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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FTA와 자유무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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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과연이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가하다니, 의외다." 지난 3월이든가, 4월이든가, 한미 FTA 반대단체들의 회의에 연구소를 대표하여 참가하고 온 회원이, 거기에 참가한 다른 단체의 대표 한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보고' 겸 웃으며 전한 말이다. 절로 씁쓰레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얘기한 사람의 눈에 비친 우리 연구소의 상(像)이, 그의 주관적 관점과 상관없이, 과히 싫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찌그러진 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미 FTA'라는 당면 문제의 본질과 성격을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의 눈에 비친 '노사과연'의 상은 필시, 계급문제만 중시할 뿐,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백안시하는 단체일 것이며, 어쩌면 나아가서는, 맑스주의적 원칙에 충실하려는 것을 넘어서 '교조주의적'이기까지 한 단체일지도 모른다. 그가 당면의 한미 FTA의 본질과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가 이를 '민족주의적' 혹은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경우, 즉, "한미 FTA는 '국익'에 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식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경우 ― 이 경우, 우리 연구소가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에게는 의외일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그가 성실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 노사과연에도 역시 '애국적인 측면'이 있었구나" 하고 제멋대로 재단하는 대신에, "혹시 이 한미 FTA라는 문제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 노사과연이 그 반대에 참여할 만한 어떤 다른 측면, 다른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에, (여러 정황으로 봐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은 안 들지만,) 그가 문제를, 애국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익 증대, 따라서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자․인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경우 ― 이 경우에도 그가 의외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노사과연을 "맑스주의적 원칙에 충실하려고 하긴 하나, '교조주의적'"이라고, 즉 맑스의 진의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연구소 내부의 일부 회원에 의해서, 물론 다른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맑스 자신은, 그리고 물론 엥겔스도,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 따라서 비맑스주의적, 혹은 반맑스주의적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그것이다. 문제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따라서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비판을 가한 바 있다.1) 따라서 그러한 애국주의적, 혹은 (소)부르주아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왈가왈부하는 데에 대해서 무언가 발언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지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일부의 문제의식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대한 맑스(주의)의 태도 ― 맑스의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을 중심으로 맑스주의의 창시자들, 그러니까 맑스와 엥겔스가 기본적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여러 기회, 여러 문건에서 그러한 태도를 표명하였지만, 우리는 특히, 1848년 1월 9일에 맑스가 '부뤼쎌 민주주의협회'에서 행한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이하, "연설"]에서 맑스의 그러한 태도를 선명히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혹시) 비맑스주의적, 혹은 반맑스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바로 주로 이 연설을 근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가 이렇게 논란의 여지없이 자유무역에 대해서,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찬성의 뜻을 표명하고"2) 있기 때문에, 현하 한미 FTA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맑스주의적 관점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명했다"는 엥겔스의 서술은, 그 발언 자체만을 떼어내어 자칫 잘못 들으면,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절대적인 지지를 표했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맑스의 연설도, 엥겔스의 해설도 잘못 이해하고, 오해하는 것일 뿐이다. 맑스의 "연설"을 고찰하기 전에 우선 엥겔스의 이 문장부터 고찰해보자. 그 문장을 생략 없이 인용하자면, 이렇다. 일정한 사정 하에서는, 즉 당시의 독일에서는 보호관세가 산업자본가들에게 여전히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무역이 결코 노동자계급의 모든 고통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 또한 반대로 이들 고통 자체를 증대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도, 그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좀 더 애매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맑스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는 엥겔스의 말이, 맑스가, (오늘날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혹시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를 철회, 혹은 유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 이 자체만으로는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맑스의 "연설" 그 자체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런데, 만일 독자가, 맑스가 문제의 "연설"에서 보호무역제도나 보호관세제도에 대한 비판을 세세히 전개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또는 혹시 더구나 맑스가 자유무역을 그 자체로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실 맑스의 "연설"은 자유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 특히 "자유무역이라는 천년왕국에서는 [노동자들의 ― 인용자] 빵의 크기가 2배로 될 것"3)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에 대한 비판에 가장 많은 시간, 혹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가 이렇게 자유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에 "연설"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것은, 당시 자유무역의 전도사였던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들의 대부분이, 자유무역을 통해서 수입이 자유화되고 그리하여 값싼 곡물이 수입되게 되면, 빵값이 싸져서 그만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한다는 식의 허위의 선전을 해댔기 때문이다. 영국 자유무역론자들의 그러한 허위선전은 물론 자유무역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맑스가 논박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자유무역제 하에서는 빵을 비롯한 식료품이나 기타 다른 상품의 가격이 내려갈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화폐액으로 더 많은 상품, 즉 생활수단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맑스는, "의문의 여지없이, ... 모든 상품의 가격이 내려간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유무역의 필연적 귀결이며, 그리하여 나는 1프랑으로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물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4)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 맑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예컨대 노동자 생활수단의 가격 하락은 필연적으로 임금을 하락시킨다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 혹은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물가의 하락은 소비를 증대시킬 것이며 이는 생산을 증대시켜 다시 임금을 상승시킬 것, 운운하는 주장에 대해서이다. 아무튼 자유무역 찬양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얼마나 신랄한가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명백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상황에서 자유무역이란 무엇인가? 자본의 자유입니다. 아직 자본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약간의 국민적 장벽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자본의 활동을 완전히 해방한 것이 될 뿐입니다. 자본에 대한 임노동의 관계를 존속시켜두는 한, 설령 상품의 교환이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수행된다 하더라도,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자본을 보다 유리하게 사용하면 산업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간의 대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무역론자들의 자만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적으로 그 반대입니다. 결과는, 이 두 계급의 대립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 노동자는, 자유로워진 자본도, 결코 관세장벽에 의해서 시달리는 자본에 못지않게, 자신을 노예로 삼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의 자유인가? ... 그것은 자본이 누리는, 노동자를 압살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라는 관념은 자유경쟁에 근거한 상태의 산물일 뿐인데, 어떻게 해서 여러분은 이 자유라는 관념에 의해서 자유경쟁을 승인하려 합니까? ... 전세계적으로 형성되는 착취를 보편적인 우애(allgemeine Brüderlichkeit)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는 것은 단지 부르주아지의 품속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관념입니다. 자유경쟁이 한 나라의 내부에서 불러일으키는 모든 파괴적 현상은 세계시장에서는 더욱 거대한 규모로 재현됩니다.5) 그런데, 이렇게 자유무역, 혹은 그 찬양론자들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맑스는, 앞에서 본 것처럼,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맑스 자신의 발언을 들어보자. 여러분, 우리가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가 보호관세제도를 변호하려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입헌주의와 투쟁한다고 해서, 절대주의의 편인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보호관세제도는 단지, 한 나라 내에 대공업을 육성하는, 즉 그것을 세계시장에 의존시키는 수단일 뿐이며, 세계시장에 의존하게 되자 마자 이미 많건 적건 자유무역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보호관세제도는 한 나라 내부에서 자유경쟁을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컨대 독일에서와 같이,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의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 나라들에서는 그들은 보호관세를 획득하기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 보호관세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며,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들의 힘을 결집하고 국가 자체의 내부에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Aber im allgemeinen) 오늘날, 자유무역제도는 파괴적으로 작용함에 반해서,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입니다. 자유무역제도는 종래의 국민성(Nationalität)을 해체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극한까지 밀어부칩니다. 한 마디로,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6)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Und nur in diesem revolutionären Sinne, meine Herren, stimme ich für den Freihandel.)!!! ― "연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을 염두에 두고, 위의 긴 인용문에서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 우선, "우리가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가 보호관세제도를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는 '보호무역'을 옹호하고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7) 하물며,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일부 한미 FTA를 광적으로 옹호하고 추진하려는 자들이 악의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음으로,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의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 나라들에서는 ... 바로 그 보호관세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이다." ― "일반적으로는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맑스의 경우 이에 반대하는 것이 두말 할 나위없이 당연하겠지만, 보호관세가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는 어떤 특수한 경우에, 맑스는 그 보호관세에 대해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러한 경우 그가 기꺼이 보호관세에 찬성했으리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판단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곡물법(1815-46)을 폐지하기 위해서 자유역론자들과 한패가 되어 지주들과 싸운 영국의 노동자들에 대한 맑스의 언급도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들에게, 자신들이 그들의 기만이나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토지소유자들에 대항하여 자유무역론자들의 편에 섰을 때, 그것은 봉건제도의 최후의 유물을 해체하고, 나아가 더 상대할 적을 단 하나밖에는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8) "봉건제도의 최후의 유물을 해체하고, 더 상대할 적을 단 하나밖에는 없게 하기 위해서"! 더구나 맑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노동자들은 계산에 착각을 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주들이, 공장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과 협력하여, 노동자들이 30년 동안이나 요구해왔으나 허사였던 10시간[노동]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법은 곡물법이 폐지된 직후 통과되었다.9) 이러한 논의를 보면, 맑스가 보호관세제도에 무조건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무조건 찬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자유무역 그것이 "종래의 국민성을 해체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경우에만, "한 마디로, ...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자유무역을 찬성했던 것이다.10) 그리고 그가 보호관세제도를 "일반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당시 그것이 "일반적으로 보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당연히, 만일 어떤 경우에, 즉 예컨대, 보호관세(제도) 그것이,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며, "부르주아들의 힘을 결집하고 국가 자체의 내부에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한 수단"인 경우,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발전시키고, 그리하여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맑스는 자유무역을 찬성했는데,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느냐" 하는 식의 문제제기는, 우선 그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인 현재 그 한미 FTA라는 것이 과연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정당한 문제제기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Und nur in diesem revolutionären Sinne, meine Herren, stimme ich für den Freihandel.)!!! ― 이 마지막 결론적 발언이야말로 이 경우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 FTA의 반동성과 반대투쟁의 혁명성 그러면 과연 한미 FTA는, 혹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특히 미국 주도의 FTA, 즉 '자유무역협정'은 그 자체로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것을 반대할 필요가 없거나, 반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찬성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FTA, 즉 '자유무역협정'은 그 자체로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가" 하는 식으로, 즉 "그 자체로서"라는 말을 삽입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 방식 자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이유는, 현재 FTA 그것은 '대체로 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그 자체에 예정된 목적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것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인민을 혁명적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다시 그것이 "대체로 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반대투쟁 내부에는 다분히 반동적 성격의 반대투쟁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문제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따라서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비판을 가한 바 있다"고 썼지만, 실제로 예컨대, "한미 FTA는 공화국 주권을 미 제국에 실질적으로 할양 양도하고자 하는 주권 반환 협정의 성격"(최형익 교수)11) 운운하는 식의 '반대투쟁', 즉 한미 FTA에 대한 그러한 애국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과 반대, 반대투쟁은 극히 반동적이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해체해야 할 "국민성"(Nationalität)을 해체하기는커녕, 애국주의적으로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동은, 그것이 아무리 [조선일보] 같은 극우를 분노하게 만들더라도, 사실은 그들과 국가주의․애국주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그만큼 노동자들을 오도하는 극히 해악스러운 것이다.12) 다시 우리의 본래의 문제로 돌아오면, 나는 우선, 맑스가 19세기 중엽에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을 본떠서, "자유무역이라고 하는 기만적인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 즉 FTA는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라 그 반대물, 즉 대표적으로 이른바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나 의약품 등의 특허권 강화․연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기생적인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자유무역'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보호무역' 장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FTA란 WTO 체제 내에서의 상품 및 자본시장의 독점과 배제 전략에 다름 아니고, 이는 당연히 전반적인 과잉생산․과잉축적에 의해서 자극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블록(bloc) 경제이다."13) 사실 신자유주의의 '자유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자유무역협정의 '자유무역' 또한 기만적이고 "희극적"인 것인데, 그것은 이미 1880년대에 엥겔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오래 전에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기"14) 때문이다. '자유무역'이 '자유무역'으로서 진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1930년대의 파괴적인 블록 경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반성으로서 제국주의 열강은 제2차 대전 후에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GATT를 창설했다. 하지만, 주요 가맹국의 산업이 제2차 대전을 통해서 철저히 파괴된 결과 각 "국가 내에 대공업을 육성"15)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비예외'보다 훨씬 더 많은 '예외'를 두어 고율의 보호관세 등, 보호무역제도를 용인해오다가, 막상 그 대공업들이 건설되자 '우루과이라운드'를 거쳐 GATT는 소멸되었다. 그리고 '자유무역'으로서는 기만적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보다 강화한 WTO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력과 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의 격화된 모순 때문에 더 이상 19세기적인 자유무역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FTA는, 지난 1930년대의 블록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전반적․만성적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전반적 위기를 해소시키거나 경감시킬 어떤 조건이나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폐지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 따라서 그 위기를 격화시킬 뿐이다."16)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회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에 대한 노동자․인민의 투쟁이 전제될 때에야 성립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한미 FTA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사회혁명을 촉진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미 FTA의 이 측면, 즉 그것이 그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사회혁명을 촉진시킨다고 하는 측면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특히 두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에 반대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맑스는 자유무역에 찬성했고, 그 때문에 자유무역 협정으로서의 한미 FTA 반대투쟁은 오류"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지금 제국주의에, 신자유주의에, 독점자본의 횡포․억압의 강화에 반대하여 일어나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농민에게 투쟁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당연히 반혁명적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오히려 진부할 정도의 얘기지만, 노동자․인민은 투쟁을 통해서 혁명적으로 된다. 둘째로는, 그 반대투쟁을 노동자계급적 노선에 입각하여 올바로 전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투쟁을 벌이되 그 투쟁이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것일 경우에는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반동적인 민중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를 백안시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투쟁의 경우 그것이,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관점과 노선에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노선에서 수행되어야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것처럼, 민족문제 또한 그에 대한 인식과 투쟁이 그렇게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노선에서 수행될 때에만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다. (참고로,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다.) <노사과연> 현대 FTA와 자유무역 |
강은주(진보신당 정책연구위원) / 2008년09월05일 15시26분
7. 활동가들의 임무
가. 정체 속에 놓인 활동가들의 상태
대중조직의 활동가들의 상태에 대한 지적들은 많다.
