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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노동자 투쟁
1. 공황
1) 공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 공황은 투자금융 부문에서 시작되지만 금융공황과 산업공황이 동시적/복합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 진정한 경제공황.
- 공황은 미국에서 시작되지만 선진자본주의 나라들과 이른바 신흥시장에서 동시적/상호적 으로 진행될 것이다 : 명실상부한 세계공황.
- 공황은 1930년대의 대공황에 근접하는 강도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보 다 파급의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 전례 없는 대공황.
2) 공황의 원인은 무엇인가?
- 직접적으로는(immediately), 부동산(주택) 투기 거품과 금융(파생금융상품) 투기 거품이 융합되어 진행되던 가공자본의 축적과정이 한계점에 이르러 폭발함으로써 일어났다.
- 조금 크게 보면, 중앙은행이 낮은 이자율로 대출을 부추겨 거품 투자를 조장한 것과 부시 행정부가 직접 나서서 ‘소유자 사회’ 운운하며 ‘내집 갖기 운동’을 벌여 거품 소비를 조장한 것이 그 원인이다. (정책실패)
- 조금 길게 보면, 레이건, 대처 이래 자본주의 경제의 축적 패러다임을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여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을 심화시킨 것이 그 원인이다.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으로 인해 유휴 자본이 생산적인 즉 잉여가치를 낳는 투자기회를 갖지 못하자 투기에서 허구적으로 증식하다가 폭발한 것이다. (축적 패러다임의 실패)
- 1970년대 이래의 장기 추세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 속에서 신자유주의 착취 강화에 의한 소비기반의 파괴와 과잉축적, 그것을 타개하고자 한 거품 투자와 거품 소비 조장, 그것에 의한 부동산 및 금융 투기의 동시 진행, 그 거품의 폭발과 시스템의 붕괴로 요약할 수 있다.
3) 공황 ‘이후’는 어떻게 전망되는가?
- 일본이 14년째 겪고 있는 바와 유사하게 장기복합불황으로 지속될 것이다. 이른바 L자형 이다. 1930년대만큼 공황의 골이 깊지 않더라도 자산 디플레이션과 부채 누적 때문에 성장엔진의 재가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윤율을 회복하여 성장엔진을 재가동 하기 위해 착취도를 높이려는 압박이 비상한 강도로 추구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줄어드 는 구매력은 군비지출 및 해외판매로써 대체하고자 할 것이다. 즉 군국주의화와 권위주의 화!
-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상호간 국제공조가 이루어지겠지만 경제패권을 둘러싸고 대립의 격 화가 나타날 것이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한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손질이 불가피하겠 지만 다극화된 국제통화체제보다는 달러/유로 공동 기축통화 체제(대서양동맹)로 갈 가능 성이 많다. 더불어 상품, 자본, 노동, 자원 등을 둘러싼 시장쟁탈전도 갈수록 치열해질 것 이다.
- 이에 따라 제국주의 상호간 대립이 정치·군사적으로도 격화될 것이다. 이는 과거의 경험 이 보여주듯이 블록 간 대결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기득권을 가진 선진자본주의 강대 국 블럭(미국, EU 및 일본)과 후발 자본주의 강대국 블럭(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이념 대 결의 성격은 거의 없고 패권쟁탈전의 성격을 가지는 냉전(그러나 열전의 가능성도 내포하 는)이 벌어질 것이다.
- 이 패권쟁탈전은 자원확보를 둘러싸고 중동에서 전개되는 테러와의 전쟁 차원을 훨씬 능 가하여 ‘상하이협력기구’ 나라들을 식민지로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과 중남미 사회주의 지 향 나라들에 대한 탈사회주의/식민지 지배권 유지를 위한 쟁탈전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 요컨대 생산력 발전과 세계시장 형성의 경향은 그 역의 경향에 의해 저지될 것이다. 자본 그 자체가 생산력 발전과 세계시장 형성에 대한 장벽으로 나타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장벽은 자본 그것이다. 즉 자본과 자본의 자기증식이 생산의 출발점이자 종점, 동기이자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를 위해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장벽이 있다. 생산자대중의 수탈과 빈곤화에 의거하는 자본가치의 유지와 증식은 이러한 장벽들 안에서만 운동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장벽들은 자본이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생산방법들[생산의 무제한적 증가, 생산을 위한 생산, 노동의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로 향하여 돌진하는 생산방법]과 끊임없이 모순된다. 수단 - 사회적 생산력들의 무조건적인 발달 - 이 제한된 목적 [기존자본의 가치증식]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물질적 생산력을 발달시키고 이 생산력에 적합한 세계시장을 창조하기 위한 역사적 수단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또한 자기의 역사적 과업과 자기의 생산관계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다.”(자본론 3권(상) p.300)
“노동자의 착취수단으로서 어느 일정한 이윤율로 기능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노동수단과 생활수단이 주기적으로 생산된다. 상품의 가치와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잉여가치가 자본주의적 생사네 특유한 분배조건과 소비관계 아래에서 실현되어 새로운 자본으로 재전환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상품들이 생산된다. 즉 이 과정을 반복되는 폭발 없이 완수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상품들이 생산된다. 너무나 많은 부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적대적인 형태의 부가 주기적으로 너무나 많이 생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장벽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노동생산성의 발달은 하나의 법칙으로서 이윤율의 저하를 내포하는데, 이 이윤율의 저하는 어느 일정한 시점에서 생산성의 발달 그 자체에 매우 적대적으로 대항하며 따라서 공황에 의하여 끊임없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2) 생산의 확장 또는 축소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과 사회적 필요[사회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욕구] 사이의 비율이 아니라, 불불노동의 취득과, 이 불불노동과 대상화된 노동 일반 사이의 비율 - 이것을 자본주의적으로 표현하면, 이윤[의 취득]과, 이 이윤과 자본투자액 사이의 비율(즉 어떤 일정한 이윤율) - 이다. 따라서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주 부족한 수준의 확장에서 이미 생산에 대한 장벽들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생산은 사회적 필요가 충족되는 수준에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의 생산과 실현이 명령하는 수준에서 중단된다.”(자본론 3권 (상) p.310)
2. 노동자 투쟁의 방향
1)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의 이념의 혁신이 그 출발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공황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매우 강도가 높은 것으로 되었지만, 사실 공황은 자본주의에 항상적인 것이다. 주기적으로 공황이 발생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다. 그리고 공황은 생산력의 발전을 멈추게 할 뿐 아니라 존재하는 생산력조차 사용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어렵게 하고 근로대중을 실업과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한다. 그리하여 공황 국면에 이르러 보면 자본주의가 분배를 심히 불평등하게 만드는 체제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가 생산에 대한 장벽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의 소외의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생산력의 면에서도 분배의 면에서도 부정적인 양식임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모든 패배주의를 떨치고, 모든 개량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타파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목표로 하는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자신을 혁신해야 한다. 그 목표가 부분적인 사회주의든 전면적인 사회주의든 그 지향하는 바가 자본주의의 구제나 수정에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을 대표하고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질곡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 이 부정의 부정은 사적 소유를 부활시키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 협업 및 토지와 생산수단[노동 그것에 의하여 생산된 것]의 공동점유 -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사적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의 소유 : 필자)를 확립한다. 물론, 개인들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분산된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전환되는 것은, 사실상 이미 사회적 생산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전자의 경우는 소수의 횡령자가 국민대중을 수탈하는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국민대중이 소수의 횡령자를 수탈하는 것이다.” (자본론 1권 (하) pp.959~960)
2) 반제국주의와 ‘노동자 국제주의’로 전략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번 공황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global)으로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식민지적 자본주의로 비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제국주의 안에서도 패권과 비패권으로 위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그리고 불황이 지속됨에 따라 제국주의와 식민지, 패권적 제국주의와 비패권적 제국주의 상호간에 모순이 격화되어 갈 것을 전망할 때,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변혁은 제국주의를 타파 또는 후퇴시키는 과정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추구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특히 패권적 제국주의 세력의 타파 또는 후퇴는 기존 질서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오며 그런 변동 속에서 사회주의 변혁은 더욱 현실적이 될 것이다.
이처럼 변혁의 주된 대상이 제국주의가 되어야 한다면 주된 동력은 세계 노동자계급의 국제연합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날에도 그러했겠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서는 더더욱 일국적 사회주의 건설을 운동의 목표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략은 해당 나라의 노동대중에게 너무나 큰 고난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노동자계급의 국제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노동자 국제주의가 노동운동의 전략적 원칙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동맹은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3) 조직과 투쟁에 관련된 모든 기존의 것들을 수술대에 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첫째 노동조합운동에 있어서 독점대사업장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실리추구적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계급적/변혁적 노동조합운동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별 노조의 산업·업종별 결속 강화를 의미하는 산별전환 노선과 단절을 의미한다. 대안은 지역산별노조이다. (이 노조는 교섭 중심에서 조직화와 저항적 투쟁 중심으로 활동의 중심이 바뀌어야 한다.즉 조직화 전략의 추구이다.) 이를 세포로 하는 지역적, 산업적 그리고 전 계급적 총연합으로, 밑에서 위로 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관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한편 노동조합 안에서의 단결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부르주아적 원칙과 더불어 공동체주의(물론 사회주의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원칙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야 한다. 이런 원칙들의 결합에 입각하여 요구들이 만들어져야 하며, 공황 정세 하에서 비정규직 철폐와 일자리를 나누는 노동시간 단축(예컨대 하루 6시간제)이 노동조합의 중심적 요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 정치운동이 주동적으로 제기하는 사회변혁적 의제들을 적극 받아 안아서 함께 요구하고 투쟁해야 할 것이다.
