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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님의 [관념적 글쓰기?] 에 관련된 글.
페미니즘 저서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섹스와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 성애적 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의 구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주디스 버틀러가 이 모든 개념은 결국 다 '젠더'를 지칭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여성연대(http://blog.jinbo.net/kimpoo88/?pid=11)라고 말할 때의 여성은 젠더로서의 여성이며, 이는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여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간에는 차이가 없다. 젠더를 마치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한 사회문화적 성이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있지만, 젠더를 '성차'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젠더는 섹스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을 줄여서 사회적 성)임을 드러내게 하는 용법에 가깝게 보인다.
이후 어떤 보편적 여성에 대해서는 주디스 버틀러의 글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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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나의 정치적 개입 덕분에 『젠더 트러블』에서의 입장 몇 가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나는 '보편성'의 주장을 극히 부정적이고 배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광의의 인권 문제에 관해 성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집단인 게이와 레즈비언 인권위원회(1994~1997)에서 처음에는 이사회 회원으로 그 다음엔 회장으로 있으면서 특별한 활동과 집단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이 용어에 바로 그 비본질적이고 열린 범주로서 중요한 전략적 용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어떻게 예기적(proleptic)이면서 수행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불러내고, 서로 만난 적 없는 문화지평들의 수렴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문화적 번역이라는 미래 지향적 노동으로 정의되는 보편성에 대한 두번째 관점에 도달했다.<<나는 이후의 글쓰기에서 보편성에 대한 생각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생각은 『격분하기 쉬운 말』 2장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각주13)>> 좀더 최근에는 내 작업을 정치 이론과 연결해야 했고, 다시 한번 헤게모니 이론과 그것이 이론적 좌파 활동가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쓴 공동 저작(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verso, 2000-역주)에서는 보편성 개념과 연결해야 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조현준 옮김, 2008년 경기도: 문학동네, p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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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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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전략적으로 호명하는 것과 생물학적 여성/구성된 여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그리고 젠더를 얘기할 때 생물학적/사회적 성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구요. 저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그렇게 구성된 젠더/여성이 여전히 상상적 재현물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젠더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수도 있을텐데, 이 젠더의 위치에는 사실 어떤 다른 것이 와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사실 제 문제의식이 어떤 수준의 논쟁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이 이상 더 뭔 얘기를 할 수있을지는.........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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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니나님과 제 입장 차는 크지 않아 보입니다. 여성에 대한 호명이 전략적이라는 점은 저도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것을 실천에 옮겨 글을 쓸 때는 '전략적으로 호명된' 부분은 빠지고 '여성'만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다른 부분은 젠더의 상상적 재현물에 대한 언급인 것 같은데 저는 그것이 '상상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현재하는 재현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런데 니나님께서도 그 정치적 의미를 인정하시니까 큰 차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재현물로서의 여성/젠더가 현재하는 이상, 이 젠더의 위치에 다른 것이 와도 상관없는 것과, 다른 것이 올 수 없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은 서로가 서로의 논지를 방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