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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3

 

5. 노동자의 주도권(통제권) 확장으로서 산업과 사회적 의제로의 발전


가. 산업적․사회적 의제로 나아갈 필요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내적인 필요성이다.

 제조업이 공동화된다. 공장이 중국으로 빠져나간다. 이미 중국에 공장을 짓고 한국에서 생산을 폐쇄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중소사업장 노조에게 투쟁하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매각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점이 붙는다. 정부는 해외매각방침을 가지고 있다. 채권단은 요지부동이다. 이 문제는 결코 채권단의 하수인에 불과한 사측과 싸워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조건으로 펼쳐지는 상시적 구조조정시대에 대응하는데 있어서 산업적, 사회적인 의제로 나가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아직 우리는 계기적으로만 산업적 사회적 의제에 대응해 왔을 뿐이다. .


 둘째로 단기이익 추구와 실리주의의 극복을 위한 매우 중요한 해결 방안이다.

 조합원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현실에 한푼을 챙긴다. 그 전망이란 무엇인가? 이미 기업단위를 넘어선 문제들이 다가오는데 산업적 연대와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대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조합원들은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점에서 산업적, 사회적 의제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는 것은 조합원의 개별화를 막고 대안을 향해 단결시키는 중요한 문제이다.


 셋째로 노조의 사회적인 고립화의 위기에 대응하는 문제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최근의 공격들은 특히 대공장노조들을 ‘이권집단’으로 매도함으로서 국민과 분리시켜 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넷째로 노동운동의 전략적인 발전을 위해서다.

 노동운동은 이제 조합주의적인 국면을 넘어서 무너진 조직력을 다시 세움으로서 사회적인 주도권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이점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적 주도계급으로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산업과 사회적인 의제롤 나아간다는 것은 곧 낡은 임단협이라는 더 이상 배울게 없는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나. 사회적인 의제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사례


 과거에 우리는 특수한 경우에만 의제를 확대하였다. 다행히도 2004년 들어서 각 산별연맹은 발전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사회적인 의제로 확대하고 있다.

 민주노총에서 최근 몇 년간 강조해온 ‘사회공공성’의 확대를 위한 노력도 그 사례이다.  택시노조가  “속도보다 안전을” 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것 또한 일단은 발전이다.  보건의료노조가 “돈보다 생명을” 주장하는 것 또한 중대한 발전이다.  괘도노동자들이 “ 이윤보다 안전을” 외치면서 인원증대를 요구한다. 자동차노조들이 “사회적 책무”를 앞세우고 “사회기금”을 주장하는 것 또한 발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매우 서투른 것들도 있다. 문제들도 안고 있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본다면 노동조합이 의제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또한 의제들의 확장은 투쟁전술에서도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이미 페턴화된 임단협에서 처럼 언제 요구안을 제출하고 언제 교섭집중기고 쟁점을 추려서 얼마간 때려 박고 그래서 막판 타결하는 류의 전술로는 턱도 없는 문제들이다. 의제의 확장은 투쟁방법과 전술의 확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간부와 지도력을 요구한다.


다. 사회적 의제로 나가기 위한 전제


 사회적 의제를 향해 나가려는 경향은 특히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회적 의제로 나가는데 있어 꿈틀거리는 위험요소들을 반드시 짚지 않으면 안된다. 그 위험요소들은 노동운동의 상시적인 경향으로 작동하는 사고법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우경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파생하는 위험요소이다.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는 관점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운동을 국민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든지 혹은 노동운동에 가해지는 자본과 정권의 공격 때문에 노동운동이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린다면 노동운동은 더 이상 계급운동이 아니라 ‘눈치보는 운동’으로서 결국은 탈 계급화된 운동으로 전락할 것이다. 특히 이점에서 사회적 의제를 전면에 내걸고 나가는 것이 노동운동의 대중적 기초가 취약한 상태에서 이를 방치하고 진행된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둘째는 협소한 계급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이런 문제는 이미 지난 노동운동의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여 온 문제들이다. 예를 들면 기아차나 대우차, 그리고 쌍용자동차의 매각과정에서도 협소한 계급주의를 주장하는 경우, 극단적으로 ‘어떤 자본에게 매각되든 상관없다. 노동자의 고용과 생존만 보장되면 된다’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결국 매각과정에서 노동조합이 고용과 단협만 보장되면 된다는 식으로 수세적 대응을 하게 만들어 매각투쟁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으로서 매각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이후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전망을 고민하는 것을 차단한다.

