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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번역 1-1 (2)

이정서 사태의 충격도 있고, 이참에 다양한 <이방인> 번역본을 봤는데 딱 이거다 싶은 건 없어서 나름대로 <이방인>을 번역해본다. 

 

이 번역은 1942년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L'étranger를 원본으로 삼으며, 때로 이휘영, 김화영, 이기언, 김예령, 이정서 번역을 참고한다. 

 

한국에서 L'étranger 원본의 저작권은 소멸했다. 이 번역본은 무료로 배포 가능하다. 단, 영리 목적 사용은 불가능하며, 일부나 전부를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 내지 수정할 수 없다. 어차피 카뮈의 간결함을 한국어로 살려본답시고 내 멋대로 의역한 부분이 많아서 그렇게까지 신뢰할 만하진 않다. 이정서는 이런 번역을 보며 까무라치겠지만, 나도 이정서 번역을 보고 까무라쳤으므로 비긴 셈 치겠다. 

 

 

제1부 

 

I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석회벽으로 만든 방이었다. 사방에 큰 유리창이 있었으며 무척 환했다. 의자와 엑스 자 모양 받침대가 여기저기 있었다. 중앙에는 뚜껑 덮인 관이 받침대 두 개에 의지한 채 놓였다. 덜 박혔는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반짝이는 못들이 호두 색깔을 입힌 목판 따라 보였다. 관 근처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선명한 색의 스카프를 얼굴에 두른 아랍계 간호사가 있었다. 

 

 

그때, 수위가 내 등 뒤로 다가왔다. 뛰어온 모양이다. 수위가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관 뚜껑을 닫아버렸네요. 고인 얼굴을 뵐 수 있도록 못을 빼 드리겠습니다.” 나는 관에 다가서려는 수위를 말렸다. 그가 “고인을 뵙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수위는 말없이 있었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싶어 난처했다. 이윽고 수위는 나를 바라보며 “왜요?”라고 물어봤다. 비난하려는 의도라기보단 궁금해 보였다. “잘 모르겠네요.”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수위는 하얀 수염을 이리저리 꼬며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그럴 수도 있겠죠.”라고 말했다. 멋진 하늘색 눈동자와 약간 붉은 안색의 수위였다. 앉으라고 내게 의자를 권하고는 자기도 조금 뒤에 가서 앉았다. 간호사가 일어서더니 출구로 향했다. 그 순간 수위가 “저 여자한테 궤양이 났거든요.”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간호사를 바라봤더니 눈 아래로 머리를 감싸는 붕대가 보였다. 코가 있을 자리는 평평하기만 했다. 얼굴을 바라봐도 붕대의 하얀 빛깔만이 눈에 들어왔다. 

 


간호사가 나가자 수위는 입을 열었다. “혼자 계실 시간을 좀 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슨 몸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위는 내 뒤에 서 있는 채로 남았다. 그가 내 등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불편했다. 빈소는 늦은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로 가득 찼다. 말벌 두 마리가 유리창에 기대 붕붕거렸다. 이내 졸음이 내 정신을 잠식해가는 게 느껴졌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수위에게 물어봤다. “여기서 오랫동안 계셨나요?” 그는 바로 “5년 됐죠.”라고 대답했다. 마치 내가 그 질문을 묻기만을 계속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러고 나자 수위는 한참 수다를 떨었다. 아마 자기도 자신이 마랑고 양로원에서 수위로 일하며 생을 마감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수위는 예순네 살에 파리 출신이었다. 그 말에 내가 물었다. “아, 여기 출신이 아니시네요?” 그리고 나를 원장에게 데려가기 전에 수위가 엄마를 언급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이 지역에선 평지 날씨가 워낙 더워서 빨리 엄마를 매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줬다. 그러다 수위가 파리 시절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직도 파리를 못 잊겠단다. 파리에선 사나흘 정도 고인 곁을 지킨다. 여기선 시간이 촉박하다. 고인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영구차를 뒤따라가기 바쁘다. 그러자 수위 아내가 말했다. “이제 그만 해, 아드님께 그런 소리를 해서 쓰겠어.” 부끄러웠는지 수위는 사과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나는 수습했다. 더구나 수위 이야기가 일리 있고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작은 빈소에 같이 머물면서, 수위는 자기가 너무 가난해서 양로원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아직 건장하니 일이라도 거들까 해서 수위 자리를 맡게 되었다고. 결국 당신도 재원자인 셈 아니냐고 물어봤다. 수위는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사실 수위가 다른 재원자들을 ‘그분들’, ‘다른 사람들’ 그리고 드물게는 ‘노인네들’이라고 불러서 이미 충격을 받은 터였다. 심지어 몇몇 재원자는 수위보다 나이가 덜 들었는데. 그런데 같은 층위에 놓고 바라볼 건 당연히 아니겠지. 그는 수위 자리를 맡았으니, 어떤 측면에선 다른 재원자들에 대한 권한을 가진 셈이니까. 

 

 

그 순간 간호사가 다시 들어왔다. 순식간에 밤이 내려앉았다. 어둠은 빠르게 유리창 위로 쌓였다. 수위는 전등을 켰다. 갑자기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멀 정도였다. 수위는 저녁을 먹으러 구내식당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수위가 카페오레라도 한 잔 가져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마침 카페오레를 무척 좋아하기에 기꺼이 수락했다. 조금 뒤 수위는 쟁반을 들고 왔다. 나는 음료를 들이켰다. 그래선지 담배가 조금 당기더군. 하지만 엄마 앞에서 흡연해도 괜찮은지 마음에 걸려 망설였다. 고민 끝에 별 상관없겠지 싶었다. 수위한테도 담배를 권했고, 우린 같이 담배를 피웠다. 

 

 

그러던 중 수위가 말했다. “어머님 친구분들도 오셔서 같이 밤을 지새우실 겁니다. 일종의 관습이죠. 의자랑 블랙커피를 좀 갖다 놔야겠어요.” 수위한테 전등을 하나 정도 꺼도 되느냐고 물어봤다. 빛 파편들이 하얀 벽면에 부딪치니 지칠 수밖에. 수위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부 끄거나 켜게끔 전기가 설계되었단다. 그 뒤론 별로 수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오가며 의자를 날랐다. 수위는 한 의자 위에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고 그 주위에 잔을 쌓았다. 그러고는 엄마를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한 자리에 앉았다. 간호사는 등을 돌린 채 구석에 있었다. 그녀가 뭘 하던 중이었는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팔 동작을 보니 뜨개질을 하나 싶었다. 포근했다. 커피 덕에 몸을 덥혔고, 열린 문으로 밤 내음과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조금 존 것 같다. 

