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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살아남은 사람 [송경동 시인]

마지막 살아남은 사람, 그녀는 김진숙입니다

[기고] 소금꽃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송경동(시인) 2011.03.30 10:37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벌써 3개월여 전이지만 난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함부로 쓰기엔 너무도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십여일 전부터는 매일 자리에 앉아 보았지만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그런 중간에도 나는 다시 네 편의 추도시를 쓰고 읽어야 했다. 쌍용차 무급자인 임무창 씨의 추도시였고, 23년 전에 신흥정밀에서 분신해 간 박영진에 대한 추도시였다. 삼성전자에서 죽어간 반도체노동자 황유미와 마흔 여섯 분에 대한 추도시였고, 며칠 전 다시 쌍용자동차 노동자 열 네 분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였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추도시를 읽어가던 도중 나는 참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안으로 전이되어 와 내 대신 시를 읽으며 울고 있는 거였다. 난 이상한 전율에 휩싸인 채 그 이를 대신해 울부짖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었다. 비로소 나는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했다.

 

이 이야기는 1975년 이후 부산에 있는 한 조선소(대한조선공사, 현 한진중공업)를 둘러싸고 벌어진 어떤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 조선소에서 일해 왔던 사람들 이야기다. 아니 이것은 우리 시대 어떤 난장이들의 서럽디 서러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며, 당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모든 이들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섯인데, 안타깝게도 넷은 죽고,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는 지금 그중 한 명이 올라가 목을 맸던 가파른 크레인 위에 올라 있다. 오늘로 81일째다. 며칠 전 추도시를 읽을 때 내 안에서, 나 대신 함부로 내 글을 뺏어 읽던 이. 김진숙이다.

 


 

문상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던 공장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 『소금꽃나무』 중에서

 

용접슬러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일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용접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치덕치 부쳐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마냥 뒹굴며 살아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용접을 하고, 절단을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해에도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용노조는 조합비를 횡령해 먹기 위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합원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나아가 자녀들까지 서류상으로 죽여 상조비를 갈취해 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이 절망의 조선소에 김진숙은 최초의 여성용접공으로 1982년 스물 한 살 때 입사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 나와 타이밍을 먹으며 옷감을 깁던 미싱공 생활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떨어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디뎌야 바퀴 밑에 깔려 죽지 않는다는 122번 화진여객 시내버스 안내양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양하리라 믿기도 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 스물한살 김진숙의 삶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 쉰 두 살’의 머리 희끗한 해고 여성노동자가 되었다.

 

빼앗긴 박창수의 죽음

 

또 다른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박창수는 김진숙과 입사 동기였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태백공고 3학년 실습기간이었던 1982년 2월에 대한조선공사 훈련소(현, 한진중공업 직업훈련소) 28기로 입소해 6개월 수료기간을 거쳐 8월에 한진중공업 선각공사부에 입사했다.

 

세월이 흘러 1986년 어느 날, 박창수는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들과 어용노조 간부들에게 짓밟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얼마 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당한 김진숙이었다. 박창수 마음 한켠에서도 분노의 압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민주노조’라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밖에서 김진숙 등이 ‘조공노동자신문’을 만들면, 박창수는 이를 몰래 공장으로 들여와 뿌렸다.

 

1987년 6월 항쟁이 열리던 시기, 이들은 그해 7월 25일 공장에서 처음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간 아무 소리 못하고 받아먹던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수천의 소금꽃나무들이 일제히 집어 던지던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들이 87년 6월 항쟁을 이어, 진정한 한국사회의 변혁을 이끌었던 87-88노동자대투쟁의 주역들이었다.

 

박창수는 이런 시대적 소명을 에둘러가지 않았다.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전노협 부산노련 부의장과,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 공동대표로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91년 2월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린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 그는 급습한 경찰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갔다.

 

그후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그해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를 서른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진짜 사건은 그 다음이다. 5월 6일 새벽, 그는 찾아 온 정보기관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가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당시 경찰은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올라 온 조선소 노동자들과 유가족과 사회단체, 학생들이 지키고 있던 병원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박창수의 시신마저 뺏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단순 추락사’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짓밟히고 끌려가는 63일간의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해 6월 20일,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김진숙은 그를 가슴에 묻었다. 이렇게 한 명의 친구가 갔다.

 

우리 시대의 의인, 김주익

 

이 소설의 슬픈 두 번째 주인공은 김주익이다. 박창수가 잡혀가던 의정부 다락원 캠프 회의에도 참석했던 이다. 다행이 그는 당시 구속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김주익은 박창수의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경찰과 사측의 사주로 움직이는 어용들로부터 민주노조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생을 바쳤다.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파업인 LNG 선상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이 되었지만, 석방 후에도 끈질긴 복직투쟁으로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수년간의 활동 끝에 그가 민주노조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위원장이 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그러자 다시 정권과 한진중공업 사측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단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600여명이 잘려 나갔다.

 

김주익은 선택의 폭이 없었다. 당시 21년 동안 근무해서 그가 받는 월급은 기본급 108만원이었다. 각종 공제를 떼고 나면 팔십 몇만 원이었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명에 대해 18억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 고발하고,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회사가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천억 매출에 239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는 알짜기업이었고, 사주는 해마다 50억에서 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었다.

 

▲  85호 크레인 위 故 김주익 지회장의 모습 [출처: 금속노조]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그 결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수시로 투입했고,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정부라는 정권 역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았다. 힘을 받은 사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 단 한번의 교섭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벌써 준엽이와 혜민이와 준하, 그렇게 2남 1녀의 자녀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평소 책을 무척이나 좋아해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던 이였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던 자상한 아빠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크레인 위에 있(는) 아빠께. 아빠 그런데 내가 일자리 구해줄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 울 아빠도 보잖아요! 다른 얘들은 아빠자랑도 하는데.. 내가 빨리 일자리 찼아줄께요! 파이팅!”이라고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는 이렇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과,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가겠다는 약속 사이에서 두 번째 약속을 택했다. 2003년 10월 17일,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 남긴 짧은 유서의 끝 구절이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그는 지키고야 말았다.

 

눈물의 장례식, 곽재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아픈 주인공은 또 한 명의 늙은 노동자 곽재규다.

 

죽어서도 크레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김주익을 마침내 평지로 내려오게 한 것은 박창수와 김주익보다 훨씬 먼저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였다. 그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일명 ‘산 자’였다. 그는 그것이 못내 미안해,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김주익의 시신 없는 빈소를 아침마다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누구들처럼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곽재규는 김진숙과 박창수와 김주익이 앞장서 싸울 때 늘 함께 해주었던 마음 따뜻한 선배였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는 배움에 대한 한이 깊어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학까지 마친 부지런한 노동자였다. 용접이면 용접, 엔진조립이면 조립, 조선소 업무 전체를 꿰뚫고 있었던 유능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주익이 목숨을 끊고도 85호 크레인을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곽재규는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 위에서 한 많은 생을 내던졌다. 죽어서도 크레인을 못 내려오는 바보 같은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한 눈물겨운 투신이었다.

 

2003년 11월 16일. 마침내 김주익과 곽재규의 합동 장례가 치러졌다. 눈을 뜨고는 볼 수 없고, 이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통곡의 장례식이었다. 35미터 고공 크레인에서 김주익의 시신이 내려왔고, 11미터 지하 도크에 있던 곽재규의 시신이 땅으로 올라왔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김주익과 곽재규의 목숨이 제물이 되고서야 정부와 사측은 항복을 했다. 경영이 어려워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를 기리는 추모공원이 조선소 안에 지어지고, 정리해고 계획은 백지화되고, 노동조합 건물이 5층 복지관으로 번듯하게 지어지고, 30억을 들여 식당이 새로 지어지고, 임금과 성과급이 올라갔다. 수십년을 싸워도 이루어지지 않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

 

투쟁 머리띠를 찬 채로 술이 거나해져 들어오곤 했다는 곽재규. 칼국수와 수제비를 유난히 좋아했다는 곽재규. 그의 딸인 경민이는 지금도 한진중공업 곁을 지날 때면 그 절망의 공장을 폭파해버리고 싶다고 한다. 그의 아내인 정갑순은 지금도 길 가다 키 작은 남자만 봐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 노무현

 

그런데, 다음에 등장할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다. 어쩌면 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도 한때는 이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라고 해맑게 말하던 이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 기일 때는 함께 향을 피우기도 했던 이다. 김진숙과는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소모임도 함께 했던 이다.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눠먹으며 신나 하기도 했던 이다.