둘째 노동자 정치운동은 사회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제도/정책적 개량을 경시하지 않지만 사회변혁의 성격을 지니는 의제들을 중심으로 활동해야 한다. 가장 선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택과 같은 기본생활의 사회주의적 보장에 관한 요구이다. 다음으로 금리생활자 계급을 안락사 시키는 과제이다. 즉 지대/배당/고금리/투기자본이득 추구자를 반사회적인 존재로 규정답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금융과 실물을 망라하여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제이다 이런 변혁적 성격의 요구와 과제를 중심으로 투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요구와 투쟁은 합법 정당의 형태로 추진될 수도 있고 반합법 전선체의 형태로 추구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둘이 결합되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 두 경우 요구에 있어서는 같을 지라도 투쟁형태에서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게는 선거가 후자에게는 전민항쟁이 주요 투쟁형태일 터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건 이런 사회변혁적 요구들은 현존 국가권력을 지배계급의 수중에 그대로 둔 상태에서, 즉 야당이나 재야에 머물러서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집권이 곧 변혁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집권 없이 변혁을 꿈꾸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셋째 노동자 사회·문화운동이 개척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 대중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노동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활세계 또는 시민사회 속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것들은 경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대표적으로 교육과 의료에 관한 것)도 있고 비경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예컨대 생태문제와 같이 진보적 가치에 관련된 것)도 있으며 그 두 가지 성격이 복합되어 있는 것도 있다.(예컨대 소비자보호운동) 특히 지금의 노동운동에는 사람들의 의식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 미디어, 문화 등에 대한 운동이 매우 부족하다. 민주노총 시대의 개량화된 노동운동은 이런 사회·문화적 운동을 자신의 임무로 사고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변혁지향성을 강하게 띠었던 87~91년 기간에 이런 활동들이 노동조합운동 안팎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지금이 공황국면이라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자본가계급은 이 위기를 주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이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자신들의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틀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또 식민지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런 점이 1930년대의 공황에서와 아주 다른 점인 것 같다. 남한에서도 지배계급은 ‘서울 컨센서스’, 여야공동정부 운운하며 종언을 고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여 위기를 관리하려 부심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노동운동은 반 한나라당(또는 반 이명박) 국민전선을 내놓은 것 밖에 없다. 만약 여야공동정부가 구성되어(민주노동당이 참여하든 않든 상관없이) 장하준 식의 케인즈주의를 대안으로 함께 추진한다면 노동운동은 지배계급의 들러리가 되어 그것을 지지하거나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비록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에 불과한 한계가 있더라도 자본가계급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독립적인 사회주의 강령을 가지고 이 공황 정세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회민주주의적인 최저강령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과 구별하여 당면 변혁강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의 원리는 사적 개인들의 연대이며 노동(능력과 노력)에 따른 분배라면, 사회주의의 원리는 사회적 개인들이 연합이며 (비록 공산주의 사회에서와 같이 완전하게는 아닐 지라도!) 필요에 따른 분배이다.
2008년 10월 18일 ksh
대공황과 혹세무민지설들
채만수
[편집자 주: 이 글은 2008년 10월 11일의 연구소 내부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을 약간 보완한 것이다.]
1. 상황 (1)
미국 공산당 계열의, 그러나 다분히 사민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상전문가가 아니라도 바람이 어디로 부는가는 누구나 알 수 있다”는 밥 딜런(Bob Dylan)의 1965년의 노래는 유명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경제적 위기가 닥쳐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1)
실제로 그 동안 수십 년 동안 온 세계를 종횡무애 쥐락펴락하며 호령하던 거대 금융자본들이 연이어 쓰러지고 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지금 말 그대로 패닉(panic) 상태에 빠져 있다. 그리고 연일 국내외의 부르주아 신문․방송․인터넷 등을 장식하고 있는 “폭락”․“붕괴”․“패닉”․“공포”․“대공황” 등등의 비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동안 그토록 완강하게 대공황이나 그 가능성을 과거지사로 치부하던, 소위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자본의 이데올로그들 역시 모두 대공황의 공포에 떨고 있다.
공황, 그것도 대공황(의 가능성)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은, 국내의 지적 분위기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1989-90년 당시와는 가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다. 그때는, 당시의 한국경제의 상황을 공황으로 규정했을 때, 예컨대 한사연(한국사회연구회․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진보적 경제학자’ 정건화(지금은 한신대 경제학 교수)나 정태인(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 지금은 진보신당의 주요 정책 이데올로그 및 성공회대 교수) 등등이, “산업구조조정 국면일 뿐”이라거나 “소공황일 뿐”이라며, “현대자본주의의 축적위기는 국가의 개입으로 공황(Crisis)으로 전개되지 않는다”(정건화의 표현 그대로)고 박박 우기고 나서도 누구 하나 그 오류를 지적하지 않던 분위기였다.2)
그런데, 이렇게 대공황(의 가능성)을 사실상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자본주의의 축적위기는 국가의 개입으로 공황(Crisis)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이 청산된 것은 아니다. 요즈음의 대부분의 논의․보도들, 그 호들갑들 역시 사실은 모양만 바꾸어 그것을 재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과 관련하여 2008년 10월 10일 현재까지 발표된 국내의 논의 가운데 이러한 헛소리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참세상>에 발표된 김성구 교수의 논설들(특히 그의 “미국 정부는 시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나”)과3) 부분적으로는 박하순 노기연 소장․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의 논설들, 그리고 노정협의 “경제공황과 자본주의 국가―신자유주의의 몰락인가?”(<<노동자정치신문>> 제45호, 2008년 9월) 정도뿐이다. 기타의 논의․논설들, 특히 <<한겨레>>나 <프레시안> 등에 게재되고 있는 그것들은, 뒤에서 명백히 하는 것처럼, 대부분이 ‘국가의 역할․규제 강화론’, 즉 사실상 형태만 바꾼 ‘국독자 영구번영론’, 혹은 국독자의 영구번영을 꾀하는 망상의 정책론들이다. 그리고 <참세상>의 일부 논의들은 전혀 이론적 근거들을 결(缺)하고 있는 몰개념하고 극좌적인 ‘자본주의 규탄․붕괴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위기의 경제 상황 그 자체로 다시 돌아가면, 지난해 여름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위기는 지난 7월 들어 그 범위에서도 그 깊이에서도 급격히 확대․심화되면서 이제는 매일매일의 사태전개를 추적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부질없는 일이 될 정도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자본가계급의 대표적인 신문의 하나인 <<뉴욕타임즈>>조차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이다.
두 주일 전 백악관이 7천억 달러의 구제 계획을 내놓았을 때에는 그 엄청난 규모가 전세계 금융체제를 진정시키고, 믿음과 신뢰를 회복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 계획이 [의회의: 인용자] 동의를 받은 지 3일이 지난 지금 그것은 마치 출렁이고 있는 바다에 조약돌 하나를 던진 것처럼 보인다.4)
실제로 써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화를 계기로 발생한 ‘금융기관들의 손실’은 애초의 상상을 넘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금년 1월에 나는 당시의 보도들을 인용하면서, 기껏 독한 맘 먹고, “1,500억 달러, 2,500억 달러, 4,000억 달러! ― 사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금액인지?! 우리네에게는 차라리 무감각하게 다가온다”5)고 썼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 순진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 손실이 1조 4천억 달러에 이른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 보도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손실이 “미국에서만도 2조 달러($2 trillion)에 이를 것”6)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언제 본격적으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되어 있는 ‘신용 파생상품’(credit derivative)으로서의 ‘신용파산 스왑’(Crdit Default Swaps: CDS)이 2000년에는 1천억 달러였으나 지난 여름에는 62조 달러로까지 증대해 있다는 보도이니,7) 실로 유구무언!