 

 

무언가 나를 스쳐 잠에서 깼다. 자다가 눈을 떠서 그런지 방의 하얀 빛깔이 더욱 강렬해 보였다. 내 앞엔 그림자 하나 없었다. 사물들과 모서리며 곡선이 눈을 벨만큼 날카로운 윤곽을 드러냈다. 그때 엄마의 친구들이 들어왔다. 열댓 명 됐는데, 눈을 멀게 하는 불빛 아래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의자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난생처음 사람 구경을 한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봤고, 표정과 옷차림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노인들이 너무 조용했던 탓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여성들은 대부분 앞치마를 둘렀는데 허리를 졸라맨 끈이 그네들 불룩한 배를 더욱 부각했다. 나이 든 여성의 배가 저렇게까지 나올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남성들은 거의 빠짐없이 바싹 말랐고 지팡이를 짚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주름 속으로 파묻힌 꺼져 가는 미광밖에 없어 놀랐다. 모두 자리에 앉았다. 대부분 이 빠진 입으로 입술을 꽉 다문 채 나를 바라보고 불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건지 경련을 일으키는 건지 헷갈렸다. 아마 인사를 했던 거겠지. 바로 그 순간 노인들이 모두 수위 주위에 앉아 나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나를 심판하러 여기 왔나 싶은 어처구니없는 인상마저 잠시 들었다. 

 

 

얼마 후, 한 여성이 울기 시작했다. 그 여성이 둘째 줄에 앉아 앞줄 사람들에 가려진 탓에 얼굴이 잘 안 보였다. 규칙적으로 작은 탄식을 내보내며 울었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른 사람들은 울음소리가 안 들린다는 듯이 앉아있었다. 다들 처진 채 소리 없이 침울해했다. 관이든 지팡이든, 뭐든 바라보던데, 다른 데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성은 계속 울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어서 참 놀랐다. 좀 그쳤으면 좋았으련만, 차마 그렇게는 말을 못 했지. 수위가 그 여성에게 몸을 기울여 말을 걸었으나, 여성은 고개를 저었고, 뭐라 중얼거리고는 또다시 예의 그 규칙성을 갖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위가 내 쪽으로 오더니 가까이 앉았다. 꽤 긴 침묵 끝에 수위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을 열어 “저분께서 어머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셨거든요. 어머님께서 유일한 친구셨는데, 이젠 아주 혼자라고 하시더군요.”라고 알려줬다.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있었다. 여성의 한숨과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 대신 코를 자주 훌쩍였다. 마침내 멎었다. 더는 졸리지 않았다. 그래도 피곤했고, 허리가 쑤셨다. 그때부터 노인들의 침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따금 괴이한 소리가 났지만,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알아냈다. 늙은이들 몇 명이 입안으로 볼을 빨아 대다가 놓쳐서 내뱉는 이상한 혀 차는 소리. 어찌나 생각에 잠겨 있던지 자기들이 그런 소리를 냈다는 것조차 모르더라. 저 노인네들에겐 가운데 놓인 망인은 별 의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랬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수위가 모두에게 커피를 대접해서 같이 마셨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밤이 지나갔다. 잠시 눈을 떴었는데, 서로 포갠 채 잠든 늙은이들을 본 걸로 기억한다. 다만 늙은이 한 명만은 지팡이 위에 손을 얹고는, 손등에 턱을 괸 채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린다는 듯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중이었다. 나는 다시 잠들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일어나고 말았다. 유리창으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늙은이 한 명이 잠에서 깨더니 거하게 기침을 했다. 체크무늬가 그려진 큰 손수건에다 가래를 뱉었는데 가래가 꽤 끓었던 모양이다. 그 늙은이가 다른 이들을 깨웠고, 수위가 이제 출발하자고 했다. 모두 일어났다. 고된 밤샘 때문에 잿빛 표정들이었다. 나가면서 다들 내게 악수를 청하길래 몹시 놀랐다. 마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던 지난밤이 우리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주기라도 한 양.

 
 

Première partie

 

I (continue)

 

Je suis entré. C'était une salle très claire, blanchie à la chaux et recouverte d'une verrière. Elle était meublée de chaises et de chevalets en forme de X. Deux d'entre eux, au centre, supportaient une bière recouverte de son couvercle. On voyait seulement des vis brillantes, à peine enfoncées, se détacher sur les planches passées au brou de noix. Près de la bière, il y avait une infirmière arabe en sarrau blanc, un foulard de couleur vive sur la tête.

 

 

À ce moment, le concierge est entré derrière mon dos. Il avait dû courir. Il a bégayé un peu : « On l'a couverte, mais je dois dévisser la bière pour que vous puissiez la voir. » Il s'approchait de la bière quand je l'ai arrêté. Il m'a dit : « Vous ne voulez pas ? » J'ai répondu : « Non. » Il s'est interrompu et j'étais gêné parce que je sentais que je n'aurais pas dû dire cela. Au bout d'un moment, il m'a regardé et il m'a demandé : « Pourquoi ? » mais sans reproche, comme s'il s'informait. J'ai dit : « Je ne sais pas. » Alors tortillant sa moustache blanche, il a déclaré sans me regarder : « Je comprends. » Il avait de beaux yeux, bleu clair, et un teint un peu rouge. Il m'a donné une chaise et lui-même s'est assis un peu en arrière de moi. La garde s'est levée et s'est dirigée vers la sortie. À ce moment, le concierge m'a dit : « C'est un chancre qu'elle a. » Comme je ne comprenais pas, j'ai regardé l'infirmière et j'ai vu qu'elle portait sous les yeux un bandeau qui faisait le tour de la tête. À la hauteur du nez, le bandeau était plat. On ne voyait que la blancheur du bandeau dans son visage.

