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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와 안상수 [미디어 오늘 펌]

              
 
‘좌파 타령’ 안상수와 드라마 추노의 명언 
[기자칼럼]"한번 변심한 자는 동지들을 더 매섭게 몰아 붙인다"
 
 
KBS 인기드라마 ‘추노’의 주인공 중 한명인 정승 이경식(김응수)은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막후 실력자이다.
그는 추노꾼 대길이(장혁)와 조선최고의 무장 송태하(오지호)와 대립각을 형성한다.

이경식은 송태하와 같은 편이었던 조선비를 이용해 송태하 쪽 인사들을 하나하나 처단한다.
이경식이 드라마에서 전한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한번 변심한 사람은 자기 동지들을 향해 더 매섭게 몰아붙인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의심하는 이들에게 신임을 받기 위해서라도 더 철저히 ‘배신자’의 길을 걷는다는 주장은 현실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분석이다.

최근 여권은 각종 설화(舌禍)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말을 옮기기에도 저속한 ‘큰집 조인트’ 논란은 대한민국 방송계의 수장 중 하나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입에서 나왔다.
이명박 정부 우산 아래 떵떵거리며 권력을 누리던 인물들의 그릇을 살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결국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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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KBS  
 
여권이 ‘큰집 조인트’로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한나라당 원내대표인 안상수 의원은 연타석 병살타로 친정을 울렸다.
좌파정부 성폭력 유도 발언 논란으로 입방아에 오르더니 이번에는 종교장악 논란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2009년 11월13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나 서울 강남 대표 사찰인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교체 문제와 관련해 ‘압력’을 행사했다는 게 의혹의 내용이다.
이 자리에는 김영국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 대외협력위원과 고흥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도 있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명진 스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면서 발뺌을 했고, 외압 논란은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명진 스님은 “강남 부자 절에 좌파 스님을 그대로 나눠서야 되겠느냐”고 안상수 원내대표가 말했다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과 다르면 승적부에서 이름을 지우겠다면서 배수진을 쳤다.

안상수 원내대표의 해명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
11월13일 자리를 주선했던 김영국 대외협력위원이 “명진 스님의 발언은 모두 사실이다”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기 때문이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궁지에 몰렸지만 “앞으로 일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무대응 원칙을 밝혔다.
상황은 안상수 원내대표와 한나라당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야권에서는 ‘안상수 원내대표는 우리 편’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지방선거를 앞둔 여당에 정치적 부담을 안겨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안상수 원내대표의 연이은 설화는 관행적인 ‘좌파 타령’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권력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힘을 지닌 인물은 자신의 권한을 과신해 함부로 칼춤을 추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새 그 칼이 자신을 향할 때도 있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친이명박계 핵심 인사이자 여당 원내대표라는 자신의 권한을 과신해 조계종에 부적절한 입김을 행사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안상수 원내대표나 조계종 쪽은 “외압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국민 동의를 이끌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안상수 원내대표 과거 행적을 보면 드라마 추노의 정승 이경식이 전한 ‘명언’이 떠올려진다는 점이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좌파 타령’으로 입방아에 오르고 있지만, 그의 과거 행적은 참 한나라당답지 않은 경험의 연속이었다.

안상수라는 이름 석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진상폭로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의 길을 걸었던 안상수 원내대표는 젊었을 때부터 할 말은 하는 인물이었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 문제로 9일간 단식을 했고, 1967년에는 6·8 부정선거규탄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폭로한 이후 변호사의 길을 걸었던 안상수 원내대표는 1991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경실련 입법위원, 박종철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보수 성향 신문이 아닌 경향신문과 한겨레라는 점이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1992년 경향신문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고, 한겨레 시평을 게재하기도 했다.

학생운동, 시민사회 운동, 진보·개혁성향 언론 필진 활동 등을 경험한 안상수 원내대표의 젊은 시절은 그가 말하는 ‘좌파 활동’과 다른 것일까. 물론 안상수 원내대표의 활동을 ‘좌파 활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문제는 안상수 원내대표가 생각하는 ‘좌파’가 무엇인지 헛갈린다는 점이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좌파라고 지목했다는 명진 스님은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무료급식에 찬성하고 용산참사 유가족을 위로한 인물이다.
자신과 정치적 뜻이 다르면 좌파인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불편한 인물은 좌파인가.

‘좌파 타령’의 가장 큰 의문점은 좌파에 대한 개념 규정 없이 일단 ‘좌파 딱지’를 붙이는 관행이다.
명진 스님은 지난 22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에서 안상수 원내대표가 자신을 좌파라 불렀다는 것을 황당해하면서 이런 얘기를 전했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좌파주지 운운했다 소리를 그렇게 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좌파 좌파 하는데 내가 왜 좌파인가 모르겠다. (안상수 원내대표는)징집영장이 나오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피해가지고 결국은 고령으로 군대를 안 갔거든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아버지도 육군병장으로 제대하셨고 저도 육군병장으로 제대했고 군 복무 중에는 제가 맹호부대로 월남까지 갔다 왔는데, 그리고 내 동생은 스무 살에 해군에 자원입대해서 훈련 받던 중에 순직을 해서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렇게 묻혀 있는데 내가 왜 좌파….”
 
김문수나 이모기도 안상수와 비슷한 동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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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단식농성중입니다.

 

작성자


김진숙
 
(2010/01/18)
 

제목


콩국 한 그릇
 
 
차가 있었다면 당장 차부터 팔았을 겁니다.
땅바닥에 누워보면 세상에 경차는 없습니다.
겉보기 아무리 작은 차라도 반드시 제 무게 이상으로 지구를 울리며 지나갑니다.
오토바이는 이명박보다 더 싫습니다.
적의 동태를 수시로 감시하는 레이다처럼 텐트 안을 1초 간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헤드라이트 불빛들.
한강 철로 위에서 잠을 자본 적은 없지만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면 이럴 거 같습니다.
저 육중하고 폭력적인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탱크 같은 저것들이 어느 순간 내 몸을
짓이기고 골을 빠개고 바퀴에 뇌수를 너덜너덜 매달고 지나갈 거 같은 환상.
아사가 아니라 그걸로 죽지 싶습니다. 로드킬.
나 좋자고 끝도 없이 쏟아내는 문명이란건 바닥 밖엔 갈 데가 없는 목숨들에겐 살상의 폭력임을 깨우치는 시간들.

86년엔가 그 이듬해인가도 단식을 했었습니다.
그땐 천막도 몰랐습니다.
짓밟힌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 일어섰던 시절.
전술도 없고 전략도 없고 교섭도 없던 시절.
성명서도 없고 대책위도 없고 상급단체도 없고 지침도 없던 시절.
오로지 들끓는 분노만 시퍼런 죽창 같던 시절.
해고자 세 사람이 밟힌 그 자리에 그대로 맨바닥에 주저앉았던 행위가 먼저 생기고 단식농성이라는 개념은 그 후에도 몇 년 만에 등장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유일하게 피웠던 요령은 라면박스를 깔고 앉는 일이었습니다.
맞은 편 가게 아주머니가 갖다 주셨던. 몇 시간인가 회의를 해서 깔고 앉기로 결론 난.
그렇게 며칠을 앉아있으니 한 사람씩 라면박스를 들고 와서 같이 앉아 같이 굶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 박창수도 있었고.
지금 제가 있는 텐트 안에는 솔직히 없는 게 없습니다.
전등에 전기스토브에 전기주전자에 전기담요에 mp3에 휴대폰충전기에.
회사에서 전기를 끊었습니다.
순식간에 작동을 멈추는 버릴 데도 없는 쓰레기들.

