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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2편,독립아닌 독립

화장실 다녀와서 2편,

원래 1주일에 2번 정도밖에 안가는 화장실을

이번주는 매일 간듯하다-_- 그것도 매일 후 4시쯤.

아무래도 맨날 점심 과식한게 원인인가-

마구 밀려 나온다.

덕분에 몸이 가뿐해져서 저녁도 많이 먹게 되니 악순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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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얘길 이어서 좀 하면,

가끔씩 서울에서 하는 집회나 교육에 갔다가 뒷풀이라도 할라치면 당연히 집에 못가고,

방학 때는 현장활동 준비한다고 오히려 외박이 더 잦아지니

이제 집에선 아얘 포기하고 내가 들어오는지 안들어오는지 별로 안궁금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나,,였다.

집에 갈/ 갈 수 있는 날도 있는데 집이 너무 멀다고 느껴서 집에 안가는 날이 증가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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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좋게 1학년 2학기에 기숙사에 퇴실자가 생겨서 기숫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턴 서울에서 뒷풀이를 하면 당연히 수원에 안갔고,

학교앞에서 뒷풀이를 하면 새벽에 기어들어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는 같은 방 아이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출석은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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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이 되어서 성적이 모자라서 기숙사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뭐 1학년 2학기도 자리가 비어서 운좋게 들어간 것이지 성적이 좋아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통학 못하겠다고 완전 버티면서 집에서 투쟁,,(?!)을 시작했는데,

아빠는 나가 사는건 허락할 수 없다며 왠걸, 덜컥 차를 사주셨다.

집에 좀 들어오라는 뜻으로....였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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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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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부르주아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깟 차 한대 쉽게 사줄 수 있는!! 그런 형편은 아니었지만,

할부금 갚을 만큼은 되셨나보다...음...

그 이후 내 차는 학교 행사와 나의 활동에 꽤나 유용하게 쓰였다.

아, 연애에도 유용하게 쓰였구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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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학기를 마치고 03년 여름을 보내고 나는 덜컥 휴학과 함꼐 어학연수를 갔고,

1년이 지나 돌아와서는 04년 가을에 무릎 연골이 찢어져 수술을 하는 대형 사고를 쳤는데,

엄마는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기브스를 한 나를 맨날맨날 나를 차 뒷자석에 가로로 싣고

아침에 학교 데려다 주고 저녁에 집에 데려오고 했어야 했다-

엄마는 슬슬 귀찮아서 짜증이 났고-_-나는 슬금 학교 앞에 집을 구해 나가살겠다 했고,

이듬해 본과에 진입하면 어차피 나가살게 되리라 생각하던것이 단지 몇달 당겨질 뿐이란 생각에서

부모님은 학교 앞에 13평 아파트를 구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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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듬해 난 진급하지 못했다-_-

그리하여 어영부영 집도 얻고 차도 얻은 것이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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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혼자 나가살게는 되었는데,

집을 사주신 것도 부모님이고, 생활비의 절반이상을 부모님께 얻어쓰는 입장에서

그것은 독립이 아니다.

게다가 난 나가 살게 된 그당시에 선배의 자살과 본과 진입 실패로 매우 unstable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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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에서 2006년 12월까지 약 2년간 나는 그집에 혼자 살았다.

청소는 커녕 쓰레기도 자주 비우지 않고 설거지도 제때 안해서

나는 종종 다른 생물, 미생물들과 동거하는 상태였다.

혼자 있는게 힘들거나 버거울 때 나는 부모님 집에 가거나 애인을 불러들였다.

연애하는 동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집에 혼자 있는 동안 나는 완전하게 우울했다.

조울증도 좀 있었고 약을 먹기도 했으며 담배는 날로 늘었다.

내 생활은 전혀 독립한 성숙한 홀로 선 누군가의 것이 아니었다.

혼자 산다고 독립은 아니다.

나는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었다.

나는 그저 학교 앞에 살고 싶은 것 뿐이었다.

부모님이 수원으로 이사 오신다면 다시 부모님집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진짜?)

지금도 수원집을 떠올리면 내 자신이 짠하다.

다신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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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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