 

 

Quand elle est partie, le concierge a parlé : « Je vais vous laisser seul. » Je ne sais pas quel geste j'ai fait, mais il est resté, debout derrière moi. Cette présence dans mon dos me gênait. La pièce était pleine d'une belle lumière de fin d'après-midi. Deux frelons bourdonnaient contre la verrière. Et je sentais le sommeil me gagner. J'ai dit au concierge, sans me retourner vers lui : « Il y a longtemps que vous êtes là ? »Immédiatement il a répondu : « Cinq ans » - comme s'il avait attendu depuis toujours ma demande.

 

 

Ensuite, il a beaucoup bavardé. On l'aurait bien étonné en lui disant qu'il finirait concierge à l'asile de Marengo. Il avait soixante-quatre ans et il était Parisien. À ce moment je l'ai interrompu : « Ah, vous n'êtes pas d'ici ? » Puis je me suis souvenu qu'avant de me conduire chez le directeur, il m'avait parlé de maman. Il m'avait dit qu'il fallait l'enterrer très vite, parce que dans la plaine il faisait chaud, surtout dans ce pays. C'est alors qu'il m'avait appris qu'il avait vécu à Paris et qu'il avait du mal à l'oublier. À Paris, on reste avec le mort trois, quatre jours quelquefois. Ici on n'a pas le temps, on ne s'est pas fait à l'idée que déjà il faut courir derrière le corbillard. Sa femme lui avait dit alors : « Tais-toi, ce ne sont pas des choses à raconter à Monsieur. »Le vieux avait rougi et s'était excusé. J'étais intervenu pour dire : « Mais non. Mais non. » Je trouvais ce qu'il racontait juste et intéressant.

 

 

Dans la petite morgue, il m'a appris qu'il était entré à l'asile comme indigent. Comme il se sentait valide, il s'était proposé pour cette place de concierge. Je lui ai fait remarquer qu'en somme il était un pensionnaire. Il m'a dit que non. J'avais déjà été frappé par la façon qu'il avait de dire : « ils », « les autres », et plus rarement « les vieux », en parlant des pensionnaires dont certains n'étaient pas plus âgés que lui. Mais naturellement, ce n'était pas la même chose. Lui était concierge, et, dans une certaine mesure, il avait des droits sur eux.

 

 

La garde est entrée à ce moment. Le soir était tombé brusquement. Très vite, la nuit s'était épaissie au-dessus de la verrière. Le concierge a tourné le commutateur et j'ai été aveuglé par l'éclaboussement soudain de la lumière. Il m'a invité à me rendre au réfectoire pour dîner. Mais je n'avais pas faim. Il m'a offert alors d'apporter une tasse de café au lait. Comme j'aime beaucoup le café au lait, j'ai accepté et il est revenu un moment après avec un plateau. J'ai bu. J'ai eu alors envie de fumer. Mais j'ai hésité parce que je ne savais pas si je pouvais le faire devant maman. J'ai réfléchi, cela n'avait aucune importance. J'ai offert une cigarette au concierge et nous avons fumé.

 

 

À un moment, il m'a dit : « Vous savez, les amis de Madame votre mère vont venir la veiller aussi. C'est la coutume. Il faut que j'aille chercher des chaises et du café noir. » Je lui ai demandé si on pouvait éteindre une des lampes. L'éclat de la lumière sur les murs blancs me fatiguait. Il m'a dit que ce n'était pas possible. L'installation était ainsi faite : c'était tout ou rien. Je n'ai plus beaucoup fait attention à lui. Il est sorti, est revenu, a disposé des chaises. Sur l'une d'elles, il a empilé des tasses autour d'une cafetière. Puis il s'est assis en face de moi, de l'autre côté de maman. La garde était aussi au fond, le dos tourné. Je ne voyais pas ce qu'elle faisait. Mais au mouvement de ses bras, je pouvais croire qu'elle tricotait. Il faisait doux, le café m'avait réchauffé et par la porte ouverte entrait une odeur de nuit et de fleurs. Je crois que j'ai somnolé un peu.

 

 

C'est un frôlement qui m'a réveillé. D'avoir fermé les yeux, la pièce m'a paru encore plus éclatante de blancheur. Devant moi, il n'y avait pas une ombre et chaque objet, chaque angle, toutes les courbes se dessinaient avec une pureté blessante pour les yeux. C'est à ce moment que les amis de maman sont entrés. Ils étaient en tout une dizaine, et ils glissaient en silence dans cette lumière aveuglante. Ils se sont assis sans qu'aucune chaise grinçât. Je les voyais comme je n'ai jamais vu personne et pas un détail de leurs visages ou de leurs habits ne m'échappait. Pourtant je ne les entendais pas et j'avais peine à croire à leur réalité. Presque toutes les femmes portaient un tablier et le cordon qui les serrait à la taille faisait encore ressortir leur ventre bombé. Je n'avais encore jamais remarqué à quel point les vieilles femmes pouvaient avoir du ventre. Les hommes étaient presque tous très maigres et tenaient des cannes. Ce qui me frappait dans leurs visages, c'est que je ne voyais pas leurs yeux, mais seulement une lueur sans éclat au milieu d'un nid de rides. Lorsqu'ils se sont assis, la plupart m'ont regardé et ont hoché la tête avec gêne, les lèvres toutes mangées par leur bouche sans dents, sans que je puisse savoir s'ils me saluaient ou s'il s'agissait d'un tic. Je crois plutôt qu'ils me saluaient. C'est à ce moment que je me suis aperçu qu'ils étaient tous assis en face de moi à dodeliner de la tête, autour du concierge. J'ai eu un moment l'impression ridicule qu'ils étaient là pour me juger.

