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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단백질 - 암치료의 새 길을 비추다 [제 859 호/2009-01-05]

최근 여름에 기승을 부리는 해파리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파리가 해안을 점령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 해파리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혜택을 베풀기 때문이다. 해파리에서 발견한 ‘GFP(Green Fluorescent Protein, 녹색형광단백질)’로 암 발생기전을 규명하고, 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GFP는 바다에 사는 해파리의 체내에서 채취한 것으로, 자외선이나 청색의 빛이 닿으면 녹색의 형광 빛을 발하는 단백질이다. GFP는 생명과학 연구와 의약품 개발에 빠질 수 없는 필수도구라 할 수 있다. 아마 전 세계 실험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유전자가 GFP 유전자가 아닐까 싶다. 최근 10년 동안 GFP를 이용한 기술들이 바이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생명체가 갖는 수많은 단백질 중 GFP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노벨상까지 받게 된 것일까?

3명의 과학자에게 노벨 화학상을 안겨준 건 해파리 몸의 독특한 단백질 덕분이다. GFP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빛나는 표지(glowing marker)’이다. GFP는 밝은 녹색의 형광을 내기 때문에 특정한 단백질 분자에다 형광 단백질을 꼬리표처럼 붙이면 표적처럼 빛난다. 따라서 녹색 형광을 따라 단백질의 움직임과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특정 세포가 어떻게 움직이고 성장하는가를 손에 쥐듯 알 수 있다.

만일 암을 일으키는 단백질 유전자에 꼬리표인 GFP를 붙여 넣었다면, GFP의 빛을 통해 단백질이 제대로 들어가 작동하는지, 암이 어떻게 움직여 얼마나 커지고 어디로 퍼져 가는지를 규명할 수 있다. 또한 GFP 유전자를 조작하여 식물에 주입하면 밤에도 빛을 발하는 발광식물을 만들 수 있고, 화생방전이나 가스를 발견하면 색깔이 바뀌는 식물도 만들 수 있다. 미국 국방성은 이를 테러전에 사용하고자 이미 감지식물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GFP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세포나 유전자에 주입하여 동물의 암세포 식별에 활용되는 등 이미 여러 분야에 다양하게 사용할 정도로 친밀한 물질이다.

이렇듯 중요한 GFP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시모무라 오사무이다. 그는 1955년 일본 나고야대 히라타 교수 밑에서 대학원 학생이 아닌 조수로 일했다. 당시 그는 히라타 교수로부터 ‘연체동물이 왜 빛이 나는지 알아보라.’는 말을 듣고 생명체의 발광 현상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시모무라는 조개류가 물에 젖으면 다양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원인 발광 단백질을 발견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업적으로 그는 박사과정을 수료하지 않았음에도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프랭크 존슨 교수의 초청까지 받았다.

그는 1960년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존슨 교수와 함께 발광 해파리가 움직일 때 녹색 빛을 내는 이유를 밝히는 연구에 돌입했다. 그리고 1962년, 에쿼리아 빅토리아(Aequorea victoria)라는 발광 해파리에서 녹색 형광을 내는 단백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처음으로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GFP가 청색 빛이나 자외선 아래에서 녹색을 낸다는 점도 알아냈다. 그전까지 단백질은 산소 등 다른 물질의 도움이 없으면 빛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모무라 박사가 처음 추출한 단백질도 마찬가지다. 에쿠오린이라는 단백질이었는데, 이것은 칼슘이 있을 때 푸른색을 발했다. 이때 그는 발광 해파리는 녹색을 띠는데 왜 에쿠오린은 푸른색을 띠는지를 이상히 여겼다. 그래서 또 다른 발광체를 찾기 시작하다가 에쿠오린이 내는 높은 파장의 푸른빛을 흡수한 GFP가 낮은 파장의 녹색 빛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GFP가 처음 발견됨으로써 그때까지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생체 단백질의 미시세계가 실험실에서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GFP에서 아직 규명되지 않은 점이 있다면 해파리가 왜 형광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다. 시모무라 박사는 2001년 퇴직했지만 지금도 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집 지하에 실험실을 만들어 놓고 해파리를 쥐어짜며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총 1백만 마리 이상의 해파리를 잡았다고 한다.