활동가들이 이제는 노동운동에 대한 전망을 잃고 노조권력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지적들은 계속되어 왔다. 일상적인 실천은 없고 노조 선거 때만 되면 왕창 모이는 모습들을 수없이 지적한다. 이는 구조조정을 경과하면서 조합원들이 과거의 악몽을 안고 미래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실리를 쫒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조합원은 실리를 쫓고 활동가들은 권력을 쫓는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활동가들이 이미 확보한 노조 집행부라는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목표를 분명히 찾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장활동은 관성적인 작업장협상들에 얽매여 있고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전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다 보니 자꾸 노동조합 집행부와 지방자치제, 민주노동당과 같은 정치적 진출을 꿈꾸게 된다. 물론 이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전략과 목표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권력경쟁이 노조에서 지자체와 정당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선봉부대로서 운동을 열어 온 견인차들이 이제는 노조나 정당에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정쟁’을 일삼는 ‘그놈이 그놈’인 제도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나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활동가들은 운동을 열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동을 퇴보시키고 발전을 가로막는 대상이 될 것이다.
나. 활동가들의 발전과 재생산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
활동가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고기는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활동가들은 대중없이는 활동가가 될 수 없다. 바로 이점에서 활동가들은 이제 신자유주의 공격과 후퇴속에 조합원들의 객관적인 상태와 심리적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이 조합원의 상태와 요구를 관성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기초하여 ‘노조상집간부되기’를 꿈꾼다면 대중과 더욱 분리될 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물이 말라버린 어항 속의 물고기와 같다. 이점에서 이제 활동가들은 작업장에 대한 구체적인 진단을 통해 문제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물론 활동가들이 조합원 속에서 다시 선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에 영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조합원들은 전망이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 실리에 집착하지만 그 저변에서는 상시적 구조조정 속에서 상시적 고용불안의 심리가 있다. 더 이상 현재의 노동조합의 실력으로는 미래의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노조를 도구적으로 활용할 뿐이다.
활동가들이 구체적인 대안 제시 능력 없이 얼마나 자주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또 합치는 것인지는 대공장들의 현실에서 무수히 발견되고 있다. 이미 조합원들은 그러한 이합집산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조선거 등 활동가들의 권력싸움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이점에서 활동가들은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전반적인 내용의 정체 속에서 권력게임만 남게되자 현장조직원들의 상당수가 권력게임을 쫓는 무능한 정치적 활동만을 일삼고 있다. 관성적으로 되풀이되는 당위적 구호에 불과한 ‘투쟁성’은 결국 선명성 경쟁에 불과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 과연 나는 노동운동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가? ’
‘ 상시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에 대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
‘ 담합적 노사관계를 넘어설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 ’
‘ 확대되는 실리주의적 경향을 넘어서 나는 과연 작업장 혁신을 위한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는가?’
‘고참활동가들의 위로부터의 권력게임, 아래로부터 확대 재생산되지 않는 활동가’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특히 단위노조 - 상급단체 - 지자체 - 국회의원으로까지 이제 가능한 현실의 권력게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왠만한 고참활동가들, 특히 노동조합의 임원 출신들은 누구나 ‘한 자리’ 노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참활동가들은 다시 현장에 돌아가서 예전에 그랬듯이 박박 기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는 퇴보다. 그것은 노동운동 전체의 운동역량의 손실이다. 전진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어떤 전진적인 배치가 가능한 것인가? 바로 단위노조에서 임단협교섭을 하는 수준의 활동을 넘어서 한 단계 높은 산업적 의제를 다루는 위치, 지역사회의 의제들을 다루는 지역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여야 한다.
차곡차곡 실력을 쌓지 않고 국회의원이 된들 기껏 조합활동밖에 않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국회에 앉아서 어떻게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의 문제들을 가지고 실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 국민들의 진보정당에 대한 상당한 기대는 단지 기대에 불과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노동당 의원도도 결국은 똑같은 기존 국회의원과 같이 평가될 것이다.
고참활동가들이 허황된 ‘국회의원되기’와 같은 야망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적절한 전진배치는 곧 후배 활동가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면서 또한 보다 폭넓은 활동으로 인도할 것이다.
신참활동가들의 재생산은 결코 낡은 사상학습으로만 이뤄질 수 없다. 이미 현장의 노동자들은 전투에 투입된 야전병 들이다. 따라서 야전 속에서 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야전의 전투들 속에서 배우는 것이 뭔가? 권력게임들, 정치적인 행동들만 가득하다.
구체적인 의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이 탄생한다. 결코 집행부 흡집내기나 대의원대회에 대한 대응방침을 논의하고 발언하는 것을 통해서 재생산 될 수 없다.
제대로 된 야전의 전투과정에서 새롭게 기초소양교육의 필요성이 탄생하며 그 필요성을 느낄 때 노동운동에 대한 기본학습도 의미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다. 활동가 조직의 발전 방향
첫째로 활동가 조직들의 재편을 더 이상 ‘자신들만의 잔치’로 반복해선 안된다.
유수한 대공장들을 보라. 현장조직이라고 하기에는 말도 안되는 수많은 조직들이 이름을 내걸고 ‘현장제조직’ 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과거의 ‘민주파’는 수많은 이합집산을 통해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제는 현장조직들이 난무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현실을 근거로 ‘민주파 재결집’을 내세운다. 근본적인 혁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재편을 외친들 뻔하다. 이제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된다.
둘째로 파벌이 아닌 의제를 중심으로 한 소통의 장이 필요하다.
전략적 전망의 부재 속에서 기존의 조직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을 한들 결국은 그게 그거다. 현장에 있을 때는 거침없이 집행부를 비판하다가 막상 집행부가 되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현장조직이 집행부를 하면 ‘껀수를 찾아서 씹어댄다’. 작업장내에서 복잡한 현장조직들의 이해관계는 의견일치를 어렵게 한다.
이제 이런 식의 파벌을 중심으로 한 조직활동은 과감히 혁파되어야 한다. 이제는 수많은 작업장의 의제들을 중심으로 열린 의사소통의 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가장 구체적이고 정확한 대안을 만들어 내는 활동가와 조직만이 인정되는 체제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점에서 현장조직은 ‘무슨파’ 인가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 혁신을 둘러싼 논의와 실천으로 집중되어야 하고 재편되어야 한다.
셋째로는 산업적,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선봉대로서 기업을 뛰어 넘는 재편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대공장의 활동가 조직이 개별 노사관계 속에서 적절히 사측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단합적 노사관계’를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를 장악하려는 행위는 결국은 아무리 전투적인 구호를 내건다 해도 그것은 구호에 불과하고 이미 정착된 구조속에서 조합원의 실리챙기기를 통해 인기를 얻고자 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제 활동가조직은 스스로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적 대안을 제출하고 그에 기초하여 산업적, 전국적 차원으로 먼저 자신을 해소 재편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제발 반복되는 ‘정파만들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중심으로 ‘실천단위’로 자신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8. 현 단계 한국노동운동의 발전 전략으로서 ‘사회적 노동운동’
가. ‘사회적 노동운동’은 현 단계 노동운동의 발전 전략이다.
현 단계에서 노동운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모든 위의 내용을 담아 ‘사회적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회적 노동운동’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다. 어떤 실천을 하는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노동운동’이 ‘사회적 조합주의’와 혼동된다고 한다. 또 반대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운동의 큰 흐름은 소련 등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도 있었지만 망했다. 유럽의 사민주의도 있지만 우경화 되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주의’를 아무리 외친들 의미가 없다. 또한 그것은 천재가 나타나서 갑자기 멋지게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본주의가 있는 곳에 계급이 있고, 계급이 있는 곳에 수탈이 있으며, 수탈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상과 관념이 아니라 현재의 노동운동을 진단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적 노동운동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아주 단순화 시켜서 전망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산력의 유지여부와 노동운동의 발전 여부에 따라서 크게는 네 가지의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첫째로 미국류의 사회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고착화)
우선 한국이 세계화, 중국의 등장 등 변화하는 세계자본주의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에 노동운동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 정규직의 일부가 이권을 중심으로 간다면 우리는 아마도 미국 류의 사회가 될 것이다.
작업장에는 고령화된 정규직이 수명의 비정규직위에 관리자처럼 군림하고, 전체노동자로 보면 잘 나가는 대기업의 노동자들은 중소하청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들 위에 새로운 계층으로 자리잡아 상층의 노동자가 기득권을 가진 지배세력과 함께 하층노동자를 수탈하는 사회다.
둘째로는 노동계급의 통제권이 전 사회로 확장되는 사회
한국이 생산력을 유지하면서 또한 노동자계급이 분화를 극복, 노동자계급을 강력히 단결시킨다면 자본에 대한 강력한 통제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곧 노동자계급이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가지고 국가까지 좌우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공장의 노동자들이 자신만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중소하청노동자완 튼튼한 연대를 이루고 그 힘으로서 국민적인 동의를 얻어 간다면 우리는 유럽의 좌파가 한참 잘나가던 시절의 복지국가를 넘어서 역사적으로 더 진전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는 노동계급이 주도권을 상실한 우익 파시즘적의 사회이다.
생산력이 유지되지 못한 채 휘청거리고 국민의 다수가 주변부 층으로 밀려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노동계급 또한 스스로 계급으로 단결하지 못한 채 정규직의 대기업 노동자들은 자신만을 위해 지배계급과 타협하고 수많은 주변부 노동자들이 사회적 불만을 토론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경우에 한국 사회는 우익 파시즘적인 국가가 될 것이다.
한때 한국보다 훨씬 잘 나가던 아르헨티나 등의 남미의 국가들과 비슷한 상태로 빠지는 것이며 왜곡된 중동지역의 국가들, 끝없는 내전 속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
넷째로는 강력한 사회적 불만을 노동계급이 조직함으로서 새로운 사회로 나가는 것이다.
신자유의의 세계화 속에서 한국경제가 초국적 자본에 의하여 처참하게 유린된다고 해도 만약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단결시키고 끊임없이 연대를 확대해 나간다면 사회적 불만을 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더 이상 한국사회를 지탱할 수 없는 지배계급에 맞선 불만은 조직된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며 이 투쟁은 사회변혁을 선도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단순히 전망 할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복잡한 동북아시아의 정세, 남북관계의 영향 등 매우 복잡한 변수가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경우와 관련해서 볼 때 노동자계급이 한국 사회의 경제를 좌우할 힘이 없기 때문에 만대로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다만 노동자 계급은 적어도 스스로 노동운동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과연 스스로 노동자의 분할을 넘어서 자신을 계급으로 단결시킬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분할되는 상태를 넘어서지 못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정규직 대공장이 앞장서서 연대를 실천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직적 발전을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둘째와 넷째의 길을 갈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이 네 가지 길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순간에 이른 것이 아니다. 조만간 이러한 선택에 다가설 것이며 바로 이점에서 현재의 노동운동은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런 현 단계에서의 노동운동의 발전전략으로 ‘사회적 노동운동’을 제출한다.
나. 계급해체에 맞서 계급단결(계급형성)을 최우선에 두는 전략이다.
일반적으로 얘기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다. 시장이 결정하는 사회는 경쟁을 법칙으로 하며 경쟁은 철저히 분열을 생명으로 한다. 이 분열은 노동자들을 산업, 기업, 고용형태로 갈갈이 찢어 놓는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시장’에 맞서는 투쟁이고 ‘분열’에 맞서는 투쟁이다.
외적의 침입은 내부를 단결시킨다. 전선이 분명하게 되기 때문에 내부의 작은 갈등은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우면 전쟁을 한다. 내부문제를 해소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강제적으로 단결시키는 정략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다. 외적이 침입하면 내부가 단결해서 싸워야 하는데 외적이 공격할수록 내부는 분열되는 상황인 것이다. 자본의 공격이 강할수록 내부가 단결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되고 있다.
자본은 비정규직을 만들어 내놓고 ‘정규직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을 주자’ ‘정규직 때문에 비정규직이 피해를 본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병법에 나오는 대로 ‘적을 서로 싸우게 하여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분할전술인 셈이다.