이렇게 $700,000,000,000.-라는 거액이 “출렁이고 있는 바다에 던져진 조약돌 하나”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하여 그 거대한 구제계획이 의회를 통과한 그 날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서양의 양안(兩岸)에서”, 즉 미국과 유럽에서, 아니 실제로는 거의 전세계에서 “주식시장의 현기증 나는 폭락”8)이 사실상 연일 계속되고 있고, 그리하여 주식시장을 아예 폐쇄해버리는 나라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9) 그리고 또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이나 IMF 등이 엄청난 액수의 구제자금 계획들을 속속 발표하고 전세계 주요 국가들이 연이어 공정 이자율을 내려도 시장 금리는 폭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금이 회전되지 않고 있는 상황! 수백 년 역사를 가진 거대 은행들(증권회사나 보험회사들을 포함한 그것들)이 여러 나라에서 연달아 도산하고 있고, 도산을 면하기 위해서 국유화되고 있는 상황!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인커인 GM을 위시하여 포드, 크라이슬러 등 이른바 ‘빅 쓰리’가 정부로부터 곧 250억 달러에 이르는 보조금을 받기로 되어10)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존 가능성 여부가 문제로 되면서 그 주식 가격이 정크본드(junk bond) 수준으로까지 폭락하고 있는 상황!11)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현재의 상황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의 써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일파만파로, 아니 일파만파라는 말로도 현실의 1만 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확산되고 있고, 물론,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위기 전공 전(前) 수석 경제학자이자 현재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경제학자인 씨몬 존슨(Simon Johnson)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장래의 전망도 극히 불길하다(It looks pretty ugly down the road)”.12) 도미니크 쉬트라우스-칸(Dominique Straus-Khan) IMF 총재님께서는 “세계가 전세계적 경제침체의 간두(竿頭)에 서 있다”면서도, 부르주아적 백치증을 대표하여, “우리가 만일 재빨리, 강력하게, 협력하여 행동한다면” ‘세계시장과 금융시장의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13)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2. 혹세무민지설들
공황의 시기는 경제학자들에게는 대목이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헛소리로 상황의 성격을 왜곡하고, 그 위기의 원인을 왜곡하여 노동자들의 탓 등으로 돌리는 등 공황의 부담을 전가하고,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며, 체제를 방어하기에 바쁜 씨즌인 것이다.14) 예컨대, 필시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겠지만, 11년 전 일반적으로 ‘IMF 사태’라고 부르는 거대한 외환․금융위기가 폭발했을 때, 자본의 극우 이데올로그들은 물론 <<한겨레>> 경제부장 이봉수15) 같은 물정 모르는 소부르주아 어릿광대들까지 그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과소비’, 즉 그 과대소비 탓으로 돌렸던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즉 공황의 궁극적 원인은 과잉생산이기 때문에 공황의 원인을 노동자 대중의 과대소비로 돌리는 것은 물론 경제학의 백치나 떠들어댈 수 있는 가히 미친 주장이다. 공황의 발발과 심화의 원인이 과잉생산에 있다는 것은, 번거롭게 경제학 교과서를 들춰볼 필요도 없이, 자본가계급의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 즉, 지난 ‘IMF 사태’ 당시에 그토록 노동자들의 ‘과소비’를 규탄하던 독점자본이 공황이 심화되고 장기화되자 한 개그우먼을 등장시켜 “허릿띠를 졸라매기만 해서는 안 되다”는 광고공세를 편 사실이나, 위기가 심화돼가자 미국 정부가 금년 봄 1천억 달러의 세금을 환급하면서까지 대중의 소비를 진작시키려고 했던 사실 등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친 주장은 그것이 미친 것인 만큼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 융단폭격 같은 공세에 잠시 주춤했다가도 대중은 금세 그것이 거짓임을 알아채고 저항에 나설 뿐 아니라,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본가계급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은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혹세무민지설(惑世誣民之說), 그러한 헛소리들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러한 헛소리들이, 극우 이데올로그들이나 극우 대중매체들에 의해서는 물론, 이른바 ‘진보’의 깃발을 내세우고 있는 지식인들이나 대중매체들에 의해서도 널리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보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극우 지식인들이나 매체들보다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그 매체들의 그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 그들의 발언에 대한 경계가 그만큼 덜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혹세무민의 헛소리들은, ‘진보’와 극우를 막론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있다. 시장과 국가를 대립시키면서,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은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탐욕과 자본,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완화에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그 대강의 내용이다. 그들은 이를, 논자에 따라서, 혹은 “신자유주의의 종언”,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라고도 부르고, ”레이건-대처주의의 종언“ 혹은 그 ”종말“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미국형 자본주의“ 혹은 ”앵글로-쌕슨형 자본주의“의 ”종언“ 혹은 ”종말“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예컨대,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해체되자 <<역사의 종언>>이라는 헛소리로 크게 재미를 본, ‘종언’ 장사꾼 극우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렇게 말한다.
... 범인은 미국적 모델 그 자체이다. 보다 적은 정부라는 슬로건 하에 미국정부(Washington)는 금융부문을 충분히 규제하는 데 실패했고 사회의 기타 부문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도록 방치했다. ...
많은 해설자들이 월스트리트의 붕락(meltdown)은 레이건 시대의 종언을 보여준다고 지적해 왔다. 이 점에서 그들은, 설령 어찌어찌 해서 매케인(McCain)이 11월에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옳다. ...
레이건주의(혹은 영국적 형태로는, 대처주의)는 당시에는 옳았다. 1930년대 프랭크린 루즈벨트의 뉴딜 이래 전세계의 정부들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1970년대에 이르면, 관료주의에 질식당한 거대한 복지국가와 경제는 극히 역기능적임이 입증되고 있었다....16)
이러한 주장들은 물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수도 없이 많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뉴스위크>>는 이렇게도 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은행의 지불능력만이 아니라 앵글로-쌕슨 자본주의 체제 전체이다”17)라고. 그리고 “투자가이자 박애주의자인 조지 쏘로스”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나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세계화 및 탈규제화의 모델이 파열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현재의 위기를 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맞고 있다.” 미래는 ... “보다 덜 제멋대로이고, 보다 덜 공격적으로 투기할 것이며, 보다 덜 차입에 의존할 것이며, 신용을 보다 더 조일” 것이다.18)
독일의 금융 담당 장관 쉬타인브뤽(Steinbrück)은, “우리가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여과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그 탐욕 때문에 결국은 그 자신을 먹어치울 것”이라며, 그리고 심지어 “맑스를 언급하면서” “금융시장을 ‘교화’(civilize)시키자는 공식적 운동까지”, 그러한 도덕운동까지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9)
이러한 발언들은 물론 수도 없이 그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단지 바다 너머의 일만도,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일만도 결코 아니다. 그러한 발언들은 바로 이 땅에서, 조․중․동 등의 극우언론에 의해서는 물론이려니와, 쟁쟁한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언론인들’, ‘진보적 매체들’에 의해서도 대량으로 생산․재생산되고 있다. 진보 매체 <<한겨레>>나 <프레시안> 등에서 전개되고 있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이나 기자들의 논의들이 특히 그러하다.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몇몇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1) 이승선 <프레시안> 기자
그의 여러 글들 중에서 “부시가 ‘대공황’ 운운하는 진짜 이유”(10월 6일)만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미국의 7,000억 달러 구제법이나 의회가 “방만한 대출로 현재의 사태를 불러온 근본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미국의 시민들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향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사태를 불러온 근본문제”나 “사태를 초래한 체제의 근본적 개혁”이란 것은, 글의 내용상 기껏해야 “금융시장에 대한 적절한 감독과 규제”이다.
더구나 그는, 해외의 일부 논객의 주장을 소개하는 형식을 취해서이긴 하지만, “대국민 협박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구제금융이란 “특혜 덩어리”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경우 차기 행정부에서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기업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부시 대통령과 폴슨 재무장관, 버냉키 FRB 의장“ 등이 ”금융위기를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금융위기 조작설“, 그러한 음모설까지 제기하고 있다. ― 참으로 훌륭하고 날카로운 ‘비판’이다!
2) 장정수 <<한겨레>> 편집인
“미국 월가 파산의 교훈”(9월 21일)이라는 칼럼에서 그는 “미국 월가의 몰락으로 1989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 붕괴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도 종말을 맞게 됐다”고 선언하며, 흥미롭게도 “미국의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어온 부시 정권이 사회주의 정권을 방불케 할 만큼 가장 반신자유주의적이고 반시장적인 국가 개입 정책을 선택한 것은 역사적 희극이다”라고 쓰고 있다.
문제의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관한 논의 등은 뒤에서 하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다만, “이런 상황에서 수출 의존형 경제구조와 함께 경제성장에 집착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하의 한국 경제는 큰 시련을 겪게 될 것 같다”거나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미국 금융자본주의를 모델로 삼고 경제구조 개혁을 추진해온 한국은 이런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경우 미국과 유사한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자.
미국 월가에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일과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월가 위기를 가져온 투자은행이 아닌 상업은행 중심의 금융구조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그 타격을 덜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이 지향하는 경제모델이 이미 파산한 미국의 금융자본주의가 아니라 독일과 일본의 내실 있는 경제체제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이렇게 그는 노골적으로 “한국이 지향하는 경제모델이”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 상업은행 중심의 금융구조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 타격을 덜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독일과 일본의 내실 있는 경제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그가 그렇게 ‘웅변’하신 후 불과 보름 남짓 사이에 독일은 거대 주택자금대출 은행이 쓰러질 위기에 처해 거액의 구제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뱅크런(bank run), 그러니까 미친 듯한 예금인출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국가가 은행예금 전액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로 몰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본은, 아직은 중 규모의 것이기는 하지만, 보험회사(야마토생명)나 부동산투자신탁회사(뉴시티레지던스)가 파산하고, 연일 주가가 폭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일본의 올해 상반기(4-9월) 상장기업의 파산 건수가 사상 최다를 기록”20)하고 있다고 야단들이니 말이다.
3)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
“‘민주세력’의 경제철학은 뭔가”(9월 23일) 묻고 있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수세력의 엉터리 경제철학을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대안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질적 성장’, ‘함께 사는 세상’, ‘민주적 시장경제’, ‘제3의 길’ …. 어렴풋한 방향은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경제철학이 없다. ... 미국발 금융위기도 보수세력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알 수 없다. 민주세력, 개혁세력, 진보세력이 제대로 된 경제철학을 찾지 못하면 보수가 계속 집권한다.
결국은 다 같은 얘기지만,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말이 특히 눈에 들어오긴 하는데, 아무튼 우습긴 하지만 어딘가 좀 싱겁다.
4) 강태호 <<한겨레>> 남북관계 전문기자
“부시는 어디 있는가”(9월 25일) 찾고 있는 칼럼에서 “이명박은 어디 있는가”도 함께 물으며 그는,
월가의 위기는 금융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자기파괴적 재앙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이를 방치하고 결과적으로 조장했다. ...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는 정부의 감독과 규제 조처는 안 보인다.
1989년 저축대부조합(S&L)의 파산에 따른 금융위기와 뒤이은 경기침체는 80년 등장한 레이건 공화당 행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인 ‘레이거노믹스’에 책임이 있다. 이번 월가의 위기는 그 연장선에 있으며, ‘부시노믹스’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2000년 ‘닷컴 거품’이 꺼지자 돈은 부동산으로 몰렸다.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규제완화로 이를 조장했고, 저금리와 주택가격 상승을 바탕으로 개인들은 앞 다퉈 소비지출을 늘렸다. 7년여 미국 경제는 흥청망청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주택 담보대출이 이를 뒷받침했다.