 

그런데, 그가 누구냐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진숙과 김주익의 한때 동지였고, 고문변호사이기도 했던 이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도 이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김주익이 85호 크레인에 오르고, 곽재규가 도크 지하로 몸을 던질 때, 공교롭게도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김진숙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잘렸으나 그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잘렸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다.’ 핵폐기장 건설에 반대하는 부안 주민들도 얻어 터졌고, 제국주의 석유전쟁인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얻어 터졌다. 새만금 개발에 반대해 생태개발을 외치던 주민들도 터졌고, 농수산물 시장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도 얻어 터졌고, 평택미군기지 이전확장에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도 얻어 터졌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국민들도 얻어 터졌다. 김주익과 곽재규 외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전용철, 홍덕표,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등 수많은 노동자농민빈민들이 죽어 갔지만,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살 길 막힌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자살공화국’ 되었고, 부동산 투기공화국이 되었고, 비정규직은 800만을 넘어 섰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약속하며 노동자민중을 멀리하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과 7,8,9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열린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터와 삶터의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행해 나가야 할 역사적 과도기에 그는 수많은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초국적 자본의 이해에 부응하는 일명 ‘좌파 신자유주의자’로서의 노선을 충실하게 밟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와 김진숙의 곁을 떠났던 그의 생도 행복하지 않았다. 2008년 5월 23일, 그는 역사의 패배자가 되어 혼자 외로이 봉하마을의 부엉이 바위를 망루 삼아 올라야 했다. 그의 죽음은 기실 출구를 잃은 1987년 6월 체제의 죽음이었다. 어디로도 갈 길을 잃고 무상함에 빠져 역사의 미아가 된 그의 유서에는 김주익이 죽음을 통해서라도 지키려 했던 어떤 ‘투쟁의 광장’도, 어떤 사회적 역사적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그렇게 한 뿌리에서 시작했던 네 사람의 운명은 길은 달랐지만 끝은 같았다. 무자비한 자본의 질서에 의한 사회적 타살들이라는 점이 같았다. 초국적 자본의 시대에 한 마리 파리 목숨들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서자들의 운명이 닮았다. 이런 참혹한 자본의 시대를 견딜 수 없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다만 가해자의 편에 섰었는가, 저항하는 사람들의 편에 섰는가가 달랐을 뿐이다. 먼저 가버린 이들에게 따질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그래서 노무현이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한 위대한 이였다 하더라도, 그 삶의 가치에서는 김주익과 곽재규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야겠지만, 조선왕조 시대 어느 왕의 이름보다 민란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이 역사에 기리 남는 까닭일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죽음들을 통과하고 승리한 자는 누구인가.

 

한진중공업. 그렇다. 삼성그룹. 그렇다. 현대자동차. 그렇다. 쌍용자동차. 그렇다. 대우자판. 그렇다. 콜트콜텍. 그렇다. 발레오공조. 그렇다. 재능교육. 그렇다. 전주버스. 그렇다. 이명박. 그렇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그렇다.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의 목숨을 집어 삼킨 한진중공업은 올해에도 마지막 남은 공장 인원의 1/3인 400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나섰다. 십여 년 사이 수만 명에 달하던 노동자들이 800여명밖에 남지 않고 모두 잘려나갔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이 틈에 공장은 이미 수 조원을 들여 필리핀 수빅으로 이전해 두었다. 2010년에만 비정규직 포함 3000여명이 잘렸고, 300명이 강제휴직을 당했고, 울산공장이 폐쇄됐다. 경영이 위기에 처했냐고. 천만의 말씀. 2011년 올해 270여명을 다시 희망퇴직으로 정리하고, 나머지 170여명을 정리해고 통보한 다음날, 대를 이은 조남호 사주 일가와 주주들은 174억의 고배당을 챙겨갔다.

 

한진중공업만 그러냐고? ‘이병철 회장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가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다. 이미 900만에 이르는 노동자서민들이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도 ‘사회적 살인’에 다름 아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 공공부문 사유화 등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의 위기로 전가하는 구조조정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다시 85호 크레인, 김진숙

 

그리곤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한 여성노동자가 혼자 김주익의 영혼이 아직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의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올랐다. 사측이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 전날이었다. 8년전 김주익과 곽재규가 죽음으로서 지킨 민주노조와 조합원들의 생존권이 모두 산산조각 나고 있는 때였다. 마지막 살아남은 자. 김진숙이었다.

 

그는 지난 8년 동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다. 85호 크레인에서 혼자 추위와 외로움에 떨다 죽어간 김주익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웬일인지 지난 1월 5일 저녁, 함께 살던 후배 황이라에게 굳이 밥을 같이 먹자하고, 8년여 동안 가지 않던 목욕탕을 다녀오더라 한다. 이틀 전엔 비로소 8년 동안 불을 때지 않던 방에 보일러를 켰었다고 한다. 그렇게 목욕재개를 하고 밤늦게 나간 그가 새벽에 문자를 보내왔다. ‘놀라지 말고 책상 위 편지를 봐라’라는 문자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85호 크레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번민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 번민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생각할 수도 없다.

 

그는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자신만은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주익 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고 한다.

 

▲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 [출처: 금속노조 부양지부]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게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크레인 위에서 오히려 ‘공기 좋고, 전망 직이고, 젤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다 알루 보입니다. 방이 좀 작아서 그렇지 발코니도 널찍해요. 봄이 오면 텃밭을 가꿔서 가을에 걷어 먹을 생각’이라고 눙을 친다. ‘아직 수맥 찾는 법을 몰라’, ‘양치질은 짝수 날만’ 하고, ‘세수는 윤석범 동지 장가가는 날은 꼭 한다’라고 한다. ‘35m 크레인 위에서 군고구마 먹어 본 사람’ 있냐고 골린다. 징역살 땐 하루에 4,520원 밖에 안쳐주더니, 오늘부터는 하루 손배 100만원짜리 인간이 되었다고, 이제야 제 가치를 인정받는 것 같다고 신나 한다.

 

올라와 보니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129일을 버티던 김주익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김주익을 죽인 건, 어쩌면 나였다고 쓰기도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처럼 모두가 개별화되어 서럽게 죽지는 말자고 한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저들이 갈라놓은 이간질일 뿐’이라고 한다. ‘우린 어제도 하나였고, 오늘도 하나’라고, ‘우리 단결이라는 방탄조끼’를 입고 끝까지 단결해서 꼭 승리하자고 한다.

 

한진중공업엔 우리들만 다닌 게 아니라고 한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하는 동안에도 한시도 맘놓지 못했던 아내들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들도’ 다녔던 공장이라고 한다. 도대체 수십 년간 ‘일요일 날에도 특근 나가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우리가 어떻게 경영을 어렵게 했냐고 한다. ‘지 마누라, 지 새끼 옆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던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냐고 한다. 자신은 ‘예준이가 두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민석이가 세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유주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다림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도, 현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이 공장에서’ 지켜볼 거라며 우리 모두 함께 싸우자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처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학을 본 적이 없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맨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시대의 절규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아름답고 존엄한 인간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그는 지금 한진중공업 동료 노동자들과 그 가족만을 위해 싸우고 있지 않다. 이 서러운 이야기는 우리 시대 평범한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 온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모두의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다.