GFP가 위치 표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더글러스 프래셔 박사가 처음으로 생각해냈다고 백과사전 누리집인 ‘위키피디아’는 전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프래셔 박사는 1994년 <사이언스>지에 챌피 박사와 함께 관련 논문을 낼 정도로 잘 나가던 생화학자였다. 그는 시모무라 박사가 해파리에서 발견한 GFP가 어느 유전자에서 만들어지는지 찾아내 이 유전자를 생물학 실험도구로 활용하려고 했다. 우즈홀해양연구소 재직 당시인 1980년대 말 그는 이런 내용의 연구계획 지원 요청을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냈으나 거절당했다. 다행히 미국암학회가 2년간 연구 지원을 승인해 1992년 마침내 최초로 이 형광 단백질의 유전자 서열을 분석했고, 해파리의 DNA에서 GFP의 유전자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년 연구는 거기서 멈춰야 했다. 연구 기관을 전전하던 그는 결국 재직했던 우즈홀 해양연구소마저 떠난 뒤 미국 농무부에서 해충연구를 하다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으로 옮겼지만 연구 프로젝트가 해체되면서 실직자 신세가 됐다. 그는 2006년부터 앨라배마주의 헌츠빌에 있는 자동차 매매상에서 시간당 10달러를 받는 셔틀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그가 찾은 유전자는 이미 오래전에 챌피와 첸 박사한테 흔쾌히 나눠주었고, 그로 인해 그가 이루려던 발견이 이들의 손에서 이뤄졌다. 프래셔 박사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프래셔 박사로부터 GFP의 원천 연구를 제공받은 챌피와 첸 두 과학자는, 1990년대 초 GFP를 특정 단백질 유전자에 붙여 표지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먼저 챌피 박사는 연구하려는 단백질의 유전자에다 GFP의 유전자를 끼워 넣어 붙이면 연구 대상 단백질이 세포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할 수 있음을 알아내고는 실험 방법을 체계화했다. GFP를 선충 등 다른 생물의 체내(촉각수용체 신경세포에서 주로 켜지는 유전자의 스위치 아래)에 집어넣은 후 살아 있는 투명한 선충에 자외선을 비추자 GFP가 만들어진 촉각 수용체 신경세포에서 녹색 형광이 나와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연구자들은 병을 일으키는 단백질들이 생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첸 박사는 GFP의 형광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또 이 단백질의 아미노산을 일부 바꾸면 형광 빛깔도 바꿀 수 있음을 확인했다. 초록색뿐 아니라 파란색, 청록색, 노란색 등을 내는 여러 가지 GFP를 만드는 데 성공해 여러 단백질에 다양한 꼬리표를 붙일 수 있게 했다. 여러 종류의 연구 대상에 각각 다른 색깔의 형광 단백질을 붙이면 한 번에 여러 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단번에 여러 단백질의 기능을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때부터 GFP는 유전자 기능을 발견할 수 있는 획기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청록색ㆍ붉은색ㆍ노란색 등의 화려한 이미지로 세포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글 :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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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게 된다 [제 858 호/2009-01-02]

2009년, 소의 해가 밝았다. 소는 옛날부터 농사꾼의 듬직한 존재였기에 부와 성실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의 좋은 동반자 관계여서 그런지 유난히 소와 관련된 속담도 많은데, 그중에서 아마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속담은 우연히 행운을 얻게 된다는 뜻의 ‘소 뒷걸음질치다 쥐잡기’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과학사에도 이러한 사례는 종종 있다.