 다른 사례도 있다. 금속의 자동차분과에서는 ‘산업정책에의 개입’을 주장한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무슨 산업정책을 논의하는 것인가?’는 반론을 제기한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관점에 근거하여 산업적 대안을 제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본의 산업정책에 대한 단순한 문제제기와 책임을 묻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사후적 반대운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는 숨겨진 노예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노예는 주인이 경영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따르고 주인이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된다. 진정 주인이고자 한다면 경영, 산업정책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대안을 제출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오른쪽으로부터 국민주의적 위험이 사회적의제로 나가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탈 계급화 할 우려가 있다면 왼쪽으로부터 발생하는 협소한 계급주의적 오류는 노동운동의 발전 자체를 가로막고 노동운동을 소아적인 정체와 퇴보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점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발전과정에서 끊임없이 좌우 양 편향에 맞서 싸우는 내부투쟁을 거치게 될 것이다. 다만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때로는 우익적 요소에 맞선 내부투쟁이 중요해 질 것이고 또한 다른 상황에서는 좌익소아병적 요소들에 맞선 투쟁이 중요해 질 것이다.         

    

라. 산업과 사회적 의제로 나갈수록 산업․사회적 교섭이 요구된다.


 노동조합이 조직을 결성하면 반드시 교섭으로 나가는 것이 필연적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이 산업적 혹은 전국적 차원에서 산업의제나 사회적 의제를 전면화 해 나갈 경우 필연적으로 사회적 교섭에 부딪치게 된다. 이점에서 노동운동이 산업적, 사회적 의제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딪칠 산업적, 사회적 교섭에 대한 분명한 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좌우편향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좌익소아병적 견해들은 이런 교섭 자체를 금기로 여긴다.

 금속연맹의 자동차분과는 산업정책에 대한 개입을 주장하면서 자동차공업협회와 노사간 상시적인 논의기구를 제안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 전략적인 계획을 갖지 못한 소아병적인 견해들은 우스꽝스럽게도 이것이 노사협조주의가 아니냐는 우려를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이런 소아병적인 견해들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교섭에 대한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는 전투적 구호들이 요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가 결국은 교섭과정에서 그야말로 어이없는 실패를 통해서 완전히 무너지는 꼴들을 보아왔다. 수많은 노동조합들의 구조조정투쟁과정이 그러했다. 발전산업의 구조조정에 맞선 연대투쟁도 그러한 사례였다.


 우익적 견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교섭자체를 목적시 한다.

 계급적 노선이 불분명한 친정부적인 인사들은 드러내지 않지만 사실상 의도적으로 노사정교섭구조를 신성시한다. 또한 대중투쟁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섭테이블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들이 만연하여 겉으로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정부와 자본과 경쟁적으로 창구를 개설한다. 소위 ‘사회적 조합주의’로 표현된 바, ‘코포라티즘’을 전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구조자체를 전략적인 목적으로 사고한다.


 문제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과연 산업적 사회적 교섭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현재 노사정위원회에 대하여 대중의 생각은 뭘까? 2004년 현대차의 조합원 설문결과에 따르면 70%가 넘는 조합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노사정위에 들어가는 것을 지지한다. 여기에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노사정위 가입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이런 사정을 알기에 노사정위 참가를 자신 있게(?) 추진한다.

 그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다시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주장하면서 대립각을 세울 것인가?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자체로 꼼꼼히 따져야 할 문제다. 다만 단순하게 결론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대책 없이 노사정위 불참을 주장하는 대안 없는 반대를 반복해선 안된다.

 적어도 우리 스스로의 전략적인 계획 아래에 산업적 사회적인 교섭형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노사정위 참가는 뻔하다. 노무현정권이 새롭게 ‘사회경제위원회’(?)같은 방식 또는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에 반대를 아무리 외친들 마치 민주노총이 국고보조금을 받는 문제가 동일하게 현실화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 하에 산업적 차원의 교섭테이블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산별노조들이 추진하는 산별교섭구조도 있다. 금속의 자동차분과가 주장하는 ‘자동차산업차원의 노사공동기구’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며 공공부분은 교섭구조 자체가 정부를 포괄한다.

  민주노총이 노사정 위원회에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서 임하게 되는가를 따져 나가야 할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설혹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난리를 떤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전략적인 목적 하에 주도적인 교섭틀을 만들어 간다면 그것으로부터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불필요하지만 한가지만 덧붙이자.