 

 

Peu après, une des femmes s'est mise à pleurer. Elle était au second rang, cachée par une de ses compagnes, et je la voyais mal. Elle pleurait à petits cris, régulièrement : il me semblait qu'elle ne s'arrêterait jamais. Les autres avaient l'air de ne pas l'entendre. Ils étaient affaissés, mornes et silencieux. Ils regardaient la bière ou leur canne, ou n'importe quoi, mais ils ne regardaient que cela. La femme pleurait toujours. J'étais très étonné parce que je ne la connaissais pas. J'aurais voulu ne plus l'entendre. Pourtant je n'osais pas le lui dire. Le concierge s'est penché vers elle, lui a parlé, mais elle a secoué la tête, a bredouillé quelque chose, et a continué de pleurer avec la même régularité. Le concierge est venu alors de mon côté. Il s'est assis près de moi. Après un assez long moment, il m'a renseigné sans me regarder : « Elle était très liée avec Madame votre mère. Elle dit que c'était sa seule amie ici et que maintenant elle n'a plus personne. »

 

 

Nous sommes restés un long moment ainsi. Les soupirs et les sanglots de la femme se faisaient plus rares. Elle reniflait beaucoup. Elle s'est tue enfin. Je n'avais plus sommeil, mais j'étais fatigué et les reins me faisaient mal. À présent c'était le silence de tous ces gens qui m'était pénible. De temps en temps seulement, j'entendais un bruit singulier et je ne pouvais comprendre ce qu'il était. À la longue, j'ai fini par deviner que quelques-uns d'entre les vieillards suçaient l'intérieur de leurs joues et laissaient échapper ces clappements bizarres. Ils ne s'en apercevaient pas tant ils étaient absorbés dans leurs pensées. J'avais même l'impression que cette morte, couchée au milieu d'eux, ne signifiait rien à leurs yeux. Mais je crois maintenant que c'était une impression fausse.

 

 

Nous avons tous pris du café, servi par le concierge. Ensuite, je ne sais plus. La nuit a passé. Je me souviens qu'à un moment j'ai ouvert les yeux et j'ai vu que les vieillards dormaient tassés sur eux-mêmes, à l'exception d'un seul qui, le menton sur le dos de ses mains agrippées à la canne, me regardait fixement comme s'il n'attendait que mon réveil. Puis j'ai encore dormi. Je me suis réveillé parce que j'avais de plus en plus mal aux reins. Le jour glissait sur la verrière. Peu après, l'un des vieillards s'est réveillé et il a beaucoup toussé. Il crachait dans un grand mouchoir à carreaux et chacun de ses crachats était comme un arrachement. Il a réveillé les autres et le concierge a dit qu'ils devraient partir. Ils se sont levés. Cette veille incommode leur avait fait des visages de cendre. En sortant, et à mon grand étonnement, ils m'ont tous serré la main - comme si cette nuit où nous n'avions pas échangé un mot avait accru notre intim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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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번역 1-1 (1)

이정서 사태의 충격도 있고, 이참에 다양한 <이방인> 번역본을 봤는데 딱 이거다 싶은 건 없어서 나름대로 <이방인>을 번역해본다. 

 

이 번역은 1942년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L'étranger를 원본으로 삼으며, 때로 이휘영, 김화영, 이기언, 김예령, 이정서 번역을 참고한다. 

 

한국에서 L'étranger 원본의 저작권은 소멸했다. 이 번역본은 무료로 배포 가능하다. 단, 영리 목적 사용은 불가능하며, 일부나 전부를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 내지 수정할 수 없다. 어차피 카뮈의 간결함을 한국어로 살려본답시고 내 멋대로 의역한 부분이 많아서 그렇게까지 신뢰할 만하진 않다. 이정서는 이런 번역을 보며 까무라치겠지만, 나도 이정서 번역을 보고 까무라쳤으므로 비긴 셈 치겠다. 

 

 

제1부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제였나, 잘 모르겠네. 양로원에서 전보를 보냈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근조.’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쩌면 어제였을 수도. 

 

 

양로원은 마랑고에 있다. 알제에서 80킬로미터 거리다. 두 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 중에 도착하겠지. 그럼 거기서 밤을 새우고 내일 저녁까지 돌아올 수 있다. 사장에게 이틀 휴가를 달라고 했고, 내 사정상 사장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썩 내킨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심지어 “제가 잘못한 건 없잖아요.”라고 덧붙였다. 사장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순간 괜한 말을 했구나 싶었다. 어쨌든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으니. 오히려 사장이 조의를 표했어야 하는데. 내가 모레 상장을 달고 나타나면 그때 표하겠지. 아직은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은 것 같은 어중간한 상태지만, 장례를 치르고 나면 일이 정리될 테고, 모든 게 보다 공적인 모양새를 띠게 될 것이다. 

 

 

두 시에 버스를 탔다. 매우 더웠다. 평소처럼 셀레스트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들 내 소식을 듣고 많이 안타까워했다. “한 분뿐인 어머니셨는데.” 셀레스트가 말했다. 떠날 때가 됐고, 모두 나를 문밖까지 배웅해줬다. 검은 넥타이와 상장을 빌리기 위해 에마뉘엘네 집에 들러야 해서 조금 정신이 멍했다. 에마뉘엘은 몇 달 전 삼촌을 잃었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었다. 서두르고 달렸다. 버스는 흔들렸고 휘발유 냄새는 진동했다. 도로와 하늘의 반사광까지 더해졌다. 이 모든 것들 때문인지 난 깜박 잠들었다. 가는 내내 잤다. 깨어나 보니 옆자리 군인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군인은 미소를 짓더니 멀리서 왔느냐고 물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 “네.”라고 답했다. 

 

 

양로원은 마을에서 2킬로미터 거리다. 양로원까지 걸어갔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엄마를 보려고 했다. 그런데 수위가 원장부터 만나야 한다고 했다. 원장이 다른 일부터 처리하는 동안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내내 수위가 말을 붙였고, 마침내 원장과 만나게 됐다. 원장실로 안내받았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단 쪼그만 노인네였다. 원장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악수를 했는데 어찌나 오래 손을 붙잡고 있던지 이걸 어떻게 빼야 하나 난감할 정도였다. 원장은 관련 기록을 보더니 “어머님께서 3년 전부터 이곳에 계셨군요. 아드님이 유일한 부양자였네요.”라고 말했다. 마치 비난받는 기분이어서 뭐라도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내 말을 끊고 부드럽게 말했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아드님은 어머니를 부양하기 힘든 형편이더군요. 아드님 벌이로는 어머님께 필요하셨던 간병인을 붙여줄 수 없었을 겁니다. 결국 말입니다, 어머님께선 이곳에 머물며 더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원장은 덧붙였다. “어머님께선 여기서 비슷한 연배 분들과 친분을 쌓으셨죠. 같이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며 지내셨던 겁니다. 아드님과 둘이 계셨다면, 아마 심심해하셨을 겁니다. 아드님은 젊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나랑 한집에 사셨을 때 엄마는 언제나 아무 말 없이 나를 주시하며 시간을 때우셨으니. 처음 양로원으로 모셨던 며칠간 엄마는 계속 우셨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러신 거였다. 양로원에서 몇 달 지내시더니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잘 적응하셨다. 익숙해지셨으니까. 그래서였나,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1년 동안은 통 찾아뵙질 않았다. 한 번 찾아뵈려면 일요일을 전부 날려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그뿐인가, 버스를 타러 가야 하지, 표를 사야 하지, 두 시간 동안 이동해야 하지… 