 

난 여기에서 굳이 그런 김진숙을 ‘소영웅주의’네, ‘절차와 지침’을 따르지 않고 조직을 와해시키는 비조직적 행동이네 하며 깠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까닭은 못 느낀다. 자발적으로 조합원들이 친 천막을 철거하고, ‘사측의 협조를 얻어 회사 CCTV를 분석해’ 누가 김진숙이 오르는 것을 도왔는지를 조사하며, 촛불문화제의 음향 제공까지를 거부하며 크레인 농성 초기 김진숙을 비난했다는 한진중공업 노조 지도부를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후 단결해 지금 다시 47m 높이의 제2안벽 크레인 위로 올라간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장 문철상과 한진중공업 지회장 채길용을 생각하고, 근처 거제도에서 다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15KW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엘 ‘신나’를 들고 올랐다는 김진숙의 또 다른 벗 강병재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14명의 동료를 잃고 오늘도 거리를 헤매고 있는 쌍용자동차노동자들과, 그 추모제가 열리는 날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삭발을 하고 단식을 선포했다는 재능교육비정규직 유명자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도 뼈아프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대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요구를 하다 도리어 구속되고 해고되고 징계당하며 울산 현대차 공장 앞에서 오늘도 끌려가고 있다는 현대자동차사내하청 비정규직들의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대와 고대와 연대에서 농성 중인 청소용역 노동자들을,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벌써 몇 달째 노숙을 하고 있는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을, 또 그렇게 몇 년째 싸우고 있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비정규직들을, 이제 다시 거리로 나앉게 된 대우자판 노동자들을, 다시 망루를 쌓고 올랐다는 전주버스 노동자들을, 5년째 위장폐업 한 공장을 지키며 뜨개질로 하루를 보내며, 기금 마련을 위한 CMS 신청서를 만들었다고, 한번 봐달라고 보낸 콜트-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민주노총이 나서서, 금속산별이 나서서, 삼성에서, 쌍용자동차에서, 그리고 다시 어디에서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에 나서야 한다고, 날마다 청와대와 전경련과 경총으로 진격하는 투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한 주인공이기도 했던 노무현의 계승자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박창수, 곽재규, 김주익의 벗인 김진숙이 다시 ‘85호 크레인’에 오르듯,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의 행진을 멈추게 할 부엉이 바위에 결단코 오르는 일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대연합을 바란다면 이제 다시는 김주익과 곽재규를 등떠밀지 않고, 시대에 참회하며, 지금 당장 구원이 필요한 그들에게 달려가 ‘이기지 못하면 살아 돌아가지 않겠다’던 김주익의 결의만한 진정성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 모두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저 아래쪽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멀어 보이는 일이 아니다. 언제 당신과 내가 다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 함께 나서 저 여린 소금꽃나무 김진숙이 김주익의 슬픈 영혼을 고이 안고 저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하자. 우리 시대가 고통받는 모든 이웃들을 함께 껴안고 조금은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 한 발짝만 더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지금 힘이 필요한 그들에게 함께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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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공단식농성중인 민주버스 박사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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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파업 지도부가 고공 단식농성에 들어간지 3일째인 29일, 박사훈 민주버스본부장과 전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박사훈 본부장을 비롯한 지도부 5인은 지난  26일부터, 지상 20m 높이의 위태로운 망루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박 본부장은 농성에 돌입하기 전 과로로 쓰러졌다가 하루만에 퇴원하고 바로 다음날 농성에 돌입했다. 박 본부장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작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길게 대화를 하기엔 무리였다.

단식 3일차다. 많이 힘드실 것 같다.
- 괜찮다.

춥지는 않은가.
- 낮에는 선선하고 밤에는 좀 춥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
- 뭐...뚜렷하게 하는 일은 없다. 책을 보거나..누워있다. 기운들이 없으니까.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하고싶은 말이야 다를게 없다. 노동부 관료나 전주시나 경찰이나 다 사업주의 입장에 서 있다. 파업을 무력화 시키려는 이 책동을 막지 못한다면 이땅의 어떤 노동자도 적법한 쟁의행위를 할 수가 없다. 유착관계에 있는 사업주들이 노동부 공익위원에게 행정지도 권고를 요청하고, 그렇게 행정지도가 내려져 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파업노동자들 출입도 못하게 직장폐쇄를 하면 그만 아닌가.

그럼 우리 파업노동자들은 저기 개굴창 다리밑에나 앉아 지리멸렬하게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우리 노동자들의 정당한 저항권을 위해 반드시 이파업은 승리해야 한다. 그 승리를 위해 지도부들이 결사항전 하겠다는 것이다. 동지들도 그에 발맞춰 힘들더라도 끝까지 함께 싸워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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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버스회사 보조금 횡령의혹 엄정하게 수사해야한다.

버스 회사 보조금은 사장님의 맛 좋은 곶감 항아리?

 

전주 버스회사 보조금 횡령 의혹, 검찰은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야 작년 11월 전주의 J여객은 이사회를 열어서 회사 임원의 급여를 무려 40-70%나 인상했다.

사장은 회장으로 승진하고 회장의 동생을 사장으로 선임하는 낙하산 인사도 단행했다.

여기에 사장이 개인 용도로 타고 다니던 벤츠 차량을 회사 차량으로 등록하려다가 항의를 받자 다시 자신의 명의로 이전하면서 이전비용 1.400만원을 회사 공금으로 사용했다.

이 회사는 버스 노동자의 통상임금 34억여원을 체불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주시는 2010년 한 해에만 무려 36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버스 노동자 임금 배나 부풀려 파업 중인 민주버스본부 전주 지부의 제기로 시작된 버스회사 보조금 횡령 의혹이 거의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일례로 노조의 주장에 따르면 보조금을 지급받기 위해서 버스 회사가 전주시에 제출한 경영 자료에 버스 노동자의 임금이 시내 260만원, 시외 285만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버스 노동자들은 실제 지급받는 임금이 150여만원에 그친다고 하니 임금을 배나 부풀려서 보조금을 수령하고 편취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하고 있다.

그간 전국 각지에서 보조금 횡령 의혹은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다.

운행하지 않은 버스를 운행하는 것처럼 꾸며서 유가 보조금을 횡령한다든지,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딸을 근무한 것처럼 꾸며서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지출을 늘리는 것과 같이 근무하지도 않는 유령 근무자 임금 명목으로 회사 자금을 횡령한다든지, 주유소와 짜고서 유류대를 부풀린다든지, 매일 들어오는 현금 수입의 일부를 누락시키는 방법으로 횡령한다든지 등이다.

국민권익위원회, 시내버스 회사 보조금 개선안 권고 사실 두 눈 버젓이 뜨고 지켜보고 있는 눈과 말할 수 있는 입이 있는 버스 노동자의 임금을 부풀려서 원가에 산입하는 방식으로 보조금 지급 금액을 늘린다고 한다면, 보는 눈도 없고 말할 수 있는 입도 없는 유류대나 부품대를 조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은 어쩌면 우문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2010년 보조금 문제를 전국적으로 조사한 국민권익위원회는 “시내버스 회사들에 지원되는 보조금이 일부 과다 지급되거나 중복 지원됐다며 개선을 권고"했다. 또한 ”중복 지원됐다는 의혹을 풀기 위해서는 명확한 원가 분석과 함께 근거를 담는 조례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버스 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하려면 수입 지출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그에 따라 원가가 제대로 산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전주시는 그간 버스 업체가 제출한 자료에만 근거에서 보조금을 산출해 왔다.

