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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할 타자의 실종

  • 등록일
    2008/11/18 20:47
  • 수정일
    2017/10/11 11:00

 

수능이 끝났다. 시험 잘 봤냐는 질문에 ‘반타작 했다’는 대답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수험생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상투적인 표현이다. 이 말 속에는 ‘50%’가 아주 좋지 못한 결과라는 뜻이 담겨있다. 뜬금없이 수능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바로 야구에서의 대표적 확률인 ‘타율’ 때문이다. ‘좋은 타자’의 지표로 쓰이는 수치 중 하나는 바로 ‘3할 타율’이다. 10번 등장해서 3번만 안타를 만들어 내도 ‘훌륭한 타자’로 대접받는다. 이거, 수능에 비하면 ‘껌’ 아닌가.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3할을 쳐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8년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모든 타자 중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고작 34명(1위 치퍼 존스 .364)에 불과하며, 한국프로야구의 경우 16명(1위 김현수 .357) 뿐이다. 따지고 보면 ‘야구의 달인’들이 모여 있는 프로야구 리그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지 오래다. 한국의 경우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MBC 청룡의 백인천 선수가 기록한 .412를 끝으로 26년째 4할 타자의 씨가 말랐으며,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도 1941년 보스톤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가 기록한 .406 이후로 반세기가 넘도록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4할 타자’들은 다 어디로 간걸까.

 

[사진] 한국프로야구의 유일무이한 4할 타자 백인천(왼쪽)과 메이저리그 최후의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

 

전통적인 야구애호가들은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로 ①투수능력의 향상에 비해 뒤떨어진 타자능력의 향상 ②늘어난 경기수와 멀어진 이동거리 등 체력 저하요인의 증가 ③야간경기의 일상화 등 타자에게 불리한 야구환경 ④선발-셋업-마무리 등 투수의 분업화에 따른 타격대응의 어려움 등을 꼽는다.
이 중 ①번은 ‘투수능력 향상’의 예로 슬라이더와 싱커 등 신구종의 등장에 비해 타격기술은 예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대표적인 ‘신구종’인 커브와 싱커, 스크루볼, 포크볼, 너클볼 등은 모두 187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등장했다. 실전에서 즐겨 사용되는 ‘국민변화구’ 슬라이더 역시 1940년대 상용화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신구종의 등장시기’와 ‘4할 타자의 증발’ 사이에 시기적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 투수의 능력은 지속적으로 진보한 반면, 유독 타자들의 능력만 제자리라는 논리 자체가 수용하기 어렵다.


④번 논리 역시 투수 분업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1이닝 마무리 체계’가 등장한 것은 1988년이란 점에서 역시 시점의 불일치 문제가 불거진다. 70년대(71-80)를 통틀어 17명에 불과했던 30세이브 이상 투수가 90년대(91-2000) 들어서는 133명으로 늘어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좀 더 양보하더라도 ‘투수의 분업화’가 시작된 시기를 1960년대 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②번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마찬가지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선수관리 시스템 등을 볼 때 핵심적인 근거로 사용되기 어려우며 ③번이 든 ‘야간경기’는 선수마다의 취향 문제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야간경기 때의 타율이 더 높은 선수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럼 뭐냐. 4할 타자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이유를 담은 작별인사도 없이 지구상에서 ‘뿅’ 사라졌단 말이냐.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굴드 교수는 그의 저서 <풀하우스>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굴드에 따르면 ‘4할 타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가 아니며, 다양한 변이로 가득 찬 풀하우스의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다. 따라서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전통적인 야구애호가들의 말처럼 타격기술의 수준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야구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기 때문’이다. 즉 4할 타자의 실종은 안정된 평균타율 주변으로 변이(선수기량)들이 모이면서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굴드 교수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선 먼저 ‘야구(타격) 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이 실존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리그 최고타율과 평균타율 격차 추이’를 사용해보자. 만일 굴드 교수의 이론이 사실이라면, 각 연도별 리그 최고타율과 평균타율 격차가 점차 줄어들어야 한다. 타격수준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최고수준의 타자’와 ‘평균수준의 타자’ 사이의 격차가 엷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래 그래프는 1901년부터 현재까지 매해 AL-NL 수위타자 타율과 리그 평균타율간의 격차를 표시한 것이다.

 

 

그래프가 점차 아래로 수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 급격한 상승변화를 보이는 것은 야구 규칙의 변화(스핏볼 사용의 금지, 투구판 거리의 조정, 스트라이크존의 조정 등)에 따른 현상으로 설명된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전반적인 야구수준이 오르며 ‘최고’와 ‘평균’의 격차를 줄여나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초기에는 4할을 거뜬히 쳐내는 타자가 있는 반면 1할대의 타자들도 존재했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정 수준’ 이하의 선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래 표는 이같은 형상을 더욱 잘 나타내는데, 1950년을 기준으로 매년 리그 수위타자 타율의 평균값과 리그 평균타율의 평균값을 비교한 것이다.

