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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데이터의 진화

  • 등록일
    2010/09/08 17:16
  • 수정일
    2010/09/10 18:23


2009년 3월 7일 일본 도쿄돔.
 

‘일본 킬러’ 김광현 투수가 WBC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전에 선발 등판한다. 이날 경기에서 김광현은 1.1이닝동안 8실점하며 조기 강판됐고, 한국대표팀은 2대 14로 패했다. 정규이닝마저 다 채우지 못한 콜드게임이었다.
 

한국에서는 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인프라 투자에 미흡했던 한국 야구계의 인색함이 불러온 필연’이라는 주장도 제기됐고, 혹자는 ‘일본 특유의 세밀한 분석야구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뭐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분석이 있다. 이날 경기 중, 한 저명한 야구해설가는 ‘일본 대표팀이 김광현의 슬라이더 쿠세를 알아챈 것 같다’고 조심스레 언급했다. 즉 김광현이 슬라이더를 던질 때 나타나는 미묘한 투구폼의 변화와 같은 습관, 즉 ‘쿠세’가 일본대표팀에 감지됐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날 김광현은 슬라이더를 던지는 족족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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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09년 WBC에서 역투하고 있는 김광현. 하지만 3월7일 일본전에서는 일본 타자들에게 완전히 ‘발렸다’. 그는 주로 슬라이더를 공략 당했는데, 이 와중에 ‘일본분석팀이 김광현 슬라이더의 쿠세를 발견한 것 아니냐’는 가설도 제기됐다.

 

마운드는 ‘쿠세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수의 동작 하나하나, 습관 하나하나를 둘러싼 기록과 분석, 그리고 이에 맞선 대응이 진행된다. ‘쿠세’는 통상 투구동작 전 투수글러브의 위치, 글러브 속에서 공을 쥐는 손의 움직임이 반영되는 손목의 위치 변화, 글러브 모양의 변화, 구종에 따른 와인드업의 차이, 구종에 따른 릴리즈 포인트의 차이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임창용 선수는 구종에 따라 달라지는 투구습관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말도 있다. 즉 직구를 던질 때에는 와인드업 동작에서 머리 뒤 쪽에 팔이 모아졌을 때 한두번 정도 튕긴 다음에 던지는 버릇이 발견됐다는 주장이다. 직구 구사 때에는 변화구에 비해 발차기도 커졌다고도 한다. 타자들은 임창용이 와인드업 할 때 팔의 움직임에 따라 타격 포인트를 조절했다는 것인데, 만일 구종을 예상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승부의 추는 타자 쪽으로 순식간에 쏠리게 된다.

 

야구는 통계와 연관이 깊은 구기종목이다. 경기 중 벌어지는 모슨 상황이 숫자로 기록되고, 엑셀 파일로 옮겨져 분석된다. ‘쿠세’와 관련된 영역에서는 릴리즈 포인트를 좌표화하는 작업과, 주자 유무와 구종에 따라 달라지는 투구 소요시간 측정 등이 이미 널리 퍼져있다. 투수의 사소한 습관 역시 모두 기록된다. 메이저리그는 이들 중 상당한 정보를 데이터화해 일반인에게도 공개한다. 하드볼타임즈(hardballtimes.com)의 마이크 페스트(Mike Fast)는 여기에 흥미로운 요소를 더하자고 제안했다. 바로 ‘그립’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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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투구동작 전 세트포지션에 들어간 투수의 글러브 모양도 때로 구질을 짐작하는 좋은 정보가 되기도 한다. 위 그림과 같은 경우에, 미숙한 투수는 포크볼이나 스플리터와 같이 손가락을 벌려야 하는 구종을 구사할 때 글러브의 모양이 같이 벌어진다. 그래서 많은 투수들이 패스트볼을 던질 때에도 일부러 글러브를 벌려 잡아 이를 숨기곤 한다.

 

같은 구종이라고 하더라도 공을 쥐는 모양에 따라 궤적은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예컨대 스플리터와 포크, 싱커는 모두 비슷한 그립을 보이지만, 공을 쥐는 검지와 중지의 간격 차이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마이크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해 ‘투수가 던지는 공마다 그립을 데이터로 남겨보자’고 제안한 셈이다. 마이크는 크게 세가지 요소를 측정했는데, △공을 손에 쥔 방식(How the ball is held in the hand) △공에 닿아있는 손가락 부위(What part of each finger is touching the ball) △손가락이 닿아있는 공의 위치(Where on the ball each finger is touching)가 그것이다.

 

공을 손에 쥔 방식(How the ball is held in the hand)

 

공을 손에 쥔 방식을 측정하는 첫 번째 지표는 (당연히도) ‘왼손-오른손’이다. 마이크는 이를 각각 알파벳 R(오른손)과 L(왼손)으로 표기했다. 다음 요소는 공이 손바닥과 맞닿아 있는지 여부로, 손바닥과 닿아있을 경우에는 ‘0’을, 손가락으로 지탱하고 있을 경우에는 ‘1’을 분류기호로 사용한다.