 산업적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교섭테이블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노동조합의 산업적 의제로의 집중을 이뤄내기 위해서도 우리가 주동적으로 교섭테이블을 주장하고 만들어 갈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교섭테이블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결렬선언 후 파업을 하는 것처럼 탈퇴를 조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계획 하에 교섭테이블을 먼저 주장하고 혹은 스스로 박차고 나올 수도 있기에 교섭테이블은 우리의 계획과 실력에 따라서 활용되는 것일 뿐 우익적 견해처럼 그 자체가 전략적인 목표이거나 혹은 좌익적 견해처럼 그런 구조에 들어가는 것이 노동운동의 종말을 의미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 산업적, 사회적 의제들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를 산업적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 가는 방향이 있다. 주 5일 근무제와 비정규직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또한 고용불안의 원인인 제조업의 공동화,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 각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자유무역협정도 중요한 의제들이다. 

 노동자들이 준비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의제들도 있다. 예를 들면 ‘탄핵정국’처럼 국민적 쟁점으로 떠오른 의제들은 노동자의 참가여부와 참여방향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난다.

 반전평화투쟁이나 통일운동의 경우도 대중적으로 준비된 의제들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의제들은 당위적인 의제들로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계몽적인 접근을 불가피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의제들에 노동자들의 개입능력에 따라서 판단해야한다. 그러지 않고 과도하게 이를 주장한다면 어거지에 불과한 관념으로 전락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산업적 사회적인 의제를 만들어 내고 주도권을 발휘하는 문제는 임단협수준이 아닌 운동전략을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거나 왜곡될 것이다. 전략적인 계획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저 주어진 쟁점들을 따라다니고 엉뚱하게 개입하여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향후의 노동운동은 단순히 쪽수에 기초하여 힘을 보여줌으로서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제설정의 선점능력에 달려 있기도 하다.   


6. 노동조합의 조직발전에 대한 재검토


가. 계급적 단결의 형태로서 대중조직의 발전방향은 ‘한국노동자단일노조’다.


 노동자계급이 완전한 계급으로서 조직된다는 것은 지역과 업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를 넘어서 동일한 의무와 동일한 권리를 갖는 동등한 조직원으로서 하나의 조직원리에 통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를 실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조직형태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단일한 노조로 조직되는 것이다.  물론 ‘한국노동자단일노조’라는 단일조직의 원리에 조직된다고 해도 지역과 업종 및 산업 등 다양한 조건에 따른 다양한 활동들이 보장되는 내부의 조직체계를 가질 것이다.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은 사실은 노동계급에 대한 대표성을 온전하게 갖고 있지 못하다. 조직률이 턱없이 낮을 뿐만 아니라 한국노총의 완전히 재편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대공장 중심이며 아직 비정규직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은 정규직 대공장의 노동자에 비하여 규모는 물론 임금과 노동조건 및 민주노총에서의 의사결정과정의 실질적인 권리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하지만 지역과 업종,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동일한 권리로 조직된 ‘전국노동자단일노조’를 현재의 대중조직 방침으로 곧바로 내 놓는다고 하면 참으로 가당치 않게 여길 것이다. 


 문제는 전국의 노동자를 계급으로서 통일시켜 나가는 과정에서의 현실에 맞는 조직발전의 방침이다. 지금까지 노동조합의 조직발전 경로는 ‘기업별노조 → 대산별’ 이라는 것이 주된 방침이었다. 그러나 대산별노조 방침은 현재 시점에 과연 유효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대산별 방침은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조직형태의 발전에 대해서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대산별 방침을 재검토하고 업종 산별, 지역노조, 비정규직의 새로운 대중조직(노조)형태를 만들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는 노동계급의 단일노조를 지향해야 한다.  

 

나. 신자유주의시대, 한국에서의 산별노조 건설의 특수한 조건.


 그간 우리는 산별노조 건설을 지향하면서 많은 경우 유럽식 산별노조의 사례들을 참고로 해 왔으며 특히 독일식 산별노조를 모범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한국은 유럽의 조건과 전혀 다른 역사와 정치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작 우리는 이런 차이보다는 ‘산별노조로 가야한다’는 당위 때문에 산별노조의 긍정적 요소들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제 현재의 시점에서는 보다 더 심도 깊은 문제들로 나가야 한다..

    

 첫째,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산업적 통일성에 차이가 있다.