문제는 자본의 공격이 거셀수록, 그리하여 정규직의 고용이 불안할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만의 고용안정을 위하여 비정규직을 인정하고 향후에 자신들의 방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자신의 고용이 불안할수록 당장에 실리를 챙긴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규직 대공장에 대한 집중적인 여론공격이 진행되고 노동자 내부의 격차는 증가한다.
여기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정규직의 임금이 많지 않다는 식의 수세적인 대응으로는 돌파하기 어렵다. 공세적으로 사회전체의 빈부격차를 제기하고 사회보장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동자 내부의 연대정신에 기초한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사회적 의제로 나가야 하는 것이고 또한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막기 위한 ‘노동자 내부평등’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곧 노동자의 분할을 막고 계급적으로 단결함으로서 해체되려는 다시 계급으로 만드는 것(계급형성)이다.
다. 작업장 혁신과 산업․사회적 의제를 중심요구로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하는 노선이다.
앞의 글에서 왜 작업장 혁신이 중요한가를 얘기했다. 특히 계급분할의 불씨는 정규직 내부의 불평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이 ‘담합적 노사관계’의 틀 안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업장’ 이라는 노동자의 삶의 터전에 대한 혁신이 중요하다.
내부의 혁신과 함께 산업적 연대, 사회적 연대를 위하여 그에 해당하는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함으로서 노동자들이 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여 나가야 한다. 이는 곧 노동자계급의 개입과 통제권이 작업장, 산업, 사회전체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 우경적 투항과 좌경적 소아병에 맞서 노동운동의 혁신을 추구하는 노선이다 .
노동운동을 단순히 정파적 파벌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의 혁신은 이룰 수 없다. 소위 그간 노동운동과정에서 NL과 PD의 대립이라든지, 우파에 맞선 범좌파의 결집이라는 사고방식은 매우 뿌리가 깊은 사고법이다.
이러한 양진영으로의 구분은 두 패로 내부를 갈라놓고 ‘내 눈의 대들보는 못보고 상대진영의 티클만 보인다’는 격언이 지적하는 사고방식을 만연시킨다. 이는 곧 상대의 모든 것은 비판의 대상이고 내편의 모든 것은 무조건 옹호하는 행태를 통해서 혁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노동운동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미 양 진영으로 구분해서는 해석되지 않는 현실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총의 4기 선거는 이런 낡은 사고방식을 더 강화시키고 있다. 이는 심지어 민주노동당내의 내부투쟁으로 훨씬 확대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글을 마치며
노동운동의 전략을 체계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면 매우 광범위한 조사와 객관적 기초들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이론적인 근거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한 실천가로서 당면한 노동운동, 특히 오랜 노동조합운동의 시대를 거친 상황인 만큼 노동조합운동의 현실에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민주노조운동의 핵심역할을 담당해왔고 아직은 조직력이 비교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금속의 자동차활동가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기 때문에 자동차산업의 사례들을 비중에 놓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변혁운동의 이론서가 아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동북아 정세 등등 의 논의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최근의 상황에서 수많은 정세분석보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역공세의 결과 처한 노동운동 내부의 상태를 냉정히 평가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과 운동은 결코 활동가들의 관념에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자 대중의 사고와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만 전진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아쉬운 내용은 상시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문제들에 대한 대응이다. 글로벌 경쟁체제는 과거 국가-재벌 중심의 한국사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세계적인 상황 → 국가,재벌 → 한국노동자>라는 구조 즉, 세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던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세계적 상황(초국적 자본운동) → 노동자>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중간의 톱니바퀴가 빠지고 국제적 자본운동이라는 톱니바퀴에 바로 한국의 민중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공동화니 자유무역협정이니 하는 수많은 의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한 점이다. 신자유주의, 유연생산체제 아래에서 일반적 노동자는 더 이상 대량생산체제의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비정규직이 일반적인 노동자이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고 기업에 대한 귀속력도 없다. 노동자계급의 가장 말단에 위치하면서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모두 떠 안고 있기에 비정규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이야 말로 모든 구조를 보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조직화 방식은 애초에 존재방식이 다른 정규직의 노동조합 따라하기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이점에서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요컨대 한국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관점에서 완전히 재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아직까지 한국노동운동의 움직일 수 있는 조직된 세력으로서 정규직 노동운동의 혁신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운동을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움직이는 타켓, 국제적 수준에서 급격한 변동들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 타켓을 쏘아 떨어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함께 움직이면서 조준하는 것이다. 목표물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 목표물이 정지해 있는 것과 같은 조건에서 조준함으로서 명중시킬 수 있다.
핵심은 변화다. 운동은 곧 변화다. 전진하고자 한다면 변해야 한다. 낡은 사고와 행동 속에서는 결코 전진하지 못한다. 다만 구태를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끝>
5. 노동자의 주도권(통제권) 확장으로서 산업과 사회적 의제로의 발전
가. 산업적․사회적 의제로 나아갈 필요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내적인 필요성이다.
제조업이 공동화된다. 공장이 중국으로 빠져나간다. 이미 중국에 공장을 짓고 한국에서 생산을 폐쇄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중소사업장 노조에게 투쟁하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매각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점이 붙는다. 정부는 해외매각방침을 가지고 있다. 채권단은 요지부동이다. 이 문제는 결코 채권단의 하수인에 불과한 사측과 싸워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조건으로 펼쳐지는 상시적 구조조정시대에 대응하는데 있어서 산업적, 사회적인 의제로 나가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아직 우리는 계기적으로만 산업적 사회적 의제에 대응해 왔을 뿐이다. .
둘째로 단기이익 추구와 실리주의의 극복을 위한 매우 중요한 해결 방안이다.
조합원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현실에 한푼을 챙긴다. 그 전망이란 무엇인가? 이미 기업단위를 넘어선 문제들이 다가오는데 산업적 연대와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대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조합원들은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점에서 산업적, 사회적 의제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는 것은 조합원의 개별화를 막고 대안을 향해 단결시키는 중요한 문제이다.
셋째로 노조의 사회적인 고립화의 위기에 대응하는 문제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최근의 공격들은 특히 대공장노조들을 ‘이권집단’으로 매도함으로서 국민과 분리시켜 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넷째로 노동운동의 전략적인 발전을 위해서다.
노동운동은 이제 조합주의적인 국면을 넘어서 무너진 조직력을 다시 세움으로서 사회적인 주도권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이점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적 주도계급으로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산업과 사회적인 의제롤 나아간다는 것은 곧 낡은 임단협이라는 더 이상 배울게 없는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나. 사회적인 의제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사례
과거에 우리는 특수한 경우에만 의제를 확대하였다. 다행히도 2004년 들어서 각 산별연맹은 발전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사회적인 의제로 확대하고 있다.
민주노총에서 최근 몇 년간 강조해온 ‘사회공공성’의 확대를 위한 노력도 그 사례이다. 택시노조가 “속도보다 안전을” 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것 또한 일단은 발전이다. 보건의료노조가 “돈보다 생명을” 주장하는 것 또한 중대한 발전이다. 괘도노동자들이 “ 이윤보다 안전을” 외치면서 인원증대를 요구한다. 자동차노조들이 “사회적 책무”를 앞세우고 “사회기금”을 주장하는 것 또한 발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매우 서투른 것들도 있다. 문제들도 안고 있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본다면 노동조합이 의제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또한 의제들의 확장은 투쟁전술에서도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이미 페턴화된 임단협에서 처럼 언제 요구안을 제출하고 언제 교섭집중기고 쟁점을 추려서 얼마간 때려 박고 그래서 막판 타결하는 류의 전술로는 턱도 없는 문제들이다. 의제의 확장은 투쟁방법과 전술의 확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간부와 지도력을 요구한다.
다. 사회적 의제로 나가기 위한 전제
사회적 의제를 향해 나가려는 경향은 특히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회적 의제로 나가는데 있어 꿈틀거리는 위험요소들을 반드시 짚지 않으면 안된다. 그 위험요소들은 노동운동의 상시적인 경향으로 작동하는 사고법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우경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파생하는 위험요소이다.
계급적 요구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는 관점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운동을 국민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든지 혹은 노동운동에 가해지는 자본과 정권의 공격 때문에 노동운동이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린다면 노동운동은 더 이상 계급운동이 아니라 ‘눈치보는 운동’으로서 결국은 탈 계급화된 운동으로 전락할 것이다. 특히 이점에서 사회적 의제를 전면에 내걸고 나가는 것이 노동운동의 대중적 기초가 취약한 상태에서 이를 방치하고 진행된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둘째는 협소한 계급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이런 문제는 이미 지난 노동운동의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여 온 문제들이다. 예를 들면 기아차나 대우차, 그리고 쌍용자동차의 매각과정에서도 협소한 계급주의를 주장하는 경우, 극단적으로 ‘어떤 자본에게 매각되든 상관없다. 노동자의 고용과 생존만 보장되면 된다’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결국 매각과정에서 노동조합이 고용과 단협만 보장되면 된다는 식으로 수세적 대응을 하게 만들어 매각투쟁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으로서 매각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이후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전망을 고민하는 것을 차단한다.
다른 사례도 있다. 금속의 자동차분과에서는 ‘산업정책에의 개입’을 주장한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무슨 산업정책을 논의하는 것인가?’는 반론을 제기한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관점에 근거하여 산업적 대안을 제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본의 산업정책에 대한 단순한 문제제기와 책임을 묻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사후적 반대운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는 숨겨진 노예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노예는 주인이 경영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따르고 주인이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된다. 진정 주인이고자 한다면 경영, 산업정책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대안을 제출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오른쪽으로부터 국민주의적 위험이 사회적의제로 나가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탈 계급화 할 우려가 있다면 왼쪽으로부터 발생하는 협소한 계급주의적 오류는 노동운동의 발전 자체를 가로막고 노동운동을 소아적인 정체와 퇴보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점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 발전과정에서 끊임없이 좌우 양 편향에 맞서 싸우는 내부투쟁을 거치게 될 것이다. 다만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때로는 우익적 요소에 맞선 내부투쟁이 중요해 질 것이고 또한 다른 상황에서는 좌익소아병적 요소들에 맞선 투쟁이 중요해 질 것이다.
라. 산업과 사회적 의제로 나갈수록 산업․사회적 교섭이 요구된다.
노동조합이 조직을 결성하면 반드시 교섭으로 나가는 것이 필연적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이 산업적 혹은 전국적 차원에서 산업의제나 사회적 의제를 전면화 해 나갈 경우 필연적으로 사회적 교섭에 부딪치게 된다. 이점에서 노동운동이 산업적, 사회적 의제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딪칠 산업적, 사회적 교섭에 대한 분명한 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좌우편향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좌익소아병적 견해들은 이런 교섭 자체를 금기로 여긴다.
금속연맹의 자동차분과는 산업정책에 대한 개입을 주장하면서 자동차공업협회와 노사간 상시적인 논의기구를 제안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 전략적인 계획을 갖지 못한 소아병적인 견해들은 우스꽝스럽게도 이것이 노사협조주의가 아니냐는 우려를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이런 소아병적인 견해들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교섭에 대한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는 전투적 구호들이 요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가 결국은 교섭과정에서 그야말로 어이없는 실패를 통해서 완전히 무너지는 꼴들을 보아왔다. 수많은 노동조합들의 구조조정투쟁과정이 그러했다. 발전산업의 구조조정에 맞선 연대투쟁도 그러한 사례였다.
우익적 견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교섭자체를 목적시 한다.
계급적 노선이 불분명한 친정부적인 인사들은 드러내지 않지만 사실상 의도적으로 노사정교섭구조를 신성시한다. 또한 대중투쟁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섭테이블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들이 만연하여 겉으로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정부와 자본과 경쟁적으로 창구를 개설한다. 소위 ‘사회적 조합주의’로 표현된 바, ‘코포라티즘’을 전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구조자체를 전략적인 목적으로 사고한다.
문제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과연 산업적 사회적 교섭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현재 노사정위원회에 대하여 대중의 생각은 뭘까? 2004년 현대차의 조합원 설문결과에 따르면 70%가 넘는 조합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노사정위에 들어가는 것을 지지한다. 여기에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노사정위 가입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이런 사정을 알기에 노사정위 참가를 자신 있게(?) 추진한다.
그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다시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주장하면서 대립각을 세울 것인가?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자체로 꼼꼼히 따져야 할 문제다. 다만 단순하게 결론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대책 없이 노사정위 불참을 주장하는 대안 없는 반대를 반복해선 안된다.
적어도 우리 스스로의 전략적인 계획 아래에 산업적 사회적인 교섭형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노사정위 참가는 뻔하다. 노무현정권이 새롭게 ‘사회경제위원회’(?)같은 방식 또는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에 반대를 아무리 외친들 마치 민주노총이 국고보조금을 받는 문제가 동일하게 현실화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 하에 산업적 차원의 교섭테이블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산별노조들이 추진하는 산별교섭구조도 있다. 금속의 자동차분과가 주장하는 ‘자동차산업차원의 노사공동기구’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며 공공부분은 교섭구조 자체가 정부를 포괄한다.