운운하며, 흔해빠진 그렇고 그런 얘기를 하는 다른 한편에서, 더구나 “저금리와 주택가격 상승을 바탕으로 개인들은 앞 다퉈 소비지출을 늘렸다”느니, “7년여 미국 경제는 흥청망청했다”느니,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주택 담보대출이 이를 뒷받침했다”느니 하는, 백치적인 ‘과대소비=경제위기의 원인“론을 설파하는 다른 한편에서,
지금 부시 행정부의 시장개입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구원을 위해 나선 건 아닐까? ... 잔치는 끝났으니 국민이 설거지하라는 것인가? ... 수많은 중소 금융기관의 도산 속에서 금융자본은 공룡화하고 독점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운운하며, 제법 놀랍고 날카로운 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시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라는, 부르주아의 ‘위선의 전형’인 상투적인 도덕적 설교나 다음과 같은 넋두리로 금세 빛을 잃고 만다.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은 이라크 전쟁과 북핵 문제는 잠시 덮어두고 경제만 봐도 부시의 8년은 끔찍하다. 특히 클린턴의 8년과 비교하면 극과 극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단기 경기부양, 장기 재정적자 감축, 시장개입 확대를 통해 아버지 부시 시절의 경기침체를 극복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스스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엄격한 분리를 규정한 독점규제법인 글래스-스티걸법은 이미 형해화” 운운하면서도, ‘경제침체를 극복한 클린턴’이라는 자신의 편견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 법률이 “이미 형해화되긴 했지만 이번엔 아예 휴짓조각이 됐다” 운운한다. 그것이 폐지된 것, 즉 형해화된 것이 바로 클린턴 정부 하에서라는 것에 침묵하면서 말이다. 폐지된 법률이야 그것을 휴지조각을 만들던, 밑닦개를 만들던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단기 경기부양, 장기 재정적자 감축, 시장개입 확대를 통해 아버지 부시 시절의 경기침체를 극복했다”? 시운이 좋았을 뿐 아닌가?
5)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 부총리, ‘자랑스런 서울대인’, 일명 ‘산신령’
“신자유주의의 ‘거품’이 터졌다”(9월 30일)는, <<한겨레>>에의 ‘특별 릴레이 기고’에서,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묻건대, 그렇다면, 그 동안 미국 경제에 닥친 숱한 위기․공황은? 예컨대 1930년대의 대공황은?
세상은 그가 경제학의 석학이고 ‘산신령’이시라니 아무튼 좀 더 들어보자.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각론은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다. 총론은 명백하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못 쓴다. 미국도 이 과정을 졸업했다. 둘째, 나라가 잘되자면,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이 잘돼 있어야 한다. 민간이 정부를 대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셋째,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넷째, 금융가는 용감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이노베이션을 해서도 안 된다.
과연 석학․‘산신령’다운 그렇고 그런 구역질나는 훈시,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아연하지 않을 수 없(는)” 농담이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6)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서브 서브 서브프라임의 비밀”(9월 24일) 등등 <<한겨레>>에 열심히 싣고 있는 이런저런 칼럼들에서,
위기의 씨앗은 눈앞의 고수익에 눈이 어두워진 금융기관들이 신용이 취약한 계층에게 높은 이자에 마구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 ...
금융의 기본은 신용이다. 신용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기업을 살리고,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 금융의 본질이다. 금융공학은 이를 좀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고수익은 고위험을 수반한다는 진리는 아무리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도 변하지 않는다. 금융공학의 기법으로 나쁜 일(자산부실화)이 일어날 확률을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확률이 줄어든 만큼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의 피해는 더 커지기 때문에 결국 위험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이를 기초로 한 관계야말로 사람을 변화시켜서 위험자체를 줄여준다.
금융선진화도 좋지만 ‘돈 놓고 돈 먹기’식 금융이 아닌 사람을 살리고 산업을 살리는 금융을 생각할 때다. ...
긴축과 고통분담이 필요하다. ...
얼마 전 진보적인 학자들이 모여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대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다. 발제를 맡은 나는 고심 끝에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장금리는 이미 많이 오르고 있다. 정책금리도 인상해야 한다. ...
서구에서는 진보세력이 긴축과 금리인상을 주장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다. 긴축으로 경기가 위축되면 노동자와 서민층이 가장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또 금리가 인상되면 채무자로부터 자산가에게로 소득이 이전되는데, 통상 저소득층일수록 자산보다 채무가 많기 때문에 역진적인 재분배 효과를 초래한다. 일례로 구제금융 위기 때 강남 부자들이 고금리를 즐기며 “이대로 영원히!”를 외쳤다는 얘기도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금리인상론을 어렵사리 꺼냈지만 의외로 토론회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학자들이 찬성했다. 긴축과 고통분담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기본 방향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의 “진보적인 학자들”의 초상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학자들’의 전공은 모두 도덕 내지는 자본 윤리학? 아무튼 좀 지나친 농담이다.
7) 정남기․최우성 <<한겨레>> 기자
“시장신화의 몰락”이라는 3번에 걸친 최근의 글들에서,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금융위기를 파생상품 등에 대한 감독 부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기의 근본 원인은 오히려 과잉 유동성과 이로 인한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 밑바닥에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비대해진 금융자본이 존재한다. 미시적인 금융감독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자체의 위기라는 얘기다.
“미시적인 금융감독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자체의 위기”라? ― 어설프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약간은 핵심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연구실장은 “금융자본이 팽창하면서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이동과 증식으로 금융시스템의 불안정 요인이 잠복해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금융위기를 1930년대 대공황과 맞먹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다만 중앙은행 독립, 예금보험제도, 금산분리장치 등이 마련돼 있어 당시와 같은 파국을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중앙은행 독립, 예금보험제도, 금산분리장치 등이 마련돼 있어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파국을 피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최근 전개되고 있는 대파국은?
좀 더 들어 보자.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시스템 안정성을 위해 적절한 정부 개입을 통한 시장설계가 필요하다”며 “그런 장치가 마련돼야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방 교수라는 분이 그러니까 그런 분, 즉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는 ‘교훈’이나 찾고 계신 분이었군요?!
아무튼 좀 더 들어보면,
고삐풀린 금융자본주의에 숨겨진 위험(리스크)는 분명하다. 최근 사태의 뇌관 구실을 한 파생금융상품 ‘크레디트디폴트스왑’(CDS)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화한 시디에스 모형이란 결국 ㄱ이 ㄴ에게 돈을 꿔준 뒤 그 돈을 받을 ‘권리’를 ㄷ에게 팔고, 다시 ㄹ,ㅁ,ㅂ…의 손으로 무한정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그 권리를 손에 쥔 투자자의 운명은 정작 누군지도 모르는 ㄴ이 돈을 갚을 능력에 달려 있다. 대형 투자꾼들이 벌이는 머니게임 속에서 위험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떠넘겨질 뿐이다. 그 위험이란 한순간에 경제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폭탄’의 다른 이름이다.
아하, 그러니까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였군요?!
다시 좀 더 들어보자면,
신용상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은 소득보다 소비를 더 많이 했기 때문”이라며 “그 뒤에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란 거품이 있었다”고 말했다. ...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10여년에 걸쳐 이뤄진 과잉소비를 고려할 때 최소한 4년 정도가 지나야 가계부채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역시 ‘과잉소비’가 문제였군요?!
8)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진짜 위기는 9월부터 시작이다”, 혹은 “‘금융 단독 위기’를 ‘실물 위기’로 키우는 MB정부”(9월 2일) 등등 <프레시안>에 게재하고 있는 일련의 ‘기사’에서 그는,
한국 경제에 정말 ‘장기적 위기’라고 할 수 있던 순간은 두 번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의 성장률로 보자면, 이 수치가 0 혹은 마이너스에 달했던 것은 80년과 98년, 두 번이다. 한 번은 박정희의 유신체계가 종료하던 시점이고, 또 한 번은 김영삼 정권의 종료와 함께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정권을 넘겨주던 시점이었다. 이 두 번의 한국 경제 공황은 모두 일종의 자본 과잉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와서 이유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두 번의 공황 사이에는 18년의 간극이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경제에는 장기파동설을 빌린다면 15-18년 사이에 도저히 조정되지 않는 문제점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라고, ‘그럴듯한 공황론’(?)을 들이대며, 문제를 논하고 있다, 학자답게! 다만, 여기에서 나는 그의 공황론 자체를 시시비비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랫동안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라”고 주장해온 한국의 우파들이 경제 운용하던 시절, 두 번의 엄청나게 큰 공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라니?! 아무리 “한국의 우파들”,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기에 바빠도 그렇지. 그리고 “박정희의 유신체계가 종료하던 시점”이라도 그렇지. 박정희의 ‘유신 시대’나 그 “유신체계가 종료하던 시점”이 과연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라’고 주장”하던 시대였던가?!
그런데,
일반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적절한 정부 개입을 지지하는 내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금리 특히 환율에 대한 정부 개입은 반대한다. 부동산 경기부양에 대한 유혹으로 노무현 정부 초중반에 취했던 저금리 정책이 결국 정권은 날려먹고, 경제의 생산적 전환에 실패했다. 조중동의 '좌파 저주'가 정권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금리를 억지로 내리려고 했던 노무현의 '2만 불 정책'이 지난 정권을 결국 무너지게 했던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은 ... 그들이 정말 시장주의자였다면, 환시장에 개입하는 바보 같은 일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 그렇게 정부가 환율에 개입하지 않으면 시장과 시장을 둘러싼 주체들이 적응하면서, 역으로 환시장이 결국에는 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환시장에 개입했고, 수십조 원을 날려먹었다. 이 사건이 9월 위기설의 실체다. ... 내가 외국의 환딜러라고 하더라도, 이런 바보 같은 정부가 있는 동안, 단단히 한몫 잡자고 작전을 걸 것 같다. ...