20년 민주노조운동은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쓰레기들을 늘려오는.
그런 것들을 늘리기 위해 비정규직도 버리고 장애인도 버리고 노점상도 버리고 농민도 버리고 여성도 버리고 다 버리고 그런 것들만 애먼글먼 끌어안고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물려주기 위해 잔업하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다 들어요.
그 삼양라면박스가 관료주의의 싹은 아니었을까.
그때 그냥 맨바닥에서 버텼어야 했던 건 아닌가.
그랬다면 천막도 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장판도 깔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진짜 싸울 사람들만 남지 않았을까. 껍데기들은 가고. 아니 아예 오지도 않고.
교육은 있어도 학습은 없는 운동. 회의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운동.
전지전능한 몇 사람이 ‘방침’을 내오고 조합원들에겐 ‘지침’이 내려올 뿐입니다.
미래가 생산되는 공정자체가 봉쇄돼있습니다.
사람을 키우지 않으니 할 사람이 없고, 할 사람이 없으니 하던 사람이 또 합니다.
그렇게 우린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스스로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3년 전부터 역사가 거꾸로 갔느니 시간이 되돌아갔느니 말들이 많았습니다.
서는 자리마다 전선이고 발 닿는 곳마다 전쟁터이고 쓰는 글마다 추모사인 일상이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을 따름이라 사실은 별 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십 몇 년 피 터져가며 살았던 게 아주 헛산 건 아니었다는 희미한 흔적은 남았습니다.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신청 10년 만에 느닷없이 내려준 명예회복과 부당해고 결정. 해고된 지 24년, 출감한 지 21년만입니다.
그게 작년 11월 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상의 기쁨이 닥치면 실감이 별로 안 나는 모양입니다.
출근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아닙니다.
쌍용차투쟁을 ‘보고’나선 투쟁이란 말 함부로 쓰면 안되겠습니다.
출근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혼자. 맨몸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른 건 진심이었지만 ‘혼자’는 영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진심이 아닌 바램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
첫날,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해고예고를 받아놓은 하청활동가가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열 명 정도가 함께 나와 같이 뿌리고 있었습니다.
홀홀단신인 제 눈에는 그 열 명이 무적의 강철대오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다 뿌리고 가는데 제 유인물은 거의 그대로 남았습니다.
하필이면 비가 내렸습니다. 비에 젖은 유인물은 참 무거웠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박성호 동지가 옆에 서주었습니다.
박창수 위원장, 김주익 지회장, 곽재규 동지를 제 손으로 묻으며 쌓은장례 내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라 이 친구 없이는 열사들 장례 못 치릅니다.
장례전문가를 배출해 낸 한진노조의 역사.
“그러다 짤리면 어짤라구. 낼부터 나오지 마” 입안에서 뱅뱅 도는 그 말을 아직도 못했습니다.
3일 정도 지나자 경비들이 노조출입을 막았습니다.
“조합원이 노조에 가는데 왜 막노” 라는 제 항의에 그들은 신기하게도 24년 전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린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거요”
세월은 영락없는 그 세월인데 저만 중늙은이가 되어 그 세월 앞에 홀로 마주섰습니다.
과거가 지속되는 걸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한 저는 과거로부터도미래로부터도 고립됐습니다.

07시. 신관 앞에 피켓을 들고 서면 아직 어둡습니다.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근버스는 그 시간이면 들어옵니다.
24년 간 공장을 지켜오면서 위원장의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고 동료의 장례마저 치러야했던 기가 막힌 아저씨들이 그 통근버스에서 내립니다.
정리해고 방침이 발표되면서 아저씨들의 불안한 눈빛이 제 눈엔 보입니다.
열에 여덟은 하청노동자들입니다.
정규직이었다가 하청이 된 아저씨들도 많습니다.
이미 하청노동자들은 천명 가까이 짤려 식당이 헐빈하고 통근버스가 텅텅 비었다는 소문이 괴담처럼 떠돕니다.
마산에서 오는 통근버스에는 네 명이 내립니다.
출근시위를 처음 시작했던 50여일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숫자가 줄었습니다.
그 아저씨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쌍용차 동지들, 하이닉스 동지들, 콜텍 동지들, 기륭동지들, KTX 동지들, 이랜드 동지들.
그 외에 이름을 들먹이는데만도 A4용지 세 바닥이 훌쩍 넘어 갈, 정리해고 투쟁을 하면서 제가 만났던 수많은 동지들.
죄송합니다.
다 아는 것처럼, 다 겪은 것처럼 세치 혓바닥을 놀렸지만 사실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그것 또한 저한텐 일상이었으니까.
“차라리 죽여라” “해고는 살인이다”
이런 구호 솔직히 너무 적나라하다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 텐트 입구엔 “해고는 연쇄살인이다” 가 붙어있습니다.
누군가 피 묻은 손으로 심장을 꺼내 징 박힌 신발로 자근자근 밟으면 이렇게 아플까요.
어디로 사라지는 지 알 수도 없고 어느 날 부턴가는 훌쩍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아저씨들. 그걸 아침마다 확인하는 일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현장에 돌아 가 아저씨들은 족구하고 저는 심판보고, 햇볕 따신 날은 선각공장 앞에 안전화 벗고 언 발을 나란히 내놓고 녹이는 꿈을 단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한번 목구멍에 쇳가루 먼지 벗겨내는 날. 강씨아저씨의 그 구성진 노랫가락을 다시 들어보는 일을  단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숙에이~” 부르시던 허씨아저씨의 목소리를 꿈에서도 듣곤 했습니다.
제가 철판에 두 다리가 깔려 병원에 오래도록 입원해 있을 때 번갈아 죽을 끓여 주전자에 담아오시던 아저씨들. 미안해 어쩔 줄 모르던 제게 “낸쥬 씨븐 쏘주나 한잔 받아주라이”
하시던 그 약속이 술 광고만 봐도 생각이 났습니다.  
눈알에 박힌 용접불똥을 종이를 뾰족하게 접어 빼내는 방법을 일러주시던 아저씨들.
좁은 땡크 안에 들어갈 땐 발을 밀어 넣고 동시에 어깨를 같이 넣어야 쏙 빠진다는 걸 알려주시던 김씨아저씨.
사다리가 없는 블록에 오를 땐 두 팔로 철판을 짚고 동시에 몸을 띄워야 한다는 걸 시범과 함께 보여주시던 박씨아저씨.
그때 제겐 무엇보다 절실했던 생존의 정보들이었습니다.
버스안내양 시절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릴 땐 오른발이 먼저 땅에 닿아야 바퀴 밑에 안 깔린다는 정보만큼이나.
2003년도에 강씨아저씨 허씨아저씨가 짤렸습니다.
김씨아저씨 박씨아저씨 마저 짜르겠다는 이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동원’할 조직도 없고 ‘지침’을 내릴 권력도 없는 제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조합원들을 지키겠다고 싸우다 같은 날 두 명의 장례를 함께 치른 게 6년 전인데, 더 크고 더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저들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요.
명단 발표되면 끝인데, 그러고 나면 우리끼리 싸우고, 죽고, 열사정신 계승하자고 결의를 ‘내오고’, 장례 치르고, 울고불고, 추모사 쓰고..
쌍차에서 6명이 죽은 게 언제라고.

요즘은 뉴스도 안 보고 인터넷도 못하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과정이 어떻게 되는진 잘 모르겠습니다. 입을 댈 기력도 없구요.
저는 국민파도 아니고 벽제파도 아니고 중앙파도 아니고 현장파도 아니니 잘 아는 후보도 없습니다.
다만, 대장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현장은 무너지는 걸까요.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린 번번이 패배하는 걸까요.
민주노총이 왜 외면당하고 욕먹는지 우리만 모릅니다.
추한 소문일수록 당사자만 모르듯이.
욕하면 국민파의 음모라 하고 현장파의 작태라 하면 됩니다.
다 같이 욕먹을 땐 조중동의 악랄한 왜곡선전 때문이라고 하면 됩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욕이 배따고 들어오나 이런 말도 논리가 됩니다.
욕이 배따고 들어와야 치유가 된다는 걸 우리끼리만 모릅니다.

