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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기출문제를 풀다가 하도 열받아서 결국 글까지 쓰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국 사법시험 문제는 객관적으로 엉망이다.
제52회 사법시험 1차(객관식) 헌법 1책형 13번째 문제를 보자.
이 문제는 의원내각제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를 모두 고르라고 한다.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지문이 있다: "이 정부형태가 성공하기 위하여는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 있어야 하고 정치인에게 투철한 공직의식이 요구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를 확신하기 어렵다."
우선 직업공무원제의 확립과 정치인에 대한 투철한 공직의식의 요구는 비단 의원내각제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제를 채택하는 모든 정부형태에서 다 요구되는 사항이다. 의원내각제의 특질을 묻기에는 다소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문제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의원내각제에도 그런 사항들이 요구되는 것은 맞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의원내각제가 그런 사항들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는 의원내각제의 단점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의원내각제가 그런 사항들을 요구하는 것을 가지고 바로 의원내각제가 '우리 실정'과 맞는지 안 맞는지를 판단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때문에 이 지문에서 의원내각제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경우 이를 확신하기 어렵다."라는 문구 속에 있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는 의원내각제 자체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이건 의원내각제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실정'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너그럽게, 그것이 의원내각제를 도입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근거가 되므로 의원내각제와 상관이 있다고 인정해보자. 그리고, 이런 현실인식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자.
진짜 문제점은 무엇이냐? 우리나라의 경우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 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간혹 부정비리가 적발되는데, 그렇다고 직업공무원제 자체가 확립되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부분만 보면 저 지문은 틀렸다(참고로 정답에서는 저 지문이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게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또 아니었다. 이건 그냥 정답이 잘못 나간 정도로 볼 수 있으니까(물론 정답이 수정되진 않았다 - 사실 이것만으로도 사법시험이 얼마나 개판인지는 증명이 되겠지만...). "이 정부형태가 성공하기 위하여는 정치인에게 투철한 공직의식이 요구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를 확신하기 어렵다."를 살펴보자. 여기에 진짜 문제점이 있다.
저 문제는 나더러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투철한 공직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단답형으로 판단하란다. 그래, 마음만 같아서는 '없다'라고 쉽게 정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정답/오답이 명확해야 하는 '객관식 시험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웃기는 소리다. 끔찍하게도, 이런 저질 문제가 저것 하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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