매해 조사 용역을 실시해야 하지만 하지 않았고 그나마 두 번에 걸친 조사도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한 면피용이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한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라고나 할까. 정산과정은 더욱 한심해서 보조금 사용에 대한 증빙서류 하나 없이 버스 회사에서 제출한 공문서 겉지와 정산서 1장이 전부이다.

달라는 대로 주고 증빙은 없어도 되는 식으로 보조금이 지급되어 온 것이다.

진보신당 전북도당, 송하진 전주시장 업무상 배임·직권 남용으로 고발 지난 3월 16일 진보신당 전북 도당은 송하진 전주시장을 “업무상 배임, 직무유기, 직권 남용” 혐의로 전주지검에 고발했다.

진보신당은 혐의 사실에 대해 “경전철 도입은 실시되지 않은 사업인데도 손실 보전용으로 보조금을 지급한 것은 전주시에 손해를 입힌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 무료환승손실 보조금은 “손실보전액 지원율을 50%로 협의 결정했음에도 1달도 지나지 않아 송시장이 새롭게 당선되자마자 근거도 없이 80%로 인상했고 현재는 100%를 지급하고 있다” 또 신설된 권역별 순환버스 손실의 경우 “협약서상 지급의무가 없는 보조금으로 약 2년간 지급함으로써 시내버스 회사에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게 해 업무상 임무를 위배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보조금 횡령 의혹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해야 이에 앞서 버스본부는 버스회사를 보조금 횡령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으나 경찰은 이제까지 조사중이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고 조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이로써 전주 버스 사업자들의 보조금 횡령 의혹을 밝히는 것은 검찰과 경찰의 손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이다.

그동안 민주버스 노조는 물론이고 전주지역 시민단체와 야당들, 각종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해 왔다.

이에 따라 전주 버스회사 보조금 횡령 의혹은 전주지역은 물론이고 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따라서 검찰과 경찰은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서 남김없이 의혹을 밝히는 것은 물론 혐의가 밝혀지는 범죄자들의 경우에는 엄벌에 처해서 국민의 혈세를 쌈짓돈처럼 도둑질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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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정비 지회장의 통곡의 연설

- 옮깁니다 -

너희는 이윤을 위해  
참 쉽게 죽일 수 있다.
그저 비용 하나 절약하는 거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절대 죽을 수 없다.
죽기 위해 정말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왜 우리만 쉽게 죽는가
세 살바기 아이가  
중고등학교 아이가  
아내가 부모가 형제가  
살아온 날들이 추억들이 소중한 보람들이  
아! 노동조합과 투쟁한 77일의 시간들이  
칭칭 온몸을 감고 매달리며 살자고 하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쉽게 죽임을 당하는가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는 당금질이라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쉽게 벼랑 끝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다 죽임을 당해야 하나.
...............................................
...........................................................


사내가 운다
산악 같고 바위 같은 사내가 운다
저 성질 급해 범 같고 화산 같은 사내가 운다
구호로 울고
호소로 울고  
절규로 울고  
원한으로 울고
규탄으로 운다


사내가 운다  
옳음과 의리하나로 호랑이 눈 부릅뜨고  
조금은 퉁명스런 등대 같던 이가 운다
그의 주먹이 울고  
그의 가슴이 울고  
그의 눈빛이 운다.


더 이상 죽지 말자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더 이상 ......
...........................................
....................................................


허무와 탄식과 한숨을 쉬고 있기에  
지금 더 많은 동지들의 목숨이 절박하다.
희망이 포기된다면 당연히 절망도 포기할 수 있다.
희망의 포기가 주는 고문에 맞서  
그 고통의 눈물을 돌려 그래 다시 싸우자.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바로 그곳에선
뒤에가 절벽이요 벼랑 끝이라면  
딱 반보가 죽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 유일한 선택일 뿐!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드는 그 힘  
단결이고 연대고 목숨을 건 투쟁!


동지들!  
힘 내 투쟁으로 죽음을 이기자  
살자.  
건투!

" 김정우 정비 지회장의 통곡의 연설..."

[출처] (기륭전자분회) |작성자 `호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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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꿈을 그리다. [고대문화 펌]

스포트라이트
누군가에게 애니메이션에 대해 물으면, 그 반응은 참 다양하다.

피규어가 죽 늘어서 있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20대 초반의 남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초등학생들이 오후 6시 정도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보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등을 예로 들면서 발달한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문화콘텐츠’가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유망 산업처럼 여겨지는 요즘은 특히 원소스 멀티유즈가 가능한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대한민국을 ‘세계 5대 문화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발표에도 애니메이션은‘핵심콘텐츠’의 하나로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기획-연출-작화-완성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획단계에서 주인공의 그림과 성격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각본이 나오면 연출단계에서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작화단계에서는 ‘원화’와 ‘동화’의 두 파트로 나뉘어서 그림이 그려진다.

완성단계에서는 배경을 넣고, 채색을 하고, 촬영과 편집과정을 거친다.

크게는 전 단계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을, 작게는 작화단계에서 ‘원화’와 ‘동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애니메이터라고 부른다.

 

애니메이터
금천구 가산 디지털단지 내에 있는 한 애니메이션 회사를 찾았다.

주로 미국 회사의 하청을 받아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 회사다.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에는 연출과 작화가 이루어지는 방들이 모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채색이나 배경작업, 편집 등이 이루어지는 방들이 모여 있다.

제작과정에 따라 공간배치를 해둔 듯하다.

원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은 책상 다섯 개로 가득 차있었고, 각각의 책상은 칸막이가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책상 한 편에 컴퓨터가 놓여있다던가, 가족사진이 하나 붙어있다던가 하는 점은 여느 사무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책상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캐릭터 설정 자료들이나,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타임 테이블이나, 라이트박스밑에서 조명광선이 올라오는 작업대 등은 확실히‘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애니메이션계에 투신(?)하여, 이제원화 감독을 맡고 있는 김유성 씨의 책상에는 파란 해파리 괴물 캐릭터가 붙어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자동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소리가‘드르륵’들린다.
“네, 이 방에서는 원화를 그리고 있어요.

원화는 스토리보드에 적혀 있는 대로 캐릭터가‘연기’를 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되죠.

여기, 견본 캐릭터를 바탕으로 해서, 캐릭터의 표정이니, 동작이니 하는 것들을 직접 그려내는 겁니다.

동화는 원화와 원화를 부드럽게 연결해주는 그림들이지요.”
김유성 씨는 커피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설명부터 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터들은 크게 ‘원화맨’과 ‘동화맨’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무래도 상황에 맞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그려야 하는 원화맨 쪽이 보다 숙련된 노동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래서 애니메이터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은 2년에서 3년 정도 동화 일을 배운 후에야 원화 일을 시작할 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회사에 원화맨이 10명 정도라면 동화맨은 50명이 넘게 있는 구조라서, 원화맨이 되었다가 다시 동화맨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단다.

한 달에 작업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김유성 씨는 고개를 갸웃한다.
“애니메이션 일은 전체적으로‘이거다!’하고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작업량도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니까. 보통 네다섯 명의 원화맨들로 이루어진 한 팀이 한 달에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보시면 될 거에요.

10분 분량이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나? 음, 회사에 따라 또다른데, ‘카툰네트워크’는 7000~10000장, ‘니켈로디언’은15000장 정도가 들어가죠.”
동작이나 표정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따라서 필요한 원화의 수도 바뀐다고 했다.

7000장이니, 15000장이니 하는 것들은 원화와 동화를 합한 수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애니메이터들은 어느 정도의 수입을 얻을까.
 

“우리 원화맨들은 좀 잘나가면 월 250에서 300정도는 벌수가 있어요.

비수기를 고려한다고 해도 연봉 3000정도는 어떻게 벌 수가 있는데. 동화하는 친구들이야 많이 힘들 거예요. 그 친구들, 한 달에 100은 가져갈 수 있으려나?”
김유성 씨 옆자리에서 ‘드르륵’ 연필을 깎던 원화맨 한 분이 말했다.