민주노총이 노사정 위원회에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서 임하게 되는가를 따져 나가야 할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설혹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난리를 떤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전략적인 목적 하에 주도적인 교섭틀을 만들어 간다면 그것으로부터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불필요하지만 한가지만 덧붙이자.
산업적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교섭테이블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노동조합의 산업적 의제로의 집중을 이뤄내기 위해서도 우리가 주동적으로 교섭테이블을 주장하고 만들어 갈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교섭테이블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결렬선언 후 파업을 하는 것처럼 탈퇴를 조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계획 하에 교섭테이블을 먼저 주장하고 혹은 스스로 박차고 나올 수도 있기에 교섭테이블은 우리의 계획과 실력에 따라서 활용되는 것일 뿐 우익적 견해처럼 그 자체가 전략적인 목표이거나 혹은 좌익적 견해처럼 그런 구조에 들어가는 것이 노동운동의 종말을 의미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 산업적, 사회적 의제들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를 산업적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 가는 방향이 있다. 주 5일 근무제와 비정규직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또한 고용불안의 원인인 제조업의 공동화,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 각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자유무역협정도 중요한 의제들이다.
노동자들이 준비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의제들도 있다. 예를 들면 ‘탄핵정국’처럼 국민적 쟁점으로 떠오른 의제들은 노동자의 참가여부와 참여방향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난다.
반전평화투쟁이나 통일운동의 경우도 대중적으로 준비된 의제들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의제들은 당위적인 의제들로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계몽적인 접근을 불가피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의제들에 노동자들의 개입능력에 따라서 판단해야한다. 그러지 않고 과도하게 이를 주장한다면 어거지에 불과한 관념으로 전락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산업적 사회적인 의제를 만들어 내고 주도권을 발휘하는 문제는 임단협수준이 아닌 운동전략을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거나 왜곡될 것이다. 전략적인 계획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저 주어진 쟁점들을 따라다니고 엉뚱하게 개입하여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향후의 노동운동은 단순히 쪽수에 기초하여 힘을 보여줌으로서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제설정의 선점능력에 달려 있기도 하다.
6. 노동조합의 조직발전에 대한 재검토
가. 계급적 단결의 형태로서 대중조직의 발전방향은 ‘한국노동자단일노조’다.
노동자계급이 완전한 계급으로서 조직된다는 것은 지역과 업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형태를 넘어서 동일한 의무와 동일한 권리를 갖는 동등한 조직원으로서 하나의 조직원리에 통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리를 실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조직형태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단일한 노조로 조직되는 것이다. 물론 ‘한국노동자단일노조’라는 단일조직의 원리에 조직된다고 해도 지역과 업종 및 산업 등 다양한 조건에 따른 다양한 활동들이 보장되는 내부의 조직체계를 가질 것이다.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은 사실은 노동계급에 대한 대표성을 온전하게 갖고 있지 못하다. 조직률이 턱없이 낮을 뿐만 아니라 한국노총의 완전히 재편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대공장 중심이며 아직 비정규직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은 정규직 대공장의 노동자에 비하여 규모는 물론 임금과 노동조건 및 민주노총에서의 의사결정과정의 실질적인 권리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하지만 지역과 업종,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동일한 권리로 조직된 ‘전국노동자단일노조’를 현재의 대중조직 방침으로 곧바로 내 놓는다고 하면 참으로 가당치 않게 여길 것이다.
문제는 전국의 노동자를 계급으로서 통일시켜 나가는 과정에서의 현실에 맞는 조직발전의 방침이다. 지금까지 노동조합의 조직발전 경로는 ‘기업별노조 → 대산별’ 이라는 것이 주된 방침이었다. 그러나 대산별노조 방침은 현재 시점에 과연 유효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대산별 방침은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조직형태의 발전에 대해서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대산별 방침을 재검토하고 업종 산별, 지역노조, 비정규직의 새로운 대중조직(노조)형태를 만들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는 노동계급의 단일노조를 지향해야 한다.
나. 신자유주의시대, 한국에서의 산별노조 건설의 특수한 조건.
그간 우리는 산별노조 건설을 지향하면서 많은 경우 유럽식 산별노조의 사례들을 참고로 해 왔으며 특히 독일식 산별노조를 모범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한국은 유럽의 조건과 전혀 다른 역사와 정치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작 우리는 이런 차이보다는 ‘산별노조로 가야한다’는 당위 때문에 산별노조의 긍정적 요소들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제 현재의 시점에서는 보다 더 심도 깊은 문제들로 나가야 한다..
첫째,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산업적 통일성에 차이가 있다.
유럽의 산별노조 모형은 적어도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근대적인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경제가 재편되고 이런 산업의 일정한 발전과정에서 탄생하였다. 비록 기업규모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규모의 차이가 곧 수직적인 불평등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는 국가-재벌이라는 두 축에 의하여 발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재벌을 중심으로 한 하청수직계열화를 산업구조의 특징으로 한다. 재벌기업(대공장)과 하청(중소영세사업장)이라는 중층적인 수직계열화가 한국 경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산업적 연관성과 통일성보다는 오히려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통합성이 더 높은 경제였다. 이 때문에 현총련과 같은 그룹조직이 활동할 기반이 있었고 자동차연맹 또한 사실상은 기아그룹의 노동조합이 중심을 차지했다.
때문에 설혹 같은 산업의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유럽에 비하여 한국의 경우 이해의 통일성은 확실한 차이가 난다.
둘째, 노동조합 출발의 역사적 차이가 있다.
유럽의 산별노조라는 모형은 장인이나 길드 등 기업과 상관없이 숙련노동자들의 연대로부터 시작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와 전혀 다른 역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즉 6.25라는 엄청난 투쟁과정에서 남한의 노동운동이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노동자의 연대는 완전히 차단된 기업별 노조구조가 정착된 경험 위에 서 있다.
셋째, 노동운동 발전의 조직적 구심에 차이가 있다.
서구의 산별노조가 강력한 계급투쟁의 전통, 그리고 전후 파시즘 등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좌파적인 정치세력의 일정한 주도권에 기초하여 적어도 강력한 기획력을 가진 사회적인 집단(좌파 정당 등)의 주도성이 발휘되면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물론 노조와 정당 중 어떤 것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는 국가별로 편차가 있지만 시민운동, 좌파정당운동, 노동운동 등 각 영역에서 일정한 발전들이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사회적인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6.25 전쟁 후 반공국가라는 독재체제 아래에서 좌익적 요소들은 모조리 청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80년대에 레닌주의적인 전위당 모델 또한 실패하였고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인 충격은 사회적으로 좌파적인 활동을 발전시키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직접적인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아지는 현장의 투쟁을 통해, 현장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무너뜨리고 군사적인 노동통제에 맞서 민주노조운동으로 발전해 왔다.
이점에서 한국에서 산별노조의 건설이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현장조직을 포괄, 발전, 재편시키지 못한채 위로부터 기획된 산별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넷째,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차이다.
서구의 현재 산별노조운동은 전후 자본주의의 확대를 불러 온 대량생산체제(포디즘)가 정착되면서 소위 말하는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에 근거하여, 사민주의 정당과 자본가계급의 일종의 타협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안정되었다. 서구의 산별노조는 대량생산 -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 - 산별노조 - 사민주의 - 계급타협(코포라티즘) - 복지국가 모델이라는 시스템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는 세계화와 유연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상황이다. 복지국가모델이 공격받고 있으며 계급타협은 ‘제 3의 길’을 주장한 영국노동당 류의 사민주의 정당의 우경화를 통해 신자유주의 확대로 이어진다. 신자유주의 앞에서 독일의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는 새로운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과 캐나다 등에서 나타나듯 기존의 산별노조들은 이 공격에 맞서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 통합을 하기도 한다. 이는 새로운 조직형태의 출현이 아니라 공격받는 조직체제의 자기방어 노력의 결과다.
과거의 근대공업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노동 유연화의 결과, 비정규직이 보다 일반적인 노동자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대공장은 유연생산체제에 따라 분산된 생산체재로 재편되고 있다.
한국에서 산별노조 운동은 재벌이 유지되면서 초국적 자본이 새로 등장하고 여기에 유연생산체제가 결합된 상황이라는 전혀 다른 조건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수직 계열화된 경제, 기업별노조, 현장조직중심구조, 유연생산체제라는 특수한 조건을 가진 상황에서 산별노조의 건설은 근본적으로 유럽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건의 차이들 속에서 어떻게 조직을 발전 시켜야 할 것인지를 따지지 않고 산별노조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다. 흔들리는 대산별의 실험
대산별의 지향을 가장 분명히 한 산업은 금속이다. 물론 금속노동자들의 경우 애초부터 대산별을 지향한 것이 아니다. 자동차연맹의 소산별, 현총련의 그룹단일노조, 민주금속의 대산별론등 금속연맹의 창립 이전에 각각 주장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산별의 지향에 동의, 금속연맹의 창립을 통해 대산별론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제조업노동운동의 강력한 전투적 기풍, 그 힘이 대단결을 강제하는 당위적 요구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기초였다. 특히 현장조직들은 전국적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 현총련, 자총련, 민주금속을 뛰어 넘어서 횡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은 연맹의 창립 후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결정적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공장의 현장조직들의 후퇴, 조합원들의 후퇴, 그리고 물러선 자리에 분명히 드러난 것은 이 사회의 구조다.
즉, 대공장노동자 - 중소기업노동자 - 비정규직노동자의 분할된 모습으로 각자의 생존을 지키는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다.
여기에 무너진 재벌회사들은 거대 외국자본에 흡수되고 남은 재벌그룹들은 경쟁대열에 끼어 들고 있다. 재벌중심의 체제는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는 유지되지만 그러나 예전의 재벌회사의 모습은 아니다. 세계화는 한 산업 안에서 외국자본이든 재벌회사든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경쟁을 하도록 만든다. 이제 한 산업이 흘러가는 모습은 더 이상 재벌그룹사간의 지원체제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세계적 경쟁구조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한 산업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은 비슷하다. 따라서 한 업종내에서 겪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비슷하다.
그렇다고 한 업종내에서 노동자들이 단결할 기초가 단순하게 강화된 것만은 아니다. 분명 해당 업종내에서도 재벌구조 아래에 수직계열화 되었던 모습이 남아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를 보면 이런 현실이 보인다. 현대-기아의 경우는 하나의 재벌그룹속에 속하면서도 국제경쟁속에서 세계 5위의 자동차회사를 목표로 글로벌 생산체제를 갖추기 위해 외국공장을 늘린다. 현대-기아도 이젠 더 이상 국내에 머무는 재벌이 아니라 지엠, 포드. 다임러, 도요타 등의 세계적 자동차회사와 경쟁하는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부품체제도 마찬가지로 모비스를 중심으로 모듈업체를 키워나간다. 지엠의 델파이, 포드의 비스테온, 도요타의 덴소와 같이 부품사를 키워 나가며 그 아래에 모든 기아-현대의 부품계열사들은 모비스라는 회사의 밑에 2차 납품사로 전락한다. 외국자본에 흡수된 삼성과 대우는 세계적인 생산체제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었으며 굴지의 외국부품회사에 흡수된 한국의 상당수 부품사들도 세계적인 부품생산체제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었다.
이제 완성차든 부품사든 세계적인 생산체제속에 흡수되면서 내부적으로는 모듈화니 플렛폼 통합이니 하는 지속적인 유연생산체제의 구축문제를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대산별노조로 나가기 위한 금속연맹의 모습이 분명히 심각한 정체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금속노조는 아직 금속연맹의 조합원 중 1/3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업종은 뚜렷하게 노동조합의 약화를 보여주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거의 유사한 구조조정속에 휘둘리고 있으면서 자동차분과를 중심으로 사업들을 추진하지만 아직은 완성차 중심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부품사의 경우 모비스를 중심으로 2-3차 하청업체들로 전락한 기업들은 점차 그 지위가 약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이 과연 단순하게 대공장의 이기주의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거나 혹은 금속노동운동의 후퇴에 따른 조직력이 약화된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변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 한국의 경제구조, 산업재편을 반영하는 구조적 결과인지를 냉정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대산별의 사례는 아직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업종산별만이 존재한다. 보건의료노조, 증권노조, 과기노조, 건설엔지니어노조, 대학노조 등과 전교조나 공무원노조도 마찬가지로 대산별은 아니다. 한국노총의 금융노조 또한 업종산별이다. 물론 아주 작은 규모들이지만 지역노조들도 있다.
우리는 아직 소규모의 업종수준에서 산별노조를 만들고 있거나 혹은 비정규직이나 영세업체를 포괄하는 지역노조와 같은 수준에서 기업별노조를 뛰어넘고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대산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과연 성공 가능한 계획인가? 당위성을 떠나서 현실성을 냉정히 따져보아야 한다. 구조조정이후 조직력의 일정한 후퇴 속에서 기업은 물론 업종까지 뛰어넘는 대산별의 건설은 벅차 보인다. 그것은 단지 현실의 사례들이 그렇다는 수준이 아니라 완환위기와 경제재편을 거치면서 변화된 한국경제와 산업재편의 결과를 반영하는 구조조적인 변화가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라. 실천단위, 내용적 통일성을 담는 조직형태로서 업종(지역)노조의 필요성
조직발전 전망을 논의하는데 있어 분명히 해야할 문제가 있다. 아무리 조직형태에 대한 명쾌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직형태의 발전을 얘기할 때는 조직의 ‘형태’ 그 자체를 가지고는 풀릴 문제가 없다.
