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굿바이, 매덕스

  • 등록일
    2008/12/10 10:20
  • 수정일
    2010/09/13 12:36

“고흐의 그림은 못 봤지만, 매덕스의 투구는 봤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본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야구팬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986년 20살 약관의 나이로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한 뒤, 42살 불혹의 나이까지 23년 동안 마운드를 호령하며 744번 등판해 통산 355승(역대 8위)과 3,371개의 삼진(역대 10위)을 뽑아냈던 그렉 매덕스(Gregory Alan Maddux)가 12월9일 공식 은퇴기자회견을 가졌다. ‘동시대 최고의 투수’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그의 은퇴로, 메이저리그는 ‘아트 피칭(Art Pitching)의 대명사’를 잃게 됐다. 더욱 슬픈 것은, 최근 메이저리그의 풍조를 볼 때 그와 같은 투수가 다시 배출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사진] 전성기였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시절의 매덕스 투구모습. 당시 애틀란타가 보유했던 매덕스-글레빈-스몰츠의 투수 3인방은 90년대를 통틀어 최강의 로테이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덕스는 23년의 현역시절 동안 데뷔 첫해와 지난해를 제외하고 21년 연속 100+ 탈삼진을 기록했다. 18년 동안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이닝 이터’였으며, 20년 동안 두자릿수 승수를 거르지 않았다. 1992년부터 4년 연속 사이영상을 휩쓸었으며, 90년 이후 2003년 한번을 제외한 18년 동안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는 당연히 그의 것이었다. 100개 미만의 공을 던지고 완투한 경기가 27회에 이른다.

 

[표] 매덕스의 통산기록. 현대야구에서 다시는 이런 기록표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록을 두고 보면 더 화려할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이력이지만, 사실 그라운드에서 볼 수 있는 매덕스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99-100마일의 광속구를 밥 먹듯이 뿌려대는 ‘파이어볼러’도 아니었고, 멋진 외모와 잘빠진 몸매를 자랑하는 ‘완소미남’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직구는 ‘매우 느린 쪽’에 가까웠다. 2008년 매덕스의 직구 평균구속은 83.7마일에 불과했다. 135Km에 불과한 그의 직구보다 더 느린공을 던지는 투수는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단 두 명밖에 없으며, 그 중 한명은 '느려야 제맛이 나는' 너클볼러다.  외모 역시 동네 아저씨나 ‘심슨’에 나오는 어떤 캐릭터를 닮은듯하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의 주무기가 바로 ‘직구’였다는 점이다.
보통 구속이 느린 투수의 경우 변화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반면, 매덕스는 직구(포심과 투심)로 승부했다. 바로 그 점이 매덕스의 롱런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팔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는 커브나 슬라이더보다, 직구계열의 공을 많이 던졌기 때문에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게다. 실제로 2005-2008년 사이 매덕스의 투구 중 직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68.1%에 이른다. 이 수치도 그나마 매덕스가 노화하며 체인지업의 비율(24%)을 끌어올린 결과다. 전성기 매덕스는 ‘직구 투수’라고 불러도 될 만큼 직구 하나로 타자를 요리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100마일짜리 공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리는 무시무시한 타자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 고작 80마일대 초반의 직구를 가지고.

 

[표] 매덕스의 2005-2008년 투구형태. 직구가 7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으며, 구속은 고작 84마일에 그친다.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매덕스는 자신의 투구 철학을 소개한 적이 있다.
‘위기의 순간에 다른 투수들은 더 빠르게 던지려고 노력하지만, 난 더 정확히 던지려고 노력한다’는 것과 ‘내가 가진 최고의 필살기는 바로 초구 스트라이크’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그의 투구철학은 기록에도 베어있다. 매덕스는 통산 3,371개의 삼진을 뽑아내며 이 부문 역대 10위에 올라있지만, 허용한 볼넷 개수는 고작 999개에 불과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300승+3,000 탈삼진’을 동시에 석권한 투수는 ‘강속구의 대명사’ 놀란 라이언을 비롯해 6명에 이르지만, 이들 중 1,000 볼넷 미만을 기록한 선수는 매덕스가 유일하다. 그렇다. 매덕스의 해법은 바로 ‘제구력’이었다.

