다!
그걸 공부하고 토론하고, 정리를 했더라면,
지금처럼 넋놓고 있었다는 후회를 하진 않았을텐데;;;
S의 말마따나 나는 스스로 무엇을 갖고있는지 없는지, 어떤 상태인지
이런 것들을 감각적으로는 캐치했던 듯.
그러니까 근데 그걸 왜 안했니............
아니, 하려고 노력을 했던 적은 좀 있었던 거 같긴 하다.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역시 용기가 부족한겅믜-_-a;;
수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도닥이며 해줬던 위로의 말이며, 뭔가를 알려주려했던 거하며 이거저거가
다 뒤섞여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구나-_-;;
다큐멘터리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입장이나 시각을 만드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특히나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서 내가 만들어야 했던 부분은 그것이었다.
관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스스로도 누누히 말했듯이 1~2년 본다고 뭔가 깊숙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또, 주인공들은 또래도 아니니 급작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뭔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뻘, 이모뻘, 언니뻘들이었죠...-_-;;)
그리고 사실은 어쩌면 친해지고 안친해지고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를 향한 발언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시각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친해질 수가 없어서 어렵다, 라는 핑계는 정말로 핑계였고.
오히려 친해지고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시각을 세울 수 있었어야 했다.
전혀 모르다시피 한 분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그것의 사회적 구성,의미, 스스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혀.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ㅁ-;
말하자면 입장조차 없이 그냥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멍청이-_-;;
지금 생각해보니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 했을 때의 핵심은 그것이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시각,관점을 갖는것.
근데 잘 모르는거니까, 관심이 별로 없으니까. 하고 넘겨버렸으니-_-
이거 뭐 어쩔;;;
아마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업에서 많은 부분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시각을 만드는 것, 이 아닐까.
만약 내가 계속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근데 왜 난 공부를 하나도 안했을까. 공부를 하고, 묻고, 질문하고, 답했어야 했다. 정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철학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발을 디디려고 하는 곳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정도는 알았어야 했다.
멍청이짓을 많이 했지만, 이건 정말 대박 멍청이짓이다.
1년을 날린 멍청이짓 중의 멍청이짓이다.
아오.
책을 파고 공부를 한다고 해서
주인공들의 깊이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시각'을 갖는건 최소한의 것이었다.
그래봐야 타인의 깊이에 또 좌절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절망할 때 밑바닥에 받침대정도는 되줬을텐데...
암튼 이 멍청이짓을 회복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듯...-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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