첫째로 조직은 구체적인 실천적 단위이다.
조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조직은 ‘네모인가? 세모인가?’하는 꼴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 보다 구체적인 실천단위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 이점에서 볼 때에 과연 현재의 금속연맹은 실천단위로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물론 금속연맹만이 그런 상태는 아니다. 공공연맹의 경우도 당위적 측면에서는 공공서비스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공무원노조와 같은 경우는 독립적인 조직체계이다. 철도, 도시철도, 각 시의 지하철노조의 경우도 사실은 공공연맹이라는 조직 속에서 실천단위로서 기능하기보다는 독립적인 괘도연대와 같은 방식은 실천단위를 만들고 있다.
금속연맹의 경우 이미 실천적인 단위는 3원화 되었다. 금속노조와 자동차분과, 조선분과 그리고 최근에는 철강분과의 독립적인 구축도 진행된다.
과연 현실에서 실천적 단위로서 기능하는 하는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가에 기초하여 조직발전전망을 세울 필요가 있다.
둘째로 조직은 내용과 별개로 형식으로서만 발전할 수 없다.
산별노조로의 발전을 추진하는 것은 종업원 의식을 만드는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 노동자계급으로 단결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적, 내용적인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당위이고 욕망이고 이상일 수는 있어도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가장 기초적으로 임금체계의 통일성, 작업장협약의 통일적 기반, 그에 기초한 산업적인 의제들에 대한 공동의 실천능력이 없다면 조직은 단지 그림에 불과하다.
이점에서 우리는 금속산별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당위에 기초하여 산별노조를 추진한 것은 아닌지를 냉정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즉 구조조정의 시대에 기업별 투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별로 가자고 했다. 그것은 구조조정이 벌어지는 현실에서는 절박한 외침으로 들린다. 하지만 구조조정과정에서 투쟁을 통한 실천적인 근거들을 축적하지 못했다. 따라서 결국은 산별로 가자는 구호는 사실상 단결의 기반이 취약해지는 과정에서 외친 ‘필요성’이긴 했지만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필요하지만 충분한 기초는 없는 상황에서 금속노조는 비교적인 조직력이 높은 노조들이 결합하여 소수노조로 출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냉정히 평가하지 못한 채 아무리 산별로 전환하자고 외친들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설혹 그런 당위에 근거하여 산별로 전환했다고 해도 금속노조에 속한 대공장들이 산별교섭체제 밖에 놓여 있는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지원투쟁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태의 금속노조의 현실은 여전히 우리가 비정규직문제에 한참 먼 상태를 벗지 못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단지 똑같은 물을 네모진 그릇(기업별노조)에서 둥근그릇(금속노조)에 담아 놓고 있을 뿐이다. 물은 여전히 물이다. 우리가 마셔야 할 것은 사각형이든 원형이든 그릇이 아니라 물이다.
따라서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산업적 의제들에 대한 대응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산별노조의 탄생이 가능하며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적 발전과 함께 전체 노동자계급이 사회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전면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한국노동자단일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이점에서 볼 때에 금속의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진행된 주장한 계급적 산별노조, 투쟁을 통한 산별노조, 아래로부터의 산별노조라는 주장은 부분적인 지적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또한 노동운동의 발전전략에 대한 대안을 분명히 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산별반대론’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 다시 제출되어야 할 노동조합 조직발전전략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에 노동조합의 발전 전략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첫째로는 그간의 산별운동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
둘째로는 당면 조직발전의 단계로서 대산별지향은 폐기되어야 한다.
셋째로는 실천적 단위이자 내용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서 과도적인 단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은 업종별 실천과 지역별 실천을 중심으로 업종과 지역노조를 만드는 노력들을 개방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로는 일반적인 노동자로 등장하는 비정규직의 투쟁과 조직화가 진전되어야 한다.
다섯째로는 업종, 지역, 비정규직의 조직발전에 기초하여 산업적 의제와 사회적인 의제를 전면에 내건 노동자들의 전국적 실천력을 기반으로 궁극적으로는 ‘한국노동자단일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될 수 없다. 다른 누군가가 구상한 작업장과 작업량, 작업방식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피동적 인간을 벗어 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안방을 누군가가 맘대로 가구를 이리저리 배치한다면 그대로 참고 견딜 인간이 얼마나 될까? 작업장은 안방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장을 자신의 구상대로 재편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묘한 모순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작업장 혁신은 자신의 안방에 가구를 놓고 수조를 배치하고 침대의 위치를 바꾸는 매우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작업장에서 수동적인 노동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작업장에서의 단순한 임금따먹기가 아니라 작업장 자체를 노동자의 통제권 아래에 두고자 하는 투쟁 또한 그 어떤 정치투쟁에 못지 않은 중요한 정치적 투쟁이다.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교육하는 것은 ‘노동교육센타’를 만들고 ‘노동교실’을 열고, 그럴듯한 기관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작업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교육을 위한 학원의 설립과 같은 의미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이제 교육은 공교육의 확립, 즉 노동조합의 현장활동의 혁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설학원의 설립수준이 아니라 대규모적인 노동조합의 현장활동에 대한 재정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 없이 노동의 미래는 없다.
셋째, 작업장혁신은 협소한 ‘작업현장투쟁’이 아닌 자본전략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다.
작업장의 혁신은 단순히 작업장 그 자체의 내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업장의 변화는 작업장 내적 원인이 아니라 자본의 경쟁체제, 그에 따른 자본의 생산효율성의 확대를 위한 노력, 기술적 발전에 따른 생산기술의 혁신 등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장 혁신을 위한 투쟁은 단순히 작업장 내부로 만의 관심을 집중하는 문제가 아니라 기업경영전략과 산업정책 등과 연관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소위 신자유주의는 대량생산체제를 넘어서 유연생산방식을 확대시키고 있다. 유연생산체제는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자를 분할,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규모로 분할된 인력공급업체에 소속된 비정규직과 써비스 유통망의 노동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유연생산체제는 치명적인 결함도 만들어 낸다. 시장변동에 맞게 적기공급을 위하여 빈번한 물량변동과 작업장 재편이 필요하고 이때마다 노동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의 작업장에서의 교섭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작업장 투쟁을 협소한 시각에서 전개하면 패한다. 경쟁력논리를 뛰어넘지 못한 채 수당 투쟁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자본은 이미 오래 전에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여 최종적으로 눈에 보이는 작업장 재편과정에서 노조와 협상을 한다. 모 기업의 경우 회사의 외주화에 대한 대 노조전략이 ‘노동조합에 들킬 때 교섭한다’는 것이다. 이미 설비투자를 해서 신설공장을 지어 놓고 물량을 빼내가려는데 노동조합은 나중에 알고 싸운다. 사측은 막대한 투자비용을 이미 쏟아 부어놓고 ‘배째라’고 한다. 이런 식의 투쟁은 결국 수세적은 투쟁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몇 년간 근골계투쟁은 매우 중요한 투쟁으로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골격계투쟁은 산안투쟁이라는 협소한 영역의 투쟁을 벗어나지 못해왔다. 그 핵심적인 원인은 ‘전쟁전략 없는 부분 전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산안투쟁이 작업장혁신이라는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재해석되고 이런 차원에서 투쟁을 전개해야 했으나 부분적 현안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간략한 지적으로 그친다.)
다. 대대적인 작업장 진단
작업장 혁신은 분명한 진단을 통해 구체적인 과제를 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몇 몇 대공장들에서 작업장 진단들이 진행된다. 불행하게도 노동조합의 주도적인 사업이 아니라 자본의 주도적인 작업들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S사의 진단과정에서 지적된 사항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로 노동도구주의적 경향이다.
조합원들의 다수가 ‘일하다가 돈 좀 벌면 나가서 장사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해 돈벌이 수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노동에 대한 집중이 떨어지고 사측은 노동력 동원을 위하여 기초질서운동을 강조한다. 그럴수록 노동자들은 자발적 노동이 아닌 도구적 노동의 생각이 강화된다. 사측은 물질적 보상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 실리적인 경향이 강화되고 자발적인 잔업특근의 요구가 증대한다. 품질의 향상이나 임금의 질적 상승이 아니라 공장가동시간이 늘고 변동임금을 통한 임금량이 증가하는 구조가 여기로부터 탄생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구조조정 이후의 경험적으로 확립된 이데올로기와 노동자정체성의 약화이다.
구조조정이후 조합원들은 ‘회사가 잘되어야 고용도 보장된다’는 생각을 한다. 노자간의 근본적 이해의 대립이 있는가가 의심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노사간의 분쟁사항은 노동자 내부의 불평등이 노조 내부의 통합력이 떨어짐에 따라 사측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조직도구주의적 경향이다.
노동자들의 계급정체성이 약화됨에 따라서 조합원의 상당수가 노동조합과 일체성을 상실한다. 따라서 노조라는 조직을 철저히 도구적으로 활용한다. 강성집행부와 온건집행부의 탄생은 노선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합원의 실리를 챙기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선택된다.
따라서 노사관계는 노동조합과 자본의 양자구도가 아니라 노동조합집행부와 사측이 있고 그 중간에 조합원들이 있는 구조가 되어 있다.
그럴수록 노동조합은 조합원동원에서 외곡된 모습을 보인다. 동원식, 이벤트식 사업을 통해 조합원을 더 모으고자하고 간부마져 노조활동에 자발적 참여가 떨어져 노동조합이 대의원들의 집회참가여부를 노보에 공개하는 식의 강제적인 방식을 동원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 왜곡된다.
넷째로 왜곡된 작업장 내부의 관계다.
조합원들은 노조가 일반조합원을 대변하기보다 목소리 큰 사람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조직에 몸담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입김이 세다. 사측도 노무관리차원에서 현장조직관리를 하기 때문에 원칙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현장조직들의 불만을 우선 처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현장은 노조나 회사나 일정한 원칙에 근거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노조-현장조직-회사의 연결관계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은 어떤 사람이 승진하거나 선호되는 업무를 담당할 경우 그 사람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빽’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단내용은 결코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해당사업장의 사례를 타 사업장 간부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제 모든 노동조합들에서 작업장에 대한 진단이 전면화 되어야 하고 내부를 스스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라. 작업장 ‘협상의 혁신’
작업장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이 필요하지만 아직 체계적으로 진행도지 못한 상황에서 몇 가지 영역만을 검토 하고자 한다.
첫째, 개념의 재정립과 통일이다.
제조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장생산체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산업의 경우를 보며 대부분의 작업장 협상은 UPH에 맞춰져 있다. UPH는 말 그대로 시간당 생산대수이다. 이 개념은 생산성을 중심으로 한 자본가적 개념이다. 그나마 작업장 협상을 전개하는 각 사업장마다 개념의 차이들이 매우 많다. 기아차의 경우는 UPH개념이 더 일반적이고 현대차의 경우는 M/H개념이 더 일상적이며 대우차의 경우는 짭수 개념이 더 일상적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작업을 통해 얼마나 단위시간당 생산대수를 늘릴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더 쉽고, 더 적게 일하며, 다 안전하게 일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업장 협상의 중요한 개념은 생산량 중심의 협상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확립된 기준이 없으면 결국 수세적인 태도로 시작하고 방어적인 협상의 결과를 갖기 마련이다.
자본의 경우 생산량을 중심으로 UPH개념을 들이대면 공장의 여기저기에 생산목표와 UPH수치들이 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동을 중심으로 한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의 작업현장을 보면 작업자가 단위작업을 준비하고 실제로 행하며 종료하는 시간인 ‘싸이클타임’(텍타임?)은 그나마 비교적 작업자 중심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져도 싸이클타임의 산정이 누구나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작업속도가 아니라 숙련작업자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 또한 교정되지 않으면 노동자적 개념으로 사용하기 매우 어렵다.
자본이 시장의 변동 → 생산량의 조절 → UPH조정이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작업장 협상에 접근해 온다면 노동자는 노동의 인간화 → 노동강도의 전략적인 완화의 단계적 목표설정 → 적정 싸이클 타임의 산정 → 노동강도의 재편 및 인원협상의 전개와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어도 각 공장에서의 개념의 편차를 해결하고 각 사업장을 넘어서 일정한 통계로 노동강도를 비교분석한다는 것은 매우 기술적인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작업이다. 이것이야 말로 기존의 공동요구를 중심으로 한 일시적인 공동투쟁이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 공장을 뛰어 넘는 산업적인 단결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고 산별노조를 향한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불균등 극복을 위한 표준의 확립
정규직 내의 작업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균등의 현상은 매우 왜곡된 현실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S공장의 작업자들의 조사결과 메인라인과 간접부서의 임금격차가 최소한 20만원 이상이 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려운 일과 쉬운 일에 대한 차별적 보상이 곧 평등한 보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려운 일과 쉬운 일의 기준은 뭘까?