실험 과정에서의 사소한 실수가 위대한 발견을 부르기도 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불리는 기적의 물질 페니실린도 실수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국의 미생물학자인 플레밍은 세균을 관찰하는 실험을 하던 중, 세균 배양기 위에 콧물을 떨어뜨렸다. 칠칠치 못한 일이었으니 얼른 치워버렸으면 그만일 텐데, 그는 자신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관찰했다. 관찰 결과 콧물이 들어 있는 배양기의 세균이 모두 죽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콧물 속에 세균을 죽이는 리소자임이라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플레밍은 실수를 통해 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당시 플레밍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부스럼의 원인이 되는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세균을 배양할 때는 다른 세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배양기의 뚜껑을 잘 닫고, 다른 세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실수로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배양기가 있었고, 거기에 푸른곰팡이가 끼어 못쓰게 된 일이 생겼다. 배양기 뚜껑이 열린 사이 푸른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붙었던 것. 그런데 신기하게도 곰팡이가 핀 배양기에는 세균이 모두 죽어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가 세균을 죽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플레밍이 맞았다. 그는 ‘페니실륨 노타튬’이라는 푸른곰팡이가 폐렴균, 탄저균 등의 세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플레밍은 이 성분을 추출해 페니실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최초의 항생제가 탄생한 것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1945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세균도 곰팡이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플레밍이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배양기에 딱 알맞은 세균과 곰팡이가 만나 반응을 한 것은 정말 로또 당첨에 맞먹는 행운이라 할 수 있다.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이후 병리학자인 플로리와 체인이 페니실린을 정제해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페니실린이 상용화되는데도 역시 우연의 힘이 작용했다. 실험 동물로 기니피그가 아니라 생쥐를 썼다는 점이다. 페니실린은 생쥐에게는 독성이 없지만 기니피그에게는 독성이 강하다. 따라서 기니피그를 실험용으로 사용했다면 페니실린을 약으로 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지 모른다. 현대 의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항생제는 이렇게 이어진 우연의 결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많은 과학사가들이 20세기 과학의 기점으로 삼는 X선의 발견 역시 행운의 여신이 준 선물이다. 뢴트겐은 음극선에 대해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X선을 발견하게 되었다. 검은 종이로 둘러싼 크룩스관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근처에 있던 판이 형광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진공관에 전류를 흘려보내면 음극선이 금속 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하면서 투과력이 강한 새로운 광선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지의 빛이라는 뜻에서 이 새로운 광선을 X선이라 명명했다. 뢴트겐은 이 발명으로 1901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최근 우연한 발견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남성용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의 원료 실데나필의 개발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원래 연구팀은 심장병 환자를 위해 혈액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약제를 개발하던 중이었다. 이 약은 영국에서 심장병 환자들에게 투여되었는데, 심장 기능을 개선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약을 수거하려고 하자 환자들이 거부했다. 환자들은 그 이유를 “심장에는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성생활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약이 심장 기능을 회복시키는 효과는 미미하지만 부작용으로 음경 발기를 일으킨다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후 대대적인 심상 실험을 거쳐 화이자는 1998년 4월 비아그라를 출시했고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제품의 부작용이 각광받은 사례는 탈모제에도 있다. 탈모 치료제인 프로페시아와 미녹시딜은 원래 각각 전립선 치료제와 고혈압약으로 개발되었는데 둘 다 머리, 팔, 다리 등에 다모증이 생기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미국 제약회사 MSD는 자사의 전립선비대증 치료제 프로스카를 사용한 사람에게 다모증이 생기는 점에 착안, 제품에 포함된 피나스테리드 용량을 1mg 줄여서 탈모치료제 프로페시아를 내놓았다. 먹는 고혈압 치료제로 혈관확장제였던 미녹시딜은 바르는 탈모 치료제가 되었다. 미녹시딜은 남성호르몬과 무관하게 모발을 자라게 하기 때문에 여성 탈모나 원형 탈모증 등 남성 탈모와 다른 유형의 탈모증에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물론 고혈압 치료제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의약품 중에는 본래 의도와는 다른 효과를 내는 것들이 종종 있다.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된 부프로피온(상품명 웰부트린)도 그런 예다. 이 약은 니코틴 성분이 없지만 흡연에 대한 갈망과 니코틴 금단 증상을 완화시킨다. 금연 이후 체중이 느는 것도 막는 효과가 있다.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해 안락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기전으로 금연을 돕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빨강, 노랑, 분홍, 복숭아색 등 여러 가지 색의 장미꽃이 있지만, 파란색 장미는 없었다. 파란색 장미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 2004년 미국 밴더빌트대학의 생화학자 2명은 암과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연구하던 중 박테리아가 파랗게 변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이 박테아의 유전자를 장미에 옮겨 넣으면 파란색 장미가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실현 여부를 떠나 작은 현상이라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과, 하나의 생각을 다른 분야에 적용해보는 열린 마음이 낳은 결과다.