그 ‘잘나간다는’ 원화맨들도 경력이 20년은 족히 되는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그리 벌이가 좋은 직업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은 계약서도 없이 일해요.

회사에서는 우리를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비정규직 노동자죠. 이 애니메이션이 좀 웃긴 게, 제가 일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그림의 단가가 다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진짜 잘나가는 직업이었지만, 요즘은 정말 빠듯합니다.

그게 한국에서는 창작을 하지 않고, 외국에서 하청을 받아오는 OEM방식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외국 회사가 작품 단가를 높이지 않으니까.”
애니메이터들의 글을 찾아 읽다보면 유난히‘창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창작’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반짝거리는 눈빛으로‘창작에 대한 꿈은 모든 애니메이터들이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게 힘들다보니까, 쉽게 나설 수가 없어요.

창작하는 애니메이터들은 진짜 밥 굶으면서 일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아이들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죠.

그래서 요즘은 3D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고 있어요. 3D를 하면 혼자서도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거든요.”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조금씩 창작 쪽에 관심을 보이고 있단다.

중국이나 동남아가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들면서, OEM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회사가 수익을 얻기는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자신이 힘들게 만든 애니메이션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이제 창작을 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며 웃었다.

나이 마흔 먹은 아저씨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의 삶
“어서 오세요, 우리 가족의 축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유성 씨를 만나고 온 다음 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박현주 씨를 만났다.

그는 오랜만에 휴일을 맞아 두 딸과 함께 외출을 나온 참이었다고 했다.

근처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오후를 보내는 것이 박현주 씨 가족의 작은 ‘축제’라고 한다.

작달막한 키에 선한 인상을 가진 박현주 씨는 불쑥 나타난 불청객을 앞에 두고 조곤조곤한 어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심슨 가족’, 한국의 RPG 게임인 ‘포가튼 사가’의 작업에 참여했던 베테랑 애니메이터였다.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한 것은 25년 전이었어요. 와, 참 오래했구나…. 그때는 애니메이터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고 했고, 저도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무척 많았었죠.

남편이랑도 회사에서 만났어요.

남편은 원화 일을 하고, 저는 동화 일을 해 왔어요.”
동화를 25년 동안 했다는 박현주 씨의 이야기에,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보았던 동화맨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업실에는 두 줄로 작은 책상들이 촘촘하게 놓여 있어 그 가운데를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동화맨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부지런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맡은 분량을 완성하면 입구 쪽에 앉아 있는 작업감독에게 가져오고, 다시 일을 받아서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흡사  ‘공장’을 보는것 같았다.
“동화맨들은 그렇게 일하죠. 다행히 저는 일을 오래하다 보니까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시간이 곧 돈으로 연결되는 애니메이터 일이잖아요. 일거리를 받아와서는 하루 종일 그리고 있어야 했어요.

아이들을 돌볼 시간도 없었죠. 한 달에 보통 1000장 정도 그렸나?

그것도 한 달 동안 여유 있게 1000장을 그리는 게 아니라, 며칠 만에 몇백 장을 그려내서 가지고 가면 또 일을 받아서 며칠 안에 몇백 장을 그려가는 식이에요.

전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회사의 방영 스케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일이 불규칙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나마 일이 계속 있으면 다행이죠. 비수기에는 일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할 때가 많았죠.”
김유성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쉽사리 믿을 수 없었던 것은 20년 동안 단가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20년이라면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계산하기도 아찔해지는 긴 시간이 아닌가. 그래서 박현주 씨에게 이를 다시 물어 보았다.
“네, 제가 일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동화 한 장당 단가는 거의 비슷해요.

IMF니 뭐니 해서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돌면‘고통분담’의 차원에서 단가가 도리어 떨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요.

미국 일은 선이 단순하니까 장당 600원 정도를 받았구요,

일본 일은 선도 복잡해서 장당 1200원 정도를 받았어요. 그래도 받는 돈은 비슷해요,

일본 일은 단가가 비싼 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한 장을 잡고 30분 넘게 씨름하는 일도 자주 있죠.”
떨어질 줄은 알아도 올라갈 줄은 모르는 임금과 나빠지기는 해도 좋아지지는 않는 노동환경 속에서 박현주 씨가 오랫동안 애니메이션 일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멋진 창작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한국 애니메이터들이 가장 많이 듣는 비판이 실력이 없어서 남의 나라 작품이나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판하기 전에 실력을 키우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저는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에게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전 세계 곳곳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다해왔어요.

미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할 것 없이 말예요.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은 지금 전 세계에서 어떤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고 있는지, 그런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란 말예요.
좋은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크죠.

혹시 ‘오세암’이라는 애니메이션 아시나요?

그 애니메이션을 보면 캐릭터의 움직임이 어색한 부분이 많아요.

스님이 산을 올라가는 장면에서 가방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그건 제작비가 부족하다보니까 충분하게 동화를 넣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어요.”
그렇게 자신이 하려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박현주 씨였지만, 작년 말 애니메이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떨어지는 단가와 불안정한 수입으로는 네 명 가족이 먹고사는 데에도 빠듯해진데다, 20년 넘게 일하면서 쌓인 피로감이 팔에 부담을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곧장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지만, 그림만 그릴 줄 아는 45세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을 한 것이 후회가 되었어요.

신물 나는 애니메이션 판, 꾸역꾸역 참으면서 일해온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죠. 그러다가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만두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지난 4월, ‘명인만두’의 수습사원으로 들어간 그는 이제만두 가게 직원으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다.

일이 무척 고되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해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고 나름의 보람도 느끼고 있노라고 말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잠시볼펜을 내려놓고 있는 나에게 박현주 씨는‘이 집 아이스크림이 참 맛있다’면서 한 스푼 먹어볼 것을 권했다.

자신의 젊음을 오롯이 바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하게 된 일이 아무리 즐겁고, 보람이 있다고 해도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아쉬움이 사라질 리가 만무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괜스레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꿈을 향하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간간히 흩뿌리던 날, 이번에는 용산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만나본 두 명의 애니메이터로부터,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들었던 의문은 왜 그들은 그런 조건 아래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조건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용산역에서 철도 웨딩홀 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 위원장인 유재운 씨다.
“이 동네가 원체 복잡해놔서요.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꽤 어울리는 회색 개량한복 차림을 한유재운 씨는 휘적휘적 걸어서 허름한 건물 3층으로 들어갔다.

작은 사무실에서 몇 명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단체의 사무실이라면서, 그는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서 앉을 것을 권했다.

우리는 무릎을 마주하고 앉았다.

애니메이터에게 관심을 보여주어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자료를 주섬주섬 챙겨오고, 달큰한 커피도 한 잔 타온다.

앞서 인터뷰했던 김유성 씨의 선배이기도 한 그는 99년 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래 애니메이터들의 노동조건을 위해 투쟁해왔다.

오랫동안 투쟁활동을 해와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듣는 사람이 다 시원시원해 질 정도다.
“네, 애니메이터들 많이 힘듭니다. 우리들 노동조건이야 더 말하면 가슴만 아플 뿐이지요.

단가 이야기니, 철야를 밥먹듯이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셨을 겁니다.

노조 처음 만들고 했을 때는 단가로 싸우고, 노동조건으로 싸우고 했지만, ‘문제는 구조다’라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외국의 하청을 받기만 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인터뷰에 응해 주었던 애니메이터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였다.