 

 

원장이 또 말을 걸었다. 어차피 잘 안 듣고 있었지만 이 말은 알아들었다. “어머님을 뵙고 싶지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원장은 서둘러 문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원장은 설명했다. “어머님을 작은 빈소에 안치시켜 드렸습니다. 다른 노인분들을 놀래고 싶지 않거든요. 재원자 한 분이 돌아가실 때마다, 다른 분들께서 며칠 정도 날카로워지신답니다. 그럼 우리가 일하기 힘들어지지요.” 우리는 서너 명씩 모여 떠들고 있는 노인들로 가득 찬 마당을 가로질렀다. 우리가 지나가려 하면 조용해졌다가, 지나가고 나니까 다시 수다를 떨더랬다. 숨죽인 채 재잘거리는 앵무새 무리 같았달까. 원장은 작은 건물 입구에 나를 남겨두며 떠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 사무실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 오세요. 보통 아침 열 시에 장례를 치릅니다. 그때까지 고인 곁을 지키면 될 겁니다. 참, 어머님께서는 종교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싶으시다고 평소 주변 분들께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일단 그렇게 준비해두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알려드립니다.” 고맙다고 했다. 엄마가 무신론자는 아니셨지만, 그렇다고 살아생전 신앙생활을 하신 것도 아니었는데.

 

 

Première partie

 

I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 « Mè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L'asile de vieillards est à Marengo, à quatre-vingts kilomètres d'Alger. Je prendrai l'autobus à deux heures et j'arriverai dans l'après-midi. Ainsi, je pourrai veiller et je rentrerai demain soir. J'ai demandé deux jours de congé à mon patron et il ne pouvait pas me les refuser avec une excuse pareille. Mais il n'avait pas l'air content. Je lui ai même dit : « Ce n'est pas de ma faute. » Il n'a pas répondu. J'ai pensé alors que je n'aurais pas dû lui dire cela. En somme, je n'avais pas à m'excuser. C'était plutôt à lui de me présenter ses condoléances. Mais il le fera sans doute après-demain, quand il me verra en deuil. Pour le moment, c'est un peu comme si maman n'était pas morte. Après l'enterrement, au contraire, ce sera une affaire classée et tout aura revêtu une allure plus officielle.

 

 

J'ai pris l'autobus à deux heures. Il faisait très chaud. J'ai mangé au restaurant, chez Céleste, comme d'habitude. Ils avaient tous beaucoup de peine pour moi et Céleste m'a dit : « On n'a qu'une mère. » Quand je suis parti, ils m'ont accompagné à la porte. J'étais un peu étourdi parce qu'il a fallu que je monte chez Emmanuel pour lui emprunter une cravate noire et un brassard. Il a perdu son oncle, il y a quelques mois.

 

 

J'ai couru pour ne pas manquer le départ. Cette hâte, cette course, c'est à cause de tout cela sans doute, ajouté aux cahots, à l'odeur d'essence, à la réverbération de la route et du ciel, que je me suis assoupi. J'ai dormi pendant presque tout le trajet. Et quand je me suis réveillé, j'étais tassé contre un militaire qui m'a souri et qui m'a demandé si je venais de loin. J'ai dit « oui » pour n'avoir plus à parler.

 

 

L'asile est à deux kilomètres du village. J'ai fait le chemin à pied. J'ai voulu voir maman tout de suite. Mais le concierge m'a dit qu'il fallait que je rencontre le directeur. Comme il était occupé, j'ai attendu un peu. Pendant tout ce temps, le concierge a parlé et ensuite, j'ai vu le directeur : il m'a reçu dans son bureau. C'était un petit vieux, avec la Légion d'honneur. Il m'a regardé de ses yeux clairs. Puis il m'a serré la main qu'il a gardée si longtemps que je ne savais trop comment la retirer. Il a consulté un dossier et m'a dit : « Mme Meursault est entrée ici il y a trois ans. Vous étiez son seul soutien. » J'ai cru qu'il me reprochait quelque chose et j'ai commencé à lui expliquer. Mais il m'a interrompu : « Vous n'avez pas à vous justifier, mon cher enfant. J'ai lu le dossier de votre mère. Vous ne pouviez subvenir à ses besoins. Il lui fallait une garde. Vos salaires sont modestes. Et tout compte fait, elle était plus heureuse ici. » J'ai dit : « Oui, monsieur le Directeur. » Il a ajouté : « Vous savez, elle avait des amis, des gens de son âge. Elle pouvait partager avec eux des intérêts qui sont d'un autre temps. Vous êtes jeune et elle devait s'ennuyer avec vous. »

 

 

C'était vrai. Quand elle était à la maison, maman passait son temps à me suivre des yeux en silence. Dans les premiers jours où elle était à l'asile, elle pleurait souvent. Mais c'était à cause de l'habitude. Au bout de quelques mois, elle aurait pleuré si on l'avait retirée de l'asile. Toujours à cause de l'habitude. C'est un peu pour cela que dans la dernière année je n'y suis presque plus allé. Et aussi parce que cela me prenait mon dimanche - sans compter l'effort pour aller à l'autobus, prendre des tickets et faire deux heures de route.