2004년 D사의 임단협 요구결정과정에서는 수당요구를 둘러싸고 격론이 발생하였다. 즉 기피작업(메인라인)에 대하여 특별수당을 6만원 가량 요구하는 안이 상정되었다. 이 안이 상정되자 기피작업은 무엇이고 메인작업은 과연 무엇인가? 정비소의 노동자들은 고객을 직접대하면서 불평사항들에 접하게 되는데 이런 작업은 그럼 왜 수당이 지불되지 않는 것인가? 조립라인만 어렵고 기피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산공장의 타 부서와 정비소 등에서 수당요구들이 터진다.
이 문제는 한편에서 보면 메인라인에서 수당을 요구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타 부서가 다시 수당을 요구하면서 ‘수당경쟁’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모습을 띤다. 물론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하게 임금인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들 내부적으로도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의 기준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K사의 경우 2002년 임단협 결과 사측에서는 구체적인 내역이 없이 조합원 1인당 1만원에 해당하는 수당을 던져주고 노조가 알아서 배분하도록 하였다. 이 문제로 노조내부에서는 며칠 간 대의원 대회를 통해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다. ‘콘베이어 작업자에게 배분되어야 한다. 아니다 골고루 배분되어야 한다.’ 등 내부적인 분열로 인해서 임단협의 결과는 오점으로 얼룩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 고깃덩이 하나 던져주니까 서로 물어뜯는 이리떼하고 뭐가 다른가?”
아주 극단적이고 냉소적인 평가이지만 그 현상을 그 사업장의 한 활동가가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통일성을 확보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할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넷째, 고용불안의 보이지 않는 칼 - 노동의 단순화와 파편화에 맞선 직무순환
모듈화와 외주화가 자동차 산업에서 일자리를 급격하게 이동시키고 있다. 무노조 비정규직 공장이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미래는 모비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모비스는 급속하게 매출을 늘리면서 ‘껍데기만 빼고 모든 것을 생산’하는 모듈업체로 성장하고 있다.
그 핵심적인 공장의 하나인 E모듈공장은 롤링샤시 모듈을 생산한다. 롤링샤시모듈이란 엔진과 변속기와 동력을 바퀴에 전달하는 구동장치, 자동차의 주행방향을 제어하는 조향장치를 한 덩어리로 조립한 것이다. 그야말로 타이어만 끼우면 달릴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모듈부품업체가 커질수록 자동차 완성차 공장은 껍데기만 씌우는 껍데기 공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 공장을 방문했을 때, 사측의 관계자는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 보세요, 저기 농사짓던 할머니도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업이 편해 졌습니다”
그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분명 자랑이었지만 노동자에게는 지옥의 입구가 여기에 있다는 점을 섬뜩하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노동은 점점 더 단순화되고 있다. 그럴수록 숙련은 필요 없다. 단지 더 적은 수의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가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자동차 공장은 더 이상 과거처럼 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대규모로 지어지지 않는다. 동시에 출근하고 동시에 일하고 동시에 퇴근하는 규율 잡힌 군대로서 ‘근대공업 프롤레타리아’는 더 이상 확대 재생산되지 않는다.
곳곳에 산개된 공장에 농사를 짓다가 인력공급업체에 채용되어 일하게 되는 무노조 비정규직으로 가득찬 모듈공장, 완성차의 조립라인과 발전한 컴퓨터 통신망(CCR룸)의 적기생산체제로 연결된 유연생산공장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산노동(노동자)는 죽은 노동(자동화설비)에 의해 대체되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의해 대체 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장시간 저임금노동 → 가격경쟁력의 체제를, 고숙련 적정임금노동 →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한들 씨가 먹힐 리 없다. 노동의 파편화와 단순화에 저항하여 유기적 노동의 보존을 위한 투쟁이 없이는 탈숙련과 저임금노동의 증대를 막을 방법이 없다.
물론 그대로 놔두는 것도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비정규직 공장들이 생겨나 그곳에서 비정규직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언젠가는 혁명적 투쟁을 또 벌이게 될 것이고 ‘제2의 87년 대투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예수재림의 날을 기다리면서 기도나 하는 사이비 종교의 종말론에 불과하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직무순환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직무순환’의 네 글자를 꺼내자 '전환배치'라는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직무순환이 과거의 고용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된 전환배치의 다른 이름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악몽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도 자본은 강력히 외친다. “내부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것이다.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는 적기공급의 유연생산체제는 필연적으로 잘 나가는 차종과 잘 안 나가는 차종에 대한 유연하고 순발력 있는 생산조절을 요청하며 따라서 상시적으로 라인이동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라인이동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못해 먹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식의 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능적 유연성을 확대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단순반복노동의 증가에 따른 근골격계 질환의 구조적 발생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이제 직무순환은 공세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노동의 파편화와 단순화에 따른 비정규 노동의 급증에 대응하는 고용전략의 일환으로서도 직무순환은 적극 검토되어야 한다. 단순 저임금 노동의 증가에 따른 임금하락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직무순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직무 고정적인 사고방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서열화를 촉진한다. 즉 편한 일로 가기 위하여 경쟁이 일고 편한 작업은 일정한 기득권(고령자, 노조간부에 대한 사측의 야릇한 전관예우 등)으로 시작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기득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직무순환은 정규직 노동자 내부에서도 통합성을 높여 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이는 어려운 일은 비정규직에게 쉬운 일은 정규직에게 할당하는 관행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무순환이 노동자적 관점에서 실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들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직무순환이 가능하려면 각 직무간의 불균등성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현저하게 어려운 노동으로 직무이동을 하는 것은 우선 작업자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노동에 대해서는 직무의 분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또한 직무순환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된 직무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을 위해 OJT가 필요하고 인원의 보충도 필요하다.
과거의 전환배치는 고용불안의 신호등이었다면 현재의 직무경직성이 고용불안의 신호등이다. 과거의 전환배치 수용이 반노동자적인 행위였다면 새로운 직무순환의 공세적인 제기는 노동자의 무기가 될 것임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다섯째, 협상의제의 확대을 통한 노동자 통제권의 확대
이제 작업장에서 모든 것은 협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작업장의 주인은 노동자다. 주인이 안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개입하고 결정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강도나 인원협상을 넘어서 생산량 또한 협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연간 회사의 생산량의 결정에 대한 본조 차원의 협상은 물론이고 공장별 부서별 생산량의 협상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작업의 배분에 개입하고 적정 노동강도를 통해서 해소할 수 없는 생산량은 새로운 인원의 충원이나 공장의 확대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라인의 재편이나 공장의 신설과정에서 생산라인의 설계까지 개입하여야 한다. 이미 현대차의 경우 2003년 협상을 통해 신모델의 고정시점에서부터 노동조합이 개입하는 것을 못박았다. 교섭의 의제의 확대를 통해 노동자의 개입과 통제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 있다. 개입의 실질적인 능력의 문제다. 현재의 활동가나 간부의 수준은 구체적인 개입을 할 실력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따라서 활동가와 간부는 이제 단순히 전투성을 내세우고 조직관리를 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각 영역에서 전문가로서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여섯째, 일시적 대응에서 전략적인 개입으로
지금까지의 라인협상은 사측의 계획에 따라서 모델의 변동과 라인재편의 경우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여
하여 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작업장에 대한 노동의 전략적인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기준에 근거하여 작업장 혁신의 단계적인 목표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에 기초하여 비록 사측의 생산변동 계획이 없다고 할지라도 노동강화의 완화, 노동시간의 단축의 단계적 목표를 위하여 먼저 매년 사업계획 수립이전에 생산량의 협상을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노동강도, 노동시간 등을 세부적으로 교섭해 나가는 새로운 패턴을 정립해야 한다.
매년의 임단협 협상기간보다 더 중요하게 매년 하반기에 이런 협상의 패턴을 강화함으로서 매년 상반기의 임단협 투쟁보다 더 비중 있게 매년 하반기의 생산계획협상을 정착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4. 임단협의 혁신을 위하여
가. 임단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임단협에 대한 위험한 관점은 구시대적 관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고방식과 임단협을 넘어서야 한다는 미래적 지향 모두에서부터 발견된다.
첫째, 낡고 고루한 임단협에 대한 관점을 버리자.
임단협은 여전히 노조의 주요한 행사이다. 집행부의 한해 농사가 여전히 임단협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이제 갓 노조를 만든 경우에 임단협 그 자체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17년째 민주노조운동을 해온 노동조합들이 아직도 낡은 임단협을 중심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체와 퇴보다.
생각해 보라. 이미 정규직 대공장의 조합원들은 일련의 패턴에 익숙하다. 조합원들은 노조의 임단협 요구안을 보고 사측의 안을 보면서 대충 몇%로 타결되며 어떤 과정을 밟아서 정리될 것인지를 안다. 반복되는 임단협은 어떤 결단을 요구하거나 혹은 비장한 파업을 요청하지 않는다. 통상적인 임단협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지점으로서 유효성이 상실되고 있다.
둘째, 임단협에 대한 청산주의적 사고방식을 경계해야한다.
임단협 중심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미래지향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분명히 임단협 중심의 노조활동은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임단협이 아닌 사회적인 의제나 전국적 계급의제, 혹은 사회 정치적 요구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잘 못 대체되는 경우 왜곡된 길로 나갈 수 있다. 즉 임단협이 아닌 무엇을 추구하는 단절적인 사고방식으로 관념화 또는 대중과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한 대공장의 노조집행부는 엉뚱하게 작업장내부의 문제는 소홀히 하면서 ‘버스요금인하투쟁’ 같은 ‘이역 주민과 함께 하는 투쟁’을 하겠다고 하면서 캠페인으로 나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집행부는 작업장 통제에 대한 대응에서 무능함을 집중적으로 공격받았으며 더 나가서는 ‘국민과 함께 하는 것 = 노동계급을 버린 것’으로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임단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임단투 자체를 혁신해야 한다. 혁신의 방향은 노동조합이 산업적 사회적의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여하는 임단협이 되어야 한다.
호주 제조노조의 경우 3년에 한번 임금교섭을 하는데 그 이유를 비정규직 및 다른 구조적인 의제를 다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이처럼 당장에 임단협의 비중을 낮출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임단협을 관성적인 임단협이 아니라 새롭게 혁신하면서 동시에 산업적, 사회적 의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점차적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나. 임금투쟁의 혁신을 위하여
임금문제와 관련해서는 개략적으로 세 가지 측면의 문제제기들이 있다.
첫째는 정규직 내부의 임금의 불평등 구조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정규직 내부에서 임금에 대한 불평등 문제는 주로 수당을 둘러싸고 격화된다. 둘째로는 임금격차의 확대문제다. 정규직 대공장과 부품사의 임금격차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의 문제다. 셋째로는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고임금론’의 문제이다.
이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방향은 무엇인가?
첫째, 이제 임금투쟁은 ‘양’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제 몇% 임금인상률의 문제가 아니라 임금구조를 전면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임금가이드라인에 저항하여 수당을 통해 변칙적 임금인상을 해왔고 변동급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심지어는 대공장들도 기본급의 비중이 50%이하를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규직 내부에서도 임금불평등을 해소할 기초가 부족하다. 직무평가에 기초한 임금체계의 재고를 통해 정규직 내부의 불합리한 임금 및 수당구조를 재편하여야 한다.
공세적으로 임금구조를 제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곡된 임금피크제의 공격앞에서 계속 두드려 맞게 될 것이다.
자동차 노조들의 수당의 통합을 위한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으며 S사의 경우는 수당통합의 방안을 만들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단일호봉제를 추진하는 등 임금구조의 문제는 이미 화두가 되고 있다.
둘째,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하청 임금격차의 원인 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제기들이 이뤄져야 한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CR(Cost Reduction)구조와 같은 원청의 하청에 대한 일종의 이윤착취를 쟁점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만으로는 임금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전략적으로 ‘차등임금인상제’를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의 일률적인 임금인상률의 적용방식이 아니라 하후상박에 기초하여 대공장의 임금인상보다 중소사업장, 중소사업장보다 비정규직의 임금인상을 높게 책정하여 제시하는 방식을 당장에 논의하여 적용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고임금론에 맞선 임금체계로 전면적인 대응과 임금결정요인의 확립이다.
해마다 대공장의 임금이 높다고 아우성들이다. 이런 공격에 얼마나 우리가 잔업특근을 많이 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따라서 오히려 역공세를 펼치는 차원에서라도 대공장의 적정임금이 얼마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분명히 만들 것을 역으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생산성의 향상 + 물가상승 등 노동력 재생산비용 + 기업의 이윤율 + 경제성장률 등 다양한 요소들을 평가하여 임금결정요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논란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임금체계에 대한 논의에서 이런 문제들이 심각한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논의하는 것은 과거와 분명 다르다. 과거의 생산성 향상에 기초한 임금연동방식은 철저히 자본의 생산성 논리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노동이 채택하여온 생계비에 기초한 임금인상 산정방식 또한 실효성이 매우 약화되었다. 실제로 임금은 노사간의 힘에 의하여 결정된 셈이지만 노사간의 힘의 문제는 기업의 지불능력이라는 객관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특히 대공장의 경우는 임금인상 산정방식을 공식화하고 그에 기초한 임금을 결정하는 것을 적극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는 중요한 전략적인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임금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대공장의 실리적 경향을 일정한 임금결정 구조를 통해서 단순한 패턴으로 처리함으로서 대공장의 관심영역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넷째, 사회적 임금, 사회적 복지의 전면적인 제기로 접근
아무리 임금격차의 해소를 위하여 차등임금인상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대공장의 노동자든 비정규직의 노동자든 먹고사는 노동력재생산 비용이 다를 수 없는데도 임금격차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격차의 해소를 위한 투쟁외에 사회적 복지, 사회적 임금을 위한 투쟁은 별도로 전개되어야 한다.