 유럽의 산별노조 모형은 적어도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근대적인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경제가 재편되고 이런 산업의 일정한 발전과정에서 탄생하였다. 비록 기업규모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규모의 차이가 곧 수직적인 불평등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는 국가-재벌이라는 두 축에 의하여 발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재벌을 중심으로 한 하청수직계열화를 산업구조의 특징으로 한다. 재벌기업(대공장)과 하청(중소영세사업장)이라는 중층적인 수직계열화가 한국 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산업적 연관성과 통일성보다는 오히려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통합성이 더 높은 경제였다. 이 때문에 현총련과 같은 그룹조직이 활동할 기반이 있었고 자동차연맹 또한 사실상은 기아그룹의 노동조합이 중심을 차지했다.

 때문에 설혹 같은 산업의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유럽에 비하여 한국의 경우 이해의 통일성은 확실한 차이가 난다.


 둘째, 노동조합 출발의 역사적 차이가 있다.

 유럽의 산별노조라는 모형은 장인이나 길드 등 기업과 상관없이 숙련노동자들의 연대로부터 시작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와 전혀 다른 역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즉 6.25라는 엄청난 투쟁과정에서 남한의 노동운동이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노동자의 연대는 완전히 차단된 기업별 노조구조가 정착된 경험 위에 서 있다.


 셋째, 노동운동 발전의 조직적 구심에 차이가 있다.

 서구의 산별노조가 강력한 계급투쟁의 전통, 그리고 전후 파시즘 등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좌파적인 정치세력의 일정한 주도권에 기초하여 적어도 강력한 기획력을 가진 사회적인 집단(좌파 정당 등)의 주도성이 발휘되면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물론 노조와 정당 중 어떤 것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는 국가별로 편차가 있지만 시민운동, 좌파정당운동, 노동운동 등 각 영역에서 일정한 발전들이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사회적인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6.25 전쟁 후 반공국가라는 독재체제 아래에서 좌익적 요소들은 모조리 청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80년대에 레닌주의적인 전위당 모델 또한 실패하였고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인 충격은 사회적으로 좌파적인 활동을 발전시키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직접적인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아지는 현장의 투쟁을 통해, 현장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무너뜨리고 군사적인 노동통제에 맞서 민주노조운동으로 발전해 왔다.

 이점에서 한국에서 산별노조의 건설이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현장조직을 포괄, 발전, 재편시키지 못한채 위로부터 기획된 산별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넷째,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차이다.

 서구의 현재 산별노조운동은 전후 자본주의의 확대를 불러 온 대량생산체제(포디즘)가 정착되면서 소위 말하는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에 근거하여, 사민주의 정당과 자본가계급의 일종의 타협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안정되었다. 서구의 산별노조는 대량생산 -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 - 산별노조 - 사민주의 - 계급타협(코포라티즘) - 복지국가 모델이라는 시스템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는 세계화와 유연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상황이다. 복지국가모델이 공격받고 있으며 계급타협은 ‘제 3의 길’을 주장한 영국노동당 류의 사민주의 정당의 우경화를 통해 신자유주의 확대로 이어진다. 신자유주의 앞에서 독일의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는 새로운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과 캐나다 등에서 나타나듯 기존의 산별노조들은 이 공격에 맞서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 통합을 하기도 한다. 이는 새로운 조직형태의 출현이 아니라 공격받는 조직체제의 자기방어 노력의 결과다.

 과거의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노동 유연화의 결과, 비정규직이 보다 일반적인 노동자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대공장은 유연생산체제에 따라 분산된 생산체재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에서 산별노조 운동은 재벌이 유지되면서 초국적 자본이 새로 등장하고 여기에 유연생산체제가 결합된 상황이라는 전혀 다른 조건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수직 계열화된 경제, 기업별노조, 현장조직중심구조, 유연생산체제라는 특수한 조건을 가진 상황에서 산별노조의 건설은 근본적으로 유럽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건의 차이들 속에서 어떻게 조직을 발전 시켜야 할 것인지를 따지지 않고 산별노조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다. 흔들리는 대산별의 실험


 대산별의 지향을 가장 분명히 한 산업은 금속이다.  물론 금속노동자들의 경우 애초부터 대산별을 지향한 것이 아니다. 자동차연맹의 소산별, 현총련의 그룹단일노조, 민주금속의 대산별론등 금속연맹의 창립 이전에 각각 주장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산별의 지향에 동의, 금속연맹의 창립을 통해 대산별론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제조업노동운동의 강력한 전투적 기풍, 그 힘이 대단결을 강제하는 당위적 요구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기초였다. 특히 현장조직들은 전국적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 현총련, 자총련, 민주금속을 뛰어 넘어서 횡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은 연맹의 창립 후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결정적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공장의 현장조직들의 후퇴, 조합원들의 후퇴, 그리고 물러선 자리에 분명히 드러난 것은 이 사회의 구조다.