 

           AL 수위타율*  AL 평균타율   NL 수위타율**   NL 평균타율***
--------------------------------------------------------------
Until 1950      .371         .267         .370           .265
After 1950      .344         .255         .346           .257
--------------------------------------------------------------

               -.027        -.012        -.024          -.008

 

 

*   AL기록은 1901년부터의 수치를 사용

**  NL 수위타자 타율 기록은 1871년(National Association)부터의 값을 사용

*** NL 평균타율 기록은 1876년부터의 값을 사용

 

1950년을 기준으로 앞뒤를 볼 때, 리그 수위타자 타율의 평균값은 AL이 2푼7리, NL이 2푼4리의 격차를 나타낸 반면, 같은 기간 평균타율의 평균값은 AL이 1푼2리, NL이 8리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수치를 ‘타자들의 타격능력 퇴보’로 설명할 경우, ‘보통 수준에 있는 타자들의 타격성적이 유지되는 동안 최상급 타자들의 타격능력만 유난히 뒤쳐졌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굴드 교수는 이와 관련해 “그러니까 우리는 여태껏 야구 기록에 속아온 셈”이라고 말한다. 즉 평균 타율이 2할6푼대에 정체된 것을 보고 타격 기량이 한 세기 동안 제자리걸음 했다고 지레 짐작하고, 4할 타자가 사라지자 위대한 타자가 다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굴드 교수는 그러나 “평균값들은 상대적인 것이며, 프로 야구 선수들의 기량이 갈수록 향상되고 있음을 염두”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다시 말해 아래의 그림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20세기 초의 야구를 나타낸 것이고, 아래 그림은 현재의 야구를 나타낸 것이다. 굴드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평균타자(2할6푼)마저 인간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수렴하면서 야구 수준의 전반적으로 향상돼 ‘4할 타자’라는 ‘변이’가 사라졌다. 굴드 교수는 타율을 ‘종 모양을 이루는 모든 변이 값으로 가득 찬 풀하우스’로 개념했으며,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변이의 축소로 설명된다.

 

그림을 다시 보면, 야구의 역사 초기에는 평균 경기 수준이 인간의 오른쪽 한계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타자나 투수나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중간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균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평균 타율 2할6푼의 균형은 변함 없이 유지된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의 타율 2할6푼은 오른쪽 벽에서 한참 먼 곳에 있었으며, 변이는 양쪽으로 넓게 뻗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변이가 퍼진 것은 얇은 선수층과 엉성한 시스템이 타격실력이 떨어지는 좋은 야수에게 일자리를 주었기 때문이며, 위쪽으로 변이가 퍼진 것은 평균과 오른쪽 벽 사이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오로지 극소수가 가진 뛰어난 재능과 헌신만이 인류의 성취 한계까지 선수들을 밀어 올려 오른쪽 벽에 서게 한다(책 166p에서 인용). 이때의 성취 한계가 바로 4할 타율이다.

 

[그림] 진화론을 풍자한 그림. 야구... 너도 정녕 이렇게 발전해왔단 말이냐...

 

현대에 들어서 야구의 기술이 향상되지만, 타격과 투구 사이의 균형은 교묘하게(때론 규칙을 바꿔가면서까지) 유지됐다. 그래서 평균타율은 2할6푼으로 일정하게 유지됐지만, 이 평균값은 오른쪽 벽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한편 시스템의 전체적 변이는 양쪽에서 대칭적으로 줄어들었다. 즉 경기수준의 향상과 함께 실력 없는 선수는 설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평균값과 ‘인간의 한계’ 사이의 거리도 줄어들었다. 쉽게 말하면, ‘최고의 선수들’은 타율로 볼 때 선배들보다 낮을지언정 오히려 오른쪽 벽으로 몇 발 더 다가갔다고 할 수 있으며, 평균수준의 선수들은 오른쪽 벽으로 몇 십보를 더 이동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평균과 최고의 차이(변이)가 줄어들며 ‘변이값들로 이뤄진 풀하우스의 오른쪽 꼬리’인 4할 타율을 없애버렸다.

 

굴드 교수의 설명처럼, 4할 타자의 실종은 ‘퇴보’가 아니라 ‘향상’을 뜻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영원히 4할 타자는 나타나지 않을까. 굴드 교수의 이론을 따르더라도, ‘돌연변이’의 등장에는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있다. 따라서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타나 인간의 한계에 한 발 더 다가서며 풀하우스의 오른쪽 끝을 확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야구가 재미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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