외국 기업의 하청만 받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왜 한국은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고, 하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는 애니메이션 산업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 상당부분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

애니메이션은노동 집약적이면서도 대규모의 자본을 요구하며 투자 위험도가 높은 산업이다(주 : 신병현,‘ 애니메이션 산업의 노동과정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산업노동학회). 인건비가 많이 드는 산업이다 보니, 애니메이션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나라들은 한국이나 중국, 동남아 등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에 하청 생산기지를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국은 무려 40여 년 전부터 하청 애니메이션 생산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25분짜리 일본 애니메이션 한편을 만들기 위해서 드는 비용은 3억 3천만 원 정도이다(주 : 2004년 제작된‘건담 SEED DESTINY’기준). 애니메이션 한 시리즈 당 25편 정도임을 감안하고 보면, 제작비용은 80억 원을 훌쩍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서 만든다고 해도, 그 성공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가 자체 제작을 나선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한국은 하청 애니메이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한국 애니메이터들이 상당부분 제작에 참여했죠. .

외국 기업이 하는 일이라고는 기획단계 정도입니다.

반대로 한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은 말라가는 겁니다. 한국에 300개 정도 애니메이션 회사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 중에 창작을 하고 있는 회사는 심형래 씨의‘영구아트무비’를 비롯해서 몇 군데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하청 위주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애니메이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일까. 유재운 씨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 하고 마시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청은 그 대금이 꽤 복잡하게 들어옵니다.

제작 진척 정도에 따라서 30%, 30%, 30%, 10% 이렇게 지불이 되죠. 또 하청이라는 게 한 회사가 다른 회사에 주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청을 받은 큰 회사가 또 작은 회사에게 하청을 주기도 해요.

이러다 보니까 어느 한 군데에서 돈이 안 들어오면 여러 회사의 애니메이터들은 한꺼번에 임금체불이 되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 돈이 들어오면 먼저 체불된 것부터 갚게 되는 과정이 몇십 년 계속되다보니 임금체불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죠.
또 있어요.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의 애니메이션 회사들과 경쟁을 하려면, 애니메이터들의 인건비를 일정수준 이상으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요즘 단가가 떨어진다고 하죠? 그럴 수밖에요.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받는 수준의 단가로 하청을 받아 오거든요.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애니메이터가 그 뭐냐, ‘후리랜서’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그것도 참 몹쓸 거지요.

우리는 법적으로‘개인사업자’라는 겁니다.

회사와는 도급계약을 맺은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연금도 못 받고, 퇴직금도 못 받고, 4대 보험 보장도 못 받았어요.

‘ 개인사업자’들은 법적으로 회사에서‘해고’된 것이 아니라 계약이 종료된 것으로 처리된다는 점 때문에 애니메이터들은 쉽게 쫓겨나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판도’가 바뀔 때마다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가끔은 일이 넘쳐나서 며칠 밤을 새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동안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할지를 몰라서 종이컵만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애니메이션에 나온 거대한 괴물 로봇이 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구조’라는 괴물 로봇과 8년 동안 싸워온 그는 어떻게 싸움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일까.
“애니메이터들이 노조를 중심으로 기업과 계약을 하는 방법이 있지요.

노조가 기업과 애니메이터 간에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업에서 일이 들어오면, 노조는 그 단가를 일정 수준 이상이 되도록 협상을 하고, 협상 후에 애니메이터에게 일을 넘겨주는 겁니다.

하청 구조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도, 이렇게 하면 애니메이터는 자신의 생계를 충분히 꾸려 나갈 정도의 일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이 노조활동에 많이 참여한다는 선행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유재운 씨는 구조 자체를 바꾸기 위해 모범적인 창작 애니메이션 회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노조에 속한 애니메이터들이 중심이 되어서 회사를 꾸리는 것이다.

작품 제작 계획을 모두에게 공개해서 각 애니메이터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명시하고, 경영에도 애니메이터가 참가하는 방식의 회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우선은 자본금이 적으니, 작은 사업부터 시작할 생각이라고 했다.

몇 명의 애니메이터들이 뜻을 모아캐릭터를 만들고 웹툰을 그리는 회사를 차릴 예정이란다.
“실력 하나는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애니메이터들이 모인 이 회사를 잘 운영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어서, 한국 애니메이션에 가능성이 있음을 보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업들이 창작에 투자를 시작하겠지요.

애니메이션의 창작이 많이 이루어지면, 애니메이터들의 임금도 한국 상황에 맞게 현실화될 것이고, 우리들도 그렇게 원하던 ‘창작’을 마음껏 할 수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더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모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구조’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 로봇’을 상대하는 일이니,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이 잘 되면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애니메이션 한 편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일년에 도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나요.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그 사람들이 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우리의 삶이 이렇게 힘든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괜찮지 않습니까? 하하.”
김유성 씨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 ‘천진한’ 웃음을 유재운 씨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스태프 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으로 빵 한 조각을 씹으면서 어제 받아두었던 애니메이션을 켰다.

발달된 인터넷(!)의 영향인지, 일본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은 불과 몇 시간 뒤면 한국에서 받아볼 수가 있다.

어느덧 25분짜리 애니메이션 한 편이 끝나고, 엔딩 테마곡이 흘러나왔다.

캐릭터들의 멋진 일러스트 위로, 작품을 만든 스태프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자 4글자로 이루어진 일본인들의 이름 사이사이에 영어로 적힌 한국인의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취재해왔던 사람들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지만, 내 머리 속에서 그 숱한 애니메이터들의 노동을 다시 떠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자신의 손으로 멋진 애니메이션 하나 만들어 보겠노라는 꿈을 안고 애니메이션 판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인터뷰를 했던 모든 사람들은 혼자서 일을 하는 애니메이터의 성격상, 하나로 뭉쳐서 무엇인가를 해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애니메이터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꿈’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

애니메이션 노동조합의 게시판에 적혀 있던, 그리고 내가 애니메이터 취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어느 애니메이터의 이 한마디 문장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대, 꿈을 향하고자 하면 그대 앞의 억압에 저항하라.”

 

주성|편집위원|encl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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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버스 파업투쟁 중 행정대집행 공권력투입 .... 이러 개새끼들 같으니라구!

파업 전주 시내버스회사 4곳서 행정대집행

경찰에 에워싸인 민주노총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9일 전북 전주 시내버스 회사 4곳에 대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된 가운데 전주시 팔복동 호남고속에서 경찰과 민주노총 노조원 간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경찰이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한 뒤 노조원들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2011.3.9 sollenso@yna.co.kr

경찰 2천500여명 배치...큰 충돌 없어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전주 시내버스 파업이 92일째를 맞은 9일 전주 덕진구청은 호남과 신성, 전일, 전북 등 시내버스 회사 4곳에 대한 행정대집행을 벌였다.

   구청 직원과 집행관 등 2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전주시 팔복동 호남고속 등 버스회사 4곳에 행정대집행을 했고 천막과 초소 등 시설물을 들어냈다.

 

윗옷 벗고 항의하는 민주노총 노조원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9일 전북 전주 시내버스 회사 4곳에 대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된 가운데 전주시 팔복동 호남고속에서 경찰과 민주노총 노조원 간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경찰이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자 노조원들이 윗옷을 벗고 항의하고 있다. 2011.3.9 sollenso@yna.co.kr

   이날 행정대집행은 4개 버스회사에서 동시다발로 이뤄졌으며 전북경찰은 노조와의 충돌을 우려해 경력 32개(2천500여명) 중대를 배치했다.

   호남고속의 집행 과정에서 사내 집회를 벌인 민주노총 노조원들과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한 경찰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으나 큰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행정대집행 현장, 그리고 아기와 경찰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9일 전북 전주 시내버스 회사 4곳에 대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된 가운데 전주시 팔복동 호남고속에서 경찰과 민주노총 노조원 간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경찰이 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의 아기를 안아 보호하고 있다. 2011.3.9 sollenso@yna.co.kr

   경찰은 경고 방송 후 노조원들을 에워싸 노조원들을 회사 밖으로 끌어냈고, 일부 노조원들은 회사 밖에서 임시 집회를 연 뒤 낮 12시30분께 자진해산했다.

