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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타자화와 남성의 윤리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12 16:23
  • 수정일
    2015/05/06 18:50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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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성으로서 여성주의에 대해 어떤 지점에서 발언을 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계속된 고민과 갈등에 시달렸다. 서로 엇비슷한 글들을 약간의 변주만 줘가며 작성했고, 내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지점까지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제서야 내가 어떤 글을, 어떤 지점에서 써야 할지 눈에 들어온다. 이미 많은 글들을 쓰고 나서 또 글을 쓴다는 것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다. 내가 왜,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이 글도 비슷한 이야기들의 반복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남성으로서, 남성이 가져야 할 윤리에 대한 글을 쓴다.

 

남성의 윤리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성의 대상화에 대한 정리부터 한다. 윤리를 말하기 위한 필수 작업이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핵심이기도 하다. 여성의 대상화란 무엇인가? 대상화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인식시키는 작업이다. 여성을 대상화시킨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성으로서의 여성을 남성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사물이 특히 남성의 페니스를 위한 덮개 내지는 남성과 남성 사이에 교환되는 상품쯤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대상화는 곧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의미한다.

 

대상화는 적절한 용어이기는 하나,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 특히 대상이 주체의 주변부로 몰리게 되는 상황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도 지닌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여성의 대상화라는 표현보다는 여성의 타자화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젠더적 지형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 주변을 타자화시켜야 한다. 한국인에게 일본인은 타자이며, 노동자에게 자본가는 타자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타자화는 거의 다 상호타자화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타자화하며 주체성을 획득하듯, 일본인도 한국인을 타자화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남성주체는 다르다. 남성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여성을 타자화하지만, 여성은 그 반대를 하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에 대해 언제나 타자이며, 자기가 여성으로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절대 타자다.

 

여성이 타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남근로고스주의 담론에 의해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출발은 남자아이를 설정하고, 그 남자아이에서 페니스를 부재시키면서 여자아이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여성을 남근이 부재한 남성으로 설정하는 데서 여성의 타자화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런 설정행위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시킬 의도가 없다고 해서 여성이 타자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타자일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은 곧 남성으로서의 글쓰기에서 호명되는 여성도 항상 타자로서의 여성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포르노나 일련의 성적 묘사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글쓰기를 거의 다 포섭한다. 포르노가 여성을 ‘극단적’으로 타자화시키고 상품화시키기 때문에, 오로지 그런 방식으로 여성을 표현하는 것만이 더 명확한 타자화로 보일 뿐이다. 아무리 개인으로서의 남성이 자신의 글쓰기에서 여성을 주체로 표현하려고 해도 여성은 다시 타자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이 남성으로서의 글쓰기를 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기 위해 내가 A라는 가상의 여성에 대해, 그녀를 ‘최대한’ 주체로 설정하여 짧은 글을 써보겠다: “A라는 여성이 있다. A는 경찰이다. A는 강력계에서 일하고 있으며, 결혼을 거부하여 자신과 뜻이 맞는 남성이랑 동거를 하고 있다.” 어떤 여성의 타자화도 없어 보이지만 이 순간에도 A는 타자화된다. 여성 A라는 기표와, 경찰이라는 기표와 동거라는 기표가 합쳐진다. 이들을 결합시키면 ‘동거하는 A 여경찰’이라는 상징계 속의 지점이 정해진다. 그 이미지적 결과를 알고 싶으면 네이버 검색창에 ‘여경찰’을 입력한 뒤 ‘이미지’를 보면 된다. 경찰 자리에 교수를 넣든, 검사를 넣든, 군인을 넣든, 의사를 넣든 달라지지 않는다. 남성주체의 직업을 여성이 가지는 것은, 남근주의에서는 여성의 코스프레로밖에 안 보인다.

 

여성의 타자화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성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여성을 타자화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현실에서 이런 타자화 작업이 남성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이로 인해 여성의 타자화가 여성 억압이 된다는 것이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타자화는, 그것이 여성의 타자화라는 의식 없이 행해질 경우 그 독점적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남성의 윤리는 자기의 글쓰기와 말하기, 자신의 욕망과 무의식이 여성의 타자화라는 것을 인식하고 공개하는 데 있다. 바꿔 말해 자신의 글쓰기가 무성적이거나 중성적이지 않고 남성적임을 밝혀, 타자화 작업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 행위가 여성의 타자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계속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자로서의 비윤리다.

 

‘남성도 성적 대상화되지 않느냐’는 발언도 이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남성은 성적 대상화가 되더라도 절대 타자화, 가 되지 않는다. 남성은 지금의 무의식적 지형에서 언제나 주체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남성의 성적 대상화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는 다르다. 남성에 대한 성적 묘사와 여성에 대한 성적 묘사가 다른 것도 이 이유에서다.

 

남성의 윤리의 시작이 자신의 욕망과 글쓰기가 성별화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만약 진보적 남성들이 정말 소수자를 위한다는 정의감이 남다르다면, 여성의 여성으로서의 발화를 방해하지 않아야 비로소 자신의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여성의 발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침묵하자는 말이 아니다. 소수자적 지위에서 하는 발언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하고, 거기에 논리, 이성, 인과관계를 너무 철저하게 요구해서 여성의 글쓰기를 다시 남성의 글쓰기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최소한 자기의 욕망이 여성을 타자화시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을 노동운동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여성운동에도 적용하는 일관성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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