 

 

Le directeur m'a encore parlé. Mais je ne l'écoutais presque plus. Puis il m'a dit : « Je suppose que vous voulez voir votre mère. » Je me suis levé sans rien dire et il m'a précédé vers la porte. Dans l'escalier, il m'a expliqué : « Nous l'avons transportée dans notre petite morgue. Pour ne pas impressionner les autres. Chaque fois qu'un pensionnaire meurt, les autres sont nerveux pendant deux ou trois jours. Et ça rend le service difficile. » Nous avons traversé une cour où il y avait beaucoup de vieillards, bavardant par petits groupes. Ils se taisaient quand nous passions. Et derrière nous, les conversations reprenaient. On aurait dit d'un jacassement assourdi de perruches. À la porte d'un petit bâtiment, le directeur m'a quitté : « Je vous laisse, monsieur Meursault. Je suis à votre disposition dans mon bureau. En principe, l'enterrement est fixé à dix heures du matin. Nous avons pensé que vous pourrez ainsi veiller la disparue. Un dernier mot : votre mère a, paraît-il, exprimé souvent à ses compagnons le désir d'être enterrée religieusement. J'ai pris sur moi, de faire le nécessaire. Mais je voulais vous en informer. » Je l'ai remercié. Maman, sans être athée, n'avait jamais pensé de son vivant à la religion

 

 

* * *

 

간단한 노트. 뫼르소가 자기 어머니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보통 생각들 하지만, 'maman'은 성년이 자기 어머니를 다정하게 부르는 호칭이다. 뫼르소가 어머니를 존대하게끔 번역했다. 그리고 '나는(je)'는 최대한 생략했다. <이방인>은 1인칭 소설이면서도 3인칭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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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를 옹호하며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01/04 23:35
  • 수정일
    2015/04/17 18:34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성폭력 개념과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사회과학대 학생회는 반성폭력 회칙을 개정하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했고 성폭력 개념을 수정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1.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된 맥락과 무죄추정의 원칙, 2. 성폭력 희화화와 대중운동을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3.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동시에 관악 여성주의 모임 달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1.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된 맥락과 무죄추정의 원칙

 

(1) 사건 해결과 당사자의 진술

 

과거 일어난 사건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의 진술이 엇갈릴 때 제3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을 할까요? 바로 당사자 진술의 신빙성입니다. 진술이 얼마나 일관적이고 구체적인가,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는가를 두고 누구 진술을 더 신뢰할지 결정하게 됩니다. 그게 우리들이 일상에서 겪는 다툼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법정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주장과 증명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어느 정도로 증명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많은 이론과 판례가 있으며, 각종 절차법이 우리 일상보다 정교하고 세밀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진술과 진술이 엇갈릴 때 누구 말이 더 신빙성 있는지 판단해야만 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2) 성폭력 피해자 진술과 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사건은 당사자 진술 이외 다른 증거가 없고, 당사자 진술이 자주 갈리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날까지도 피해자 진술은 부당하게 공격받고, 편견과 잘못된 사회 통념을 바탕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깎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성관계 동의를 간주하려거나, 피해자가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을 들어 피해자 신뢰성을 낮추려는 시도가 그렇습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런 공격들을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통념에 기반한 부당한 시도로 규정합니다. 이런 공격들이 피해자의 경험과 느낌, 아울러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피해자를 부당한 의심과 불필요한 질문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한 두 개의 질문이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이미 수사기관들부터 남성중심적인 시선에 갇혀 있고, 피해자에게 전혀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위축되고 자기가 겪은 일을 제대로 진술하기 힘들어집니다. 여기서부터 피해자 대리인 제도와 신뢰관계인 동석, 피해자 진술 녹화제도가 도출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남성중심적인 사회구조 자체의 변화 없이는 피해자의 경험과 느낌이 제대로 진술될 수 없고, 진술되더라도 사건 해결에 제대로 반영될 수 없다는 최종적인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그 고민을 정리한 표현이 바로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입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피해자의 경험, 진술은 부당한 의심과 공격에 끝없이 노출되므로 그에 대항하는 원칙으로, 피해자 진술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 것입니다.

 

(3) 무죄추정의 원칙에 대한 설명

 

형사절차에서 검사는 권력독점체인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체포, 구속, 압수, 수색, 검증을 통해 피고인에 비해 압도적인 증거수집능력을 지닙니다. 아무리 피고인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피고인과 검사가 동등하게 대결하는 한 힘의 균형은 절대적으로 검사에게 쏠립니다.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가 무죄추정의 원칙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범죄사실을 주장하고 치밀하게 증명할 책임을 모두 검사에게 돌리는 원리입니다. 만약 검사가 합리적 의심을 지울 정도로 범죄사실을 증명하는 데 실패한다면, 피고인에 대한 혐의가 남아 있더라도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아무리 무죄추정의 원칙을 엄중하게 적용하더라도 여전히 양 당사자 진술의 신빙성은 요구됩니다. 즉 법관은 여전히 누구 진술이 더 합리적이고, 일관적이며 구체적인지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다만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이 낮더라도 함부로 유죄를 선고하지 못하게 만들고, 검사 측 증인들의 증언을 상당한 수준으로 신뢰할 수 있는 때에야 유죄를 선고하기 만듭니다.

 

형사절차가 아닌 경우에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가요?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이래로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절차에만 적용되어 왔습니다. 애초에 권력독점체인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그런 권력독점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민사절차를 비롯한 다른 법 영역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일반적인 증명책임입니다. 주장하는 자가 증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증명이란 결국,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누구 진술이 더 신빙성 있는가 문제로 복귀하게 되며, 피고인을 더 유리하게 취급한다든가 할 필요는 사라집니다.

 

(4)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해자 중심주의

 

만약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를 형사절차에도 도입한다면 무죄추정의 원칙과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재 형사절차에서 성폭력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규정한 입법례는 전세계적으로 거의 전무합니다. 여성주의자들조차 형사절차에까지 피해자 진술에 대한 1차적 신뢰를 도입하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앞서 소개한 대로 수사과정과 법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막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직업을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편견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규제하려고 합니다. 미국 등 몇 개 국가는 이런 규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피해자 신뢰관계인 동석 등은 특별법으로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성폭력 자치규약은 형사절차가 아닙니다. 학생사회에 국한해서 보자면, 학생회가 강제수사권을 갖는 권력독점체도 아닙니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형사절차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발생하는 까닭은 "성폭력 = 범죄 = 형사처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은 범죄일 뿐만 아니라 민사상 불법행위이며 각종 단체의 내규에 따른 징계 사유입니다. 민사상 불법행위로서 성폭력을 판단할 때 무죄추정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으며, 징계 사유에 대한 검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남는 것은 일반적인 증명책임이며, 피해자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 가해자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 문제로 귀결될 뿐입니다.