위원장선거에다 지자체선거까지 앞두고 있으니 후보들이 앞 다투어 ‘방문’하시겠지요.
이슈도 있고 표도 되는 사업장이니까.
다만, ‘발언’ 하려고 오진 마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간곡히.
발언 기회 확보되면 이 투쟁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핏대 세우곤 또 다른 사업장으로
가시겠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가셔서 똑같은 ‘발언’을 하실테구요. 저도 그랬거든요.
어떤 위원장은 하루에만 목숨 세 번 거는 것도 봤습니다. 가는 데마다.
민주노총을 정말로 바로 세우고 싶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비정규직의 현실이 아프다면
결의를 했던 그 자리에 눌러앉으세요.
그 자리에서 비정규직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짤리는지 눈으로 직접 보십시오. 자료는 그만 보시고.
정규직은 그나마 싸울 조직이라도 있고 연대할 상급단체라도 있습니다.
뉴스에라도 나오고 신문에 한 줄이라도 나옵니다.
비정규직들은 어쩌면 좋을까요.
한진에서만 천명 가까이가 짤렸고, 소문으로 떠도는 앞으로 짤릴 4천명의 목숨들을
도대체 어째야 할까요.
그 답을 가져오시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후보님들을 추대했던 조직들과 함께 실천할 방안들을 다만 한 가지라도 마련해오십시오.  

한 시간에도 수 만대의 차가 골을 흔들고 생애를 흔들며 지나다니는 길가에 쳐놓은, 잠시도 쉬지 않고 펄럭이는 작은 텐트에 누워서야 비로소 51년의 삶과 그 절반을 차지하는 운동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난 어떻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삶을 꿈꾸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 누워있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여기 혼자 누워 굶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길바닥에 나앉아 굶는 이것밖엔 할 게 없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그래도 거창한 꿈을 품었습니다.
민주노총이 당장 천막을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단위노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한진중공업 앞에서 태종대까지 천막이 늘어설 것이고 그럼 이길 것이다..
사람이 안 죽고도 이길 것이다..
김주익도 그런 마음으로 홀로 크레인위에 올랐겠지요.
엿새를 이러고 있어보니 김주익은.. 우리가 죽였습디다.  내가..

그럼에도 저는 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류재운  :  김진숙 지도위원님 고생 많습니다.
저 애니메이션 노조 류재운입니다.
소식을 듣긴 들었는데 차마 굶고 있는 분한테 싸가지 없이 전화로 고생한다는 말을 하기가 민망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저도 두 번 해봤는데 세상에 못할 짓이 단식입니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건강을 위해서 굶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리를 듣긴 들었습니다만 사측에 압박수단으로 밥을 굶는 것은 어찌보면 드럽고 치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왜 저 새끼들 때문에 밥을 안 먹어야 되나?
2004년 그 놈의 비정규법 국회입법 막겠다고 열린 우리당 이 부영 당의장실 점거해서 일주일, 딱 일주일 굶어 봤는데 사실 고백하면 배는 안 고픈데 술이 고파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밥이야 워낙 굶고 다니는 게 일이라 그리 그립지는 않았는데 술이 저를 괴롭히더군요.
투쟁하시는 분한테 너무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라고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때 참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삭발(아 물론 중, 고등학교 다닐 때는 삭발을 하고 다녔지만 성인이 되고나서 말입니다. --- 그리고 그 때 저는 머리를 길게 길러 묶고 다녔습니다)
동지들이 하는 말이 제가 삭발을 해야 효과가 좋을 것 같다고 꼬시는 바람에 괜한 머리만 깎았지요.
그리고 단식, 천막농성, 국회 안 고공크레인 점거농성 등등
그래도 기어코 통과시킨 법이 그 놈의 비정규 악법입니다.
생각하면 노무현씨 ...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 노동자들이 최고로 많이 구속됐고 가장 많이 죽었다는 걸 사람들은 잊었는지 아니면 모르는지 저는 아직도 노무현 추모하는 사람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폭파시켜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어쨌거나 김주익 위원장 자결 하셨을 때 올라가본 크레인은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아찔했었습니다.
그 크레인에서 농성투쟁을 한 김주익 위원장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주루룩 흐르더군요.
부산역 광장에서 지도위원님이 추도사를 읽을 때는 저쪽 구석자리에 짱 박혀 가지고 소주 먹으면서 또 그렇게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제가 좀 눈물이 많은 편입니다.
비정규직 동지들 싸우는 것 보면 눈물 나고 해고 되서 투쟁기금 마련 물품 팔러 다니는 것 보면 또 눈물 나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를 외면할 때면 분노의 눈물이 나고........구사대, 용역깡패들이 천막을 침탈한 현장이나 두둘겨 맞는 것 보면 또 울면서 같이 싸우고....그러고도 모자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사제폭력을 묵인하고 있는 경찰 놈들 보면 이가 갈립니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해고자들은 비정규직으로 채워질 것은 불을 보듯 뻔 한데 참 아직도 자기 밥그릇만 바라보는 미래의 해고자들!

저는 자기 밥그릇을 발로 걷어차야만 자본에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밥그릇에 안주하고 밥그릇에 연연하고 한 숫갈 만 더 먹겠다고 달려들 때 자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따 하고 거지 동냥 주듯이 던져 주겠지요.
그러면 또 그걸 자기 식구들과 게걸스럽게 먹겠지요.

여의도에서 천막농성을 하는데 비닐천막 사이로 별이 보이데요.
그리고 입김으로 도너스도 만들어 졌습니다.
그 때는 그래도 한 6년 젊었으니까 버틸 만 했을까요?
지도위원님도 그리 젊은 편은 아니니 건강 조심하셔야 합니다.
투쟁하는 동지께 건강 조심하라는 헛소리 밖에 못하겠습니다.
조건이 된다면 연대집회나 집중집회 때 한번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 왠만하면 오래 굶지 마세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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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당 앞 노제에서 송경동 시인 조사

저 슬픈 망루를 보라
- 남일당 앞 노제에서 송경동 시인 조시-
저 남일당 4층 옥탑 위
파란집을 보아라
낱낱이 세들어 살던 집들 말고
2009년 1월 19일 새벽 2시 갈 곳 잃은 우리가
공동으로 지었던 저 마지막 희망의 집을 보아라
그러나 부서진 저 집을 보아라
짓밟힌 저 집을 보아라
불태워진 저 집을 보아라
끌려간 저 집을 보아라
우리 모두의 눈물이 1년째
아니 다시 수년, 수십년 얼어붙어 있을
저 파란눈의 집을 보아라
저 집을 보아라
저기서 우리 모두가 불탔다
밀려나고 쫓겨나는 이 시대 모든
가난한 이들의 꿈이 불탔다
세상은 이만 살기 좋아졌는지도 모른다는
우리들의 기대가 순박함이 무지가 불탔다
이만하면 민주주의지 않냐는 헛소리들
헛소문들 헛담론들이 불탔다
저 집을 보아라
곧 무너져 내릴 저 역사의 파란집을 보아라
다시 저렇게 쫓겨날 피압박민중들의 집을 보아라
다시 저렇게 뭉개질 가난한 꿈들을
공장을 일터를 삶터를 보아라
똑바로 보아라
눈 부릅뜨고 생피 뚝뚝 떨어지도록 똑바로 보아라
혼자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해봐도
같이 살아보겠다고 합심해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물대포와 곤봉과
배제와 소외와 왜곡과 죽임뿐인
이 추악한 사회를 이 더러운 사회를
이 병든 사회를 똑바로 보아라
그러나 다시, 저 파란집을 보아라
끊어진 다리를 세우고
꺾여진 관절을 다시 맞추고
어렵사리 다시 일어서는 우리 모두의
저 파란집 파란꿈을 보아라
새롭게 지어지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보아라
소유와 착취를 위한 건설이 아니라
삶을 위해, 평등을 위해, 평화를 위해
다시 우리 모두가 지어야 할, 올라야 할
저 저항의 망루 투쟁의 망루 연대의 망루
해방의 망루를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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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보니 폭설이 내리고 있네요.

올해는 예년과 달리 유난히 눈이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이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좋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농경사회 때 눈이 많이 오면 풍작이 든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면 뭐가 그리 좋았는지 강아지 새끼처럼 깡충깡충 뚸어 다니며 좋아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귀찮기만 합니다.

하하하 원.......