   덕진구청은 버스회사 4곳에서 천막 16동과 초소 2동 등 시설물 18개동을 철거했다.

 

끌려가는 민주노총 노조원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9일 전북 전주 시내버스 회사 4곳에 대한 행정대집행이 진행된 가운데 전주시 팔복동 호남고속에서 경찰과 민주노총 노조원 간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경찰관들이 한 노조원을 회사 밖으로 끌어내고 있다. 2011.3.9 sollenso@yna.co.kr


   철거가 끝난 뒤 전일 38대, 신성 22대 등의 버스가 출차했고, 호남고속에선 버스 점검이 이뤄졌다.

   앞서 전주지법 제1민사부는 전주시내 4개 버스회사가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등을 상대로 낸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대부분 받아들여 "노조는 부동산과 부동산 안의 시설을 점거하거나 정류장의 출입, 주차, 운행 등 일체의 행위를 방해하는 행동을 금지한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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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버스 신문 3월호 만평입니다.

전주 민주버스 파업이 장기화되어서 시민들이 많이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안을 노조는 받았는데 업자들이 못받겠다고 노조로 인정 할 수 없다고 게기고 있습니다.

이 추운 꽃샘추위에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투쟁!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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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고있는 민주노총 버스노동자의 글입니다.

이 글은 민주노총 전북본부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전북 버스파업 노동자의 글입니다.

전북 버스노동자의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글이어서 고침 없이 그대로 옮깁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파업을하고 잇는 시외버스 기사입니다

지금은 시민여러분께서 저희가 왜파업을 할수밖에업는가!!

파업하는 이유를 만희들 알고 계시고 독려 글들도 만히 올려 주셔서 만은힘을 엍고잇고 시민단체에서도 저희들을 만히 독려를 해주시기 때문에 정말힘든 파업이지만 꿋꿋

하게 자본에 압잡이 악덕업주들 한태 밀리지안코 지면 죽음박에업단 각오와 신념으로 이악물고 총력투쟁 하고잇습니다.....

 

근대 간혹 아직저희들이 왜파업을 하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잇어서 못쓰는 글이지만 몃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우리 전북고속은 한노총과 사업주들에 횡포에 작년 6월달에 한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투쟁을하게 되엇고 사업주는 우리를 인정하지 안코 해고와 징계남발로 우리를 핍박하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원에 합법적인 노조니까 회사에게 대화에 나서라는 차원에서 법원에 응락가처분 신청을 냇고 판사님도 합법적인 노조다 교섭을 하라고 명령을 내렷고 회사에게 한번교섭을 불응하는대 100마넌씩 노조에 주라고 명령을 내렷습니다...

근대 회사에서는 교섭장소에 나와서도 엄한말만 퉁퉁하고 우리를 인정해 주지 못한다는자세로 몃 달 을 끌엇고 우리는 파업만은 면해보자고 노동청에 쟁이신고를 내서 쟁이기간이 끝낫는대도 더10일 이상을 연장해가면서 까지 최선에 노력을 다햇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를노동자를 해고하고 탄합하는대 도가 넘쳐서 생존권 차원에서 파업을하게 되엇습니다...

언론도 자본가 편에서서 합법파업하는 저희 노동자에 파업을 불법 운운하면서 매도햇고요~

그이유는 전주에 신문사 몃곳이 사업주가 가지고 잇는 신문사라 우리 매도하는대 압장서서 힘업는 저희노동자를 공격햇지요...

 

이번에는 왜파업을 하게되엇나 말씀드리겟습니다...

이글을 읽어보시면서 한가족이란 생각으로 읽어주셧으면 감사하겟습니다....

  

처음에 파업에 시초는 우리에게 주야되는 수당을 교묘히 회사에서 띠어먹은거 가지고 시작이 되엇습니다...

대법원 판래도 잇지만 여러명이 소송해서 이긴판래가 만히 잇습니다

작게는 1000~만게는2000만원 이상으로 알고잇습니다.

그래서 우리조합원들은 소송을 걸어서 밭을려고 햇는대 사장이 하는말이 조합원들 모아놓고 통상임금 밭으려면 사표쓰고 나가라고 공갈협박을 하엿고 여기에서 우리가 반발하니까 한국노총도지부장하고 작당해서 우리노동자 들에게 그동안 착복햇던 임금을

단돈100만원 주기로 합이를 하고 자기네들끼리 도장을 찍엇습니다...

그후로 회사 사업주들은 조합원에게 공갈반 협박반으로 각서를 밭고 100만원씩 지급하엿습니다

 

 

의지가 강한 조합원은 각서에 싸인을 안한 조합원도 잇지만 거이가 회사에 압박에 못이겨 만히 각서에 싸인을 하게 되엇습니다...

안전여객 같은경우에는 100마넌도아닌 70만원에 도장을 찍엇다 합니다...

세상에 공산당도 아니고 민주 국가에서 잇을 법이나 한일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내임금을 왜한국노총 도지부장이 그것도 1000만원 이상밭을돈을 100만원에 찍습니까!!

그리고 사업주들은 안줘도 될 돈이면 반강제로 압으론 민형사상 고소, 고발 안한다고 각서까지 밭고 주겟읍니까!!!

그것뿐이 아닙니다

한국노총 지부장 놈들은 하는 일 업이 먹고 놀면서 우리보다 월급을 두배정도 밭으면서도 그것이 적다고 70만원이나 더올리고 우리임금은 말로는4.5프로 올렷다는대 수당을 빼버려서 따져보면 별로 올른것도 업습니다...

우리가 밭는 월급은 150~~160정도밭습니다~

그것도 7월달에 임금협상이 끈낫으면서도 지금까지도 머가얼마가 올랏고 먼수당이 빠졋나 공고를 부치야 됨에도 불구하고 머가 무섭고 구린지 임금타결 내용도 못부치고 잇읍니다...

저도 대학생이2명이고 고등학생이 1명잇습니다

어떻게 이돈가지고 먹고 살수가 잇겟습니까...

사업주들은 우리에게 280만원씩 준다고 시하고 도에서 보조금을 타같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우리에겐 150~160만원 정도 지급햇습니다 그돈은 모두 시민에 혈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한노총밑에서 사업주들 밑에서 파업을 안하고 일을 할 수가 잇겟

습니까!!!

그동안도 회사가 어렵다 해서 월급동결한 적도 잇엇고 월급이 올라바야 겨우1~~2프로 올랏습니다...

우리 밥갑이 얼만지 아십니까 한끼에 2000원밭습니다....

요즘2000원가지고 라면도 못먹습니다 우리는 근무시간도14~~16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고 잇습니다...

우린 서울도 손님 모시고 가고 인천 포항 경주 춘천 거이 안가는대 업이거이 운행 하고 잇습니다

가끔 여러분도 티비를 보면 그런 뉴스를 접하실겁니다~~

버스가 사고가 나서 몃 명이 죽고 몃 명이 다쳣다...

버스는 시민여러분이 만히 타시기 때문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 일수 박에 업습니다...

그 차에는 시민여러분에 자제분이 타고 잇을때도잇고 때론 부모님이 때론 남편 와이프가 타고 잇을 때가 잇을 때가 잇으실겁니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밤늣도록 까지 쉬는 시간도 별로업이 운행 한다면 안전 운전이 될까요...

사실저도 운행하면서 만히 졸앗습니다

안 졸으려고 청양고추도 가지고 다니면서 먹어보고 허벅지도 꼬집어 가면서 운전해밭지만 졸음에는 그게 통하지 안터군요...

그렇타고 만은 손님이 타고계신대 잠시 자고가자고 하겟습니다

그럴수도 업구요...

손님들은 또그런말씀  만히 하시죠??

기사가 불친절하다...

그럴수 박에 업습니다

쥐꼬리 월급 밭고 중노동에 밥갑2000원밭아가면서 어떻게 친절하게 손님을 모실수 잇겟는지요...

