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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09 10:39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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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에 와서 처음으로 '반여성적', '반여성성'이라는 표현을 들었다. 아직 여성성, 여성적 섹슈얼리티조차 불안한 상태에서 어떤 행위나 글이 '반여성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그 용어 자체의 미래성에도 불구하고 남용의 소지가 다분하다. 우리는 아직 그런 글이나 행위를 '여성 억압적'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는지 제안해 본다.

 

laron의 글쓰기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흘러간 점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그 책임은 laron에게 있다. 여성 억압이라는 젠더적 문제를 '헌법적' 문제로 위장시키려는 (무의식적) 전략은 한 마디로 비윤리적이다. 기타 개인의 블로그에 남기는 글에 너무 과잉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비사회적이라고 평가한다. 현실이라는 비슷한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이상 글쓰기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강용석 사태와 관련된 나의 글에서 반복해서 강조했다시피 이번 논쟁에서도 laron의 글쓰기가 포르노인지 아닌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왜 여성 억압인지는 다른 블로거 분들이 지적했고 아직도 '김윤옥 포르노'가 여성 억압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laron의 입장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여성 억압적 글쓰기에 대항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타 많은 점에서 라브의 행동을 지지한다. 이와 관련되어 촉발된 다른 블로거들의 연대도, 아직 진보넷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반갑다. 그러나 laron의 사과를 받아낸다는 점에 가서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 (진보넷에 공개 질의서를 보낸 행동은 다른 차원이다. 질의서는 진보넷의 입장을 확인하는 시도였고 진보넷이 여성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사과를 받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사과를 받아내면 논쟁은 중단되는 면이 있다(다행히도 laron의 사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이번은 예외가 될지도 모른다). 이는 하나의 논쟁이나 담론을 또다시 개인 행동의 잘잘못으로 축소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은폐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여성 억압의 문제, '김윤옥 포르노'의 문제는 laron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모든 여성의 사건이기도 하다. laron의 사과 여부에 따라 담론이 소각상태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laron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다.

 

laron은 남성이다.

 

-글을 계속 쓰기 전에 밝힌다. 나도 남성이다. 나는 여성의 현실에 대해 간접 경험이나 페미니즘 저서를 통해서 밖에는 알지 못한다. 남성인 내가 논의의 방향을 바꿔달라는 취지의 글을 쓰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지금의 논의가 여성 해방에 보탬이 되기는 커녕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글을 계속 쓴다.

 

남성이 촉발시킨 사건을 남성의 사과로 끝내는 것은 다시금 담론의 결정권을 남성에게 줘버리는 꼴이 된다. 남성적 담론, 가부장제의 담론은 현실의 담론이다. 지금 형성되는 담론은 미약할지라도 분명한 대항 담론이다. 이 대항 담론이 음순 담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laron의 사과에 집착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여성 블로거들이 지금 형성되는 담론에 가담하길 희망한다. 가부장제의 담론을 재독해하고 다른 담론을 세우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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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댕: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이것은 과연 가치 있는 것이며 작가로서 실천하는 일의 일부가 되는 것인가요?

 

이리가라이('이리가레'가 올바른 표기로 보임): 나는 여자입니다. <나>라는 주체를 갖고 글을 씁니다. 여성의 가치를 경멸하지 않는다면, 또는 성적인 것이 의미 있는 주관적·객관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로 거부되지 않는다면 왜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가치 있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여성이면서 한편으로 작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말의 자동화 상태에 젖어 있거나 기존의 의미를 그대로 모방하는 사람들만이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글쓰는 자아간의 분리나 분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몸은 모두 성별화되어 있습니다. 나의 성욕(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섹슈얼리티'가 타당한 번역이라고 판단함)은 나의 성이나 성적인 행동(제한된 의미에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억압의 영향, 특히 성적인 문화의 결핍-세속적·종교적-이 낳는 결과가 여전히 너무나 강하므로 「나는 여성이다」, 「나는 여성으로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와 같은 이상한 발언들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항의에는 남성들만의 문화에 대한 은밀한 예속이 또한 내포되어 있습니다. 과연 알파벳 문자는 가부장제 권력의 세속적·종교적 법전화에 역사적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말과 문자를 성별화하는 데에 공헌하지 않는 것, 이것은 남성 족보와 그들의 논리적 기호체계에 특권을 부여하는 법과 전통의 그릇된 중성화를 영속화시키는 일입니다.

 

 

뤼스 이리가라이, 나, 너, 우리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박정오 옮김, 1996년 서울: 동문선, p. 55.

기울여서 쓴 부분은 번역에 대한 이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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