 

형사법 분야에서 국가가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에 피고인을 유리하게 다루듯, 다른 법 분야에서도 권력의 편향이 나타날 경우 증명책임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의료분야나 기업을 상대로 하는 환경소송이나 제조물책임소송 등은 한 쪽에 권력이 편향되었기 때문에 도리어 기업이나 의사를 상대로 소송하는 측의 증명책임을 완화시켜주는 법리들이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원칙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합니다. 남성중심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남성인 가해자 측에 권력이 편향되기 쉽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정으로서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는 차원입니다. 형사절차라면 무리가 있겠지만 자치규약에서 이런 원리를 도입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을뿐더러, 피해자 중심주의에 의한 증명책임의 보완 내지 수정은 오히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시정한다는 점에서 필요합니다.

 

(5) 피해자 중심주의와 자의적 판단 문제

 

오늘날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피해의 호소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기존 남성중심적인 시선에서 탈피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개정된 사화과학대 반성폭력 회칙은 “이[피해자 중심주의]에 기반한 정책은 피해를 호소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든 자의적 사유로 누군가를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고 재단할 권력을 쥐어주는 명백히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결과를 낳는다.”라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성폭력상담소 등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근거로 피해자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피해자가 피해를 주장한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진 않습니다. 설령 피해자의 호소가 있더라도, 그리고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되었더라도 피해자와는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분명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유발할 수 있는 자의성이 존재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실제 적용에서 우려했던 것만큼 자의적으로 적용되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정된 반성폭력 회칙은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 혹은 몇 가지 사건을 근거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자의적인 판단을 불러일으킨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된 맥락을 너무 단순화시킵니다. 개정 전 사회과학대 반성폭력 회칙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소 애매하게 규정했고,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의 문제이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2. 성폭력 희화화와 대중운동 

 

(1) 성폭력에 대한 희화화

 

반성폭력 운동은 전진된 성폭력 개념을 제시해왔지만 항상 좋은 반응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 희화화와 조롱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성폭력 개념을 포괄적으로 잡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3회 이상 상대방에게 교제나 만남을 요구하는 방식의 스토킹을 처벌하는 경범죄처벌법 개정을 둘러싼 희화화입니다. 이런 유형의 스토킹은 경찰청조차 성범죄로 분류할 정도로 ‘좁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경범죄처벌법 개정에 대해서 “이젠 무서워 고백도 못하겠다”, “여성분들 앞으론 두 번만 튕기는 걸로 합시다” 등의 조롱도 상당했습니다.

 

두 번째는 부부강간입니다. 흉기를 들어 폭행을 하는 부부강간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폭행이나 협박을 동반하지 않은 동의 없는 부부간 성관계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반성폭력 운동의 주장에 대해서는 숱한 희화화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는 성노동자의 성폭력 피해입니다. 성노동자도 당연히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노동자가 자기 성폭력 피해사실을 고발한 대자보에 대해 쏟아진 야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스토킹과 같은 ‘전형적’인 성폭력조차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만약 포괄적인 성폭력 개념이 희화화의 원인이었다면 스토킹에 대한 희화화가 없었어야 함에도 운동권 내에서조차 조소가 이어졌습니다.

 

(2) 희화화와 운동에 대한 진단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포괄적인 성폭력 정의가 성폭력의 무게감을 없애 희화화를 촉발했다고 말하지만, 문제가 있는 분석입니다.

 

우선 포괄적인 성폭력 정의가 성폭력을 흉악하고 잔혹한 범죄로만 취급하는 통념적인 시각을 없애려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은 포괄적 성폭력 정의를 통해 성폭력이 뿌리깊은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우리가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대상으로 정의하려 했습니다. 무게감을 아예 없애는 게 아니라 그 내용과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무게감을 없앤 건 반성폭력 운동이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반성폭력 운동 진영의 주장을 희화화한 당사자들입니다. 당연합니다. 희화화 자체가 상대방 주장을 조롱하면서 그 무게감이나 진지함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무게감을 없애기 위한 희화화는 끝없이 이루어집니다. 전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비꼬거나, 좌파들이 조금만 반자본주의적인 이야기를 하면 북한이나 가라며 윽박지르는 반응들이 그렇습니다. 희화화하는 측은 상대방이 어떠한 빌미를 제공하기만 하면, 때론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도, 희화화를 합니다. 그걸 가지고 대중운동의 성패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성급합니다.

 

(3) 젠더 기반 폭력과 대중운동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반성폭력 운동이 그 동안 고수해온 젠더 기반 폭력을 바탕으로 한 성폭력 개념은 실패했으며,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이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주장을 보면 마치 반성폭력 운동 전반이 여태까지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주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성폭력 법제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반성폭력 운동 진영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 개념을 관철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신상숙, 젠더, 섹슈얼리티, 폭력, 2008, p. 30). 이후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규정하고, 그런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2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여전히 성폭력을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정의해오는 경우가 오히려 소수였던 셈입니다. 

 

학생사회나 운동사회 중에서도 이미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을 받아들인 곳이 존재합니다. 사회 전반에 비추어 보면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인식이 더더욱 압도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언론기사는 물론이고 보수적이라고 평가하는 법원조차 판례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이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에 거부감을 느끼고,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이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반성폭력 운동 진영과 여타 미디어, 법률 교과서, 판례, 공공기관 주도 성교육이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규정하고, 가르치고, 홍보해왔기 때문입니다. 

 

학내 반성폭력 운동이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주장해왔으나 실패했다는 진단 역시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심지어 반성폭력 운동 진영마저도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와 동일시하는 마당에 학내에서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주장한다고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아무리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초점을 젠더 기반 폭력에 맞추더라도,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학내 반성폭력 운동이 곧바로 효과를 나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4)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이 남긴 과제

 

20년 넘게 성폭력이 성적 지기결정권 침해라고 주장해서 얻은 것과 아직 얻지 못한 것이 각각 있습니다. 우선 정조를 침해한 죄로서 성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피해자에 대한 비난도 일정 부분 줄어들었습니다. 