정부에서는 9월 위기설은 근거 없다고 했다. 물론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 실물경제와 연관없는 위기는 진짜 위기는 아니다. 아직 한국의 실물경제는 대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묻건대,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적절한 정부 개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개입해야 하는 부문과 개입해선 안 되는 부문은? 혹시 매번 우 교수님한테 자문해야? 더 들어보자.
위기 대응이 바로 실력이다. 만기도래 채권의 특징 몇 가지를 보여주면서 "위기는 없다"고 항변하는 게 위기 극복이 아니라, 실제 한국 경제를 둘러싼 몇 가지 위험요소들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근거 없어 보이는 위기설을 극복하는 진짜 방법인 것 같다.
위기설을 극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현 위기설의 출발점인 강만수부터 해임하라. 위기설의 절반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청와대 경제팀을 위기관리형으로 재편하라. 그리고 현재의 이념 경제 기조를 위기관리 기조로 바꾸기 바란다. 정말로 말로만 외치던 ‘시장 경제’ 혹은 ‘작은 경제’, 그 기조를 외환과 금리에 대해서 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측근 인사를, “경제를 아는 사람”으로 바꾸기 바란다. 그 정도만 해도 9월 위기설은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글에서 “강만수부터 해임”하고 “경제를 아는 사람”으로 바꾸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면 위기(설)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는 말한다. “나는 정치학자가 아니라서, 경제가 망하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망하는 것보다는 국민경제가 건실하고 튼튼해지는 것을 더욱 소망하기 때문이다”라고! 강만수를 대신할 적임자는 혹시 ㅇㅅㅎ?
그런데, “‘금융 단독 위기’를 ‘실물 위기’로 키우는 MB정부”라니? 그것도 시정잡배나 그와 별 다름 없는 정치모리배도 아닌 명색이 경제학을 논하는 학자님의 말씀이라니 ― 참으로 장관이다!
9) 김호기(연세대)․(다시) 유종일․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학)․전창환(한신대) 교수 등 ‘개혁진보세력’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의 “개혁진보세력 ‘대안이념’ 백가쟁명”(9월 29일)이란 기사에 의하면,
대안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한국형) 조정시장 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 : 김호기․유종일․최태욱
금융권력에 대한 민주적 견제 및 통제로 금융민주주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전창환
아하! 아하! 그런 것이었군요! 그것이 바로 ‘대안’이었군요!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추구하고, 자본주의의 ‘극복’이 아닌 ‘인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과 닮은 꼴[닮은 꼴? 표절?: 인용자]”이며,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보장하지만, 사회적 형평과 시장질서 확립을 위해 정부 개입을 허용하는 경제 시스템”이라는 ‘좌파의 아이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민주적 시장경제론”21) 이 바로 그 대안?
결국 저들이 “(한국형) 조정시장 경제”니, “금융민주주의”니 하는 ‘대안’으로 요구하는 것은 기껏해야 서유럽식의, 혹은 북유럽식의 ‘사민주의’, 혹은 케인즈주의이다.
10)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 교수는 경제학 전공의 교수이자 “참여정부[=노무현 정권: 인용자] 초기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데 이어 참여정부의 12개 핵심 국정과제를 총괄 조정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해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설계사’로 꼽혔(던)”22) 거물인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근의 대공황이라는 사태를 맞으면서 진보 <<한겨레>>가 “특별 릴레이 기고” 제1호를 그에게 할여했고, 나아가 ‘창간 20돌’을 맞아 “경제섹션 ‘한겨레 경제’”를 별도 발행하면서 그 첫 호에서부터, 그리고 매주 월요일 정기적으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를 담당하도록 촉탁한 인사이다. 그만큼 거물의 ‘진보적’인 경제학자이시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연히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특별기고] 사상누각이 주는 교훈”(9월 29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다. 자본시장이 효율적이라는 가설 하에 정부 개입을 반대해온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오래 동안 각종 규제를 완화해왔고, 미국 금융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금융공학이라는 현대판 연금술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아왔으나 그 모든 신화가 사상누각이라는 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시장만능’을 외치던 그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에 숨었나. ...
미국의 금융위기는 한국경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경제가 추종해온 것이 미국식 월가 자본주의 모델이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훈련받은 사람들이 학계, 정부, 재계, 언론계에 포진하여 날마다 ‘시장’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명박 정부는 모든 전봇대를 뽑을 듯이 규제완화를 부르짖고 있고, 작은 정부, 감세를 내세워 멀쩡한 종합부동산세조차 없애려고 하고 있다. 부시의 경제철학과 쏙 빼닮은 이명박의 경제철학은 참으로 걱정스럽다. 미국 금융위기를 촉발한 것이 지나친 규제완화와 부동산 거품이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 “멀쩡한 종합부동산세”를 빼놓고는, 자신이 참여하여 핵심적 역할을 했던 ‘참여정부’의 제반 경제정책, 예컨대 한미 FTA나, 비정규직 확대 등을 노린 이른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등이야말로 ‘월가 자본주의 모델’, 즉 미국식 모델이 아니었으며, 자신 역시 “학계, 정부, 재계, 언론계에 포진”한 “미국에서 경제학을 훈련받은 사람들”의 하나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라는 그의 진단 혹은 분석의 결과도 잊지 말자. 또한 “맹목적 시장주의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지를 미국 금융위기가 잘 보여준다”고도 말씀하시고 계신 바, 이 역시 잊지 말자. “맹목적 시장주의”가 아닌, 말하자면, ‘개명한 시장주의’ 혹은 ‘조정 시장경제주의’ 역시 “무책임하고 위험”하며 ‘금융위기’가 필연적임을 곧 보게 될 것이니까!
한편, “성년 한겨레”의 “경제섹션”의 첫 번째 “강의”, “주요 경제현안들을 경제이론 또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짧은 강의”답게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시장경제’가 문제 아니라 ‘미국형 시장만능주의’가 문제”(10월 6일)라는 글은, 보다시피 그 제목에서부터 핵심을 장악해가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최근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기존 경제체제를 불신하고,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며,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위기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의 문제점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미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대표선수답게 별명도 많다. 월가 자본주의, 영미형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불린다. 모든 나라에서 시장과 정부가 힘을 합쳐 경제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현대경제를 혼합경제라고 하는데, 그 혼합 비율은 나라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영미형 자본주의에서는 시장이 주연이고, 정부는 조연이다.
그러면서 강의를 계속한다.
시장경제에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에는 시장만능주의만 있는 게 아니고, 크게 봐서 영미형, 북구형, 유럽형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시장이 큰 역할을 하고 성장을 중시하는 것이 영미형 모델이며, 영국․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대척점에 정부의 역할이 크고, 분배를 중시하는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 사회민주주의가 있다.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의 유럽 복지국가다. 영미형 국가의 조세부담률이 20-25% 정도인 데 비해 북구는 무려 50%나 되고, 유럽은 양자의 중간쯤 된다. 이념적으로 본다면 영미형은 우파, 북구형은 좌파로 부를 수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세 모델의 종합성적은 어떤가? 세 모델의 평균소득은 모두 3만 달러라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영미형에 비해서 분배가 평등하면서 성장은 비슷하고, 교육․혁신능력이 탁월하고, 범죄가 적고 인간적인 사회라 할 수 있는 북구가 우등생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국민소득 대비 20%의 세금을 내면서도 감세와 ‘작은 정부’가 인기가 있고, 좌파는 경제를 망친다는 것이 정설처럼 통하는 한국에서는 참으로 믿기 어렵겠지만 50%나 세금을 거두는 북구 좌파 국가의 경제성적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연 ‘시장경제’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의 “짧은 강의” 전체를 옮기고 말았는데, ‘진보’ <<한겨레>>라서 다행히 “무단 전체를 금지합니다” 따위의 경고는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 교수의 ‘강의’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것은,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 사회민주주의”가 “좌파로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영미형에 비해서 분배가 평등하면서 성장은 비슷하고, 교육․혁신능력이 탁월하고, 범죄가 적고 인간적인 사회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으로서의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모름지기 이 북구형의 좌파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며, 이번의 경제위기를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좋다. 다른 문제들은 잠시 제쳐두자. 그리고 과연 경제위기는, “영미형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의 문제,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의 문제는 아닌지, 이 교수의 주장이 아니라, 사실로 눈을 돌려보자.
먼저 덴마크
일찍이 지난 7월 11일부터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오고 있다.
북유럽 지역 86개 금융회사 가운데 지난해 주식이 최악이었던 로스킬데은행(Roskilde Bank)은 써브프라임 위기가 개시된 후 중앙은행에 의해서 구제되는 덴마크의 첫 번째 대출자가 되었다.23)
덴마크의 ... 로스킬데 은행은 7월 10일에 중앙은행으로부터 “무제한의 유동성”을 받았고, 덴마크은행연합회는 7억5천만 크로너까지의 손실을 보상해주기로 동의했다.24)
덴마크의 위기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 다르고 더욱 나쁘다. 이는 초거대은행인 UBS의 판단이고, 신용평가회사 무디스(Moody's)의 판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UBS는 금년에 더 많은 은행들이 파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덴마크의 주택가격은 2006년 가을까지 거대하게 상승했다....”25)
그리고 10월 6일이 되면, 뱅크런을 예방하기 위해서 덴마크 정부는 350억 크로너(약 64억 달러)에 이르는 모든 은행예금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다.