아침에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옥상에 올라가보니 옆집 아저씨와 아이들이 저마다 밀개와 빗자루를 가지고 나와 집 앞과 길가의 눈을 치우고 있더군요.

다른 것 다 떠나서 보기 좋은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좋은 풍경을 보면서 드는 상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끝날 수가 없는 용산과 민주노총, 그리고 아직도 천막을 거둘 수 없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이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장례를 치르게 되는 용산학살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차마 맨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 비통하고 처절한 심정들....

저 후레아들 놈들은 이제 장례를 치르기만 하면 그렇게만 하면 일단의 입닥음은 될테니 그것으로 마무리를 짓자고 덤빌 것입니다.

안 봐도 비디오 아닙니까?

여태껏 열사들의 죽음이 모두 그렇게 마무리가 됐지요.

그러나 착각은 자유라고 용산은 그렇게 끝날 수가 없고 그렇게 마무리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유족들의 굳센 다짐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이 죽음의 행렬 앞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더욱 더 그렇습니다.

이제 또 어느 철거현장에서 어느 누가 또 죽으면 가서 슬퍼하고 경찰들과 실랑이 벌이고 그리고 장례 치르고.... 또 다시 반복되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겠습니다.

아까 서두에 눈이 오면 요즘에는 귀찮다고 했는데 그건 비단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닌게 지난 참사 한 달째인 2월20날 현장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 귀가 하려고 버스를 기다리다 그만 양쪽 발을 버스에 치여 다치고 말았습니다.

투병생활을 200일을 했고 아직도 요양 중인데............. 그러니까 가을에 퇴원을 했지요.

다가올 겨울을 몰랐었는데 막상 겨울이 되니까 이놈의 발이 시리다 못해 아파서 거동을 못 하겠는 겁니다.

오늘도 공공연맹 시무식이라 시무식 참석하고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에 참배를 간다고 하는데 저는 못갈 것 같습니다.

눈밭에 조금만 서있어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쩌지 못하는 게 지금의 제 형편입니다.

먼젓번 민주노총 여의도 집회에 갔다가 아파서 굉장히 당황했지요.

걸어 다니면서 이빨만 뿌득뿌득 갈고 다니지요.

돌아가신 분들도 있는데 어찌됐건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 그나마 천운이라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이지요.

저는 사무공간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공공서비스노조고(대방동소재) 다른 하나가 용산에 있습니다.

왔다갔다 출퇴근 하면서 항상 버스 안에서 묵념을 하고 지나다닙니다.

아마 남들은 제가 뭐하는지 모르겠지요.

용산투쟁 내내 병원에 있다 보니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신문과 TV, 그리고 찾아오는 동지들에게 귀동냥으로 듣곤 했는데 언젠가는 수술한 병원으로 다른 수술을 또 받으러(큰 수술을 몇 차례 받은 후에 당시는 요양병원에 있었습니다) 차를 얻어 타고 가는 길에 용산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현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옷은 환자복이고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가보고 싶었는데 만약 제가 가게 되면 유족들이 아무 죄도 없이 미안해 할까봐 겉에서 둘러보기만 하고 왔던 기억이 납니다.

용산!

이제는 그저 용산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모든 모순이 겹겹으로 쌓여있는 바로 우리들의 투쟁의 현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깼나봅니다.

그야말로 주절주절 이었습니다.

동지들 1월9일 용산에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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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죽어갑니다.[프레시안 펌]

[2009년, 잊을 수 없는 사람들·⑤·끝] 죽어가는 청소년, 스러진 꿈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이제 헌 달력을 버릴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쁜 기억은 씻어내고 좋은 기억만 남기리라 결심하곤 합니다.

올해가 유난스러웠던 걸까요.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아니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두리라고 다짐하게 하는 기억들이 참 많습니다. 용산 참사, 전직 대통령의 잇따른 서거,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 등이 그렇습니다. 새로운 달력을 걸어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2009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전교 2등 정도 하는 아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친구도 많고 선생님도 좋아했다. 그런데 걔 부모님이 공부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했다고 하더라. 전과목에서 다섯 개를 틀려도 칭찬이 아니라 '왜 이 문제를 틀렸냐'며 혼내고.

일기장에 '아빠가 너무 싫다'며 온갖 욕을 써놓은 걸 걔 친구가 우연히 보고 엄청 놀랐다고 했다. 결국 1학기 기말고사 이틀 전, 아파트에서 떨어졌다. 죽기 전에 공부 잘해서 경쟁하던 자기 친구들한테 문자로 '뭐해?'라고 물어봤다던데…."

"우리 학교가 워낙 많이 애들을 때리는데, 그 애 담임이 여자인데도 가장 지독했다. 수업 시간에 딴짓한다고 학생 얼굴에 펜으로 낙서를 하기도 하고, 애가 우는데도….

걔도 선생님이 싫어서 전학 아니면 자퇴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안 들어주니까, 다리가 부러지면 학교에 안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심하게 다쳐서 결국 죽었다."


2009년, 한국을 흔든 사건 중에는 유난히 '죽음'이 많았다. 많은 이들은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간 이들을 애도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죽음은 이미 무수히 많았다. 바로 매년 자살하는 청소년들이다.

매년 채 피지도 못한 채 내던져진 수많은 '꿈'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자살은 청소년 사망 원인 중 2위를 차지할 만큼, 이들에게 가까운 문제다. 올해도 학생들의 자살은 하루가 머다하고 이어졌다.

친구가 자살한 경험을 가진 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2009년 한국 청소년의 현실을 되짚어봤다.

수원, 18세, 여자, 고등학생 "고3? 오히려 기뻐요"

"작년 학교 자율화 조치 뒤에 사설모의고사가 확 풀렸다(제한 지침이 없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 많을 땐 두 번씩 모의고사를 본다. 원래도 몰래 보긴 했지만….

4월엔 정말 심했다. 논술고사, 영어듣기, 중간고사까지 겹쳐서 그냥 매일 시험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2학기 때 다행이었던 건 신종플루로 휴교하는 날이 모의고사와 겹쳐서 안 봤다."


이은지(가명) 학생은 수원 A고등학교 2학년이다. 첫눈에 보기에도 밝아 보이는 이은지 학생은 "그나마 자신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끝없이 공부를 시키는 학교는 밝은 성격의 그의 숨까지 턱 막히게 한다.

오는 12월 31일은 이 학교의 방학식이 있는 날이다. 그렇지만 쉬는 날은 딱 사흘 뿐. 연휴가 끝난 내년 1월 4일부터 A고등학교 전교생은 보충 수업을 받으러 방학 내내 학교에 나가야 한다. 그나마 여름방학 때는 2주 정도 쉬었는데, 이번 방학은 신종플루 때문에 못 다한 2학기 보충 수업을 채워야 한다며 선생님들이 쉬는 날을 없앴다.

"원래 1, 2학년은 방학 때 야자(야간 자율 학습)까지는 안 시켰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무조건 9시까지 야자를 하라며 (선택란에) 동그라미를 쳐야 했다. 빼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완전 힘들다."

A고교는 올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사교육비 절반 공약을 실천하겠다며 야심차게 전개한 '사교육 없는 학교'로 지정됐다. 학교에서는 수능 과목 위주로 보충 수업을 대폭 늘렸다. 그러나 이은지 학생은 "하나도 효과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나 같은 경우엔 학원을 다니면 오히려 성적이 떨어지는 편이다. 혼자 하면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학교에 나와서 맛없는 밥(급식) 먹고, 선생님들에게 욕먹어가면서 보충을 들어야 하는지…."

친구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사교육 없는 학교' 프로그램 실시 이후 다니는 학원 갯수가 줄었는지 여부를 수시로 조사했다. 그러나 고3이 다가오면서 학원 갯수가 늘면 늘었지 학원을 완전히 끊거나 줄인 학생은 없다고 했다. 이 학생은 "솔직히 어차피 강제니까 듣기 싫은 과목도 인원수 맞추려 억지로 들어야 한다"며 "다들 수업에 들어가도 자거나 딴짓하지 누가 열심히 듣나"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은지 학생은 이제 입시 경쟁의 최전선인 '고3'이 된다. 그는 "슬프기도 하지만 330일만 있으면 이 생활이 끝난다는 해방감 때문에 기쁘다"고 말했다. 2010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조건 0교시'와 매일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자다.