죄송한 말씀 이지만 정말 너무 피곤 할때는 누가 말시키는거 조차  대답하기 실을 때가 만습니다...

잠자린 어떤가요... 우린직행 버스라 밖에서 자는날이 만습니다...

잠자리도 가장싼곳 자기도 힘든곳 얻어주고서그것도 2명이잘꺼 회사어렵다고 하면서 좁은방을 3명씩 몰아 넣코 동료발밑에서 쭈그려 자는날이 허다합니다...

아마 남원이나 서울 쪽에 사시는 분들은 저녁에 전북고속 숙소 가보시면 제말이 거짓인지 진짜인지 잘아실겁니다...

우리가 파업을 하는 목적은 우리에 노동주권을 찾자는 의미도 잇지만 손님들을 안전하고 편하게 모시는것도 목적이 잇습니다...

근대 전북고속 사장은 어떤지 아십니까...

우리 몰아낸다고 용역들을 배치해서 왕같이 행동하고 잇습니다...

출근할때면 대통령 경호하는거 같이 용역들을 차주위에 뺑돌려서 출근합니다...

아들같은 용역 깡패가!! 아버지같은 조합원을 집단으로 구타해서 갈비뼈가 3대나 부러지게 하는 잇을수도 업는 일이 일어나고 잇고 우리가 사장 면담 좀 한다하면 용역깡패들이 소화기를 수 십 게씩 저희에게 뿌리는 일도 비일비재 합니다...

 

이게 다 무슨 돈으로 그럴까요??

지 돈이면 아까워서 그리 쓰겟습니까~~

들리는 소문에는 용역한명당 25만원 이상 일당준다는대 수 십명을 3개월째 쓰고잇습니다...

이게다 우리 시민여러분이1년에 백억이 넘게 주는 시민들 세금 혈세입니다...

자기측근들에게는 관리차원에서 회사압으로 사채를 가져다 쓰면서 1억에 150만원 이라는 이자를 주고 잇읍니다!!

티비에도 방송이 된사실입니다...

전에 근무하시던 사장님은 은행에서 싼이자를 가져다 사채를 다갑고 회사경형을 튼튼히 하셧습니다...

3년동안 160억이라는 회사빛을 갑으셧습니다...

근대 지금사장은 싼은행이자도 잇는대 자기측근들에 사채를 가져다 쓰고 회사빛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잇습니다...

직행버스간이정거장 덕진.완산동.노송동.안골.그리고 시외버스 터미널안에 장사잘되고

목좋은곳은 자기 측근들이 다점령하고 잇습니다...

난!!전주가 썩어도 이리썩은지는 몰랏습니다...

인천같은대는 버스파업을 하니까 시장이 나서서 3일만에 해결 햇습니다..

시장이나 도지사가 왜가만이 잇고 경찰들이 왜 우리불쌍한 노동자를 탄합 할까요.....

경찰들은 용역깡패들이 하루종일 우리를 감시하고 사진찍고 비디오 촬영할때는 말도안하고 관망만 하면서 우리들이 불법적으로 고용한 대체인력 사진찍으려고 하면 초상권 침해다 하면서 회방을 놓코 잇습니다...

우리가 행진하면서 전북고속 압에 지나가면 경찰들 중무장해서 수백명 와가지고 악덕업주 지켜 주는거 보신 분들도 만으실겁니다...

 

전주 시장은 어떻습니까 교섭장소에서 악덕업주 김택수가 사람 만은 대서도 어이~송시장 하고 부른답니다..

그래도 전주시를 대표하는 시장인대 얼마나 우습게밭으면 그리할까요...

저번에는 시장이 3공화국 시절도 아닌대 사업주 편에서서 반상회를 열어서 합법파업을 불법파업이다 하고 호도를 하다가 주민들에게 질타를 맛앗다는 이야기도 들엇습니다...

이게 전주에 마음아픈 현실입니다...

 

도지사와 시장이 관광버스 증차해서 시민들 불편하게 하지안게 한다는대 관광버스 늘리는건 사업주들 편들어 주는겁니다...

그리고 관광버스 투입된돈은 고스란히 시민들에 세금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야 더느긋하게 시간을 같고 우리노동 자를 탄합할수 잇을태니까요..

우리는 3개월째 무노동 무임금으로 10원한푼 못밭으면서 투쟁하고 잇습니다...

가정을 가진 남편으로서 애들 아빠로서 너무힘들고 마음 아픈일이 만습니다...

전북고속 사장님이 그랫답니다

저것들은 돈이업으니 한달 잇으면 쓰러질 거라고...지금은 쓰러질래야 쓰러질수 가업습니다

항복하면!! 우리에게 기다리는건 해고와 손해배상청구와 구속이 기다리고 잇을뿐 입니다...

저희 노동자들도 하루빨리 돌아가서 시민여러분 웃는 얼굴로 모시고 십습니다.....

우리 노동자들 만히 응원해주십시오

시민여러분 힘만이 썩어빠진!! 정치인 공권력 악질사업주들을 이길수 잇으니까요~~

우리 힘을모아 깨끗한전주 살기 좋은 전주를 만들어 밭으면 합니다......

법원도 우리파업을 합법적이라고 인정햇고 민주당최고위원에서도 인정햇고 민변에서도 인정햇습니다...

그런대도 도하고 시에서만 수수방관 하고잇습니다...

왜그리 악덕업주 한태 꼼짝못할까요  

민주당도 시도지사한태 공문까지 보냇다는대 왜꼼짝을 안할까요......

그건 시민여러분이 잘생각해보시면 해답이 나올꺼 같습니다...

꼬~~옥 이겨서 시민여러분 친절히 안전하게 모시겟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글을 일고 저희파업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면 시청 도청 경찰청 노동청 홈피에 글도 만히 올려 주시고

전화도 만히해서 항이좀 해주십시오~

 

 

그리고 이글을 아는싸이트나 블로그에 올려 주셔서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좀 해주십시오......

글솜씨가 업어서 제마음이 다 전달 되지는 안앗지만 어느정도는 이해하셧으리라 생각합니다~~

빨리 일터로 돌아가고 십습니다...

그리고 요즘 방송 매체에서  지나가는 버스에 돌을 던졋다 버스를 불질럿다

이런 이야기가 만히 나오는대요~

그건 여론과 시민이 우리 노동자들 편을 만히 드니까

여론을 호도시켜서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려는 어떤 나쁜 사람에 술수인걸로 추정이 됩니다~~

얼마전 여론에서 파업하고 잇는 노동자들이 월드컵 경기장에서 차량을 못나가게해서 차량운행이 안됫다고 여론마다 떠들엇는대요 

그것도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법으로 불법인 대체기사 가려내려고 간거지 차량을 막은적은 업읍니다

한국노총 측에서 여론몰이 하려고운행을 안시킨거 일뿐입니다

아주나쁜 놈들이죠...그리고 대형버스는 차고지위에 주차는 엄연한 불법인대 법을어겨가면서 회사박에 주차시키고 그걸 경호해주는게 경찰입니다~

법을 지키고 수호해야 하는 시하고 경찰이 법을어기면서 자기들 맘대로 하고잇읍니다 이게 전주에 답답한 현실입니다...

선거때만 대면 서민편에서서 일하겟다 공약해놓코 당선만 대면 서민알기를 우습게 아는 정치인들은 압으론 우리 시민에 표로 시민을 무시하면 얼마나 무서운가를 똑똑히 보여줘야 합니다!!!

 

민주당 공천만 밭으면 당선댄다는 생각도 싹!!바까버려야 합니다!!!

아직 날씨가 쌀쌀 하니 건강 유이 하시고 항상 행복 하셧음 좋겟습니다...

시민여러분 사랑합니다~~~~~어느버스 노동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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