다음엔 스웨덴
덴마크에서의 문제야, 이 교수로 하여금 어이없는 얘기를 하게끔 하는 이론적인 바탕을 잠깐 제쳐두고 사실 그 자체만 본다면, 비교적 최근의 사태들이기 때문에 공사다망하신 이 교수님께서 혹시 추적하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책망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웨덴에서의 문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1990년에서 ’94년 사이에 이미 스웨덴은 심각한 경제․금융위기를 겪었고, 이는 경제학 교수,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혹은 다 알아야 할 유명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것은 “정말 체제적 위기의 문제”26)였고, “가장 극적인 세계의 10대 금융위기”27)의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날 “스웨덴의 주택가격은 미국의 그것보다 더욱 과대평가되어 있다.”28)
이 역시 사실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교수님께서는,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고 있다. 영미형의 “대척점에 정부의 역할이 크고, 분배를 중시하는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이 있으며, 이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이러한 이 교수 등의 정신적 병증과, ‘이번의 경제위기는 좌파 정권 10년 탓’이라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등의 정치가들의 그것, 그리고 쏘련과 과거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이북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일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정신적 병증 사이의 차이를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3. 혹세무민지설들의 이론적․정치적 특징
1) 극우적 대안과 다르지 않은 ‘진보적’ 대안
이상에서 몇몇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위주로, 그들이 이 대공황의 정세에서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비록 표현이 다르고, 또 사람에 따라 방점을 찍는 곳이 다소 다르지만, 그들 간의 그러한 비본질적인 차이를 도외시하면, 그들의 주장의 요점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것은 모두 한결같이 ‘신자유주의’,29) 혹은 영미형․앵글로-쌕슨 형의 시장만능주의, 혹은 ‘규제되지 않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그리하여 ‘시장의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는’, 자본의 탐욕과 방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감독․역할이 보다 강화․확대된 자본주의, ‘조정 시장경제’, 구체적으로는 ‘북구형의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겨레>>가 “개혁진보세력 ‘대안이념’ 백가쟁명”이라는 제목 하에 소개하고 있는 여러 ‘진보적 교수님들’의 이른바 “(한국형) 조정 시장경제”나 “금융민주주의”,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다”는 이정우 교수의 주장 등이 이를 특히 명확하고 요약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진보적 지식인들’ 혹은 ‘개혁진보세력’의 이러한 ‘대안이념’은 사실은 현 공황․위기 국면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그것과 그다지, 아니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 극우 이데올로그들 역시 탐욕과 방종을 비판․비난하고, 신자유주의의 종언, 레이건-대처리즘의 종언, 미국형 혹은 영미형 자본주의의 종언, 몰락을 얘기하면서 ‘보다 투명한 자본주의’, 탐욕과 방종이 정부․국가에 의해서 규제․감독되는 자본주의, 국가의 역할 증대 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한 혁명적 노동자 신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위기를 탐욕 탓으로 돌리며 비난하고 있다. 자신의 집이 몇 채나 되는지도 모르는 존 매케인[공화당 대통령 후보: 인용자]조차 그렇다.
요트를 갖고 있고 자가용 비행기와 여러 채의 호화주택을 가지고 있는 기생충들, 즉 억만장자들은 증오를 받아 싸다. 그러나 탐욕은, 인류사회가 부자와 가난뱅이로 분열된 이래 수천 년 동안의 현상이다.30)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서 정치가들과 학자님들은 다같이,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공식적인 태도는 탐욕과 규제 실패라는 상황을 비난하는 것이다.31)
은행들이 쓰러지고, 일자리들이 사라지며, 경제가 빈곤과 불행이라는 엄청난 위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갈수록 텔레비전 방송과 선거 유세 판은 갑자기, 결코 그럴 것 같지 않은데도 ‘대기업’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꽉 차고 있다.
라우 돕스, 글렌 벡[모두 미국의 극우적 방송인들: 인용자], 그리고 심지어 사라 페일린[극우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 인용자]나 존 매케인까지도 갑자기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싸우는, ‘근로인민의 보호자들’이 되고 있다. ...
돕스와 벡은 때때로 대기업을 비판하지만, ― 그러나 그것은 실로 노동자들과 중간계급의 모든 고통의 근원과 관련하여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왜곡된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32)
이렇게 “‘월스트리트’를 비난하는 우익들을 조심하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의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영미형 혹은 미국식의 자본주의를,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심판하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을 조심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
저들 주장에 숨겨진 그들 주장의 반노동자적․반동적 성격․특징 때문이다.
2) 시장 대 국가의 문제
저들은 시장과 국가 혹은 정부를 무매개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에 대한 국가․정부의 규제․감독․감시 및 국가․정부의 역할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규제완화’․‘작은 정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투쟁’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은 자못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다!
저들이 몰계급적인 언사로 그 역할 강화를 요구․주장하는 국가 혹은 정부는 과연 누구의 국가, 누구의 정부인가?
분명 독점자본가계급의 국가․정부이다. 그러나 저들은, 국가의 본질, 그 계급 억압적 기능에 대한 선의의 무지 때문이든, 아니면 그것을 짐짓 은폐하고자 하기 때문이든, 바로 이 점에 침묵하면서 반동적으로 그 독점자본가계급의 국가․정부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 그 전선을 왜곡 혹은 은폐하고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 그 전선의 본질이 마치 시장 대 국가, 혹은 시장 대 정부의 대립․갈등에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국가․정부의 규제․감독․역할을 증대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 대 국가, 혹은 시장 대 정부의 대립․갈등은 결코 신자유주의의 본질도 그 전선의 핵심도 아니다.
시장과 국가․정부의 대립이나 갈등, 그것은 그저 언제나 노동 대 자본 간의 대립,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억압의 강화라는 신자유주의의 본질, 그 핵심적 전선을 은폐하고 호도하기 위한 기만적인 치장, 기만적인 슬로건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것은 때때로 발생하는 개별 독점자본과 정부 사이의 갈등에 불과하다. 예컨대, 그토록 ‘작은 정부’를 외쳐대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부인 레이건 정권의 재정․예산의 구조․규모33)가 웅변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에서는 결코 ‘작은 정부’는 존재한 적도, 지향된 적도 결코 없다. 만일 ‘작은 정부’와 유사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에서뿐이었다.
3) 신자유주의 대 케인즈주의
저들은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또한 그것들을 무매개적으로․절대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대립 속에서는 대체로 신자유주의=악, 케인즈주의=선이다. 바로 현대 서유럽 사민주의34)가 표방하는 도식 바로 그것이다.
전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선전하는 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뿐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케인즈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곧바로 반동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김성구 교수가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위기에 직면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한 이후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케인스주의 시대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국가의 개입과 위기관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일 요소이다.35)
실제로 케인즈주의나 그것의 실천판(實踐版)인, 파시즘적 경제정책들은 물론,36) 그 자유주의적 판(版)인 뉴딜도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 아니 거꾸로 극히 반동적이다. 그것들은 모두, 특히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웅변하는 것처럼, 인류의 안전․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이미 지양되었어야 할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억지 이론과 정책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비난․심판한다며 곧바로 케인즈주의로, 즉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기초일 뿐인 케인즈주의로 달려간다. 그리하여 자본의 ‘탐욕’ 및 ‘방종’에 대한 국가의 규제․감독을 요구하고, 국가가 ‘성장’이 아니라 ‘분배’에 그 정책의 중점을 둘 것을 요구한다. 저들은 ‘복지국가’라는 형태 속에 독점자본의 반노동자계급성이 은폐되어 있는 자본주의를 지향한다.
그만큼 그들은 반동적이다.
그러나 그나마 위로부터 그러한 ‘복지국가’를 주조해내려는 저들의 주장은 사실은 역사적 조건을 부당하게 사상한 저들의 망상에 불과하다. 케인즈주의적 소위 ‘복지국가’는 쏘련이라고 하는, 제국주의의 대립물, 억압과 착취에 대한 강력한 대립물․반대물로서의 20세기 사회주의가 발전하고 있었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조건 속에서만 형성․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는 실제로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된 후, 예컨대 “제3의 길”, “새로운 중도” 등의 이름 하에 심각하게 해체과정을 밟아 왔으며, 바로 그것도 이번의 공황이 이토록 심대해질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의 하나이다.
그러나 저들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일부의 ‘사회주의 혁명가들’도,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개는 어느 것이 누구의 깃발인지조차 치명적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독점자본의 반공선전에 녹아나고, 그 장단에 어릿광대 춤을 추면서 말이다.
4) 위기의 원인․성격에 대하여
앞에서 본 것처럼, 저들은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라는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이니 ‘근본적인 문제’니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결국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요, 따라서 그에 대한 규제․감독․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저들의 주요 관심이 ‘시장에 대한 국가․정부의 규제․감독․조정’ 등에 가 있을 때, 저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대해서는 비록 희미하나마 무언가 감각․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성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인식․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저들은 공황의 진정한 원인이나 성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고, 거기에서 바로 몰계급적인, 사실은 독점자본의 이익을 옹호하고 절대화․영구화하는, 대안 아닌 대안, 사민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절(節)을 바꾸어 고찰해보자
4. 공황의 원인․성격
금융상의 위기만이 아니다
극우적 이데올로그들의 경우도, ‘진보적 지식인들의 경우도, 저들이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 저들의 논의의 특징 중의 하나는 위기를 사실상 전적으로, 혹은 기본적 혹은 본질적으로 금융위기, 즉 신용위기로서 규정하고 취급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 저들은 그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의 위기’로 비화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혹은, 앞에서 본 우석훈 교수님처럼, “실물경제와 연관없는 위기는 진짜 위기는 아니(며)” “아직 한국의 실물경제는 대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면서, 장관 하나만 잘 갈아치우면 위기를 모면하고 비껴갈 것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현 위기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금융위기로 보면서 그것이 소위 실물경제로 비화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사실을 정확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관점은 현재의 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화, 즉 주택의 대량 미분양 사태와 그에 따른 주택가격의 하락, 다시 그에 따른 주택대출 원리금 상환의 연체․불능화에서 유발되었다는 자신들의 인식, 그러한 사실 자체와도 모순된다.