 

공에 닿아있는 손가락 부위(What part of each finger is touching the ball)

 

‘공에 닿아있는 손가락 부위’를 측정하기 위해 마이크는 각각의 손가락에 숫자를 부여했다. 즉 엄지는 1, 검지는 2, 중지는 3, 약지는 4, 소지는 5로 불렀다. 만일 안토니오 알폰세카(Antonio Alfonseca)처럼 손가락이 여섯 개인 선수는 ‘6’까지 분류될 것이며,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처럼 손가락이 세 개인 경우에는 3에서 멈추게 된다.
 

이어서 손가락의 지문이 있는 부분으로 공을 잡을 경우에는 알파벳 ‘P'를, 손가락 끝으로 잡을 때에는 ’T'를, 첫 번째 마디 안쪽 손가락으로 짚을 경우에는 ‘K'를, 손가락과 손바닥이 맞닿은 부위의 옆면으로 잡을 경우에는 ’S'를, 손가락 가운데 마디의 옆면으로 잡을 경우에는 ‘N'을 각각 기호로 사용했다. 손가락이 아예 공에서 떨어진 경우는 ’O'로 표기했다.

 

손가락이 닿아있는 공의 위치(Where on the ball each finger is touching)

 

손가락이 닿아있는 공의 위치는, 야구공에 가상의 축을 그어 그 좌표를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마이크는 야구공의 가죽넓이가 가장 좁아지는 곳(즉 붉은색 실로 꿰맨 심지가 가장 가까워지는 곳)의 한가운데를 잇는 선을 Z축으로 설정하고, 그와 반대로 가죽 넓이가 가장 넓은 곳(즉 심지가 말발굽 모양으로 생겨난 곳)의 중앙을 잇는 두 개의 선을 각각 X-Y축으로 정했다. 그리고 아래 그림과 같이 이 축을 기준으로 손가락이 위치한 좌표를 설정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글로만 설명해선 어려우니, 아래 예를 살펴보자.
그림의 투수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마무리투수 호세 발베르데의 패스트볼 그립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호세 발베르데의 투구모습. 2008년 5월4일

 

이 그립을 마이크 패스트의 방식대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R1
1P,-170,15
2P,60,-30
3P,60,-70
4N,-80,15
5O

 

반면 발베르데는 자신의 직구 그립에 때때로 변화를 주며 구사하는데, 아래 그림이 이와 같은 ‘변칙 그립’의 한 경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호세 발베르데의 투구모습. 2008년 6월24일

 

 

이 그립의 경우 같은 패스트볼이지만, 중지(3번 손가락)을 공에서 떼어냈다. 이렇게 하면 속도와 궤적에서 여느 직구와 차이가 나게 된다. 만일 타자가 투수의 통상적인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다가 ‘옳다구나’ 하고 스윙을 하게 될 경우, 아마도 공은 배트의 중앙에 맞지 않을 것이다. 같은 직구지만 그립을 달리하며 궤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변칙그립의 표기방법은 아래와 같다.

 

R1
1P,-170,15
2P,60,-30
3O
4N,-80,15
5O

 

이와 같은 데이터가 과연 경기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시력이 좋은 타자들의 경우 투수의 ‘쿠세’를 밝혀내는 데에 더 유리할 수밖에 없으며, 릴리즈 순간의 손가락 변화를 통해 좀 더 안정적인 대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타자의 필수 요건 중 하나로 ‘시력’이 꼽히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앞서 ‘야구와 시력’이란 포스트에서도 밝힌 것처럼, 많은 야구선수들은 동체시력 향상을 위해 안구 칼슘침전 제거수술을 받기도 하고, 황갈색 콘텍트렌즈를 착용하기도 하며, 고속으로 날아오는 테니스공에 적힌 번호를 식별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좋은 야구선수가 되긴 위해선 동체시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이 ‘동체시력 훈련안경’은 렌즈 안쪽의 LCD 셔터가 점멸하는 방식을 통해 동체시력 향상을 도와준다. 일본 한신 타이거즈의 가네모토 도모아키 선수는 지난해부터 노화에 따른 동체시력 저하를 막기 위해 이런 류의 장비를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반면, 투수들로서는 타자의 시력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게다. 그래서 많은 ‘좋은 투수’들은 공의 릴리즈 포인트를 최대한 오랫동안 감출 수 있는 투구 동작을 연마하고 몸에 익힌다. 또 공을 던질 때 같은 직구라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그립(공을 쥐는 손 모양)을 개발해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연습을 거듭한다. 이렇게 투수의 기술과 타자의 기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굴드는 이와 같은 현상을 ‘풀하우스’라는 저서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다.

 

마이크 패스트의 제안이 과연 야구계에 받아들여질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아마도 쉽지 않을 거란 예측은 가능하다. 그립의 경우 그 미세한 차이를 일일이 기록하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손가락의 위치가 달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데이터와 달리 타자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많다. 하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출루율이나 OPS 같은 스탯이 오랜 외면 끝에 광명을 찾았듯이) 투구 그립을 데이터화하려는 마이크의 노력이 빛을 볼지도 모를 일이다. 자, 한 번 지켜보자.

 

** 관련 원문을 보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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