서울, 18세, 남자, 고등학생 "학교? 그냥 맞으러 가죠"

"교문 앞에서부터 맞기 시작하는 거다. 선생님 네 명이 지키고 서서 복장 검사를 한다. 단추 하나 풀려 있어도 맞고, 추워서 교복 위에 다른 옷을 껴입어도 맞는다."

김민석(가명) 학생은 서울 B고등학교 2학년생이다. 남자고등학교이자 사립학교인 이 학교는 인근 지역에서 대학 잘 보내기로 소문난 이른바 '명문고'다. 그러나 이 학교가 이름을 날리는 또 다른 분야가 있다. 바로 상식 밖의 생활 지도와 가혹한 체벌이다.

김민석 학생과 그의 친구 박진수(가명) 학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겪은 '체벌담'을 끝없이 털어놓았다.

"복도에서 머리카락이 길다고 걸렸다. 잘랐다고 말하니까 그때부터 말대답 한다면서 따귀를 때리고 발로 찼다. 결국 데려가서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한 달에 한 번씩 두발 검사를 하는데, 머리를 각목으로 맞아서 피가 난 애도 있다."

"비가 많이 온 날 어쩔 수 없이 신발을 신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선생님을 만났는데, 흙이 다 묻은 젖은 신발로 머리를 계속 때리더니 결국 신발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5층이었는데…. 비오는 날에 신발 찾아다니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이 학교의 과도한 체벌 문제는 간간히 언론에서 기사화됐다. 김 학생과 박 학생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교육청에 진정이 들어간 적도 수차례였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됐다. '체벌 4인방'으로 꼽히는 교사 중 한 명은 몇 번이나 고발을 당했다고 소문이 났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학생 사이에서는 '신고해도 안 된다'는 패배감이 커졌다.

김민석 학생은 "남자애들은 사실 맞고 상처가 나도 부모에게 잘 말하지 않는다"며 "지난번에 60대를 맞은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목욕탕에 같이 갔다가 시퍼렇게 멍이 든 걸 본 다음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또 체벌 사실을 안다고 해도 '좋은 대학 보내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아 학교 문화를 바꾸기가 어렵다고 했다.

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자퇴나 전학을 선택하는 친구도 많았다. 김 학생 역시 전학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2년이나 버텼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계속 다니겠다고 결정했다.

고3이 되는 2010년 역시 학교는 지금과 똑같을 확률이 99.9%이다. 그는 "하도 맞으니까, 이제 안 무섭다. 학교에 그냥 맞으러 간다"고 말했다.

"선생님들이 죽은 애 보고 '그런 XX랑 놀지 말라'더라"

이은지 학생과 김민석 학생에게는 공통된 경험이 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 재학 중이던 친구가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은지 학생의 친구가 자살을 한 것은 3년 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던 옆반 친구였다. 처음에 인터넷 메신저로 소문이 돌았을 땐 장난이려니 했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 전체가 웅성거렸고 곧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많이 친한 애는 아니었지만 착하고 재미있고 공부도 잘 해서 학교 생활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부모님의 압박이 심했다. 일기장에 부모님에 대한 욕을 써놓았던 게 죽기 1년 전이었고, 그것 말고는 자살 이유가 없었다. 나름대로 활기차게 놀 시기인데 공부만 시키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싫었다고 하더라."

친구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던 이 학생과 친구들은 이후 선생님들의 대응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학교에서 매우 쉬쉬하는 분위기였다"며 "기자들에게 절대 인터뷰해주지 말라고, 하면 혼날거라고 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김민석 학생의 학교에서 친구가 죽은 때는 지난 6월 경이었다. 끝없는 교사들의 체벌에 시달리던 같은 학년 다른 반의 친구는 5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다리를 다치게 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목숨을 잃었다.

김 학생 역시 친구의 자살을 대하는 학교의 태도를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면서 '이 정도도 못 버티는 그런 XX랑 놀지 말라'는 식으로 훈계를 했다"며 "아무리 그래도 죽은 앤데, 그러면 안 되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슬픈 통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소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0∼19세의 자살자 수는 317명으로 하루에 한 명 가량의 청소년이 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248명이었던 청소년 자살자 숫자는 △2005년 279명 △2006년 232명 △2007년 309명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자살을 생각하는 청소년은 훨씬 많다. 보건복지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2007년에 한번이라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답한 청소년은 응답자 중 23.7퍼센트(%)였다. 한국사회조사연구소 역시 2008년에 "학원에서 새벽 1시에 들어온 아이들 47.6퍼센트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청소년의 정신 건강 상태는 이 같은 높은 자살률을 일정 정도 설명해준다. 통계청 설문조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변한 청소년은 전체 응답자의 46.5퍼센트였다. 중학교 1학년은 41.7퍼센트, 고등학교 3학년은 54.2퍼센트로 학년이 높아질수록 스트레스를 받는 비율이 높아졌으며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10퍼센트 이상 높게 나타났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4∼8월 전국 470개 초·중·고교생(초등학교는 1·4학년, 중·고교는 1학년) 12만61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가운데 2만1497명(17.5퍼센트)이 우울·불안·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의 문제로 정밀검진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신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2007년 서울시 청소년 상담지원센터 조사에서 청소년들은 스트레스 요인의 1위로 시험성적에 대한 부담감(74.8퍼센트)을 꼽았다.

최근 15명의 청소년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책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동녘 펴냄)를 쓴 김순천 작가는 "청소년 관련 자료를 찾다 보면 밝고 희망찬 통계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며 이를 두고 "슬픈 통계"라고 표현했다.

"꿈? 이러다가 없어질 것 같아 무섭다"

▲ 지난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1년을 맞아 열린 집회에서 청소년들은 자살로 죽어간 친구들을 추모하는 작은 분향소를 설치했다. ⓒ프레시안
친구의 자살을 겪고 난 뒤 이은지 학생은 새삼 그와 그의 친구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주변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게 미안했다. 그 친구가 죽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그런 애들이 굉장히 많더라. 사람이 죽는 교육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 받은 충격은 지난해 발표된 학교 자율화 조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이은지 학생은 청소년인권단체 수원지부를 만들어 활동했고, 올해는 경기도교육청에서 만드는 학생인권조례에 의견을 냈다.

이제 19살이 되는 이은지 학생. 그는 자신의 십대를 돌이켜보면 "너무 억울하고, 황당하다"고 했다. 10년을 통틀어 남은 기억이란 오직 '공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도 않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매일 공부만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떨어도 공부 얘기만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가끔은 장관을 찾아가 '내 인생 물어내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어른들, 심지어 친구들도 '네가 너무 순진하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우선 공부를 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어차피 좋은 대학에 가도 경쟁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 똑같은데? 안 그런가."


이은지 학생이 어렸을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특히 국사는 그가 꾸준히 관심이 있는 분야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입시 학원 이외에 다른 학원은 포기해야 했다. 선생님들은 "서울대 갈 애들만 국사를 선택하라"고 했다.

이은지 학생은 "대학에 가서도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는데, 하고 싶었던 공부는 대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입시 걱정이 없다고 하면 십대야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라며 "자꾸 미뤄지니까 나중에는 정말 꿈이 없어질 것 같아서 무섭다"고 말했다.

한편, 김민석 학생과 박진수 학생이 지금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하루빨리 '재수 없으면 두드려 맞는 교도소 같은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다.