현 상황은 분명 거대한 금융위기, 거대한 신용위기임에 틀림없다. 온 세상을 호령하며 쥐락펴락하던 거대 금융자본이 속속 파산하고, 거대 금융기관들이 서로가 서로의 지불능력을 믿지 못해서 돈을 움켜쥐는 바람에,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RB)를 위시한 각국의 중앙은행과 정부가 역사상 유례없는, 상상도 못했던 거액의 구제자금을 살포하고37) 있는데도 금리가 폭등하고 전세계 금융시장이 마비상태에 빠지다시피 하고 있는 현 상황38)은 분명 거대한 금융공황, 거대한 신용공황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융공황, 신용공황은 결코 ‘실물경제’의 위기에 의하지 않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실물경제’의 위기의 현상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
맑스는 말한다.
경제학의 천박성은 특히, 산업순환의 시기전환의 단순한 징후인 신용의 팽창과 수축을 그 원인으로 삼는 데에서 보인다. 일단 일정한 운동에 던져진 천체가 끊임없이 동일한 운동을 반복하는 것과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사회적 생산도 그것이 일반 팽창과 수축이라는 교대하는 운동에 던져지자마자 이 운동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결과가 다시 또 원인이 되고, 그 자신의 조건들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모든 과정의 부침은 주기성의 형태를 취한다.39)
화폐시장에서의 공황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생산과정 및 재생산과정 자체에서의 비정상을 표현하고 있다.40)
그리하여, 오늘날 여러 경제학자들이 현 위기를 단순히 금융위기로서 규정하면서, 규제․감독 등 금융상의 관행을 바꿈으로써 위기를 해결하고, 나아가 예방․회피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경제학의 천박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은행과 신용은”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 강행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고, 또한 공황과 사기(詐欺)의 가장 유효한 매체의 하나”41)이기 때문에, 공황의 규모, 그 심도나 격렬도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그 작용은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현 위기의 심각성, 그 역사적 의의도 사실은 바로 그 점, 즉 그것이 단지 규제완화․감독소홀 등과 같은 금융관행상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단순한 금융위기․신용공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본질적으로 생산과 소비간의 엄청난 충돌, 엄청난 과잉생산에 의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 의의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듯이 하는 말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 운운하는 따위의 천박한 인식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지만,42) 누구나 인정하는 것처럼, 위기는 분명 주택의 과잉생산에 의해서 발발하였고, 이미 여러 분야, 여러 부문에서 그 과잉생산이 명확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최대 산업의 하나인 자동차 산업은 엄청난 과잉생산이 일어난 나머지 GM이나 포드, 크라이슬러 같은 ‘빅 쓰리’의 생존 가능성 여부가 이미 월스트리트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불과 수개월 전만해도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치던 철근, 철강도 이미 세계적 규모에서 엄청난 과잉생산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조선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반도체나 LCD 산업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그 가격이 심각하게 폭락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발전에 의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엄청난 과잉생산, 그에 따른 출혈경쟁에 의해서 그렇게 폭락해 왔다. 기타 대부분의 산업부문에서도 물론 유사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산업은 현대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주요 산업일 뿐 아니라 하나 같이 한국 자본주의의 명줄을 쥐고 있는 주요 산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위기를 단지 금융상의 그것으로만 보는 백치증세 때문에, 강만수 장관 같은 주요 관료들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본 것처럼, 그야말로 건필을 휘두르고 계신 우석훈 교수 같은 이도 한가하게도 “아직 한국의 실물경제는 대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운운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IMF의 쉬트라우스-칸 총재도, 이명박 대통령도 2009년 하반기, 그러니까 내년 하반기에는 경제가 서서히 회복․성장 국면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두 사람만의 주장이 아니다. 사실상 주요 부르주아 정책 담당자들,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이고, 사실은 소망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금융위기로서 파악하면서 금융상의 패닉, 경색만 해소되면 위기 상황이 끝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이 현실로 실현될 가능성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는 하지만, 이번의 위기를 어찌 어찌 해서 내년까지는 극복하고 ‘호황’, 즉 생산의 확대국면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하루살이의 호황으로 끝나면서 곧바로 다시 대공황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엄청난 과잉생산은 동시에 노동자 대중의 거대한 빈곤화와 함께 진행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 (2) ― 노동자계급의 빈곤
공황은 수많은 자본을 파산으로, 조업단축으로, 인수합병으로, 구조조정으로 내몰고, 그만큼 수많은 노동자들을 실업으로, 과잉인구로, 산업예비군으로, 빈곤으로, 길거리로 내몬다. 그리고 공황의 규모, 그 심도, 그 격렬도가 크면 클수록 그 빈곤화가 그에 비례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공황에서도 이미 런던의 월스트리트에서, 런던의 씨티에서, 그리고 사실은 도처에서 이미 대규모의 ‘감원’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아직도 초발단계(初發段階)인 만큼 앞으로 더욱더 심각하고 더욱더 대규모의 더욱더 비극적인 소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 공황의 배경을 이루는 지금까지의 빈곤화의 문제를 돌아보자.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비난하는 극우 이데올로그들이든, 우리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든, 저들은, 앞에서 본 것처럼, 신자유주의를, 저들 독점자본이 기만적으로 표방하는 바에 따라, 단지 시장 대 국가의 문제로, 특히 주로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완화, 감독 소홀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특히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비롯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억압의 강화가 그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을 불가피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리고 물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면서 그 과정을 증폭시켜가고 있는 것은, 우선 노동생산력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속에서의 과학기술의 혁명이다.
그리고 극소전자(ME)혁명, 정보통신(IT)혁명 등의 규정을 수반하면서 진행되어온 특히 지난 30여 년 동안의 과학기술혁명은, 이전의 어떤 과학기술혁명보다도, 자동화, 그것도 전면적 자동화, 나아가 무인생산(無人生産) 체제를 의식적으로 지향한 것이었고, 또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특별잉여가치․초과이윤을 취득하기 위한 자본의 탐욕과 패배는 곧 파산․몰락을 초래하는 경쟁이라는 외적 강제에 의해서 그렇게 추진되었다.
인간의 필요 충족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합리적인 경제체제, 그러한 사회체제 하에서라면,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비약적인 증대는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다. 물질적 생활수단의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을 그만큼 단축할 수 있고, 그러한 필요노동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잠재되어 있는 인간적 자질을 개발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잉여가치․이윤을 위한 생산체제인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하에서는 그것은 노동자 대중의 재앙(災殃)이다. 소수의 노동자에게는 장시간 노동이 강제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실업과 반실업, 비정규직, 그에 따른 극심한 빈곤․고통이 강제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그 노동(시장)의 유연화, 구조조정 등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하에서의 과학기술혁명의 그러한 작용을 강제․강화하고 제도화하는 억압기제이다. 그리고 바로 그에 의한 광범하고 심대한 대중의 빈곤 위에서 폭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과잉생산위기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자본가 국가들이 설령 어떤 재정․금융 정책에 의해서, 즉 파산해가는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고, 금융시장에 엄청난 ‘유동성’, 즉 지불수단을 공급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진정시킨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곧바로 공황을 끝내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폭발하고 있는 대공황은 바로 자본주이적 생산체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발전한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혁명이 사실상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독점자본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억압의 강화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를 그토록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사적으로도 주요한 조건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조건 때문에 노동자 대중은 궁지에 몰리면서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름 아니라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그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에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위기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형태로 재격화되면서 신보수주의, 통화주의의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대처 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그리고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권의 집권과 더불어 현실적인 정치권력으로 등장하여, 미국의 항공관제사 파업, 영국의 광산노동자파업이라는 내전을 거치고 그것들을 파괴하면서 자신을 강화해갔다. 말할 것도 없이, 수십 년 간에 걸친 집요한 선전과 공작․탄압으로 반쏘․반공 이데올로기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버티고 있고 발전하고 있는 한, 그것들을 아무리 이데올로기적으로 악마화하더라도 엄연한 사실이 자신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공격의 전면화를 위해서는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먼저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이건 정부 하에서 극도로 강화된 냉전은, 한편에서는 그 자체가 과잉생산의 부담을 완화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바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를 해체시키기 위한 전쟁 그것이었다. 무슨 구실을 내걸었던, 국제 노동운동 내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던 각양각색의 반쏘 선전, 반쏘 정치공작은 물론 그들 제국주의의 우군이었고, 지금도 물론 그렇다.
드디어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서 저들은 목적을 달성했다. 노동자계급은 좌절감과 방향상실증에 빠져들었고, 신자유주의는 거침없이 활개쳤다. 광범한 노동자 대중을 빈곤의 나락으로 내몰면서! 그리하여 사실은 자신의 묘혈을 파면서!
