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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파괴-타순혁명 : 소시아의 실험

  • 등록일
    2008/07/26 22:49
  • 수정일
    2010/09/13 12:39

 

야구는 매회 공격 때마다 9명의 타자가 돌아가며 타석에 서는 경기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감독의 여러 역할 중 하나는 바로 이 타순을 짜는 일이다. 9명의 타자를 모두 최고 수준의 선수로 짜 넣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타순배치는 승리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9명의 선발타순에 리그에서 해당 포지션을 대표하는 수위선수를 배치한다고 해도 반드시 이길 수 없는 경기가 바로 야구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야구경기에는 ‘타순’에 대한 일종의 불문율과 같은 원칙이 있다.
1번 타순에는 보통 출루율이 높고 발이 빠른 타자가 배치되며, 2번 타순에는 출루한 1번 타자가 득점권 루에 진루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뛰어난 타자가 자리 잡는 것이 전통적이다. 이같은 2번 타자의 능력의 실체와 역할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통상 번트 성공능력, 1루에 있는 주자가 2루에 안착할 가능성이 높게 하기 위한 밀어치는 능력(우타자의 경우), 히트앤드런 등의 작전이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망이에 맞히는 능력’ 등이 꼽힌다. 이렇게 팀이 득점을 올릴 수 있도록 루상에 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1-2번 배팅오더를 '밥상을 차린다'는 의미의 ‘테이블세터(Table Setter)’라고 한다.

 

[사진] 높은 장타율과 많은 홈런으로 '1번 타자'의 개념을 바꾸고 있는 클리브랜드 인디언스의 그래디 사이즈모어(왼쪽)와 통산 1,406개의 도루로 MLB 역대 최다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전통적인 1번형 타자'의 대명사 릭키 핸더슨(오른쪽)

 

현대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타자는 바로 3번이다. 득점타를 작렬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3번 타순에는 장타력이 뛰어나거나 안타생산능력이 높은 선수가 주로 서게 된다. 4번과 5번 역시 3번의 역할을 이어받을 수 있는 수준의 타자가 맡게 되며, 이렇게 형성된 3-4-5번의 배팅오더를 ‘클린업 트리오(Clean up Trio)’라고 부른다.

 

9번 타순의 경우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도록 돼있는 MLB의 National League와 일본프로야구의 Central League에서는 통상 투수 몫이다. 투수를 마지막 타순에 배치하는 이유는 (당연히도) 9번 타순이 타석에 들어서는 횟수가 적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6-7-8번 타순에는 나머지 세 명의 선수들의 성적에 따라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투수를 대신해 타격에만 나서는 지명타자 제도를 두고 있는 미국의 AL과 일본의 Pacific League, 한국프로야구 등에서는 6-7-8-9번 타순을 성적에 따라 배치한다.

 

[사진] 애경산업의 히트상품 트리오. 물론, 야구의 클린업 트리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같은 배팅오더 선정은 오랜 기간동안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오늘날 까지도 그렇다. 그런데 LA Angels의 마이크 소시아(Mike Scioscia) 감독은 이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 7월1일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12-345-6789 타순 시스템을 사용하던 소시아 감독은 7월2일부터 돌연 123-456-789 타순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즉 테이블세터진을 3명으로 확장하고, 클린업트리오를 4-5-6번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에인절스에서는 7월2일부터 출루율이 높은 피긴스(Figgins)와 카치맨(Kotchman), 이즈투리스(Izturis), 아이바(Aybar) 등을 각각 1-2-3번 타순에 배치했다. 이어 올 시즌 들어 3-4-5번 타순을 맡아오던 게레로(Guerrero)와 헌터(Hunter), 앤더슨(Anderson)으로 하여금 각각 4-5-6번 타순에 들어서도록 했다. 세명의 테이블세터로 북적거리는 이 방식은 과연 어느정도 성과를 내고 있을까.

 

[사진] 2000년부터 LA Angels의 감독을 맡고 있는 마이크 소시아(왼쪽). 이른바 '작은 야구'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인절스는 2008.7.26. 현재 63승39패로 AL 서부지구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위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격차는 무려 10.5게임에 이르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혹은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에인절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은 사실상 확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LA Angels as of 2008.7.26.


                       W-L(W%)        RS(RS/G)       X W-L

------------------------------------------------------------
Total                63-39(.618)      454(4.45)      55-47
Till 2008.7.1.       50-34(.595)      346(4.12)      43-41
From 2008.7.2.       13-5(.722)       108(6.0)       12-6

 

에인절스가 배팅오더의 변화를 가져온 7월2일을 기준으로 나눠보면, 이 새로운 시스템이 꽤 높은 효율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에인절스가 7월1일까지 50승34패를 거두며 기록한 .595의 승률은 절대로 나쁜 기록이 아니다. 하지만 팀의 득점과 실점을 기준으로 계산한 X W-L(기대 승패)는 43승41패로 실제 성적보다 크게 낮다. 기대승패로만 본다면 에인절스는 오클랜드(X W-L 48-35)에 이은 지구 2위에 불과하다.

 

기대승패가 실제승패보다 형편없다는 것은 통상 1점 차이의 승부에서 강점을 나타냈다는 것을 뜻하지만, 이를 다시 말하면 팀의 득점이 실점에 비해 크게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겨도 똥줄 타게 이긴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인절스는 1점차 승부가 무려 33차례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MLB 소속 30개 팀 중 가장 많은 숫자다. 에인절스는 이중 20승을 챙겼다. 이는 에인절스의 마무리 투수인 프란체스코 로드리게스에게 더 많은 세이브 기회를 부여했을 것이며, 이 덕에 로드리게스는 46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43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다. MLB 구원투수 중 40번이 넘는 세이브 기회를 가진 선수는 로드리게스가 유일하다. 두 번째로 많은 세이브 기회(35번)를 얻은 볼티모어의 조지 세릴(George Sherrill)과의 격차도 무려 11게임에 이른다.

 

[사진] 2008.7.26. 현재 43개의 세이브를 기록하며 단일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바비 식펜, 57세이브, 1990년)갱신을 넘보고 있는 'K-Rod'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실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이런 대기록을 위해선 운도 따라야 한다. 득점력이 2% 모자라 늘 아슬아슬한 경기를 치뤄야하는 에인절스는 그에게 최고의 팀일게다.

 

하지만 배팅오더의 변화를 준 뒤인 7월2일 이후, 에인절스는 다른 팀으로 변신했다.
13승5패로 이전보다 훨씬 높은 승률(.722)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기당 득점도 4.12점에서 6.0점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기대승패(12-6)도 자연스레 본궤도에 오르며, 실제 승패 숫자와 비슷해지며 안정을 되찾았다. 이는 똑같이 ‘이기는 경기’라고 하더라도, 보다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불펜운영 등에 숨통이 트이며, 후반기 팀을 괴롭히는 불펜투수의 피로도 증가 등도 피해갈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특히 현대 야구에서 불펜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수를 낼 수 있을 때 쥐어 짜내는 이른바 '스몰볼(Small Ball)'을 구사하는 소시아 감독에게는 이것이 더없이 중요한 부분이다.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된 지 채 한달이 지나지 않아 표본이 부족한 면은 있지만, 지금까지만 본다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 소시아 감독의 이 실험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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