바로 이점에서 2004년 자동차 완성차들이 제기한 ‘사회기금’은 첫 출발로서 다양한 논란들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의 현실에서 사회적 임금과 사회복지, 연대임금을 전면화 하기 위한 현 단계에서의 전술적 출발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 단체협약투쟁의 혁신을 위하여
현 단계에서 특히 대공장의 단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미 자동차 대공장의 경우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수준이다. 각 노동조합의 해당 조항들을 한 번만 훑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각 단위노조의 사정에 따라서 더 개선되어야 할 조항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공장의 단협은 더 이상 조합원의 복지혜택을 늘리거나 하는 수준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다. 이제 대공장의 단협은 노동자들이 경영과 산업의제들에 개입하고 통제권을 확대 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첫째로는 작업장 혁신을 위한 세부적인 장치를 만드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앞에서 밝힌 바, 작업장 혁신을 위해서는 생산계획에 대한 협상에서 시작하여 작업의 배분, 적정노동강도에 대한 규정 등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부서별 대의원의 협상에 맡겨져 왔다. 이것은 옳다. 작업장의 협상을 대의원들이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작업장 협상의 규범을 단협에서 체계적으로 확정하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단협의제의 확장을 통해 경영권에 대한 개입은 물론이고 산업적 의제에 대한 개입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
2004년 자동차노조들은 산업차원의 노사간 공동기구 마련 등을 요구안으로 내걸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조항 및 경영권 개입조항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03년 현대차는 산업정책을 다루기 위하여 자동차공업협회에 논의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하는 합의를 한 바 있다. 대공장은 선도적으로 이런 의제를 단협을 통해서 확대해 나가야 한다.
대공장은 단협을 통해서 경영권과 산업의제에 대한 개입과 통제의 근거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생산과 투자계획에 대한 협상, 산업정책에 대한 협상에 주력함으로서 과거의 단협이 아닌 새로운 교섭패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현재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대공장노조의 단협에서의 역사적 과제다.
* 다만 우리가 이런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점증하는 경영참가 요구에 대한 오해와 빗나간 견해들이다.
노조 내부적으로는 경영참가를 통해 생산계획을 노사간에 다루고, 산업정책을 노사공동기구를 통해 다루자는 주장에 대하여 ‘노사협조주의’를 운운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반론들이다. 노동자가 노예에 머물고자 한다면 시키는 데로 자본의 계획에 따라서 노동만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경영계획이나 산업정책에 개입해야 한다.
반대로 자본의 경우 경영참가를 극도로 경계한다. 그들의 본질은 자본에 대한 소유와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영권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 따라서 경영권에 대한 공격은 자신의 본질을 공격하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최근 경영계는 경영참가를 막는 한편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유인한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사주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전혀 노동자적인 태도가 아니다. 주식을 가진 자 만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의 논리다. 노동자는 이윤을 만드는 원천인 노동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회사의 주인이다. 따라서 노동을 제공한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경영권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일부에서는 우리사주를 통한 위험스런 경영참가의 논리를 펴고 있다. 물론 특수한 경우 투쟁과정에서 전술적으로 우리사주제를 활용하는 것이 고려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경영권 주장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우리사주를 통한 경참가는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은 자본의 통제방식이 아니라 자본에 흡수되어 결국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 현 단계 노동운동의 발전전략 -
사회적 노동운동을 위하여
2004년 6월
1. 노동운동은 어디에 와 있는가?
가. 주도권확장 국면에서 부딪친 암초
87년 민주노조운동의 본격적인 출발 이후 노동계급은 험난한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95년 말 민주노총의 결성은 민주노조운동이 실질적으로 시민권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비록 노동조합이라는 일면적인 조직형태에 의존하였지만 노조를 거점으로 하여 계급적 요구를 표현하고 관철시켜 왔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조를 통해 ‘굴종의 사슬을 끊고’ 인간선언을 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노동계급의 주도권 하에 바꾸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에서 본다면 비합법 혁명운동이 실패하고 노조라는 일면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온 상태를 넘어서 사회적인 대안을 가지고 사회자체를 바꾸는 과제로 나아갈 것을 요청 받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존재를 인정받자 마자 노동계급은 새로운 암초를 만나게 된다.
96년부터 시작된 정리해고의 도입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국제경쟁력’ 논리속에서 한국에도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세계화의 폭력적인 관철과정으로서 경제위기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아주 작은 출발에 불과하였다. 아시아의 금융위기속에서 한국 또한 외환위기와 함께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들어섰으며 그것은 곧 자본의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역공세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이 이제 갓 인간선언을 하고 ‘조합주의적 국면’을 활짝 열고 새로운 장으로서 사회적인 주도계급으로 발전하기 위한 ‘헤게모니적 국면’을 열어야 할 시기에 채 꽃을 피우지 못하고 공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의 역공세는 노동자들의 뿌리를 흔들어 노동계급의 해체를 겨냥하여 노동자를 중층화, 분열시키고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계급의 분열을 막아내고 사회적 주도계급으로서 자신을 확대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아직 노동운동은 좌표를 분명히 세워나가지 못하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 바로 현재의 노동운동의 상황이다.
나. 노동운동의 변화를 위한 두 가지 시도와 실패
노동운동은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노동운동의 변화는 시도되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민주노총의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의 활동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전략위원회의 구상이 제출되었으나 지역별 순회토론 등을 거치면서 그것은 한갓 ‘구상’을 넘지 못하고 좌초 소멸되고 만 것이다.
두 번째의 시도는 ‘산별운동’이다.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라는 양날개를 향한 노력이 구조조정시대의 대안으로 제출되었다.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고 산별노조는 보건의료나 금속노조의 건설로 나타났다.
산별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대안으로서 민주노총 또한 산별시대를 꿈꾼다. 그러나 산별운동은 전진보다는 정체상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성패를 논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2012년 집권을 꿈꿀 만큼 민주노동당은 희망이 부풀어 10명의 국회의원으로 메스컴을 장식하고 있지만 아직 누군가의 표현처럼 이제 민주노동당은 ‘장롱면허’가 아니라 본격적인 ‘실전운전’을 시작하였으며 이 초보운전자가 얼마나 교통사고를 낼 것인지는 아직 시험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다. 노동운동의 발전을 둘러싼 두 가지 경향 - ‘국민주의’와 ‘계급주의’
위 두 가지의 노력은 노동운동내부의 견해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의 확립으로 나아가기 보다 이견들을 더욱 더 확실히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노동운동에 늘 나타나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은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주장은 한편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적 운동을 넘어서 사회적인 주도계급으로 나서기 위하여 국민속으로 헤게모니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주장은 격렬한 구조조정의 시기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계급적 관점이 불확실함을 증명하면서 좌초된다.
국민파로 분류된 ‘배석범 민주노총 직대체제’는 정리해고를 합의함으로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결정타를 입게된다. 또한 현대자동차의 6대 집행부가 내세운 ‘국민주의’적 편향은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진행된 구조조정기에 격렬한 노자대립의 상황에서는 관념적이고 계급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국민의 눈치보기’로 비판되었다. 노동자들은 국민의 눈치를 볼 여유가 없이 정리해고라는 격렬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현대자동차에서 98년 정리해고는 바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계급주의’의 한계와 균열이다.
노동운동의 좌파활동가들은 구조조정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을 중심으로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합의에 강력한 행동으로 비판하였으며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에 맞서 계급적 원칙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전선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사퇴한 민주노총 지도부를 대신한 단병호 직무대행의 파업철회, 우여곡절을 통해 등장한 이갑용 집행부의 한계와 노사정위 참여 등으로 무너진 전체 전선 속에서 이제 전투는 각 개별사업장의 투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된다. 만도기계, 현대자동차, 발전투쟁 등 수많은 투쟁을 경과하면서 강력한 투쟁을 통한 돌파를 주장한 좌파들의 경우도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거나 한계를 드러냈다.
이 구조조정기의 투쟁을 거치면서 좌파내부 또한 분명하게 분화된다. 대체로 원칙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려는 경향과 구조조정투쟁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우회로를 찾게 되는 경향의 등장이 그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회적 경향은 산별노조를 강력한 대안으로 제출, 2000년 이후 힘을 발휘하여 왔으나 금속노조의 정체 등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있다. 원칙적인 태도을 가진 경향은 이렇다할 대중적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힘이 약화된다.
2004년 노동운동은 표면만 본다면 이제 민주노총의 4기 집행부체제가 등장하면서 계급주의적인 노선보다는 타협적인 노선들이 강화될 것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집행부의 등장은 과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부활과 승리라는 측면보다는 계급노선의 실패의 측면이 훨씬 크다. 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의 실패와 정규직 대공장 노조들의 실리적인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은 정규직의 실리주의를 배경으로 민주노총의 우경화 가속화가 결합되고 여기에 노무현정권의 로드맵이 힘을 발휘한다면 장기적인 체제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일면적인 지적이다. 이런 평가에 기초하여 소위 좌-우 대결로만 인식한다면 민주노총의 우경화에 맞선 범좌파단결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계급주의를 표방한 범좌파 연합이 기존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채 지도력을 상실했다는 측면을 잊어선 안된다. 이를 잊고서 다시 낡은 사고법에 기초하여 대안을 세우려 한다면 그 결과는 ‘권력쟁패’만이 남을 것이다.
4기 민주노총 지도부의 경우 분명한 전략적 대안을 제출하기보다는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적 상태에서 우경화 가능성과 동시에 과거 노조운동의 낡은 틀을 해체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흔들리는 노동운동의 자화상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아직 본격적인 형태로 대안적 방향이 제출되는 상황은 아니다. 아직 체계화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흐름들이 감지된다.
가. 이미 생명을 다했으나 아직 청산되지 못한 ‘깃발론’
“ 과거에는 깃발을 들고 ‘따르라’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조합원들의 분노가 있었기에 투쟁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2004년 5월에 만난 현대중공업의 한 활동가의 고백이다. 분명 이런 식의 깃발론으로는 현재의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낡은 깃발론은 청산되고 있는가?
2004년 열사정국에서도 이런 류의 모습이 여전히 드러난 것이 아닐까? 애초에 두산이든 한진이든 혹은 세원이든 사업장들의 투쟁은 조합원들의 다수를 결집시키지 못한 한계가 드러났다. 열사들은 이 한계를 안고 보다 강력한 선도투쟁으로 몸을 던지면서 조합원들을 결집시킨 측면이 있다. 더욱이 열사들의 죽음 앞에 민주노총의 경우 총파업의 선언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선도적인 투쟁의 선언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대중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2003년 11월9일의 강력한 가두시위 또한 노동계급의 분노를 담은 것이라고 하지만 대중적인 투쟁의 확산의 계기 보다는 선도투적인 성격을 넘지 못하였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총의 선거에서는 ‘문제는 힘이다. 힘있는 민주노총건설’이라는 주장은 낡은 투쟁노선의 반복으로 비춰지고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는 4기 집행부가 탄생하였다.
아직 깃발론은 제대로 극복되지 못한 것이다.
구조조정투쟁의 결과 현장의 정서는 투쟁에 대한 전망을 잃고 실리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어보았자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이런 류의 투쟁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관성적인 동원투쟁은 간부들의 자족적인 투쟁으로서 뭔가를 했다는 면죄부를 주는 의미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현장의 조합원들의 투쟁을 촉진하거나 대중투쟁의 확산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투쟁은 전혀 아니다.
나. 현실영합으로서 ‘담합적 노사관계’
‘구조조정의 악몽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는 조합원의 경향’ 즉 실리주의가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은 이제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의 분석도 매우 안이한 것이고 또한 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조합원들의 경향만을 지적하는 수준에서는 포괄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조합원들의 이런 경향은 확장되어 새로운 사슬고리를 만들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사슬고리속에서 조합원들의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다.
그 사슬고리는 ‘조합원들의 실리적 경향 + 회사의 지불능력 + 관리되는 활동가조직 + 노조의 적절한 실리충족에 기초한 지위유지’가 결합되어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체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고착화 가능성도 엿보이게 한다. 대기업의 지불능력에 기초하여 조합원들은 현금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노조는 적절히 실리를 안겨다 줌으로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함으로서 일종의 노사간 담합구조가 형성되어 나가고 있다. 몇 몇 대공장들의 상황은 이런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KT, 지하철, 현중, 대우조선 등)
활동가조직들은 이런 경향에 맞서서 일부 저항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활동가조직의 이런 저항도 사실은 노조권력을 둘러싼 정쟁으로 낙인찍힌다.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 조직 또한 담합적인 노사관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그놈이 그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상당수의 활동가조직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사측과 관계하고 있으며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사측으로부터 일정한 편의를 제공받기까지 한다.