김성구(편집위원장, 한신대) / 2008년09월23일 14시43분
홍석만 (논설위원) / 2008년09월16일 3시49분
박하순(노기연/사회진보연대) / 2008년08월04일 15시46분
세계적 석유 위기와 한국 경제의 위기 | ||
고유가, 피크오일과 MB노믹스의 무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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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격 추세와 석유가격 급등의 원인
유가가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1999년 1월, 이라크의 증산으로 인한 공급 증대와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수요 둔화가 겹쳐 유가는 배럴당 8달러에 머물렀다(미 서부텍사스 중질유 기준). 그러나 그 이후 유가는 급격히 올라 2000년 9월 배럴당 35달러가 되었다. 2001년 정보기술 산업 거품붕괴로 미국에 경제위기가 도래하자 2001년 말에 유가는 다시 하락하였다가 2004년 9월경에는 배럴당 4-50달러까지 상승하였다. 2007년 9월에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섰고, 같은 해 10월에는 90달러를 넘어서더니 올해 1월 2일에는 100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100달러는 일시적인 정점이라는 견해가 유력했다. 하지만 6월 17일 현재 130달러를 넘고 있고, 최고치를 기록한 6월 6일에는 139.89달러를 기록했다. 물가를 감안한 실질 가격 기준으로는 역사상 가장 유가가 높았던 2차 석유 위기 당시인 1980년의 100-110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에너지 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세계 석유 집약도 감소를 고려한 2차 석유위기 당시의 ‘실질 실효 가격’은 150-160달러가 된다고 한다. 즉 아직은 이 가격에는 못 미친다). 최근의 유가 상승은 그 가파르기가 그지없고 변동성 또한 매우 커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달러 기준 유가는 왜 이렇게 오르고 있는가? 달러 가치 하락 및 금융 투기, 중국, 인도 등에서의 원유 수요 증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의 원유 소비 증대 등이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날그날의 유가 변동 이유로는 나이지리아 등지에서의 테러리스트의 송유관 공격, 원유 채굴 노동자 파업, 미국 원유 재고량의 감소,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설 등이 얘기되기도 한다. 우선 달러 가치 하락부터 보자. 달러 가치가 현저히 하락한 현재 달러 기준 유가는 유가 상승 정도를 과장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즉 유로 기준으로 유가는 그렇게까지 오르지 않았다. 또한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금융 기관에 대한 불신이 커져 있는 상황에서 국채나 곡물 원유 등의 상품에 갈 곳 없는 자금이 몰릴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물론 최근에 곡물 등 다른 상품 시장의 거품은 꺼지는데 원유 가격은 계속해서 치솟고 있는 점에서 원유 시장과 다른 상품 시장 사이에 차별화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다. 중국, 인도 등지에서의 수요 증대 또한 막대하지만 이들 국가에서의 원유수요를 포함한 세계 원유 수요 증가율은 1994년에서 2006년 사이에 연평균 1.76%에 불과하다. 2003-2004년에 가장 높은 3.4%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런 정도의 수요 증가에 부응하지 못하는 공급이 문제가 아닐까? 더욱이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급 확대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유가상승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원유 생산 및 공급 제약이다. 사실 투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투기 거품 이후에 유가가 폭락해서 '정상 가격'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석유는 근본적으로 고갈 가능성이 있는 자원이다. 만약 원유 생산량의 정점이 도래했거나 곧 도래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석유는 단기적으로 비슷한 가격의 대체제가 나타나기 힘든 자원이다. 이런 자원에 대한 투기와 고갈 가능성이 없고 일시적으로 공급 제약이 존재하는 상품에 대한 투기와는 성질이 다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원유 생산 및 공급 제약의 문제는 금융 투기를 제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피크오일(원유 생산 정점)이 도래했는가? 원유 생산 및 공급 제약은 일부 유전들이 생산 정점을 지나 생산량이 줄고 있고 일부 유전의 경우 투자가 진행되지 않아 잉여생산능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에 조그마한 차질을 가지고 올 사건도 즉각 원유 가격을 밀어 올리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다 뜨거운 쟁점은 원유 생산 정점이 이미 도래했거나 곧 도래할 것이라는 ‘피크오일’론이다. 킹 휴버트가 제시해 1970년대 미국의 원유 생산 정점 시기를 거의 정확히 예측해 유명해진 이 이론은 지금까지는 일부 극단적 비관론자들에게만 수용되다가 최근에는 주류 언론에도 자주 소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원유가 상승의 근본적인 원인이 이것에 기인하지 않는가라는 논의가 활발하다. 비록 가까운 장래는 아닐지라도 원유 생산 정점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원유가 “토지처럼 재생산이 불가능하지만 또 토지와는 달리 고갈 가능성이 높은” 광업자원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피크오일 주창자들의 피크오일 시기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피크오일 시기가 지났거나 곧 도래한다. 휴버트와 같이 작업했던 디훼이즈(Kenneth S. Deffeyes)는 2005년에, 독일의 에너지워치그룹(EWG)는 2006년에 이미 피크오일에 도달했다고 하고, ‘피크오일 및 피크가스 연구연합회’(ASPO)의 창시자 캠벨(Colin Campbell)은 올해 6월에 발표한 자료에서 2008년을 피크오일의 해라고 예측하고 있다(캠벨은 새로운 자료를 반영하여 피크오일 시기를 변경해가고 있는데 2011, 2010, 2007, 2008로 바뀌고 있으나 2010년 전후로 피크오일 시기를 예측하고 있다. 캠벨은 1990년대 중반에 2000년을 피크오일 시기로 예측한 바 있다). 그리고 사우디 및 중동의 원유생산을 연구한 시몬스(Matthew Simmons)도 대체로 지금 시기를 피크오일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2005년, 2006년, 2007년의 원유 생산량은 1일 평균 약 8,500만 배럴로 거의 동일하고, 2008년 1/4분기만을 보면 생산량은 2005-2007년에 비해 조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거대 석유기업 등에서도 “값싼 원유 시기는 지나갔다”며 피크오일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피크오일 주창자들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원유 매장량에 대한 판단의 차이, 앞으로 발견될 원유량의 차이, 오일 샌드 등 비전통적인 원유에 대한 판단의 차이 등에 있다. 피크오일 주창자들은 각국이 발표하는 매장량, 특히 OPEC 회원국들이 원유 생산 쿼터를 많이 할당받기 위해 부풀려온 매장량을 불신하고 대신 생산량, 원유 발견량, 원유 채굴량 등에 기초해 독자적으로 매장량을 판단하고 피크오일 시기를 산정한다. 피크오일 이후 원유 생산량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도 논란거리이다. 급격히 하강하느냐 고원 형태를 보일 것이냐가 문제다. 별 준비 없이 전자의 사태를 맞이하면 석유 문명은 공황, 전쟁 등 급격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후자라 할지라도 석유문명의 전환은 불가피하고 그래도 전자보다는 혼란이나 고통이 덜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현재의 고유가가 가까운 장래에 피크오일의 도래에서 연유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원유 생산 및 공급의 제약이 어느 정도 뚜렷해 보여, 중국 인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경제위기가 아니라면 고유가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피크오일 지지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기관들이 이러한 예측에 영향을 받아 고유가를 예상하고 있다. 투자회사 모건 스탠리에서는 원유가가 곧 150달러에 달할 것이라 발표를 했고, 골드만 삭스는 그 보다 먼저 향후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원유가가 200달러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보다 극적인 사례로는 CERA(Cambridge Energy Research Associates)가 있다. 2008년의 유가폭등이 있기 전까지 CERA 의장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은 피크오일 주창자들을 비판해 왔고, 유가가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 5월 7일에 2008년 중 유가가 150달러에 이를 것이고, 이는 공급 제약 때문이라고 기존 견해를 뒤집었다. 고유가와 한국 경제 고유가는 한국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다. 당장 화물연대 등 운수 종사자들의 파업을 낳고 있다. 치솟은 경유 가격에 비해 운송료가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항공업계와 자동차업계가 타격을 받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곡물 가격 상승 또한 유가 상승과 무관하지 않다. 화학비료 생산, 기계영농에 원유가 필수적이고 이는 곡물 가격을 상승시키고 있다. 높은 가격의 원유에 대한 대체제로 바이오연료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양의 곡물이 쓰이고 있다. 고유가는 이렇게 개별 산업에의 영향 이전에 물가나 경상수지 등 거시 변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의 물가 상승은 고유가가 주요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고유가는 경상수지를 악화시키고 있다. 원유 수입액은 올해 1월에서 4월까지의 합계액를 보면 수입총액의 18.8%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전년 동기의 15.2%보다 3.6%포인트가 늘어난 것이다(참고로 곡물수입액이 총수입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에 1.7%였다). 2007년 1월에서 4월까지의 원유수입액이 약 170억 달러인 반면 2008년 원유수입액은 약 270억 달러로, 올해 4월까지만 전년 대비 약 100억 달러의 추가부담이 있었다. 이 대부분이 가격 상승으로 인한 추가 부담이었다. 4월까지의 경상수지 적자가 약 68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유가 상승으로 인한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고유가가 지속되고 이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된다면 이는 자칫 초민족적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이탈을 낳고 이는 환율 위기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정도의 경상수지 적자만으로 이런 문제가 야기될 것은 아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막대한 규모의 금융투기자본이나 단기 외채의 존재로 인해 적은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로도 쉽게 환율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국제투자수지 마이너스 규모는 최근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고유가는, 특히 이것이 피크오일에서 기인한다면, 이런 단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중장기적으로 보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석유에 기댄 산업 및 소비생활 전반에 대해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재의 고유가로 인한 문제를 전부 이명박에게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명박을 비롯한 지배세력이 이런 문제에 올바로 대처할 수는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금융세계화된 현실에서 국제적 환율의 변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석유 가격의 급변은 그 자체로 경제에 큰 위기 요소다. 우리는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이 경제성장 또는 효율이라는 미명하에 주권이나 안전, 생명, 건강, 민주주의, 노동권 등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들이 경제위기, 생태위기나 문명의 전환 등에 대한 그 어떠한 개념이나 대책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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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06월18일 16:20:1 |
박하순(노기연/사회진보연대) / 2008년06월13일 14시42분
변정필 기자 bipana@jinbo.net / 2008년07월16일 18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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