이 밖에도 우연이 만들어낸 과학적인 성과는 셀 수 없이 많다. 3M은 강력 접착제를 연구하다가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물건인, 붙였다 뗐다 하는 접착물질을 이용해 포스트잇을 만들어냈다. 듀폰사의 플룬케트는 우주선을 열로부터 보호하는 물질을 연구하다가 테플론을 발명했다. 이러한 의외의 발명품들은 획기적인 과학 발달의 계기가 되기도 했고, 막대한 상업적인 이익을 낳기도 했다. 본래의 의도대로라면 실패한 결과지만 연구자들이 그 사건이나 현상이 주는 중요함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일 플레밍이 곰팡이가 낀 접시를 그냥 내다 버렸다면, 뢴트겐이 실험실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콜럼버스는 인도를 향해 가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다. 하지만 그가 인도를 향해 그 길고 험난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사의 우연이라는 것도 끈질긴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결과이다. 과학적인 지식과 어떤 현상에 숨겨진 비밀을 캐기 위한 열정이야말로 세기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이끌어내는 로또다. 부디 기축년 새해에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행운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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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붓그리기의 아버지 [제 857 호/2008-12-31]

최근 중등학교 수학문제들 중에 한붓그리기라는 주제로 위상수학이 소개되고 있다. 과거 중등교육 과정 중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양적인 면에서 많이 발전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극히 일부만 접할 수 있었던 수학문제를 지금은 중등교육 과정의 모든 학생들이 그들의 수학시간에 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홍수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난다.

위상수학의 학문적 바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복소수, 원주율, 적분, 함수 등을 표시하는 기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오일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철학자 칸트의 생활공간이었던 독일의 괴니히스베르그의 주민들이 가졌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일러의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도시를 관통하는 프레겔이라는 강과 그 내부에 고립된 두 섬 사이에 7개의 다리가 있었다. 주민들은 프레겔 강변의 어느 한 쪽에서 출발해 7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지나서 되돌아올 수 있는 산책로를 알고 싶어했다. 오일러의 결론은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는 산책길은 없다.였다.

오일러는 주민들 눈에 보이는 다리와 땅을 종이로 옮겨 놓았다. 실재세계를 머릿속 추상적 세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오일러의 머릿속 공간에서 다리는 선으로 땅은 점으로 보이고 그 사이를 힘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면서 논리를 세우고 문제의 해답을 찾았고, 이렇게 해서 위상수학은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상수학이 중등교육에 도입되는 이유는 현대생활에 있어서 그것의 유용성 덕분이다. 한붓그리기에서 시작된 위상수학은 지하철 노선의 계획, 반도체 집적회로의 설계, 컴퓨터의 기억장치 배열, 세일즈맨이나 여행가들의 최적 경로 찾기 등에 이용되고 있다. 실재하는 이 세상의 경제적 활동영역에 넓게 응용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한붓그리기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위상수학은 최신의 물리학에도 이용되고 있다. 물리학은 운동과 공간의 형식을 갖는 추상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런 물리학의 형식화는 17세기 말 뉴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공간 속에서의 변화 또는 운동은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힘이라는 것이다. 자연에서 물체가 움직일 때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모두 알게 되면, 원인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미래의 특정한 시간에서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된다는 원리다. 이후에 물리학자들은 힘의 역할을 대신하는 에너지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추상적 세계의 묘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물리학에서 형식화의 틀이 20세기 초에 크게 바뀌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때문이다. 뉴턴의 물리학 형식에서 공간은 단순히 연극의 무대배경과 같다고 보았다. 연극이란 희곡을 바탕으로 인간 삶의 변화무쌍함을 배우가 몸짓과 언어로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무대는 특정한 시대 또는 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뉴턴 이래로 200년 넘게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무심코 믿어 오던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시공간은 관심의 대상인 물체와 무관한 고정불변의 것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아인슈타인은 상황에 따라 그 표정과 몸짓을 달리하는 무대 위의 배우로 바꾸어 놓았다.