"우리 애들만은…"

이들이 바라본 한국 교육의 미래는 어떨까? 이들은 "분명한 것은 내 아이가 이런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지 학생은 "한국 교육이 바뀌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사실 어머니와 얘기를 해보면, 어머니도 어렸을 때 나처럼 '내 자식은 이런 교육을 안 받겠지' 생각했는데 달라진 게 없었다고 하더라"며 "그렇지만 내 후배나 내가 낳는 자식들은 절대 이런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민석 학생은 "제 과외 선생님도 우리 고등학교를 나왔다"며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고, 결국 한번은 너무 화가 나서 체벌한 선생님의 차를 긁어버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아들을 낳으면 절대 우리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자신이 받는 교육이 대물림되지 않길 바라는 학생들, 우리는 이들에게서 그나마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009년 한국의 슬픈 아이러니다.

한해동안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간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2009년 한국 교육 제도, 무엇이 변했나

2009년 한국 교육계는 유독 눈코 뜰새 없이 분주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친서민' 이미지를 부쩍 강화하면서 교육 정책을 대대적으로 손을 댔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사교육비와 등록금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실천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한 해동안 나온 결과는 정반대다. 서울에서는 국제중학교가 문을 열고 고교선택제를 도입했으며(이 정책을 펼친 공정택 교육감은 결국 지난 10월 선거법 위반 유죄가 최종 확정돼 교육감직에서 물러났다), 전국적으로는 자율형사립고 20개가 지정돼 중·고등학교 입시 시장을 넓혔다.

대학 입시 제도에서는 입학사정관제가 대대적으로 도입됐다. 사교육을 줄이겠다며 도입한 이 제도는 오히려 '대입컨설팅'이라는 새로운 사교육 시장을 형성했다. 정부는 심야 학원 교습 제한과 학원비 산정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대입컨설팅은 이런 통제를 벗어나 고액 사교육으로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최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든 2010년 교육 예산안을 발표하는 한편, 교원 수를 동결하기로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고 수준을 기록하는 교사1인당 학생수는 '저출산' 현상 때문에 알아서 줄어든다는 논리다.

대신 정부는 비정규직인 기간제 교원 활성화를 위해 각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의 반일 또는 격일제 근무형태를 늘리고, 강사료를 예산의 범위내에서 자율적으로 책정·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가을에는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나서면서 외국어고 개혁 문제로 뜨거운 논쟁이 일었다. 당시 여론은 초·중학생 사교육비를 높이는 '주범'으로 꼽힌 외고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다. 그러나 이를 수습하겠다면서 교과부가 최근 내놓은 방안은 결국 외고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지난 4월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되면서 시국선언 교사들의 징계를 유보하고, 단계적인 무상급식을 방안을 제시하는 등 지역 단위 교육청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김 교육감은 현재 교육과학기술부의 고발, 경기도의회의 잇따른 예산안 부결로 발목을 잡혀 있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발표한 학생인권조례 초안은 그나마 학생들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방안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두발과 복장의 자유, 야자 선택의 자유, 체벌 금지 등 학생들이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 이슈가 담겼다. 그러나 보수 언론은 이를 '정치적인 술수'로 몰아가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경기도의회에서의 조례안 통과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강이현 기자 ( sealovei@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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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서 12월31일 좋은 행사가 있네요.

 

 

이놈의 나라가 도데체 어찌된 나라인지 당췌 모르겠습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일년이 다 되가는데 아직 장례도 못치르고 냉동실에 계시는 열사분들과 또한 칼바람 추위속에서 천막생활을 하시는 유가족들을 볼 때마다 운동한답시고 깝죽대고 돌아가니고 있는 제가 참으로 한심합니다.

어찌됐던 가서 몸빵이라도 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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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용산불법음악회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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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범대위 박래군 위원장, NCCK인권상 수상

 
용산참사범대위 박래군 위원장, NCCK 인권상 수상
 

박래군 위원장, NCCK 인권상 수상    

2009년 12월 12일 (토) 12:53:49 최유라 수습기자  77paper@newscj.com  


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상에 박래군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하 위원장)이 선정됐다.

세계인권의 날을 맞아 10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2009년 제23회 인권상 시상식’에서 현재 수배 중인 박래군 위원장을 대신해 홍성만 대변인이 인권상을 받았다.

박 위원장은 용산참사 관련 불법집회를 개최한 혐의로 활동에 제약이 가해져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홍성만 대변인은 미리 받은 박래군 위원장의 수상 소감문을 대신 낭독했다.

박 위원장은 인권참사가 발생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고 개탄하면서 “수배생활 후에 감옥으로 가더라도 용산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인권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상은 지금도 묵묵히 인권을 지키는 이들과 함께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더 이상 인권운동이 필요 없는 날이 올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최 측은 박 위원장에게 인권상을 수여하는 이유를 “용산참사 희생자들에게 가해진 국가 권력에 저항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인권옹호에 직접 헌신했고,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인권문제에 위기가 왔음을 지속적으로 알려낸 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박래군 위원장은 지난 7일 올해의 NCCK 인권상 수상자에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이 글의 출처  :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8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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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박래군님의 안해가 석방 탄원을 위해 쓰신 글을 여기 옮겨봅니다.
2009년, 박래군님의 가족은 다시금 그의 수배가 풀리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출처 : www.gyuhang.net
2006/04/10 15:06
다시, 박래군

김규항 글

박래군과 통화하다가 길어져 "내일 다시 통화하자"고 했더니 “대추리에 들어와 있는데 내일 아침엔 크게 싸울 것 같아 통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몸조심해”하고 끊었는데 다음날 그는 연행되었고 결국 구속되었다.

박래군 아내가 쓴 탄원서. 그 동안 뭘 쫌 써보려 몇차례 시도했지만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글.


탄원서

판사님. 이 사건의 판결을 맡으신 용 판사 님께서는 판사 님의 가치관이나 삶과 퍽 다르게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일지라도 가슴에 담아 읽으실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길 바라면서 탄원서를 씁니다.

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인권활동가 박래군의 아내입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딸을 키우는 평범한 엄마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과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한마음으로 더불어 한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저희 남편은 평생을 낮은 곳에서 인권을 일궈내고 정의와 진실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 왔습니다.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외치다 억울한 옥살이를 1년이나 했고, 부모님도 모르는 사이에 군대에 강제 징집을 당했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 항거했던 동생의 시커멓게 탄 몸뚱이를, 꺼져가는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숱한 슬픔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 고난의 길을 피해 따뜻한 안식처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내가 편안하고 배부르게 살 때, 내 곁에서 힘들게 고통받고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는 착하고 올곧은 심성의 소유자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어릴 적 아주 가난하게 살았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이 머슴살이로 시작해 농토를 일구어 삼형제를 가르쳐야 했던 집안이었으니까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점심시간이면 집까지 뛰어와 끼니를 때우고, 등잔불도 아끼시는 할머니 때문에 밤에는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도 읽을 수 없었답니다.

악착같이 농사일을 하셨던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과일이며 채소를 장에 내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는 뻥튀기 구르마를 끌고 다니며 장 바닥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삼형제는 너무도 착해 학교에서 돌아와 밤늦도록 농사일을 돕고 그 추운 겨울에도 뻥튀기 구르마를 따라나서 하루 종일 시커먼 연기를 뒤집어쓰고 부모님을 도왔답니다.

가슴 절절한 시를 많이 썼던 동생이 남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자갈논 한 자리나마 가지고 싶다
밤낮없이 새경을 모으고
살 에이는 겨울길
뻥튀기 구르마를 끌던 아버지
국민학교 6학년 어린 나이로
구르마 쫓아다니던
큰 형님이 가여워
밤마다 베갯잎을 적시던 엄니
양회포 한 포대 얻자고
이장한테 삿대질하다가
퍼렇게 멍든 아버지 얼굴 보고
여보
우리도 한 번 보란듯이 삽시다
울며울며
자식새끼들 끌어안으시던
엄니

시에 나오는, 등골이 휘도록 힘들게 살아온 부모님을, 부모님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남편은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잊지 않았습니다.

연세대 국문과를 나온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귀를 막고 쳐다보지 않고 살았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처럼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남편은 인권의 불모지인 이 땅에 인권의 싹을 심고 키웠습니다. 장애인, 이주 노동자, 성적 소수자, 노숙자, 양심수, 구속 수감자, 복지 시설 수용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당하고, 멸시받고, 차별받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찾고 고민하고, 그들이 일어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갔습니다.