 즉, 대공장노동자 - 중소기업노동자 - 비정규직노동자의 분할된 모습으로 각자의 생존을 지키는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다.

 여기에 무너진 재벌회사들은 거대 외국자본에 흡수되고 남은 재벌그룹들은 경쟁대열에 끼어 들고 있다. 재벌중심의 체제는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는 유지되지만 그러나 예전의 재벌회사의 모습은 아니다.   세계화는 한 산업 안에서 외국자본이든 재벌회사든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경쟁을 하도록 만든다. 이제 한 산업이 흘러가는 모습은 더 이상 재벌그룹사간의 지원체제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세계적 경쟁구조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한 산업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은 비슷하다. 따라서 한 업종내에서 겪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비슷하다.

 그렇다고 한 업종내에서 노동자들이 단결할 기초가 단순하게 강화된 것만은 아니다. 분명 해당 업종내에서도 재벌구조 아래에 수직계열화 되었던 모습이 남아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를 보면 이런 현실이 보인다. 현대-기아의 경우는 하나의 재벌그룹속에 속하면서도 국제경쟁속에서 세계 5위의 자동차회사를 목표로 글로벌 생산체제를 갖추기 위해 외국공장을 늘린다. 현대-기아도 이젠 더 이상 국내에 머무는 재벌이 아니라 지엠, 포드. 다임러, 도요타 등의 세계적 자동차회사와 경쟁하는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부품체제도 마찬가지로 모비스를 중심으로 모듈업체를 키워나간다. 지엠의 델파이, 포드의 비스테온, 도요타의 덴소와 같이 부품사를 키워 나가며 그 아래에 모든 기아-현대의 부품계열사들은 모비스라는 회사의 밑에 2차 납품사로 전락한다. 외국자본에 흡수된 삼성과 대우는 세계적인 생산체제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었으며 굴지의 외국부품회사에 흡수된 한국의 상당수 부품사들도 세계적인 부품생산체제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었다.

 이제 완성차든 부품사든 세계적인 생산체제속에 흡수되면서 내부적으로는 모듈화니 플렛폼 통합이니 하는 지속적인 유연생산체제의 구축문제를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대산별노조로 나가기 위한 금속연맹의 모습이 분명히 심각한 정체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금속노조는 아직 금속연맹의 조합원 중 1/3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업종은 뚜렷하게 노동조합의 약화를 보여주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거의 유사한 구조조정속에 휘둘리고 있으면서 자동차분과를 중심으로 사업들을 추진하지만 아직은 완성차 중심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부품사의 경우 모비스를 중심으로 2-3차 하청업체들로 전락한 기업들은 점차 그 지위가 약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이 과연 단순하게 대공장의 이기주의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거나 혹은 금속노동운동의 후퇴에 따른 조직력이 약화된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변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 한국의 경제구조, 산업재편을 반영하는 구조적 결과인지를 냉정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대산별의 사례는 아직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업종산별만이 존재한다. 보건의료노조, 증권노조, 과기노조, 건설엔지니어노조, 대학노조 등과 전교조나 공무원노조도 마찬가지로 대산별은 아니다. 한국노총의 금융노조 또한 업종산별이다. 물론 아주 작은 규모들이지만 지역노조들도 있다.

 우리는 아직 소규모의 업종수준에서 산별노조를 만들고 있거나 혹은 비정규직이나 영세업체를 포괄하는 지역노조와 같은 수준에서 기업별노조를 뛰어넘고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대산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과연 성공 가능한 계획인가? 당위성을 떠나서 현실성을 냉정히 따져보아야 한다.  구조조정이후 조직력의 일정한 후퇴 속에서 기업은 물론 업종까지 뛰어넘는 대산별의 건설은 벅차 보인다. 그것은 단지 현실의 사례들이 그렇다는 수준이 아니라 완환위기와 경제재편을 거치면서 변화된 한국경제와 산업재편의 결과를 반영하는 구조조적인 변화가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라. 실천단위, 내용적 통일성을 담는 조직형태로서 업종(지역)노조의 필요성


 조직발전 전망을 논의하는데 있어 분명히 해야할 문제가 있다. 아무리 조직형태에 대한 명쾌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직형태의 발전을 얘기할 때는 조직의 ‘형태’ 그 자체를 가지고는 풀릴 문제가 없다.


