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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과 도둑맞은 퍼펙트게임

  • 등록일
    2010/06/04 14:11
  • 수정일
    2010/09/13 12:11

 

2010년 6월3일 미국 백악관.
로버트 깁스(Robert Gibbs)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을 위해 기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깁스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대통령-부통령의 주요 일정을 소개하고, 콜로라도 상원의원 민주당 내부경선과 관련해 백악관이 로마노프 주하원의장에게 출마포기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대한 해명에 나섰다. 기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이스라엘 긴장사태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재미있는 일은 브리핑 막바지에 튀어나왔다.

 

[사진] 백악관의 로버트 깁스 대변인. 개인적으로 머리숱이 적으면 일단 호감형으로 분류한다.

 

“저는 그 투수의 퍼펙트게임이 인정되길 기대합니다(I hope that baseball awards a perfect game to that pitcher)”
한 기자가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알려주자, 깁스 대변인은 “강력한 행정조치를 발동할 수도 있다”며 농담을 던진 뒤 “오심을 인정한 심판이 사과를 하고, 선수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야구는 물론 백악관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란 ‘정답’으로 브리핑을 마무리했다.

 

급기야 정치쟁점화(ㅎㅎ) 된 이번 사태의 개요는 이렇다.
2010년 6월 2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타이거즈의 투수 아만도 갈라라가(Armando Galarraga)는 9회 투아웃까지 단 한명의 주자도 허용하지 않은 ‘퍼펙트게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9회 2사까지 갈라라가의 투구수는 고작 83개로,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을 경우 갈라라가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21번째 ‘퍼펙트게임 투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클리블랜드 제이슨 도널드 타자는 2루 쪽 평범한 땅볼을 쳤고, 디트로이트 1루수 미겔 카브레라는 이 공을 잡아 베이스커버에 들어온 갈라라가에게 던졌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누가 봐도 여유 있게 아웃인 상황에서, 1루심 짐 조이스가 세이프를 선언해 버린 것. 세이프 판정이 나자, 투수 갈라라가와 1루수 미겔 카브레라, 디트로이트 감독 짐 릴랜드는 물론이고, 정작 안타 판정을 받은 클리블랜드의 도널드 선수까지 머리를 감싸 쥐며 황당해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진] 문제의 장면. 공은 이미 글러브 안에 들어가 있고, 주자의 발은 한 발이나 떨어져 있다. 조이스 심판은 정말 이 상황을 '아웃'으로 본 것일까. 태평양 건너에서 봐도 세이프인 것을...

 

[사진] '아 씨바 망했따...'  1루심의 세이프 판정 뒤 머리를 감싸안으며 안타까워 하는 디트로이트의 1루수 미겔 카브레라.

 

[사진] '내가 봐도 아웃인데...'  타자였던 도널드 역시 머리를 감싸 쥐며 당황할 만큼의 오심이었다.

 

경기 뒤 조이스 심판은 경기 비디오를 본 뒤 오심임을 인정했고, 갈라라가에게 사과했고, 갈라라가 역시 이 사과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나 기가 막힌 오심을 ‘작심’으로 해석한 많은 팬들은 조이스 감독에게는 물론 그 가족들에까지 항의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조이스 심판은 오심을 인정하는 눈물의 입장발표를 했다고 한다.

 

다음날인 6월3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짐 릴랜드 감독은 배팅오더 교환 때 감독이나 코치가 아닌 갈라라가 투수를 내보냈다. 공교롭게도 이날 배팅오더를 받는 주심은 전날 갈라라가의 퍼펙트게임을 앗아간 오심의 주인공 짐 조이스였다. 조이스는 오더 교환 내내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다가 결국 눈물을 내비치고 말았으나, 갈라라가는 오히려 그런 심판을 포옹하며 괜찮다고 위로했다.

 

[사진] 짐 조이스 심판은 결국 눈물을 내비쳤다. 아마도 2010년 6월2일의 오심은 평생토록 그의 심판 이력에 붙어 다닐듯 하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버드 셀릭 커미셔너는 '(조이스 심판이 오심임을 인정하더라도) 판정을 번복하진 않을 것'이란 취지의 입장을 발표했다. 대신 끊이지 않는 오심 논란과 관련해 비디오 판독을 통한 재심제도를 추진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현재 MLB는 홈런 판정에 한해서만 비디오 판독을 허용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갈라라가의 ‘역사상 21번째 퍼펙트게임’은 오심과 함께 날아갔다.

 

‘인간’인 심판의 오심과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는 논쟁 주제 중 하나다. 특히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넓어진 스트라이크존을 두고 감독-선수와 심판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미국 역시 올 들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굵직한 오심으로 홍역을 겪고 있긴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론 ‘비디오 판독’과 같은 요소가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럴 바에는 아예 심판을 없애고, 기계를 통해 판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흔해빠진 말을 더하지 않더라도, 야구가 보다 인간적인 경기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판정의 일관성’이란 철의 원칙이 지켜진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

 

[사진] 오심 다음날 배팅오더를 제출하러 나온 갈라라가 투수와 '오심의 주인공' 짐 조이스 심판. 한 명은 여유롭게, 다른 한 명은 불편해 보인다.

 

갈라라가는 오심 직후에도 ‘썩소’가 아닌 ‘미소’를 날리며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차분한 모습을 본 릴랜드 감독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갈라라가에게 맡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경기 이후 쇄도한 인터뷰에서도 날이 선 단어와 문장을 일체 뱉어내지 않았다. 경기 다음날인 3일에도 갈라라가의 눈빛에서는 원망이나 저주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극도로 불안해하는 심판에게 먼저 악수와 포옹을 청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야 말로 ‘대인배’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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