반인권과 부패로 얼룩진 사회복지설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을 정상화하기 위한 싸움에선 비리재단 측에서 퍼부은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말 못하는 이들의 귀와 입이 되어 주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고문후유증을 앓던 선배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했고, 폭력적인 수용 시설에 억울하게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았던 수용자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수용 시설에서 나왔던 한 사람은 10년이나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는 고아여서 가족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의 형제나 되는 듯 그 사람이 이사를 하면 이삿짐을 손수 날라 주고,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교도소에 있는데 얼마 전 석방 날짜가 연기된 줄도 모르고 사무실 총회를 밤 새워 하고 새벽에 춘천까지 차를 몰아 그를 맞이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가는 길엔 왜 이렇게 슬픔과 어려움과 시련이 많을까요.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 가진 자들과의 싸움, 폭력과의 싸움, 권력과의 싸움, 불의와의 싸움, 편견과의 싸움... 끝도 없는 싸움이 계속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늘 씩씩하게 웃고 다닙니다.

우울하거나 비관하는 법이 없고, 좌절하지도 않고, 고난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갑니다.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들어 주었던 그의 곁엔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남편은 바깥 일로 늘 바쁘게 살지만 가정에도 충실한 책임감 있는 가장입니다.

아내를 존중하고 아낄 줄 아는 남편이고, 아이들로부터는 정신적 지주란 믿음을 얻고 있는 아빠입니다.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원고를 쓰거나 이런저런 일을 하여 가정의 경제도 책임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무책임하게 돌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는 시간이라도 쪼개어 가족들을 보살핍니다.

넓적하고 그을린 투박한 얼굴과는 달리 집에서는 아주 섬세하게 가족을 챙깁니다.

아이들이 엄마인 저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이해해 주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이들과 놀아 주고, 아빠는 좋은 분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희 옆집 아주머니는 저희 집 아이들은 엄마가 오면 엄마하고 큰 소리로 나와 부르지 않는데 아빠가 오면 맨발로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아빠를 반기며 안긴다고 애들이 아빠를 참 좋아한다고, 무슨 아빠가 애들을 그렇게 이뻐하냐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저희 남편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빠로서 뿐만 아니라 지금도 경기도 화성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늙으신 부모님에겐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여느 농민처럼 당신의 목숨처럼 땅을 아끼시며 한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분이십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 고관절을 앓으시고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되셔서 목발을 짚고 다니시지만 농사일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서 있을 수도 쪼그려 앉을 수도 없으셔서 땅바닥을 기어다니시고 스티로폼으로 만든 방석을 끌고 다니면서도 밭일을 하십니다.

다들 왜 그렇게 사시냐면서 농사일을 그만두시라고 만류하지만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시겠답니다.

만류하는 가족도 있지만 저희 남편은 아버님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것을 존중해 드리고, 아버님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습니다.

토요일도 나가 일하고 돌아와 일요일엔 쉬어야 하는데 달려갑니다. 땅을 갈아 곡식과 채소를 심을 수 있게 해 드리고, 두둑을 만들고, 고추 말뚝을 박고, 거름을 져 나르고, 농약을 주고, 포도를 따고, 포도를 갖다 팔고, 고추를 따고 고구마를 캐고, 깨를 털고, 농기계를 수리하고... 쓰려면 다 쓸 수도 없는 고된 농사일을 불평 없이 하고 돌아옵니다.

막내아들을 그렇게 먼저 보낸 부모님이 찢긴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롭게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어서일 것입니다.

한평생 좋은 일도 없이 자식을 다 떠나보내고 병든 몸으로 외롭게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차마 남편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실까, 참 걱정이 많이 됩니다.

아빠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몹시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아빠 같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왜 구속시키는지 모르겠다며 엄마와 아빠 모두 힘내시라고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판사 님께 비굴하게 빌지 말고 당당하게 부모님의 뜻을 말씀 드리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그와 수많은 인권활동가들의 행동은 이 땅의 소외된 자들의 인간다운 삶, 자유롭고 평등하고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는, 존엄한 삶을 위한 고귀한 실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인권활동가의 노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도 만들어진 것이고 국민들도 인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권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경찰 대학에 가서 인권 교육을 하고 법조인이 인권 교육을 받기도 하는 세상이니 인권의 싹이 크긴 큰 모양입니다.

그러나 인권은 아직 커다란 나무로 자라지 못했고 숲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권활동가가 구속되고, 평생 살아온 땅에서 옷이 벗겨진 채 처참하게 끌려가는 농민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는 진실의 편에 서 있었고 그의 외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지금 구속되어 철창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 또한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외면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땅을 미군에게 내어 주어 전쟁터로 만들고 싶지 않으며 평생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음은 당연한 마음이고 지키려는 싸움은 정당한 싸움입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 추진 중 일어난 충돌은 주민과 국민의 충분한 협의와 동의 과정 없이 일부는 돈으로 회유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땅은 강제로 빼앗으려 는 일련의 과정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공무집행방해라는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땅의 평화이고 농민들의 생존권입니다. 농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땅을 강제로 파헤치는 일을 공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했다면 그렇게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공무를 방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악이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몸부림 끝에 뒤바뀌었는지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전쟁기지로 내어 주고 농민을 내쫓은 일도 부끄러운 역사가 되리라는 것을,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용기 있게 지켜내려 했던 실천이 옳았음을 재판 과정에서 밝힐 것입니다.

제가 길게 저희 남편의 어린시절이며 살아온 이야기를 한 것은 저희 남편은 비겁하게 도주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을 성실하게 받고 진실을 밝히려 애쓸 사람이라는 것을 판사님께서 알아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구속이 필요하다고 상당히 의심된다는 ‘공무집행방해죄’는 검사 님의 소견일 뿐입니다.

이렇게 충돌되는 사안은 양쪽의 주장을 공평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쪽의 주장을 듣고 재판을 통해 진실을 가리면 됩니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불구속 수사와 재판으로도 얼마든지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고 상당히 의심되지도 않거니와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는 인권활동가를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합니다.

현 정부는 형사소송절차에서 피의자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집행해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에 따라 공개적으로 활동해 온 저희 남편은 왜 구속되어야 하나요?

아빠의 구속을 아이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판사 님, 부디 불구속수사 원칙이라도 지켜진 속에서 남편이 진실의 법정에 설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판사 님, 아이들 아빠를 풀어 주십시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게, 그가 이 세상 그늘진 곳에서 햇볕을 드리우는 소중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박래군 아내 정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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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에게 우측통행은 죽음의 통행 [메디컬투데이 펌]

 




 

 
 
"지하철을 타면 살아서 돌아가는 게 감사하다…. 발 한 자국만 더 디뎠으면 레일 밖으로 떨어질 뻔 했다"

지하철역 내 우측통행이 시행됐지만 시각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이뤄지지 않아 시각장애인은 사고 위험에 그대로 노출 돼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국토해양부는 '우측통행'를 대대적으로 시행했지만 '에스컬레이터'의 바뀐 방향에 대한 시각장애인 대책 마련에는 팔짱만 끼고 있다.

시각장애인 나사렛대학교 음악목회학과 이상재 교수는 "얼마 전 동대문운동장역 안전유도블록을 따라 걷다 역 레일 밖으로 떨어질 뻔 했다"며 "우측통행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 지하철 통행은 더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방향이 바뀐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아닌 에스컬레이터도 있어 이젠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불안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시각 장애인들은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잡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 방향이 바뀌면 지팡이를 왼손으로 옮겨 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잃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또한 대안으로 이용하라는 엘리베이터는 찾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버튼을 찾는데서부터 몇 층에 내려야 하는지 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부족한 실정이다.

위치도 역사마다 달라 엘리베이터는 에스컬레이터보다 못하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정부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점자 안내 블록도 인식을 하기엔 점이 작아 실효성이 크지 않다.

점자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은 사람마다 다른데 경우의 수를 따져보지 않고 작은 점자를 만든 것이 문제다.