 

부부강간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아냈으며 친고죄 역시 폐지되었습니다. 대중들의 인식 역시 적게나마 바뀌었습니다. 

 

반면 구조적 성격으로서 성폭력은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줄어들진 않았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성폭력 범죄 형량이 늘어났으며, 언론 보도는 갈수록 선정적으로 흘러갑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이라는 관념이 남성 편향적 섹슈얼리티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 이 지점을 반증합니다. 여전히 사회는 성폭력을 야기하는 구조를 바꾸는 데 주저하고, 성폭력이 일부 사이코패스에 의한 범죄라는 인식은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내 성폭력 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반성폭력 운동이 다시금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강조하고 쟁점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개인 대 개인 문제로 치환되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사회적 이슈로 옮겨오는 작업입니다. 

 

이에 비해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학내 반성폭력 진영이 도리어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포기하고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을 도입해야 비로소 대중이 성폭력을 구조적 문제로 바라볼 수 있는 매개가 생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지난 20년 간 반성폭력 운동이 한계를 드러낸 지점을 반복하자는 것입니다. 반복이라고 하기도 애매합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폭력 정의인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에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정의를 끼워 맞추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가 대중이 성폭력을 구조적 폭력으로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5) 성폭력 사건 공론화 문제

 

대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성폭력의 민주적 해결을 강조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무엇을 성폭력이라고 볼 것인지 구성원 사이에 합의하고 결정하면 된다고 합니다. 성폭력 사건은 공론장 안에서 평가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정 반성폭력 회칙 역시 사건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포함한 평가 절차를 공개적으로 하도록 강제합니다(제10조 제1항 제5호, 제2항). 피해자가 이런 공개 과정을 원하지 않는다면 아예 처음부터 신고를 하지 말거나, 신고를 반려하도록 요청해야 합니다(제9조 제3항 제1호).

 

물론 진상조사 결과에 대한 공개 범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건이 성폭력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애매한 경우, 공론화를 통해 성폭력 여부를 결정하는 이상 구체적 사실관계 공개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구체적 사실관계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폭력 여부를 결정하고 사건을 평가하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소간의 사실관계를 포함한 진상조사 결과 공개가 필수적이고, 그 공개된 진상조사를 가지고 어느 구성원이든 참석해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평가회가 열리는 이상 피해자의 생존권은 매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자기 사건이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공동체 내에서 어디서든 자기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고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정 회칙은 심지어 평가의 권한을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것을 경계합니다(제10조 제2항 제1호 해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은 대중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맥락의 복잡함이나 피해자 심리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위해 전문성 역시 동시에 추구합니다. 성폭력 상담원 교육과정이 존재하는 까닭도 바로 이 전문성 확보를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전문가에 의한 판단을 경계하고 공론장에서의 토론을 통해 사건을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개정 회칙이나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성폭력 사건에는 구체적 피해자가 존재하며, 그 피해자는 대중에 대한 공개가 아니라 훈련을 받은 전문가에 의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등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재평가

 

(1) 미비했던 제도적 장치

 

기존 회칙이나 대책위원회 운영에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기존 회칙은 피해자의 진술이나 발언에 대한 2차적 판단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란 곧 피해자의 말에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다음으로 가해자 대리인 제도가 도입되어 있지 않아 각 당사자가 대책위원회 테이블에서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불러 일으키고,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 상담소를 비롯한 전문 상담소와의 연계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거나 애매한 사건의 경우 도리어 외부 단체와 공동 테이블을 모색하거나 적어도 조언이라도 구해서 보다 수월한 해결을 도모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미비점들은 각 당사자들의 감정적 충돌이나 갈등을 부추기거나 완충 지대를 마련해주지 못하며, 피해자에 대한 ‘설득’을 어렵게 합니다.

 

(2) 성폭력이었는지 여부?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이런 미비점과, 그런 미비점으로 인한 결과들이 모두 피해자 중심주의와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은 절대 성폭력이 아니었다, 나아가 “잘못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건으로 확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젠더 기반 폭력에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성폭력 개념을 바꿔오면 당연히 그 사건이 성폭력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자기 성적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고 구성할 권리이듯, 어디까지를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그 침해로 규정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성별 발언권이 충분히 보장된 상태에서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자기 성적 행위를 스스로 구성하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요? ‘성’을 섹슈얼리티로 해석하는 것 같은데, 자기 섹슈얼한 행위의 구성이 어디까지인지, 섹슈얼리티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그렇게 단정적으로 정할 수 있는가요? 연애 관계 끝에서 이별하는 것이, 성별 발언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 섹슈얼리티와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요?

 

이런 문제에 대해 개정 회칙은, 그리고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공론장에서 평가하면 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설령 공론장에서의 토론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섹슈얼한 행위의 구성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발제하고 토론해도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확답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3) 사건에 대한 재평가

 

오히려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에서는 그 사건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지 여부가 핵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건의 맹점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반드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하고, 그 테이블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각 성폭력 사건은 그 사건만의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피해자가 제대로 치유될 수 있고 고통이 최소화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피해자 중심주의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중심주의란 상황에 따라서는 피해자에 대한 설득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설득을 시도한 류한수진 씨의 행동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과연 그런 설득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일어났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런 사항들을 SNS에 독자적으로 공개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책위원회 구성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 다른 방식의 치유는 어려운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고 보지만, 이를 단지 류한수진 씨만의 책임으로 돌리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별개로 피해자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 곧바로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는 식의 판단을 허용한 기존 회칙의 미비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하고, 여타 전문 상담가가 대책위원회 테이블에 참여하는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점은 개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지점들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지,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의 폐기와 성폭력 개념의 축소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4)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의 폐기가 필요한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제가 3자적 위치에서 이 사건을 다 정리하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과연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한 사건을 둘러싼 미비점이나 문제점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하고 성폭력 개념을 축소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논리적 비약과 성급한 결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기존 회칙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런 문제점은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점들을 고쳐나가면 될 뿐,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를 폐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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