 첫째로 조직은 구체적인 실천적 단위이다.

 조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조직은 ‘네모인가? 세모인가?’하는 꼴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 보다 구체적인 실천단위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 이점에서 볼 때에 과연 현재의 금속연맹은 실천단위로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물론 금속연맹만이 그런 상태는 아니다. 공공연맹의 경우도 당위적 측면에서는 공공서비스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공무원노조와 같은 경우는 독립적인 조직체계이다. 철도, 도시철도, 각 시의 지하철노조의 경우도 사실은 공공연맹이라는 조직 속에서 실천단위로서 기능하기보다는 독립적인 괘도연대와 같은 방식은 실천단위를 만들고 있다.

 금속연맹의 경우 이미 실천적인 단위는 3원화 되었다. 금속노조와 자동차분과, 조선분과 그리고 최근에는 철강분과의 독립적인 구축도 진행된다.  

 과연 현실에서 실천적 단위로서 기능하는 하는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가에 기초하여 조직발전전망을 세울 필요가 있다.


 둘째로 조직은 내용과 별개로 형식으로서만 발전할 수 없다.

 산별노조로의 발전을 추진하는 것은 종업원 의식을 만드는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 노동자계급으로 단결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적, 내용적인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당위이고 욕망이고 이상일 수는 있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가장 기초적으로 임금체계의 통일성, 작업장협약의 통일적 기반, 그에 기초한 산업적인 의제들에 대한 공동의 실천능력이 없다면 조직은 단지 그림에 불과하다.

 이점에서 우리는 금속산별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당위에 기초하여 산별노조를 추진한 것은 아닌지를 냉정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즉 구조조정의 시대에 기업별 투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별로 가자고 했다. 그것은 구조조정이 벌어지는 현실에서는 절박한 외침으로 들린다. 하지만 구조조정과정에서 투쟁을 통한 실천적인 근거들을 축적하지 못했다. 따라서 결국은 산별로 가자는 구호는 사실상 단결의 기반이 취약해지는 과정에서 외친 ‘필요성’이긴 했지만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필요하지만 충분한 기초는 없는 상황에서 금속노조는 비교적인 조직력이 높은 노조들이 결합하여  소수노조로 출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냉정히 평가하지 못한 채 아무리 산별로 전환하자고 외친들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설혹 그런 당위에 근거하여 산별로 전환했다고 해도 금속노조에 속한 대공장들이 산별교섭체제 밖에 놓여 있는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지원투쟁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태의 금속노조의 현실은 여전히 우리가 비정규직문제에 한참 먼 상태를 벗지 못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단지 똑같은 물을 네모진 그릇(기업별노조)에서 둥근그릇(금속노조)에 담아 놓고 있을 뿐이다. 물은 여전히 물이다. 우리가 마셔야 할 것은 사각형이든 원형이든 그릇이 아니라 물이다. 


 따라서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산업적 의제들에 대한 대응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산별노조의 탄생이 가능하며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적 발전과 함께 전체 노동자계급이 사회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전면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한국노동자단일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이점에서 볼 때에 금속의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진행된 주장한 계급적 산별노조, 투쟁을 통한 산별노조, 아래로부터의 산별노조라는 주장은 부분적인 지적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또한 노동운동의 발전전략에 대한 대안을 분명히 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산별반대론’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 다시 제출되어야 할 노동조합 조직발전전략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에 노동조합의 발전 전략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첫째로는 그간의 산별운동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

 둘째로는 당면 조직발전의 단계로서 대산별지향은 폐기되어야 한다.

 셋째로는 실천적 단위이자 내용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서 과도적인 단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은 업종별 실천과 지역별 실천을 중심으로 업종과 지역노조를 만드는 노력들을 개방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로는 일반적인 노동자로 등장하는 비정규직의 투쟁과 조직화가 진전되어야 한다.

 다섯째로는 업종, 지역, 비정규직의 조직발전에 기초하여 산업적 의제와 사회적인 의제를 전면에 내건 노동자들의 전국적 실천력을 기반으로 궁극적으로는 ‘한국노동자단일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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