시공간이 고정불변이 아니고 변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빛이 움직이는 경로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전까지 모든 물리학자들은 빛은 곧게 뻗어 진행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의 근처를 지나는 빛은 물체의 존재가 원인이 되어 그 시공간 자체가 휘어진다고 생각했다. 휘어진 공간을 따라 빛이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그 경로도 휘어질 것이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1919년 개기일식을 이용하여 검증되었다. 시공간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뿐이지 물리학의 눈과 손에는 보이고 만져지고 때때로 이곳에 있을 때 저곳에 있을 때 그 성질을 달리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간의 틀을 깨뜨린 것이 양자역학이다. 입자가 운동하는 것은 그것에 미치는 힘 또는 그것이 가지는 에너지 때문이다. 그런데 입자의 운동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고 변한다는 것은 그 입자가 가지는 에너지의 증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뉴턴은 멀리 있는 입자들 사이의 상호 영향력을 미칠 때 그 사이의 공간은 무대배경처럼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그 입자들의 존재로 인해서 공간의 이곳저곳에서 다른 값을 갖는 필드 또는 장이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입자가 운동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입자 에너지의 증감을 장이 주거나 받게 되어 자연스럽게 입자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양자역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입자가 제한된 영역에 구속되어 있으면 그곳에서 에너지는 연속적인 값을 갖지 못하고 띄엄띄엄한 값만을 갖게 된다. 다른 값을 가진 상태로 변하게 되면 그 차이만큼의 에너지 덩어리, 즉 입자를 외부로 방출하거나 외부에서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이 에너지를 가지며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각기 장마다 고유한 입자를 만들어내거나 그 입자를 다시 흡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동안 텅 비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던 공간은 오히려 장이라는 것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더불어 입자가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물리학의 형식에 있어서 큰 변화는 100년 전에 시작되었다. 현재 새 이론들은 낡은 이론이 잘 들어맞는 실험적 조건에서도 낡은 이론과 똑같은 예측을 함으로써 물리학의 대응원리를 만족시키고 있다. 뉴턴 역학이 포함된 물리학을 굳건히 지켜주는 2개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큰 변화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거대한 우주를 하나의 얇은 막으로 생각하는 M-이론이 그것이다. 올여름 유럽 입자물리학연구소의 LHC의 가동과 더불어 언론매체에 자주 소개되기도 했다. M-이론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오일러에 의해서 개발된 위상수학의 도구들을 많이 빌려와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간 해석에 있어서 고유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물리학의 버팀목 2개를 1개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머릿속 세계에서 11차원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수와 공간으로 생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수학자들은 이러한 고차원의 세계를 많이 탐색해 놓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차려놓은 공간의 밥상 위에 입자들의 운동을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말은 쉬워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안성맞춤의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에서 출발선을 넘어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최첨단의 순수 물리학으로 세계 곳곳의 인재들이 이 일에 참여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의 두드러진 기여는 없다. 앞으로 한붓그리기와 같은 추상세계에 빨리 익숙해진 지금의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큰 기대를 해본다.

우리들 눈길이 닿는 곳에 색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또 다양한 모양의 선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삭막한 세상인가.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미술의 유용함을 믿으면 추상화란 결코 쓸모없는 그림이 아니다. 앞으로 이 분야에서 젊은 세대의 활약은 추상적 세계의 가치를 소홀히 다루지 않는 사회적 인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추상적 세계의 근본은 실재세계다.

글 : 김태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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