특히 에스컬레이터 운행은 아직 전부 우측통행으로 바뀌지 않아 뒤죽박죽이며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실제로 1~4호선에 설치돼 있는 52대는 운행 방향을 바꾸기 힘든 구형이라 지금도 좌측통행을 유지하고 있다.

5~8호선 27대는 교체 계획이 잡혀 있지도 않다.

27대는 까치산역 4대, 여의나루역 2대, 왕십리역 4대, 불광역 4대, 노원역 2대, 고속터미널역 3대, 대림역 4대, 남구로역 4대 등으로 각각 혼잡한 역으로 정상인은 우측통행 여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은 습관적으로 우측통행을 해 사고 위험에 노출 돼 있다.

교체 예정이 없는 27대의 에스컬레이터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표시도 없다.
실제로 본지 기자가 11일 3호선 고속터미널 역사에 가본 결과 에스컬레이터는 여전히 좌측통행 중이었다.

시각장애인이 우측통행으로 착각하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를 때 밑으로 내려오는 사람과 접촉 사고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음성 안내나 기타 표시는 마련돼있지 않았으며 복잡한 역사 안에 안내원 또한 부재했다.

이에 대해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은종근 팀장은 "장애인을 위한 안내인은 역내 1명 이하며 점검을 해본다고 말한지 두 달 째인데 국토해양부와 지하철 운영측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신용호 소장은 "지하철의 우측보행은 장애인의 보행권과 이동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시범 사업이다"고 꼬집으며 "장애인에게 통행 방향이 바뀌는 일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인만큼 공청회 등의 절차를 통해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야 했지만 국토해양부는 그러한 배려를 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서울 메트로와 국토해양부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 메트로 김정환 차장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책은 '양날의 검' 같은 것이다"며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 만큼 시민에게 그 부담을 전가할 소지가 있다"고 답했다.

국토해양부 교통안전과 신재영 사무관은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엘리베이터로 많이 간다"며 "최대한 안내원을 배치 하려 노력 중이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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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명언록 (퍼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관련 망언록

올해 가장 많은 망언을 배출한 분야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이다.

극우 보수의 선봉장 조갑제가 "신문 기사에서 '서거'가 아닌 '자살'로 고쳐 써야 한다"며 망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지만원은 "패가망신의 도피처로 자살을 택한 사람이 왜 존경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라며 응수했다.

여기에 김동길이 "노무현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이며 이 비극의 책임은 노씨 자신에게 있다"며 극우보수 원로 3인방의 망언록을 완성시켰다.  

한편 광명시청에 마련된 분향소를 “치워라”라고 하여 물의를 빚었던 이효선 광명시장은 다시 "아이들이 자살한 사람한테 뭘 배우겠냐?"며 아이들 듣기에 지극히 비교육적인 발언을 내뱉어, 내년에 치러질 지방선거에 ‘자살골’을 넣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또한 송대성 세종연구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 늘어선 추모 시민들을 행렬을 두고 "제 애미, 애비가 죽어도 그렇게 하겠느냐?"는 발언으로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도 항의를 받는 상황을 자초했다.

그러나 이 모든 망언들을 제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관련 최고의 망언을 남긴 이는 보수 진영의 뉴 페이스로 떠오른 변희재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국민 세금은 단 돈 1원도 투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듣보잡 조세론을 펼쳐 대중들의 주목을 이끌어 냈다.

변희재는 곧이어 "사회적 발언 하려면 최소한 1주일에 2-3권 이상의 사회과학서, 인문과학서인문과학서 책을 읽고, 매일 신문과 잡지의 글을 최소 3시간 이상 읽고, 정부 정책 등에 대한 보고서도 주마다 서너 편씩 읽어야 한다"는 독서 권장 발언으로 후속타를 날림으로써 보수우익 망언계의 세대교체가 도래했음을 패기있게 선언하였다.

 

 

국민을 깔보는 망언록 

 

높은 지위에 앉아 계신 분들이 국민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망언을 서슴치 않고 내뱉어 주셨다.

지난해 국회 욕설 발언으로 2008년 망언록 대상을 수상하신 유인촌 문광부 장관은 올해도 녹슬지 않는 내공을 발휘했다.

한예종 사태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학부모 앞에 홀연히 자전거를 타고 등장한 유인촌 장관은 "학부모를 왜 이렇게 세뇌시켰지?"라는 주어 없는 독백으로 2년 연속 망언록에 이름을 올려놨다.

비극적인 용산 참사를 두고도 충격적인 망언이 나왔다.

참담하게 희생된 분들을 겨냥해 한나라당 몇몇 의원들과 일부 보수 언론이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무개념 발언을 남발해 국민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한편 이승환 홈플러스 회장은 골목 슈퍼를 운영하는 중소상인들을 "맛없는 빵을 만드는 장애인"에 비유해 말 한 마디로 중소상인과 장애인의 비난을 동시에 이끌어내는 일타쌍피의 신공을 선보였다.

또한 중앙대 박범훈 총장은 한나라당 의원모임에 판소리 공연 시키려고 동원한 여제자를 가리켜 "감칠맛 있다"는 발언으로 총장 체면에 스스로 “먹칠”을 해주셨다.

 

 

자기 직책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망언록

 

 

어렵게 고위관직을 차지하신 분들이 자기 직책의 존립 이유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정체성 혼란형 망언을 내뱉어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일도 많았다.

박기성 노동연구원장은 “헌법에서 노동3권 빼야한다”며 제 밥그릇 깨뜨리는 발언을 하더니, 급기야 노동연구원 직원들의 파업과 직장 폐쇄라는 초유의 사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도 정체성 부정에 일가견을 보였다.

스스로 인권 비전문가임을 인정하고 ICC차기 의장국 후보를 철회함으로써 왜 그 자리에 앉았는지 의구심을 자아내더니, MBC 수사 관련 회의에서는 자신이 결제한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는 자폭 신공을 발휘했다.

법을 집행하는 권력기관 수장들도 정체성 혼란 발언이 많았다.

강희락 경찰청장은 "나도 기자들 모텔 많이 보내봤다"는 발언으로 스스로 성매매 알선이라는 불법을 자행했음을 자수했다.

검찰도 정체성 혼란에 가세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기자들에게 촌지 돌리기 이벤트로 물의를 빚자, 검찰 대변인은 "공개석상에서 추첨한 것은 촌지 아니다"는 발표로 많은 범죄자들에게 앞으로 공개석상에서 저지를 범죄는 검찰이 기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몰역사, 몰상식 망언록

 

 

너무나도 기초적인 상식조차 가뿐히 초월한 몰역사, 몰상식 망언들도 여럿 있었다.

가장 압권은 정운찬 국무총리였다.

서울대 총장까지 역임한 분이 국회 대정부 질의 석상에서 "731 부대는 항일 독립군"이라는 새로운 역사 해석으로 온 국민을 경악시켰다.

이에 유인촌 장관은 멀리 중국까지 날아가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 표현해 정운찬 총리에게 쏟아지는 국민적 비판을 고통분담 하는 눈물겨운 동지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한편 한나라당 이사철 의원은 “아름다운 가게는 반정부 단체”라고 규정하는 발언으로 반정부 운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확대시키려는 혼신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가카의 망언록

 

 

이 모든 다양한 망언들에도 불구하고 올 한해 망언록의 압권은 역시 이명박 가카이시다.

올해 초 명텐도 발언을 기점으로 “4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등 입만 열면 주옥같은 화제성 망언들을 잇달아 쏟아내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단연 망언록 지존의 자리에 등극할 실적을 만들어 내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망언을 굳이 하나를 뽑아보면 바로 이 장면이다.

서민 행보를 과시하기 위해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한 가카. 어느 가게에 들어가 “요즘 장사가 어렵다”는 상인의 하소연을 가볍게 씹으며 진열대로 돌진하면서 한 말씀을 남기셨으니,

 

"야~ 이것 좀 사먹어라. 야~ 뻥튀기."

 

어떤가?

자신의 서민 행보가 다 “뻥”이었음을 은유적으로 몸소 고백하신 가카의 양심적 면모가 돋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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