 

매덕스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7년간 1,442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455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그의 제구력이 ‘신의 영역’에 이른건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로 이적한 1993년부터였다. 매덕스는 1993년부터 2008년까지 3,564이닝을 던지면서 단 544개의 볼넷만을 내줬다. 이중 100개가 고의사구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다시 보기 힘든 놀라운 제구력이다. 1993년을 기준으로 9이닝당 2.84개의 볼넷을 허용하던 투수가(사실 이도 훌륭한 수치지만), 9이닝당 단 1.37개의 볼넷을 허용하는 투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사진]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할 당시의 매덕스(왼쪽)과 은퇴를 앞둔 다저스에서의 매덕스(오른쪽). 느껴지는가, 세월의 힘.

 

전성기였던 1995년에는 181개의 삼진을 솎아내는 동안 단 23개의 볼넷만을 허용하며 K/BB(삼진대 볼넷 비율)이 무려 7.87에 이르렀으며, 두 해 뒤인 1997년에는 K/BB가 8.85(삼진 177개, 볼넷 20개)까지 치솟았다. 8.85의 K/BB는 역대 통산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역대통산 삼진 1위에 올라있는 놀란 라이언이 5,714개의 삼진을 뽑아내는 동안 무려 2,795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역대 볼넷허용’에서도 1위에 올라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져 넣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투수들은 스트라이크 존을 몇 등분해서 던질까. 야구게임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9개로 나눠 던질 것’이라고 답하겠지만, 현역 투수들 중 제구력이 좋기로 이름이 난 탐 글레빈은 “스트라이크 존을 6개의 과녁으로 나눠 던진다”고 답했다. 올해 올림픽에서 한국에 역전타를 허용한 일본 최고의 마무리투수 후지카와 큐지는 인터뷰에서 “2-3센티미터 차이로 스트라이크존을 오가며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면서 “그래도 공을 쳐낸 한국 타자가 잘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는데, 좀 과장이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리 제구력이 훌륭한 투수라고 해도 스트라이크존을 센티미터 단위로 오가며 던져넣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Lowest Percentage of Balls on 3-0 Counts, 2006-2007

  pitcher          NP     B_pct
----------------------------------
Danny Haren        56     0.179
Joe Blanton        69     0.217
Jeff Suppan        54     0.222
Jamie Moyer        76     0.224
Erik Bedard        63     0.238
Jake Peavy         52     0.250
Brandon Webb       67     0.254
Javier Vazquez     58     0.259
Tom Glavine        87     0.264
Jake Westbrook     52     0.269

 

위 표는 2006-2007 두해에 걸친 메이저리그 시즌 중에 쓰리볼 상황을 맞이한 투수가 볼을 던질 확률 중 상위 10걸을 나타낸 것이다. 표본오차를 줄이기 위해 ‘3-0’ 상황을 50회 이상 맞이했던 투수만 골라냈으며, 고의4구 상황은 배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3-0 상황은 ‘반드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 때이며, (대부분의 경우) 타자들도 가운데로 심각하게 공이 몰리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스트라이크를 던져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 상황에서 가장 좋은 제구력을 보여준 투수조차 열 번에 두 번은 스트라이크 투구에 실패했다. 이 부문 최하위인 제레미 라이트 투수는 59번의 ‘3-0’ 상황에서 던진 공 중 볼이 절반을 넘는다(0.508).

 

투수의 어깨는 분필과 같고 흐르는 세월은 막을 도리가 없기에, 선수의 등장과 은퇴는 당연히 자연스런 것일게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며 그의 전성기를 볼 수 있었던 투수의 퇴장은 안타까움과는 좀 다른 묘한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많은 투수들이 마운드를 호령하고 있고 ‘유망주’란 이름을 단 수많은 선수들이 도약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투수의 분업화가 본격화되고 ‘완투의 미덕’이 사라지고 있는 현대 야구에서 ‘300승-3,000탈삼진’ 투수를 다시 만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스터 매덕스, 투구가 왜 ‘Throwing'이 아닌 ’Pitching'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줬던 투수들의 진정한 ‘교수’, 당장 내년 시즌부터 그가 그리울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찾아보기

최근 글 목록

  1. '야구의 여신'과 루트케 소송
    약간느리게
    2011
  2. 야구 데이터의 진화(1)
    약간느리게
    2010
  3. 우리시대의 마구, 이퓨스(1)
    약간느리게
    2010
  4. 보직사임(2)
    약간느리게
    2010
  5. 백악관과 도둑맞은 퍼펙트게임(6)
    약간느리게
    2010

최근 트랙백 목록

  1. @nottora2님의 트윗
    @nottora2
    2010
  2. QS/W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