‘담합적 노사관계’는 철저히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기업에서 나눈다. 아쉬울 것이 없는 대공장의 성(城)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대공장의 노조는 상급단체에 대하여 어떤 아쉬움도 갖지 않으며 언제든지 탈퇴를 협박한다.
이런 경향들은 심지어 전국적 차원의 위험스런 구상으로까지 발전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일부 대공장에서 소위 ‘전국차원의 제4 세력의 구축’을 위한 행보들이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이런 취약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노정관계 등 사회적 논의구조는 아마도 유럽식의 사민주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그야말로 포섭된 노동자들의 정부에 빌붙기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
또한 담합적 관계는 이미 중층화된 노동자들의 분할을 고착화 할 것이다.
“ 조합원들이 생각하는 미래요? 아마도 고령화되어 나이가 들면 젊은 비정규직을 몇 명 관리하는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지요”
모 자동차공장의 대의원이 고령화되는 정규직의 미래에 관하여 조합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무엇인가를 묻자 내놓은 답이다. 결국 정규직의 경우 비정규직의 관리자로서 자기전망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전망이 성공할 것인가는 별도로 따져야 할 것이지만 대공장의 ‘담합관계’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 무기력한 ‘초심론’
노동운동이 우려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활동가들의 도덕성을 문제시하면서 활동가나 노조의 ‘윤리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운동의 타락을 경고하는 사람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담고 있는 애틋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활동가들이나 노동조합의 잘못된 관행이나 이미 몇 개의 노조에서 발생한 비리들은 철저히 규명되고 또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혹은 당위적인 선언만으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노동운동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이 없다면 무기력한 주장에 그칠 뿐이다.
라. 희망처럼 떠오른 ‘정치시대론’의 함정.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크게 고무된 분위기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분명 이는 상당한 진척이고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 민주노동당의 미래에 대하여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미 출발에서부터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함정이 도사린다.
첫째로 이미 실패한 역사가 재발될 가능성이다.
‘노조시대에서 정당시대로’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자칫 낡은 사회주의운동의 이론을 그대로 반복 할 수 있다. 경제의 상위개념으로서 정치를 말하고 경제주의를 지적하면서 정당을 통한 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국가를 장악하여 사회전체를 재편한다’는 국가주의적인 관념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작업장투쟁이나 현장조직력문제는 경제주의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경쟁적으로 민주노동당내에서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만이 전개되고 현장은 더욱 방치,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권력경쟁에 곧바로 염증을 느끼는 상황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제와 정치에 대한 낡은 이분법은 버려야 한다. 작업장의 문제, 조합원의 정서 문제는 단순히 하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이다.
둘째로 허약한 계급적 기반의 문제다.
앞서 밝힌 바 실리주의가 확대되고 이것이 ‘담합적 노사관계’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왜곡된 노정간 타협체제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설 자리는 너무도 뻔한 것이다. 그것은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이 ‘제 3의길’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옮겨간 것 보다 훨씬 못한 수준에서 제도화와 자본주의로의 자발적인 포섭으로 나갈 가능성을 보여 준다.
셋째, ‘밀어내기’에서 ‘길들이기’로 전환한 보수집단의 전략
‘초보운전자’ 민주노동당에 대한 선생은 누구일까? 애초에 보수집단은 진보집단의 등장을 막고 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밀어내기를 해 왔다. 반공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가지고 밀어내기를 해 왔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운동권 문화를 버리고 이제 이 사회의 책임 있는 주류중의 한 부분으로서 민주노동당도 문제제기만 하지말고 책임을 져라. 밥 얻어먹던 관성을 버리고 이제는 밥값을 내라’는 요지의 조선일보 사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좌파밀어내기’에서 ‘좌파길들이기’로 전환한 보수집단은 끊임없이 ‘초보운전자’ 민주노동당을 훈련시키려 할 것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일관성을 견지할 수 있는가하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적 능력의 문제이다. 과연 약화된 노동계급이 보수집단의 길들이기를 물리치고 민주노동당을 자신의 계급적 부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다.
라. 대안부재의 무기력 속에 탄생하는 ‘외적 충격론’
“ 대공장의 현장 상태를 바꾸는 게 가능하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외적 충격속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한 대공장노조의 활동가의 얘기다. 그가 말하는 외적 충격이란 뭘까? 아주 극단적인 것이다.
“ 현재의 노무현 정권 마져도 외국언론이 보기에는 좌파정권이며 김대중 이후 보수집단은 노무현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에 충격을 먹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를 뒤집고자 할 것이다. 한때 문제가 된 이화여대의 김용서라는 꼴통 보수논객은 지금은 좌파가 국가를 장악한 혁명적 상황이라면서 군부의 쿠테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보수집단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 재탈환을 하고자 하며 만약 경제가 어려워지고 혼란이 발생한다면 이 틈을 타서 치열한 권력쟁패에 나설 것이며 이 과정에서 희생양은 노동조합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반공을 중심으로 공안정국을 만들어 왔다면 이제는 노조를 희생양으로 하여 우익파시즘이 등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조가 완전히 박살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겠냐”
정말 극단적인 판단이다. 물론 극단적인 이 시나리오의 현실화 가능성도 문제지만 더 문제인 것은 대안을 찾지 못해서 극단적인 ‘외적 충격’을 말하는 이 활동가의 극단적인 비관주의다.
물론 이런 극단주의가 아닐지라도 현재 ‘외적 충격론’은 이미 실행 중에 있다. ‘노동운동 이대로는 안된다’며 공격을 퍼붓고 ‘대공장 고임금론’을 들먹이고 ‘대공장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에게 주자’는 식의 공격들이 그것이다.
마. 제로섬게임으로서 노동운동 ‘내부권력경쟁’의 격화
미래가 불투명한 조합원들이 실리를 중심으로 모인다면 활동가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모이는가? 현재의 일반적인 답은 ‘노조권력’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운동의 미래를 향한 전략적 대안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남은 것은 계파간의 치열한 노조권력 경쟁이다. 2004년 민주노총의 선거도 과거의 어떤 선거보다 파벌을 분명히 하는 선거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영역에서의 권력경쟁의 장이 새로 열려 권력게임은 더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권력경쟁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경쟁이 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퇴보시키는 제로섬 게임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각 종의 선거에서 대공장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앞다투어 대공장 모시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담합적 노사관계’의 경향이 강화되는 대공장노조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기보다는 오히려 득표를 위하여 ‘대공장노조 모시기’ 경쟁은 대공장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이를 용인함으로서 나쁜 경향을 확대하고 있다.
매우 예민한 문제이지만 박일수 열사투쟁과정에서 현대중공업노조의 징계문제와 기아차의 해외연수관련 문서위조를 둘러싼 처리과정에서도 이런 위험한 경향들이 증대되고 있다.
조직간의 노조권력을 둘러싼 경쟁은 노동운동에 대한 이렇다할 지도노선과 주체를 세우지 못하는 낡은 계파들의 소멸을 예고하는 최후의 모습으로 평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낡은 정파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도노선과 대안세력이 출현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정파라고 하더라도 현재 노동운동의 상황에서 모두 발가벗고 서 있다는 것이다.
3. 작업장혁신을 위하여
가. 그림자현상과 작업장 혁신
왜 작업장 혁신을 제기하는 것인가?
단순하게 말한다면 계급해체와 계급내의 계층화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노동운동의 발상의 전환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작업장 혁신을 제기한다.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이다. 정규직 노조의 이권화와 주변부 노동자로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투쟁이 분리되어 있고 이 현상에 기초하여 자본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분할통치를 한다.
좀더 좁혀보면 정규직 대공장과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의 격차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산업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산업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더 좁힌다면 정규직 내부의 불평등 구조 또한 매우 심각하다. 가장 손쉽게 확인되는 것은 수당을 둘러싸고 힘든 작업과 쉬운 작업자 사이에 불평등에 대한 불만들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평등의 원리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공장간에도 물량을 둘러싼 경쟁들이 발생한다. 정규직 작업장내에서의 불만들의 처리는 일정한 원리에 근거하여 해결되기보다는 ‘목소리 큰 현장조직이나 활동가의 편의 봐주기 차원에서 해결된다’는 지적마저 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상황을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 광원(빛) 앞에 물체를 두고 비추면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림자가 커지는 현상에 비교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가족관계에서의 가부장성, 정규직내의 위계적 사고방식,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이라는 점점 커지는 간극을 발견한 다.
물론 모든 문제를 다 작업장 내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작업장 혁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세력화나 계급운동을 말하는 것은 관념적 당위로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임금따먹기, 실리주의적 사고방식들을 낳은 작업장의 기반들을 근본적으로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 작업장에 대한 도구주의적 사고들
우선 작업장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특히 작업장에 대하여 기존의 입장들은 도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첫째, 자본의 입장에서 본 작업장은 이윤창출의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핵심적인 개념은 ‘생산성’이다. 산업안전 등은 보조적 개념에 불과하다. 자본이 시행하는 모든 작업장운동의 핵심은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력이며 이를 위하여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둘째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도구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뿌리박혀 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은 ‘돈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에 불과하다. 이런 의식 속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생겨난다. 즉 한편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인 잔업특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쉬고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작업장 기피현상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노동시간단축’이라는 요구와 ‘자발적 특근의 증대요구’라는 모순된 현실에서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잔업특근 없는 ‘수요가정의 날’을 실시하고 특근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강제하려 하지만 조합원들의 반발로 인하여 잔업특근을 인정한다. 이 문제를 과연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당위로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런 접근은 해결의 실마리가 아니라 오히려 딜레마를 더 가중 시켜 왔다는 점이 증명되고 있다.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미래가 불투명한 조건에서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잔업특근의 증가요구’가 급증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활동가들이 잔업특근을 하는 것은 문제다” “잔업특근에 합의해 주는 대의원들은 맛이 간 놈들이다” 는 평가는 대책 없는 당위에 불과하며 현실은 이 당위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에 기초하여 전략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대책은 없다. 당위를 주장하면 오히려 조합원들로부터 배척 당할 것이며 조합원들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자발적 노동력 동원을 통해 자본에 속박 당하게 된다.
세 번째는 운동적 도구주의다.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작업장은 조직력이 만들어지는 원천이다. 수많은 현장활동가들이 ‘현장조직력 강화’를 외치고 심지어는 ‘현장권력쟁취’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무엇이 현장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현장의 조직력을 약화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속에서 대안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현장을 ‘운동이라는 목적’에 근거하여 수단으로 보는 경향들이 많다.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기술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현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조집행부나 대의원에 당선되기 위하여 현장활동을 하는 순간, 작업장 자체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은 사라지고 기술적으로 현장조합원을 만나서 조직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열심히 조합원의 경조사에 쫓아다니고 술자리를 통해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현장은 점점 활동가와 간부들에 의하여 도구화되고 그럴수록 조합원들은 간부들과 괴리되고 왜곡된 활동가와 조합원의 관계가 만연해 진 결과 대리주의적인 정치가 정착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모든 도구주의적 관점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 극복함으로서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다. 새로운 개념으로서 작업장
그렇다면 작업장에 대하여 새롭게 정리되어야 할 관점은 무엇인가?
첫째로는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보아야 한다.
작업장을 협소한 경제활동의 공간, 즉 단순한 노동과정으로서 보는 것을 벗어 던져야 한다. 통상적으로 노동자들의 전 생애를 통틀어 볼 때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작업장이다. 1년 8,760시간 중 2002년을 기준으로 볼 때에 현대차의 노동자들은 순 노동시간이 2,700시간이 넘는다. 여기에 순 작업시간을 제외한 작업 준비 및 휴게시간을 포함한다면 3,000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보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인생의 1/3이상을 공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하루 평균 7시간으로 잡을 경우 년 2,555시간을 자는 셈이다. 실제 활동하는 시간은 6,205시간이고 이중에 3,000시간 이상을 작업장에서 보내는 셈이니 취업 전과 취업 후를 제외한 인생의 절반이상을 작업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가장 자주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어 가는 곳 또한 작업장이다. 혈연과 지연 같은 주어진 인간관계와 학연과 같은 과거의 인간관계의 경우 성장기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는 인간관계이지만 실제 그 만남의 빈도 수 등을 고려할 때에 작업장에서 맺는 인간관계와 비교도 안되는 비중이다.
여기서 맺는 인간관계란 단순한 인적 접촉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얻는 정보, 형성되는 정서, 가치관 등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이 작업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업장에서 불만족스럽다는 것은 곧 인생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업장은 곧 노동자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둘째로는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훈련과 재생산의 핵심적 공간이다.
일단은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장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노동계급의 의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작업장에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응력을 갖춰야 한다.
‘주면 주는 데로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는 작업장에서 인생을 보내는 노동자들은 결코 세계의 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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